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인간아 > 청수(淸水) - 히라노 게이치로, 양윤옥 옮김

                                                     청수(淸水)

 

                                                                                         히라노 게이치로 - 양윤옥 옮김

 

먼 곳에서 맑은 물이 뚝 떨어지고 있다.

그날은 아침부터 햇빛이 쉬임없이 쏟아져, ……견딜 수 없었다.
새벽녘 나는, 오랜만에 고집스레 달아나기만 하는 잠의 행방을 짚어가며 커튼에 비치는 바깥 풍경이 새삼 이상해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요 며칠 동안, 나는 내 몸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되도록 납득할 만한 설명을 찾아내려고, 이것저것 두서없는 사색을 거듭해왔다. 물론, 처음부터 이렇게 조용한 마음은 아니었다. 조용한…… 그렇다, 이제는 조용하다. 이런 것을 체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체념이 이토록 무력감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이라는 전제가 필요하긴 하지만.
그 기억의 단편은 한번 뇌리에서 싹을 내밀자 갑작스레 담쟁이가 넝쿨을 쭉쭉 뻗어가듯 식물적인, 씩씩한 신속함으로 무성해져갔다.
그것은 먼 옛날 태양에 관한 기억. 우리 머리 위를 빈틈없이 덮었던 거대한 태양이 빛을 가득 흩뿌리며 멀어져가던 날의 기억이었다. 하늘에는 허름한 푸른색이 차츰 퍼져갔다. 나는 별리(別離)를 슬퍼했다. 눈물을 떨구며 허망하게 언제까지나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억. 그렇다, 나는 지금 기억이라 했다. 그러나 애초부터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최초에 그렇게 생각했고, 즉시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이건 어디선가 읽은 신화의 단편이 아닐까, 거기에 이끌려 내 마음대로 해본 몽상의 흔적은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영화의 한 장면인가. 생각을 더듬어가며 묘사했던 내 소설의 한 구절인가. 잠에서 벗어나 눈 뜨면서 잃어버렸던 꿈이 어느 결에 되살아난 것인가. 어쩌면 그저, 이리저리 굴리며 놀던 공상의 잔재일까.
하지만, 그중 어느 것도 미덥지 않았다. 무엇보다 먼저 앞서는 것은 ꡐ생각이 돌연 떠올랐다는 느낌ꡑ, 그리고 ꡐ그 기억의 현실감ꡑ이었다.
이불에서 나온 나는 테이블로 다가가 어젯밤에 남긴 커피를 마시며, 그 곁의 비스킷 상자에 눈을 던졌다.
대체 의심하려야 의심할 수 없는 기억 따위, 존재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에 나는 다시 끌려들어갔다. 어제 일어난 일조차, 아니 바로 지금 일어난 일조차도, 그것을 확증할 물적(物的)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면, 얼마든지 의심이 가능한 것 아닌가.
이를테면 여기에 있는 비스킷 한 조각이 그렇다. 나는 분명 지금 이 비스킷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먹어버린다. 기억 속에는 손바닥 위의 한 조각 비스킷의 영상이 남는다.
이번에는 손바닥 위에 아무것도 두지 않고, 그저 비스킷의 영상만을 떠올려본다.
(나는 주의깊게, 일단 주먹을 쥐었다 편 뒤 거기에 비스킷의 영상을 떠올리고, 다시 주먹을 쥐었다.)
그러면 어떤가, 역시 내 기억 속에는 손바닥 위의 한 조각 비스킷의 영상이 남아 있다. 이때, 두 조각의 비스킷 중에 다만 첫번째 비스킷만 실재했었노라고 어떻게 논증할 수 있는가. 기억 속에서는 같은 비스킷의 영상이다. 어쩌면 실재했던 것은 두번째 비스킷뿐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좀더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비스킷 같은 건 한 조각도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식은 커피를 입에 가져갔다.
―그렇다면, 그 앞뒤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된다. 첫번째 비스킷을 상자에서 꺼내고 종이봉지를 뜯고 손바닥 위에 놓았을 때의 기억을, 그 직후 나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꼭 쥐어 살갗에 붙은 비스킷 가루를 톡톡 털어냈을 때의 기억을. 아, 그렇다. 이야기가 복잡하게 된 건, 나의 그 기억이 단편적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러나 참으로 앞뒤의 기억 같은 것에 기대어볼 수 있는 것일까. 실제로 이미 두번째 비스킷은 첫번째 비스킷을 모방하여 앞뒤로 무한하게 기억을 연장하기 시작하고 있지 않은가.
컵 바닥에 동그라미가 되어 남은 커피를 빨아들이듯 소리내어 마시고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서편 창을 향해 걸어갔다.
결국, 첫번째 비스킷이 진정으로 존재했다는 따위는 논증할 수 없는 것이다. …… (나는 테이블을 돌아보았다.) 아직 거기에 놓여 있는 커피잔조차 내 기억 속의 커피잔과는 다른 것인지도 모른다. 같은 것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나 자신 또한 어떻게 같은 것이라고…….
불현듯 나는 불안에 휩싸였다. 그리고 강요하듯이 서둘러 결론을 뒤집었다.
그러나, 그래도 역시 나는 알고 있다. 존재했던 것은 두번째 비스킷이 아니라 첫번째 비스킷이었다는 것을. 첫번째 비스킷의 기억에는 뭔가, 그렇지, 실재감(實在感), 실제로 비스킷에 손을 댔을 때의 그 현실감이 부착되어 있다. 이것은 두번째 비스킷의 기억이 어떻게도 모방할 수 없는 것이다. 현실감이라…… 결국 기억을 보증해주는 건 그런 정도의 것이다.
나는 내 생각이 내린 결론의 허약함에 실망을 느꼈다. 그러나 이것은, 실은 처음부터 내가 바라던 것이었다.
그랬다. 하지만 이 결론은 나의 그 기억을 긍정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기억에는 다른 어떤 기억에도 지지 않을 현실감이 갖춰져 있었으므로.
창에 다가서니 냉기가 아슴푸레 전해져왔다. 막상 바깥을 내다보는 게 아무래도 망설여졌지만, 마음을 정하고 커튼을 열자 짐작했던 대로 태양이 지금까지보다 더욱 치열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기억이 분명해짐에 따라, 내게는 점점 더 확실하게 그 모습이 눈에 보였다. 내가 내 기억을 의심하겠다는 건가. 그날 이래 태양은 이렇게 계속 쏟아지고 있지 않은가.

나는 전날 벗어 던져놓았던 주름투성이의 바지를 입고, 대충 집어든 스웨터 위에 얇직한 코트를 걸치고 바깥으로 나섰다.
입김이 희다. 차디찬 바람이 떠돌이 고양이인지 뭔지 그런 조그만 짐승처럼 다리 사이를 훑고 달아나며 코트 자락을 과장스럽게 들춰올렸다. 줄곧 쏟아지는 빛이 이런 바람에 전혀 휘둘리지 않는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일에서 아직도 범속한 이상함을 발견하는 자신을 또한 이상하게 느꼈다.
시타카모(下鴨) 큰길에서 남쪽을 향해 걸어가자 신경질적으로 가지를 뻗은 단풍나무 아래로 낙엽을 치우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짙푸른 청소복에 하얀 장갑을 끼고 곱슬한 머리를 뒤로 묶은, 사십대 가량의 흔히 볼 수 있는 여인네였다. 나는 갑작스레 불안해졌다. 다가가자 짐작대로 여인은 내 눈앞에서 작은 소리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그 순간, 맑은 물이 뚝 떨어졌다.
곧이어 관광 안내서를 든 남녀 한 쌍이 걸어왔다. 그들도 역시 내 바로 앞에서 똑같은 두 개의 소리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그 소리를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무언가가 터지는 듯한 소리. 그것도 종이나 나무 같은 것과는 다른, 이를테면, 그렇다, 인간의 피부처럼 탄력 있는 것이 극한까지 당겨지다 견디지 못해 터져버릴 때 나는, 둔탁하고 불쾌한 소리였다.
그들이 사라지는 걸까 아니면 내가 사라지는 걸까, 그건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서로 사라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런 일이 언제부터 일어나게 되었는지 생각을 더듬다 나는 문득, 행방을 알 수 없는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한 사념에 이르렀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나 또한 다른 모든 이들과 똑같았다. 늦건 빠르건 죽음은 내게도 찾아올 것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역이나 공항의 무빙 워크를 타면서 곧 넘어질 뻔하다가 마지막 선을 넘어 무사히 발을 디뎠을 때, 나도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죽음을 지금처럼 모양 사납게 맞이할지 모른다는 시답잖은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우연히 사고 현장을 맞닥뜨리기라도 하면, 입 가진 사람들이 다 그러듯이, 죽음이란 저렇듯 바로 다음 순간에 덮쳐온다 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날, 나는 나의 죽음을 이미 오래 전에 시간 속에서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래를 바라봐도 과거를 돌아봐도, 어디에서도 나의 죽음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죽지 않으리라고 믿은 것인가, 그렇지 않았다. 죽음은 어딘가에 의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건 저 맑은 물소리가 알려주었다. 물방울이 떨어져 닿는 곳, 그곳이 바로 죽음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이를 방법은?
나는 세상에 알려져 있는 자살 수단을 시험해보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그런 방법이 죽음을 가져다 줄 것 같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죽는다는 건 여전히 내게 공포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저 알고 싶을 뿐이었다. 갖가지 사념 끝에, 나의 죽음은 분명 수은 같은, 용해되기 쉬운 금속 비슷한 것이리라고 결론지어보았다. 지금은 아직 액체인 채로 조그맣게 팽창하여 정체되어 있는 상태. 맑은 물이 떨어질 때마다 나는 그것이 흩뿌린 죽음의 비말 세례를 받는 것이다. 그들을 만질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스테인리스 바퀴를 은빛으로 반짝이며 앞쪽에서 자전거를 타고 달려온 소년이 웃는 얼굴만을 선명하게 남기고 사라졌다. 태양은 조금도 그 빛을 멈출 기척이 없다.
……그렇다 해도, 죽음이 시간의 한 점에서 응고되어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기묘한 일인가. 시간이 아주 조금만 기울어진다면 금세 언덕길을 굴러 내리듯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에서 나를 향해 흘러들 것이다. ……그러나, 과연 정말 그럴까. 그때 죽음은 내 곁을 그대로 지나쳐 어딘가 내 손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흘러가버리는 게 아닐까. 아니, 어쩌면 그건 이미 액체 상태 그대로 시간 속에 침투하여 내 발 밑을 적시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 뚝 떨어졌다.

