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민예총 문예아카데미에서 하는 라캉 수업을 듣게 됐다. 신청은 두달 전쯤 해놨고 강의는 오늘에서야 시작. 한달 코스라고 해봐야 일주일에 한번 가는 거니 수업은 총 다섯번 듣는 셈이다.

실은 굳이 정신분석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건 아니다. 그렇다고 라캉의 세계가 그렇게 궁금했던 것도 아니거니와, 라캉의 라자도 잘 모른다. 실은 난, 수업을 듣고 싶었던 거다. 아마 다른 수업을 듣자고 해도 난 다 오케이 했을 거다. 역사나 문화나 사회학이나 문학이나, 그게 뭐든 그냥 배울 수 있는 거라면. 그게 뭐든, 먹고 사는 일과 크게 관련이 없는 일이라면.

회사에 다니면서부터, 계속 뭔가를 배우긴 했지만, 여기서의 배움이란 어떤 깨달음, 혹은 지적 충족이라기보다는 어떤 기술의 습득 혹은 체화의 단계였던 것 같다. 통계프로그램을 다루는 법을 배운다던가, 사내 솔루션 이용법을 배운다던가, 여러 매체의 광고상품들에 대해 배운다던가, 보고서 쓰는 스킬이라던가, 파워포인트나 엑셀을 쓰는 법이라던가, 하다못해 메일을 공손하게 쓰는 예의라던가, 명함을 주고받는 법이라던가,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웠지만, 일주일에 세번, 아침교육 씩이나 들어가면서까지 뭔가를 계속 배워 왔지만 오히려 나는 하나도 배우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다. 해가 지날 수록 바보가 되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난, 정말이지 수업을 듣고 싶은 욕망이 계속 생겨왔다. 어느 평일 조용히 휴가내고 학교로 내려가 맨 뒷자리에 앉아 몰래 수업을 듣고 오는 상상도 했다.

처음에 듣자고 하던 두달 전 이것저것 책도 읽고 공부도 하면서 준비해야지, 라고 했는데 결국 아무것도 안했다. 속성 코스로 라캉이라도 알자며 구매한 저 하룻밤의 지식여행 라캉 편(→)도 귀찮아서 다 안읽었다. M언니는 그나마 정신분석 쪽에 좀 관심이 있어 이것저것 많이 읽었지만 나의 목표는 그냥 라캉이 누군지 정도만 알자, 이다. ㅎㅎㅎ 그리고 작전은 바싹마른 스폰지 마인드다. 아무것도 없는 스폰지가 원래 물을 더 좍좍 빨아들이지. 선무당이 사람잡는다고, 나는 벌써 주변 친구들의 욕망을 분석해본다고 또 난리법석이다. 흐흐.

대신 내가 준비한 건 공책과 필통이었다. 학교때부터 좋아하던 하이테크펜 두자루를 필통에 넣고 (넣을 것도 없다 실은 ㅋㅋ) 회사에 들고다니는 가방에도 들어갈 만한 사이즈의, 하지만 두껍지 않은 공책을 2권 준비해 M언니에게 한권을 선물하고 한권은 내가 적는다. 오늘 나 또 얼마나 모범생 모드로 필기를 열심히 했는지 두시간동안 네바닥이나 꽉꽉 채워 썼다. 우와~

시험도 없고, 학점도 없지만, 일단은 개근을 목표로 다섯번의 수업을 열심히 나가보련다. 그런데 정신분석학적으로 자꾸만 나를 들여다보니 아무래도 신경증에 강박증 증상이 좀 있는 것 같다. 오늘 첫 시간에 이렇게 느껴지면, 다섯번을 다 듣고나면 나에게 어떤 증상을 더 진단할 수 있을지, 조금 두렵기도 하다는 거. 흑흑.






댓글(2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매지 2008-01-30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마지막 학기에 현대비평론 듣는데
비평 관련 이론보다는 라캉이니 뭐니 정신분석 강의만 들었던 ㅎㅎㅎ
심지어는 레포트도 작품을 정신분석으로 분석해가는거였어요 ㅎㅎ
뭐 쓰면서도 잔뜩 끼워 맞춰서 겨우 냈지만요.
저도 민예총에서 듣고 싶은 강의들 몇 개 있는데
나중에 꼭 들어야겠어요.
라캉 관련 책 중에서는 how to read 라캉 어렵지 않고 괜찮았어요~

웽스북스 2008-01-31 00:20   좋아요 0 | URL
흐흐 비블리오테라피같은 것도 재밌어보이더라고요
봄학기 때도 또 다른 강좌 신청해서 들어볼까 생각중이에요
나는 1학년 때 현대사회와 심리학 듣고, 2학년 때 상담과 심리 듣고나서
심리학 비슷한 걸 강의로 듣는 건 처음인 것 같아요

하우투리드 라깡은 사실 읽을까 고민을 했었는데,
일단 5주 수업 듣고나서 결정하려고요 ㅎㅎㅎ

Mephistopheles 2008-01-31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을 사악하게 사는 법" 명강사 메피스토

이런 강좌는 들어보실 생각이 없으신지요.

