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각국의 사례
1) 브라질 : MST
MST는 엄격하게 말하면 혁명적 조직이라고 할 수 없으며 권력의 장악을 지향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 조직은, 비경작 토지가 사회적 용도를 위해 몰수될 수 있게 보장하도록 헌법을 적절히 개정할 것을 지향하고 있다. 따라서 이 조직은 ‘합법주의적’이면서 또한 직접 행동을 지향한다. 직접 행동의 정치는 민주주의 이데올로기--그리고 헌법의 진보적 대의--와, 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지배계급의 사회-정치적 속박 사이의 간극을 파고든다.
좌파의 부활은 독특한 배경 속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따라서 쉽게 분류될 수 없다. MST는 주로 남-중부 지역에 기반한 일종의 지역적 운동으로부터 출발하여 북부, 북동부, 서부 지역의 농촌에서도 점차 활동을 증대시키고 있는 조직가들을 보유한 하나의 전국적 운동으로 성장했다. 이들의 투쟁은 도시의 노조들이나 교회 부분들로부터도 점차 지지를 얻고 있다. 리우와 사웅 파울로의 대부분의 favelados들이 이들에 대해 존경과 공감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최근 몇 달동안 이들은 대중적 지지의 결집을 촉진하고 동시에 도시 세력들과의 연합을 이루기 위해 각 주의 소도시들 주변에 대한 대규모 토지 점거운동을 조직화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전환했다. 대규모 비경작 단지 내의 심장부에 들어서자마자, 이들은 점증하는 폭력에 직면하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불법 정착자들을 내쫓으려는 지주들에 의해 고용된 약탈 저격수들을 막기 위해 자기방어 위원회를 구성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있다. 이들은 13만 9천 가구 이상을 생산자 협동조합으로 조직했는데, 이들중 일부는 수출용 농작물 재배에 종사하고 있다. 이들은 총 720만 헥타르의 토지를 ‘몰수(expropriate)’했으며 12개 주에 걸쳐 55개의 협동조합을 조직했다. 이들은 880개의 학교를 세워 3만8천명의 아동들을 수용했다. 협동조합의 성공은 빈번히, 새로이 점거운동을 시작한 무토지 농민들에 대한 지원에 참여할 수 있도록 활동가들에게 자유를 부여하며 정부의 몰수 허가와 신용대부를 기다리는 토지 점거자들에게 식량을 제공해주는 역할을 한다. 1995년 7월의 MST대회는 수십만 농민들을 대표하는 5천명 이상의 대의원들을 불러모았다. 각 주지부는 버스들을 대절했고 각자의 식량과 침구를 가져왔다. 산타 카타리나(Santa Catarina)의 지도력 훈련 학교는 80명 가량의 인원을 집단 침실에 수용한다. 그곳에는 아침식사를 위한 빵과 치즈, 커피 등이 있고 냉수 샤워시설과 허름한 교실들이 있다. 그러나 이는 모두 공동으로 사용된다.
오늘날 브라질의 농촌지역은 일종의 화약고이다. 문제는 [단순히] 토지 점거자들을 조직화하는 것이 아니라--수만의 가구들이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으며 MST의 호소에 반응하려 하고 있다--승리를 조직화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토지 점거 이전에 요구되는 정치적 지원, 강제이주에 대항하는 정치적 조직체와 물자--식량, 생활필수품 등등--의 지원이 필요하다. 이러한 지원이 취해진다면 그 사이에 운동은 생산의 재정지원을 놓고 정부와 협상할 수 있을 것이다.
1995년에 MST는 92회의 토지 점거를 주도했다. 1996년 6월까지 120회의 토지 점거가 벌어졌으며 4만 가구로 이루어진 총 168개의 campamento들(농촌 지역 점거집단들)이 정부의 몰수 허가를 기다리고 있다. 대선에서의 패배에 뒤이은 1995년 PT의 우선회는 현재의 토지 점거 공세의 기반을 조성했다. 점거는, 카르두수 대통령이 자신의 소속 당(PSDB)의 반동적 분파뿐만 아니라 우익 지주들의 정당들(PFL, PMDM)과도 연계되어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세계은행과 해외 다국적 기업들에 대한 대통령의 연계로 인해 그는 전략적인 산업들을 민영화하고 수출 농업 부문을 장려하며 우호적인 ‘게임의 법칙’ 아래 브라질에의 대규모 외국인 투자를 고무하는 데 점점 더 깊이 몰두하게 되었다. 공세의 또다른 원인은, PT로부터 독립하여 그 바깥에서 보다 공격적인 정책을 펴자는 MST 투사들의 점증하는 압력이었다. 그들은 PT를, 이미 그 일부가 고전적 사회민주주의를 넘어서 ‘사회-자유주의적’ 정책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는 선거주의적 정당으로서 적절히 인지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농촌지역에서의 ‘객관적’ 조건들과 ‘주체적 요인들’이 공세를 취하기에 알맞도록 점차 ‘성숙하고’ 있다고 인정되었다. 첫 번째 공세에 대한 최초의 반응은 공세가 취해진 곳의 인접지역에서 특히 적극적이었다. 자생적 토지 점거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MST는, 이러한 자생적 지방 행동들을 전국적 운동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조직화된 지도력과 의식적 조직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1995년말과 1996년초에 이르기까지, 이전까지 우익의 근거지였던 지역들에서 토지 공세는 일상적인 사건이 되었다. 카르두수는 무력을 사용하겠다고 협박하거나 새로운 점거를 유예하는 대가로 무단거주자들을 정착시켜주겠다고 공허한 약속을 남발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MST는 협상에 나섰지만 참으로 적절하게도 토지 점거를 중단하길 거절했다. 이들은, 휴전이 자신들의 주요 협상 카드를 제거할 것이며 무토지 농민들에 대한 자신들의 호소를 약화시키고 운동 내의 수백명의 젊은 지도자들과 활동가들을 탈동원화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투쟁은 그 깊이를 더해갔으며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브라질, 특히 사웅 파울로의 전체적 분위기는 MST에 대해 무척 우호적이다. 1996년 4월 19일의 학살극 이후에 있었던 사웅 파울로의 여론조사결과는 대다수가 농지 개혁에 우호적이며(65% 이상) 절대다수가 MST와 그 점거 전략에 대해 호의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MST는 효과적인 대항-헤게모니 전략과, 도시와 농촌을 통합하는 강력한 정치 블럭을 발전시키고 있다. 이 블럭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는, 특히 MST가 토지 개혁이란 의제를 넘어 일종의 사회주의적 변혁으로까지 나아갈 것인가에 따라, 계속 주시되어야 할 문제로 남아 있다. MST 지도자인 페드루 스테디레(Pedro Stedile)는 MST의 활동에 도움을 주는 국민적 정세에 대한 유용한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최근 역사에서의 세 국면을 구별하고 있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의 군부 독재에 대항한 투쟁의 최종 단계, 전대통령 콜루르(Collor)를 탄핵하기 위한 대중 투쟁, 그리고 카르두수가 신자유주의적 의제를 수행하고 있는 현재 국면이 바로 그 세 국면이다. 각각의 시기에 부르주아지의 주요 분파와 거대 언론, 주요 정당들 내의 그 동맹 세력들은 당시의 권력자를 약화시키는 데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래서 MST에 ‘정세적 지지’를 보내곤 했다. [물론] 그들의 목표가 달성되자 그들은 그러한 지지를 철회했다. 따라서, MST의 관점에서는 지배 블럭 내의 내적 분열의 시점이야말로 엘리트 및 언론 분파들의 묵시적 지지를 받으며 행동에 착수할 수 있는 기회의 국면을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농민 혁명가들의 현대적 고양은 볼리비아에서도 관찰된다. 그곳에서는 자본주의적 착취와, 노동의 저항에 대한 자본의 대결의 재구조화라는 변증법이, 전이되고 재조직화되어, 제국주의와 그 지방전도사들에 대한 강력한 저항을 구성하게 되었다.