북쪽 큰길로 나가다 서쪽으로 길을 돌아서자마자, 성인 오락실에서 막 나온 사내가 하마터면 나와 부딪칠 뻔하다가 직전에 사라졌다. 자동 도어가 한순간 전해준 오락실 안의 소란. 그리고는 그저 예의 불쾌한 소리의 여운만이 남겨져 있었다. 그리고 한참 걷는데, 이번에는 열 대여섯 명 정도의 백인 관광단체와 마주쳤다. 깃발을 든 안내원 앞을 걸어가는 열 두서너 살 되어 보이는 금발 소년 둘이 그 선두였다.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제법 어른스럽게 보이지만 실은 겨우 초등학생 정도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바로 눈앞에서 갑작스레 모습이 지워졌다. 그리고 새카만 선글라스를 쓴 붉은 얼굴의 중년 사내가 사라지고, 안내원이 사라지고, 그의 얘기에 열심히 귀기울이던 기품 있어 보이는 노부부가 사라지고…… 아버지의 발치에 꼭 붙어 걷던 어린애가, 주근깨투성이의 소녀가, 까다로운 얼굴로 가이드북을 들여다보던 대학생풍의 청년이, 야구모를 쓴 뚱뚱한 사내가, 대열의 맨 끝에서 카메라에 필름을 넣던 허니문의 젊은 남녀가…… 모조리, 똑같은 조그만 소리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나는 침묵의 거리에 우뚝 선 채 아직도 쏟아지고 있는 햇빛에 눈을 던졌다. 그리고 잃어버린 나의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이런 의문이 뇌리를 스쳤다. 나의 생의 시간은 이미 직선이기를 중지한 게 아닐까. 어린아이가 뒤엎어버린 장난감 상자처럼 나의 존재는 시간과 공간이 이르는 곳곳에 산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버스 정류장 곁을 지나자, 늘어서 있던 순서대로 세 개의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사라진 뒤에야 나는 누군가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황망히 깨달았다.
두 갈래 길 사이에 자리잡은 찻집 창 너머로 한 남자와 여자가 격앙된 몸짓으로 말다툼을 하는 것이 보였다. 옆 자리에서는 신문을 펼친 회사원풍의 사내가 흥미진진한 듯 이따금 그들을 훔쳐보고 있었다. 쇼핑백을 든 임산부가 찻집 앞을 혼자 걸어가고 있었다. 길에는 자동차가 태연스레 달리고 있었다.
나는 ꡐ불가해(不可解)한ꡑ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전율했다. 나도 모르게 떠오른 그 말에 의해,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에 갑자기 빠른 속도로 접근한 것만 같았다. 되묶을 수 없는 무언가의 실을 풀어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비로소 무언가를 해결한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신호등이 켜진 건널목을 지나 북쪽 큰길 다리에 이르자, 나는 오른쪽으로 꺾어 복판에 가로수가 이어진 길을 한동안 걸었다.
소나무 가로수는 이미 잎이 시들었고, 앞쪽에는 줄기가 가느다란 벌거벗은 벚나무가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문득 그중 한 그루의 나무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성긴 깃털에 덮인 이상한 형태의 살덩어리가 보였다. 흘러내린 피가 검게 변색하여 굳어 있었다.
죽은 비둘기였다. 무언가에 뜯기기라도 한 듯 난폭하게 거꾸로 선 깃털이 내게는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미풍에 흔들리고 있었다. 살이 썩어들어서 깃털 뿌리 쪽이 느슨해진 탓일까. 깃털 한 올 한 올이 모두 제멋대로의 방향을 향하여 흔들리고 있었다. 끝으로 갈수록 털의 폭이 넓어지고 푸른빛을 띤 회백색은 엷게 흐려져, 연로초(蓮鷺草) 꽃잎처럼 보였다. 깃털 두세 개가 주위에 흩어져 있었다.
살아 있을 때는 그토록 유연하게 다듬어져 있던 깃털이 죽어버리면 이렇게 되는 것인가, 나는 아연했다. 훼손된 섬세함은 도리어 육신의 중대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이제껏 없던 초조한 분노감마저 느껴져 도망치듯 강둑길로 내려서는데, 어쩐 까닭인지 눈앞에 마주 바라보고 있을 때에는 전혀 깨닫지 못했던 시체 목줄기 부분의 선명한 초록빛이 집요하게 뇌리에 어른거렸다.
그리고 또, 물이 뚝 떨어졌다.

강둑길을 가로질러, 돌들을 콘크리트로 굳혀놓은 강가에 앉았다.
추위 탓인지 강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평소에 곧잘 보이던, 개를 산보시키러 온 주부, 조깅하는 젊은 사람들의 모습도 없었다. 단풍 철도 이미 끝난 지 오래였다. 북쪽 큰길에 걸린 다리며 북산대교, 북산대로 쪽에서는 끊임없이 자동차가 오가고, 그 풍경은 아까 지났던 벚나무 가로수 길과 연결되어 바깥세계와 완전히 격절(隔絶)되어버린 듯한, 널따란 하나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가모가와(鴨川) 수면에 햇빛이 쏟아지는 모습은 참으로 굉장했다. 어느 쪽을 건너다보아도 강은 정시(正視)할 수 없을 만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허공에 가득 찼던 빛이 그 모습을 투영하며 녹아들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수면에 떠올랐다 차례차례 결합하면서 점점 퍼져가는 걸까.
해체되어 평면 위에서 다시 숨을 헐떡이는 태양. 인간이 고정시킨 강 안에 몸을 담아 흘러가는 태양.
점점 더 쏟아지는 햇빛의 비말은 나를 거의 미치게 하였다. 끊임없이 쏟아지고 또 쏟아진다는 것이 표현하기 힘든 압박감을 불러일으켰다. 그 광경에는 음악 같은 것이 있었다. 절대적으로 단조로운 음악이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단조로움으로 듣는 이의 감각에 이상을 일으키게 하고, 쉴새없이 변화의 환각을 어른거리게 하는 음악이었다. 나는 내 청각이, 들릴 리 없는 그 소리를 향하여 맹렬하게 수렴되고 무한히 확장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찢어져라 고막이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흐르는 강물 소리는 난폭하게 뒤로 제쳐졌다. 자동차의 소음도 이제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침묵이 육박해올수록 귀는 초조감을 더해간다. 소리 건너편에 침묵이 없는 것과 똑같이 침묵 건너편에 소리가 없다는 것을 청각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귀를 기울이면 아주 작은 소리를 포착할 수 있는 것과 똑같이 침묵으로부터도 소리가 들려올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청각은 갈 곳을 잃었다. 기댈 곳도 없이 방황하였다.
시각도 괴이할 만큼 예민해졌다.
눈은, 빛이 물에 닿는 순간을 집요하게 쫓았다. 추처럼 좌우로 흔들리면서 뱃구레부터 강의 수면에 닿고 두세 번 돌다 천천히 흘러가는 것. 비스듬히 쓰윽 떨어져와 가장자리부터 물에 젖고 흐름에 이끌려 급하게 스러져 흘러가는 것. 한 조각 한 조각이 수면에 접촉하는 순간. 빛에 녹아 사라지는 순간.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눈부신 빛 속의 환영에 지나지 않았다. 선 없는 선, 형태 없는 형태였다. 시각은 어디에도 가 닿지 못했다. 침묵 속의 소리와 똑같이, 더듬어 닿은 끝에는 그저 널린 빛뿐이었다.
각각의 감각은 파탄을 향한 맹목적 충동에 홀려 있었다. 착란을 일으키고, 서로의 영역을 침식하며 섞여들었다. 나는 그 민감함에 놀랐다. 나 자신보다 훨씬 빠르게 그것들은 벌써 나아가야만 할 장소를 알고 있었으므로.
음영(陰影)을 모조리 삼켜버려 호수면처럼 태연스럽게 가득 넘치는 그 빛의 띠에, 긴 간격을 두고 몇 겹이나 층을 만들며 이어진 강바닥이 자꾸만 물결을 만들어 보냈다. 제한 없이 난반사하는 자디잔 물결들은 짙은 청색이라고도 깊은 초록이라고도 할 살빛을 밑에 깔고 점차로 파문을 넓혀 철썩이면서 가장 밝은 빛 속으로 사라져갔다. 물새는 거기에서 거무스레 희미한 그림자가 되어 뛰놀고 있었다. 강의 수면에 날아 내려와 그때마다 그렇게 그림자가 되었다가 튀쳐날면서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그 광경은 죽음과 부활을 둘러싼 불사조의 생을 두루마리 그림으로 만들어 보여주는 것 같았다.
눈을 한번 꽉 감았더니 나의 시계(視界)는 피 세례를 받은 듯 붉게 물들었다. 일순 빛이 물러나고 강의 흐름이 확실하게 보였다. 느닷없이 떠오른 색채와 곡선에 나는 여인의 긴 머리채를 떠올렸고 그 살결을 생각했다. 그 모습들은 눈을 깜빡일 때마다 희미해지며, 다시금 되돌아와 시계에 퍼져가는 강 수면의 빛 속으로 사라져갔다.
내가 보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혹은 보기를 원한 것은…….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른 겨울 하늘 한켠에서 기억 속의 태양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빛을 가득 흩뿌리며 멀어져가던 저 거대한 태양의 환각. 빛이 흩어진다. 흩어진다. 눈〔雪〕조차도 하늘을 등지면 먼지처럼 보이건만. 이 빛의 아름다움은, 그리고 이 슬픔은.
……일어서려고 땅바닥에 손을 짚었을 때, 돌연 건너편 강둑에서 목걸이를 두르지 않은 개 한 마리가 구르듯 달려 내려왔다. 개는 강둑을 달려 강가로 미끄러져 내려오더니 미친 듯이 강에 뛰어들어 조금 거칠고 길다란 털을 물에 흠씬 적시며 몸을 흔들어댔다.
음식물 찌꺼기에 더럽혀진 그 몸뚱이가 점점 빛에 젖어들어갔다.
ꡒ아아, 너에게도…….ꡓ
다시, 물이 뚝 떨어졌다.

