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 안드리치Ivo Andrić/옮긴이 모름

 장날이 되면 왁자지껄하는 소리로 온 동네가 떠들썩했다. 가축들이 울부짖는 소리, 사람들의 고함소리, 장돌뱅이 깡부르는 소리에 난장판이었다. 장터를 가로질러 한복판쯤 파고 들어갈라치면 쇠붙이 소리에 귀가 멍멍해질 지경이었다. 낫을 하나 새로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한 농부들이 낫을 고르는 것이다. 상점 문턱받이 돌에다 낫을 퉁겨본다. 떵, 떵, 떵… 칭, 칭…, 쨍그렁, 쨍그렁! 돌에 부딪치는 쇠소리가 하루 종일 장터에서 끊일 새가 없었다.
 땅을 파먹고 사는 사람들이란 원래가 꼭 해야 할 일이 있어도 미리 걱정하는 법이 좀체로 없다. 일단 발 밑에 불이 떨어졌을 때야 비로소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마음을 가다듬어 참을성 있게 죽어라 해대는 것이다. 낫 하나 골라 사는 것도 이런 일 중의 하나다.
 꼭두새벽 집에서 출발하여 까마득히 험준한 비탈길을 걸어 장터 마을로 내려온 비토미르는 갖고 온 낟알을 팔아치우고 나니 따뜻한 봄낮 한나절은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낫 한 자루만 사면 볼일은 다보는 것이다.
 그는 우선 이 사람 저 사람 오가는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쭉 줄지어 선 철물상 앞을 지나가며 두리번두리번 공짜 구경을 한참 하고 난 다음 마침내 안면 있는 상점에 발을 들여놓았다. 무엇을 찾느냐고 상점 주인이 묻자, 그는 서슬이 등등해서 말없이 입을 다문 채 낫을 찾으면서 천정에 걸려 있는 상품들을 한 차례 쭉 훑어보는 것이었다. 무엇을 찾는 손님인지 알지 못해 주인이 한참 얼떨떨해하자 점원녀석이, 흔히 칼을 포장할 때처럼, 삼베포(麻布)로 한 겹 싸고, 그 위에 피나무 껍질로 질끈 동여매 놓은 날 한 묶음을 비토미르 앞에 내놓았다.
 농부는 한 자루 한 자루 낫을 풀어 놓고는 날의 휜 모양과 빛깔과 강도(强度)를 찬찬히 살펴보다가 손가락을 슬쩍 칼날에 대어보기도 하고, 또 두 손으로 받쳐 들어보는가 하면, 이것을 뺨에 슬쩍 갖다 대었다가 금세 무엇을 베어보기나 하듯 낫등을 지그시 노리며 내려다보는 것이다. 그는 쇠에다 침을 퉤 뱉어서는 손톱으로 문질러놓고 혀 끝을 대보기도 했다. 앞니 몇 개가 빠진 점원녀석이 한참 동안 좌우로 훑어보았다. 그의 조그만 눈에는 이미 순진한 빛이 사라지고 껌벅이는 눈으로 곁눈질치는 것이었다.
 비토미르는 그 중에서 낫다고 생각되는 것을 두서넛 골라 한 옆으로 가려놓고는 곧 이것을 들고 상점 밖으로 나가서 하나하나 여유있게, 조심스럽게 발받이 돌에다 퉁겨보기 시작했다.
 점원녀석이 따라나와 연상 물건을 지키고 있다. 농부는 점원녀석만 성가시게 쫓아다니지 않는다면 돈을 좀 더 주고라도 살 심산이었다. 하기야 이렇게 해보면 흠 있는 데를 곧 발견해 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어린 점원녀석과 그 녀석의 눈치가 못마땅했지만 그는 그런 것에 정신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마치 음차(音叉)를 다루는 것처럼 날을 발받이 돌에다 땅하고 때려서는 곧 이것을 귀에다 갖다 대고 어느 손님보다 오랫동안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의 얼굴 표정은 넋빠진 사람 같았다. 그 소리에만 정신이 빠져 버린 그는 자기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장터에 와 있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고, 들판으로 달려가서 자루를 해박은 바로 이 낫을 휘두르며, 뱀이 풀숲을 뚫고 나가듯 삭삭 풀을 베어 나가 비탈진 초원을 한 고랑 베어 제쳐 놓은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었다.
 상점 앞을 지나가던 농부들이 발길을 멈추고 서성거리며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귀를 기울여 보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몇 마디 말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무리 두들기고 찬찬히 살펴보아도, 전처럼 그 품질 좋던 바르카르 상표(商標)가 붙은 낫은 이제는 살 수 없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귀띔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비토미르는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마다 치사를 해주었지만 귀를 대고 다시 소리를 들어보고 자신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었다.
 꽤 오랫동안 그가 낫을 퉁겨보고 또 엎어보고 제쳐보고 있으려니, 참다못한 상점 주인이 문 밖으로 달려나와 약간 노기 띤 음성으로 투덜대기 시작했다. 한 묶음 가운데서 추려놓은, 두서넛 중에서 골라 보라는 것이다.
 "아무거나 골라잡아도 염려할 건 없어요. 비토미르, 다 괜찮다니까”
 "예” 하고 농부는 대답했다. 사실이 그렇다느니보다 그저 툭 튀어나온 말이었다. 상점 주인의 말에 구애없이 마음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좀더 시간적 여유가 필요했다. 
 어떤 날에는 큼직한 글자로 공장표지를 한 금장표가 박혀 있었다. <Boehme & Son,Wiener Neustadt>.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금장표라고 불렀다. 다른 종류로는 그 쇠가 불을 먹여 푸르스름해진 것으로, 일명 티롤 제(製)라고 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에는 깨알 같이 잔 글씨로 새겨져 있고 클로바 네 잎의 그림이 박혀 있었다. 역시 은장으로 박은 것이었다.
 "거 뭘, 그렇게 골치 쓸 필요 없다니까요” 상점 주인이 빗대어 하는 말이었다. "당신 보라고 글자하구 클로바 자호가 게 있지 않소”
 "그렇군요. 그래요” 농부는 생각 없이 대답했다. "소위 글발깨나 읽는다는 작자들도 종종 잘 속더라. 물건은 보지 않고 자호만 보고 샀다간 망신당하는 때가 많단 말이야”
 농부는 이렇게 생각했다.
 "네” 농부는 다시 한번 대답했다.
 그는 상점 주인과는 더 이상 말을 않고 다만 마음 속으로 지껄이면서 날과 손이 대화를 주고받을 뿐이었다. 이것저것 모두 생각해 보았으나 다른 것은 다 볼 필요도 없었고, 오골보골 들끓는 쌩쌩이 장터에서는 좀 미안하지만 염치불고하고 정신만 바짝 차리면 되는 것이었다.
 "난 그따위 것은 모른다”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글자나 자호는 참 예쁘게 새겨져 있지만, 나와 그것들과 무슨 상관이 있담. 더구나 일단 물건값을 치르고 난 다음에야 하등의 무슨 상관이 있느냐 말야? 그런 건 생각도 할 필요없지. 그 따위 글자들은 소용이 없어지기 때문에 말이야. 그런 것 때문에 골치를 앓게 되거든. 돈을 더 받기 위해 그따위 것을 박아 놓았지. 골치 아프게시리. 결국 손해 보는 쪽은 우리거든. 그 멋들어진 글자와 금장표가 사람을 망하게 만들어 놓지. 내겐 그 따위 것들은 소용도 없어. 그래도 사긴 하나 사야지. 디카부 마을의 억센 풀이 글자를 알 리 없지. 오직 필요한 것은 낫뿐이야. 낫만 있으면 되고말고. 이놈의 집에서 처음 낫을 사는 것은 아니야. 그래도 나는 다 알고 있어. 그 꿍꿍이속을 말이야. 누가 봐도 여기서 볼 때는 참 멋진 군도(軍刀)같이 볼 테지. 그러나 이놈을 일단 사들고 그 육시랄 디카부 마을 밭으로 올라가 보란 말이야. 자루를 해박고 풀을 베기 시작해 보지. 마치 고드름 녹아 떨어지듯 풀포기에 날이 푹푹 닳아 버리고 또 숫돌질엔 영 맥을 못춘단 말이야. 나는 이런 걸 다 알고 있지 그럼”
 비토미르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여전히 하나하나 문지방 발받이 돌에다 두들겨 보는 것이다. 판에 박힌 듯 한결같이 요란한 소리를 내봄으로써 낫 속에 숨겨진 진실을 알아내기 위하여 낫을 달래는 것이었다. 
 다시 그는 날을 골라잡고 하나하나 여유있게 음미해 보았다.