2) 볼리비아 : 민중 권력의 삼각지대
볼리비아에서는 적어도 세 개의, 민중 동원의 독특한 중심들이 존재한다. 남부의 농민 운동, 광산 지역, 라 파즈(La Paz)의 노조들. 이들 각자는 COB(Bolivian Worker’s Con- federation, 볼리비아노동자총연맹)에 의해 형식적으로 조정된다. 과거에는 광부들이 전략적으로나 조직적으로나 결정적인 세력이었다. 이는, 제 일 서기가 광부 지도자 출신이어야 한다는 COB의 규약 안에 표현되어 있었다. COB는, 다른 노조 연맹체들과는 달리, 엄격히 말해 하나의 임금 노동자 조직이라고 할 수 없다. 여기에는 농민들과 소생산자들, 여성들과 생태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노점상들, 전문직 종사자들, 학생들까지 성원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이들 각 부문들은 일정한 대의원 비율을 할당받고 있다. 농민들은 보다 많은 인정과, 헤게모니적이라고 할 수는 없더라도 주도적이라고는 할 수 있을, COB 내에서의 영향력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이는 1996년 6월 COB 회의에서 광부들의 지배에 대한 도전이 강하게 제기되면서 분명히 드러났다.
1952년의 볼리비아 혁명 과정에서, 무장한 노동자, 농민 투사들은 혁명적 민족운동(Revolutionary Nationalist Movement) 정부하에 광산, 토지, 공장 등을 몰수했다. 1996년까지 모든 혁명적 변화들은 역전되어버리거나 최소한 변화중에 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1985년이었는데, 이 해에 하이메 파즈 자모라(Jaime Paz Zamora) 정부는, IMF의 후견 아래, 대부분의 국영 주석 광산을 폐쇄하고 3만명의 광부들을 해고하며 노조 세력의 전통적 중심들의 토대를 완전히 허물어버리기로 결정했다. 오늘날 광부노조, 특히 국영 부문의 광부노조는 본질적으로 퇴락해버렸다. 즉 IMF, 세계은행, 미국출신 학자 고문들에 의해 설계된 재구조화 기획하에 5만명 이상의 광부들이 해고당한 것이다. 현재 대부분 외국인 소유의 다국적 자본에 의해 고용되어 있는 광부들은, 그 규모의 축소--대략 만5천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합법적 해외 교역의 거의 75% 정도를 낳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아직도 경제의 고도로 전략적인 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광부들이 후퇴하는 동안, 3만명 이상의 전(前)광부들의 파견대를 포함하는 농민층이 체제와의 직접 대결에서 가장 역동적이며 영향력있는 부문으로 등장했다. 농민층은, 이전에 광부였던 농민들로 구성된 코카 재배자들과, 전통적인 농업 생산자라는 두 부문으로 구분될 수 있다. 전통적인 민족주의 정당에 대한 농민들의 단절은, 부분적으로는, 미국의 정책결정자들, 특히 군부, 마약단속국(Drug Enforcement Agency, DEA) 및 대사관에 대해 부당하게 종속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채택하게 된 중도좌파의 노선전환의 결과이다. 농민운동의 정치적 독립성은 필로멘 에스코바르(Filomen Escobar)의 지도를 받는 광부 출신 노동자들의 유입으로 인해 강화되었는데, 이들은 운동에 고도의 조직과 정치적 경험을 불러들였다. 에보 모라레스(Evo Morales)와 알레호 베레즈 라조(Alejo Velez Lazo) 같은 젊은 지도자들은 농촌뿐만 아니라 볼리비아의 보다 광범한 공공영역까지를 포괄하는 새로운 사상과 정치적 계획을 제공했다. 두 개의 서로 구별되는 정치 문화의 결합은 노동계급의 선진 부분의 조직 형식, 대결 전략, 전술과, 인디오 농민 공동체에 뿌리박고 있는 전통적인 정신적 가치들에 대한 존경심, 문화적 자율성, 토지에의 요구 등을 서로 결합시키는 운동을 창조해냈다. 농민운동은, 특히 코카 재배자들의 경우에, 신자유주의 정권과 그 해외 파트너인 미국에 대항하는 가장 거대하며 가장 본질적인 투쟁의 일부로 되어 있다. 그 결과로 국민 의식이 고취되어 ‘인디오 나라(Indian nation)’라는 관념이 보편적 흐름이 되었다.
멕시코의 사파티스타들과 같이, ‘새로운 농민운동’은 미국의 군사적, 정치적 침투라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탓에 토지와 문화적 자율성을 위한 투쟁에 대해서는 일단 고삐를 채웠다. 하지만 멕시코의 경우와 달리 볼리비아 운동의 공공 대변인은 인디오출신 농민 지도자들 자신이다. 이들은 지적으로 세련되어 있고 독학자이며 전투적인 지식인들로서 기층의 고통을 공유하고 있다. 브라질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사무실은 허름하다. 그곳에는 몇 개의 낡은 의자들, 부서진 책상들, 과거의 정치적 동원과 혁명 지도자들이 그려져 있는 포스터들이 있을 뿐이다.
농민운동의 중요한 부분들은 또한 독립적 정치조직을 통해 직접행동을 선거정치와 결합시키는 데 결정적인 일보를 내디뎠다. 이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투쟁에서 독특한 요소로 존재하는 것에 그쳤던 예전의 입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사회운동과 정당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민족주의 정당이나 좌파 정당들의 행위에 대해 염증을 느낀 농민운동은 새로운 정치 조직인 ‘인민주권회의(Assembly for the Sovereignty of the Peoples, ASP)’를 출범시켰고, 코카 재배 지역의 수십개 지방 선거에서 승리했다. 현재 코카 재배자들(cocaleros)은 ASP를 하나의 국민적 대안으로 내세울 것을 제안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전국적 수준의 계급 정치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농민들이 결정적인 목소리를 부여받길 희망하고 있다. 코카 재배자들의 정치적 실천은 [인디오들의] 조상 전래의 영적 신앙을 근대적 형태의 계급적, 반제국주의적 투쟁에 활용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맑스주의적 분석이 전(前)유럽문명적인 가치들과 연결되고 있다. 다국적 자본과 외국 은행들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과거의 우주론이 다시 깨어나고 있는 것이다.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코카 재배자들에게조차 토지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것이지만, 주요 투쟁은 미국에 의해 조종되는 코카 생산 금지 시도들에 대항하여 자유 교역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코카에 대한 전통적인 방어는 역사상의 인디오 국민에 대한 재검토, 즉 계급을 국민으로 포괄시키는 그런 류의 개념에 기반하고 있다. 국가의 개입과 더불어 전통적인 작물의 무제한적인 생산을 위해 싸우는 농민 반란들을 북돋우고 있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자기]역설이 농민운동의 이단적 본성을 고양시키고 있다.
인디오 농민운동은 이중의 도전을 맞이하고 있다. 코카 재배에 대항한 볼리비아 군대의 사용뿐만 아니라 인디오들의 요구를 빈 말로 다독거리는, 신자유주의 정권의 ‘문화주의적’ 전략들. 이것들은 대부분, 상징적인 대표성--부통령이 인디오출신이다--과 두 언어[스페인어, 인디오 언어]의 공통 교육에 초점을 맞춘 상징적 충족일 뿐이다. 코카 재배자들은 계급-환원주의적 좌파 정당들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제기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문화적 조작에 대한 거부의 경우에는 ‘경험적 요소들’에 보다 많이 기반하고 있다. 즉 그들이 내게 말한 바에 따르면, 부통령은 신자유주의 엘리트를 위해 복무하기 때문에 결코 진정한 인디오가 아니라는 것이다.
