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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시의 목록 - 블랙리스트 시인 99명의 불온한 시 따뜻한 시
안도현 엮음 / 걷는사람 / 2017년 2월
평점 :
라라
최세운
흰 말들이 달려 나갔다. 오르간은 비어 있었다. 라라는 예배당 가운데에 앉아, 달리는 말들을 세고 있었다.
말들이 사람들을. 차례차례 밟아 쓰러뜨리는 것을. 라라는 보고 있었다. 거울 속에서 라라는. 긴 호수가 되고 있었다. 라라 옆에서 라라가 말을
했다. 강림을 알리는 차임벨은. 확고해간다. 성전의 커튼은. 죽은 이교도의 튜닉을. 떠오르게 한다. 라라 옆에서 라라는 들었다. 성호를 그으며
사라지는. 놀이터와 수몰된 마을과 비대칭이 되는 망루를. 사람들은 라라가 펄럭거리지 못하게. 손목에 밧줄을 감았다. 교부가 줄을 당겨 거대한
향로를 흔들 때. 라라가 노래를 시작했다. 사람들의 귓속에서. 모래가 흘러나왔다. 라라는 죽지 않는 라라. 라라는 죽지 않는 라라. 라라를 처음
본 것은 손등이었다. 창밖에서. 해변의 윤곽들이 재로 질 때. 라라는 춤을 추었다. 라라는 폐가의 창문. 라라는 생크림. 라라는 웃고. 라라는
벽에서 들린다. 믿음에 가까이 있거나 황홀경에 휩싸인 칼과 포크를 쥐고서 흘러내리는 낙원. 라라는 껍질. 라라는 화산재가 쌓이는 복도. 얼굴을
쓸어내리는 목동. 혹은. 목공. 믿음에 가까이 있거나 황홀경에 휩싸인. 라라는 단 위에 서서. 울고 있는 내 얼굴을 매만졌다. 라라 속에서 눈이
그쳤다. 흰 말들이 강대상을 돌아. 차례차례 사람들을 밟아 쓰러뜨리는 것을. 라라는 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불을 당겨 내가 정신없이 태워질 때.
나는 라라의 이름을. 불렀다.
이 책이 지어진 계기는, 지금은 누구나 알겠지만 블랙리스트로 시작되었다. 문단계에 정치와
관련된 모임에 참가했거나 수상한 어조로 시를 짓는 문인들의 이름이 정부에 리스트로 올려져 있다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다들 설마했지만 전 대통령이었던 박근혜의 비선 실세였던 최순실이 JTBC 사장에 의해 끄집어내지면서 있을 수도 있는 일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리스트가 상세히 공개되면서 분노는 극에 치달았다. 자신도 그 리스트에 끼워 달라고(...) 조롱하는 가수들이나 아마추어 문인들도 반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으리라 생각한다. 몇몇 여성에게 추행을 보여 쫓겨난 문인들을 제외하면 사람들은 그들의 작품을 보고 싶은 마음에 꽉 차있기
때문이었다. 금지된 것일수록 더욱 맛나 보인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문제는 아까 위에서 말했듯이, 여성에게 추행을 저지른 문인이 낄 만큼
리스트가 너무나 방대했다는 점이다. 처음엔 유명한 어느 시인이 이 시집을 편찬했다는 말을 듣고 구입하기를 조금 망설였다. 너무 메이저한 책이
아닌가. 그러나 생각보다 메이저하진 않았다. 지역 특색이 보수적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을 밖에서 들고 읽으면 유독 사람들의 시선이
책등과 내 손등을 쿡쿡 찔렀다. 아버지에게 회식 때 말조심하라는 이야기를 전해달라고 어머니와 통화를 할 때, 주변 사람들에게 받았던 시선보다
어찌보면 더 노골적이었던 것도 같다.
책을 펴보면 독자들의 기대대로 시국을 걱정하는 우울한 시들이 많다. 하지만 그 분위기를 확
깨뜨리는 시도 많다. 예를 들면 박찬세 시인의 시를 들 수 있다.
