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울보 > 3.000원으로 만든 매일 반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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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끼고 절약하면서 가족들의 건강까지 챙기느라 힘드시죠? 이 달에는 값싼 재료를 이용한 맛있는 건강 반찬을 배워보세요. 달걀, 콩나물, 두부, 감자, 오징어, 닭고기 등 싸고 흔한 재료들로 얼마든지 맛깔스런 요리를 만들 수 있답니다.



달걀·두부·콩나물로 만든 별미 반찬 …

참치달걀말이
달걀찜
달걀장조림
달걀당근김말이
 
야채치즈프리타타
달걀샐러드
두부조림
두부오븐구이
 
두부고추조림
두부굴소스볶음
두부멸치찜
콩나물냉채
 
콩나물밥
중국식콩나물볶음
콩나물빈대떡
콩나물잡채


신선한 맛이 일품~ 야채 반찬 …

두부야채무침
느타리청포묵무침
가지고기구이
표고버섯두부볶음
 
오이선
오이쇠고기볶음
오이무침
오이곤약나물
 
오이즉석피클
가지배추찜
가지나물
가지된장무침
 
표고버섯튀김탕수
순두부굴소스찜
무실파생채
숙주김나물


식탁이 풍성해지는 해산물&고기요리 …

닭봉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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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05-06-10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아무래도 유어블루님은 나중에 시집가시면 살림박사가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

urblue 2005-06-10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설마요.. -_-;

sudan 2005-06-10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유카리의 표정과 포즈로 말하면, 뭐든 시비처럼 느껴진다는거에요.
그래서 아까 로드무비에 갔다가, urblue의 댓글을 보면서 혼자 웃었다는.

urblue 2005-06-10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대체 어떤 댓글이 시비처럼 느껴졌을까.
유카리 포즈로 다시 읽어봐도 모르겠군요. -_-;

히피드림~ 2005-06-10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맛있겠네여.
흐음, 이 중 내가 만들 수 있는 것들은 몇 가지 안되는 듯.

히피드림~ 2005-06-10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금 발견한 건데. 요리 이미지를 누르면 만드는 방법과 연결이 되네요.^^;;
레시피가 있으면 아무래도 만들기가 어렵지는 않죠.

urblue 2005-06-10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unk님, 그러니까 제가 퍼왔죠. 사진만 있으면 아무것도 못 만드는걸요. 아, 계란찜과 계란말이는 가능. ^^; 글구, 레시피 있어도 전 어려워요. 분명 레시피대로 했는데도, 이 맛이 아니야~ 이럴 때가 한 두번이 아니라니까요. ㅠ.ㅜ
 
 전출처 : 로즈마리 > [스크랩] 미국선 '강간', 한국선 '화간'?

미국선 '강간', 한국선 '화간'?
[해외리포트] 국제적 인권문제 된 한국의 성범죄 판결
  강인규(foucault) 기자
"피해여성이 술에 취해 '필름'이 끊겨 성관계를 했다 하더라도 적극 저항하지 않았다면 준 강간이 아니다." – 2004년 3월 28일 서울고법 형사4부 엄상필 판사

한국과 미국의 '강간죄' 규정의 차이

▲ "데이트 강간" 문제를 특집으로 다룬 주간지 <타임>의 표지.
ⓒ2005 TIME
'데이트강간'이라는 말이 있다. 한국에서도 간혹 사용되는 말이지만, 아직까지 이 개념은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정서에 잘 부합하지 않는다. 합의에 의한 '데이트'와 상대의 의사에 반하는 '강간'이 상호모순적인 개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스스로 원해서 만나는 남자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강간'이 성립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사회에서 '데이트 강간'은 성범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심각한 사회문제다. 미국남성들이 한국남성들보다 성적으로 더 억압적이고 폭력적이어서가 아니다. '강간죄'에 대한 규정과 법집행이 한국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엄격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형법은 여자들이 '완강히 저항'하지 않는 한 합의에 의한 성관계로 파악한다. 그러나 미국은 이와 정반대로, 여성이 능동적으로 동의를 표시하지 않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성적 행위는 강간으로 간주한다. 한국에서 '적극적 저항'을 범죄의 구성요소 보는데 반해, 미국에서는 '여성의 적극적 동의'만을 '합의에 의한 성관계'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여성의 동의에서 성관계가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어느 순간이라도 여성이 반대의사를 표하면 상대방은 즉시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성의 의사에 반하는 성적 행위, 즉 성폭행으로 간주된다. 여성의 적극적인 동의를 얻는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 '동의'가 어떤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인지가 동의 자체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성의 '동의'는 온전한 판단력을 가진 상태에서 이루어진 자발적인 것이어야 한다. 물리적 폭력이나 언어적, 심리적 협박에 의한 것이 '동의'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술이나 약물 등으로 온전한 판단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에서 내린 결정 역시 '동의'에 포함되지 않는다.

당연히 '동의를 할 수 없는' 상태의 여성과의 성관계는 모두 강간으로 분류된다. 여기에는 성숙한 판단이 불가능한 미성년자와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의 정신적 장애자들이 포함된다. 따라서 이들과는 어느 경우라도 '동의에 의한 성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성범죄를 조장하는 성범죄 판결

지난 3월, 한국에서 만취상태에서 성관계를 가진 한 여성이 형부를 준 강간죄로 고소한 사건에 대해서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한 일이 있다. 판결문은 무죄선고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고소인이 술에 취해 이성적 판단이 흐려진 상태에서 형부의 성관계에 응했거나 적극 저항하지 않아서 피고인이 동의한 것으로 알고 성관계를 가진 것 같다."

미국 대부분의 주가 명시하고 있는 형법에 따르면, 위의 사건은 명백히 강간에 해당한다. "이성적 판단이 흐려진 상태에서" 내려진 판단이 '동의'에 해당하지 않는 것은 물론, 합의에 의한 성관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의사 표명'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적극 저항하지 않아서 피고인이 동의한 것으로 알았다"는 앞의 '무죄항변'은 오히려 강간죄를 스스로 고백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는 14살의 미성년자이며 정신지체 장애인 여성을 5년에 걸쳐 8차례 성폭행한 사건에 대해서도 법원은 무죄판결을 내렸다. '어른이 겁을 줘 옷을 벗게 한 후 성폭행한 점은 인정되지만 절대적으로 반항이 불가능한 상태는 아니었다'는 것이 무죄판결의 이유였다.

"장애인 미성년자이더라도 항거불능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무죄다." –2004년 9월 16일 부산고법 형사2부 윤재윤 부장판사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인구 10만 명당 강간사건 발생회수는 14.3건이었다. 이는 2003년보다 0.8건이 더 늘어난 것으로, 사건 총수로는 428건이 더 증가한 6959건을 기록했다. 같은 해 미국의 인구 10만 명당 강간사건 발생회수는 32.1명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한국이 미국보다 성범죄문제가 덜 심각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미국의 성폭행 신고비율이 54%에 이르는 반면, 한국은 6%대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신고비율을 고려한 한국의 10만 명당 강간사건 발생비율은 238건으로, 미국(59건)의 4배를 넘어선다. 여기에 기소율과 미국이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포괄적이고 엄격한 법규정을 통해 성범죄를 처벌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격차는 훨씬 더 커진다. 위의 통계수치에는 기소된 사건만 포함되어 있고, 한국에서 신고된 성범죄사건 중 기소되는 비율은 3분의 1 미만이다.

한국 남성법조인 60% "'야한 옷' 성범죄 유발"

미국은 물론이거니와, 강간 사건에서 피해자의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은 전 세계적인 상식이다. 미국 위스콘신 대학 캠퍼스에 비치되어 있는 한 교육안내서에는 성폭력이 "언제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로, 결코 피해자가 입고 있는 옷이나 피해자가 있는 장소, 또는 하고 있는 행동과 무관하다"고 못 박고 있다. 이 안내서는 "성폭행은 피해자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으며 사건의 모든 책임이 가해자에게 있다"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 "강간위기센터"의 교육책자. 어떤 경우라도 성범죄 피해자에게는 책임이 없음을 명시하고 있다.
ⓒ2005 UW-Madison
이 안내서도 말하고 있듯이, 성폭력이 '성적 욕망'때문에 발생하는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폭력성, 분노 그리고 권력에 의해 매개된 가해자의 자발적 행동임은 이미 오래전에 밝혀진 사실이다. 성폭력이 '성적 욕망의 크기'에 따라 무차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연장자가 연소자에게, 그리고 사회적 위계가 높은 사람이 아래의 상대에게 성폭력을 가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실시한 한 여론조사 결과는 그런 면에서 대단히 충격적이다. 이 조사에서 한국 남성법조인의 60% 이상이 '여성의 야한 의상이 성범죄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답변했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성범죄 판결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말해준다.

한국은 성폭력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이 사실을 알리겠다'고 협박할 수 있는 아주 독특한 사회적 환경을 지닌 곳이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협박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한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 부조리극을 가능케 하는 것은 성폭력 피해자를 비난하는 한국의 왜곡된 성의식 때문이다. 피해자를 비난하는 이 야만적인 문화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아주 기초적인 상식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형법은 성폭력이라는 끔찍한 범죄 상황에서 피해자에게 '필사의 저항'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 법논리 뒤에는 남성중심적 사고방식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한국과 달리 미국의 형법은 철저히 피해자의 신변보호에 초점을 두고 있다. 범죄구성요소로 피해자의 '저항'을 요구하지 않는 것은 물론, 피해자의 저항행위가 목숨을 위협하는 대단히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때로는 가해자를 공격하는 것이 범죄를 피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위험을 불러오는 경우도 많다. 통계자료에 따르면, 성폭행의 17%, 그리고 폭행미수의 39%가 피해자에게 육체적인 상해를 초래한다. 성폭행은 가해자가 흉기를 가지고 있든 그렇지 않든 피해자의 목숨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폭력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가해자와 맞서 싸우는 것이 상황을 피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더 나아가 대단히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 "강간과 성폭행: 당신이 알아야 할 것," Binghamton,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저항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의 여부는 피해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름에 불구하고, 한국의 형법은 '목숨을 건 사투' 아니면 '합의에 의한 성관계'라는 이분법을 강요하고 있다.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범죄 상황 하에서 '적극적 저항'을 요구하는 것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지닌 국가기구가 할 일이 아니다. '정절 아니면 목숨'이라는 조선시대의 '은장도 정신'이 현대의 법정신이 아니라면 말이다.

바뀌고 있는 '강간'의 정의

▲ 미국의 모든 교육기관에서는 성범죄 피해예방과 사후조치를 위해 가해자의 책임과 피해자의 권리에 대해서 지속적인 교육을 벌이고 있다. 사진은 미국 대학 곳곳에 비치되어 있는 교육안내자료.
ⓒ2005 U. Health
2003년 1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로라라는 이름의 한 여성이 남자친구 존과 합의에 의한 성관계를 가졌다. 관계 도중 그녀는 마음을 바꾸어 "이제 집에 가겠다"고 말했다. '그만 두라'는 구체적인 거부의 의사가 아니라고 생각한 남자친구는 행위를 계속하다가 그녀가 네 번째로 "집에 가야 한다"고 말하자 그녀를 놓아주었다.

이후 그 남자는 강간죄로 구속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명백히 동의에 의해 성관계를 시작했다 하더라도 상대가 마음을 바꾸어 거부의사를 표하면 즉시 그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 캘리포니아 대법원의 판결이었다. "집에 가야 한다"는 것은 충분한 거부의사의 표시였고, 따라서 그녀의 의사에 반한 채 계속 성행위를 한 것은 명백히 "강압에 의한 강간죄(offense of forcible rape)"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 클레어 쿠퍼, "법원판결: 강간은 여성이 거부의사를 표명할 때 시작된다" <새크라멘토 비> 2003. 1. 7.

피고는 피해자가 "집에 가겠다"라는 첫 발언이 있은 후 5분, 그리고 네 번째 말을 들은 후 1분여 만에 그녀를 놓아주었다는 사실을 들어 무죄를 주장했다. 그리고는 남자의 생리적인 특성상 곧바로 행동을 멈출 수 없다는 부분을 고려해야 한다고 항변했으나,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유죄를 선고했다. 피고의 거부의사를 들은 이후에도 피고가 계속해서 양손으로 원고의 허리를 잡은 채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강간'의 범죄구성요소로 충분하다는 판결이었다.

이 판결이 있은 후 미국 대다수의 주들이 '강간'의 법규정을 수정했거나 수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합의에 의한 성관계'를 강간의 예외적 사례로 보는 기존의 입장을 탈피해 '합의'는 여성이 거부의사를 표시하는 순간 효력을 상실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 반해 한국에서는 94% 이상의 법조인들이 "피해자가 가해자와 함께 여관에 들어간 경우 성폭력으로 인정받기 불리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고 2003년 성폭력상담소 여론조사는 밝히고 있다.

