점심시간에 밥을 패스하고 아래층 다방으로 내려가 책을 좀 읽고 있다가 올라가니 C가 묻는다.

C : 요가갔다왔구나
W : 아니
C : 그럼, 잤어?
W : 아니
C : 그럼?
W : 책봤어

C는 이런 뭥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W : 나 요즘 대인기피증 생겼나봐. 사람들이랑 마주보고 밥을 먹기가 싫으네

C는 더욱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비웃기 시작한다.

C : 너 올해 목표가 뭐였는지 기억나?
W : 응? 올해 목표?
C : 그래, 올해는 질퍽질퍽하게 살겠다며

쿵.

아 맞다. 올해는 질퍽질퍽하게 살기로 했다. 쿨함을 지향한다는 C를 비웃으며 했던 말이다. 제법 노희경 드라마 말까지 흉내내면서, 얘, 인간이 어떻게 쿨할 수 있니? 나는 올해 무조건 질퍽거리면서 사람들한테 치대면서, 끈적끈적하게 살테야, 라는 말을, '겁도 없이' 내뱉었었구나.

(우씨, 근데 생각해보니, 내가 좀 질퍽질퍽해져서 대인기피증이 생긴걸지도 몰라. 쿨한거랑 팀이랑 밥 안먹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쿨하면 그냥 웃으면서 먹어야지. 그치 않나?) 라는 반항심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냥, 잊고 있었던 목표가 떠올랐다는 게 중요한 거다. 내가 그런 목표를 세웠었지. 그런데, 모르겠다. 쿨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우겼으면서도, 나는 어느 순간, 쿨해지는 게 더 쉽다는 걸 깨달았나보다. 질퍽함을 걷고 난 뒤 신발 뒤꿈치에 묻어있는 끈덕끈덕한 진흙같은 감정들을 내 손으로 닦아내거나, 혹은 여기저기 묻히고 다니는 게 나는 아직도 그렇게 싫은가보다. 그래서 아스팔트 깔린 매끈한 길로만 다니다 보니, 갈 수 있는 길은 그저 여기까지. 그래도 난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성가시게 닦지 않아도 되니, 편안해, 라고 말하긴 하지만... 돌아보면 나는 아직 거기에 서 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저런 목표를 세우고, 자신 있게 공표까지 했건만... 까먹다니. 까먹다니. 도무지 목표는 뭐하러 세운단 말이냐. 그러게 목표는 한가지만 세워야지, 왜 이틀에 한번씩 목표는 세워서 공표하고 까먹고 못지키고 망신당하고의 악순환을 반복하는게냐, 라며 자책하지만, 그게 어디 '목표 실행' 이라는 하잘것 없는 이름 하에 가당키나 한 일이더냐. 암튼 올해도, 참, 다치지 않고 '잘' 살았구나. 그런데, 내가 참 잘 살고 있구나, 라는 허망한 믿음이 무너지는 건 언제나 한 순간이다. 돌아보면 잘 살지 못했으니까.

난 여전히 C가 쿨함을 지향한다고 하면 비웃을 작정이고, 나는 질퍽하게 살겠다고 말해줄 작정이다. 난 여전히 쿨함보다 질퍽함을 지향한다. 이건 C가 쿨하지 못한 인간임을, 또 내가 질퍽하지 못한 인간임을 반증하는 예이다. 사실 우린 비슷한 류의 인간이다. 뼛속까지 쿨하지도 못하면서 질퍽한 인간도 되지 못하는. 다만 뼛속과 뼈밖의 괴리가 괴롭기에, 그녀는 뼛속의 쿨함을, 나는 뼈밖의 질퍽함을 추구할 뿐.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라주미힌 2008-09-16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이 밥 먹은 난 뭥미? ㅎㅎㅎㅎ

웽스북스 2008-09-16 22:01   좋아요 0 | URL
아니, 사실 저녁도 굶으려고 했는데....
점심 굶었더니, 저녁에 너무 배가 고프잖아요 -_-

(대인기피증을 능가하는건 배고픔? 막이러고 ㅋㅋㅋ)

2008-09-16 2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16 2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꼬 2008-09-17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쿨한 것, 쿨한 사람이 싫어요. 웬디양님이 쿨하기로 작정이라도 한다면 난 정말 고민에 빠질 거예요. 계속 친구해야 되나, 하고. 우리 질퍽하게 살아요. 그러기 위해서 노력해요, 응?

웽스북스 2008-09-17 00:51   좋아요 0 | URL
그죠 네꼬님, 저도 쿨한 것, 쿨한 사람이 싫어요.
그런데 저 자꾸만 쿨한 척을 해서요. 응, 응, 일단 머드팩 기꺼이 바르겠다는 사람은 구해놨으니, 네꼬님은 제가 머드팩으로 변신하기 전에 인생 선배로서, 질퍽 특강을 해주시는 건 어떨까요. 완벽하지 않아도 좋아요, 네?

치니 2008-09-17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요, (이런 말 하면 쿨 하다고 네꼬님이랑 웬디양님 싫어할까봐 망설이다가 ㅋㅋ),
점심시간에 밥 패스하고 혼자 책 읽고 싶어지는 것이 하나도 안 이상한 그런 사회에 살고 싶어용.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사람을 충분히 이해하는 그런 사회.

웽스북스 2008-09-17 09:21   좋아요 0 | URL
치니님, 제가 위에도 투덜투덜거리긴했지만, 그건 쿨한거랑 상관 없는 것 같아요, 진짜 쿨한척 하는 건 내가 사람들이랑 밥먹기 싫어도 으하하하 하면서 먹는거 아닐까, 라는 자기합리화 ㅋㅋ 어음, 그건, 그러니까, 내가 너무 자기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어서 그런 걸 거에요, 그죠 그죠? (이제 막 다그치고 ㅎㅎ 내가 이래서 인간이 안변해요 ㅋㅋㅋ) 암튼 전 오늘도 점심 패스할거란말이죠 ㅎㅎㅎ

에디 2008-09-17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정말 치니님 말씀처럼 점심시간에 혼자 놀아도-.- 안 이상한 사회에 살고 싶어요. 라고 쓰고 보니, 이미 사람들이 날 충분히 이상하게 보기 때문에 괜찮지 않을까란 생각이 드네요-.- 저도 오늘 시도해 봐야겠어요. (근데 배고프겠....)

전 관계에 있어서는 좀 쿨한것도 좋지 않을까 -.- 생각해요 (네꼬님이 싫어하시겠다.)

웽스북스 2008-09-17 12:08   좋아요 0 | URL
네 사실 저 점심시간에 혼자 자주 놀아요
별로 안 이상하게 보기도 하고요 ㅎㅎ

다만 괜히 소심해져서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또 같이 먹어야지
이러고있어요 ㅎㅎ

주이님도 지금 굶고 계신가요? ㅎㅎㅎ
(다들 여기서 막 네꼬님 눈치보고 ㅋㅋ)

다락방 2008-09-18 10:47   좋아요 0 | URL
나는!

쿨하든 뜨겁든 뭘하든간에,
주이님과 웬디양님이 배고프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정말입니다!!

웽스북스 2008-09-18 18:23   좋아요 0 | URL
저 오늘 배고파서
점심 굶고 결국 햇반에 컵라면 냠냠 ㅋㅋ

2008-09-17 1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17 1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