광부들의 코카 재배자들로의 전환은 사회 권력 블럭의 주축을 농촌지역으로 이동시켰지만, 이 경우 농촌은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농민들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즉 이들은 광산 투쟁과 연계를 맺고 있는 소규모 생산자들로서 전통적인 농민층과는 분명히 차별화된다. 배경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농민이 된 계급의식적 광부들은 광범한 농민층 사이에 이데올로기와 지도력 형식을 유포시킬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질적으로 다른 전망이 투쟁에 부여되었다. 동시에, 농민 지역, 특히 코카재배 인디오 공동체들에서의 광부들의 거주는, 그들로 하여금 코카 잎과 보다 많은 인디오의 자율성에 대한 요구와 연관되어 있는 전통적인 영적 담론들과 실천들에 자신들을 접합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볼리비아에서 산체즈 데 로사다(Sanchez de Losada) 대통령의 신자유주의 정권에 대한 근본적인 정치적 적대자들중 하나는 차파레(Chapare)의 코카 경작자들--9만 가구 이상이다--이다. 자유시장 정책으로 인해 싼 값의 식량이 수입되어 옥수수와 같은 전통적인 곡물들의 가격은 경작자들이 생존할 수 있는 수준 이하로 떨어지고 있다. 그 결과, 전(前)광부들의 다수가--그리고 또한 전(前)공장 노동자들--충분한 식비, 의복비, 가족의 기본적 필요에 대한 비용 등을 충당할 수 있는 수익을 제공하는 코카 잎 경작으로 전환했다. 미국 정부는, 마약사업 이익의 대부분을 세탁해주는 것으로 이득을 챙기고 있는 은행 및 금융 엘리트들과의 그 긴밀한 연줄 때문에, 분명히 합법적인 곡물로서 코카를 재배하고 있는 농민 경작자들에 대하여 가장 치열한 공격을 감행하는 반(反)마약 캠페인을 밀어붙이기로 결정했다. DEA의 작전 지도하에, 볼리비아의 정권은 정기적으로 농민 생산자들에 대항하는 근절 켐페인에 착수했으며, 이에 따라 수백명이 투옥되었고 시위행진, 총파업, 고속도로 봉쇄 도중 농민 대열이 공격받아 죽거나 다치는 일이 생겼다. 농민 지도자들에 따르면, 평가액 150만 달러 상당의, 대안적 작물을 위한 미국 기금은, 그토록 떠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정부 관리들의 주머니 안에서 사라져버렸다. 1996년 5월초에 정부는 의료적 용도로 쓰일 예정인 양을 초과하는 코카 재배를 완전히 근절시키로 한 계획을 공표했다. 볼리비아 농촌노동자총연맹(Bolivian Rural Worker's Confederation)은 근절 계획을 ‘광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부름으로써 이에 대응했으며, 만약 계획이 실행에 옮겨진다면 농민들은 ‘우리의 가족들, 우리의 생활, 우리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든 채 봉기할 것이라고 정부에게 경고했다. 에보 모라레스는 “차파레가 남아메리카 한 복판에서 멕시코 치아파스의 재판(再版)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코카 재배자들에게 코카의 근절이란, 그들 자신 강조한 대로, 자신들의 가족의 근절을 의미하므로 그들로서는 이를 피해야 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군사 고문들과 DEA 요원들은--아이비 리그식 억양으로 스페인어를 말하는, 허울뿐인 볼리비아 대통령을 통해--기본적 정치 결정들에 대해 더욱더 깊이 관계하고 있으며 코카 재배자들에게 적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지만, 이는 역으로 투쟁의 민족주의적, 반(反)제국주의적 본성을 심화시키고 있다. ‘코카 경작자 대 제국’은 볼리비아 정치의 현실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울부짖음이 아니다. COB가 내부 갈등에 얽혀들게 되고 그 지도자들이 정부와의 타협에 발목잡히면서 정치 활동의 선도성은 부문 운동들, 그중에서도 특히 전투적 농민운동으로 이전되었다. 하지만 미국이 즉각적인 [코카] 근절에 대한 압력을 증대시킴에 따라 정치적 협상의 영역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 징후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무장 대결이 배제되지 않고 있다.
3) 페루
페루에서는 1980년대 후반과 특히 1990년 이후에 혁명 운동이 전반적인 후퇴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합법적 좌파인 PUM과 통일좌파(United Left)는 붕괴됐으며, 부분적으로는, 유럽, 캐나다, 미국의 기금에 의존하는 NGO들에 흡수되었다. 남은 활동가들은 선거정치에 몰입하게 되었고 1992년 후지모리(Fujimori)의 autogolpe에 의해 주변화되었는데, 이 조치를 통해 그는 의회와 법원 제도를 해산하고는 독재권력에 가까운 무엇으로서 자기 자신을 예약해놓았다. 주요 게릴라 조직인 센데로 루미노소(Sendero Luminoso, ‘빛나는 길’이란 뜻)는 자멸해버렸다. 일부 인디오 공동체들을 방어하려던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종파주의적인 폭력과 광신주의, 컬트풍의 정치 지도력, 독재적인 내부 조직 탓에 이 조직은 그 대중적 지지의 대부분을 파괴시켜버렸다. 그 최전성기에 센데로는 농촌지역과 지역 도시들의 판자촌 내부, 그리고 리마에 강력한 사회적 기반을 지녔었다. ‘곤잘로 동지(Comrade Gonzalo)’의 생포와 지지자들과 활동가들의 그물망의 이름 및 주소의 발견으로 인해 조직은 전멸되었다. 그에 뒤따라 심대한 분열이 있었고, 그 결과 고참 활동가들의 한 세대 전체의 변절이 발생하여 그 실제 역량은 더욱 제한되었다. 또다른 페루 게릴라 조직인 MRTA도, 일본 대사관의 극적인 점령의 실패 이후, 크게 약화되었다. 이러한 게릴라 조직들은 다른 곳들에서 관찰되는 것과 같은 좌파 부활의 한 흐름이 아니라 이전 시기의 잔재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페루에서 사회적 저항이 회복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역사적 경험은 후지모리식의 힘센 자들이야말로 미래에 닥칠 곤란들을 진뜩 쌓아가는 자들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4) 파라과이 : 미래를 바꾸기 위해 과거를 회복하기
파라과이에서는, 스트뢰스너(Stroessner) 독재정권으로부터 보수적 선거 체제로의 이행이 이루어지면서 이와 더불어 농민과 노동자의 동원이 성장해가게 되었다. 독재자 전복의 즉각적 여파 속에서 농민들의 토지 공세의 물결이 지주 계급의 반격을 동반하며 뒤따랐다. 처음에는 용병 세력이, 그리고 나중에는 군대가 직접 점거 가구들을 철거하기 위해 개입했다. 이러한 점거와 철거의 유형은 와스모시(Wasmosy) 체제하에서도 지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지문제에 대한 농민들의 압력의 누적적 효과는 긍정적인 성과를 창출해냈다. 어떤 점거 가구들은 영구히 거주하고 있으며, 아순시온에서는 농민 투쟁에 대한 공감이 증대하고 있는 것이다. 대결을 지속할 수 있는 능력을 입증하고 있는 농민운동이 점점 더 대항-헤게모니 블럭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농민의 투쟁성은 어떤 지역--북부의 산 페드로(San Pedro) 같은 곳--에서는 다른 곳보다도 더 직접 행동에 경사되어 있는 등 불균등하게 나타나고 있다. 유사하게, 사회적 행동주의와 정치적 충성 사이에 항상 직접적 상호관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많은 농민들은 전국농민연맹(National Federation of Peasants, FNC)에 대해 적극적이지만 또한 계속 스트뢰스너의 콜로라도 당(Colorado Party)에 투표하고 있다. 직접 행동의 호소가 과거의 속박을 [자동적으로] 제거하는 것은 아니다.