낸시 깁스는 이런 견해를 여성의 자기결정권의 입장에서 비판한다. 그녀에 따르면, "여성이 남자와 술을 함께 마시거나, 함께 밤길을 걷거나, 심지어 열정적인 키스를 나누고 싶다고 해서, 그녀가 바닥에 억지로 눕혀져 성폭행을 당하고 싶다는 것까지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 낸시 깁스, "강간은 언제 시작되는가" <타임>, 1991. 6. 3.

국제사회에서 인권문제로 다루어지는 한국의 성범죄

미국무부에 제출된 한 보고서는 만연한 성범죄로 고통 받는 한국여성의 상황을 '인권문제'의 하나로 다루고 있다. 2004년 2월에 발간된 이 보고서는 가정폭력과 함께 사회에 만연한 성범죄를 심각한 사회문제로 분류하고 있다.

"강간은 심각한 상태이다. 1월부터 9월까지 1만3914건의 신고가 접수되었으나, 이중 3630건만 기소되었다. 강간사건에 따르는 피해자의 사회적 오명 때문에 많은 사건이 신고되지 않은 채 지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수의 여성단체들이 사건 신고와 처벌의 중요성을 알리고 있으며, 직장 내 성희롱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교육을 벌이고 있다. 여성단체의 보고에 따르면, 다수의 강간사건이 기소되지도 않은 채 무마되고 있으며, 성범죄자로 기소되는 경우도 아주 미약한 처벌만을 받는다." - "인권실천에 관한 국가 보고서," 미국무부 제출, 2004. 1. 25일 발간.

남성중심사회를 살펴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모순을 발견한다. 하나는 남성이 언제나 여성보다 '이성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해자의 입장이 되면 갑자기 여성의 옷 하나에도 통제력을 상실하는 지극히 비이성적이고 나약한 존재로 돌변한다. 물론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나면 즉시 '이성적인' 지배자의 위치로 복귀한다.

한국의 성범죄 법체계에 반기를 들어야 할 사람은 누구보다 남성들이다. 한국의 형법이 가정하고 있는 바, 스스로 비이성적이고 충동적인 존재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완강한 저항'이 없는 한 가해자의 손을 들어주는 법체계는 남성들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끔찍한 범죄자가 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 비인도적 법 앞에서 침묵한다면 우리는 끔찍한 범죄를 묵인하고 있는 공범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사실은 법원에서 당신을 '무죄'로 판결해준다고 해서 달라지지는 않는다.
2005/05/31 오후 2:03
ⓒ 2005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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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토랑 2005-06-01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두 오늘 아침에 오마이 에서 이 기사 보고, 퍼올까 말까 생각했었는데 ^^;;
크.. 이런글 읽으면 너무 화나지 않으세요? 물론 모 우리나라 법이 말랑하지는 않겠지만, 분위기를 바꾸어갈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참.. 화도 나고 그렇답니다.

urblue 2005-06-01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저 성범죄 무죄 판결 보고 'XX XX XXX'이라고 욕했었죠. 사람들하고 얘기할 때 자기 가족이 당해봐야 알거라는 심한 소리도 나왔었답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알 수가 없다니까요.
 

4. 좌파 부활에 대한 몇 가지 고찰

1) 옛 좌파와 새 좌파 사이의 골

라틴 아메리카 전체를 통해 최근의 상황중 가장 놀라운 것은 1960년대의 이전 좌파들이 1990년대의 세 번째 물결의 혁명가들에게 최소한의 영향만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의 ‘후광’ 효과는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 농민들의 토지 점거의 분출, 직접 행동의 정치는 두 번째 물결의 합법주의적, 선거주의적 정치와 그 실용주의적인 중도좌파 연합 사이에 긴장을 창출시키고 있다. 새로운 혁명가들은 공동체들과 협동조합들, 지방 자치체들 내에 민중 권력의 자율적 중심들을 건설하는 전략을 발전시키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투쟁을 지원하고 진보적 입법안을 통과시키며 억압적 체제로부터 철수하라고 중도좌파에게 요구하고 있다. 우선회하는 선거 연합들과 좌선회하는 사회-정치적 운동들이 서로 갈라져 각기 자신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은 단지 시간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중도좌파 정부에 대한 대중적 탈주술화는 이들의 풍토병적 부패, 긴축정책, 억압, 민영화 등에 대한 의존으로 인해 자극되었다. 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가령 칠레, 베네주엘라, 볼리비아, 니카라과 등의 전(前)혁명가들, 좌파 정치가들은 모두 이런 형태의 이러저러한 불신을 자초했다. 전국적으로 정권을 획득하는 데 실패한 1980년대의 반항적 정치가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토대를 상실해갔다. 이들의 선거상의 시도들은 패배당했으며 이들의 신화는 사라져버렸다. 약간의 지방적 예외를 제외하면, 이들은 운동들을 건설하고 사회변혁의 장기적 강령을 선전하기 위해 선거상의 개입을 활용하는데 실패했다. 심지어는 브라질의 PT와 멕시코의 PRD마저도 지금은 자기네 나라의 위기와 대결할 분명한 강령을 결여하고 있으며, 우익의 기민한 새 세력들(카르두수와 PAN)과 좌익의 새로운 의회 외부 운동들에 의해 포위되어버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순전한 정치꾼들로 보여지는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카르데나스가 멕시코 시티 시장직 선거에서 승리한다면, 활동가들은 PRD 행정부가 억압적 세력의 날개를 잘라내고 민중 운동을 강화하는 데 지방자치체의 이니셔티브를 활용하길 희망할 것이다. 마르코스는 중앙 아메리카에서의 평화협정들 및 라틴 아메리카의 그외 대다수 지역들에서의 군부와 IMF의 비호하의 ‘민주화’의 제한성을 통렬히 경고하고 있다. 좌파가 선거상으로 전진하고 있는 경우에도 이는 단지 실질적인 후퇴를 은폐하는 것일지 모른다. 엘 살바도르에서는, 1992년의 평화협정으로 인해 FMLN의 선거상의 전진이 가능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좌파가 1997년 3월 최초로 수도인 산 살바도르의 통제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민주농민연합(Asociacion Democratico Campesino)의 활동가들은 당연히 죽음의 군단의 테러 통치의 종식과, 대중들의 압력에 대해 보다 더 개방적인 성향을 지니는 지방 정부의 출현을 환영했다. 그러나 [중앙] 정부 정책들이 빈농들과 농촌 노동자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히는 동안, FMLN은 ‘생산적 자본가들’에 대한 그 정책지향으로 인해 이들의 이해에 대한 관심을 제한시켰다. 이번의 마지막 선거에서, 기권율은 60%에 이르며 많은 빈곤층이나 농민층 유권자들은 투표하러 가지 않았다. 지주와 고용주들의 협박이 많이 줄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기간중에 4명의 활동가들이 살해당했다.      

2) 정치와 혁명적 윤리

마르코스는 라틴 아메리카에 새로운 형태의 지도자상을 보여주었다. 마르코스와 다른 농민 지도자들 사이의 차이는 분명하다. 마르코스는 라틴 아메리카의 그의 다른 동료들이 감히 필적할 수 없는 문학적 세련됨을 갖춘, 도시 출신의 지식인이다. 하지만 마르코스는 사회혁명의 문화적, 주체적, 역사적 차원들에도 동등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마르코스와 그 새로운 지도자상은, ‘국제적으로(internationally)’ 사고하는 동시에, 지방적 풍습들, 전통들, 규범들의 미묘한 음조에 대한 감수성을 통해 ‘일국적(national)’이고 지역적인 현실에도 깊숙히 기반하고 있다. 새로운 지도자들중 그 누구도 이제는, 과거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외국의 경험에서 추출된 어떤 ‘모델’을 추종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개인숭배 문화를 피하고 기층에 대해 민감해야 할 필요성을 의식하고 있다. 새로운 지도자들은 뛰어난 조직가들이며 능력있는 지도자들이지만, 카리스마적인 웅변가나 공산당식 정치국원은 아니다. 그들은, 최소한 어느 정도는, 복종함으로써 통치하고 있으며, 감정적인 열정을 통해 자신들의 생각을 투사들에게 강요하지 않고 토론을 통해 납득시키길 추구한다.    
광범하게 유통되는 민주주의 수사와 선거 체제의 지속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지도자들은 정부의 지령을 통해 면죄권을 갖고 활동하는 다양한 초사법적 용병 조직들이 가하는 암살의 지속적 위험을 의식해야만 하는 처지에 있다. 가령 마르코스는 그를 살해당하게 만들려는 멕시코 정부의 의도를 꽤 경계하고 있었다. 목숨이 위태로운 위험한 상황이 표현적으로는 계속 현존하고 있지만, 이것이 강박관념으로 작용하거나 지도자들의 활동을 약화시키거나 제한하는 것은 아니다. 벙커 안에 숨어서 지휘하는 것은 허약성이나 심지어 비겁함의 표시가 될 것이다. 그들은 회합과 시위 와중에 항상 나타나며, 많은 경우, 구타당하고 체포되어 멀리 떨어진 감옥에 보내진다. 투사들은 투쟁을 함께 하는 이러한 지도자들을 존경하고 있으며, ‘[투쟁 속에] 얼굴 보이기’는 가난한 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다. 새로운 지도자들은 새로운 운동들의 창출에 일조했지만, 그들 자신 이러한 새로운 운동들의 산물--그 사회-경제적 이해에서뿐만 아니라 윤리에 있어서도--이기도 하다. 1990년대의 새로운 농민 및 도시기반 운동들의 부활은, 이들 운동이 생생한 이해들을 방어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누구도 자신들의 지도자의 인격상의 청렴성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만약 지도자들이 이러한 자질을 상실한다면, 이 운동들은 해체되거나 선거주의적인 의뢰인-후견인(clienteles) 정치로 파편화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조직들은 단순한 ‘신사회운동들(new social movements)’이 아니다. 그들은 맑스주의를 견지하고 있으며, 새로운 환경 속에서, 정치-경제 권력의 국가적인--비록 국제적이지는 않다 하더라도--구조의 변화라는 분명한 전망을 지니고 새로운 형태의 투쟁에 관계하고 있는 새로운 계급 행위자들에 걸맞게 맑스주의를 발전시키고 있다. 이전의 광부들이 코카 경작자들이 되고, 도시 지식인들과 결합된 인디오 공동제들이 게릴라 운동을 주도하며, 농촌의 무토지 노동자들이 반(反)자유주의 권력 블럭을 건설하고, 과라니어를 사용하는 농민들이 마약과 밀매 ‘자본가들’의 헤게모니에 도전한다. 즉 맑스주의는 사회 변화의 이러한 새로운 주역들과 결합함으로써 창조적인 도구로 거듭날 수 있다.    
새로운 운동들의 고무적인 측면은, 환경적으로 수탈적인 사회-경제 체제와의 대결로 인해 이들의 저항이 지속가능한 생태계의 방어에 대한 강력한 헌신과 곧잘 결합된다는 점이다. 자신들의 고향 땅에 대한 원주민 민중들의 자기동일시는 농촌 급진주의의 강력한 요인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여성들이 그토록 빈번히 민중 생존 전략의 예봉 역할을 맡는 탓에, 새로운 운동들은 운동이 여성들의 쟁점과 성 평등 문제에 대해 관심을 보일 때에만 번성한다. 전국적 지명도를 지닌 지도자들의 대부분은 여전히 남성들이지만, 공동체 수준에서 지도적 역할을 맡은 여성들의 수는 증가하고 있다. 생활용수가 오염되거나 전통적 경작 분지가 개발자들에 의해 점령되었을 때, 이로 인한 대중 투쟁의 최전선에 나서는 것은 매우 빈번히 다름아닌 여성들이다.      
거의 모든 새로운 지도자들은, 직접적으로든 그들 조직원들과의 어울림을 통해서든, ‘종교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사파티스타는 치아파스의 진보적 가톨릭 교도들, 특히 사무엘 루이즈(Samuel Ruiz) 주교 등의 의식화작업에 크게 기대고 있다. MST의 대부분의 초창기 조직가들은 가톨릭 신학교나 농촌의 교구사제 운동들로부터 배출되었다. 파라과이 농민 지도자들중 일부는 진보적 교회인들에 의해 추동되었던 농민동맹(Ligas Campesinas)의 초창기 투사들의 자녀들이다. 볼리비아의 지도자들은 인디오 공동체들의 정신적 전통에 기대고 있다. 민중의 종교성과 맑스주의는 혼합주의적 형태로 결합될 수 있다. 하지만 1980년대의 상투적 사고를 계승하는 것은 주의해야만 한다. 가톨릭 해방신학은 사회적으로 급진적인 세력으로서 남아 있지만, 다수의 국가들에서 그 힘은, 부분적으로는 바티칸의 적개심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NGO 문화에 의한 그 파편화된 복구 때문에, 다소 쇠퇴해버렸다. 이에 반해, 개신교나 오순절운동(Pentecostal) 교파들은 라틴 아메리카의 많은 부분들에서 역동적이고 성장중인 세력으로 존재하면서 농촌 및 도시의 가난한 자들과 여성들, 인디오와 흑인 인구들에게 특별한 호소력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라틴 아메리카에는 현재 카톨릭교도들보다 개신교도들이 더 많다고 한다. 라틴 아메리카 프로테스탄트주의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충복이라는 점에서 좌파의 가장 첨예한 라이벌이라고 인식되어야만 한다. 이는 정치 제도에 대한 민중의 적개심을 피안으로의 지향으로 왜곡시키고 있으며, 가장 박탈당한 자들 사이에서 자조와 자기개혁을 고취시키고 있다. 제도권 좌파 정당들이 이러한 도전에 응전하는 데 실패한 데 반해, 새로운 운동들은, 그 실천적인 선거-외적 지향으로 인해, 그럴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3) 도시의 조합과 농촌의 조합

