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나무가 있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그 나무 자체가 좋은 것이라기보다는
하늘과 어우러지는 그 나무의 모습을 좋아한다



출근길에는 절대 볼 수 없고, 퇴근길에만 볼 수 있는 나무다
조금 이른 시간, 그러니까 해질 무렵 퇴근을 하던 어느 날
삭막한 도시의 풍경을, 거기 있어주는 것만으로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이 나무를 발견하고는
나는 가방에서 바로 카메라를 꺼내 들어 한 장의 사진을 남겼었다

미니홈피에 이 사진을 올렸을 때,
같은 동네에서 출퇴근하는 회사 후배가 이 나무를 알아봐 주었다
하늘과의 어우러짐이 좋았다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나만의 나무가 빼앗긴 것 같았던 섭섭한 마음보다는
나와 똑같은 곳에서, 똑같이 지쳤을 그녀에게도 이 나무가 위로가 됐겠구나, 하는 사실이
또 나를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

오늘도 퇴근이 늦었다
그런데, 콜택시를 잡지 못하고, 그러니까 뺀찌를 먹고
지하철을 타고 터덜터덜 돌아오는 길에
긴 계단을 오르면서 이 나무를 발견하고는 그만 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눈이 쌓인 이 나무의 모습, 그리고 그 위로 계속 눈이 날리고 있는 모습에
이 나무를 한 여섯배쯤 더 사랑하게 된 것 같다


갑자기
콜택시가 나를 버린 건
나에게 이 나무를 선물해주기 위해서,라는 말도 안되는 예정론을 펼치며
주변의 모든 풍경이 사랑스러워진다

희희낙낙 걸으며 온갖 나무들의, 눈과 함께한 새로운 풍경을 보며
장갑도 안끼고 눈을 뭉치며
놓쳐버린 신호등을 보면서도 기뻐하며
오늘은 택시를 타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듯 걷는다


집으로 향하는 골목 앞에 있는 홍목련이 피던 나무에 쌓인 눈을 보며
너는 목련보다 눈이 잘어울리는 것 같아, 라는 시덥잖은 말을 걸며
(목련피던 봄밤에 흥분하던 건 기억도 못하고 -_- 배은망덕한것 같으니)
집으로 향하는 길 미끄러지듯 골목 앞에 서는 서울 택시를 보며

헉, 저 콜 어디야? 라며 잠깐 콜 업체를 바꿀까 심각하게 고민하는 -_-

그렇지만 20분 세이브의 편안함과 신속함이 주는 기쁨과
오늘 마치 마지막 겨울밤인 것만 같던 오늘 밤이 주던 기쁨은
아마 다시 선택하래도, 바꾸지 않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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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8-02-26 0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엄청 늦게 주무셨나봐요~ 오늘 출근하시는데 지장은 없으신지..

웬디님의 이런 섬세함이 좋단 말이죠 (공개적인 애정표현 ㅋㅋ) =3=3=3=3

웽스북스 2008-02-26 10:37   좋아요 0 | URL
어 제이드님 요새 너무 적극적이야 흐흐 (좋아서~)
근데 난 섬세보다 역시 단순 ^^

어제 야근해서 오늘은 1시간 늦게 나왔지요 흐흣

무스탕 2008-02-26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고마운 나무네요. 웬디양님의 피로를 살짝 걷어가버린 이쁜 나무..
저도 아파트 입구에 있는 엄청 큰 나무 대따 좋아해요.
가지치기 하는게 아까울 정도로 멋진나무에요 :)

웽스북스 2008-02-26 21:24   좋아요 0 | URL
아 궁금해요
무스탕님이 대따 좋아하는 나무 ^^

마노아 2008-02-26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나무는 사진 안 찍었어요? 분위기 너무 좋은 밤이었네요. 그 자체가 그림같아요!

웽스북스 2008-02-26 21:24   좋아요 0 | URL
음, 찍었는데,
역시 혼자만 간직하는 편이 낫겠어요
(휴대폰 카메라인데, 지가 200만화소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녀석이에요)

실비 2008-02-26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럴때가 있어요
표현을 잘 하시네요. 님의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져요^^

웽스북스 2008-02-26 21:24   좋아요 0 | URL
아이쿠, 고마워요 실비님 ^^

네꼬 2008-02-26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유. 예쁜 웬디양님. 저도 저 나무 나눠 가져도 돼요? (한쪽으로만 올라갈게요.)

웽스북스 2008-02-26 21:25   좋아요 0 | URL
네꼬님, 전 나무에 못올라가요~ ㅎㅎ
네꼬님이 위쪽 다 가지세요, 전 아래에서 그냥 볼래요 ^^

Mephistopheles 2008-02-26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 앞에서 서성거리셨다는데 "고도를 기다리며"가 생각나버렸다는..^^

웽스북스 2008-02-26 21:25   좋아요 0 | URL
저 그래도 좀 운치있게 서성거렸거든요? ㅋㅋ

Mephistopheles 2008-02-27 02:05   좋아요 0 | URL
아...난 문학적으로 서성거렸다는 뜻이였는데...

웽스북스 2008-02-27 02:15   좋아요 0 | URL
아하하, 고등학교 때 봤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몇 장면들이 떠오르는 바람에 ㅋㅋ

Mephistopheles 2008-02-27 02:27   좋아요 0 | URL
뜨끔!

웽스북스 2008-02-27 02:32   좋아요 0 | URL
쳇 역시 ㅜㅜ

바람돌이 2008-02-27 0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를 타고 다닐때와는 다르게 걸을때는 아주 많은 것들을 볼 수가 있죠. 느림이 주는 즐거움일거예요.

웽스북스 2008-02-27 02:33   좋아요 0 | URL
네 그걸 분명 알면서도 느림을 지향하는 삶은 참 힘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