 그 꾸부정한 날의 모양과 검푸르고 또 금장표의 빛깔은 마치 낫 하나하나의 내력과 운명을 얘기해주는 것 같았다. 저 낯모를 세상에서 디카부 마을의 농삿군인 그의 손에까지 들어오게 된 경로 말이다. 그는 마치 보기나 하는 듯 머리 속으로 그려보는 것이다. 광석을 캐낸 광산에서 이것을 녹이는 용광로로, 또 거기에서 물건의 모양과 이름을 붙여주는 철공소에 이르기까지. 그는 속으로 이 물건이 한 다리 한 다리 거쳐온 경로를 생각해 낼 수 있었다. 루마니아 세멕이 들어오기까지 다른 나라들을 통해서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실어 날라서는 또 부리고 싣고 해서 수입업자들의 손을 거쳐 대리상으로, 또 거기에서 비엔나와 사라예보의 도매상에 들어와 마차에 실려 꼬불꼬불 비세그라드에 들어오기까지의 일들을 생각했다.
 이렇게 손과 손을 거쳐 들어오는 도중에 물건이 상하게 마련이다. 즉 어느 것에나 조그마한 흠이 지게 마련이다. 어느 것에나 흠이 있지 그럼!
 비록 비토미르가 상식적으로 모든 것을 어림쳐 생각한 것이라도 마치 몸이 아플 때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생생한 느낌이었다. 이 물건을 사서 닳아빠질 때까지 써먹을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였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라 자기 일인 것이다. 별 도리가 없었다. 
 "젠장 요놈의 것이” 화가 치밀어 오른 비토미르는 이렇게 투덜대며 날을 들어 발받이 돌에다 대고 힘껏 내리쳤다. 계산대 뒤에 있던 상점 주인이 휙 고개를 돌렸다. 아차 정신을 차린 그는 어쩔 줄 모르고 서성댔다.
 만져 보고 흔들어 보고 한참 고르고 난 그는 찬 물 속에 뛰어 들어가는 사람처럼 선뜻 단김에 마음을 결정했다.
 그런 후에도 상점 주인과 옥신각신 흥정이 길어졌다. 
 돈을 치르고 낫을 들고 나온 비토미르는 나귀 등에 올라탔다. 그가 산 물건은 뒤쪽에 있는 길마에 매놓은 빈 자루 속에 찔러 넣었다.
 주막에 다다르자 말에서 내린 그는 브랜디 한 잔을 시켜 목을 축였다.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게 되니 잡담이 오고가게 마련이다. 그는 주로 자기가 산 낫에 대해서 푸념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교부(敎父) 두 사람도 만났다. 은근히 군침을 다시는 것을 눈치챈 그는 술을 몇 잔 더 시켜 왔다. 그는 잔을 떼지 않고 연거푸 석 잔을 들이켰다. 보통 주량을 넘게 마신 것이다. 이게 다 그놈의 낫 때문이지. 그는 이렇게 혼자 뇌까려 보는 것이다.
 그는 땅거미가 짙어지고 얼마 있다가 마을을 향해 비탈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믿음직스러운 늙은 나귀는 딱정벌레처럼 가파른 비탈길을 기어 올라갔다. 띵 하던 비토미르의 머리는 점점 맑아졌다. 술이 정신을 흐리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에게는 브랜디가 노곤한 사지에 힘을 돋구어주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것 같았다. 쌓이고 쌓였던 모든 상념이 치솟아 올라 목청을 돋구어 소리지르고 한바탕 노랫가락이라도 뽑아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침내 그는 모든 것이 또렷하게 선명해져옴을 느꼈다. 어느 정도 정확하게 낫에 불을 먹여서야 된다는 것을 지금은 말할 수 있다. 또 상점 주인 양반에게 말해야만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런데 늘 이 모양이었다. 마을로 내려가면 늘 얼떨떨해지기가 일쑤고,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일과 사사건건에 어쩔 수 없이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생지옥 같은 장터를 빠져 나와 디카부 마을을 향하여 산길을 기어오르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원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자신 속에 깃들인 신념과 능력과 믿음이 다시 그에게 찾아드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가도 다음 장날이 오면 또 맹추가 되어 버린다. 또 전처럼 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니 언제나 염통이 곪아 터질 지경이었다.
 말에 박차를 가하고는, 오늘 무척 애를 먹였고 많은 돈을 잡아먹은 낫을 돌아보았다. 지금 자기 뒤에 매달려 있는 낫이야말로 두말할 것 없이 마누라가 자기 것인 것처럼 자기의 소유물인 것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사람이 생명이 없는 물건의 성질과 진가를 판단해 볼 수 있을까? 제일 좋은 낫을 골랐다고 어느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또 바가지를 썼는지 안 썼는지를 누가 안단 말인가? 최종적으로 물건값이 결정되었을 때 그는 상점 주인의 표정을 살폈던 것이다. 그리고도 낫에 새겨져 있는 상표문제보다는 오히려 낫 그 자체가 수수께끼 문제 같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뒤적거려 봤지만, 그래도 흠이나 결점이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또 그의 물건이 비록 크고 쨍쨍한 소리를 울렸지만 고르다가 놓아 버린 물건이 더 좋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긴 이제는 다 끝난 일이다. 이미 다 고른 물건이다. 그러나 꺼림칙한 생각이 그를 괴롭혀주었기 때문에 그는 못 미더운 듯 연상 힐끗 눈알을 굴리며 나무라는 눈으로 그가 산 물건을 돌아보는 것이었다.
 오른쪽 어깨 너머로 넘겨다 보면 시커먼 낫 머리가 보이고 왼쪽으로 넘겨다보면 날 끝이 드러나 보였다. 쇠로 만든 초생달같이 생긴 것이 싱싱하고 밝은 빛을 내며 창공을 솟아오르는 진짜 달같이 보였다. 안장에 앉아 몸을 한번씩 뒤퉁거리면서, 어떤 때는 부드러운 말로, 또 어떤 때는 투정섞인 말로 새로 산 자기의 소유물에게 말을 걸어보는 것이다.
 "실컷 바람이나 마셔 봐라. 너도 이제는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리면 너와 인연을 맺을 동네가 어떤 동네인지 알게 될 거라. 너는 시집을 오는 거란 말이야! 만일 그 예쁜 너의 글자를 곱게 모셔둘 것이라고 생각했다간 정말 큰코 다치지. 그럼, 어림도 없는 노릇이지. 내 말해준다만 그 산뜻하고 아담한 글자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을 거란 말이야. 하기야 저곳에서는 너나 풀이나 숨이 붙어 있는 사람이라면 호락호락 놀고 먹게 놓아두지는 않을 거란 말이야. 나는 아직까지 나의 할아버지 리스탠 어른의 일을 기억하고 있지. 꼴을 베어 오라고 젊은이 늙은이 할 것 없이 한 사람 한 사람 내보냈지, 솥에 넣어 들들 볶듯 부려먹었단 말야. 애녀석들은 파리새끼처럼 픽픽 쓰러졌었지, 아낙들은 애들을 집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그를 붙들고 애걸복걸했지만, 그는 그럴수록 더욱 아우성만 질렀지. ‘제 할일이나 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아!' 이렇게 호통을 치셨어. ‘아직도 너희들 근력이 정정하지 않느냐 말이야. 개도 안 뜯어먹을 그놈의 몸뚱이를 아끼는 꼴을 죽어도 보고 싶지 않단 말이야. 사족을 놀려 일하지 않고, 먹지도 않으려면 무엇하러 세상에 태어들 났느냐 말이야…' 나는 죄다 기억하고 있지. 흥, 그것보다 더한 일까지도 기억할 수 있단 말야…”
 비토미르는 낫을 보고 싱긋이 웃음지었다. 달빛을 받은 낫의 광채가 그에게로 되비쳤다. 그는 어금니를 지그시 다문 채 심각한 듯 뇌까렸다.
 "좋아 요것아. 내일 아침 한 번 시험해 볼 테야. 자루를 해박아 갖고 번개같이 휘둘러서 들판과 온 골짜기에다 본때를 보여줄 테니까 두고 봐라. 너를 숫돌 위에 놓고 석석 갈기 시작하면 디카부가 어떤 동네인지 너는 알게 될 거라! 네놈 빤들한 맵시도 마술에 걸린 것처럼 뭉턱뭉턱 닳아 떨어질 테니. 두고 보라니까. 이게 바로 산이라는 거야. 험준한 큰 산이지. 네가 있던 물렁물렁 하고 밋밋한 평지와는 다르단 말야”
 희미한 달빛을 뚫고 앞을 내다본 비토미르의 눈에는 ‘서나무 작은 동네’라고 불리는 분지가 보였다. 
그는 곧 자기 마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자 목청을 힘껏 돋구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사도, 이렇다 할 가락도 없다. 그저 높은 소리가 축 처져 흘러퍼질 뿐이다. 마치 원수를 불러다가 복수라도 하는 것처럼.