……그리고, 이것 역시 하나의 기억이었다. 참으로 하잘것없는 하나의 기억일 뿐이었다. 이 기억을 회상하면서, 나는 다른 많은 기억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번 이 기억을 살아보았다. 강둑을 따라 북쪽을 향해 올라가 계속 거리를 걸었다. 부디 이 기억이 오늘의 기억이기를, 바로 조금 전까지의 기억이기를 믿으려 했다. 넘쳐나는 수많은 기억 속에서 이 기억이야말로 지금의 내게 가장 가까운 과거의 기억이기를 믿으려 했다. 물론 무모한 노력이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었다. 가령 그렇게 믿을 수 있다 해도 그 믿음에 대체 얼마만큼의 의미가 있을 것인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오늘의 기억이건 어제의 기억이건, 백 년, 천 년 전의 기억이건, 얼마나 먼 옛날인지도 알 수 없는 저 태양의 기억이건. 그것은 모두 같은 기억들이다. 더구나 시간 속에서 허망하게 표류를 계속하는 고독한 기억이다. 그렇다, 어쩌면 이 순간조차도.
북산대로로 나와 서쪽으로 향하다 호리가와(堀川)에 들어서기 전에 남쪽으로 꺾어져 주택가로 들어가 동쪽으로 향하고, 북쪽으로 향하고, 서쪽으로 향하고…… 그러기를 끝없이 거듭하다 도중 어딘가에서 시바타케(柴竹) 거리로 나가고 그리고 다시…….
어리석은 방황이 나를 조금씩 무엇인가로 가까이 다가가게 하였다. 그것은 물론 구체적인 장소 따위가 아니었다. 차라리 어디에도 도달하지 않고 계속 걷는 것이야말로 그 ꡐ무엇인가ꡑ의 존재를 내게 열어 보여주고 있었다. 귓전에 조그만 소리만을 남기고 시계에서 사람들이 사라져갔다. 세계는 빛의 색채를 부여받고 막 허물을 벗은 한여름 매미처럼 무구(無垢)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존재가―그렇다, 이제는 더이상 의심할 것도 없이, ꡐ나라는 존재가ꡑ 점점 과거로 방출되어가는 것이었다. 이 순간의 나의 존재, 아아, 그렇게 말을 떨구자마자 이미 그것은 하나의 위험한 기억이다. 생각을 미처 마무리하기도 전에 기억이 되어 멀어져가는 것이다.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아니 의식하는 것조차도 그것을 따라잡을 수 없다. 나의 존재, 포착조차 할 수 없는 존재. 나는 그저 조각조각 흩어진 한 무리의 기억에 쫓겨 다니는 무엇인가이다. 실 끊어진 구슬들처럼 과거로 산산이 흩어져가는 무엇인가이다. 그것들을…… 그렇다, 그 기억이라 이름 붙여진 내 존재의 단편을 허망하게 모아들여 어떻게든 이어붙여보려 하는 무엇인가이다. 얼마나 많은 것을 줍지 못했는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잘못 주워들었는가.
맑은 물은 수없이 떨어지고 점점 그 간격을 좁혀간다. 떨어졌다. 다시, 뚝 떨어졌다.

잎을 떨군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따라 걷는 걸음이 다시 북산대교로 돌아왔다. 거기에서 무언가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중앙 가로수 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마지막 불가사의와 만났다. 가모가와 강변의 고요하게 이어진 벚나무 가로수 속 한줄기 가느다란 나무 아래, 조그맣게, 네모 반듯하게, 계절 잃은 벚꽃잎이 떨어져 쌓여 있었던 것이다.
분명 나는 그렇게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꽃잎이 아니었다. 다가가 보니, 누군지 모를 여인의 복숭앗빛 손수건이었다. 급히 다가든 내 발길이 일으킨 바람이 아주 조금 그 가장자리를 스치자, ꡐ언젠가 보았던ꡑ 비둘기 시체가 얼핏 깃털을 내보였다. 손수건은 다시 천천히 펄럭이며 그것을 덮었다…….

태양은 아직도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이따금 가만히 흔들리는 손수건을 바라보면서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아래, 지금도 쓰러져 누운…… 쓰러져 누워 있을 터인 비둘기의 시체를 생각하며.
맑은 물은 이제 쉴새없이 내 등뒤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히라노 게이치로
1975년 생 1999년 첫소설 <<일식>> 아쿠다가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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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물만두 > 유아블루님 감사합니다(_ _)

잘 도착했습니다.

벌써 만돌이 읽고, 만순이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겠습니다.

어제 다 올릴려고 했는데 그만 ㅠ,ㅠ

넘 죄송해요(_ _)

블루의 아름다움이 모두 담겨있는 것 같아요^^

블루문이라는 장미랍니다.

예쁘죠.

님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파란장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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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15 1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10-15 1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10-15 1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10-15 1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출처 : 바람구두 > 김진호 - 한국 개신교의 미국주의, 그 식민지적 무의식에 대하여

한국 개신교의 미국주의, 그 식민지적 무의식에 대하여


김진호 | 󰡔당대비평󰡕 편집주간․목사


1. 후발대형교회적 신앙과 미국주의

한국교회의 대형화는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독보적이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교회 대형화’의 문제가 비단 양적 현상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특히 현실적 규모에 관계없이 대형화는 거의 모든 교회가 갖는 ‘선교적 욕망’의 대상으로 실재한다. 지금은 좀 덜하기는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은 교회들이 매주 발행하는 주보의 표지에 교회 이미지를 실었다. 이때 그 교회 이미지는 자신들의 예배터인 실재 공간이라기보다 자신들이 동일시하고 있는 대형화된 상상적 가공물인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공간의 상상적 동일시를 통해 대형 교회의 신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은연중에 표상되어 있는 것이다. 또 “(교회) 부흥하세요” 같은 말이 인사말이 될 정도로 신앙언어에서도 대형 교회에 대한 욕망은 일상화되었다. 요컨대 ‘대형 교회’는 교회의 규모에 관계없이 일반적인 한국 기독교 신앙제도의 주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대형 교회적 신앙은 힘에 대한 동경과 숭배를 신앙화한 결과이자 원인이다. 이때 힘에 대한 신앙적 욕망은 한국 기독교의 미국에 대한 선망과 겹친다. 이러한 겹침의 역사적 배경과 함의를 살피는 것이 이 글의 과제다.
그런데 대형화된 교회의 신앙제도는 최근 두 가지로 분화된 양상을 띤다. 하나는 1960년대 이후, 특히 1970년대와 1980년대 전반기의 한국 근대화과정에서 급성장한 교회의 신앙제도와 연관된다면, 1980년대 후반 이후 급부상한 교회의 신앙제도와 연관되는 현상이 다른 하나다. 이 글에서는 이 두 유형의 교회를 각각 ‘선발 대형 교회’와 ‘후발 대형 교회’라 부르겠다.
이렇게 두 가지 이념형으로 유형화할 수 있는 대형교회간의 차이를 보여주는 일련의 사태들이 최근 벌어지고 있다.
담임목사직 세습, 2003년 이후 수차례에 걸친 대규모 반공・친미적 (시청) 집회, KBS와 MBC TV의 기독교 비판 프로들에 대한 기독교도들의 부적절한 방식의 항의, 아프간・이라크전쟁에 대한 교회의 친미・호전적 태도, 비민주적 권력독과점 관행의 제도화에서 기인한 갈등이 각각의 약한 고리를 통해 표출된 영락교회와 광성교회 사태, 남아시아 해일 재앙에 대한 김홍도 목사의 발언 등, 사회적으로 부정적 이미지로 비쳐진 일련의 사태들은 선발 대형 교회적 유형의 신앙이 일반대중의 인식과 불화를 일으킨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KBS 제1TV의 <특별기획. 한국사회를 말한다>의 2004년 10월 2일자로 방영된 ‘선교 120주년, 한국교회는 위기인가?’, 󰡔한겨레21󰡕 536호(2004.12.2)의 커버스토리 <성도들이여 봉기하라>, 󰡔시사저널󰡕 790호(2004.12.16)의 커버스토리 <순복음교회, 헌금의 비밀>, 그리고 시사격월간지 󰡔아웃사이더󰡕 12호(2003.4)의 커버스토리 <한국 개신교 다시 보기> 등, 한국의 주요 대중매체들이 기획한 기독교에 대한 심층적 비판들은 한결같이 선발대형교회의 문제적 행보에만 주목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는 이 유형의 한 가운데 있는 신앙 기구다.
한편 기독교의 어떤 사회적 행보들은 커다란 반발을 초래하지 않고, 더 섬세하게 사회의 논쟁 지평 속에 우파적 관점으로 개입해 들어가곤 한다. 문화적 영역에서 기독교적인 보수주의적 윤리관을 통한 사회개입에 방점을 둔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이하 기윤실)와 정치적 차원의 개입을 지향하는 ‘기독교 사회책임’ 등, 이른바 ‘기독교 NGO’들이 그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한국기독교개혁운동’, ‘공의정치 실천연대’, ‘학원복음화 협의회’ 등은 기독교사회책임의 외곽단체로서 인적, 재정적 지원 기구의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꼭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런 기구들은 후발 대형 교회를 가능하게 했던 사회문화적․정치적 신앙관과 연속적이며, 그 주체들도 깊은 연관성이 있다.
이들(선발 대형 교회든 후발 대형 교회든)은 종교적으로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보수적이며, 미국에 대한 선호와 신앙 간의 괴리를 상대적으로 덜 체감한다는 점에서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동시대 한국 근대성과의 호응 차원에서 양자는 극명하게 대조된다. 선발 대형 교회 유형의 신앙이 오늘날 한국사회의 ‘지체된 근대성’의 전형을 보여준다면, 후발 대형 교회 유형은 우리 시대의 합리성과 보다 잘 부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사회의 정치지형이 보수주의가 압도하는 가운데, 개발독재시대의 합리성에 더 적합한 분파와 민주화시대의 합리성에 더 강한 호소력을 지닌 분파간의 갈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고 한다면, 교회적 신앙간의 대립구조는 그러한 양상의 신앙적 버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교회의 보수주의는 정치지형보다 훨씬 더 우편향적이라는 점을 주지해야 한다.
여기서 길게 얘기할 수는 없지만, 전자가 돌진적 성장(rush-to growth) 나는 이 시기가 양적 측면에 과도한 비중이 두어진 형태의 발전전략의 시대라는 점에서, 한스 랜스버그의 rush-to development 개념을 rush-to growth로 수정하고 있는 김대환의 지적에 동의한다. 김대환, 「돌진적 성장이 낳은 이중 위험사회」, 󰡔계간 사상󰡕 (1998 가을) 참조.
시대의 한국 근대성과 맞물리는 시기에 양적으로 급성장한 교회적 신앙 유형이라는 점과 후자가 민주화시대의 한국 근대성과 부합하면서 양적으로 급부상하였다는 점에서 양자의 차이를 읽는 사회적 맥락을 조명할 수 있다. 민주화시대는 과거 권위주의시대와는 다른 방식의 위기를 내포한다. 특히 내가 주목하는 것은 ‘시대의 야만이 은폐되면서 작동’하는 메커니즘이 민주화시대의 주된 특징이라는 점이다. 바로 이처럼 후발 대형 교회의 외양은 세련되고 부드러운 듯하지만, 그 담론들을 들여다보면 폭력적인 요소들이 그 존재의 축을 이루고 있다.
내가 여기서 대형 교회 신앙의 두 유형에 관해서 얘기한 것은, 최근 널리 확산되고 기독교(의 선교)의 위기에 관한 논의에 개입하고자 해서이다. 선발 대형 교회가 기독교를 과대대표하고 있는 것처럼 인식되는 상황에서 교회의 사회적 위상은 급속도로 실추하고 있는 형편에 있다. 비기독교측은 고사하고, 천주교와 개신교의 설문조사들 가톨릭대학교 인간학연구소의 '근현대 100년 속의 가톨릭교회’ 연구프로젝트 일환으로 발표된 원고인 박문수의 「2003 한국천주교의 사회적 역할과 근대화 기여에 대한 국민의식조사 결과에서 나타난 한국 천주교회의 경쟁력과 선교・사목적 과제」(www.minjungtheology.net/의 ‘월례포럼’ 43번)와 한신대학교 학술원 신학연구소의 󰡔한국 개신교와 한국 근현대의 사회 ․ 문화적 변동󰡕 (한울아카데미, 2003)를 참조하라.
조차 한국의 주요 종교들 가운데 가장 신뢰도가 낮은 집단으로 한결같이 개신교가 지목되고 있다는 점은 이러한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더욱이 민주화가 진전되고 소비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개인적 주체화가 강화되는 현재의 맥락에서 몰개인적인 공동체적 주체성을 과도하게 주장하는 신앙은 또 다른 차원에서의 위기를 드러내는 요소다. 그것은 교인 충성도의 현저한 약화로 나타났다. 집회 출석률, 전년 대비 헌납 비율, 목회자나 장로 등 교회 지도자에 대한 존경도 등이 낮아지거나, 적어도 성장이 멈추어 있다. 또 가장 개인주의적인 세대인 청(소)년층이 사라져가고 있는 추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분명 기독교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에 기반을 둔 위기론은 절반의 진실만을 담고 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교회의 존재방식과 관련해서 보면 위기론은 아직 현실이 아니다. 실제로 한국 역사에서 개신교는 대중보다는 권력에 대한 배려를 우선시함으로써 존속・발전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통령이나 장관, 국회의원 등 한국의 정치엘리트 집단 가운데 개신교도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사실은 바로 그것을 단적으로 시사한다. 지난 16대 국회의원 가운데 개신교와 천주교 신자의 비율은 전체의 60%에 달한다. 인구 대비 기독교인 수가 30%를 넘어본 적이 없고,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호감도가 언제나 그리 높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 기독교의 사회적 지위의 요체는 대중의 지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 접근성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대중사회의 지지도가 그다지 높지 않더라도 권력에 대한 접근성이 현저히 높은 집단이라는 점에서 기독교는 자신의 주장을 의제화하고 제도화하는 강력한 능력을 담지한 세력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기독교사회책임’ 같은 도덕적 지명도나 의사표현의 합리성이 높은 집단이 기독교의 정치세력화를 도모하는 현상의 전면에 나섰다는 점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이 기구에는, 부패와 오명으로 얼룩진 한기총의 지도자들과는 달리, 존경과 신망을 한 몸에 받는 교계의 명망가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CBS(기독교방송)가 지난1월 24~25일 신학대 교수, 종교 담당 기자, 목회자, 평신도 등 500명을 대상으로 행한 한국 교회의 과거・현재・미래의 대표적 지도자를 묻는 전화여론조사에 의하면, 한경직, 옥한음, 오정현이 각각 1위로 선정됐다. 또 미래의 지도자 2위는 전병욱이 차지했다. 오정현(사랑의 교회 목사)은 기독교사회책임의 공동대표이며, 전병욱(삼일교회 목사)은 지도위원이다. 그리고 현재의 지도자 5위에 랭크된 김진홍(두레교회 목사)은 공동대표의 한 사람이다. 옥한음(사랑의 교회 원로목사)도 조만간에 참여할 것으로 알려졌다. 그밖에 손봉호(동덕여대 총장), 서경석(조선족 교회 목사), 김일수(기윤실 공동대표), 윤경로(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이동원(지구촌교회 목사), 이중표(한신교회 목사) 등 신망이 높은 보수적 인물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다.

