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고등학생 시절, 챕스틱(립케어제품을 통칭해 나는 이렇게 부른다. 마치 스카치테이프나 포스트잇 부르듯 ㅋ)을 왜 바르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었다. 핸드크림도, 스킨로션도- 핸드크림은 20대 중반이 지나서 바르기 시작했고, 남들 다 갖고 있는, 깨끗하고 맑고 자신있어진다는 존슨즈 베이비 스킨/로션 같은 건 왠지 나도 하나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가지고 있었으나 잘 쓰지는 않았다. 새스고딘이 말했지, 마케터는 새빨간 거짓말쟁이라고- 존슨즈베이비로션은 나를 끈적끈적하게 했지, 뭐 그닥 깨끗하거나 맑거나 자신있게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챕스틱도 마찬가지다. 애들이 바르니까 따라 사보고, 또 따라 발라보고 했었는데 생각해보면 입술에 뭐든 바르는 게 금지되던 시절, 챕스틱은 나름 '화장품'이 아닌 '의약품'이기에 '정당하게' 바를 수 있음에도, 바르는 행위 자체가 화장을 하는 느낌이어서, 그 재미를 즐겼던 것 같다. 이런 챕스틱 중에는 빨간 물이 들어가 있는 것도 있었는데, 잔잔히 드는 그 빨간 물이 얼마나 갔겠는가. 그럼에도 그렇게 잠시 입술을 붉게 만들어보는 것이 주는 묘한 쾌감 같은 것도 있었다. 어른 흉내를 내고 싶던 학생의 발악인가보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챕스틱을 사지 않았다. 이제 더이상 챕스틱으로 어른 흉내를 낼 필요는 없었다. 반짝반짝 입술을 예쁘게 만들어주는, 챕스틱의 붉은기와는 비견할 수도 없는 립글로스가 있었으니까. 물론 챕스틱도 몇번 산 적이 있지만 끝까지 쓴 적은 없다. 바를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에.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챕스틱을 바르기 시작한 건 올해다. 아! 챕스틱을 발라주지 않으면 이렇게 입술이 파싹파싹 마르고 당기는구나, 라는 느낌을 올해 알기 시작한 거다. 늦은 건지도 모르겠다. 스킨을 안바르면 피부가 당기는 건 스물 서너살쯤 알았고, 핸드크림을 안바르면 손이 당기고 답답한 건 작년에 처음 알았다. 그리고 난 태어나서 처음으로 핸드크림 한통을 다 써봤다. 알지 못하던 느낌들을 알아가는 이 느낌이 썩 기쁘지만은 않구나, 이런 건 앎의 즐거움으로 쳐주고 싶지 않아. 하지만 점점 알아가는 건 늘어만 가고 있다.

N사의 립케어제품 관련 설문조사를 하면서, 중고등학생과 20대의 결과를 비교해보니, 립케어제품을 살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건 보습력이었다. 그런데 중고등학생의 경우 보습력만큼 중요하게 보는 게 바로 '색깔'이었다. 20대 이상에게 색깔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더이상 챕스틱의 희미한 붉은 빛은 20대에게 매력을 주지 못한다. 대신 잦은 화장품 사용으로, 건조하고 갈라진 입술을 가지고 있는 그들의 고려 요소는 50% 이상이 무조건 보습력! 그러고보니 나도 나이들어 다시 챕스틱을 사면서 무색무취에 무조건 입술 뽕뽕하게 수분 꽉 채워주는 듯한 느낌을 주는 제품을 선호하고, 조금 가격을 더 치르더라도 그런 것들을 고르게 된다. 10대의 구매 희망 제품과 20대의 구매희망 제품은 모두 N사였으나, 10대는 니베아, 20대는 뉴트로지나였다. 니베아 챕스틱은 붉은 틴트끼가 살짝 들어가 있는 제품도 있지만, 뉴트로지나의 경우 압축해놓은 바세린같다. 그야말로 의약품스럽다. 나는 심지어 그보다 보습력이 더 좋은 제품을 쓰고 있다. 특히 겨울이 되니 입술이 벽돌같다. 주위에는 입술이 후끈 달아오르면서 팽팽해지고 빵빵해지는 듀왑 제품을 즐겨 쓰는 사람도 많다.