 

* 출처 ㅡ [풀씨](2001년 여름) http://www.fulssi.or.kr/book/

* 이 작품은 이보 안드리치에 대한 정보를 찾아헤매던 어느 날 운좋게 건진 것입니다. 퍼온 곳, [풀씨]에서는 <낫>이라는 번역제목만 있을 뿐 원제목을 병기하지 않았더군요. 슬라브어를 모르므로 제목의 원어를 병기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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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브권 문학계 최근 동향

최건영(문과대학 교수/ 슬라브 문학)

1. 세기말의 러시아 문학-- 5월 10일 자 [연세춘추]
2. 최근의 동구문학 --- 5월 31일 자 [연세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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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기말의 러시아 문학


마침 19세기와 20세기 러시아문학을 대표하는 뿌쉬낀과 나보꼬프가 각기 탄생 200주년, 100주년을 맞은 러시아의 세기말 문단은 문학 그 자체는 물론 역사, 사회사상사, 문화사의 보고라 할만하다. 세기말의 러시아 문단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을 두 가지로 요약해서 살펴본다. 우선 해금작가, 망명이민 작가, '검열기피문학' 등이 합류하고, '또하나의 문학' 혹은 포스트모던의 창작경향, 추리소설과 대중소설이 혼재하고 있는 80-90년대의 문단을 살펴보고, 후반에서는 20세기 러시아의 사상문화사적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재해석하려는 평론의 출현을 논해보겠다.

검열과 통제가 사라진 고르바초프 이후의 러시아 문단은, 언어의 직선적 지시기능이 힘을 발휘하여 한때 사회평론적 문예비평이 큰 힘을 얻었다. 문단은 보수, 진보 양 진영으로 갈라졌고, 문예지는 극단을 치닫는 논쟁으로 메워졌다. 해금도서, 망명문학, 동시대 작가를 망라하여 모든 창작물은 두 진영의 아전인수적인 해석에 따라 심지어는 중복되어 인용되기도 했다. 이 두 부류에 속하지 못하고, 그 어떠한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지 않은 작품들을 지칭하기 위해 "또하나의 문학"이라는 용어가 탄생하기도 했다. 문학이 문학이상의 힘을 발휘하고, 작가가 사회의 교사로 존재하던 19세기 러시아의 전통적 사고가 이 시기에 부활하는 듯 했다.

그러나 뻬레스뜨로이까의 종언과 함께 문학의 사회적 영향력은 급속히 약화되기 시작했으며, 작가의 발언도 사회적 권위를 잃은 지 오래다. 80년대의 해금작가나 망명작가의 작품과 발언, 수백만부가 팔리는 문예지의 위력, 쏠제니찐의 권위, 사회적인 대 논쟁을 불러일으킨 아이뜨마또프나 르이바꼬프의 문제소설 등등 모두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9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들어오면서 순수 문학은, 각종 오락서, 추리소설 등과 경쟁하지 않으면 독자를 얻을 수 없게 되었다. 베스트셀러 만들기와 문학상의 출현이라는 러시아에서는 매우 낯선 시스템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재 진행중인 러시아의 사회현상을 다루는 리얼리즘계의 작품군이라도 해도 이는 사회의 사상적 리더로서의 문학이라는 의식보다는 차라리 사회의식을 철저하게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는 의미에서의 리얼리즘문학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기존의 전통적 리얼리즘 문학이 사회적인 메시지를 갖지 않고, 교사로서의 기능을 잃었다함은, 정치나 문학적 담론 모두를 신용하지 않게 된 사회의 의식과 생태까지도 문학적 소재에 포함시킬 수 있는 리얼리즘 문학의 출현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실제로 일부 러시아의 비평가들은 이러한 현상을 단순히 러시아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금세기 후반의 세계문화 전반에 나타나는 포스트모던이라는 사조와 연결시키기도 한다.

평론의 경우 세기말의 러시아를 논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에뜨낀뜨와 그로이스의 활동이다. 러시아에서의 정신분석의 역사를 논한 『불가능한 욕망』(1993)의 저자 알렉싼드르 에뜨낀뜨(1955-)는 스딸린시대의 전체주의적 사고의 기원이 20세기초 러시아 문화의 르네상스기에 있다고 주장하며, '은의 시대'에 대한 종래의 이미지를 부정한다. 문화 전반으로 보아서는 러시아 문화사 최대의 전성기였지만, 동시에 러시아사 최대의 비극을 준비한 시기이기도 했다는 인식이다. 그는 '은의 시대'를 분석하면서, 물적이고 카오스적인 자연을 정신적인 것으로서의 문화(코스모스) 속에 조직화하려 했던 욕망을 지적해낸다. 정치적 관념과 문화를 구체적 현실(자연)에 투영하면서, 현실을 억압 지배하려는 욕망은 혁명과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에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전체주의적 문화는 바로 정신적이고 관념적인 이데올로기를 통한 현실 재배, 개조를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한편 보리스 그로이스(1947-)는 『전체주의 예술 스딸린』(독어판 1988, 노어판 1993)에서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이, 사실은 전체주의 예술(가령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준비했다고 주장한다. 가령 테크놀로지는 전통적 자연의 통일을 파괴해서 자연의 재현을 전제로 하는 미메시스의 예술을 무의미화하고, 진리와 세계의 반영으로서의 예술은 사라지고 만다. 스스로 새로운 통일적세계를 테크놀로지를 사용하여 제로에서 인공적으로 재창조하는 것으로 이 상황을 타개하려고 했던 것이 아방가르드였다는 해석이다. 제로 상태에서 세계를 재창조하려면 아방가르드는 단순한 예술영역을 넘어서, 세계를 변혁시키고 지배하는 힘을 필요로했다는 것이다.

20세기 전반기에 대한 이러한 혁명적인 내용의 재해석과 함께, 20세기 후반기 각 시기에서 발굴된 문학작품, 망명 이민 작가의 귀환 작품, 포스트모던을 표방하는 나보꼬프 추종자들에 의한 90년대 작품들이 동시에 읽히고 있는 러시아문단은 현재 매우 세기말적이고 복잡하다.

 

2. 최근의 동구권 문학


우리의 언론을 보면, 사회주위권 붕괴 이후 동구, 러시아의 문화생활은 맥도날드, 헐리우드 영화, 서구대중소설로만 뒤범벅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냉전시절 그들에 대해 가졌던 우리의 이데올로기적 우월감이 천민 자본주의적 시각으로 대체된 것이라고나 할까. 언어의 절제와 비유 정신이 무기였던 작가들이 검열제도가 없어진 후 당황하는 상황이 있었다고는 해도 이는 어찌 보면 작가들의 겸허한 자세를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러시아 문학의 경우는 이전보다 더욱더 자유분방한 작품들이 분출하고 있으며, 서구에서는 전쟁중인 구 유고권의 문학(끼슈, 뻬끼치, 빠비치)을 포함하여 최근의 동구 문학 번역이 냉전시기 못지 않게 줄을 잇고 있다.