지난해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보듯 근본주의적 기독교 보수세력의 정치개입은 ‘정치의 (근본주의적) 도덕화’를 낳을 우려가 있다. 정치가 (근본주의적으로) 도덕화된다는 것은, 민주적 의사소통 과정보다 ‘원리’에 준거한 정치행위가 강화된다는 것을 뜻한다.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질서로 양분된 세상에서 선을 배타적으로 대표하는 도덕의 존재란 그것을 둘러싼 모든 논쟁과 대화를 중단시킨다. 그러므로 이런 사회에서 합의는 공론을 통하기보다 감정 편향적이고 도그마적 신념에 좌우되는 경향을 띠게 된다. 특히 9.11사태에서 비롯된 일련의 미국 사회의 합의 양상은 매우 강한 도그마적 편향을 보이고 있다. 임성호, 「도그마와 컨센서스 사이―테러시대의 미국 민주주의」, 󰡔계간 사상󰡕 (2002 봄) 참조.
이러한 도그마적 합의의 핵심에 있는 부시 미 대통령이 근본주의적 종말론을 신봉하는 ‘메시아적 군사주의자’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김지석, 󰡔미국을 파국으로 이끄는 세력에 대한 보고서󰡕 (교양인, 2004), 74~81쪽 참조.

더욱이 정치의 도덕화는 국제정치적 차원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실행되고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특히 제리 폴웰(Jerry Falwell)이 창설한 근본주의적 기독교 우파 정치조직인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는 낙태, 아동, 여성, 음란비디오 등에 관한 숱한 보수주의적 입법을 주도하였는데, 이들의 신앙적 신념은 바로 도덕적 절대성에 기반을 둔 도그마적 태도에 준하고 있다. 백찬홍, 「기독교우파와 미국의 보수정치에 대한 소고」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2002년 9월 포럼 원고(www.minjungtheology.net) 참조

몇 년 전 ‘기윤실’ 등이 주도한 대중음악이나 영화의 음란성에 대한 보수주의적 개입도 위와 같은 미국의 근본주의적 도덕관과 다르지 않다. 김진호, 「문화 십자군 ‘기독교윤리실천운동’과 기독교의 윤리―‘성찰 없는 신앙 윤리는 예수로부터의 이탈’」, 󰡔교수신문󰡕 208호(2001.8.27) 참조.
그런 점에서 인적, 신앙적 차원에서 기윤실과 깊은 연계성을 맺고 있는 기독교사회책임도, 비록 아직까지는 정치적인 보수주의에 경도된 듯하지만, 조만간에 도덕의 정치화를 일상 속에서 강화하는 태도를 취할 것이 예상된다. 여기서 ‘일상화’ 현상은 근본주의적 도덕의 정치 문화를 고착화하고 제도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될 때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체감되는 이러한 정치 문화를 거의 불편해하지 않게 되며, 따라서 문제의식을 느끼는 감수성이 퇴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대중사회에 대한 ‘무례함의 제도화’를 뜻한다. 그것은 타자화된 존재를 사회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조직적으로 배제하는 틀이다. 동시에 타자를 생산하는 체계이다. 권위주의시대는 이러한 무례함의 제도화를 통해 사회적 동력이 추동되던 시대였다. 반면 민주화시대는 그것을 지양하려는 사회적 욕망에 의해 발진되었다. 백성이 아닌 시민으로 주체화되었고, ‘양(羊)’이 아닌 ‘성도’로 주체화되었으며, 식솔이 아닌 가족으로 주체화되었다. 한데 민주화는 ‘그 이후의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힘과 그것을 막는 힘의 격전의 장이다. 비시민, 비성도, 비가족 등의 주체화와 타자화의 대립이 민주화의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이때 민주화된 사회의 무례함의 제도화는 이들을 타자화할 뿐 아니라, 그 메커니즘을 은폐함으로써 작동한다. 내가 여기서 민주화 사회의 은폐된 야만에 대해 얘기한 것은 기독교의 정치의 도덕화가 바로 야만을 은폐하면서 작동하게 하는 계기가 되리라고 우려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 개신교의 미국주의를 다루려는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서, 이러한 기독교적 ‘무례함의 신앙’은 힘의 숭배와 관련이 있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무례함의 신앙이 포교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힘’이다. 선교 대상을 압도하는 힘이 수반되어야만, 그 대상인 대중의 삶의 틀, 그 고통의 언어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녀/것)를 자기의 삶의 틀 속에 끌어들이는 것이 가능하다. 한국 개신교가 그토록 맹목적인 친미주의를 신앙의 내적 언어로 이해하게 된 것도 (선교 종주국인 미국의) ‘힘에 대한 선망’을 신앙으로 오인한 결과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신앙은 사실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북미와 독일에서 각각 출간된 두 권의 문제작 클라우스 벵스트의 󰡔로마의 평화―예수와 초대 그리스도교의 평화 인식과 경험󰡕 (한국신학연구소, 1994)와 리차드 호슬리의 󰡔예수와 제국―하느님나라와 신세계 무질서󰡕 (한국기독교연구소, 2004)는 이 주제에 관해 가장 돋보이는 저술에 속한다.
은 팍스아메리카나와 팍스로마나가 담론 구조상 등가물이라는 점을 논증함으로써 힘을 숭배하는 무례함의 신앙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를 보였다. 특히 리처드 호슬리는 미국판 힘의 종교인 팍스아메리카나가 형성되는 과정이 미국적 기독교인 근본주의 신앙의 형성 과정과 긴밀히 맞물리고 있음을 주장한다. 위의 책의 ‘에필로그’ 참조.

나는 다음 절에서 한국의 ‘힘 숭배 신앙’이라 할 수 있는 대형교회 신앙의 뿌리에는 미국식 힘의 종교인 근본주의 신앙의 이식과정에서(특히 해방 전후기) 식민지적 무의식으로 고착화된 ‘부적절한 모방’ 호미 바바는 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방식으로 추구된 ‘모방’ 전략이 식민지 피지배자들에게서 굴절되면서 지배전략을 교란시키는 탈식민주의적 효과를 설명하는 개념으로―'적절한 모방(mimicry)'에 대비되는―‘부적절한 모방(mockery)’이라는 용어를 고안해낸다. 그런데 고모리 요이치는 일본이 제국주의 서구에 대한 부적절한 모방의 결과 또 다른 제국주의 세력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고 주장한다(󰡔포스트콜로니얼󰡕 <삼인, 2002> 참조). 나는 고모리 요이치에 의존하여 이 용어를 쓰고 있다.
이 있었음을 말하고자 한다. 이러한 부적절한 모방의 결과, 한국적 근본주의 신앙은 은연중에 미국적 이상과 하느님 나라의 이상을 동일시하며, 나아가 내・외부에서 타자화된 대상에 대한 식민화를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또 하나의 제국주의적 신앙의 심성적 틀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2. 한국개신교의 미국주의, 그 심성사적 배경(식민지시대)

구한말과 식민지시대에 개신교는 선교사들의 압도적인 영향력 아래 있었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변동이 급속하던 시절에 가족의 생명이나 재산을 보호하거나 신분 상승을 위한 근대적 자산을 획득하는 데 보다 유리한 조건을 얻고자 하는 삶의 전략으로 많은 사람들은 선교사들의 우산 속으로 자발적으로 들어갔고 그들의 ‘법’에 순응하였던 것이다. 김상태, 「평안도 기독교 세력과 친미엘리트의 형성」, 󰡔역사비평󰡕 45 (1998 겨울) 참조.
한데 선교사들의 절대다수가 미국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 개신교는 출발부터 미국 기독교에 대한 의존성이 매우 높은 집단이었다. 특히 전체 선교사들의 과반수에 달하는 미국 북장로회 출신 선교사들의 신학적 성향은 본국 교회보다 훨씬 전투적인 근본주의적 경향을 띠었다는 점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1929년 미국 북장로회는 프린스턴 신학 세미너리의 교수로서 반근대주의적(이고 인종주의적)인 전투적 근본주의 신학운동을 주도했던 메이천(J.G. Machen)을 제명했다. 그런데 조선에 파견된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들은 1938년 조선장로교 총회에서 이를 정죄하지 않았다. 또 메이천파 신학자인 박형룡이 일종의 종교재판 심문관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데는 선교사들의 명시적이거나 암묵적인 비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강인철은 이들의 신앙관을 ‘종교적 민족주의’라고 표현한다. 강인철, 󰡔한국기독교회와 국가・시민사회. 1945~1960󰡕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3), 89쪽.
19세기 말 미국 복음주의연맹의 총무였던 스토롱(J. Strong) 목사는 그러한 미국적 선교의 과제를 전 인류의 ‘앵글로색슨화’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흥수, 「교회와 민족・민족주의」, 󰡔기독교사상󰡕 (1990.3).
선교가 신앙적 동일화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여기에는 ‘인종주의적 동일화’가 수반되어 있다는, 잘 알려진 사실이 다시 한번 확인된다. 그런데 이러한 인종적 동일화 담론에는 ‘인종적 타자화’가 내재되어 있다는 점을 주지해야 한다. 호미 바바, 「모방과 인간」, 󰡔문화의 위치󰡕 (소명출판, 2002) 참조.