아순시온에서의 전투적 농민운동의 영향은 필자의 파라과이 체제 기간 동안 필자에게 친숙한 느낌을 주었다. 대중 매체, 음식점, 택시, 가두 등등에서의 대담과정에서 농민 지도자들은 격려와 공공연한 지지의 표명과 함께 따뜻하게 환영받았다. 정부 정책에 대한 중요한 시위는 맨 먼저 농민 조직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무뚝뚝한 말투의 농민 지도자들은 투쟁을 그칠 마음이 전혀 없다. 와스모시 대통령과의 최근의 면담에서 알베르트 아레코(Albert Areco)는 다음과 같은 말솜씨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석달전 귀하는 우리에게 말하길, 농지 개혁 문제를 즉각 다룰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거짓말장이이든지 아니면 무능력자입니다.” 와스모시의 얼굴은 붉어졌다. 전화줄이 자신에게 감겨 있는 것도 모른 채 그는 밖으로 나가면서 전화기를 책상 밖으로 내동댕이쳤고, 십분 후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파라과이에서도 모든 선거상의 이행은 경제 엘리트들의 권력의 지속과 군부의 사면, 경제적 자유화의 심화, 그리고 사회적 동원의 억압 등을 전제하고 있다. 이행의 핵심 지원자는 다섯 블럭에 걸쳐 있는, 거의 군사기지를 방불케하는 시설의 미국 대사관이다. 와스모시가 군부 쿠데타의 위협을 받았을 때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수천의 파라과이인들이 시위 행렬로 거리를 메웠지만, 대통령의 첫 번째 대응은 미국 대사관으로 도망가는 것이었다. 미국의 전략은 노조와 농민운동의 반대로부터 자유화의 심화를 보호하기 위해 민간 체제와 우익 군부 모두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신속한 군부의 개입은 장군들과 지주들 사이의 공생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농민들이 점거한 휴한지들은 고위 장성들에 의해--대개 불법적으로--빈번히 도용되었다. 내가 방문한 동부 파라과이의 토지 무단거주자 정착촌에서는 농민들이 ‘monte’ 전통으로부터 토지에 대한 별난 계획을 찾아내었다. 그들은 한 장군이 불법적으로 토지에 대한 권한을 부여받은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사적인 총잡이들과 불도저들이 최초로 들이닥쳤을 때 이들은 농민 공동체에 의해 성공적으로 격퇴되었다. 지방의 소농들은 식량을 기부했고 종자도 지원되었다. 토지 정착자들은, 소써클들로 조직되어 집단으로 작업하면서, 비정규군인 용병들의 공격에 대항해 싸울 준비를 했다. 얼마 안 있어 보병용 장갑차에 탑승한 200명의 병사들이 나타나 가옥들과 곡물창고들을 파괴했고 농장 가축들을 죽였으며 그 과정에서 백여 가구에 들이닥쳐 남자와 여자, 아이들을 구타했다. 선거 체제는 파라과이의 농촌지역에서보다는 미국의 선전 전단 속에서 더 민주적인 얼굴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농민운동은 막 꽃피던 농민동맹(peasant leagues)이 군부의 억압으로 인해 분쇄된 1970년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들중 살아남은 활동가들은 1980년대 내내 계속된 비합법적 조직화의 조심스러운 과정을 시작했으며 1980년대 말에는 결국 지역적 조직들이 형성되어 활동가들을 조정했다. 스트뢰스너의 몰락과 엘리트들 내부의 분열은 대규모 토지 점거운동의 신호였다. 그 성과는, 농민운동이 더 이상 ‘농촌 이슈’가 아니라 국민 정치 내의 한 중요한 요소라는 인정이 확대되어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선거 체제로의 전환에도 불구하고, 매달 수십명의 농민들이 체포되고 있고, 사용되지 않는 토지를 점거한 농민들을 철거시키기 위한 폭력적인 군부 개입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으며, 국가와 협력하여 활동하고 있는 용병들에 의해 십수명의 농민들이 다치거나 죽임을 당하고 있다. 아순시온에서 진보적인 중간계급과 공공부문 피고용자들이 자유화의 범위와 심도를 토론하는 동안, 다른 한 편에서는 치열한 농촌 투쟁이 오직 물리력에 의해서만 저지될 수 있을 열기를 규합해냈다.
지금까지, 농민운동은 두 개의 전선을 전개하고 있다. 즉 지방의 지역 조직들의 형성을 통해, 그리고 전국적인 연합 조직들과의 제휴의 증대를 통해. 전국농민연맹은 느슨하게 연합한 30개의 지역 조직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공식적인 ‘회원증’도 발급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일반적인 실천방식이다. 지도자들은 그 자신 일하는 농민들이다. 여기서도 또한, ‘전업’ 유급 직원들은 존재하지 않으며 전용차도 없고(이들은 버스로 여행한다) 전문적 고문도 별로 없다. 또한 이들은 성장중이다. 다시 한 번 여기서도, 눈에 띄지 않는 활동은 지도자들의 ‘미덕’이다. 이들은 조직하고 토론하며 자신들의 지지자들과 투쟁 및 투옥을 함께 한다.
파라과이에서도, 브라질과 볼리비아에서처럼, 지식인들과 농민 활동가들 사이에 심대한 이질감이 존재한다. 지식인들은 점점 더 NGO들과, 해외 기부자들에 대해 책임을 지는 기획들에 결합하고 있다. 농민들은 점점 더 NGO들--한 파라과이 농민 지도자가 말한 바에 따르면, ‘해외 기금들을 안전케하기 위해 운동을 이용하는 자들’--에 의한 기만과 조직간 경쟁에 대해, 적대감이 아니라면, 의혹을 보내고 있다. 농민 투사들의 맑스주의적인 혁명적 전망은 지식인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포스트 맑스주의’의 변형들과 직접적인 갈등에 처해 있다. 극소수의 지식인들만이 농민운동의 종복으로서 봉사하길 바라고 있으며 그럴 능력을 지니고 있다. 농민 지도자들은 신실한 지식인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바라며 심히 흥미를 느끼지만, 다른 한 편으로 지식인들의 ‘기구들(institutes)’을 통해 협력하는 것은 거부하고 있다.
토지 쟁점 외에도, 세 가지 식별가능한 흐름들이 농민운동의 호소와 성장 속에 구현되어 있다. 첫째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인디오 전통의 융합이 존재한다. 과라니어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언어이며, 파라과이는 ‘농촌’이 언어적으로 도시를 지배하는 유일한 국가이다. 농촌지역에는, ‘인디오’와 농민적 경작 양식의 결합--공동체에 기반을 둔 농사와 ‘시장’ 행동--이 존재한다. 농민 지도자들의 굳은 유대와 도시적 지향성, 정치적 세련성은, ‘monte’에서 농사지으며 그들 자신을 자연에 밀착시키고 기본적으로 자기-소비를 위해, 그리고 단지 부차적으로만 시장을 위해 생산하려는 욕망과 결합되어 있다. 둘째로, 일부 농민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사회주의가 중요한 정치적 경향이 되었다. 이론적 세련성과는 거리가 멀지만 자본주의의 약탈에 대한 공통의 저항에 뿌리를 박고 전통적인 농민 공동체들에 구현되어 있는 사회주의가 존재한다. 셋째로, 농촌지역의 민족주의는 과라니어를 사용하는 소경작자들, 무토지 노동자들과, 비옥한 토지의 막대한 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부유한 유럽인 정착자들 사이의 대당에 기반을 두고 있다. 수만 에이커의 관개지가 독일인, 네덜란드인, 미국 기업농들뿐만 아니라 메논교도들(Mennonites)에 의해 소유되고 있으며, 이들은 과라니어를 사용하는 농민들을 계절적으로 고용하고 있다. 민족-인종적 문제는 파라과이의 19세기의 민족주의 경험에 대한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 파라과이에서는 성공적인 국가 주도의 산업화가 개척되었었으며 삼각 동맹 전쟁(war of the Triple Alliance) 동안의 외세의 개입만이 이를 파괴할 수 있었다. 이 역사적 기억은, 전사들의 용감함과 그 지속기간 동안 그 실험이 거두었던 성공 때문에, 여전히 남아 있다.
군부 쿠데타의 위협 와중에 있었던 3월 내내, 와스모시는 부끄럽게도 미국 대사관에 숨은 반면, 농민들은 고속도로를 마비시키고 수도로의 행진을 동원했다. 학생들이 공공의 이목을 독차지했지만, 군부가 움직임을 보이기만 하면 나라를 마비시키려고 대비한 이들은 대부분 젊은 노동자들과 농민들이었다. 며칠 후, 위협은 사라지고 파라과이는 반세기만에 가장 강력한 총파업--모든 주요 활동들이 중단되었다--을 경험했다. 수만의 농민들이 거리를 메웠으며 토지 쟁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5) 콜롬비아 : 혁명은 전진한다
콜롬비아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발달된 게릴라 운동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아마 전세계에 대해서도 그러할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곳들에서는 게릴라 운동이 패퇴하거나 자유주의적 선거 정치에 흡수된 반면, 콜롬비아에서는 게릴라 운동이 새로운 지역들에 그 영향력을 증대시켜 농민층 사이에서 엄청난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는 한편, 동시에 그 군사적 역량을 증가시키고 있다. 국제적인 무시와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게릴라들은 지방, 지역 수준에서 고도의 정당성을 획득했다고 평가될 수 있다. 게릴라들, 특히 콜롬비아 무장세력(Colombia Armed Forces, FARC)은 농민들에게 군부와 지주의 약탈에 대한 보호를 제공하고 있으며 식량작물 재배와 사회적 서비스를 지원하고 있다. 1940년대에 그 투쟁을 시작한 FARC는 소비에트 맑스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현재는 원칙적으로 토지 개혁과 민주 변혁을 위한 농촌 투쟁에 전념하고 있다. FARC 지도부는 계속 맑스주의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여전히 전설적인 마누알 ‘티로피고(백발백중이란 뜻)’ 마루란다(Manual ‘Tirofigo’ Marulanda)에 의해 영도되고 있다. 이들은 대략 만3천명의 무장 게릴라와, 압도적으로 농민으로 이루어져 있는 수십만의 민간 활동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세 개의 게릴라 조직들은 훨씬 작으며 약 4천명의 전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정통한 관측통들의 평가에 따르면 게릴라들은 이 나라의 천 개의 자치구들중 약 반정도에 현존하고 있으며 커피, 바나나 및 석유 생산 지역들을 포함한 중요 생산 지대에 강력하게 조직되어 있다. FARC는 적절한 전략적 계획--지방 권력의 축적--에 따라 자신의 권력 기반을 장기간 인내를 갖고 건설해왔다.