작년 여름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노조연맹체들은 성공적인 총파업을 조직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파업으로 인해 모든 산업 생산이 정지되었고 거의 모든 상업 유통이 단절되었다. 브라질에서는 천2백만명의 파업 노동자들이 산업활동을 정지시키고 대부분의 지방주들의 상업유통 또한 마비시켰다. 이러한 행동들에 대한 대중적인 참여는 그것의 빈약한 정치적 성과와 대조될 수 있다. 더욱 심화되어가기만 하는 실업 위기--아르헨티나에서는 노동력의 17% 이상, 즉 노동계급의 1/4이, 그리고 브라질에서는 사웅 파울로 지구 내의 15% 가까이가 실업상태이다--는 최근 15년 내 최악의 상태이다. 불만은 점점 더 카르두수와 메넴의 체제에뿐만 아니라 공식적 노조 지도부, 특히 사웅 파울로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전국 지도부에로도 향하고 있다. CGT와 CUT 지도부에 의한 총파업 소집령은 본질적으로 이러한 분노를 굴절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총파업은 전략적 전망을 결여한 의례적인 행동에 그쳤으며 많은 부분 보여주기식 저항으로 한정되었다. 정치 지도자들 역시 총파업을 그런 식으로 이해했으며 자신들의 신자유주의적 의제를 완화하는 외에는, 대중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려는 일말의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파업의 상징적 의미는 도시와 농촌의 이해들 사이의 동맹이라는 유령을 깨우고 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지방주들과 대도시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유대가, 브라질에서는 무토지 농민운동과 사웅 파울로의 산업 벨트 사이의 유대가 발전하고 있다.
공공부문 노동자들, 특히 지방주들의 공공 노동자들이 새로운 노조 투쟁의 선두에 나선 한편--교육과 보건부문에서의 예산 삭감, 세계은행과 IMF의 예산 권고치를 충족시키기 위한 공공 노동자들의 대량해고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된다--, 수출 이윤을 늘리고 새로운 투자들을 유인하기 위해 [비용] 삭감의 새로운 라운드가 민간부문의 자본가들의 인건비를 낮추고 ‘무비용’ 해고(‘no cost’ firings)를 용이하게 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 결과, 계층하락하고 있는 공공 노동자들과, 사회적 권익--가족 수당, 상여금 지급, 휴가 등등--의 상실과 과잉인원이라는 협박에 시달리는 민간부문 임금노동자들 사이에는 공통의 이해의 ‘합류(confluence)’가 나타나고 있다. 총파업은, 따라서, 이러한 새롭고 잠재적으로 탈안정화의 힘을 지닌 합류의 첫 번째 징후일 뿐이며, 지속되기만 한다면 이는 신자유주의 정권들을 위태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노조 투쟁과 노동계급 전투성의 재등장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노조 반란의 주된 측면은, 예산 삭감과 임금에 대한 하향 압박의 새로운 물결에 대항해 현존하는 사회적 입법과 이전의 임금을 방어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투쟁성은 이전의 민중주의적, 사회민주주의적 시기로부터 연유하는 잔존 요소들을 고수하는 데 기반하고 있다. 따라서, 파업들과 점증하는 투쟁성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의 성장을 반영하긴 하지만, 이들이, 자본주의의 주기적 마비를 생산 및 분배의 새로운 형태의 사회화로 나아가는 어떤 이행으로 변전시킬 일종의 대안적 전략 개념을 동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농민운동들의 부상은 도시 노동자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칠 전례를 제공했으며, 이들 운동이 자극하고 있는 새로운 투쟁성은, 역으로, 낡은 전위의 ‘협상주의(pactism)’와 협조주의적 지도노선으로부터 독립적인 ‘새로운 노동조합주의’의 창출의 길을 열어주고 있다. 중도좌파 정당들이 사회운동을 저버리는 동안, 농민운동은 토지 점거로, 지방의 시민 연합체들과 노조들은 총파업으로 방향전환했으며, 무장 조직들은 ‘해방구들’을 창조했다. 하지만 조직상의 파편화는 이러한 운동들의 성공에 심각한 도전을 제기한다. 이것이야말로 권력에 대한 진지한 도전에 있어서 유일한 주요 장벽이다. 이는, 수많은 지방 무장 농민들, 채무자들, 인디오들, 공동체 그룹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지만 각각 자신들의 제한된 형태로써만 일당 국가의 집중화된 권력에 대항하고 있는 멕시코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농촌지역에서의 농민 투쟁의 재생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도시들에 뿌리를 둔 어떤 정치적 수단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전국적 정치-사회 조직을 요구하고 있다.

4) 새로운 식민주의(New Colonialism)

자신들의 국내법인 헬름스-버튼 법(Helms-Burton Law)을 전지구에 대해 강압하려는 미국 정부의 시도--법률 용어로는 ‘초영토성(extra-territoriality)’이라 언급되는--는 미국 외교 정책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제국주의적 이해의 집중성이 발전하고 있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형벌부과는 라틴 아메리카 국가의 행정, 군사, 정보 기구들의 고위층에 대한 미국의 사실상의 침투라는 맥락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많은 논평가들이 미국 은행들에 의해 특히 채무 위기를 통해 수행되는 금융 통제에 대해 비판한 바 있고 또 다른 이들의 경우 미국에 의해 세계은행과 IMF에서의 그 권력 지분을 통해 초래되는 인플레이션의 만연을 비판한 바 있지만, 이러한 강력한 경제적 압력이 어느 정도나 미국 관리들이 수행하는 직접적인 정치적, 군사적 통제와 나란히 작동되고 있는지에 대한 보고는 제출된 바가 거의 없다. 워싱턴은 마약 밀매상과의 전투라는 외양을 걸치고서 라틴 아메리카 군대를 미국의 지휘하에 조직했는데, 이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착수되었지만 아직까지 채 달성되지는 못한 목표이다. 멕시코, 볼리비아, 콜롬비아에서 미국 대사와 국무성은 일상적으로, 어떤 군 간부와 내각성원이 환영할만한지와 어떤 이를 해임시킬 것인지를 지령하고 있다. 그리고 늘상 라틴 아메리카인 행정관료는 이를 순순히 따른다.      
라틴 아메리카의 국내 안보 사안들에 대한 미국의 통제의 강화는 라틴 아메리카 정부들에 대해 각국의 재래식 군대 규모는 줄이면서 국내 경찰과 군사적인 억압기구들은 강화시키라고 압박하는 워싱턴의 정책과 병행되고 있다. FBI와 DEA의 요원들은, 전술적인 수준에서조차, 라틴 아메리카 국가의 요원들에게 정보제공과 해외작전을 요구하면서 수사를 지휘하고 있다. 볼리비아의 차파레와 페루의 우알라가 고원(Upper Huallaga Valley)에서 DEA 요원들은 누가 작전을 지휘하고 있는지를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라틴 아메리카 장성들과 대통령들은 미국이 자신들을 ‘마약 밀매상’이라고 낙인찍을 경우 자신들의 지위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매우 염려하고 있다. 미국의 강고한 영향력은, 열과 성을 다해 미국 외교 정책의 입장을 알아서 추종하는 메넴 대통령의 경우와, 수백만 동포들의 궁핍화는 아랑곳없이 외채를 앞당겨서 상환하는 멕시코 세디요 대통령의 경우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마약 문제는 라틴 아메리카 내에 미국의 권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하나의 핑계이다. 미국의 무역불균형을 미국 은행들을 통한 돈-세탁에 의해 벌충하기 위해 마약 자금이 활용된다는 사실은 마약-퇴치 프로그램 안에 결코 쟁점으로 등장한 적이 없다. 20세기의 끝무렵에 라틴 아메리카 매입(Latin America Purchase)은 전면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수익성있는 주요 라틴 아메리카 공영 석유회사들은 모두 매각 상태이다. 마퀼라도라(maquiladora) 공단지대나 고착취 자유무역지대는 외국자본 주도의 새로운 수출 전략의 상징이 되어가고 있다. 미국 기업들은 현재 패스트푸드 산업과 문화 및 매체 부분의 매상에 대해 막대한 지분을 장악하고 있다. 미국 기업들은 소매품 판매점과 쇼핑 센터뿐만 아니라 부동산에 대해서도 적극적이다. 미국이 후견하는 군사화는 이러한 ‘매입(the Purchase)’을 경호하는 데 맞추어져 있다. 새로운 제국주의는 ‘신식민지적(neo-colonial)’이지 않다. 아니, 이는 차라리 직접적이고 일상적인 행정적 통제의 문제이다.  
새로운 제국주의는 라틴 아메리카 경제의 보다 막대한 착취를 통해 미국의 세계적 위치를 강화하려 시도하고 있다. 미제국 건설의 기본 동력은 해외 이윤에 대한 미국 다국적 자본의 최상층부분의 결정적 의존, 아시아와 독일에서의 적자를 메꾸기 위해 라틴 아메리카에 주목해야만 하는 미국 경제의 결정적 의존에 의해 규정된다. 미국은 대륙의 불안을 억제하기 위해 두 개의 새로운 수단을 고안해냈다 : ‘세계화’의 이데올로기와 비영리적 NGO들의 부양. 첫 번째 것은 지식인들을 미래의 필연적 물결 앞에 굴복하도록 신비화시키기 위한 것이며, 두 번째 것은 일국적 복지국가를 해체시킬 수단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 개입의 폭과 깊이는 계속해서 사회계급의 거의 모든 층들의 토대를 침식하고 있다 : 중소 기업은 부도로 내몰리고 있고, 공공 노동자들은 궁핍화되고 있으며, 농민들은 땅에서 내몰리고 있고, 공장 노동자들은 비항시적으로 고용되어 아주 낮은 임금만을 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고 있기에, 지식인들중의 일부 무리조차 머뭇거리는 태도로 사회분석과 정치실천의 중심 개념으로서 제국주의라는 관념을 되살리기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5. 결론          

제국의 건설은 대략 다음의 것들을 포함한다 : 이자 상환 수탈, 자연 자원들의 강탈, 그리고 다국적 자본으로의 공공 재부의 대량 이전. 이러한 힘들이 함께 몰아 닥쳐 라틴 아메리카 사회 체계에 엄청난 압박을 가했다. ‘지방 권력체’가 그 지방의 중심 도시들에 위치해 있는 탓에, 수탈과 전유의 과정에서 ‘지방주들(provinces)’과 농촌 지역들이 특히 고난의 급소로 등장하게 되었다.
새로운 농민운동의 확산의 논리는 본질적으로 제국주의 요구의 심화되는 침투에 대한 변증법적 저항뿐만 아니라 농민들 내의 변화--정치상의, 문화상의, 그리고 경제상의--와도 관련있다. 오늘날의 농민들은 시장 지향적이며 또한 노동자 지향적이다. 신용, 시장, 기술 원조에 이르는 접근로들은 그들의 임금노동자로서의 계급 조건들의 증대와 연결되어 있다. 교육받은 농민들의 근대적 도시 중심으로의 이전 경험은 농촌 투쟁을 도시 계급투쟁과 연결시킬 근대적인 조직화, 매체 기술을 지닌 새로운 농민들을 창조하고 있다.
현재의 농민운동들을 원초적 반란의 마지막 몸부림으로 폄하하는 것은 중대한 오류일 것이다. 농촌과 도시 사이의 운동은 더 이상 일방적이지 않다. 도시에서의 고도의 범죄율과 사회적 시설의 조락은 도시 생활의 이득을 감소시켜왔다. 운동이 토지를 점령하고 공동체들을 건설하자 인구의 도시 유출에 대한 농촌의 안정화--그 역이 가능하게 되진 않았다 할지라도--가 가능하게 되었다. 인구학적 변화를 강제하는 본래적이고 역사적인 논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이는 많은 부분 일종의 정치적인 문제이다. 이자 지불, 코카 재배자들의 억압, 수출-경작 복합체의 특별 보조금 등은 무엇보다도 국가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것들이다.
지금까지 제국은 전례없는 번영을 구가해왔다. 광물 자원 전유의 조건들, 시장에의 접근로, 낮은 노동 가격, 정부와 군부에 대한 영향력은 최상의 상태였다. ‘개혁’의 공간은 자유 시장, 선거 체제, 군사적 통제의 공식 안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의 변증법적 반대편 극에는 도시 중간 부분의 조락과, 직접적 사회 행동으로 나아가고 있는, 점차 궁핍화되어가는 노동자들과 공공부문 피고용인들의 급속한 축적이 있다. 바로 이러한 과도한 제국주의 때문에 새로운 농촌 운동들은 전국적인 정치적 영향력과 탁월함을 얻어가고 있는 것이다.
문화적 자율성과 소규모 생산을 고도의 전략적 가치를 지닌 경제영역에 대한 통제와 연결시키는 사회주의적 실천의 혁신과 함께, 농지 개혁이라는 제한된 이슈로부터 사회적 변혁으로 나아가는 근본적 전환이 취해져야 한다. 제국은 라틴 아메리카 사회의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골격을 강타하여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그것은 극소수만을 흡수하고 다수를 착취했다. 그러나 좌파가 다시 반격에 나섰다 즉 파라과이와 볼리비아의 시골에서, 브라질의 농촌 공유지 촌락에서, 멕시코의 밀림에서, 새로운 운동이 등장하여 그 고유의 이론을 발전시키고 있으며 그 고유의 역사를 써나가고 있다.  [장석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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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dan 2005-05-25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회사에서 일은 안하시고.