90년대 초 체코에서『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체코의 해금문학(주로 꾼데라, 끌리마, 슈끄보레쯔끼 등의 망명작가들)의 열기를 누르고 초 베스트셀러가 됐을 때, "쓰레기도 나름대로 팔려나가야 조이스도 책방에 놓이겠지" 라고 말한 것은 원로작가 즈데넥 우르바넥. 서구 오락물이 범람하여 대중들의 독서 취향이 진지한 담론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초조해하는 슈끄보레쯔끼에게 던진 한 마디이다. 아니나 다를까 작년 여름 필자가 가본 쁘라하 중심가의 책방에는 꾼데라, 끌리마, 슈끄보레쯔끼를 비롯하여 체코 현대 철학자들의 책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이제 동구의 최근 문학을 각국별로 살펴보자. 최근 20년 사이에 시인만 두 명(미워슈, 쉼보르스까)이 노벨상을 탄 폴란드 문학계에는 오랜만에 대형 소설가가 탄생했다. 등단하자 마자 세계적 명성을 얻은 빠베우 후엘레(Pawel Huelle 1957-). 1987년 처녀작『바이제르 다비덱』은 곧바로 영어 등 십여개국어로 번역되었다. 배경은 노조로 유명한 그단스끄. 유년기에 만났던 유태인 소년 바이제르에 대한 초자연적 분위기의 회상록이다. (바웬사의 노조운동을 통해 유명해진 이 도시는 2차대전 이전에는 주민 대부분이 독일인이었으며 독어로는 단찌히라고 불리었다. 이곳은 귄터 그라스의 고향이기도 하다.) 90년대에 들어서 낸 단편집 『이사하던 이야기』도 역시 전후 그단스끄를 배경으로 한 환상적 분위기의 자전적 소설이다. 피아노를 치는 독일 부인과 그 음악에 빨려드는 폴란드 소년에 대한 단편 「이사」의 경우, 극도로 섬세한 폴란드어 문체는 관능적이기까지 하다. (역시 그단스끄를 배경으로 소년 소녀의 격렬한 사랑, 에로스, 배반, 죽음을 묘사한 「첫사랑」도,「이사」와 함께 후엘레 최고의 결작으로 꼽을 수 있다.) 유년시절 일상의 디테일들 속에 화자가 아련하게 떠올리는 그 시절 신화에 대한 향수가 담긴 그의 문체는 짜릿함마저 맛보게 해준다. 94년에 시집과 희곡도 발표.

꾼데라와 하벨에 가려 우리에게 덜 알려져 있으나 못지않게 중요한 체코의 작가로 요젭 슈끄보레쯔끼(Josef Skvorecky 1924-)와 이반 끌리마(Ivan Klima, 1931-)를 들 수 있다. 슈끄보레쯔끼는 1968년 망명, 현재 캐나다 거주. 자전적 작품이 많고, 속어와 시어를 섞은 독자적 문체로 유명하며 서구에서는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으나 우리말 번역은 아직 보지 못했다. 국내에『하룻밤의 연인 하룻낮의 연인』『사랑과 쓰레기』가 소개된 쁘라하 출생의 유태계 작가 끌리마 역시 자전적 요소가 강한 소설을 많이 썼다. 그는 소년기에 강제수용소 생활을 체험했으며 60년대에는 쿤데라 등과 함께 자유화 운동에 참가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경험이 작품에 많이 투영되어 있다. 대표작은 600쪽이 넘는 장편『자비의 재판관』이 있다. 사회주의 시절 체코슬로바키아가 배경. 사형제도에 반발, 공권력의 압력에 버티며 소신을 지키다가 직장과 결혼생활 모두를 잃게 되는 재판관의 이야기로, 자전적인 요소를 포함하여 소설 전체가 마치 체코 현대사의 축소판처럼 느껴진다.

노벨상을 수상한 이보 안드리치와 뻬끼치 등이 소개되어 있는 구 유고권에서는 밀로라드 빠비치(Milorad Pavic 1929- )를 대표작가로 꼽을 수 있다. 베오그라드 출신으로 집필언어는 쎄르비아어. 전설 속으로 사라진 하자르 민족을 다룬 사전 형식의 실험 소설『카자르 사전』('하자르'의 오역)이 최근 국내에 번역 소개되었다. 세계적 화제작인 이 소설이 국내에서는 이해할 수 없게도 주요 일간지나 서평지의 주목을 전혀 받지 못했다. 그의 최근작으로는 3세기 로마제국 지배하의 발칸반도를 배경으로 한 동화 형식의 연애담 『어피 모자』(1996년). 역시 쎄르비아어로 집필한 다닐로 끼슈(Danilo Kis 89년 사망)도 부르노 슐츠, 카프카, 싱어, 코신스키의 계보에 연결되는 유태계 동구 작가로 서구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유고권의 대표적 현대작가로 꼽히고 있다.

언어문화적 구분으로는 슬라브권에 속하지 않지만, 알바니아 출신으로는 1990년 프랑스에 망명한 이스마일 까다레(Ismail Kadare 1936-)가 있다. 그는 최근 수년간 노벨상 최종후보 리스트에 빠지지 않고 오른다. 대표작 『죽은 군대의 장군』(1970)과『부서진 사월』(1982)이 한국어로 출판되어 있다. 사람들의 꿈을 모아서 분석하여 숨겨진 의미를 해독하는 정보기관을 그린 1990년의『꿈의 궁전』을 비롯하여 전후 알바니아 독재 체제를 비판한 우화적 소설들이 많다. 그에게는 안드리치, 꾸스뚜리짜, 드라큘라 전설을 연상시키는 발칸의 뿌리깊은 그로테스크적 상상력이 물씬 느껴진다.

이렇듯, 슬라브권 현대작가들은 자신의 개인적 일상과 이 일상의 틈새마다 가득차 있는, 20세기 그들이 겪어야 했던 사회역사적 경험을 작품 속에 자전적 요소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대의 자전적 요소와 함께, 과거 공동체의 신화·전설이 갖는 환상적 요소를 접목하여 독특한 자신들의 작품세계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도 최근 수 년간 불가리아, 우끄라이나, 리투아니아, 헝가리, 중앙 아시아(압하지아, 끼르기스)의 작품들도 적으나마 번역되어 이제 슬라브 및 동구문학의 고전을 포함한 다양한 작품이 빠른 속도로 소개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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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인간아 > 중남미 문학에 나타난 마술적 사실주의 - 루이스 레알

 

중남미 문학에 나타난 마술적 사실주의



루이스 레알/박병규 옮김



앙헬 플로레스는 「이스파노아메리카 소설에 나타난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논문에서 마술적 사실주의는 1935년에 탄생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같은 해 출판된 보르헤스의 작품 『불한당의 세계가』는 이스파노아메리카 소설의 새로운 경향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플로레스 견해에 따르면, 보르헤스 작품에는 카프카의 영향이 보이며, 보르헤스는 이보다 2년 전에 카프카 작품을 번역했다고 한다. 플로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카프카는 초기 작품부터 -「사형 선고」(1912), 『변신』(1916)- 공들여 다듬은 적확한 문체를 사용하여 단조로운 현실과 악몽의 환상 세계를 혼합하는 어려운 기법에 통달했다. […] 따라서 참신성은 사실주의와 환상의 혼합에 있었다. 사실주의와 환상문학은 각기 다른 경로를 통해서 우여곡절 끝에 라틴아메리카에 등장했다. 사실주의는 식민 시대부터 있었고, 특히 1880년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마술적인 것은 이보다 훨씬 이전의 수많은 작가가-콜럼버스의 편지, 각종 연대기들, 카베사 데 바카의 무용담- 사용한 것으로 모데르니스모 시기에 문학적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또한 플로레스는 아르헨티나의 비오이 카사레스, 실비나 오캄포, 마예아, 사바토, 비앙코와 코르타사르, 실체의 봄발, 쿠바의 노바스 칼보와 루이스, 멕시코의 아레올라와 룰포 그리고 우루과이의 오네티 작품이 마술적 사실주의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플로레스가 이들의 작품에서 발견한 특징은 문체에 대한 관심과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을 섬뜩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변형시킨다는 점이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시간은 일종의 무시간적인 흐름 속에서 존재하고, 비현실적인 것이 현실의 한 부분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레고리 잠자의 경우를 예로 들어, 주인공이 바퀴벌레 혹은 딱정벌레로 변신한 사건도 “잠자를 제외한 나머지 등장 인물은 정상적인 사건이나 다름없이 받아들인다”고 한다.

플로레스는 마술적 사실주의의 문학적 형식을 정의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말한다. 마술적 사실주의 작가들은 “마치 문학이 제 길에서 벗어나거나 동화처럼 초자연적인 영역으로 비상하는 것을 막으려는 듯이 현실에 집착한다. 이야기는 예상대로 전개되며 갈수록 강렬해져 마침내 헤아릴 수 없는 모호함이나 혼돈 속으로 파고든다. […] 모든 마술적 사실주의 작가의 공통점은 이외에도 19세기 라틴아메리카 소설(『마리아』『쿠만다』『둥지 없는 새』등)에 만연한 어설픈 감상주의의 배척이다” 그리고 플로레스는 이렇게 덧붙인다. “마술적 사실주의 작품은 종종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비인간화’ 라고 일컬었던 예술과 유사하며, 정확하고 간결한 문체를 추구한다. […] 이처럼 마술적 사실주의 작가들이 빈틈없는 플롯 짜기에 고심한 이유는 아마도 보르헤스, 비오이 카사레스, 페이로우를 비롯한 마술적 사실주의 작가들이 탐정 소설을 창작했거나 번역 편집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내가 플로레스의 논문을 자세히 인용한 이유는, 믿기 어렵겠지만, 이 글이 현재까지 이스타오아메리카 문학의 마술적 사실주의에 대한 유일한 연구이기 때문이다. 플로레스의 글은 사막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비록 그 이후부터 이 용어는 정확한 정의도 없이 빈번하게 사용되었지만 말이다.