다른 농민기반 운동들과 같이, 콜롬비아의 게릴라들도 대학생들이나 지식인들로부터 거의 혹은 전혀 지원을 받지 않는다. 대학생들이나 지식인들중 대부분은 원래부터, 이제는 해산되어 선거 연합체가 된 게릴라 조직인 MR-19에 결합했다. MR-19가 최초에 얻은 거의 20%에 이르는 득표는 이들이 가비리아(Gaviria)의 신자유주의 정권에 결합하면서 소멸되어버렸다. 이들은 현재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정치세력이며 한때 이들의 대통령 후보였던 안토니오 나바로 울프(Antonio Navarro Wolf)는 에콰도르에 인접한 작은 도시의 시장으로 있다.
1996년 9월에 콜롬비아 군대에 대하여 지난 30년 이래 최대의 게릴라 공격이 감행되었다. 푸투마요(Putumayo)주의 밀림 안에 있는 한 군사 기지--아이러니컬하게도 라스 델리치아스(Las Delicias)라 불리는--가 괴멸되어 27명의 병사들이 죽고 19명이 부상당했으며 67명이 포로로 잡혔다. FARC와, 시몬 볼리바르 게릴라 조정운동(Simon Bolivar Guerrilla Coordinating Movement)으로 조직화되어 있는 ELN(National Liberation Army, 민족해방군)이라는 그 동맹군은 나라의 32개도(주)중 15개곳에서 군대와 매일 접전을 벌이고 있다. 지난 6년 동안 FARC는 그 전투 전선의 수를 10개에서 105개로 늘려왔다. 자동소총, 유탄발사기, 로켓포로 무장한 게릴라들은 군대 주둔지와 공군기지들을 공격하고 있다. 지금까지, 정부는 거의 5백명의 병사들이 살해되거나 부상당했다고 인정했다. FARC에서 발행하는 신문의 발표에 따르면 최초의 해방구들이 과바이레(Guavaire), 메타(Meta), 카쿠에타(Caqueta), 푸투마요, 아마조나스(Amazonas) 등의 도에 건설되었다. 점차 이중권력 상황이 출현하고 있다.
마루란다가 여전히 논쟁의 여지 없는 지도자로 존재하지만, 현재의 공세를 책임지고 있는 게릴라 지도자는 그의 장래의 계승자인 호르헤 브리엔코(Jorge Brienco)--‘모노 루비오 호호이(Mono Rubio Jojoy)’로 더 잘 알려져 있는--이다. 한 게릴라의 아들이며 어렸을 때부터 FARC에서 양육된 그는 마루란다의 수제자이다. 그는 가장 강력한 게릴라 전선인 동부 cordillera(산악 지대)의 블로퀘 오리엔탈(Bloque Oriental)을 지휘하고 있다. 수마르파즈(Sumarpaz)에 있는 브리엔코의 사령부는 실제로 보고타로 향하는 길에 위치해 있다.
전쟁의 결과로 끔찍한 피난 위기가 닥쳐와 수만의 사람들이 폭력으로 위협받은 채 자신들의 고향으로부터 피난하도록 강제되었으며, 이들은 대개 가장 기초적인 쾌적함조차도 결여되어 있는 대도시의 판자촌에서 삶을 마치고 있다. 값싼 미국 곡식들의 수입에 의해 전통적인 곡물에 가해지는 파괴적인 공격을 직면하고 있는데다가 농민들에게는 유일하게 수익좋은 현찰-곡물인 코카의 재배를 근절시키겠다는 집중적인 캠페인까지 짊어지게 된 농민들은 FARC에 결합하고 있다. 농민 조직들에 대항하기 위해서 2천명 이상의 성원을 지닌 100개 이상의 용병 조직들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군부와 지주들에 의해 재정지원을 받고 있다. 이들은 농민 투쟁 지역 내에서 활동하면서 수백명의 활동가들을 살해했다. 용병 조직들과 군대의 주된 공격목표는 우라바(Uraba)이다. 이 곳에서는 지난 몇 년동안 500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살해당해왔다. 정부와 그 지주 동맹자들이 노동 쟁의를 총탄으로 해결하고 있는 그곳 우라바가 게릴라 충원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1995년 후반과 1996년 동안 FARC는 주요 도시 중심들에 대한 침투를 시작했다. 농촌지역으로부터 도시로의 게릴라 투쟁의 확장은 Escuela de Artilleria Francisco Aguilar하의 보고타 자체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상황의 발전은 몇가지 요인들의 결과이다. 첫 번째 요인은 지배 엘리트들 내부의, 그리고 에르네스토 삼페르(Ernesto Samper) 대통령과 미국 사이의 심대한 분열이다. 워싱턴은 삼페르와 코카인 카르텔들 사이의 유대에 대한 증거를 갖고 있다며 그의 퇴임을 강요하는 전면적인 외교적, 정치적 캠페인에 착수했다. 이는 의회, 집권 자유당(Liberal Party), 행정부를 양분시켰다. 이로 인해 야기된 정치적 쇠약화는 삼페르로 하여금 코카-근절 캠페인에 착수하도록 만들었다. 또다른 요인은 석유 회사들이 군 부대를 ‘임대하여’ 사령관들에게 상납급을 지불하면서 게릴라 공격으로부터 송유관을 보호하게 하는 관행이다. 그 결과, 소수의 정예군만이 게릴라와의 대결에 쓰일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전통적인 마약 카르텔들의 붕괴로 인해 새로운 밀매상들, 군부, 정치 관료들 사이에서 [마약] 이익을 놓고 경쟁이 치열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수도로부터 불과 30마일 떨어진 곳에서 작전을 벌이고 있는 FARC는 보고타에 식량을 수송하는 교통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을 거두어왔다. 이는 30년간의 전쟁중 가장 진전된 게릴라 침투로서 농민 게릴라들의 정치적, 사회적 권력의 증대를 반영하는 것이다. “볼리바르 광장으로 승리의 행진을 해들어가겠다”는 브리엔코의 목표가 가까운 장래에 실현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결코 억지가 아니다. 콜롬비아[혁명]는 베트남 전쟁 이래 최초의 성공적 농민혁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6) 부활한 좌파 : 칠레
이러한 새로운 혁명 세력들 외에도, 라틴 아메리카 좌파에는 또다른 긍정적 발전이 존재한다. 칠레에서는 공산당이, 독재로 인해 야기된 일련의 후퇴, 초자유주의적 ‘합작(Concertaction)’ 체제에 대한 사회당의 협력으로 말미암아 강요된 고립, 그리고 소련의 붕괴로 인한 방향상실과 변절 등을 거친 후, 다시 한 번 노조운동의 주요 세력으로 등장했다. 최근의 CUT 조합 선거에서는, 투표 상대자를 조작하려던 기독교 민주당과 사회당의 막판 음모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이 대의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부상했는데, 대의원들은 조합을 민주화할 새 의장으로서뿐만 아니라 한 명의 반대파 사회주의자로서 공산당 후보들을 지지했다. 공산당은 3대 주요 노조, 보건, 교육, 석탄 노조의 선거에서 승리했다. 이들은 또한 다른 많은 노조들 내에서 그 영향력을 증대시켰으며 학생 연맹의 의장직을 획득했다. 글라디스 마린(Gladys Marin) 여사--인기있는 당 서기장으로서 시위 행렬의 맨 앞에서 자주 발견된다--의 역동적인 지도 하에 공산당은 노동 계급과 사회운동에 대한 새로운 논쟁들에 자신을 개방하고 있다. 또한 기본적인 맑스주의적 계급 분석을 견지하면서도 소련의 과거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칠레는, 그 외양에도 불구하고,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엄격히 통제되고 있는 사회중 하나이다. 이는, 평생직으로 되어 있는 상원의원 제도, 군사 및 정보 업무에 대한 피노체트(Pinochet)의 통제, 권위주의적인 헌법, 제한적이고 불공정한 선거법 등등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기독교민주당, 사회당 정권과 우파 야당 모두 선거 제도와 운동 자금원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고 매체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후보를 지지하도록 하는가 하면 양당 제도를 영속화하는 선거법을 지지하고 있다. 