생각해보니 모든 화장품들이 자유롭게 주어진 지금보다, 챕스틱의 희미한 붉은 기운이나마 잠시잠깐 즐기며 어른 흉내를 내던 그 때가 더 즐거웠던 것 같기도 하다. 챕스틱의 영양가에 기대지 않아도 촉촉하고 부드럽던, 듀왑같은 제품으로 억지로 후끈거리게 만들지 않아도 팽팽하고, 립글로스의 끈끈함을 더하지 않아도 반짝반짝하고 불긋불긋한 그 시절 그 모습 그대로가 아름답다는 걸, 아직은 화장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예쁜 나이라는 걸, 화장품에 기대기 시작하면 기대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때가 온다는 걸,  괜히 어른들이 부러워 문구점에서 파는 2000원짜리 립글로스를 쓰는 건 입술 망가지는 지름길이라는 걸,

이제 수능이 끝나고 조금씩 멋내기에 맛들이기 시작할 풋풋한 아가씨들에게 꼭 얘기해주고 싶다



ps 어제 이 글을 쓰다가 또 컴퓨터 앞에 엎드려 잠들었다. 그리고 오늘 교회에서 중고등부 애들을 보는데, 입술밖에 안보여, 아 예쁘다 참! ^^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Mephistopheles 2007-11-18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위에는 입술이 후끈 달아오르면서 팽팽해지고 빵빵해지는 듀왑 제품을 즐겨 쓰는 사람도 많다."

아하하하...대체 그 제품엔 뭐가 들었기에...^^

웽스북스 2007-11-18 16:58   좋아요 0 | URL
뭔가 매운 향신료같은 성분이 들었다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어요- 암튼 매운 음식 먹었을 때처럼 입술이 후끈해지는 느낌이 퍼지면서 입술에 잔주름이 펴지고 부어올라 빵빵해지죠- 입술에 볼륨감 없는 사람들의 로망? 막이러고 ㅋㅋ

이매지 2007-11-18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듀왑은 전 기분 나빠서 못 쓰겠더라구요 ㅎㅎ
한 번 샘플로 발라본 적 있는데 입술이 아프더라는 ㅠ_ㅠ
전 니베아꺼 써요.
뉴트로지나는 정말 의약품스러워서 되려 더 찝찝한;;

웽스북스 2007-11-18 19:39   좋아요 0 | URL
그래서 지금, 10대에 가깝다고 얘기를 하고 싶은 거죠? ㅎㅎ
좀더 나이가 들어서 입술이 더 쩍쩍 갈라지거든 바디샵 비타민E 라인 립케어 제품 써봐요, 완전 좋아요- 난 그나이 때 아무것도 안발랐어요 ㅎㅎ 나이들면 정말 입술이 막 땡겨요 ㅠㅠ

마늘빵 2007-11-18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 저는 약국에서 파는 챕스틱 쓰는데.. -_-a

웽스북스 2007-11-19 00:03   좋아요 0 | URL
구매경로 1위는 '약국' 맞더군요 ㅎㅎ

라주미힌 2007-11-19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옆의 여인의 입술에서 좋은 향이 나면 맛이 궁금하다는 ㅡ..ㅡ;;;
특히 딸기.. 흐흐흐

웽스북스 2007-11-19 00:03   좋아요 0 | URL
딸기맛이 날거라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ㅎㅎ

마늘빵 2007-11-19 11:54   좋아요 0 | URL
이 댓글 미묘하게 야한데요? ^^

웽스북스 2007-11-19 12:03   좋아요 0 | URL
야하긴 한데, 미묘하다기보단 좀 대놓고 야하지 않나요? ㅋ
라주미힌님께 딸기향 챕스틱을~!

라주미힌 2007-11-19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향.. 딸기맛이 아녜요? ㅡ.,ㅡ;;;
초코향도 있던거 같던데..

웽스북스 2007-11-19 16:01   좋아요 0 | URL
라주미힌님, 챕스틱으로는 향이 퍼지는 정도지 달달한 맛까지는 느끼기 어렵구요~ 정 '달달한 립제품의 맛'을 느껴보고 싶으시면 랑콤의 쥬시튜브 계열 쪽이 향도 맛도 괜찮은 편입니다 ^^ 마침 제가 쓰는 쥬시튜브가 살짝 달달하게 초코 비스무레한 맛이 나는 제품이니 원하신다면 담번에 뵐일이 있을 때 새끼손가락에 조금 짜드리겠습니다 ^-^

프레이야 2007-11-19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향 챕스틱, 저 쓰던 것 어제 작은딸한테 줬어요. 입술이 텄다고 그래서요.
이제 정말 향이나 색이 없는 입술보호제가 좋던걸요. 진한 립스틱도 싫고..
그래서 립글로스만 바르는 편이죠. 아무것도 안 바른 큰딸의 깨끗한 얼굴이 참
이쁘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요..

웽스북스 2007-11-19 21:25   좋아요 0 | URL
저도 립스틱은 사본 적이 없어요, 누가 줘도 5번 이상 발라본 적도 없구요~
립글로스가 좋아요~ 흐흐
아무것도 안바른 그얼굴 참 예쁜때죠

아, 오늘 화장 다지워진 내얼굴, 가리고 퇴근해야지 흐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