나는 플로레스의 마술적 사실주의 정의에 동의하지 않는다. 플로레스는 이 경향에 속하지 않는 작가까지 포함시키기 때문이다. 또 마술적 사실주의가 1935년 보르헤스부터 시작되었고, 1940년과 1950년 사이에 가장 번성했다는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이유를 설명하겠다.

‘마술적 사실주의’ 라는 용어는, 1925년경 발생한 후기표현주의 회화를 지칭하기 위해 예술 비평가 프란츠 로가 맨 처음 사용했다. 그는 이 용어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마술적’ 이라는 말은 ‘신비적’ 이라는 말의 반의어라고 말한다. 프란츠 로는 “신비mystery는 재현된 세계로 내려오지 않고 오히려 그 뒤에 숨어서 고동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이스파노아메리카에서는 우슬라르 피에트리가 『베네수엘라의 인물과 문학』(1948)이서 이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 같다. “단편들을 지배하고 깊은 인상을 남기게 하는 요소는 인간을 현실적인 사물과 사건에 둘러싸인 신비로운 존재로 고찰한다는 점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현실에 대한 시적인 재단이거나 아니면 시적인 부정이다. 마땅한 명칭이 없으므로 이를 마술적 사실주의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우슬라르 피에트리 이후, 이러한 현상에 누구보다도 관심을 쏟은 사람은 카르펜티에르였다. 카르펜티에르는 마술적 사실주의 소설 『지상의 왕국』(1949) 서문에서 흥미 있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경이로움이 경이로움다워지려면 우선 일종의 ‘한계 상황’에 다다를 만큼 신들린 상태에서 특별히 강렬하게 현실을 지각해야함을 잊어버린다. 현실의 예기치 않은 변화(기적), 현실에 대한 각별한 계시, 미처 깨닫지 못한 현실의 풍요로움을 제공하는 예사롭지 않거나 특별한 깨달음, 현실의 층위와 범주의 확장 등을 이 ‘한계상황’에서 경험할 때 진정한 경이로움이 발현된다.


따라서 마술적 사실주의는 환상문학이나 심리 소설과 다르며 초현실주의나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말한 신비주의 문학과도 다르다. 마술적 사실주의는 꿈을 모티브로 사용하지 않으므로 초현실주의와 다르다. 또한 현실을 왜곡하거나 상상의 세계를 창조하지 않으므로 환상문학이나 공상과학 소설과도 다르다. 그렇다고 등장 인물의 심리 분석에 역점을 두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사술적 사실주의는 등장 인물의 행동을 유발시키거나 억압하는 동기를 설명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데르니스모는 세련된 문체로 작품을 창작하는 데 관심을 쏟았으므로 미학 운동이지만, 마술적 사실주의는 미학 운동이 아니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복잡한 구조를 창조하는 일에는 관심도 없다.

마술적 사실주의는 마술의 문학이 아니다. 마술적 사실주의의 목적은 감정 표현이지 감정 환기가 아니므로 마술의 목적과 다르다. 무엇보다도 마술적 사실주의는 일종의 현실에 대한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는 대중 문학이나 고급 문학으로 표현될 수도 있고, 조탁된 문체나 통속적 문체로 표현될 수도 있으며, 닫힌 구조나 열린 구조로 표현될 수도 있다. 마술적 사실주의 작가는 현실과 대면할 때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 나는 앞에서 마술적 사실주의 작가는 우리가 일상 현실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상상의 세계를 창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술적 사실주의 작품을 보면 작가는 현실 앞에 서서 현실을 풀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사물과 삶과 인간 행위에서 신비로운 것을 발견하려고 한다. 이것이 우슬라르 피에트리, 아스트리아스, 카르펜티에르, 노바스 칼보, 룰포, 피타 로드리게스, 기예, 그리고 그밖의 단편 작가들, 소설가들, 시인들이 작품에서 하고 있는 작업이다. 코르타사르의 단편 소설 「비밀 무기」에서 화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침대 정리는 침대 정리와 동일하다고 생각하고, 악수는 언제나 같은 악수라고 생각하고, 정어리 통조림 한 개를 따는 것은 그것과 똑같은 정어리 통조림을 무수히 따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두가 다 다른 일이지.’ 피에르는 서툰 솜씨로 낡은 청색 침대 커버를 펴면서 생각한다.


마술적 사실주의는 플로레스의 주장처럼 카프카 작품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보르헤스는 『변신』의 스페인어판 서문에서 카프카 소설의 기본 특징은 “참을 수 없는 상황의 창조” 라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우리는 이렇게 덧붙일 수도 있다. 플로레스의 지적처럼 바로 카프카의 『변신』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인간이 바퀴벌레로 변한 것을 정상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등장 인물들이 현실을 바라보는 태도는 마술적이지 않다. 등장 인물들은 이런 상황을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며,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작가의 환상 문학도 그렇지만, 보르헤ㅡ 작품의 주된 특징은 수많은 층위의 창조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두 가지 사항 중 어느 것도 마술적 사실주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없다. 마술적 사실주의 작품의 핵심은 상상의 존재나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 아니라 인간과 그를 둘러싼 세계 사이의 신비스러운 관계를 발견하는 일이다. 경이로운 현실의 존재가 일부 비평가들이 진정한 아메리카 문학이라고 주장하는 마술적 사실주의 문학의 출발점이다.

아방가르드 문학과는 달리 마술적 사실주의는 현실도피의 문학이 아니다. 영국의 비평가 콜링우드는 『예술 원리』에서 마술로서의 예술을 논하면서 이렇게 얘기한다.


미학자에게 중요한 것은 아주 오래된 미의식의 재등장이다. 이를테면, 어려움을 무릅쓰고 19세기 비평을 가르쳐놨더니 가르침을 뒤집는 얘기를 한다. “절대로 주제에 신경을 쓰지 마십시오. 주제란 예술가가 재능을 발휘한 대상일 뿐이므로 하찮은 것입니다. 당신은 예술가의 재능과 재능을 발휘하는 방식에 관심을 가지십시오”라고 얘기하는 게 아니라, “예술가가 재능을 발휘할 때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주제를 천착할 때뿐입니다” 라고 말한다. 이 새로운 미의식은 두 가지 시각을 포함하고 있다. 즉, 주제를 예술 작품의 통합적 요소로 생각하며, 주어진 예술 작품을 평가하려면 예술가가 주제를 다루는 방식뿐만 아니라 주제 자체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는 시각이다.


주제에 대한 이와 같은 관심은 마술적 사실주의의 주된 특징 가운데 하나이며, 또한 마술적 사실주의 작품-대중문학이든 고급문학이든-을 하나로 묶는 것이기도 하다.

가예고스의 소설 『칸타클라로Cantaclaro』(1934)를 보면 카라카스 출신의 젊은이가 등장한다. 이 젊은이는 베네수엘라의 대평원 야노에 매료되었다가 이내 환멸을 느낀다. 어느 의미심장한 장면에서 젊은이는 야노 주민 크리산토 바에스 노인과 마주치자 자신보다 지위가 낮다고 여긴 나머지 무례하게 대한다. 그러자 노인은 근엄하게 얘기한다.


이보게, 젊은이. 내가 제대로 설명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알아들으려고 해보게. […] 젊은이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고 발버둥치고 있다네. […] 지금 윙윙거리는 벌 소리가 들리지. 젊은이가 벌 얘기를 했으니까 말이지. 그리고 지체 높은 양반이라고 위세를 떨면서 우리 얘기도 듣고 있지. 하지만 고독한 영혼의 기도는 절대로 듣지 못할 걸세. 지성이 억압하고 있으니까.