통제는 정부와 거대 기업들 사이의 긴밀한 통합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결과, 대중매체들 내에서 신자유주의 전략을 비난할 수 있을 기구나 배출구가 실질적으로 부재하게 되었다. 군부의 잔악행위에 대한 공공의 논의를 북돋고 있는 개인들은 사법 절차에 종속되어 있다. 논의의 이러한 폐쇄성은, 민간 정치인들에 의해, 즉 국가 기금을 통제하고 기업들을 관리하며 여론조사기구와 대중매체의 중요 부분들을 지휘하는 기독교민주당과 사회당에 의해 강화되고 있다. 이들은 기업 이사들의 신뢰를 얻는 데 여념이 없다. 이들은, 생존자들과 인권그룹들에 의해 정체가 드러난 악명높은 군 간부들의 혐의를 수사하기 위한 시도에 대해 반대했다. 법관들의 대다수 무리는 군부 정권 당시부터 복무한 고참들이거나 새로운 민간 권력의 권력남용의 혜택을 입은 자들이다. 칠레의 학자들과, 계층상승한 전문직 종사자들은 권력의 중간 수준을 체현하고 있으며 점점 더 순응주의적이 되고 있다. 내각 내의 ‘사회당원들’은 [현존 경제] 모델이 이미 칠레의 최근 역사상,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 내의 가장 편향된 소득 유형들중에서도 가장 나쁜 불평등 상태를 초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의 기적을 칭송하고 있다.
하지만, 노조들, 노동계급 거주지 주민들, 대학들 내에서 공산당의 영향력이 성장하고 있는 것 외에도, 좌파 재생의 다른 많은 신호들이 존재한다. 좌파의 영향력의 성장은, 줄곧 신자유주의 정책의 전달벨트에 불과했던 조합 관료들에 대한 기층 노조 활동가들의 불만을 반영하고 있다. 공산당원들은, ‘아웃사이더’로서, 사회당과 기독교민주당의 관료들에 의해 강화되기만 한 피노체트의 가혹한 노동법에 대항하여 노동자들의 이익을 방어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왔다. 의회에서 실질적으로 배제된 상황은 오히려 사회운동들에 대한 공산당의 행동주의에 좋은 영향을 끼쳤다. 자주적 노조의 새로운 세대와 학생 지도자들이 공산당의 영향력 증대 과정에 결합했다.
하지만 공산당은 두 가지 문제에 직면해 있다. 첫 번째는, 지식인들의 이탈이다. 공산당 경제학자의 대부분이 돈벌이가 되는 정부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다른 이들은 공개적인 토론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정치적 이유를 들어 떠나버렸다. 당에 제기되는 도전은 내부 토론을 허용하고 새로운 대중 지도자들에게 자율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지식인 문제는 열린 당 운영을 통해 새로운 세대를 매혹시킴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는, 당의 계속적인 성장이 새로운 노조와 학생 지도자들의 자율성을 받아들이는 것에 주로 의존하고 있다는 문제가 존재한다. 정치 노선을 강요하려는 중앙집권주의적 시도는 이전의 공산당 문화 속에서 형성되지 않은 이러한 지도자들을 급격히 소외시킬 것이다.
또한 당은, 공장 노동의 새로운 조건들, 칠레에서 자유롭게 무비판적으로 회자되고 있는 ‘세계화’ 수사의 배후에 놓여 있는 계급-국가 관계에 대한 보다 진전된 이해 등등에 대한 분석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한편] 산티아고 주변의 공업 지대에서 영향력을 획득하고 있는 독립 노조의 네트워크(co-ordinadores)와 같은 또다른 좌파 그룹들이 존재한다. 민주 포럼(the Democratic Forum)--중도좌파 전문직 종사자들의 조직--이나 그 외 독립적 정치경제학자들의 조직, 막 움트고 있는 반(反)기업적 생태운동 등등은, 하나로 수렴되기만 한다면, 칠레에 강대한 좌익 정치 세력이 등장하는 데 자극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7) 아르헨티나 : 침체와 반란 사이에서
아르헨티나에서의 정치투쟁은 줄곧 순환적이었다. 군사 정권으로부터의 이행--말비나스(Malvinas)의 패배 이후의--기간중에, 그리고 그에 뒤따른 군사 쿠데타의 시도 와중에, 광범위한 동원이 있었다. 1980년대 중반과 후반에는 급진당 정부에 대항한 6차례의 총파업이 있었다. 1990년대에는 지방주들에서의 광범위한 봉기들이 계속 있었다. 가장 최근에는, 1996년 8월에 있었던, 비틀거리는 메넴(Menem) 정권에 대항한 최초의 성공적 총파업이 계급 갈등의 새로운 순환의 전조가 될 수 있겠다.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관건적인 쟁점은 대중적인 민중 저항의 주기적 분출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분출이 어떠한 대안적 정치 기획과도 괴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1980년대 CGT의 총파업이나 1990년대 초 도시 저항운동과 같이 정치와 사회투쟁이 결합될 경우, 이는 대개 신자유주의 기획에 흡수되는 정치 기획으로 흘러버렸다. CGT는 알폰신(Alfonsin)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데 일조했지만 이는 메넴 정권의 초자유주의적 정책들에 길을 열어주었을 뿐이다. 1990년대 초반의 반대파 노조 활동가들(CTA)은 대전선(Frente Grande)의 창당에 기여했지만, 이 당은 이후 신자유주의적 안정화 정책을 지지했다. 즉, 조직된 사회운동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기반을 표현해줄 정치적 도구를 창출할 수 있는 능력과는 줄곧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아르헨티나 좌파의 또다른 측면은 지방주들에서의 중요한 자생적 봉기들과 이들 좌파 사이의 괴리인데, 여기에는 후후이(Jujuy)의 주목할만한 사례와 같은 약간의 예외만이 있을 뿐이다. 필자는 뉴쿠엔(Neuquen)에서 노조 활동가들, 학자들, 전문직 종사자들과 담소하면서 편안함을 느꼈다. 불과 50마일 바깥에서는 2만명 이상의 민중들이 주지사의 정책들에 항의하여 주요 고속도로를 봉쇄하고 있었다. 필자가 뉴쿠엔 회합의 그 지방출신 주최자들에게 이 대중 행동의 지도부에 대해 물었을 때, 그들은 어떠한 좌파 활동가들도, 다른 어떠한 조직된 그룹들도 이에 관계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보다 일반적으로, 지방주들에서의 봉기는, 각 지역의 독특한 형태의 지방주의로 치부된 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그 어떤 지식인에 의해서도 아직 이론화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들 봉기는 곧잘, 최근의 포스트모던 담론의 어조를 통해, 문화적 소외와 정치적 괴리의 또다른 사례인 것으로 읊어지고 있다. 유사한 봉기들이 살타(Salta), 로사리오(Rosario), 코르도바(Cordoba), 산 후안(San Juan), 멘도자(Mendoza), 그리고 티에라 델 푸에고(Tierra del Fuego) 등에서 발생한 바 있다. 어떤 경우, 봉기들은 공공 건물의 방화와 대규모의 가두 대결을 초래했는데, 이들 모두는 어떤 전국적, 지역적인 정치적 대안을 보여주기에는 미흡한 것들이었다. 대개, 시위자들은 이러저러한 전통적 정당들과의 이전의 의뢰-후견 정치관계(client political relations)로 돌아간다.