기독교 구원관 속에는 결코 신성화될 수 없는 존재의 ‘가상적 신성화’라는 관점이 함축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미국적 근본주의 신앙은 결코 인종적으로 동일시될 수 없는 미개한 종족이 포교를 통해 신성한 인종으로 가상적인 변모를 가능케 한다는 확신을 수반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상적’이라는 데 있다. 즉 ‘동일화’는 포교의 주체(선교사)가 대상에게 주는 선물이며, 그 대상은 선교사를 자신보다 개화한 존재로 여기는 순간 ‘개화’라는 옷을 덧입게 되는 것이다. 이때 덧입음이라는 것은 차별화가 내재함으로써 동일화가 수행되는 것을 나타내는 수사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포교 대상은 결코 닮을 수 없다는 인식 속에서 선교사를 선망하며 모방한다. 이렇게 ‘식민지적 무의식’은 선교 담론 속에 내재화되며, 그 속에는 인종주의가 작동한다. 요컨대 기독교적 구원관과 서구의 인종주의는 담론구조상 등가물이며, 미국의 근본주의 속에는 기독교 신학에 대한 인종주의적 재해석이 포함되어있는 것이다. 한국 근본주의 신학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전투적 근본주의자인 J. G. 메이천도 예외 없이 인종주의적 편견을 갖고 있었다. 죠지 마르스텐, 󰡔미국의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이해󰡕 (성광문화사, 1998), 226쪽.

조선에서 미국계 선교사들의 통제는 매우 철저했다. 특히 종교 엘리트 집단인 목회자 형성 메커니즘은 철저하리만큼 선교사들에 의해 장악되어있었다. 재정은 물론이고, 교수임용, 교과내용, 학사행정 등에까지 절대적인 권한이 선교사들에게 위임되어있는 형편이었다. 선교사들보다 더욱 선교사적인, 아니 보다 더 완고한 신앙을 대표한 박형룡은 1930년대에 󰡔신학지남󰡕(평양신학교 신학논문집)에 기고된 김재준의 논문들을 사상 검진하면서 그의 주장에 이른바 자유주의적 색채가 잘 드러나지 않는 것(즉 용이주도하게 숨겨야 했던 것)은 선교사들의 사상통제가 그만큼 심했기 때문이라고 진술한다. 장동민, 「1930~1950년대 한국장로교회에서의 소위 ‘자유주의’ 해석의 문제―송창근・김재준의 신학을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와 역사󰡕 6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7), 194쪽.
게다가 종교재판을 통해 담론상의 이질적인 것들을 지속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조선 기독교에 대한 그들의 장악력은 넘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주체 중심적인 교회구조는 내부의 동조 없이는 불가능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식민지적 무의식은 피선교국 엘리트들로 하여금 열정적으로 선교사들을 모방하게끔 한다. 아니 오히려 더욱 ‘순수한 동일시’를 열망하게 한다. 이 점에서 메이천파들의 정결주의는 가히 편집증적이다. 이른바 ‘창세기 모세 저작 부인 사건’, ‘아빙돈 성경 주석 사건’ 감리교 선교 50주년을 기념하여 유형기 목사의 책임 편집으로 번역 출간한 아빙돈 단권 주석서를 박형룡이 근대비평을 사용한 책이라고 정죄함으로써 장로회 총회가 이를 문제시하고 번역자들에게 공개사과를 요구한 사건.
등 근대 신학적 시선으로 볼 때는 논란할 가치도 없는 것들을 정죄하고 추방하는 사건의 주역은 메이천파 조선 엘리트들이었으며, 또 교회에서 여권(女權) 문제 같은 근대적 상식 또한 치리와 배제의 대상이 된 것도 바로 이들의 광적인 복고적 순수주의에 대한 선망과 모방의 산물이었다. 조선 기독교의 메이천 파 수장인 박형룡은, 당시 메이천 파의 본거지였던 미국의 프린스턴 신학 세미너리에서도 부분적으로 허용하고 있던 근대비평 방법에 대해 전면적으로 거부하면서, 자신에 의해 근대주의적 신학을 수용했다는 혐의를 받는 이들을 가차 없이 정죄했다. 심지어 박형룡 자신조차 유학 시절 프린스턴 신학 세미너리에 제출한 논문에서도 근대비평을 부분적으로 포용했다. 장동민, 위의 논문, 194~202쪽 참조.
근본주의적 신앙의 모방 행위는 이와 같이 모방 대상을 과도하게 흉내내게 마련이며, 더욱 전투적인 성향을 드러낼수록 선교사들로부터 신임을 받았다.
이런 사정은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지속적으로 협력해왔던 선교사 중심적인 조선 주류기독교가 신사참배 건으로 당국과 불화하고 선교사들이 추방되는 사태에 직면해서도, 선교사 중심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신앙태도가 별반 변화되지 않았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신사 참배’는 근본주의 일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조선 기독교에서 엄청난 사건이었다. 근본주의적 신앙의 시선에서 신사 참배란 논란의 여지없이 종교적 정결에 치명적인 흠집을 내는 것이었다. 전시동원체제로 치닫던 1930년대 후반 정세에서 식민지 당국과 조선 기독교는 서로 막다른 길에서 마주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일로 인해 물적으로나 심성적으로 의존해왔던 선교사들이 강제 추방되고, 적지 않은 조선의 엘리트들이 실형에 처해졌다. 투옥된 70여 명 가운데 20여 명만이 감옥문을 살아서 걸어 나올 수 있었다니, 그들이 겪은 고통이 어떠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 그에 못지않게 고통스러운 것은 근본주의적 신앙으로 무장한 대다수 기도교도들의 상처였다. 근본주의적 신앙을 포기할 수도 없지만, 대다수는 자기 신앙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그것을 허용해야 했다. 그런데 그것은 아프다고 말할 수 없는 상처였다. 오직 말할 수 있는 자는 목숨을 각오하고 저항한 이들뿐이다. 근본주의 신앙은 이런 상황에서 타협한 자들에게 고통을 표현할 언어를 제공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언어를 빼앗긴 상처는 트라우마로 남으며, 트라우마는 기억의 상실을 낳는다. 고통을 회피하려는 무의식의 언어인 망각은 고통을 다른 것으로 치환함으로써 새로운 기억의 구성에 개입한다. 그렇지 않으면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같은 고통중독성 병증으로 나타나고야 말 것이다. 한데 문제는 트라우마에 의한 치환된 기억은 많은 경우 ‘적을 생산’함으로써, 그리하여 그들에게 고통을 전가함으로써 자신의 고통을 해소한다는 데 있다. 내가 보기에 해방 이후 한국 기독교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서 바로 이 점은 매우 중요한 심성사적 배경이 된다.