크리산토는 비현실을 현실의 일부로 보고 있으므로 비현실을 받아들인다. 후안 룰포의 소설 『페드로 파라모』의 등장 인물들도 이와 같은 일을 경험하는데, 여기서는 아무도 고통받는 영혼들의 존재를 억압하지 않는다. 그리고 룰포는 한술 더 떠서 죽은 화자의 관점에서 현실을 포착한다. 현실을 바라보는 룰포의 시적인 비전은, 민중 언어에서 차용한 말로 표현되고 있는데, 작품에 마술적 어조를 부여한다.

마술적 사실주의에서는 핵심 사건에 대해서 논리적 설명이나 심리적 설명이 없다. 마술적 사실주의 작가는 주변 현실을 모사하거나 (사실주의 작가들은 모사했다) 훼손하지 않고 (초현실주의자들은 훼손했다) 사물 뒤에서 숨쉬고 있는 신비를 포착해내려고 한다. 피타 로드리게스의 작품 「옹기장이 알라리코」Alarico el alfarero에는 신비한 인물이 등장한다. 이 인물은 이상한 반지를 끼고 있는데, 그가 죽자, 그의 장치들도 산산조각 난다. 카르펜티에르의 「씨앗으로 가는 여행」Viaje a la semilla 에서는 늙은 흑인 정원사가 지팡이를 휘두르는 순간부터 시간은 거꾸로 흐르기 시작한다. 카르펜티에르의 소설 『잃어버린 발자국』Los pasos perdidos을 보면 주인공이 밀림으로 돌아왔을 때, 이전에 현재에서 과거로-현대 문명 속에서 삶의 의미를 잃은 채 살다가 원시적인 아메리카의 낙원으로-가면서 지나갔던 강변의 입구를 찾아내지 못한다. 이러한 마술적 사실주의 작품에서 작가는 환상문학 작가들과는 달리 사건의 신비를 해명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환상문학에서는 초자연적인 것이 이성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으로 침입한다. 마술적 사실주의에서 “신비는 재현된 세계로 내려오지 않고 오히려 그 뒤에 숨어서 고동친다.” 마술적 사실주의 작가들은 현실의 신비를 포착하려고 극도로(한계상황에 다다를 정도로) 감각을 곤두세운다. 이러한 감각으로 외부 세계, 곧 우리가 살고 있는 다양한 세계의 감지하기 어려운 미묘한 국면들을 직관적으로 포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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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07 17: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urblue 2005-10-07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긴 그쳤는데...
전시회 보러 갑니다.
 
 전출처 : 인간아 > 환상과 예술적 창조-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 지역의 경우 - 가르시아 마르케스

 

환상과 예술적 창조-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 지역의 경우

 

 

                                                                                가르시아 마르케스/현중문 옮김



스페인 한림원 사전에 의하면, 환상이란 “이미지를 통해 무언가를 재생하는 정신의 능력”이다. 이보다 더 빈약하고 모호한 정의를 생각해 내기도 어려울 것이다. 두 번째 뜻을 보면, 환상은 “허구, 단편이나 소설, 고상한 사상 또는 기발한 사상”이다. 이는 첫 번째 정의가 야기한 혼란을 더욱 가중시킬 뿐이다.

또 한림원 사전은 상상을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근거가 없는 것에 대한 허위적 파악” 이라고 한다. 한편, 스페인어 어원 연구의 대가 코로미나스Juan Corominas는 모국어는 스페인어가 아니라 카탈란어이다- 현실과 상상은 어원이 같으므로, 결국 두 단어는 동일히다고, 깊이 따져보지도 않고 얘기한다.

천학비재한 탓이겠으나 한림원 사전과 코로미나스 어원사전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위압적인 한림원의 괴상한 풀이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환상과 상상의 차이점을 파악하려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다시 한 번 사전을 들춰 보았다. 그러나 나는 이 사전의 정의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성상가상으로 그 정의가 뒤바뀌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순수한 환상적 허구, 근거가 없는 것 그리고 “chaleco de fantasía(유행이 지난 조끼, 모조품 조끼)” 라는 용례를 든 사람이 잘 알고 있듯이 예술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은 취향이라는 뜻이다. 한 인간이 그 누구도 카프카의 창조적 능력을 환상이라고 생각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환상은 월트 디즈니가 즐겨 사용한 수단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나는 한림원 사전의 정의와는 정반대로, 상상이란 예술가들이 그들이 처한 현실에서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내는 특별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상상은 내가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유일한 예술적 창조이다. 이제부터 라틴아메리카의 예술적 창조에서 상상을 얘기하겠다. 그리고 환상이라는 말은 되지 못한 집단이 사용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


1. 믿어 달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문제

중남미와 카리브 해 예술가들은 새로운 것을 창조할 필요가 거의 없었다. 그들이 당면한 문제는 창조가 아니라 중남미 현실을 믿게 만드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중남미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지금까지 그래왔다. 중남미 문학에서 연대기 작가들보다 더 현실에 집착하면서 동시에 믿을 수 없는 작가는 없을 것이다. 이들 역시-상투적이지만 정곡을 찌른 표현을 사용하면- 현실이 상상을 능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유의 문학 가운데 최고의 작품은 바로 콜롬부스의 『항해일지』다. 콜럼부스 얘기부터 시작한 이유는 이 항해 일지가 정말로 현존했는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항해 일지는 라스카사스 신부가-그는 원본을 보았다고 말했다.-필사한 판본이다. 아무튼, 우리는 이 필사본을 통해서 콜럼부스가 위대한 발견을 했다고 카톨릭 왕들이 믿게끔 놀라운 상상력으로 꾸며낸 일들을 어림짐작할 수 있다. 콜럼부스는 1492년 10월 12일 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때 그를 맞이하러 나온 원주민들이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났을 때 모습 그대로였다”고 쓰고 있다. 연대기 작가들도 콜럼부스와 마찬가지로 카리브 해 사람들은 나체로 생활하는데 아직 기독교적 도덕이 미치지 못한 열대 지방에서는 자연스럽다. 그러나 콜럼부스가 바르셀로나 왕궁으로 데려간 원주민들은 색칠한 야자수 잎, 깃털, 진기한 동물의 이빨과 발톱으로 만든 목걸이로 치장하고 있었다. 이를 설명하기란 쉽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콜럼부스의 첫 번째 항해는 기대에 전혀 못 미치는 참담한 실패였다. 가까스로 금을 찾았을 때는 배 한 척이 침몰했다. 따라서 막대한 비용을 투자한 콜럼부스 발견이 엄청난 가치가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투자할 만하다는 확신을 심어줄 수 있는 그 어떤 구체적인 증거도 없었다. 원주민 포로들에게 옷을 입힌 것은 효과적인 광고 전략이었다. 이미 한 세기 전에 마르코 폴로는 중국에서 국수, 누에 등-화약과 나침반처럼-새롭고 명백한 증거물을 가져왔던 터이라 단순한 굳 증언만으로는 어림없었다. 콜럼부스 발견 이래 중남미 역사의 특징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역사라는 점이다. 내가 애독하는 책 중에 하나는 마젤란과 함께 세계 일주에 참여한 이태리 사람 피가페타가 쓴 『최초의 세계일주』이다. 피가페타는 브라질에서 꼬리 없는 새, 발이 없어 둥지를 틀지 못하므로 바다 한가운데서 암컷이 수컷의 등에 알을 품는 새, 배설물만 먹고 사는 새를 봤다고 한다. 그리고 배꼽이 등에 달린 돼지, 부리는 수저와 유사하고 혀가 없는 거대한 새도 보았고 머리와 귀는 노새, 몸은 낙타, 발은 사슴, 꼬리와 우는 소리는 말馬인 동물을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파타고니아 지방에서는 거인을 만나게 된 내력과 거인이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기절했다는 이야기를 쓴 사람도 바로 피가페타였다.