표면상, 좌파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중도좌파 선거주의 전선체와, 직접 행동에 연루되어 있는 지방주들의 운동으로 양분되어 있다. 실제로, 이러한 차이는 심각한 [상호] 자격제한과 연결되어 있다. 인권 그룹인 ‘오월광장어머니회(Madres del Plaza de Mayo)’는 대학생들과 학자들의 중핵뿐만 아니라 젊은이들, 반대파 노조 활동가들, 주민운동 조직들의 민중 동원의 한 중요한 참조점이 되었다. 수석 대변인인 에베 보나피니(Hebe Bonafini)는 필자에게, 현존하는 중도좌파 연합체들로부터 독립적인, 통합적인 전국적 운동을 건설하는 것에 대한 그녀의 구상을 말해주었다. 3만명 이상의 살인에 책임을 지고 있는 군부 요인들을 재판에 회부하라는 비타협적 주장 때문에 어머니회가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외에도, 이들은 대부분 젊은이들로 구성된 5만명 이상의 전투적 시위를 일으켜낼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저항으로부터 정치로 나아가는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맑스주의 좌파는, 비록 개인적 투사들이 중요한 노조들에 존재하고 있긴 하지만, 내부적으로 분열되고 사회적으로 고립된 채 여전히 극소수 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들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은 도시 사회투쟁들의 참여자들 사이에서 정치적 신뢰를 얻는 어떤 좌익적 운동이다. 선거정치는, 사회적 투쟁들과 직접행동 운동들의 극단화로부터 출현한 정치적 정체성의 성장의 일부로서만 의미를 지닐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는 사이, 마치 멕시코의 경우처럼, 부패하고 무능한 메넴 정권에 의한 사회의 해체는 정치의 군사화의 증대를 야기시키고 있다. 8월의 총파업 기간 동안 군대가 거리를 메웠고 공중의 저항을 막았다.
8월의 총파업은 모호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 이는 메넴에 대한 지지의 퇴락의 진전과 CGT의 관료제에 대한 점증하는 압력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노조 관료들은 이를 내부의 반대를 굴절시킬 탈출구로 보았으며 투쟁을 심화시킬 의도는 전혀 지니지 않고 있었다. 달리 말하면, 아르헨티나 좌파는 대전선이나 CGT 같은 공식 좌파 조직의 침체와, 어떤 정치적 혁신의 원천이 될 것으로 기대되는 지방주 반란의 극단화 사이에 서 있는 것이다.
8) 멕시코
멕시코에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사파티스타(Zapatista) 운동과 그 지도자인 ‘마르코스(Marcos)’ 부사령관이 있지만, 이들은 단지, 게레로, 오악사카 및 그외 지역들을 포함하는 중요한 농민운동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파티스타 운동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그들에 의한 맑스주의적 분석과 인디오 실천의 혼합, 전국적이고 국제적인 전략적 사고와 지방의 공동체에 기반한 [민중] 지지 사이의 연결이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중도좌파 정당인 PRD (Revolutionary Democratic Party, 민주혁명당)가 입법부에서 계속 주변화되고 있는 탓에 NAFTA 쟁점, 민주화, 토지 개혁, 사회 정의 등에 대한 국민적 논쟁의 기반을 제공하는 것은 다름아닌 농민운동, 그중에서도 특히 EZLN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보다 강력하고 대규모적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EZLN은 사회적 투쟁을, 전체 사회를 변화시킬 정치적 도구를 벼리려는 노력과 결합시키고 있다.
하지만 멕시코 혁명의 전망을 논의하면서 EZLN에만 배타적인 초점을 맞춘다면 이는 오류일 것이다. 급진적 변화의 잠재력들은 다양한 지역들에 분포되어 있다. 새로운 게릴라 조직들의 폭발, 지방의 지역 농민운동들의 활성화, PRD의 사회적 기반의 급진화, 공식 노조 내부에서의 의미심장한 분열들의 출현, 이에 병행한, ‘Ruta 100’과 같은 자주적인 ‘계급 지향적’ 노조의 등장 등등. 이들 각 구성부분들은 서로 중첩되어 있다. 예를 들어, 국가 권력의 장악을 자신의 임무로 설정하고 있는 EPR(Ejercito Popular Revolucionario)은 최소한 게레로의 일부 농민운동들 사이에서 실질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농민운동 내의 급진적 사회운동가들은 또한 PRD 좌익의 일부를 이루기도 한다. 이 운동들은 세디요(Zedillo) 대통령의 ‘선거 개혁’에 의해 열린 정치적 공간에 대해 반응하지 않고 있다. 그 대신, 이들은 나라의 군사화의 증대에 굴하지 않고 그들 자신의 정치 공간을 [스스로] 창출하고 있다. 멕시코의 정치적 지배자들은 월 스트리트와 마약 자본가들(narco-capitalists)에 대한 멕시코의 신탁과, 세계은행과 IMF의 파견총독 사이의 혼인의 산물이다. 정치-사회운동들의 성장은 부분적으로는 권위주의적인 국가 자본주의로부터 경찰국가의 강권정치로의 이행의 결과인데, 후자는 자신을 ‘자유시장 자유주의’라고 칭하면서 선거 개혁과 반대파의 암살을 ‘민주주의로의 이행’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새로운 국면의 특징적인 현상은 철도의 민영화에 뒤따른 화물 열차 강도의 물결이었다. 최근까지, 멕시코의 철도망은 멕시코 혁명 및 국민적 관념과 강고히 연결되어 있었다. 지난 몇 년 내내, 십수개 이상의 화물 열차들--대개 곡물을 운반하는--이 농민 군중에 의해 정지되었고, 이는 운송물을 약탈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급진적 저항세력을 확대하고 심화시키는 데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점은 이들이 어떤 정치적 주축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운동의 분산적이고 지방적인 성격으로 인해 주로 직접적인 해결책을 찾으려는 운동에 머물고 있으며, 따라서 일당 국가 체제에 대해 도전할 수 있는 전국적 운동의 창출은 늦추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RI와 그 내부 음모들, 정치투쟁과 피의 복수 등의 부후(腐朽)화 현상으로 인해 시민사회의 민중 계급들에 대한 집권세력의 촉수가 이완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선거 차원에서는, 우익 PAN이 지난 몇 년간 자신의 선거 기반을 거의 두 배로 늘려 15만명에 육박하는 유권자들을 획득, 가장 많은 이득을 보았다. PRD는, 당을 보다 능동적인 개입활동으로 향하게 하려는 그 좌파 사회 기반과, 당을 북부 대도시들의 중간계급 유권자들에게 영합하는 선거 기계로 만들려 하는 그 의회 지도자들 사이의 심각한 분열을 겪고 있다. 오브레곤 로페즈(Obregon Lopez)를 당 의장으로 선출한 후, PRD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는 실행곤란한 시도를 해보이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멕시코에서의 혁명[가능성]의 성장은 혁명사 연구가들에게는 결코 놀랄 일이 못 된다. 고어 부통령은 NAFTA를 19세기의 루이지아나 매입(Louisiana Purchase)과 비교하고 있다. 존 삭세 페르난데즈(John Saxe Fernandez)가 지적하는 대로, 20세기 후반의 미국의 정책을 ‘멕시코 매입(Mexico Purchase)’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멕시코의 채무자에 대한 은행들의 재정적 압박이 임금을 시간당 40센트까지 떨어드리고 농산물기업에 의한 농민들의 대규모 강제이주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혁명은 이미 무르익어 있다(there is a revolution waiting to be made).
※ EZLN : 무기와 정치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Zapatista Army of National Liberation)은 멕시코와 전세계에 걸쳐 상상력과 공감, 지지를 끌어모았다. 이는 치아파스의 밀림에서 사파티스타에 의해 주최된 국제적 ‘Encuentro’(1996년 7월 27일-8월 3일)에서 분명히 드러났는데, 여기에는 41개국에서 모인 4천명의 인원이 참여했다. 마르코스와의 회합을 비롯한 대담들과 토론들을 통해, [필자는] EZLN의 진보와 최근 상황에 대한 복잡한 그림을 그려볼 수 있었다.
