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건대
나는 내가 다혈질인 줄 몰랐다. 더더더더더욱 솔직히 솔직히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내가 좀 온화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줄 알았다. C에게 늘 네가 보는 너의 성격은 너의 자의식이 만들어낸 거지 그건 결코 니가 아니야, 라고 놀림조로 이야기를 하곤 했던 내가, 스스로의 성격 중, 굉장히 쉽게 간파할 수 있는 부분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아왔다니. 참 심각하다. 그런데 문제는 나만 몰랐다는 사실이다. 주변 사람들은 다 알고있었다는 것 -_- 최근에 와서 진상 병특 M을 대하는 과정에서 화가 나면 몸이 부르르르 떨리는 스스로를 여러 번 발견하고는 나 혹시 다혈질이 아닐까, 하고 자가진단을 내려본 후 주변에 물어보니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것.
H씨에게 물었다. 내가 다혈질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H씨는 웃으며 네, 가끔 욱! 하시는 면이 있죠- R대리님에게도 물었다. 내가 다혈질이라는 거 알고 있었어요? 네. 그리고 오늘 팀장님과 이야기하던 중에, 팀장님, 아무래도 제가 다혈질이라는 걸 저만 몰랐나봐요. 라고 이야기하자 팀장님 왈, 그래, 넌 내가 아무리 너 성격이 강한 편이라고 얘기해줘도 아니라고,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거라고 얘기했잖아. 아, 그랬었지. 나는 정말이지, 팀장님이 나를 잘못 보고 계신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스스로 굉장히 말도 잘듣고, 별로 주장이 강하지도 않고, 상대방 의견을 수긍도 잘하는 사람이라 여겨왔던 거다. 그런데,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맞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주장도 잘 안굽히고, 그럼에도 주장이 굽혀지게 될 경우에는 다혈질의 본성이 드러나는 것이지. 증상은 부릉부릉 떨리는 몸. -_- 커지고 빨라지는 목소리 ;;; 그래서 팀장님은 새로 실장님이 오실 때마다 우리 애들 중 만만한 애들은 한명도 없다고, 보통 애들이 아니라고 여러 번 주의를 주셨단다. 그럴 때마다, 왜요 팀장님, 저는 별로 안그렇잖아요, 라고 말하면 팀장님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고 계셨었는데 -_- 그런데 난 내가 꽤 말도 잘듣고, 묵묵하게 조용히 일하는 직원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심리학책 들여다보고, 자아를 분석 내지는 파악해보겠다며 이것저것 보면 뭐하나, 결국은 기본적인 스스로의 기질조차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는걸.
과거를 떠올려보면, 스스로 다혈질임을 자각할 기회는 많았다. 불합리하게 들어오는 일들에 찌릿 하고 올라오는 신경, 속상하거나 화나는 일 앞에 억울한 눈물까지 흘려가며 흥분하던 일들, J가 오늘 흥분했을 때의 나를 묘사해줬는데 동작은 커지고 고개는 획획 돌리고, 살짝 굳은 표정에 자꾸만 쓰게 되는 날카로운 의문형들, 그런데 스스로 이 점을 인식하지 못했던 건, 아마도 내가 모질지 못한 탓일 것 같다. 그렇게 흥분하다가도 돌아서면 네가 안쓰럽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다시는 보지 않겠다, 라고 악을 악을 쓰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흥분한 이유는 기억나지 않고 함께한 좋은 추억이 더 먼저 떠올라 다시 한번쯤 보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그러고보니 다혈질이고 모진 친구인 H의 분명한 맺고 끊음이 부럽기도 했던 것 같다. 물론 H는 나에게 늘 배신감을 느꼈단다. 같이 거품물고 흥분해놓고는 그렇게 화를 냈던 이유를 다 까먹는다고. 그래서 다시 그 친구가 보고싶다며 절 지낸다고, 참 편리한 뇌구조를 가져서 좋겠다고. 음, 이거 어째 좀 비아냥인 것 같으다, H! 흥흥! (이래놓고 까먹고 H와 헤헤거린다는 거다)
아,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처럼 순한 다혈질이 어딨냔 말이지. 응? 대답좀 해봐요 (아직도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자의식의 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