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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쓴 것 같기도 하지만, 내가 멋부리는 일에는 별로 소질이 없다. 옷도 잘 고를 줄 모르고, 화장도 이쁘게 할 줄 모르고 그런다. 눈썹 같은 것도 다듬을 줄 몰라서 그냥 다니고, 화장은 파우더에 입술만 바르는 수준. 옷은 내옷 비싸게 주고 사는 건 또 왜이리 아까운지, 화장품은 또 왜 그렇게 비싼 것들이 많은 것인지. 아이라인은 커녕 마스카라도 기술있게 바르지 못하니 그냥 생긴대로 살고 있는 중이다.
하여, 비슷한 논리로 미용실에도 비싼 돈을 주고 가는 걸 잘 못한다. 친구들 보면 몇십만원씩도 척척 주고 머리도 하고 하던데, 나는 덜덜덜덜, 잘 못한다. 머리를 자르는 것도 회사동네에서 겨우겨우 찾은 만원짜리 미용실을 애용해주고 있다. 오히려 만원짜리 미용실에 사람이 없고, 몇만원은 줘야 머리 자를 수 있는 미용실에 더 사람이 많은 이상한 동네지만, 나는 꿋꿋이 만원짜리 미용실에 갔다. 오늘도 퇴근 후, 나는 만원짜리, 이름도 깜찍한 샴푸미용실에 갔다.
어머, 왜 양쪽 머리 길이가 살짝 달라요? / 이거 여기서 잘랐는데요? / 아, 그래요? -_-
/(아저씨가 자른 건 아니에요 - 속으로만)
어떻게 머리 해드릴까요? / 그냥 다듬어만 주세요
코트깃에 뻗치는 머리가 지겨워 파마를 할까 생각중인데, 다들 머리길이가 어중간하다며 말리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그냥 다듬기만 한다. (언젠가 파마를 한다면 삼만오천원 균일가에 파마를 해주는 샴푸미용실을 또 이용할 예정이다.) 미용사 아저씨는 남자였는데 이래저래 말이 많으신 분이다. 뭐하는 사람인지, 일하는 건 힘들지 않는지, 집은 어디인지, 설에는 뭐하는지 이런 일상적인 것들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묻고 이야기한다. 심지어는 본인의 일이 왜 보람있고, 무엇이 힘든지에 대한 애환까지도! 나눴다는 거. 뭐 이런 것도 대단한 실력이라면 실력이다.
사실 멋부릴 줄 모르는 것들이 다 그렇듯, 패션에 대한 주관도 별로 없거니와, 내 머리에 대한 소신도 별로 없다. 그래서 앞머리는 얼마나 잘라드릴까요? 라는 아저씨의 물음에 한 내 소신 없는 대답이 지나고 생각해보니 웃기다. 남들은 다, 뭐- 눈썹 약간 위로, 라던가.... 아니면 이보다 좀 더 디테일한 답을 하겠지만, 나의 대답은?
한달 버틸 정도로만 잘라주세요
하하하, 어이없어하시는 아저씨, 앞머리를 조심스레 자르더니, 이정도면 한달은 버티실 수 있을 거에요, 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커트를 마치고 드라이를 하려는 아저씨.
아, 드라이 안해주셔도 돼요, 어차피 감을 거니까- 그냥 집에 갈 수 있을 정도로만 해주시면 돼요~ (만원짜리 미용실은 샴푸를 안해줘요, 그러고보니 샴푸미용실인데 -_-)
ㅋㅋㅋ 내가 생각해도 참 소탈한 손님이지 싶다. 한달 버틸 정도로만, 집에 갈 수 있을 정도로만 이라니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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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회사에서 나온 시간이 8시, 미용실에서 살짝 기다리다가 머리를 자르고 나온 시간이 8시 50분 약간 넘어, 그런데 집에 온 시간은? 무려 10시 40분 두둥- ㅜㅜ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문제는 저 긴 시간동안 나는 아무것도 못하고 '버스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ㅜㅜ
나는 버스를 잘 타지 않는다. 일단 버스에서 책을 보면 멀미가 나고, 버스 정류장이 회사에서 더 멀고 지하철보다 시간이 조금 더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버스도 미덕이 있으니 그것은 '앉아갈 수 있다'는 것. 회사에서 우리집까지 가는 노선은 좌석버스이고, 회사는 그 버스의 종점 다음 다음 정거장이기 때문에, 웬만큼 사람 많은 시간만 피하면 거의 앉아갈 수 있다. 오늘은 선물세트다 뭐다 양손이 묵직해 지하철 대신 버스를 타기로 했다. 그 무거운 짐을 들고 사람 많은 2호선을 타는 것도 끔찍했고, 서서 가는 것도 끔찍했으니까.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는다. 양손은 짐이 많아 핸드폰을 꺼내 시계를 볼 여유도 없다. 날은 기절하게 춥다. 손이 시려워 꽁. 핸드폰은 못꺼내고 장갑은 꼈다. 발이 시려워 꽁. 나는 이미 보온이 최고로 잘되는 부츠를 신고 있다. 발에는 해법이 없고 몸은 오돌오돌 떨린다. 30분은 지난 느낌이다. 10분쯤 지났을 거야. 