3. 해방 후 한국기독교의 미국주의―부적절한 모방으로서의 식민지적 무의식

일제 말기 조선 기독교의 주류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서북지역의 기독교였다. 전체 개신교 신자의 60% 정도가 평안도와 황해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선교사들의 지역분할 선교정책인 ‘네비우스 정책’에 따라 이 지역은 장로교 지역에 속하였다. 따라서 서북지역의 장로교회가 당시 한국 기독교의 주류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전투적 근본주의가 가장 극성스러웠던 지역 또한 서북지역이었다.
그런데 신사 참배 문제로 선교사들이 추방되고, 1938년 근본주의의 아성인 평양신학교가 무기휴교에 들어가고, 그 이론적 지주인 박형룡 등이 만주로 망명하게 되자, 형식상 서북 중심적 기독교는 무너진 듯이 보였다. 이 틈에 1939년 서울에서 건립된 조선신학교는 근본주의 신학과 선교사들에게서 벗어나 현대적이고 자주적인 신학과 교회의 견인차 역할을 할 것처럼 보였다.
이 학교의 건립에 핵심 역할을 한 김재준은 5개조로 된 일종의 ‘신학교육 매니페스토’를 발표하였는데, 󰡔한신대학 50년사󰡕 (한신대출판부, 1990), 21~22쪽.
거기에는 근대적 신학을 여과 없이 소개하고 교수가 학생의 사상을 억압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학문의 자유’에 관한 신념이 들어있다. 나아가 “분쟁과 증오”를 일삼는 종교재판식의 감성을 조장하는 신학이 아닌 “신앙과 덕성에 활력을 주는 신학”을 추구한다는 내용도 담겨있다. 이것은 논리와 의사소통보다 힘과 권력으로 사고를 통제하는 미국계 선교사와 근본주의 신학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이것은 필경 그 자신은 인식하지 못했겠지만 그 속에 조선 기독교도들의 심성에 내장된 식민주의적 무의식을 향한 우려가 내포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해방 직후부터 표면화된 선교사와 근본주의적 신학의 반격은 한국 기독교의 주축은 여전히 서북‘식’의 기독교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증한다. 여기서 서북‘식’ 기독교라는 표현을 쓴 것은 식민지시대부터 이미 그러한 신학이 초지역적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1947년에 비서북 출신이 다수인 조선신학교 학생들이 먼저 김재준의 신학교육 이념에 문제를 제기하여 총회에 진정서를 낸 것은 그릴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곧바로 서북 출신 메이천파가 주축이 된 종교재판이 사태를 이어갔다.
북한 지역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충돌한 후 대거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도들이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38선 이남지역에서 기독교의 헤게모니 세력이 될 수 있었는지, 나아가 남한 사회 전체를 주도하는 세력의 하나가 될 수 있었는지 이해하는 데는, 이제까지 이야기한 식민지시대부터 고착화된 선교사 중심적인 서북식 기독교의 신앙적 헤게모니라는 배후를 염두에 두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에 앞장의 말미에서 언급한 신사 참배의 트라우마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정결주의적 근본주의 신앙과 신사 참배 강압에 승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경험 간의 모순을 체험해야 했던 범서북 기독교 신자들의 트라우마는 해방 직후 월남하기까지 서북 출신 기독교도들이 좌파 정권에 의해 탄압받았던 경험을 마치 자신의 경험처럼 일반화함으로써 고통스러운 기억을 전이시킬 출구를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우면서도 말할 수 없었던 기억을 다른 이들에 대한 증오라는 강력한 체면 효과를 지닌 기억으로 치환함으로써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전이시키는 무의식적 작용이 그들의 트라우마를 ‘자가 치료’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신사 참배 거부 건으로 투옥되었다가 해방 직후 출옥하게 된 이들을 지칭하는 ‘출옥 성도’라는 이름의 십자군들은 그러한 기억의 치환을 위한 적절한 계기를 제공해준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극한의 고통을 감내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배타적인 도덕적 정당성을 담지한 존재로서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그들의 거부 행위의 의미에 대한 모든 토론의 중단을 의미한다. 친일 잔재의 청산이라는 국면적 대의를 업고서 그들과 그 지지자들은 식민지시대에 모든 교회는 죽었다고 선언하고 고강도의 교계 정화를 부르짖는다. 이른바 ‘교회 재건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상황은 모든 기독교도들이 이 재건운동이 제기한 게임의 룰 속에 말려들지 않을 수 없는 근거를 설명해준다.
그동안 잘 은폐되어왔던 트라우마가 바야흐로 발광할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출옥성도들의 광적인 활동으로 말미암아 무의식 속에 은폐되어온 상처가 도졌다. 근본주의적 신앙을 가진 자들로서는 피할 수 없었던 신사 참배자라는 자학적 오명을 벗기 위해선 ‘악마’의 등장이 필요하다. 자신들의 배신이 얼치기 악마의 모습이라면, 그것과는 비할 수 없는 진정한 악마, ‘악의 축’이 필요했다. 그 무시무시한 괴물을 향해 모든 ‘성도’들이 단결하여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악마 말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운동에서 ‘이스카리옷 유다’의 출현이나 영국 빅토리아조 시대의 드라큘라의 출현 등 역사 속에서 나타난 ‘절대 악마’ 담론은 바로 악마를 요구했던 그 시대의 고통에 대한 기억의 치환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 시기에 김재준 탄핵 등 숱한 이단 심판들이 재개된 것은 악마에 대한 시대적 열망과 부합한다. 그러나 진정한 악마는 앞서 말한 것처럼, 서북 출신 기독교도들의 체험을 자기 체험으로 내재화함으로써 비로소 출현한다. ‘반공’은 이 시기 근본주의적 기독교의 상흔에 대한 자가치료의 필요에서 요청된 무의식적 기억의 치환 현상의 결과인 것이다. 해방정국에서 많은 전투적 반공단체들의 면면을 보면 개신교도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두드러진다. 또 기독청년 면려회, 서북연합회, 영락교회 청년회 및 대학생회, 서북학생총연맹 등 전투적 반공주의적인 성향의 개신교 단체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많은 경우 당시의 반공적 테러리즘에 적극적으로 관여되어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반공과 근본주의 신앙 간의 ‘행복한 만남’을 위해 또 한 가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미국의 등장이다. 근본주의적인 조선의 기독교도들이 동경해마지 않던 선교사들의 모국인 미국 군대가 한반도에 진군한 것이다.
일제 식민지 정부를 대체한 미 군정청은 자신의 가장 우호적인 협력자를 기독교에서 찾았음이 분명하다. 해방 당시 미국인과의 접촉을 경험했던 거의 유일한 집단은 기독교, 특히 개신교 신자들이었다. 또 적지 않은 이들이 선교사들에 힘입어 미국으로 유학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그들은 영어를 할 줄 아는 극소수 사람들에 속했으며, 더구나 미국에 가장 우호적인 집단 또한 개신교 신자였기 때문이다. 당시 다시 내한한 선교사들은 이들을 군정 당국에 소개해주었다. 강인철에 의하면, 강인철, 「한국 개신교교회의 정치사회적 성격에 관한 연구. 1945~1960」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4)의 ‘개신교 신자의 국가기구 내 분포’ 참조.
1945년 10월 5일 미 군정청이 임명한 한국인 행정관 11명 중 6명(목사 3명)이 개신교 신자였다고 한다. 또 1946년 12월부터 1947년 8월까지 군정청에 의해 임명된 한국인 고위관료 가운데 50% 이상이 개신교 신자였다. 지방 고위 공직자들의 경우 비율(30% 이상)은 상당히 줄지만 인구대비 기독교 신자의 비율(0.52%)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았다. 한편 김상태는 다른 관료들 외에 통역 요원에 관한 정보를 약술하고 있는데, 흥미롭게도 그들은 국내 정치세력의 동향을 군정 당국에 소개해 주면서 좌파계열을 폄하하고 우파의 역할을 실제보다 부풀리곤 했다고 한다. 김상태, 「평안도 기독교 세력과 친미엘리트의 형성」, 198쪽.
아마도 그렇다면 식민지시대 일제의 부역자였던 중하급 관료들을 군정 당국에 소개한 주요 장본인들이 기독교도였다고 추론하는 것이 그리 무리한 상상은 아닐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과정은 한국 기독교와 미국의 상호신뢰 관계를 한층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그것은 미시적 차원에서는 쌍방향적이었겠지만, 거시적으로는 일방향적 소통이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서 미국은 하느님 나라의 역사적 현실태에 가까운 것으로 기억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양의 한 목사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 소식 이후 미군의 국내 진군을 기다리면서 그들을 ‘구원의 천사 미군’이라고 불렀다. 반면 바라지 않던 소련군이 진주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낙망감과 항전의 마음을 가다듬는다. 이것은 미국과 소련을 경험하기 전에 이미 이 두 나라에 대한 선망과 적대가 신앙관으로 고착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상태, 위의 논문, 195쪽에 인용된 황은규, 「8.15 해방과 평양의 교계」, 󰡔기독교계󰡕 창간호 (1957.8)의 글 참조.
요컨대 한반도에서 미국의 시선은 한국 기독교의 시선이었고, 저들의 위기는 곧 자신의 위기였다. 저들이 추구하는 세상에 대한 열망 또한 자신들의 것으로 내재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미국계 선교사들에 대한 무의식적 식민의식은 미군정으로 전이되고, 선교사들의 신앙적 메시지는 군정 당국의 사회적 메시지로 환원될 수 있었다. 그것은 신앙의 하느님 나라와 현실의 유토피아로서 미국이라는 상상적 동일시가 그들의 신앙구조 속에 의미화의 코드로서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파간의 반목과 갈등 그리고 분열이 가속화되던 시절, 반공과 친미라는 두 개의 고리는 기독교 각 교파간의 거대한 심성적 연결망이었다. 1949년 당시 최대 교파이던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가 연합하여 ‘합동찬송가’를 만든 것은 그러한 차이 속의 공감이라는 또 다른 예이다. 여기에는 미국 기독교인들이 자기 정체성의 상징으로 여기는, 백인 우월주의가 들어있는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를 포함하여, 미국 대부흥운동기의 수많은 복음성가들이 대대적으로 수록된다. 전체 수록곡의 60%가 미국 복음성가에서 유래하였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를 결속시키는 신앙적 정체성이 어떤 양상을 지녔는지를 읽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정경(正經, Canon)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을 가진 근본주의적 신자들에게 근본주의적 신앙운동의 가장 핵심적 주장은 ‘성경의 무오설’에 대한 확신이었으며, 그것은 근대 신학의 역사비평적 성서 해석에 대한 저항의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다. 그것은 ‘성서(Scriptura)’를 단일 배타적 ‘정경(Canon)’으로 받아들인 고대 유대교와 기독교의 편집증의 근대적 버전에 속한다. ‘정경’의 신앙사와 근대성에 관하여는 김진호, 「탈정전적 성서 읽기의 모색」, 󰡔반신학의 미소󰡕 (삼인, 2001) 참조.
‘정통 찬송’이라는 집착은 정경 못지않은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근대적 비평을 둘러싼 종교재판들처럼 찬송가의 채택 문제도 식민지 시대부터 지속적인 배제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 이것은 한국 개신교가 당시 한국 사회에서 가장 미국적인 감성의 공간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위에서 ‘출옥성도’ 중심의 교회 재건운동이 촉매제가 되어 신사 참배의 트라우마가 공산주의라는 신앙적 악마를 발명하게 됨으로써 거대한 ‘신앙적 공통감각’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말했는데, 실은 한국 교회사를 다루는 텍스트들은 한결같이 이 시기를 각 기독교 세력간의 분열과 반목의 시대로 기억한다. 게다가 1945년 해방 이후 사회적․이념적 갈등의 폭발적 양상에서 시작되어 1950년에 전면전으로 발전한 ‘한국전쟁’의 비극적 체험을 겪어내면서, 극도의 불안과 공포 상황에서 신비주의적 소종파 운동들이 크게 확산되었다. 물론 수많은 기독교계 소종파들의 탄생도 이 시기에 있었고, 그들은 기성의 제도종교들을 격렬하게 비판하면서 탄생했고 성장했다. 김흥수, 󰡔한국전쟁과 기복신앙확산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9) 참조.
그럼에도 내가 위에서 한국 기독교의 거대한 동질성에 대해 논한 것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 요소들의 네트워크를 말하기 위함이다.
신사 참배의 트라우마를 자극한 출옥성도들의 활동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공산주의라는 악마의 발명 그리고 이러한 악마의 발명을 가능케 했던 미군정 당국과의 긴밀한 유대라는 네트워크의 배후에는 원인이자 결과이고, 과정을 가능케 한 요소인 근본주의 신앙이 놓여있다. 이것은 선교사들, 특히 미국 선교사들의 신앙이었다. 그런데 그들을 모방하려는 식민지적 무의식은 흰 무명 바지저고리를 입은 조선 사람이 서양 중절모와 선글라스를 낀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부적절한 모방’을 초래했다. 한국적 근본주의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은 미국주의를 미국인보다 더욱 호들갑스럽게 추구하고 모방하려는 신앙적 욕망을 낳았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이 힘의 숭배 신앙이 교회의 제도 속에 깊숙이 스며들게 된 것이다.