1994년 새해 첫날의 최초의 봉기 이래로 EZLN은 정치적 전망의 본질적인 변화를 겪었다. 이러한 변화들과 사파티스타의 정책들이, EZLN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25개의 공동체들을 뛰어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 EZLN의 공식 담화뿐만 아니라 마르코스 및 그 외 지도자들과의 대화 등을 검토해보면, 우선 EZLN이 자신의 목표를 좁혔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초창기에는 기본적인 사회-경제적 변혁에 초점을 맞추었으나(사파티스타 투사들은 이와 관련해 사회주의 변혁까지를 말하곤 했다), 오늘날 전반적인 강조점은 ‘민주화’, ‘탈군사화’, 그리고 일종의 ‘정치적 이행’에 맞추어지고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 조여오는 군대의 포위 때문이다. 정부의 비타협적 태도와 ‘살라미 소시지(salami) 전술’--EZLN과 단절시키기 위해 인디오 공동체들을 고립시키고 굶주리게 만들고 매수하는--의 결과, 잔존한 공동체들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적 기습의 전망이 고조된 것이다.
조직을 군사적 구조의 조직체에서 정치적인 그것으로 변형시키고 그에 맞는 민주적 책임 체계를 수립한다는 과제는 EZLN에게 많은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무엇보다 첫째로, 즉각적인 군사적 위협의 문제가 있다. 일부 사파티스타 공동체들에 대해서는 1 km도 안 되는 곳까지 병력이 배치되어 있다. 조급하게 정책결정의 중심에 회의체-형태(assembly-type)의 구조를 채택한다면 이는 1995년 2월의 전격적 공격의 교훈을 경시하는 것일 수 있으며, 민주적 가치를 지지하는 지도부의 약점을 증대시키는 것일 수 있다. 공동체 연대의 문화와 생존은 민주주의 건설의 필수 전제조건이다. 사파티스타군의 현재 환경의 연속성을 지키는 것이 하나의 보장이 될 수 있다. 마르코스는 물론 게릴라 조직체 내의 중앙집권주의 경향을 경계하고 있으며 이 쟁점에 대해 고뇌하고 있다. [하지만] 군사적 방어와 민주주의 사이의 긴장은 단순히 민주적 명령 체계를 쟁점화하는 것으로써는 해결될 수 없다. 이는 점령되어 있는 치아파스의 구체적 상황을 고려함으로써만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인데, 이 곳에서는 지금 헬리콥터가 머리 위를 배회하고 있고 공수특전단이 공격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정부의 공격을 받게 될 경우, EZLN은 그들의 사회적 기반과 분리될 것이고, 언론에 의해 획책된 공적 이미지는 인디오 공동체들과 일당 국가 사이의 투쟁으로부터 게릴라와 군대 사이의 무장투쟁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양극화는 진보적인 도시 세력의 지원을 약화시킬 것이다.
전쟁이냐 평화냐 하는 문제는 마르코스의 일방적 양보들에 의해 해결될 수 없다. 향후의 전쟁은 치아파스 바깥의 세력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을 보다 광범한 정치적 투쟁들 속에서 결정될 것이다. 게레로의 게릴라들, 오악사카의 농민 동원, 점증하는 노조의 불만--1996년 노동절날 멕시코 시티에서는 30만명의 인파가 시위행진을 벌였다--,북부에서의 유권자 지지의 급락, 약간의 불안정의 조짐에도 떠나갈 채비가 되어 있는 유동자본에 심각하게 의존하고 있는 경제 등등과의 다면적 전선에서 멕시코의 정권이 싸워나갈 수 있겠는가? 6월에는 멕시코 시티 시장직 선거가 치루어지기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PRD의 후보인 콰우데목 카르데나스(Cuauhtemoc Cardenas)가 승리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러한 전망은 아마도 정부와 EZLN이 신중히 행동하도록 설득될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
EZLN의 목표의 축소는 국제적 지원의 광범화를 동반했다. 뭐라 규정될 수 없는 EZLN 지도부의 성격으로 인해 제각각의 경향들이 EZLN을 자신들의 정치적 관심하에 독해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프랑스 지식인들은 사파티스타를 19세기의 공화주의적 시민의 재생으로 칭송한다. 스페인의 무정부주의자들은 이들을 두루티(Durrutti)의 농민군의 관점에서 본다. 비규정성이 이득을 주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이는 치아파스를 넘어선 일관성있는 전국적 운동을 건설하는 데 한계로 작용하기도 한다. 게다가, 목표의 축소가, EZLN을 구성하는 정치적 경향들 사이의 내적 변화의 반영이 아닌가 하는 문제는 분명치 않다.
EZLN의 현실접근상의 두 번째 변화는, ‘시민사회’에 대한 산만한 호소--시민사회는 ‘자기-조직화’를 낳지 못했다--에서 벗어나, 정부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입증해보인 멕시코의 특정한 그룹들과의 협력과 조정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1996년 6월과 7월에, 백만명의 회원을 주장하는 채무자 조직 BARZON이 사파티스타 구역 내에서 전국 대회를 갖고 사파티스타와 연계를 맺었다. 그후 곧바로, 다수의 전국적, 지방적 인디오 조직들이 같은 곳에서 회합을 가졌다. 같은 시기에 EZLN의 지도자들은 멕시코 지식인들과 함께 국가의 개혁을 논의하는 일주일간의 세미나에 참석했다. 조직화된 그룹들과의 이러한 연계는 전국적인 정치 대안을 건설한다는 보다 큰 약속을 의미하며, 정부로 하여금 포위 전략이 효과가 없음을 깨닫게 만들어주고 있다. 더 중요하게는, 이러한 연계 덕분에 마르코스가 구상하는 운동의 사회적 성격이 그 실체를 획득하기 시작하고 있다.
사파티스타 정책상의 세 번째 변화는 일종의 정치적 해결과 무장투쟁의 조건부 중단에 대한, 배타적이지는 않더라도 압도적인 강조이다. Encuentro에서의 연설에서, 마르코스는 무장투쟁을 투쟁의 초기 ‘국면(phase)’의 맥락에--인정을 획득하고 체제와의 정치적 대화를 개시하며 정치적 해결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위치지웠다. 이는 특히, 자유 민주주의적 공공 의견에 대한 열렬한 제안과, 1996년 6월에 출현한 게레로의 새로운 게릴라 운동(EPR)에대한, 비록 적대적이지는 않지만 거리감있는 관계를 통해 고조되었다. 우리의 대담과정에서, 마르코스는 군사적 투쟁과 정치적 투쟁 사이의 선택의 딜레마를 정교화했다. 그는 분명히 합법적 정치 활동으로의 선회에 열의를 보였지만, 정권은 그 동안에도 군대의 포위망을 좁히면서 용병 조직에 대한 원조를 통해 치아파스의 농민들에 대한 억압을 증대시키고 있었으며 PRI 국가가 정치적, 사회적 생활의 모든 측면들을 지배하는 숨막히는 현실을 중단시키는 데 대해 어떠한 양보도 하지 않고 있었다. 멕시코의 실제적인 정치적 조건들은 극히 억압적이다. 매주 평균 2명의 PRD 지도자들이나 활동가들이 죽음을 당하고 있으며 이들의 수는 세디요 대통령의 당선 이후 250명 이상에 이른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만약 사파티스타가 밀림에서 나와 본격적인 조직활동을 시작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상상할 수 있다.
마르코스는 농업 개혁과 문화적 자율성이 모든 농민 거주지의 핵심적 사안임을 강조했다. 마르코스와 EZLN에게, 토지 분배라는 쟁점은 인디오 공동체들의 자치와 연관되어 있다. 멕시코 정부는, 볼리비아, 과테말라, 에콰도르의 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인디오 문화라는 쟁점을 사회-경제적 변화들 및 자율적인 정치 권력[이라는 쟁점들]과 괴리시키려고 시도하고 있다. 어떤 경우, 정부의 협상대표들은 바깥의 반란 지지자들을 지치게 만들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고 소모전을 벌이길 꿈꾸면서 아무런 의미있는 양보도 제시하지 않고 있으며 재산몰수를 통해 공동체들을 황폐화시킨 뒤 기습적인 군사 공격을 가하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