엄마의 초경
박찬세
열두 자식 중 열하나를 땅에 묻은 외할아버지는
하나 남은 엄마마저 열여덞이 넘도록 초경을 하지
않아서
말수 대신 술만 늘어갔다고 합니다
엄마가 초경을 하던 날
외할머니는 신발도 못 신고 외할아버지의 방앗간으로 달려갔다고
하는데
소식을 들은 외할아버지는 나르던 쌀가마니를 내던지고
친구들을 불러 술을 사셨다고 합니다
그날 꽉 취한 외할아버지는 붉게
물든 얼굴로
돼지고기와 브래지어를 양손 가득 사오셨다고 합니다
모든 게 더디기만 한 엄마에게
외할머니는 맞지도 않는 브래지어를
채워주셨다 하고
엄마는 그때만큼 맛있는 고기를 지금껏 못 먹어봤다고 합니다
외할아버지의 제삿날이면 절을 하는 사 형제를
보며
엄마는 엄마의 초경 얘기를 하고 또 합니다
박찬세 시인은 파문 팟캐스트 방송때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남들은 다 욕해도 나는 좀
동경했음 ㅋㅋㅋ 미치려면 저렇게 작정하고 미쳐야지.
아무튼 박찬세 시인도 세월호와 관련된 시를 써서 올린 적이 있다. 그 자신은 기발했다고 생각했던지 모르겠지만, 나는 솔직히 그 시를
읽으면서 살짝 지루함을 느꼈었다. 딱딱함까지 느껴지는 그 시는 박찬세 시인 특유의 끼가 없었다. 이 책을 편찬한 시인도 그렇게 생각했던지, 그의
시 중 가장 재밌던 부분이었던 '가족의 역사'와 관련된 시를 올렸다. 이런 의외성이 독자의 긴장을 풀어주고 다음에 나올 시를 기대되게 한다.
아직 자신의 시집을 내지 않은 신인들의 시가 많은 것 또한 이 시집을 읽는 즐거운 요소 중 하나다.
그러고보면 박찬세라는 시인이
참여한 책은 올해의 좋은 시 2011을 제외하고 전부 다 가지고 있는 편이다. 좋은생각이라는 잡지에 연재하고 있다는데 거기에 실린 에세이들은 좀
가식적이다 싶은 게 있어서 항마력 딸리고(...) 아무튼 보지 않는 중이다.
지금 한창 유행중인 황인찬이 나오는 책들은 좀 귀찮아서 중도에
포기했는데 박찬세 시인 책은 꾸준히 모으는 중. 그러면 나는 그 시인을 존경하고 있는건가? 무튼 시집 내셨으면 했는데 여태 소식이 없어서
아쉽다. 그리고 왜 박찬세 씨 이름 검색하면 검은 시의 목록 책은 안 뜨는 걸까...
거짓말에 대한 맛
서정원
거짓말에도 맛이 있다
세상 온갖 은어와 말들을 빛깔나는 그릇에 담아 매콤한 맛의
비빔밥처럼 무뚝뚝한 옹기그릇에 멀건 곰탕 국물과 뜨거운 밥 한 공기를 말아 먹은 후 허무함처럼 찌그러진 깡통에 코를 틀어막고 마시는 쓴
약사발처럼
어찌 거짓말엔 이 맛뿐이겠는가
꽤나 연세가 있으신 듯한 시인이셔서 죠죠를 알고서 이런 시를 쓰진 않으신 듯하다(...)
그러나 일단 죠죠의 기묘한 모험 5부의 제일가는 명대사와 키워드가 많이 비슷해서 올려봤다.
이렇게 이 시집에는 시국의 불행한 사태 하나만을 딱 집어서 시를 쓰지 않았다. 세월호 사건, 정치와 기업의 부정부패, 제주 4.3
사건... 생각해보면 이 나라는 예전부터 바람 잘 날 없었다. 사람들도, 아이들도, 노인들도 많이 많이 죽었다. 단지 지금의 사건이 이전의
수없이 많은 사건들과 같이 덮일 수 없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주의의 급속한 성장과 같이 네트워크가 전국적으로 뻗어나간 덕분이다. 종편이
만들어져 일정 정도 언론이 국가의 오랏줄에서 풀려난 덕분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어두운 구석을 굳이 불을 밝혀 보려고 하며 장막으로
가려진 모서리를 굳이 들춰보려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 덕분이다. 나는 그게 우리나라 시인들의 특성이라 생각하고, 그렇기에 우리나라에서 시의 유행은
멈추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세상이 혼란스럽기 때문에 시가 유행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자본주의가 급속히 발달하기만 했다면 아무리 집안이
부자라고 해도 사람들이 굳이 돈이 안 되는 시인이란 직업을 그렇게 선뜻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강자들이 강제로 역사와 기억을 지우는 게
그들은 어느 정도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