4. 미국주의로서의 힘 숭배 신앙을 넘어서

한국의 대표적 대형 교회의 담임목사이고 ‘한기총’의 임원인 한 개신교 목사는 서울시청 앞 광장 한가운데서 친미 집회를 열면서, 10만이나 되는 한국 개신교 신자들 앞에서 영어로 기도했다. 근본주의적 신앙관에 따르면 기도는 하느님과 기도자간의 내밀한 대화, 아니 청탁이다. 그런데 개신교는 내밀한 기도를 공중 앞에서 하는 신앙제도를 발전시켰다. 물론 실상은 기도자와 청중 그리고 신과의 3자 대화라고 하는 게 타당하다. 그런데 그는 영어로 기도했다. 10만의 청중보다 보지도 듣지도 않을 태평양 건너, 그리고 미국을 횡단하여 끝에 있는 백악관의 누군가와 더 내밀한 관계를 맺고 싶은 욕망을 은연중에 드러낸 셈이다. 그런 심성의 사람이라면, 어쩌면 신이 영어 기도를 더 잘 들어준다고, 적어도 무의식적으로는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신은 미국인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는지도......
교회학교에서 어린아이들에서 하느님을 그리라고 하면 대개 흰 수염이 길게 난 할아버지를 그린다. 그들에게 신은 남성이고 노년의 사람이다. 신앙적 무의식은 이렇게 여성과 연소자를 내부식민지화하는 보수주의적 인식론을 동반한다. 그리고 아마도 위의 목사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느님은 미국 시민, 아니 이 세계의 권력자와 오버랩되어 기억될지도 모른다.
최근 이러한 식민화된 신앙은 많은 이들에게 조롱 대상이 되고 있다. 민족주의는 그것을 읽어내는 감수성을 강화시켰다. 그런데 후발 대형 교회적 신앙에서 친미성은 노골적이지 않다. 그들의 맹목적이지 않으려는 균형 잡힌 태도는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그들은 민족주의적 감시의 망을 무사히 투과시킨 신앙적 미학을 제도화하는 데 성공하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 이들의 행보는, 선발대형교회의 그것과는 달리, 사회적으로 적지 않은 지지를 얻고 있다. 대중을 배려하는 듯한 신앙의 제도가 효력을 발휘한 덕이다.
그런데 ‘기윤실’이나 ‘기독교사회책임’ 등 기독교 NGO의 행보에서 보이는 것은, 대중과 대화하기보다 여전히 대중을 계도하는 훈장의 포즈를 유지하려 한다는 것이다. 다만 회초리(심판 담론)로 위협하는 대신, 너그러운 훈장의 모습이 외부로 드러나고 있는 것만 다를 뿐이다. 문제는 이들의 의제가 무수한 소수자를 타자화함으로써 실현될 수 있는 담론이라는 점에 있다. 여성을 포함한 성적 소수자에 대해 가부장적 가족주의의 도덕을 판단의 잣대로 내세우며, 낙태 문제를 고려할 때 계층이나 성적 평등의 문제를 간과한다.
대중에 대해 배려하지 않는 태도 속에서 그들은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의제 형성 능력과 실행 능력을 통해 그것들을 위로부터 제도화하려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기독교사회책임’의 국면적 지향점은 양대 보수정당의 합리적 보수주의를 연대하게 하여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시킬 대통령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1980년대 이후 미국의 근본주의적 기독교도들의 정치세력화를 흉내낸 것에 다름 아니다.
비록 국제정치 등에서 노골적으로 친미적 태도를 취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이러한 민족주의적 신앙은 미국의 근본주의적 신앙의 부적절한 흉내내기, 그 무의식의 식민화를 보여준다. 아래를 배려하기보다 위를 선망하고 모방하는 것, 그리고 아래를 계도하고 자신을 모방하게 하려는 것. 이것은 그들의 신앙이 곧 힘에 대한 신앙임을 의미한다.
그들의 힘의 신앙은 바로 근본주의 속에 내장된 미국주의의 소산이고, 그들의 그 모방은, 아니 그 부적절한 모방은 남아시아 해일에 대한 한 목사의 발언처럼, 내․외부의 소수자에 대한 식민화를 욕망하는 신앙의 내적 메커니즘이다. 이제 미국은 노골적 친미성으로 표현되기보다는 힘의 숭배 신앙으로 모방된다. 그것은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타자에게 힘의 주체가 되고 싶어 하는 ‘부적절한 모방’, 바로 그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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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10-15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 파란 장미도 올렸어요^^
 

장송(葬送)


히라노 게이치로 장편소설 | 양윤옥 옮김
문학동네 | 2005년 10월 24일 발행예정


『일식』 『달』을 잇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삼부작 완결편!

1999년, 당시 만 23세의 어린 나이에 첫 소설 『일식』으로 일본 최고 권위의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며 일본 문단의 새로운 태양으로 떠오른 히라노 게이치로.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중세 유럽의 신학과 연금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 그리고 작품에 걸맞은 장중한 의고체 문장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의 치밀함이었다. 그리고 두번째 소설 『달』 이후 오랜 침묵에 싸여 있던 그가 내놓은 다음 작품은 200자 원고지 약 5500매에 달하는 초(超)대작 『장송』(전2권). 번역에 걸린 시간까지 합해, 우리에게는 근 육 년 만에 만나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신작이다.

19세기, 격동하는 파리를 무대로 되살아나는 천재 예술가들의 숨결

소설의 배경은 1848년 2월혁명을 전후한 프랑스 파리. 그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쇼팽과 들라크루아 두 주인공과 준(準) 주인공인 조르주 상드를 중심으로 예술가들의 삶과 고뇌, 사랑과 죽음이 장려하게 펼쳐진다.
『장송』의 첫머리에 놓이는 것은 1849년 10월 30일 마들렌 사원에서 거행된 쇼팽의 장례식 풍경. 장례식장 앞에서 벌어진 군중들의 소란, 쇼팽의 죽음에 비통해하는 들라크루아를 비롯한 지인들의 심경 등이 장중하고도 절제된 문장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소설은 1846년 11월 12일, 쇼팽이 연인 조르주 상드와 함께 지내던 노앙을 떠나 파리로 돌아온 날로부터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3년여의 시간을 촘촘하게 재구성한다. 심각한 병에 시달리면서도 고국 폴란드에 대한 향수를 안고 예술가의 길을 걸어가는 쇼팽, 하원 도서관의 거대한 천장화를 완성시키고 화단에서 확고한 위치를 쌓아가는 들라크루아, 쇼팽의 사랑을 저버리고 혁명의 불길에 몸을 던지는 조르주 상드의 인생과 예술이 소설의 큰 축을 이룬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소설을 쓰기 전부터 쇼팽의 전기와 들라크루아의 일기 등을 읽고 그들의 인생과 예술론에 크게 이끌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 작품을 위해 일 년 가까이 방대한 관련자료를 섭렵하고(책의 말미에는 그가 참고한 30여 권의 참고문헌 목록이 덧붙어 있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파리와 런던, 스코틀랜드 등을 직접 찾아다니며 책에 등장하는 작품들을 실제로 관람하고 자료를 수집하는 등 치밀한 준비를 거쳤고, 실제 집필에만도 삼 년 가까운 시간을 들였다. 그 결과 『장송』은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재현하는 것을 넘어 쇼팽과 들라크루아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 섬세한 마음의 움직임까지 모두 담아낸 치밀하고 방대한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보편적이고 종합적인 ‘소설’

『장송』은 19세기 중반 프랑스를 무대로 한 일종의 역사소설이자, 낭만주의 예술철학의 정수를 담은 예술가소설이며, 쇼팽과 조르주 상드의 관계의 미묘한 엇갈림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심리소설, 또 당시 파리의 살롱을 무대로 한 풍속소설이기도 하다. 그 모든 측면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치밀하게 짜맞추어져 『장송』이라는 작품 전체를 구성한다. 게다가 곳곳에서 등장인물들의 대화와 독백의 형식을 빌려 표현되는 예술과 역사에 대한 작가의 깊은 사색의 정수,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 정묘한 묘사는 소설읽기 자체의 흥미를 끊임없이 자극한다.
예컨대 작품 곳곳에서, 세면기에 어른거리는 객혈의 붉은빛에 대한 쇼팽의 회상과 눈 내린 파리 정경에 대한 묘사, 예술에서 감성과 지성의 문제에 대한 격렬하고도 풍부한 토론, 쇼팽과 상드, 혹은 들라크루아와 그의 연인 포르제 남작 부인 사이의 조심스럽고도 격정적인 대화, 한겨울 바닷가의 파도에 의탁해 펼쳐지는 들라크루아의 긴 사색 등은 그 절제된 표현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읽는 이를 흥분시키고야 만다.
특히 『장송』의 백미라고 할 예술작품 자체의 언어화는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1부 마지막 장에서는 자신이 완성한 천장화를 바라보는 들라크루아의 시선을 빌려 하원 도서관 천장화 구석구석에 대한 치밀한 묘사가 펼쳐지고, 그에 응답하듯 2부 첫머리에는 쇼팽의 연주회 장면이, 그것만으로도 한 권의 책이 될 정도의 분량으로, 그 음 하나하나를 되살려내듯 그려진다. 예술을 언어로 표현한다는, 언어의 근본적인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끝간 데 없이 밀어붙이는 과감하고 놀라운 장면이다.

19세기 정통소설의 정점을 딛고 미래를 내다보다

『장송』에서 히라노 게이치로는 19세기 유럽의 인물과 거리를 그리기 위해 의식적으로 발자크와 플로베르 같은 19세기의 작가들의 방법론을 철저하게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여, 치밀한 정경 묘사와 심리 묘사를 기초로 하는 정통적인 근대소설의 수법을 도입한다.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자신의, 그리고 현대의 새로운 방법론을 찾아내려 한다.
“그 스타일로 소설을 씀으로써, 소설의 긴 역사를 나 자신의 작가로서의 역사로 소화하려 했습니다. 마치 음악이나 미술을 공부하는 사람이 화성학과 데생 공부를 거쳐 그 전통과 맞서듯이요. 그걸 위해서는 소설의 스타일뿐 아니라, 제재도 19세기 프랑스로 둘 필요가 있었습니다.”
덕분에 『장송』의 문체는 이전의 『일식』이나 『달』과는 또 다른 독자적인 방법적 성취를 이루어냈다. 품격을 잃지 않는 고풍적인 문체이면서도 『일식』과 같은 고답적인 의고체가 아닌, 단정한 번역소설과도 같은 느낌을 주는 문장이다. 그렇게 한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문체를 자유자재로 변화시키는 철저함에 대해, 그러나 그는 “작품이 그리는 세계에 어울리는 문체를 썼을 뿐, 일상 회화에서도 상대방에 따라 말투가 달라지는 것처럼 별다른 고민 없이 썼다”고 가볍게 답할 뿐이다.

왜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인가

히라노 게이치로는 『장송』을 『일식』 『달』과 함께 삼부작 중 하나로 구상했다. 이 삼부작의 일관된 관심은 ‘전환기에 해당하는 시대와 장소를 그리는 것’. 『일식』의 배경이 중세에서 르네상스로의 전환기였고 『달』의 배경이 일본의 근대화가 시작되는 시기였던 것처럼, 『장송』의 시대 배경이 되는 1840년대 후반의 프랑스는 2월혁명을 통해 입헌군주제에서 공화제로의 이행이 이루어진 시기이자, 낭만주의 예술이 꽃을 피우고 보들레르가 거기에서 새로운 ‘현대성’을 발견해낸 전환기적인 시기였다. 그 시기는 곧 현대를 사고할 때 반드시 도달하게 되는 일종의 원점이기도 하다. 예컨대 그가 작품 속 인물들의 입을 빌려 당시의 예술이 처한 곤란에 대해 언급할 때, 그 논의는 대중의 취향과 시장의 논리에 복속되어가는 현재의 상황과 그대로 겹친다. 그가 회고적인 취향이 아니라 가장 첨예한 현대의 문제와 다른 방향에서 맞서기 위해 계획적으로 그 시기를 배경으로 삼았음을 증명해주는 대목이다. 말하자면 히라노 게이치로는 신에서 인간으로, 전통에서 현대로 이행해가는 ‘유럽 근대화의 하나의 고비’라고 할 그 시기를 전략적으로 선택함으로써 오늘날의 문제를 근원에서부터 사고하고자 하는 것이다.