2. 현실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의 믿기 어려운 모험

중남미 역사에서 가장 이상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전설은 말할 필요도 없이 엘도라도 전설이다. 이 환상적인 땅을 찾는 과정에서 헤메네스데 케사다는 오늘날 콜롬비아 영토의 절반을 정복했고, 프란시스코 데 오레야나는 아마존 강을 발견했다. 더욱 환상적인 것은 일반적으로 강을 발견하는 경로와는 정반대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면서-강 어귀쪽으로 항해하면서-아마존 강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엘도라도는 아스테카 제국 마지막 황제 콰우테목의 보물처럼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았다. 잉카 제국의 황제 아타우알파의 보석금을 지불하기 위해 마리 당 10만 파운드의 금을 싣고 쿠스코를 출발한 11000마리의 야마가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반 세기 전, 파나마 지협에 대향 횡단철도 건설 책임을 맡은 독일 대표단이 계획은 실현 가능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면서 이 지역에서 철은 구하기 힘든 광물이므로 레일을 금으로 만들자고 했을 때, 현실은 다시 한 번 멀어졌다. 이처럼 정복자들이 쉽게 믿어버린 이유는 중세의 형이상학에 흥분하고 기사 로망스의 황당무계한 얘기에 도취한 사람들이라는 점을 감안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 카베사데 바카의 터무니없는 모험도 이런 식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카베사 데 바카는 스페인을 출발해서 오늘날 미국의 남부를 거쳐 멕시코까지 가는데 꼬박 8년이 걸렸다. 600명으로 구성된 원정대는이 과정에서 서로를 잡아먹었고, 마지막 생존자는 5명뿐이었다. 카베사 데 바카의 동기는 엘도라도가 아니라 이보다 좀 더 시적이고 고상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영원한 젊음을 준다는 “청춘의 샘”이었다.

목이 달아난 기사의 머리도 척척 붙이는 고약이 등장하는 소설을 애독했던 곤살로 피사로는 16세가 키토에서 황금 왕국이 가까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 왕국은 금으로 가구를 만드는 장인만 3000 명이고, 왕궁 계단은 금괴이며, 금 사슬에 묶인 사자가 지키고 있다고 했다. 안데스에 사자라니! 발보아도 다리엔에서 그와 비슷한 얘기를 듣고 태평양을 발견했다. 곤살로 피사로는 발견다운 발견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거짓말 같은 왕국을 찾아내려고 스페인인 300명, 인디오 4000명, 말 150 마리, 인간 사냥용으로 훈련된 개 천여 마리로 원정대를 조직한 사실에서 그가 얼마나 그 얘기를 믿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3.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현실

광대한 규모의 중남미 현실 때문에 문학이 당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단어의 부족이다. 중남미인이 강을 이야기할 때, 유럽 독자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긴 강은 2790km의 다뉴브 강 정도이다. 자세히 묘사하지 않으면 유럽 독자로선 5500km에 달하는 아마존 강의 실상을 상상조차 못할 것이다. 벨렝에서 바라보면 아마존 강은 발틱해보다 넓다. 강 대안은 보이지도 않는다. 중남미인이 폭풍우라는 단어를 쓰면 유럽인은 번개와 천둥을 생각하지만 중남미인은 표현하고자 하는 현상을 제대로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비雨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프랑스인 마리미에르의 묘사에 따르면, 안데스 산맥에서는 5달 동안 내내 폭풍우가 몰아친다.


이 폭풍우가 얼마나 거센지 안 겪어본 사람들은 상상조차 못할 것이다.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피의 폭포처럼 번쩍번쩍 번개가 내리치고, 천둥소리는 대기를 뒤흔들며, 굉음은 거대한 산에서 되울린다.


묘사가 졸렬하기 이를 데 없지만, 아무리 신중한 성격의 유럽인이더라도 공포에 떨만 하다.

그러므로 중남미 현실의 규모에 맞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 왜 필요한지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20세기 초 아마존강 상류를 탐험한 네덜란드인 그라프는 5분 안에 계란이 익을 만큼 펄펄 끓는 물이 흐르는 시내를 보았으며, 소나기가 폭포처럼 쏟아지기 때문에 큰 소리로 얘기해도 잘 안 들리는 지역을 통과한 적이 있다고 했다. 나는 콜롬비아 카리브 해안에서 귀에 벌레가 들어간 소 앞에서 주문을 외우며 기도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기도를 하는 동안 죽은 벌레들이 땅으로 떨어졌다. 그 사람은 동물이 있는 장소와 생김새만 가르쳐주면 멀리서도 똑같은 치료를 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1902년 5월 8일, 마르티니크 섬의 몬펠레 화산이 폭발하여 순식간에 생피에르 항구가 파괴되고, 30만 명이나 되는 주민들이 모두 용암 속에 묻혀 버렸다. 그러나 단 한 사람, 그 섬의 유일한 죄수 실바리스는 탈옥이 불가능할 만큼 튼튼하게 지은 독방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

멕시코의 경우만 해도 믿을 수 없는 현실을 표현하려면 책을 여러 권 써야만 할 것이다. 내가 이곳에 체류한 지도 20년 가까이 되지만, 지금도 꿈틀거리는 강낭콩을 쳐다보며 몇 시간이고 보낼 수 있다. 합리주의자들은 콩 안에 애벌레가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지만 내가 보기에 그 설명은 너무 빈약했다. 여기서 경이로운 사실은 애벌레 때문에 강낭콩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강낭콩이 움직이고 싶어 애벌레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내 인생에서 또 하나 이상한 경험은 아숄로틀하고 처음으로 대면한 일이다. 코르타사르는 단편 아숄로트에서 사자가 보고 싶어 찾아간 파리 동물원에서 아숄로틀을 보았다고 했다. 코르타사르는 수족관으로 발길을 옮겼고 “흔히 볼 수 있는 물고기를 흝어보다가 예상치 않게 아숄로틀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한 시간 동안이나 쳐다보다가 속절없이 그곳에서 나왔다”고 했는데, 나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파스쿠야로에서 난 한 시간 동안이 아니라 오후 내내 아숄로틀을 들여다보았고, 문밖을 나서면서도 몇 번이나 뒤돌아보았다. 하지만 아숄로틀보다 더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바로 그 집 문에 걸려 있던 팻말이었다. “아숄로틀 시럽 팝니다.”


4. 카리브 지역 : 믿을 수 없는 것의 중심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은 카리브 지역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여기서 카리브란, 엄밀히 얘기해서, 미국 남부에서 브라질의 남부에 이르는 지역을 일컫는다. 이를 팽창주의자의 헛소리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사실, 카리브는 지리학자들이 생각하는 지리적 영역일 뿐만 아니라 매우 동질적인 문화적 영역이기도 하다.

카리브에서는 신대륙 발견 이전의 마술적 세계관과 독창적인 원시 신앙에 아주 다양한 문화가 더해지면서 일종의 마술적 종합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마술적 종합은 끊임없이 예술적 관심 대상이 되었으며 결코 고갈되지 않는, 예술의 원천이 되었다. 아프리카 문화는 흑인 노예의 수입과 착취 등 강제적이고 야비한 수단과 방법을 통해 라틴아메리카 문화에 기여했으나, 라틴아메리카로서는 행운이었다. 이처럼 세계가 한 곳에서 만남으로써 무한한 자유라는 개념, 하느님도 법률도 존재 않는 현실, 즉 각자는 아무런 제약 없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만연했다. 그리하여 도적은 하루 아침에 왕이 되었고 도망자는 제독이 되었고, 창녀는 통치자가 되었다. 물론 이와 정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나는 카리브에서 태어나고 성장했기 때문에 그곳에 있는 나라와 섬을 죄다 알고 있다. 현실보다 더 놀라운 것을 생각해내지도 만들지도 못했다는 나의 좌절감은 어쩌면 여기서 연유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현실로부터 가장 동떨어질 때는 정치적인 요소를 다룰 때이지만 내 작품에서 사실에 근거를 두지 않은 것이라고는 단 한 줄도 없다. 이러한 현실 변형의 한 예는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부엔디아 가문을 그토록 불안하게 만들었던 돼지 꼬리다. 다른 이미지를 사용할 수도 있었겠지만,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가장 희박한 사건은 돼지 꼬리를 가진 아이의 출생을 두려워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소설이 유명해지기 시작하자마자 아메리카 곳곳에서 돼지꼬리 비슷한 것을 달고 살아가는 남녀들이 속속 나타났다. 바란키야 지방 시문에 한 청년 사진이 실렸다. 꼬리를 달고 태어난 청년은 『백년 동안의 고독』을 읽기 전까지 숨기고 다녔다. 꼬리보다 더 놀라운 것은 청년의 설명이었다. “부끄러워서 한 번도 꼬리 얘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소설을 읽은 사람들의 얘기도 들어보고 또 내 자신이 소설을 읽고 난 지금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어느 독자가 여자 아이 사진을 스크랩해서 보내왔다. 한국의 수도 서울에 돼지 꼬리를 달고 태어난 아이 사진이었다. 내가 소설을 쓸 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 여자아이는 꼬리를 잘라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작가로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족장의 가을』을 구상하고 자료를 정리할 시기였다. 나는 10여년에 걸쳐 중남미, 특히 카리브 독재자에 관한 책은 손에 닿는 한 모두 구해서 읽었다. 내가 구상하던 작품이 도무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번 실망하고 말았다. 후안 비센테 고메스는 점쟁이를 능가하는 혜안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이티의 폭군, 듀발리에 박사는 政敵 한 사람이 박해를 피해 도망다니다가 인간의 모습을 잃고 검은 개로 변했다는 말을 듣고 전국의 검은 개를 몰살했다고 한다. 철학자로 명성이 높아 칼라일이 연구하기도 했던, 프라시아 박사는 파라과이 공화국을 집으로 생각했는지, 우편물이 들어올 수 있는 창구 하나만 열어 두고 빗장을 걸어버렸다. 산타 아나는 ‘거창한 장례식’에 참석하여 다리 한 쪽을 잃어버렸다. 로페 데 아기레의 잘린 손은 며칠이고 강을 따라 흘러갔고, 이를 목격한 사람들은 살인자의 손이 다시 칼을 들지나 않을까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아나스타시오 소모사는 자기 집 후원에 동물원을 짓고 우리를 둘러 나누었다. 쇠창살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맹수들을, 다른 쪽에는 정적들을 가둬놓았다고 한다. 엘살바도르의 독재자 막시밀리아노 에르난데스 마르티네스는 홍역을 퇴치하려고 전국의 가로등을 빨간색 종이로 덮어씌웠으며, 음식에 독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있는 진자를 만들어 음식 위에서 흔들었다고 한다. 과테말라의 테구시갈파에 가면 모라산 동상이 있는데 사실은 네이 원수의 동상이다. 모라산 동상을 구입하러 영국으로 파견된 정부 대표단은 창고에 처박혀 있는 동상을 구입하는 편이 새로 제작하는 것보다 훨씬 비용이 적다는 것을 알았다.