... 라고 말하는 사람도 회사에서 노는 중. 흐흐.
(읽을거리 많아서 좋군요. 좋은 정보들이에요.)

urblue 2005-05-25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사에서 할 일 없는 사람의 비애,
라고 말하려했더니 일이 갑자기 쏟아지는군요.
아, 오늘은 완전 지쳐버렸어요.

urblue 2005-05-26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저도 아직 다 못 읽었어요. ㅠ.ㅜ
 

3. 각국의 사례

1) 브라질 : MST                  
        
MST는 엄격하게 말하면 혁명적 조직이라고 할 수 없으며 권력의 장악을 지향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 조직은, 비경작 토지가 사회적 용도를 위해 몰수될 수 있게 보장하도록 헌법을 적절히 개정할 것을 지향하고 있다. 따라서 이 조직은 ‘합법주의적’이면서 또한 직접 행동을 지향한다. 직접 행동의 정치는 민주주의 이데올로기--그리고 헌법의 진보적 대의--와, 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지배계급의 사회-정치적 속박 사이의 간극을 파고든다.
좌파의 부활은 독특한 배경 속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따라서 쉽게 분류될 수 없다. MST는 주로 남-중부 지역에 기반한 일종의 지역적 운동으로부터 출발하여 북부, 북동부, 서부 지역의 농촌에서도 점차 활동을 증대시키고 있는 조직가들을 보유한 하나의 전국적 운동으로 성장했다. 이들의 투쟁은 도시의 노조들이나 교회 부분들로부터도 점차 지지를 얻고 있다. 리우와 사웅 파울로의 대부분의 favelados들이 이들에 대해 존경과 공감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최근 몇 달동안 이들은 대중적 지지의 결집을 촉진하고 동시에 도시 세력들과의 연합을 이루기 위해 각 주의 소도시들 주변에 대한 대규모 토지 점거운동을 조직화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전환했다. 대규모 비경작 단지 내의 심장부에 들어서자마자, 이들은 점증하는 폭력에 직면하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불법 정착자들을 내쫓으려는 지주들에 의해 고용된 약탈 저격수들을 막기 위해 자기방어 위원회를 구성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있다. 이들은 13만 9천 가구 이상을 생산자 협동조합으로 조직했는데, 이들중 일부는 수출용 농작물 재배에 종사하고 있다. 이들은 총 720만 헥타르의 토지를 ‘몰수(expropriate)’했으며 12개 주에 걸쳐 55개의 협동조합을 조직했다. 이들은 880개의 학교를 세워 3만8천명의 아동들을 수용했다. 협동조합의 성공은 빈번히, 새로이 점거운동을 시작한 무토지 농민들에 대한 지원에 참여할 수 있도록 활동가들에게 자유를 부여하며 정부의 몰수 허가와 신용대부를 기다리는 토지 점거자들에게 식량을 제공해주는 역할을 한다. 1995년 7월의 MST대회는 수십만 농민들을 대표하는 5천명 이상의 대의원들을 불러모았다. 각 주지부는 버스들을 대절했고 각자의 식량과 침구를 가져왔다. 산타 카타리나(Santa Catarina)의 지도력 훈련 학교는 80명 가량의 인원을 집단 침실에 수용한다. 그곳에는 아침식사를 위한 빵과 치즈, 커피 등이 있고 냉수 샤워시설과 허름한 교실들이 있다. 그러나 이는 모두 공동으로 사용된다.
오늘날 브라질의 농촌지역은 일종의 화약고이다. 문제는 [단순히] 토지 점거자들을 조직화하는 것이 아니라--수만의 가구들이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으며 MST의 호소에 반응하려 하고 있다--승리를 조직화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토지 점거 이전에 요구되는 정치적 지원, 강제이주에 대항하는 정치적 조직체와 물자--식량, 생활필수품 등등--의 지원이 필요하다. 이러한 지원이 취해진다면 그 사이에 운동은 생산의 재정지원을 놓고 정부와 협상할 수 있을 것이다.
1995년에 MST는 92회의 토지 점거를 주도했다. 1996년 6월까지 120회의 토지 점거가 벌어졌으며 4만 가구로 이루어진 총 168개의 campamento들(농촌 지역 점거집단들)이 정부의 몰수 허가를 기다리고 있다. 대선에서의 패배에 뒤이은 1995년 PT의 우선회는 현재의 토지 점거 공세의 기반을 조성했다. 점거는, 카르두수 대통령이 자신의 소속 당(PSDB)의 반동적 분파뿐만 아니라 우익 지주들의 정당들(PFL, PMDM)과도 연계되어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세계은행과 해외 다국적 기업들에 대한 대통령의 연계로 인해 그는 전략적인 산업들을 민영화하고 수출 농업 부문을 장려하며 우호적인 ‘게임의 법칙’ 아래 브라질에의 대규모 외국인 투자를 고무하는 데 점점 더 깊이 몰두하게 되었다. 공세의 또다른 원인은, PT로부터 독립하여 그 바깥에서 보다 공격적인 정책을 펴자는 MST 투사들의 점증하는 압력이었다. 그들은 PT를, 이미 그 일부가 고전적 사회민주주의를 넘어서 ‘사회-자유주의적’ 정책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는 선거주의적 정당으로서 적절히 인지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농촌지역에서의 ‘객관적’ 조건들과 ‘주체적 요인들’이 공세를 취하기에 알맞도록 점차 ‘성숙하고’ 있다고 인정되었다. 첫 번째 공세에 대한 최초의 반응은 공세가 취해진 곳의 인접지역에서 특히 적극적이었다. 자생적 토지 점거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MST는, 이러한 자생적 지방 행동들을 전국적 운동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조직화된 지도력과 의식적 조직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1995년말과 1996년초에 이르기까지, 이전까지 우익의 근거지였던 지역들에서 토지 공세는 일상적인 사건이 되었다. 카르두수는 무력을 사용하겠다고 협박하거나 새로운 점거를 유예하는 대가로 무단거주자들을 정착시켜주겠다고 공허한 약속을 남발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MST는 협상에 나섰지만 참으로 적절하게도 토지 점거를 중단하길 거절했다. 이들은, 휴전이 자신들의 주요 협상 카드를 제거할 것이며 무토지 농민들에 대한 자신들의 호소를 약화시키고 운동 내의 수백명의 젊은 지도자들과 활동가들을 탈동원화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투쟁은 그 깊이를 더해갔으며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브라질, 특히 사웅 파울로의 전체적 분위기는 MST에 대해 무척 우호적이다. 1996년 4월 19일의 학살극 이후에 있었던 사웅 파울로의 여론조사결과는 대다수가 농지 개혁에 우호적이며(65% 이상) 절대다수가 MST와 그 점거 전략에 대해 호의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MST는 효과적인 대항-헤게모니 전략과, 도시와 농촌을 통합하는 강력한 정치 블럭을 발전시키고 있다. 이 블럭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는, 특히 MST가 토지 개혁이란 의제를 넘어 일종의 사회주의적 변혁으로까지 나아갈 것인가에 따라, 계속 주시되어야 할 문제로 남아 있다. MST 지도자인 페드루 스테디레(Pedro Stedile)는 MST의 활동에 도움을 주는 국민적 정세에 대한 유용한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최근 역사에서의 세 국면을 구별하고 있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의 군부 독재에 대항한 투쟁의 최종 단계, 전대통령 콜루르(Collor)를 탄핵하기 위한 대중 투쟁, 그리고 카르두수가 신자유주의적 의제를 수행하고 있는 현재 국면이 바로 그 세 국면이다. 각각의 시기에 부르주아지의 주요 분파와 거대 언론, 주요 정당들 내의 그 동맹 세력들은 당시의 권력자를 약화시키는 데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래서 MST에 ‘정세적 지지’를 보내곤 했다. [물론] 그들의 목표가 달성되자 그들은 그러한 지지를 철회했다. 따라서, MST의 관점에서는 지배 블럭 내의 내적 분열의 시점이야말로 엘리트 및 언론 분파들의 묵시적 지지를 받으며 행동에 착수할 수 있는 기회의 국면을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농민 혁명가들의 현대적 고양은 볼리비아에서도 관찰된다. 그곳에서는 자본주의적 착취와, 노동의 저항에 대한 자본의 대결의 재구조화라는 변증법이, 전이되고 재조직화되어, 제국주의와 그 지방전도사들에 대한 강력한 저항을 구성하게 되었다.  