지금 이 시간이 지루해서 나한테 길게 느껴지는 걸거야, 그래, 시간은 상대적인 거니까. 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두둥, 정말 30분이 지났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버스정류장 맨 끝으로 간다.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많아지는 사람들이 다 내가 탈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집까지 40분 서서 가는 게 싫어서 버스를 타려고 한 건데, 이미 버스를 기다린지 40분이 지났다. 심지어 기다리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운 나쁘면 서서 가게 생겼다. 나는 짱구를 굴리기 시작했다. 버스 정류장의 맨 뒤쯕으로 가서 오는 버스들을 보고 그 버스가 설 위치를 계산해서 어떻게든 앉아야겠다. 그런데 아무리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는다. 버스를 타면 버스 아저씨에게, 아저씨 도대체 이거 배차 간격이 몇분이에요? 라며 짜증섞인 한마디를 남겨 줘야지. 아냐. 아냐. 책임을 아저씨에게 돌리는 건 옳지 않아. 아저씬 그냥 시키는대로 할 뿐이지. 아 이 억울함을 어디 풀어야 하나. C에게 문자라도 보내 호소하고 싶지만 그조차도 쉽지 않다. 장갑을 뺄 용기가 나지 않는다. 흑흑. 뭐가 잘못되지 않고서야 이렇게 버스가 안올 리가 없어. 같이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동병상련과 묘한 경쟁 의식을 함께 느끼며 그렇게 계속 기다리고 그렇게 5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사람이란 참 우스운 존재라, 그 시간 50분이 그냥 아까운 게 아니라, 지하철을 타서 계속 서서 가는 시간, 그 시간이 주는 고통스러움의 대체제로 선택한 것이 그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의 소모와 신체적 고통, 그리고 정신적 스트레스를 안겨줬다는 그 사실 자체가 너무너무 화가 났다. 나는 게속 씩씩거리며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어어어어.....!!!!!
잠깐 고개를 뒤로한 새, 내가 탈 버스가 중앙도로가 아니라 바깥 쪽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게 보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 짧은 순간. 아저씨가 혹시 분노한 시민들에게 테러를 당하는 게 두려워 옆 정류장으로 피해서 가는 건가? 라는 생각까지 들고, 나는 일단 미친듯 뛰어가 버스를 겨우 탔다. 몇몇 사람은 그 버스가 온 지를 모르고 계속 기다리겠지만, 거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저기에 9503이 왔어요~~ 라고 소리치면서 갈 수는 없는 거니까, 일단 버스를 탔다. 아, 그런데 버스 노선이 바뀐 거란다. 4일쯤 전에. 이제 더 이상 이 차는 중앙차로에 서지 않는단다.
억울해 억울해. 그러고보니 난 계속 앞만 보느라, 우리쪽으로 오는 버스 번호에 집착하느라 옆쪽으로 가는 버스는 몇번인지 보지도 않았는데, 그 시간동안 아마도 몇 대를 보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아마 거의 확실히 그랬을 거다. 잠깐 뒤를 돌아 그 버스를 보지 못했더라면, 나는 지금까지도 거기에 있었을런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살면서 가끔 곁눈질도 하고 그래야 되는 건데 말이다. 너무 한군데만 미친듯이 집착하면서 기다렸구나.
버스에 탔지만, 실은 누구 잘못도 아닌 분노 때문에 마음이 잘 진정이 안된다. 그치만 난 단순하니까, 일단 버스에 탔으니까, 화낼 데도 없는 화는 내지 말고, 그냥 이 시간을 잘 보내자, 일단 앉았으니까 ^-^ 라고 생각해버린다. 일단 버스 안이 따뜻하니 한 30% 쯤은 용서가 되고 시작한다. 마음을 가라앉히려 음악을 듣는데, 진짜로 마음이 가라앉아버린다. 내릴 때쯤 됐을 땐 마음은 평정을 되찾고, 50분 그쯤이야 뭐, 하며 룰루거린다. 나는 이런게 음악의 힘인거지 뭐, 라며 흥얼흥얼 집으로 온다. 나는 내 방이 찜질방처럼 뜨끈뜨끈한게 늘 불만이었는데 (우리집은 열선이 내방을 통해 나간다 ㅜㅜ) 오늘은 이조차 너무 좋구나 흐흐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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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곧 휴일이어서 관대한 걸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