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날 오전에 테레비에서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참패하면 박근혜 대세론이 흔들릴 것이며 그러면 대안으로 김문수 등등이 부각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더라. 그때 나는 어라, 그러면 안되는데... 하는 생각을 했었다. 박근혜가 여권 대통령 후보로 나와줘야지, 비박근혜면 여당이 대선에서 이길 지도 모른다... 차라리 새누리당이 총선에서 선전해서 박근혜가 새누리당의 유일한 대안으로 계속 남아있는 게 낫겠다...
그런데 총선 결과는 새누리당의, 누구도 짐작 못한 압승. 그리고 그것은, 누구도 토달 여지 없이 완벽한 박근혜의 승리. 더 커다란 낭패는, 여당에 과반마저 넘겨주어 대선에서 야당이 승리한다 하더라도 정권의 힘을 미리부터 반감하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 아마 최악의 낭패는, 이제 박근혜의 힘을 인정하고, 그가 대통령이 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고, 설사 그렇게 되더라도 그다지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조지 오웰의 "1984" 마지막 장면처럼 체념해 버린 사람들이 무척 많아졌다는 것. -우리는 우리 시대에서 상상도 못했던 엄청난 괴력을 가진 사람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자, 이제 그 앞으로 가서, 하찮은 자존심때문에 차마 인정하지 못했던 우리의 경외를 고백하자!
갑자기 대선까지 시간이 너무 짧게 남았다는 위기감이 든다. 박근혜가 보여준 초인간적인 괴력의 기억이 엷어지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야권이 준비하고 있을 박근혜 침몰 프로젝트(정수 장학회 문제 등등)는 오히려 역풍을 맞을 것이다. 그리고 이 괴력의 기억을 증폭할 궁리를 하고 있을 새누리당 사람들은 분명 이런 문제들을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털고 갈 수 있도록 무대를 마련하고 있을 것이다. 자, 대의를 위해 이런 사소한 시비꺼리는 과감하게, 깨끗하게 털어버립시다! 과연! 그릇이 된 사람이야!
그러나 이명박이 재앙이듯 박근혜도 재앙이라는 사실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박근혜는 사안을 합리적으로 판단할 능력이 전무하다는 우리의 확신을 단 한번도 배신한 적이 없다. 그리고 그를 신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친박"이라는 이름의 당이 출현했었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가?). 이보다 확실하게 실패할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정치인이 있었는가?
쳇... 야당은 카리스마 있고, 전 연령대에 감동을 줄 수 있는 대선 주자를 중심으로 뭉쳐야 할 거다. 이명박을 까지도 말고, 박근혜를 까지도 말고, 너무 진보적인 정책도 내놓지 말고, 인물 대 인물로 붙어서 박근혜보다 더 감동을 줄 수 있는 후보를 내놓아야 할 거다. -정책이 아니라 인물에 기대야 한다고 주장하는 나는 확실히 늙었다. 다른 대안이 있느냐고 항변하는 이 논리는 언젠가 많이 들어본 흘러간 곡조다. 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