2) 볼리비아 : 민중 권력의 삼각지대

볼리비아에서는 적어도 세 개의, 민중 동원의 독특한 중심들이 존재한다. 남부의 농민 운동, 광산 지역, 라 파즈(La Paz)의 노조들. 이들 각자는 COB(Bolivian Worker’s Con- federation, 볼리비아노동자총연맹)에 의해 형식적으로 조정된다.  과거에는 광부들이 전략적으로나 조직적으로나 결정적인 세력이었다. 이는, 제 일 서기가 광부 지도자 출신이어야 한다는 COB의 규약 안에 표현되어 있었다. COB는, 다른 노조 연맹체들과는 달리, 엄격히 말해 하나의 임금 노동자 조직이라고 할 수 없다. 여기에는 농민들과 소생산자들, 여성들과 생태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노점상들, 전문직 종사자들, 학생들까지 성원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이들 각 부문들은 일정한 대의원 비율을 할당받고 있다. 농민들은 보다 많은 인정과, 헤게모니적이라고 할 수는 없더라도 주도적이라고는 할 수 있을, COB 내에서의 영향력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이는 1996년 6월 COB 회의에서 광부들의 지배에 대한 도전이 강하게 제기되면서 분명히 드러났다.
1952년의 볼리비아 혁명 과정에서, 무장한 노동자, 농민 투사들은 혁명적 민족운동(Revolutionary Nationalist Movement) 정부하에 광산, 토지, 공장 등을 몰수했다. 1996년까지 모든 혁명적 변화들은 역전되어버리거나 최소한 변화중에 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1985년이었는데, 이 해에 하이메 파즈 자모라(Jaime Paz Zamora) 정부는, IMF의 후견 아래, 대부분의 국영 주석 광산을 폐쇄하고 3만명의 광부들을 해고하며 노조 세력의 전통적 중심들의 토대를 완전히 허물어버리기로 결정했다. 오늘날 광부노조, 특히 국영 부문의 광부노조는 본질적으로 퇴락해버렸다. 즉 IMF, 세계은행, 미국출신 학자 고문들에 의해 설계된 재구조화 기획하에 5만명 이상의 광부들이 해고당한 것이다. 현재 대부분 외국인 소유의 다국적 자본에 의해 고용되어 있는 광부들은, 그 규모의 축소--대략 만5천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합법적 해외 교역의 거의 75% 정도를 낳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아직도 경제의 고도로 전략적인 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광부들이 후퇴하는 동안, 3만명 이상의 전(前)광부들의 파견대를 포함하는 농민층이 체제와의 직접 대결에서 가장 역동적이며 영향력있는 부문으로 등장했다. 농민층은, 이전에 광부였던 농민들로 구성된 코카 재배자들과, 전통적인 농업 생산자라는 두 부문으로 구분될 수 있다. 전통적인 민족주의 정당에 대한 농민들의 단절은, 부분적으로는, 미국의 정책결정자들, 특히 군부, 마약단속국(Drug Enforcement Agency, DEA) 및 대사관에 대해 부당하게 종속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채택하게 된 중도좌파의 노선전환의 결과이다. 농민운동의 정치적 독립성은 필로멘 에스코바르(Filomen Escobar)의 지도를 받는 광부 출신 노동자들의 유입으로 인해 강화되었는데, 이들은 운동에 고도의 조직과 정치적 경험을 불러들였다. 에보 모라레스(Evo Morales)와 알레호 베레즈 라조(Alejo Velez Lazo) 같은 젊은 지도자들은 농촌뿐만 아니라 볼리비아의 보다 광범한 공공영역까지를 포괄하는 새로운 사상과 정치적 계획을 제공했다. 두 개의 서로 구별되는 정치 문화의 결합은 노동계급의 선진 부분의 조직 형식, 대결 전략, 전술과, 인디오 농민 공동체에 뿌리박고 있는 전통적인 정신적 가치들에 대한 존경심, 문화적 자율성, 토지에의 요구 등을 서로 결합시키는 운동을 창조해냈다. 농민운동은, 특히 코카 재배자들의 경우에, 신자유주의 정권과 그 해외 파트너인 미국에 대항하는 가장 거대하며 가장 본질적인 투쟁의 일부로 되어 있다. 그 결과로 국민 의식이 고취되어 ‘인디오 나라(Indian nation)’라는 관념이 보편적 흐름이 되었다.
멕시코의 사파티스타들과 같이, ‘새로운 농민운동’은 미국의 군사적, 정치적 침투라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탓에 토지와 문화적 자율성을 위한 투쟁에 대해서는 일단 고삐를 채웠다. 하지만 멕시코의 경우와 달리 볼리비아 운동의 공공 대변인은 인디오출신 농민 지도자들 자신이다. 이들은 지적으로 세련되어 있고 독학자이며 전투적인 지식인들로서 기층의 고통을 공유하고 있다. 브라질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사무실은 허름하다. 그곳에는 몇 개의 낡은 의자들, 부서진 책상들, 과거의 정치적 동원과 혁명 지도자들이 그려져 있는 포스터들이 있을 뿐이다.  
농민운동의 중요한 부분들은 또한 독립적 정치조직을 통해 직접행동을 선거정치와 결합시키는 데 결정적인 일보를 내디뎠다. 이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투쟁에서 독특한 요소로 존재하는 것에 그쳤던 예전의 입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사회운동과 정당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민족주의 정당이나 좌파 정당들의 행위에 대해 염증을 느낀 농민운동은 새로운 정치 조직인 ‘인민주권회의(Assembly for the Sovereignty of the Peoples, ASP)’를 출범시켰고, 코카 재배 지역의 수십개 지방 선거에서 승리했다. 현재 코카 재배자들(cocaleros)은 ASP를 하나의 국민적 대안으로 내세울 것을 제안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전국적 수준의 계급 정치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농민들이 결정적인 목소리를 부여받길 희망하고 있다. 코카 재배자들의 정치적 실천은 [인디오들의] 조상 전래의 영적 신앙을 근대적 형태의 계급적, 반제국주의적 투쟁에 활용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맑스주의적 분석이 전(前)유럽문명적인 가치들과 연결되고 있다. 다국적 자본과 외국 은행들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과거의 우주론이 다시 깨어나고 있는 것이다.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코카 재배자들에게조차 토지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것이지만, 주요 투쟁은 미국에 의해 조종되는 코카 생산 금지 시도들에 대항하여 자유 교역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코카에 대한 전통적인 방어는 역사상의 인디오 국민에 대한 재검토, 즉 계급을 국민으로 포괄시키는 그런 류의 개념에 기반하고 있다. 국가의 개입과 더불어 전통적인 작물의 무제한적인 생산을 위해 싸우는 농민 반란들을 북돋우고 있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자기]역설이 농민운동의 이단적 본성을 고양시키고 있다.
인디오 농민운동은 이중의 도전을 맞이하고 있다. 코카 재배에 대항한 볼리비아 군대의 사용뿐만 아니라 인디오들의 요구를 빈 말로 다독거리는, 신자유주의 정권의 ‘문화주의적’ 전략들. 이것들은 대부분, 상징적인 대표성--부통령이 인디오출신이다--과 두 언어[스페인어, 인디오 언어]의 공통 교육에 초점을 맞춘 상징적 충족일 뿐이다. 코카 재배자들은 계급-환원주의적 좌파 정당들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제기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문화적 조작에 대한 거부의 경우에는 ‘경험적 요소들’에 보다 많이 기반하고 있다. 즉 그들이 내게 말한 바에 따르면, 부통령은 신자유주의 엘리트를 위해 복무하기 때문에 결코 진정한 인디오가 아니라는 것이다.
광부들의 코카 재배자들로의 전환은 사회 권력 블럭의 주축을 농촌지역으로 이동시켰지만, 이 경우 농촌은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농민들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즉 이들은 광산 투쟁과 연계를 맺고 있는 소규모 생산자들로서 전통적인 농민층과는 분명히 차별화된다. 배경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농민이 된 계급의식적 광부들은 광범한 농민층 사이에 이데올로기와 지도력 형식을 유포시킬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질적으로 다른 전망이 투쟁에 부여되었다. 동시에, 농민 지역, 특히 코카재배 인디오 공동체들에서의 광부들의 거주는, 그들로 하여금 코카 잎과 보다 많은 인디오의 자율성에 대한 요구와 연관되어 있는 전통적인 영적 담론들과 실천들에 자신들을 접합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볼리비아에서 산체즈 데 로사다(Sanchez de Losada) 대통령의 신자유주의 정권에 대한 근본적인 정치적 적대자들중 하나는 차파레(Chapare)의 코카 경작자들--9만 가구 이상이다--이다. 자유시장 정책으로 인해 싼 값의 식량이 수입되어 옥수수와 같은 전통적인 곡물들의 가격은 경작자들이 생존할 수 있는 수준 이하로 떨어지고 있다. 그 결과, 전(前)광부들의 다수가--그리고 또한 전(前)공장 노동자들--충분한 식비, 의복비, 가족의 기본적 필요에 대한 비용 등을 충당할 수 있는 수익을 제공하는 코카 잎 경작으로 전환했다. 미국 정부는, 마약사업 이익의 대부분을 세탁해주는 것으로 이득을 챙기고 있는 은행 및 금융 엘리트들과의 그 긴밀한 연줄 때문에, 분명히 합법적인 곡물로서 코카를 재배하고 있는 농민 경작자들에 대하여 가장 치열한 공격을 감행하는 반(反)마약 캠페인을 밀어붙이기로 결정했다. DEA의 작전 지도하에, 볼리비아의 정권은 정기적으로 농민 생산자들에 대항하는 근절 켐페인에 착수했으며, 이에 따라 수백명이 투옥되었고 시위행진, 총파업, 고속도로 봉쇄 도중 농민 대열이 공격받아 죽거나 다치는 일이 생겼다. 농민 지도자들에 따르면, 평가액 150만 달러 상당의, 대안적 작물을 위한 미국 기금은, 그토록 떠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정부 관리들의 주머니 안에서 사라져버렸다. 1996년 5월초에 정부는 의료적 용도로 쓰일 예정인 양을 초과하는 코카 재배를 완전히 근절시키로 한 계획을 공표했다. 볼리비아 농촌노동자총연맹(Bolivian Rural Worker's Confederation)은 근절 계획을 ‘광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부름으로써 이에 대응했으며, 만약 계획이 실행에 옮겨진다면 농민들은 ‘우리의 가족들, 우리의 생활, 우리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든 채 봉기할 것이라고 정부에게 경고했다. 에보 모라레스는 “차파레가 남아메리카 한 복판에서 멕시코 치아파스의 재판(再版)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코카 재배자들에게 코카의 근절이란, 그들 자신 강조한 대로, 자신들의 가족의 근절을 의미하므로 그들로서는 이를 피해야 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군사 고문들과 DEA 요원들은--아이비 리그식 억양으로 스페인어를 말하는, 허울뿐인 볼리비아 대통령을 통해--기본적 정치 결정들에 대해 더욱더 깊이 관계하고 있으며 코카 재배자들에게 적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지만, 이는 역으로 투쟁의 민족주의적, 반(反)제국주의적 본성을 심화시키고 있다. ‘코카 경작자 대 제국’은 볼리비아 정치의 현실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울부짖음이 아니다. COB가 내부 갈등에 얽혀들게 되고 그 지도자들이 정부와의 타협에 발목잡히면서 정치 활동의 선도성은 부문 운동들, 그중에서도 특히 전투적 농민운동으로 이전되었다. 하지만 미국이 즉각적인 [코카] 근절에 대한 압력을 증대시킴에 따라 정치적 협상의 영역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 징후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무장 대결이 배제되지 않고 있다.    

3) 페루

페루에서는 1980년대 후반과 특히 1990년 이후에 혁명 운동이 전반적인 후퇴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합법적 좌파인 PUM과 통일좌파(United Left)는 붕괴됐으며, 부분적으로는, 유럽, 캐나다, 미국의 기금에 의존하는 NGO들에 흡수되었다. 남은 활동가들은 선거정치에 몰입하게 되었고 1992년 후지모리(Fujimori)의 autogolpe에 의해 주변화되었는데, 이 조치를 통해 그는 의회와 법원 제도를 해산하고는 독재권력에 가까운 무엇으로서 자기 자신을 예약해놓았다. 주요 게릴라 조직인 센데로 루미노소(Sendero Luminoso, ‘빛나는 길’이란 뜻)는 자멸해버렸다. 일부 인디오 공동체들을 방어하려던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종파주의적인 폭력과 광신주의, 컬트풍의 정치 지도력, 독재적인 내부 조직 탓에 이 조직은 그 대중적 지지의 대부분을 파괴시켜버렸다. 그 최전성기에 센데로는 농촌지역과 지역 도시들의 판자촌 내부, 그리고 리마에 강력한 사회적 기반을 지녔었다. ‘곤잘로 동지(Comrade Gonzalo)’의 생포와 지지자들과 활동가들의 그물망의 이름 및 주소의 발견으로 인해 조직은 전멸되었다. 그에 뒤따라 심대한 분열이 있었고, 그 결과 고참 활동가들의 한 세대 전체의 변절이 발생하여 그 실제 역량은 더욱 제한되었다. 또다른 페루 게릴라 조직인 MRTA도, 일본 대사관의 극적인 점령의 실패 이후, 크게 약화되었다. 이러한 게릴라 조직들은 다른 곳들에서 관찰되는 것과 같은 좌파 부활의 한 흐름이 아니라 이전 시기의 잔재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페루에서 사회적 저항이 회복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역사적 경험은 후지모리식의 힘센 자들이야말로 미래에 닥칠 곤란들을 진뜩 쌓아가는 자들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4) 파라과이 : 미래를 바꾸기 위해 과거를 회복하기

