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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유형 검사 중 디스크 검사,라는 게 있다. 사내에서 워크샵 때 진행했었는데 난 특이하게도 네가지 유형 중 세가지가 모두 높은 유형이다. 사교형, 안정형, 분석형. 세가지가 모두 높기 때문에 자연히 나머지 한가지는 바닥을 친다. 그게 바로 주도형이다. 나는 주도하거나 리드하는 것보다는 조용히 서포트하는 것을 좋아하고, 결정된 사항을 잘 따르는 편이다. 이 주도형이 낮은 사람의 안좋은 특징 중 하나가 선택과 결정을 어려워한다는 것이다. 분석형이 높아, 뭔가 하나를 선택하거나 결정하기 전까지 엄청 고민하기도 하며, 안정형이 높아 나의 선택으로 인해 누군가 불편을 겪게 되지는 않을까 지나치게 배려하는 편이다. 이러니 선택과 결정은 내게 참 어려운 문제. 점심 시간에 밥 먹을 장소 선택하는 것 같은 게 특히나 내게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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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대학 시절 방순이들을 만났다. 1학년 때 1년간 기숙사에서 같은 방, 앞방, 옆방에서 살던 사람들. 자주 못만나도 오래도록 만날 사람들이다. 우리 중 가장 가방끈이 길고 취업이 늦은 H가 얼마 전 환경분야의 공무원에 합격해 가장 늦게 사회인의 대열에 합류한 것을 축하하고, H에게 밥도 얻어먹고 하는 자리. 장소는 대학로였다
내가 올해 좀 대학로에 자주 갔다. 다양하고 많은 리스트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 다들 대학로 음식점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었으므로 본의아니게 내가 음식점 선택을 하게 됐다. 파스타와 피자를 파는 가게 중 나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는 가게로 데려가 파스타, 피자, 리조또, 샐러드, 스테이크 등을 시켜 먹는데 음식이 하나 하나 나올 때마다 누구 하나 맛없게 먹을까 불안불안하다. 모두의 표정을 살핀다. 다행히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어, 이거 맛있다- 라고 누군가 얘기했을 때 나는 안심이 된다. 휴 다행이야.
꽤 나왔을 밥값을 H가 냈으므로, 후식은 내가 사기로 했다. (왜 하필 내가? 그러게) 그 자리에서 계속 먹으려고 메뉴를 받았는데, D언니가 핫초코를 고른다. 어, 핫초코는 저 앞에 맛있는 데가 있는데... 그래서 사람들을 끌고 그 앞에 있는 커피숍으로 간다. 사람이 많아, 오늘따라 서비스가 엉망이다. 메뉴를 받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심지어 음식은 종이컵에 준단다. 사람이 많아 컵이 부족하단다. 씻으려면 한참 걸린다며 ;; 우리 시간 많아 괜찮으니까 머그잔에 달라고 이야기한다. 급 불안해지는 마음. 아, 내가 고른 집인데, 다들 불편해하면 어떡하지? 아니나다를까 차가 너무 늦게 나온다. 괜히 내가 미안해. 비굴한 마음에 사과를 연발한다. 차가 나오고 다들 만족스러워한다. 맛있네. 함께 나온 생초콜릿도 반응이 좋다. 휴, 다행이다. 역시 이번에도 이제서야 겨우 안심이 된다. 아, 음식점을 선택하는 일은 역시나 어려워. 작은 선택이었지만 그 대가로 오늘 곳곳에서 나는 책임감 만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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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점을 고르는 건 매우 작은 선택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 나라의 국민들은 매우 큰 선택을 했다. 그 선택을 해준, 30% 가량의 국민들 덕에 나는 오늘 비싼 밥과 달콤한 초콜릿을 먹으면서도 참담한 심정이었다. 향후 5년간 대통령으로서 그가 펼쳐 나갈 정치적, 경제적인 정책도 걱정이지만, 앞으로 다른 정치인들도 그깟 부패쯤이야 우리 국민들은 전혀 개의치 않더라, 라는 자유함으로 정치에 임하게 될 것이 뻔해 걱정이다. 환경도, 복지도,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이제 모두 거꾸로 가겠지. 그저 우리 모두의 걱정과 예감이 기우이길 바랄 뿐이다.
10년 째 만난 이 사람들과 정치 얘기를 하며 광분한 건 처음이다. 우리로 하여금 이런 첫경험을 하게 만든 대단한 대통령 당선자를 지지한 대한민국의 그 30%의 사람들에게 이 큰 선택 뒤에 있을 일들에 대해, 내가 밥집을 고르며 느꼈던 마음만큼의, 선택에 대한 책임 정도라도 느껴달라고 하는 건, 너무 무리한 바람일까. 그들은 밥집에서도 남의 밥그릇을 살피지 않고 제 밥그릇에밖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많을테니, 이런 바람은 애초에 접는 것이 나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