결론적으로 중남미와 카리브 지역 작가들은, 한 손을 가슴에 얹고, 현실이 우리보다 더 나은 작가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운명은, 어쩌면 우리의 영광은, 겸허한 마음으로 현실을 모방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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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平野啓一郎) 강연회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 강연회 「이야기–전달한다는 것」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와 문학동네 공동 주최로 일본의 소설가「히라노 게이치로(平野啓一郎)」씨의 강연회를 서울에서 개최합니다.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 씨는 대학 재학중인 1999년 데뷔작 <일식(日蝕)>으로 일본 최고 권위의 아쿠타가와상을 수상, 일본에서는 물론 한국에서도 큰 반향을 얻은 바 있습니다.

 

이번 강연회는「이야기 – 전달한다는 것 (語り、伝えるということ)」이라는 테마로, 최근 출판된 장편소설 <장송(葬送)>을 비롯한 그의 작품세계와 함께, 현재 한국에서 붐을 일으키고 있는 일본 문학에 대하여 문학계 최일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젊은 일본인 작가로서의 생각을 들어보고자 합니다. 또한 27일(목)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에서의 강연회에는 소설가 김연수 씨가 진행을 맡아, 작가 입장에서의 문학적인 질의응답도 할 예정입니다.

 

한편, 29일(토)에는 영풍문고 종로점에서 기념 사인회도 개최됩니다.

 

 

강연일정

제1회 강연

일 시 : 2005년 10월 27일(목) 18:30
장 소 :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 이연홀 (광화문 흥국생명빌딩 3층)
진 행 : 소설가 김연수
언 어 : 한국어 통역
입 장 : 무료 (선착순. 17:30부터 입장. 150명 이상인 경우 입장을 제한할 수 있음)
문 의 :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 (Tel. 02-397-2828/2820)

 

제2회 강연

일 시 : 2005년 10월 28일(금) 16:30
장 소 : 고려대학교 인촌기념관 1층 대회의실
주 관 : 고려대학교 일본학연구센터,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일어일문학과
언 어 : 일본어 (한국어 통역 없음)
입 장 : 무료 (선착순)
문 의 : 고려대학교 일본학연구센터 (Tel. 02-3290-1656, 3290-2148)

 


사인회 일정

일 시 : 2005년 10월 29일(토) 14:30 ~ 15:30
장 소 : 영풍문고 종로점
주 관 : 문학동네, 영풍문고
문 의 : 영풍문고 종로점 (Tel. 02-399-5600)

 

 

작가소개

히라노 게이치로(平野啓一郎, HIRANO Keiichiro)

소설가. 30세.
1975년 일본 아이치현 출생.
1994년 교토대학교 법학부 입학, 1999년 졸업.
2004년 일본 문화청의 문화교류사 자격으로 1년간 파리에서 체재.

 

17세에 처음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함 (미발표). 1998년 일본 문예지「신조(新潮)」에 처음으로 투고한 소설 <일식(日蝕)>이 게재되면서 화제가 됨. 이듬해인 1999년, 당시 23세의 나이로 일본 최고 권위의 제120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 이는 당시 사상 최연소 수상 타이기록이며, 또한 대학 재학중의 수상은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 무라카미 류(村上龍)에 이어 4번째로, 큰 주목을 받았다.

 

<일식> 이후의 그의 작품으로는 메이지시대를 배경으로 한 탐미적인 유상에 젖은 연애담 <달(一月物語)> (1999년), 19세기 파리를 무대로 음악가 쇼팽과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를 주인공으로 한 근대 유럽의 역사를 그린 장편소설 <장송(葬送)> (2002년), 특유의 섬세하고도 날카로운 시각으로 현대사회의 문제점들을 바라본 산문집 <문명의 우울(文明の憂鬱)> (2002년), 현대의 교토를 무대로 젊은 남녀의 성(性) 문제를 섬세한 심리주의적 방법으로 묘사한 소설집 <다카세가와(高瀬川)> (2003년), 전쟁과 가족, 죽음, 근대화, 테크놀로지 등 현대사회의 다양한 테마를 9개의 단편으로 엮은 소설집 <방울져 떨어지는 시계들의 파문(滴り落ちる時計たちの波紋)> (2004년) 등이 있다.

 

그의 작품은 프랑스, 타이완, 러시아, 스웨덴 등지에서 번역되어 소개되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현재 <일식>, <달>, <장송>, <문명의 우울>이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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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10-07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송과 문명의 우울은 10월 24일 발간 계획.
히라노 게이치로의 신작을 대체 몇 년이나 기다렸나.

인간아 2005-10-07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정말로 히라노 게이치로의 신작이 10월 24일에 나오나요? 정말 오래 기다렸네요. 기대가 큽니다. 어느 출판사에서 나오는지, 확실한 정보인가요? 블루님.

urblue 2005-10-07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문학동네 가서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원래 9월 초였다가 미뤄졌다네요.
드뎌!! ^^

플레져 2005-10-07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이 히라노 게이치로 좋아한다는 거 기억하고 있어요.
몰라요, 왜 기억하고 있는지. 그냥 블루님 보면 기억나요.
블루님은 히라노 게이치로를 좋아해! ㅎㅎㅎ

urblue 2005-10-07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 <달>은 사랑해요!
(그리구, 잘 생겼잖아요. ㅎㅎ)

히피드림~ 2005-10-07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까우면 한번 가겠구만,,, 넘 멀잖아 ㅠㅠ ㅠㅠ

sudan 2005-10-07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게이치로의 [달]은 아주 좋았어요. [일식]은 그 의고체 문장의 맛을 번역으로는 충분히 알 수 없어서인지 좋은 줄 몰랐었지만. 게리치로는 [일식]으로 먼저 실망했다가, [달]때문에 확 좋아져버렸는데, 저 순서를 바꿔읽었더라면 어떡할뻔 했어요. 그죠?
좋은 정보 얻어가요.

瑚璉 2005-10-07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일식 때문에 이 작가는 패스~ 목록에 들어가버렸습니다(절대로 잘 생긴 외모를 질투해서라거나 그런게 아니예요. 믿어주세요 -.-;).

urblue 2005-10-07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戶庭無塵님, 믿어야하나, 말아야하나...흠...아무래도 의심스러워요.
달을 읽어보세요. 생각이 달라지실지도.

수단님, 전 달을 먼저 봤습니다. 기차역 서점에서 우연히 집어든게 달이었는데, 그리고나서 일식을 읽었더니, 좀 실망. 근데 보통 먼저 실망한 작가라면 다른 작품 안 보지 않아요? 신기한 수단님.

punk님, 제가 잘 보고 말씀드릴게요. 사진도 찍어오고. ㅎㅎ

sudan 2005-10-08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작가가 잘 생겨서.

urblue 2005-10-08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완전 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