파라과이에서는, 스트뢰스너(Stroessner) 독재정권으로부터 보수적 선거 체제로의 이행이 이루어지면서 이와 더불어 농민과 노동자의 동원이 성장해가게 되었다. 독재자 전복의 즉각적 여파 속에서 농민들의 토지 공세의 물결이 지주 계급의 반격을 동반하며 뒤따랐다. 처음에는 용병 세력이, 그리고 나중에는 군대가 직접 점거 가구들을 철거하기 위해 개입했다. 이러한 점거와 철거의 유형은 와스모시(Wasmosy) 체제하에서도 지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지문제에 대한 농민들의 압력의 누적적 효과는 긍정적인 성과를 창출해냈다. 어떤 점거 가구들은 영구히 거주하고 있으며, 아순시온에서는 농민 투쟁에 대한 공감이 증대하고 있는 것이다. 대결을 지속할 수 있는 능력을 입증하고 있는 농민운동이 점점 더 대항-헤게모니 블럭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농민의 투쟁성은 어떤 지역--북부의 산 페드로(San Pedro) 같은 곳--에서는 다른 곳보다도 더 직접 행동에 경사되어 있는 등 불균등하게 나타나고 있다. 유사하게, 사회적 행동주의와 정치적 충성 사이에 항상 직접적 상호관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많은 농민들은 전국농민연맹(National Federation of Peasants, FNC)에 대해 적극적이지만 또한 계속 스트뢰스너의 콜로라도 당(Colorado Party)에 투표하고 있다. 직접 행동의 호소가 과거의 속박을 [자동적으로] 제거하는 것은 아니다.
아순시온에서의 전투적 농민운동의 영향은 필자의 파라과이 체제 기간 동안 필자에게 친숙한 느낌을 주었다. 대중 매체, 음식점, 택시, 가두 등등에서의 대담과정에서 농민 지도자들은 격려와 공공연한 지지의 표명과 함께 따뜻하게 환영받았다. 정부 정책에 대한 중요한 시위는 맨 먼저 농민 조직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무뚝뚝한 말투의 농민 지도자들은 투쟁을 그칠 마음이 전혀 없다. 와스모시 대통령과의 최근의 면담에서 알베르트 아레코(Albert Areco)는 다음과 같은 말솜씨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석달전 귀하는 우리에게 말하길, 농지 개혁 문제를 즉각 다룰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거짓말장이이든지 아니면 무능력자입니다.” 와스모시의 얼굴은 붉어졌다. 전화줄이 자신에게 감겨 있는 것도 모른 채 그는 밖으로 나가면서 전화기를 책상 밖으로 내동댕이쳤고, 십분 후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파라과이에서도 모든 선거상의 이행은 경제 엘리트들의 권력의 지속과 군부의 사면, 경제적 자유화의 심화, 그리고 사회적 동원의 억압 등을 전제하고 있다. 이행의 핵심 지원자는 다섯 블럭에 걸쳐 있는, 거의 군사기지를 방불케하는 시설의 미국 대사관이다. 와스모시가 군부 쿠데타의 위협을 받았을 때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수천의 파라과이인들이 시위 행렬로 거리를 메웠지만, 대통령의 첫 번째 대응은 미국 대사관으로 도망가는 것이었다. 미국의 전략은 노조와 농민운동의 반대로부터 자유화의 심화를 보호하기 위해 민간 체제와 우익 군부 모두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신속한 군부의 개입은 장군들과 지주들 사이의 공생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농민들이 점거한 휴한지들은 고위 장성들에 의해--대개 불법적으로--빈번히 도용되었다. 내가 방문한 동부 파라과이의 토지 무단거주자 정착촌에서는 농민들이 ‘monte’ 전통으로부터 토지에 대한 별난 계획을 찾아내었다. 그들은 한 장군이 불법적으로 토지에 대한 권한을 부여받은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사적인 총잡이들과 불도저들이 최초로 들이닥쳤을 때 이들은 농민 공동체에 의해 성공적으로 격퇴되었다. 지방의 소농들은 식량을 기부했고 종자도 지원되었다. 토지 정착자들은, 소써클들로 조직되어 집단으로 작업하면서, 비정규군인 용병들의 공격에 대항해 싸울 준비를 했다. 얼마 안 있어 보병용 장갑차에 탑승한 200명의 병사들이 나타나 가옥들과 곡물창고들을 파괴했고 농장 가축들을 죽였으며 그 과정에서 백여 가구에 들이닥쳐 남자와 여자, 아이들을 구타했다. 선거 체제는 파라과이의 농촌지역에서보다는 미국의 선전 전단 속에서 더 민주적인 얼굴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농민운동은 막 꽃피던 농민동맹(peasant leagues)이 군부의 억압으로 인해 분쇄된 1970년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들중 살아남은 활동가들은 1980년대 내내 계속된 비합법적 조직화의 조심스러운 과정을 시작했으며 1980년대 말에는 결국 지역적 조직들이 형성되어 활동가들을 조정했다. 스트뢰스너의 몰락과 엘리트들 내부의 분열은 대규모 토지 점거운동의 신호였다. 그 성과는, 농민운동이 더 이상 ‘농촌 이슈’가 아니라 국민 정치 내의 한 중요한 요소라는 인정이 확대되어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선거 체제로의 전환에도 불구하고, 매달 수십명의 농민들이 체포되고 있고, 사용되지 않는 토지를 점거한 농민들을 철거시키기 위한 폭력적인 군부 개입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으며, 국가와 협력하여 활동하고 있는 용병들에 의해 십수명의 농민들이 다치거나 죽임을 당하고 있다. 아순시온에서 진보적인 중간계급과 공공부문 피고용자들이 자유화의 범위와 심도를 토론하는 동안, 다른 한 편에서는 치열한 농촌 투쟁이 오직 물리력에 의해서만 저지될 수 있을 열기를 규합해냈다.      
지금까지, 농민운동은 두 개의 전선을 전개하고 있다. 즉 지방의 지역 조직들의 형성을 통해, 그리고 전국적인 연합 조직들과의 제휴의 증대를 통해. 전국농민연맹은 느슨하게 연합한 30개의 지역 조직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공식적인 ‘회원증’도 발급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일반적인 실천방식이다. 지도자들은 그 자신 일하는 농민들이다. 여기서도 또한, ‘전업’ 유급 직원들은 존재하지 않으며 전용차도 없고(이들은 버스로 여행한다) 전문적 고문도 별로 없다. 또한 이들은 성장중이다. 다시 한 번 여기서도, 눈에 띄지 않는 활동은 지도자들의 ‘미덕’이다. 이들은 조직하고 토론하며 자신들의 지지자들과 투쟁 및 투옥을 함께 한다.        
파라과이에서도, 브라질과 볼리비아에서처럼, 지식인들과 농민 활동가들 사이에 심대한 이질감이 존재한다. 지식인들은 점점 더 NGO들과, 해외 기부자들에 대해 책임을 지는 기획들에 결합하고 있다. 농민들은 점점 더 NGO들--한 파라과이 농민 지도자가 말한 바에 따르면, ‘해외 기금들을 안전케하기 위해 운동을 이용하는 자들’--에 의한 기만과 조직간 경쟁에 대해, 적대감이 아니라면, 의혹을 보내고 있다. 농민 투사들의 맑스주의적인 혁명적 전망은 지식인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포스트 맑스주의’의 변형들과 직접적인 갈등에 처해 있다. 극소수의 지식인들만이 농민운동의 종복으로서 봉사하길 바라고 있으며 그럴 능력을 지니고 있다. 농민 지도자들은 신실한 지식인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바라며 심히 흥미를 느끼지만, 다른 한 편으로 지식인들의 ‘기구들(institutes)’을 통해 협력하는 것은 거부하고 있다.
토지 쟁점 외에도, 세 가지 식별가능한 흐름들이 농민운동의 호소와 성장 속에 구현되어 있다. 첫째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인디오 전통의 융합이 존재한다. 과라니어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언어이며, 파라과이는 ‘농촌’이 언어적으로 도시를 지배하는 유일한 국가이다. 농촌지역에는, ‘인디오’와 농민적 경작 양식의 결합--공동체에 기반을 둔 농사와 ‘시장’ 행동--이 존재한다. 농민 지도자들의 굳은 유대와 도시적 지향성, 정치적 세련성은, ‘monte’에서 농사지으며 그들 자신을 자연에 밀착시키고 기본적으로 자기-소비를 위해, 그리고 단지 부차적으로만 시장을 위해 생산하려는 욕망과 결합되어 있다. 둘째로, 일부 농민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사회주의가 중요한 정치적 경향이 되었다. 이론적 세련성과는 거리가 멀지만 자본주의의 약탈에 대한 공통의 저항에 뿌리를 박고 전통적인 농민 공동체들에 구현되어 있는 사회주의가 존재한다. 셋째로, 농촌지역의 민족주의는 과라니어를 사용하는 소경작자들, 무토지 노동자들과, 비옥한 토지의 막대한 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부유한 유럽인 정착자들 사이의 대당에 기반을 두고 있다. 수만 에이커의 관개지가 독일인, 네덜란드인, 미국 기업농들뿐만 아니라 메논교도들(Mennonites)에 의해 소유되고 있으며, 이들은 과라니어를 사용하는 농민들을 계절적으로 고용하고 있다. 민족-인종적 문제는 파라과이의 19세기의 민족주의 경험에 대한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 파라과이에서는 성공적인 국가 주도의 산업화가 개척되었었으며 삼각 동맹 전쟁(war of the Triple Alliance) 동안의 외세의 개입만이 이를 파괴할 수 있었다. 이 역사적 기억은, 전사들의 용감함과 그 지속기간 동안 그 실험이 거두었던 성공 때문에, 여전히 남아 있다.
군부 쿠데타의 위협 와중에 있었던 3월 내내, 와스모시는 부끄럽게도 미국 대사관에 숨은 반면, 농민들은 고속도로를 마비시키고 수도로의 행진을 동원했다. 학생들이 공공의 이목을 독차지했지만, 군부가 움직임을 보이기만 하면 나라를 마비시키려고 대비한 이들은 대부분 젊은 노동자들과 농민들이었다. 며칠 후, 위협은 사라지고 파라과이는 반세기만에 가장 강력한 총파업--모든 주요 활동들이 중단되었다--을 경험했다. 수만의 농민들이 거리를 메웠으며 토지 쟁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5) 콜롬비아 : 혁명은 전진한다

콜롬비아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발달된 게릴라 운동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아마 전세계에 대해서도 그러할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곳들에서는 게릴라 운동이 패퇴하거나 자유주의적 선거 정치에 흡수된 반면, 콜롬비아에서는 게릴라 운동이 새로운 지역들에 그 영향력을 증대시켜 농민층 사이에서 엄청난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는 한편, 동시에 그 군사적 역량을 증가시키고 있다. 국제적인 무시와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게릴라들은 지방, 지역 수준에서 고도의 정당성을 획득했다고 평가될 수 있다. 게릴라들, 특히 콜롬비아 무장세력(Colombia Armed Forces, FARC)은 농민들에게 군부와 지주의 약탈에 대한 보호를 제공하고 있으며 식량작물 재배와 사회적 서비스를 지원하고 있다. 1940년대에 그 투쟁을 시작한 FARC는 소비에트 맑스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현재는 원칙적으로 토지 개혁과 민주 변혁을 위한 농촌 투쟁에 전념하고 있다. FARC 지도부는 계속 맑스주의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여전히 전설적인 마누알 ‘티로피고(백발백중이란 뜻)’ 마루란다(Manual ‘Tirofigo’ Marulanda)에 의해 영도되고 있다. 이들은 대략 만3천명의 무장 게릴라와, 압도적으로 농민으로 이루어져 있는 수십만의 민간 활동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세 개의 게릴라 조직들은 훨씬 작으며 약 4천명의 전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정통한 관측통들의 평가에 따르면 게릴라들은 이 나라의 천 개의 자치구들중 약 반정도에 현존하고 있으며 커피, 바나나 및 석유 생산 지역들을 포함한 중요 생산 지대에 강력하게 조직되어 있다. FARC는 적절한 전략적 계획--지방 권력의 축적--에 따라 자신의 권력 기반을 장기간 인내를 갖고 건설해왔다.
다른 농민기반 운동들과 같이, 콜롬비아의 게릴라들도 대학생들이나 지식인들로부터 거의 혹은 전혀 지원을 받지 않는다. 대학생들이나 지식인들중 대부분은 원래부터, 이제는 해산되어 선거 연합체가 된 게릴라 조직인 MR-19에 결합했다. MR-19가 최초에 얻은 거의 20%에 이르는 득표는 이들이 가비리아(Gaviria)의 신자유주의 정권에 결합하면서 소멸되어버렸다. 이들은 현재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정치세력이며 한때 이들의 대통령 후보였던 안토니오 나바로 울프(Antonio Navarro Wolf)는 에콰도르에 인접한 작은 도시의 시장으로 있다.
1996년 9월에 콜롬비아 군대에 대하여 지난 30년 이래 최대의 게릴라 공격이 감행되었다. 푸투마요(Putumayo)주의 밀림 안에 있는 한 군사 기지--아이러니컬하게도 라스 델리치아스(Las Delicias)라 불리는--가 괴멸되어 27명의 병사들이 죽고 19명이 부상당했으며 67명이 포로로 잡혔다. FARC와, 시몬 볼리바르 게릴라 조정운동(Simon Bolivar Guerrilla Coordinating Movement)으로 조직화되어 있는 ELN(National Liberation Army, 민족해방군)이라는 그 동맹군은 나라의 32개도(주)중 15개곳에서 군대와 매일 접전을 벌이고 있다. 지난 6년 동안 FARC는 그 전투 전선의 수를 10개에서 105개로 늘려왔다. 자동소총, 유탄발사기, 로켓포로 무장한 게릴라들은 군대 주둔지와 공군기지들을 공격하고 있다. 지금까지, 정부는 거의 5백명의 병사들이 살해되거나 부상당했다고 인정했다. FARC에서 발행하는 신문의 발표에 따르면 최초의 해방구들이 과바이레(Guavaire), 메타(Meta), 카쿠에타(Caqueta), 푸투마요, 아마조나스(Amazonas) 등의 도에 건설되었다. 점차 이중권력 상황이 출현하고 있다.
마루란다가 여전히 논쟁의 여지 없는 지도자로 존재하지만, 현재의 공세를 책임지고 있는 게릴라 지도자는 그의 장래의 계승자인 호르헤 브리엔코(Jorge Brienco)--‘모노 루비오 호호이(Mono Rubio Jojoy)’로 더 잘 알려져 있는--이다. 한 게릴라의 아들이며 어렸을 때부터 FARC에서 양육된 그는 마루란다의 수제자이다. 그는 가장 강력한 게릴라 전선인 동부 cordillera(산악 지대)의 블로퀘 오리엔탈(Bloque Oriental)을 지휘하고 있다. 수마르파즈(Sumarpaz)에 있는 브리엔코의 사령부는 실제로 보고타로 향하는 길에 위치해 있다.  
전쟁의 결과로 끔찍한 피난 위기가 닥쳐와 수만의 사람들이 폭력으로 위협받은 채 자신들의 고향으로부터 피난하도록 강제되었으며, 이들은 대개 가장 기초적인 쾌적함조차도 결여되어 있는 대도시의 판자촌에서 삶을 마치고 있다. 값싼 미국 곡식들의 수입에 의해 전통적인 곡물에 가해지는 파괴적인 공격을 직면하고 있는데다가 농민들에게는 유일하게 수익좋은 현찰-곡물인 코카의 재배를 근절시키겠다는 집중적인 캠페인까지 짊어지게 된 농민들은 FARC에 결합하고 있다. 농민 조직들에 대항하기 위해서 2천명 이상의 성원을 지닌 100개 이상의 용병 조직들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군부와 지주들에 의해 재정지원을 받고 있다. 이들은 농민 투쟁 지역 내에서 활동하면서 수백명의 활동가들을 살해했다. 용병 조직들과 군대의 주된 공격목표는 우라바(Uraba)이다. 이 곳에서는 지난 몇 년동안 500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살해당해왔다. 정부와 그 지주 동맹자들이 노동 쟁의를 총탄으로 해결하고 있는 그곳 우라바가 게릴라 충원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1995년 후반과 1996년 동안 FARC는 주요 도시 중심들에 대한 침투를 시작했다. 농촌지역으로부터 도시로의 게릴라 투쟁의 확장은 Escuela de Artilleria Francisco Aguilar하의 보고타 자체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상황의 발전은 몇가지 요인들의 결과이다. 첫 번째 요인은 지배 엘리트들 내부의, 그리고 에르네스토 삼페르(Ernesto Samper) 대통령과 미국 사이의 심대한 분열이다. 워싱턴은 삼페르와 코카인 카르텔들 사이의 유대에 대한 증거를 갖고 있다며 그의 퇴임을 강요하는 전면적인 외교적, 정치적 캠페인에 착수했다. 이는 의회, 집권 자유당(Liberal Party), 행정부를 양분시켰다. 이로 인해 야기된 정치적 쇠약화는 삼페르로 하여금 코카-근절 캠페인에 착수하도록 만들었다. 또다른 요인은 석유 회사들이 군 부대를 ‘임대하여’ 사령관들에게 상납급을 지불하면서 게릴라 공격으로부터 송유관을 보호하게 하는 관행이다. 그 결과, 소수의 정예군만이 게릴라와의 대결에 쓰일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전통적인 마약 카르텔들의 붕괴로 인해 새로운 밀매상들, 군부, 정치 관료들 사이에서 [마약] 이익을 놓고 경쟁이 치열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수도로부터 불과 30마일 떨어진 곳에서 작전을 벌이고 있는 FARC는 보고타에 식량을 수송하는 교통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을 거두어왔다. 이는 30년간의 전쟁중 가장 진전된 게릴라 침투로서 농민 게릴라들의 정치적, 사회적 권력의 증대를 반영하는 것이다. “볼리바르 광장으로 승리의 행진을 해들어가겠다”는 브리엔코의 목표가 가까운 장래에 실현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결코 억지가 아니다. 콜롬비아[혁명]는 베트남 전쟁 이래 최초의 성공적 농민혁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6) 부활한 좌파 : 칠레