웽스북스 2008-01-31 01:06   좋아요 0 | URL
세상을 샤방하게 사는 법 명강사 웬디
이런 강좌는



없습니다 ㅋㅋ

Mephistopheles 2008-01-31 01:31   좋아요 0 | URL
샤방(x) 정의(O)

순오기 2008-01-31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학생놀이가 부러운 웬디님의 마음이 확~ 이해되는 순오기! ^^

웽스북스 2008-01-31 01:06   좋아요 0 | URL
그래서 순오기님도 이런저런 수업 많이 들으러 다니시는 거죠? ^^

순오기 2008-01-31 13:59   좋아요 0 | URL
예~ 나는 기회만 된다면 어디든 달려가요! ㅎㅎ
학창시절에 이렇게 열심을 냈으면?ㅋㅋㅋ 배우자가 달라졌을거얌!!

웽스북스 2008-01-31 16:02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10분 더 공부하면 남편 얼굴이 달라진다, 뭐 이런거? ㅋㅋ

네꼬 2008-01-31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회사 다니면서 '에이 C 이게 뭐야!' 하면서 대학원 들어갔을 때요, 첫 수업 끝났는데 나오면서 목에서 이상한 소리 났어요. 끅끅, 하는 소리요. 아는 사람들한테 다 전화해서는 "나 행복해 죽을 것 같아. 세상 모두 사랑해" 맨정신에 술주정을 했더랬죠...... 두 학기 다니다 말았다능. -_-

웽스북스 2008-01-31 01:14   좋아요 0 | URL
아 네꼬님 그 심정 완전 알 것 같아요 흐흐흐
근데 두학기 다니다 말았다능, 그 아름답고도 슬픈 전설도
또 이해되는 저는 뭐랍니까 ^_^

네꼬님 정말 사랑스러운 분이군요~ (생뚱맞지만 개연성있죠? ㅎㅎ)

깐따삐야 2008-01-31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왓!! 재밌겠어요. 열심히 듣고 잘 배워서 나도 정신분석 좀 해주세요. 아마 웬디양님과 비슷할 것 같긴 해요. 신경증에 강박증...ㅠㅠ

웽스북스 2008-01-31 16:03   좋아요 0 | URL
흐흐 깐따님은 건강한 정신을 가진 건강한 아가씨로 보이는걸요 ^_^

프레이야 2008-01-31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노트를 공개해주세요.
학생놀이, 저도 늘 하고 있지요. 그거 나름 재미있답니다.
개근상 꼭 타실거죠? ㅎㅎ 상으로 뭘 주실까 궁금^^

웽스북스 2008-01-31 16:08   좋아요 0 | URL
아 그러게 상으로 뭘 줄까~ 고민해봐야겠어요 ^_^
혜경님은 어디서 학생놀이 하시는지 궁금해요 ㅋㅋ

2008-01-31 2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8-01-31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깡이라닛. 나도 직장 생활하면서 그런 아카데미 다니고 싶다.

웽스북스 2008-01-31 16:09   좋아요 0 | URL
나는 김상봉/서경식 강의 가고 싶었었는데 말이죠 ㅜ_ㅜ

민예총강의는 아카데미라는 이름이 붙긴 했지만
금액도 저렴하고, 커리큘럼도 짧아서 아카데미 성격은 아니에요
(그래서 좋지만 말이죠 ^^)

마노아 2008-02-01 0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학생이 되고 싶어서 지난 가을에 직장인을 위한 역사 수업을 들었어요. 생각보다 재미 없었고, 각오보다 많이 졸았지만, 그래도 수료증 받으니까 기분 좋았어요^^

웽스북스 2008-02-01 19:32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이 직장인을 위한 역사수업을 듣는다는 건
어째 좀 반칙 같아요 ㅎㅎ

개츠비 2008-02-01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때 라깡으로 레포트 10장 썼던게 생각나네요... 뭐 거의 책을 베끼는 수준이었지만... 넘 어려워서 ...ㅋㅋ 근데 차분하게 강의 받는거라면 한번 도전해볼만 하겠네요... 뭐든, 배운다는건 좋은거죠.

웽스북스 2008-02-01 19:32   좋아요 0 | URL
네네 일단 시험도 없고 레포트도 없으니까 좋지요
그래도 숙제는 있답니다 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