히라노 게이치로 문학의 한 정점

『장송』은 쇼팽과 들라크루아의 내면에 대한 정치한 기록이자 히라노 개인의 총체적인 예술론이며, 또 현대소설에 대한 메타적인 방법론, 그리고 무엇보다 한 편의 종합적인 이상으로서의 ‘소설’이다. 그것은 쇼팽과 들라크루아가 각각 음악과 회화로써 도달하고자 했던 그 지점을 그들에 대한 ‘언어’를 도구로 하여 도달하는 것이며, 나아가 그 너머에 있는 지금-여기의 문학과 앞으로의 히라노 게이치로 자신의 문학을 조망하는 것이다.
그는 『장송』 이후 현대를 무대로 전쟁, 가족, 죽음, 근대화, 테크놀로지 등 여러 가지 테마를 파격적인 형식 실험을 통해 파헤치는 일련의 작품들을 발표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장송』의 출간은, 삼부작의 완결이라기보다 이어지는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예고로서의 의미를 가지는지도 모른다.


* 출간 예정일 : 2005.10.24

http://www.munhak.com/_renewal/_index.php?munhakdongne=board.php&dbbase=new&page=1&numerals=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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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우울

히라노 게이치로 산문집 | 염은주 옮김
문학동네 | 2005년 10월 24일 발행예정


일본 신세기문학의 기수, 히라노 게이치로 첫 산문집

교토 대학 재학중 사상 최연소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며 일본문학의 새로운 태양으로 떠오른 히라노 게이치로, 그의 첫 산문집. 로봇 강아지, 사이비 종교, 낙서, 고질라, 쇼핑, 지진, 광우병, 휴대전화까지, 주변의 일상과 사건에서 얻은 착상을 그만의 냉철한 직관과 분방한 상상력으로 풀어나간다. 소설가이기 이전에 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로서의 히라노 게이치로를 만나는 흥미로운 기회.

분방한 상상력, 문명의 그늘을 꿰뚫어보는 혜안

인공 애완동물이 살아 있는 생물 그 자체를 모방한 게 아니라, 소유하면서부터 비로소 애정의 대상이 되는 애완동물을 모방해 만들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혹 창조에 대한 우리 무의식의 두려움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언젠가 우리는 생물 그 자체를 모방해 로봇 동물을 만들고, 애완동물에게 쏟는 것보다 더 보편적인 애정을 로봇 동물에게 쏟게 될지도 모른다.
―본문 중에서

『문명의 우울』은 히라노 게이치로가 한 일간지에 2년간 연재한 에세이를 묶은 책이다. 주로 시사적인 사건과 현상에서 소재를 가져왔지만, 소설가로서 그의 강한 자의식은 저널리즘의 관점과는 차별화되는, 그렇다고 신변잡기적인 한담도 아닌 그만의 고유한 에세이를 만들어냈다. 때문에 책에는 히라노 게이치로 자신의―소설가로서, 또 현대 일본의 젊은이로서―관심과 생각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책 전체를 포괄하는 관심은, 말하자면 현대의 과학기술과 여러 가지 현상 이면에 있는 문명 그 자체의 우울.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에 대한 오마주로 보이기도 하는 제목 ‘문명의 우울’은 그의 관심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로봇 강아지나 인공장기에 대한 그의 논의는 매우 인상적이다. 중세와 19세기와 현대를 자유롭게 오가는 그의 분방한 상상력과 현상의 이면을 꿰뚫어보는 그의 혜안은 이십대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

세상을 보는 그만의 특별한 눈

그렇다고 『문명의 우울』이 『일식』과 『달』의 산문판인 양 복잡하고 난해한 것은 아니다. 글에 담긴 사유의 깊이는 만만치 않지만, 작가 스스로도 연재글인 만큼 자유로운 스타일로 썼다고 밝히고 있는 것처럼 비교적 평이하고 날렵한 문장으로 씌어져 있다. 때로는 가벼운 웃음을 흘리게 하기도 하고, 어린 시절이나 소소한 사생활을 소재로 삼기도 하는 그의 글쓰기는, 『일식』 『달』, 그리고 『장송』의 작가로서 독자들이 가지고 있을 그의 이미지를 긍정적인 의미에서 살짝 ‘배반’해, 마치 똑똑한 옆집 청년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은 편안함을 느끼게도 한다. 말하자면 『문명의 우울』은, 그의 소설과는 전혀 다르게(!) 한번에 끝까지 읽어나갈 수 있으면서도, 그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생각의 여운에 잠기게 하는 빼어난 산문이다.

그의 소설을 읽었다면 반드시 참조할 만한 텍스트

한 가지 덧붙여, 『문명의 우울』에 반영되어 있는 작가 자신의 일관된 관심과 주제는 이 산문집을 『일식』 『달』 『장송』과 같은 그의 작품들의 곁에 놓이는 이른바 ‘파라텍스트’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특히나 이 책에 실린 글들이 그가 근작 『장송』을 집필하는 중에 씌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책에서 그가 펼쳐나간 사유들이 그의 작품에 어떻게 녹아들었는지를 찾아보는 것도 매우 즐거운 경험이 될 만하다. 일단 제목부터가 그렇다.

이 글의 연재와 함께 19세기 중엽의 유럽을 무대로 한 장편소설을 집필하고 있어서 진보와 문명이라는 당시 사회를 천천히 뒤덮던 매우 강력한 관념과 세기병으로서의 우울과의 관련성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것도 ‘문명의 우울’이라는 제목을 고른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후기’ 중에서

또 책의 한 부분에서, 열쇠의 물질성과 그것이 감추고 있는 비밀과의 관련성에 대한 독특하고도 치밀한 논의를 읽은 독자라면, 예컨대 『장송』에서 심상하게 스쳐가는 이런 한 구절,

……그것은 열쇠처럼 확실하게 비밀에 접근하는 수단임을 나타내는 것이며, 또한 열쇠처럼 견고하게 어떠한 복제도 거부하는 것이었다.

라는 비유가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된 것인지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이 그의 꼼꼼한 독자에게만 주어지는 책읽기의 재미가 아닐까. 히라노 게이치로의 팬이라면 한번 도전해볼 만한 일.

목차

장난감과 애완동물 | 가공 기술 | 정체 모를 것 | 나의 현재 위치 | ‘인데도’와 ‘이니까’ | 과학신앙 시대의 인간의 죽음 | 골육론 | 낙서 생각 | 고질라 | 가깝다는 것 | 함께 탄 사람들 | 변덕스러운 쇼핑 | 로봇의 애교 | 천재지변의 신학 | 대량수송 시대의 전염병 | 자물쇠와 열쇠를 둘러싼 이미지 | 꿈의 다이(大)리그 | 모험이라는 퍼포먼스 | 새로운 신체 | 특별한 사람 |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 | 식탁 위의 살벌한 풍경 | 휴대전화의 연애학


* 출간 예정일 : 2005.10.24

http://www.munhak.com/_renewal/_index.php?munhakdongne=board.php&dbbase=new&page=1&numerals=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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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아 2005-10-12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장송>! 정말 기대되는 작품입니다. 기쁘고 반가운 소식이네요. 좋은 소식 고맙습니다.

urblue 2005-10-12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주 기대하고 있습니다. ^^

sudan 2005-10-12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없던 기대도 생길 수 밖에 없겠어요.

2005-10-12 1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출처 : 히피드림~ > 중세 시대, 나의 직업 알아보기~

중세에 태어났다면  나는 어떤 직업을 가지게 되었을까?

이 테스트는 현재 자신의 인성과 기질, 가치관 등을 토대로, 지금보다 모든 것이 훨씬 단순했던 시대였지만, 최소의 사회시스템은 갖추고 있었던 중세 시대로 돌아가서 자신이 가지게 될 지위와 직업을 알아보는 것이다.

http://www.wjthinkbig.com/kingdomality

심심풀이로 해보세요.

 

신의 인성 성향은 ‘백기사(White Knight)’이다. 백기사는 중세에 번성했던 대부분의 왕국에 존재했던 역할이다. 백기사의 전형으로는 돈키호테와 잔 다르크, 론 레인저(Lone Ranger: 미국 TV나 영화 서부극의 주인공) 등을 들 수 있다. 백기사인 당신은 어떤 보상을 기대하고 선행을 행하지는 않는다. 당신이야말로 이 세상의 진정한 ‘기증자’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의 부와 시간 그리고 인생을 타인과 나누는 익명의 자선가이다. 주는 것 자체에서 보상을 찾는 당신은 진실로 그 이상을 바라지 않는다. 당신의 긍정적인 측면은 인정과 동정심이 많고, 타인에게 늘 도움이 되는 영웅적 존재라는 점이다. 부정적인 측면은 충동적으로 결정을 내리기 쉽고, 감정에 이끌려 방향을 잘못 잡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흥미롭게도 당신의 인성 성향은 오늘날의 기업 왕국에도 잘 들어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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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10-10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기사 새롭습니다^^;;; 저는 공학자래요 ㅠ.ㅠ

urblue 2005-10-10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님 글도 봤습니다. ^^

클리오 2005-10-10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다면, '흑기사'는 알고보면 나쁜 사람인가요? ^^;; 흠, 저는 '자애로운 군주'랍니다... ^^

urblue 2005-10-10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님도 자애로운 군주. 이런이런...군주들만 있으면 어쩝니까.

히피드림~ 2005-10-10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 윗 글을 보니 남에게 관대하고 늘 선행을 실천하시는 님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나저나 알라딘에 왠 군주가 이렇게 흔하답니까. urblue님 모셔야 될 주군들이 넘 많으시군여. (썰렁~~)^^;;

sudan 2005-10-11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도 이 테스트 해보려다가 포기했어요. 순위를 매기라는데, 순서 정하는 거 어렵더라구요. 귀찮기도 하고. 이렇게 우유부단하고 게으른 사람은 뭐가 나올까요? 중세시대라 했으니, 혹시... 음유시인?(이런 결과도 있던가. -_-)
적어놓고 보니 음유시인이 중세시대 직업이 맞는건가? 긁적.

urblue 2005-10-11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단님, 음유시인이라...좀 어울릴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님도 공학자 뭐 이런 거 나오는거 아닌가. 흠.

punk님, 에구구, 별로 저한테 맞는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
많은 군주들을 모시기에는 이 몸이 너무 허약하야..큭..

瑚璉 2005-10-11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주가 이리도 많다니... 그럼 도대체 제가 양을 몇마리나 쳐야한다는 말입니까 (-.-;)?

urblue 2005-10-11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양치기란 말이십니까? 오~ 그런 직업도 나오는군요.
전 백기사니까, 제가 먹을 양도 부탁~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