이러한 새로운 혁명 세력들 외에도, 라틴 아메리카 좌파에는 또다른 긍정적 발전이 존재한다. 칠레에서는 공산당이, 독재로 인해 야기된 일련의 후퇴, 초자유주의적 ‘합작(Concertaction)’ 체제에 대한 사회당의 협력으로 말미암아 강요된 고립, 그리고 소련의 붕괴로 인한 방향상실과 변절 등을 거친 후, 다시 한 번 노조운동의 주요 세력으로 등장했다. 최근의 CUT 조합 선거에서는, 투표 상대자를 조작하려던 기독교 민주당과 사회당의 막판 음모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이 대의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부상했는데, 대의원들은 조합을 민주화할 새 의장으로서뿐만 아니라 한 명의 반대파 사회주의자로서 공산당 후보들을 지지했다. 공산당은 3대 주요 노조, 보건, 교육, 석탄 노조의 선거에서 승리했다. 이들은 또한 다른 많은 노조들 내에서 그 영향력을 증대시켰으며 학생 연맹의 의장직을 획득했다. 글라디스 마린(Gladys Marin) 여사--인기있는 당 서기장으로서 시위 행렬의 맨 앞에서 자주 발견된다--의 역동적인 지도 하에 공산당은 노동 계급과 사회운동에 대한 새로운 논쟁들에 자신을 개방하고 있다. 또한 기본적인 맑스주의적 계급 분석을 견지하면서도 소련의 과거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칠레는, 그 외양에도 불구하고,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엄격히 통제되고 있는 사회중 하나이다. 이는, 평생직으로 되어 있는 상원의원 제도, 군사 및 정보 업무에 대한 피노체트(Pinochet)의 통제, 권위주의적인 헌법, 제한적이고 불공정한 선거법 등등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기독교민주당, 사회당 정권과 우파 야당 모두 선거 제도와 운동 자금원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고 매체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후보를 지지하도록 하는가 하면 양당 제도를 영속화하는 선거법을 지지하고 있다. 통제는 정부와 거대 기업들 사이의 긴밀한 통합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결과, 대중매체들 내에서 신자유주의 전략을 비난할 수 있을 기구나 배출구가 실질적으로 부재하게 되었다. 군부의 잔악행위에 대한 공공의 논의를 북돋고 있는 개인들은 사법 절차에 종속되어 있다. 논의의 이러한 폐쇄성은, 민간 정치인들에 의해, 즉 국가 기금을 통제하고 기업들을 관리하며 여론조사기구와 대중매체의 중요 부분들을 지휘하는 기독교민주당과 사회당에 의해 강화되고 있다. 이들은 기업 이사들의 신뢰를 얻는 데 여념이 없다. 이들은, 생존자들과 인권그룹들에 의해 정체가 드러난 악명높은 군 간부들의 혐의를 수사하기 위한 시도에 대해 반대했다. 법관들의 대다수 무리는 군부 정권 당시부터 복무한 고참들이거나 새로운 민간 권력의 권력남용의 혜택을 입은 자들이다. 칠레의 학자들과, 계층상승한 전문직 종사자들은 권력의 중간 수준을 체현하고 있으며 점점 더 순응주의적이 되고 있다. 내각 내의 ‘사회당원들’은 [현존 경제] 모델이 이미 칠레의 최근 역사상,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 내의 가장 편향된 소득 유형들중에서도 가장 나쁜 불평등 상태를 초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의 기적을 칭송하고 있다.
하지만, 노조들, 노동계급 거주지 주민들, 대학들 내에서 공산당의 영향력이 성장하고 있는 것 외에도, 좌파 재생의 다른 많은 신호들이 존재한다. 좌파의 영향력의 성장은, 줄곧 신자유주의 정책의 전달벨트에 불과했던 조합 관료들에 대한 기층 노조 활동가들의 불만을 반영하고 있다. 공산당원들은, ‘아웃사이더’로서, 사회당과 기독교민주당의 관료들에 의해 강화되기만 한 피노체트의 가혹한 노동법에 대항하여 노동자들의 이익을 방어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왔다. 의회에서 실질적으로 배제된 상황은 오히려 사회운동들에 대한 공산당의 행동주의에 좋은 영향을 끼쳤다. 자주적 노조의 새로운 세대와 학생 지도자들이 공산당의 영향력 증대 과정에 결합했다.  
하지만 공산당은 두 가지 문제에 직면해 있다. 첫 번째는, 지식인들의 이탈이다. 공산당 경제학자의 대부분이 돈벌이가 되는 정부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다른 이들은 공개적인 토론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정치적 이유를 들어 떠나버렸다. 당에 제기되는 도전은 내부 토론을 허용하고 새로운 대중 지도자들에게 자율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지식인 문제는 열린 당 운영을 통해 새로운 세대를 매혹시킴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는, 당의 계속적인 성장이 새로운 노조와 학생 지도자들의 자율성을 받아들이는 것에 주로 의존하고 있다는 문제가 존재한다. 정치 노선을 강요하려는 중앙집권주의적 시도는 이전의 공산당 문화 속에서 형성되지 않은 이러한 지도자들을 급격히 소외시킬 것이다.  
또한 당은, 공장 노동의 새로운 조건들, 칠레에서 자유롭게 무비판적으로 회자되고 있는 ‘세계화’ 수사의 배후에 놓여 있는 계급-국가 관계에 대한 보다 진전된 이해 등등에 대한 분석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한편] 산티아고 주변의 공업 지대에서 영향력을 획득하고 있는 독립 노조의 네트워크(co-ordinadores)와 같은 또다른 좌파 그룹들이 존재한다. 민주 포럼(the Democratic Forum)--중도좌파 전문직 종사자들의 조직--이나 그 외 독립적 정치경제학자들의 조직, 막 움트고 있는 반(反)기업적 생태운동 등등은, 하나로 수렴되기만 한다면, 칠레에 강대한 좌익 정치 세력이 등장하는 데 자극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7) 아르헨티나 : 침체와 반란 사이에서

아르헨티나에서의 정치투쟁은 줄곧 순환적이었다. 군사 정권으로부터의 이행--말비나스(Malvinas)의 패배 이후의--기간중에, 그리고 그에 뒤따른 군사 쿠데타의 시도 와중에, 광범위한 동원이 있었다. 1980년대 중반과 후반에는 급진당 정부에 대항한 6차례의 총파업이 있었다. 1990년대에는 지방주들에서의 광범위한 봉기들이 계속 있었다. 가장 최근에는, 1996년 8월에 있었던, 비틀거리는 메넴(Menem) 정권에 대항한 최초의 성공적 총파업이 계급 갈등의 새로운 순환의 전조가 될 수 있겠다.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관건적인 쟁점은 대중적인 민중 저항의 주기적 분출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분출이 어떠한 대안적 정치 기획과도 괴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1980년대 CGT의 총파업이나 1990년대 초 도시 저항운동과 같이 정치와 사회투쟁이 결합될 경우, 이는 대개 신자유주의 기획에 흡수되는 정치 기획으로 흘러버렸다. CGT는 알폰신(Alfonsin)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데 일조했지만 이는 메넴 정권의 초자유주의적 정책들에 길을 열어주었을 뿐이다. 1990년대 초반의 반대파 노조 활동가들(CTA)은 대전선(Frente Grande)의 창당에 기여했지만, 이 당은 이후 신자유주의적 안정화 정책을 지지했다. 즉, 조직된 사회운동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기반을 표현해줄 정치적 도구를 창출할 수 있는 능력과는 줄곧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아르헨티나 좌파의 또다른 측면은 지방주들에서의 중요한 자생적 봉기들과 이들 좌파 사이의 괴리인데, 여기에는 후후이(Jujuy)의 주목할만한 사례와 같은 약간의 예외만이 있을 뿐이다. 필자는 뉴쿠엔(Neuquen)에서 노조 활동가들, 학자들, 전문직 종사자들과 담소하면서 편안함을 느꼈다. 불과 50마일 바깥에서는 2만명 이상의 민중들이 주지사의 정책들에 항의하여 주요 고속도로를 봉쇄하고 있었다. 필자가 뉴쿠엔 회합의 그 지방출신 주최자들에게 이 대중 행동의 지도부에 대해 물었을 때, 그들은 어떠한 좌파 활동가들도, 다른 어떠한 조직된 그룹들도 이에 관계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보다 일반적으로, 지방주들에서의 봉기는, 각 지역의 독특한 형태의 지방주의로 치부된 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그 어떤 지식인에 의해서도 아직 이론화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들 봉기는 곧잘, 최근의 포스트모던 담론의 어조를 통해, 문화적 소외와 정치적 괴리의 또다른 사례인 것으로 읊어지고 있다. 유사한 봉기들이 살타(Salta), 로사리오(Rosario), 코르도바(Cordoba), 산 후안(San Juan), 멘도자(Mendoza), 그리고 티에라 델 푸에고(Tierra del Fuego) 등에서 발생한 바 있다. 어떤 경우, 봉기들은 공공 건물의 방화와 대규모의 가두 대결을 초래했는데, 이들 모두는 어떤 전국적, 지역적인 정치적 대안을 보여주기에는 미흡한 것들이었다. 대개, 시위자들은 이러저러한 전통적 정당들과의 이전의 의뢰-후견 정치관계(client political relations)로 돌아간다.
표면상, 좌파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중도좌파 선거주의 전선체와, 직접 행동에 연루되어 있는 지방주들의 운동으로 양분되어 있다. 실제로, 이러한 차이는 심각한 [상호] 자격제한과 연결되어 있다. 인권 그룹인 ‘오월광장어머니회(Madres del Plaza de Mayo)’는 대학생들과 학자들의 중핵뿐만 아니라 젊은이들, 반대파 노조 활동가들, 주민운동 조직들의 민중 동원의 한 중요한 참조점이 되었다. 수석 대변인인 에베 보나피니(Hebe Bonafini)는 필자에게, 현존하는 중도좌파 연합체들로부터 독립적인, 통합적인 전국적 운동을 건설하는 것에 대한 그녀의 구상을 말해주었다. 3만명 이상의 살인에 책임을 지고 있는 군부 요인들을 재판에 회부하라는 비타협적 주장 때문에 어머니회가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외에도, 이들은 대부분 젊은이들로 구성된 5만명 이상의 전투적 시위를 일으켜낼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저항으로부터 정치로 나아가는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맑스주의 좌파는, 비록 개인적 투사들이 중요한 노조들에 존재하고 있긴 하지만, 내부적으로 분열되고 사회적으로 고립된 채 여전히 극소수 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들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은 도시 사회투쟁들의 참여자들 사이에서 정치적 신뢰를 얻는 어떤 좌익적 운동이다. 선거정치는, 사회적 투쟁들과 직접행동 운동들의 극단화로부터 출현한 정치적 정체성의 성장의 일부로서만 의미를 지닐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는 사이, 마치 멕시코의 경우처럼, 부패하고 무능한 메넴 정권에 의한 사회의 해체는 정치의 군사화의 증대를 야기시키고 있다. 8월의 총파업 기간 동안 군대가 거리를 메웠고 공중의 저항을 막았다.
8월의 총파업은 모호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 이는 메넴에 대한 지지의 퇴락의 진전과 CGT의 관료제에 대한 점증하는 압력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노조 관료들은 이를 내부의 반대를 굴절시킬 탈출구로 보았으며 투쟁을 심화시킬 의도는 전혀 지니지 않고 있었다. 달리 말하면, 아르헨티나 좌파는 대전선이나 CGT 같은 공식 좌파 조직의 침체와, 어떤 정치적 혁신의 원천이 될 것으로 기대되는 지방주 반란의 극단화 사이에 서 있는 것이다.
      
