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제 런던의 중국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너무 많이 먹었다. 다시는 여기 올 생각이 안들 정도로.


2. 코톨드 갤러리에 갔다. 유료다. 입장료가 있다는 건 관람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어 내셔널 갤러리는 무료다. 잠깐 들러서 좋아하는 그림 몇 점 보고 머리를 환기시킨 후 가볍게 갤러리를 나설 수 있다. 유료인 경우는 가능한 많이 보려 한다. 결국 지친다. 코톨드 갤러리를 나서면서 나는 완전히 진이 빠져 버렸다.


코톨드에서 본 첫 그림은 성모와 성자를 그린 것이었다. 나는 팽팽했던 무엇이 갑자기 사르르 풀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격해 있었고 팽팽하게 긴장해 있었던 것 같다. 격하게 표출되는 감정들(눈물, 흐느낌 등을 동반하는)은 그러한 이완의 반영일 것이다. 나는 숨을 고르며 차분히 옆 그림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잔의 풍경화 앞에 섰다. 세잔은 또다시 나에게 수수께끼를 준다. 나는 또다시, 세잔의 그림을 이해해 보려 애쓰고 있다. 왜, 그림 앞에서 이런 짓을 하여야 하는가? 모르겠다.


3.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내가 두번째로 논문을 보냈던 교수님에게 답장을 받았다. 나는 당혹감을 느꼈다. 우리는 작은 논쟁(철학 토론)을 벌이는 중이었다. 교수님은 나의 주장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당혹스러웠다. 나는 비트겐쉬타인의 "말할 수 있는 건 분명하게 말해져야 한다"는 금언의 강력한 옹호자라고 자임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틀렸다"라는 말보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가 나에게 더 큰 심리적 타격을 준다.


그 교수님은 숱한 질문들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의아스러운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당신은 비트겐쉬타인의 판단 이론이 어떤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같은 질문. 이 질문은 우리의 논쟁과 별 상관이 없다. 그래서 토론 중에 나는 이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 그리고 이 문제는 나의 작은 논문의 한 주제다! 결국 그 교수님은 나의 논문을 읽지 않았다는 것인가? 


교수님은 추천서를 써주고 싶으니 나 자신에 대해 좀 더 많은 정보를 알려 달라고 했다. 그러나 내가 보낸 논문에 대해서는 단 한 줄의 평도 없었고, 읽었다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토론에 있어서는 나의 주장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고, 나의 철학적 자질에 대한 유일한 판단 근거인 나의 작은 논문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으면서도 추천서는 써주겠다고 한다!


나는 당혹과, 일종의 좌절을 느꼈다. 아마 코톨드에서 미리 진을 빼놓지 않았다면 그것은 불면의 밤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나는 확신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확신은 정당화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결국 내가 첫 번째로 논문을 보냈던 교수님의 평에 의존하기로 했다. 그 분은 나의 논문을 "It's a very good piece of work"라고 했었다. 나는 구체적인 코멘트가 없는 일반적인 평들은 무시하기 때문에 이 분의 평을 무게있게 여기지 않았었다. 이런 허울 좋은 말보다, 내가 바란 것은 차라리 "Your essay is full of common mistakes. First, ..." 같은 것이었으니까. 어쨌든 지금 나는 확신의 근거가 필요하다.


이런 지저분한 감정 속에서 나는 추천서를 얻기 위해 CV를 써 보낼 것이다. 그 교수님이 나의 CV를 읽고 과연 추천서를 써줄지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 나는 아마 너무도 덜 성숙한 사람일 것이다. 그 교수님과 논쟁을 벌이지 말았어야 했을 것이다. 조용하게, 부드럽게, 실리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나의 한 친구에게 맬컴의 비트겐쉬타인 회상록을 읽으라고 강제하고 있다. 나의 의도는 뻔하다. 여기 나보다 훨씬 심한 사람도 있다, 최단 거리를 걷기 위해 벽을 뚫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다, 그에 비하면 난 정말 부드러운 사람이다... -아, 정말로 부드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 나라는 사람이 피곤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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