8) 멕시코

멕시코에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사파티스타(Zapatista) 운동과 그 지도자인 ‘마르코스(Marcos)’ 부사령관이 있지만, 이들은 단지, 게레로, 오악사카 및 그외 지역들을 포함하는 중요한 농민운동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파티스타 운동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그들에 의한 맑스주의적 분석과 인디오 실천의 혼합, 전국적이고 국제적인 전략적 사고와 지방의 공동체에 기반한 [민중] 지지 사이의 연결이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중도좌파 정당인 PRD (Revolutionary Democratic Party, 민주혁명당)가 입법부에서 계속 주변화되고 있는 탓에 NAFTA 쟁점, 민주화, 토지 개혁, 사회 정의 등에 대한 국민적 논쟁의 기반을 제공하는 것은 다름아닌 농민운동, 그중에서도 특히 EZLN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보다 강력하고 대규모적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EZLN은 사회적 투쟁을, 전체 사회를 변화시킬 정치적 도구를 벼리려는 노력과 결합시키고 있다.
하지만 멕시코 혁명의 전망을 논의하면서 EZLN에만 배타적인 초점을 맞춘다면 이는 오류일 것이다. 급진적 변화의 잠재력들은 다양한 지역들에 분포되어 있다. 새로운 게릴라 조직들의 폭발, 지방의 지역 농민운동들의 활성화, PRD의 사회적 기반의 급진화, 공식 노조 내부에서의 의미심장한 분열들의 출현, 이에 병행한, ‘Ruta 100’과 같은 자주적인 ‘계급 지향적’ 노조의 등장 등등. 이들 각 구성부분들은 서로 중첩되어 있다. 예를 들어, 국가 권력의 장악을 자신의 임무로 설정하고 있는 EPR(Ejercito Popular Revolucionario)은 최소한 게레로의 일부 농민운동들 사이에서 실질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농민운동 내의 급진적 사회운동가들은 또한 PRD 좌익의 일부를 이루기도 한다. 이 운동들은 세디요(Zedillo)  대통령의 ‘선거 개혁’에 의해 열린 정치적 공간에 대해 반응하지 않고 있다. 그 대신, 이들은 나라의 군사화의 증대에 굴하지 않고 그들 자신의 정치 공간을 [스스로] 창출하고 있다. 멕시코의 정치적 지배자들은 월 스트리트와 마약 자본가들(narco-capitalists)에 대한 멕시코의 신탁과, 세계은행과 IMF의 파견총독 사이의 혼인의 산물이다. 정치-사회운동들의 성장은 부분적으로는 권위주의적인 국가 자본주의로부터 경찰국가의 강권정치로의 이행의 결과인데, 후자는 자신을 ‘자유시장 자유주의’라고 칭하면서 선거 개혁과 반대파의 암살을 ‘민주주의로의 이행’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새로운 국면의 특징적인 현상은 철도의 민영화에 뒤따른 화물 열차 강도의 물결이었다. 최근까지, 멕시코의 철도망은 멕시코 혁명 및 국민적 관념과 강고히 연결되어 있었다. 지난 몇 년 내내, 십수개 이상의 화물 열차들--대개 곡물을 운반하는--이 농민 군중에 의해 정지되었고, 이는 운송물을 약탈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급진적 저항세력을 확대하고 심화시키는 데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점은 이들이 어떤 정치적 주축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운동의 분산적이고 지방적인 성격으로 인해 주로 직접적인 해결책을 찾으려는 운동에 머물고 있으며, 따라서 일당 국가 체제에 대해 도전할 수 있는 전국적 운동의 창출은 늦추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RI와 그 내부 음모들, 정치투쟁과 피의 복수 등의 부후(腐朽)화 현상으로 인해 시민사회의 민중 계급들에 대한 집권세력의 촉수가 이완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선거 차원에서는, 우익 PAN이 지난 몇 년간 자신의 선거 기반을 거의 두 배로 늘려 15만명에 육박하는 유권자들을 획득, 가장 많은 이득을 보았다. PRD는, 당을 보다 능동적인 개입활동으로 향하게 하려는 그 좌파 사회 기반과, 당을 북부 대도시들의 중간계급 유권자들에게 영합하는 선거 기계로 만들려 하는 그 의회 지도자들 사이의 심각한 분열을 겪고 있다. 오브레곤 로페즈(Obregon Lopez)를 당 의장으로 선출한 후, PRD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는 실행곤란한 시도를 해보이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멕시코에서의 혁명[가능성]의 성장은 혁명사 연구가들에게는 결코 놀랄 일이 못 된다. 고어 부통령은 NAFTA를 19세기의 루이지아나 매입(Louisiana Purchase)과 비교하고 있다. 존 삭세 페르난데즈(John Saxe Fernandez)가 지적하는 대로, 20세기 후반의 미국의 정책을 ‘멕시코 매입(Mexico Purchase)’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멕시코의 채무자에 대한 은행들의 재정적 압박이 임금을 시간당 40센트까지 떨어드리고 농산물기업에 의한 농민들의 대규모 강제이주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혁명은 이미 무르익어 있다(there is a revolution waiting to be made).

※ EZLN : 무기와 정치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Zapatista Army of National Liberation)은 멕시코와 전세계에 걸쳐 상상력과 공감, 지지를 끌어모았다. 이는 치아파스의 밀림에서 사파티스타에 의해 주최된 국제적 ‘Encuentro’(1996년 7월 27일-8월 3일)에서 분명히 드러났는데, 여기에는 41개국에서 모인 4천명의 인원이 참여했다. 마르코스와의 회합을 비롯한 대담들과 토론들을 통해, [필자는] EZLN의 진보와 최근 상황에 대한 복잡한 그림을 그려볼 수 있었다.
1994년 새해 첫날의 최초의 봉기 이래로 EZLN은 정치적 전망의 본질적인 변화를 겪었다. 이러한 변화들과 사파티스타의 정책들이, EZLN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25개의 공동체들을 뛰어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 EZLN의 공식 담화뿐만 아니라 마르코스 및 그 외 지도자들과의 대화 등을 검토해보면, 우선 EZLN이 자신의 목표를 좁혔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초창기에는 기본적인 사회-경제적 변혁에 초점을 맞추었으나(사파티스타 투사들은 이와 관련해 사회주의 변혁까지를 말하곤 했다), 오늘날 전반적인 강조점은 ‘민주화’, ‘탈군사화’, 그리고 일종의 ‘정치적 이행’에 맞추어지고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 조여오는 군대의 포위 때문이다. 정부의 비타협적 태도와 ‘살라미 소시지(salami) 전술’--EZLN과 단절시키기 위해 인디오 공동체들을 고립시키고 굶주리게 만들고 매수하는--의 결과, 잔존한 공동체들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적 기습의 전망이 고조된 것이다.
조직을 군사적 구조의 조직체에서 정치적인 그것으로 변형시키고 그에 맞는 민주적 책임 체계를 수립한다는 과제는 EZLN에게 많은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무엇보다 첫째로, 즉각적인 군사적 위협의 문제가 있다. 일부 사파티스타 공동체들에 대해서는 1 km도 안 되는 곳까지 병력이 배치되어 있다. 조급하게 정책결정의 중심에 회의체-형태(assembly-type)의 구조를 채택한다면 이는 1995년 2월의 전격적 공격의 교훈을 경시하는 것일 수 있으며, 민주적 가치를 지지하는 지도부의 약점을 증대시키는 것일 수 있다. 공동체 연대의 문화와 생존은 민주주의 건설의 필수 전제조건이다. 사파티스타군의 현재 환경의 연속성을 지키는 것이 하나의 보장이 될 수 있다. 마르코스는 물론 게릴라 조직체 내의 중앙집권주의 경향을 경계하고 있으며 이 쟁점에 대해 고뇌하고 있다. [하지만] 군사적 방어와 민주주의 사이의 긴장은 단순히 민주적 명령 체계를 쟁점화하는 것으로써는 해결될 수 없다. 이는 점령되어 있는 치아파스의 구체적 상황을 고려함으로써만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인데, 이 곳에서는 지금 헬리콥터가 머리 위를 배회하고 있고 공수특전단이 공격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정부의 공격을 받게 될 경우, EZLN은 그들의 사회적 기반과 분리될 것이고, 언론에 의해 획책된 공적 이미지는 인디오 공동체들과 일당 국가 사이의 투쟁으로부터 게릴라와 군대 사이의 무장투쟁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양극화는 진보적인 도시 세력의 지원을 약화시킬 것이다.        
전쟁이냐 평화냐 하는 문제는 마르코스의 일방적 양보들에 의해 해결될 수 없다. 향후의 전쟁은 치아파스 바깥의 세력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을 보다 광범한 정치적 투쟁들 속에서 결정될 것이다. 게레로의 게릴라들, 오악사카의 농민 동원, 점증하는 노조의 불만--1996년 노동절날 멕시코 시티에서는 30만명의 인파가 시위행진을 벌였다--,북부에서의 유권자 지지의 급락, 약간의 불안정의 조짐에도 떠나갈 채비가 되어 있는 유동자본에 심각하게 의존하고 있는 경제 등등과의 다면적 전선에서 멕시코의 정권이 싸워나갈 수 있겠는가?  6월에는 멕시코 시티 시장직 선거가 치루어지기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PRD의 후보인 콰우데목 카르데나스(Cuauhtemoc Cardenas)가 승리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러한 전망은 아마도 정부와 EZLN이 신중히 행동하도록 설득될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
EZLN의 목표의 축소는 국제적 지원의 광범화를 동반했다. 뭐라 규정될 수 없는 EZLN 지도부의 성격으로 인해 제각각의 경향들이 EZLN을 자신들의 정치적 관심하에 독해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프랑스 지식인들은 사파티스타를 19세기의 공화주의적 시민의 재생으로 칭송한다. 스페인의 무정부주의자들은 이들을 두루티(Durrutti)의 농민군의 관점에서 본다. 비규정성이 이득을 주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이는 치아파스를 넘어선 일관성있는 전국적 운동을 건설하는 데 한계로 작용하기도 한다. 게다가, 목표의 축소가, EZLN을 구성하는 정치적 경향들 사이의 내적 변화의 반영이 아닌가 하는 문제는 분명치 않다.
EZLN의 현실접근상의 두 번째 변화는, ‘시민사회’에 대한 산만한 호소--시민사회는 ‘자기-조직화’를 낳지 못했다--에서 벗어나, 정부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입증해보인 멕시코의 특정한 그룹들과의 협력과 조정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1996년 6월과 7월에, 백만명의 회원을 주장하는 채무자 조직 BARZON이 사파티스타 구역 내에서 전국 대회를 갖고 사파티스타와 연계를 맺었다. 그후 곧바로, 다수의 전국적, 지방적 인디오 조직들이 같은 곳에서 회합을 가졌다. 같은 시기에 EZLN의 지도자들은 멕시코 지식인들과 함께 국가의 개혁을 논의하는 일주일간의 세미나에 참석했다. 조직화된 그룹들과의 이러한 연계는 전국적인 정치 대안을 건설한다는 보다 큰 약속을 의미하며, 정부로 하여금 포위 전략이 효과가 없음을 깨닫게 만들어주고 있다. 더 중요하게는, 이러한 연계 덕분에 마르코스가 구상하는 운동의 사회적 성격이 그 실체를 획득하기 시작하고 있다.
사파티스타 정책상의 세 번째 변화는 일종의 정치적 해결과 무장투쟁의 조건부 중단에 대한, 배타적이지는 않더라도 압도적인 강조이다. Encuentro에서의 연설에서, 마르코스는 무장투쟁을 투쟁의 초기 ‘국면(phase)’의 맥락에--인정을 획득하고 체제와의 정치적 대화를 개시하며 정치적 해결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위치지웠다. 이는 특히, 자유 민주주의적 공공 의견에 대한 열렬한 제안과, 1996년 6월에 출현한 게레로의 새로운 게릴라 운동(EPR)에대한, 비록 적대적이지는 않지만 거리감있는 관계를 통해 고조되었다.    우리의 대담과정에서, 마르코스는 군사적 투쟁과 정치적 투쟁 사이의 선택의 딜레마를 정교화했다. 그는 분명히 합법적 정치 활동으로의 선회에 열의를 보였지만, 정권은 그 동안에도 군대의 포위망을 좁히면서 용병 조직에 대한 원조를 통해 치아파스의 농민들에 대한 억압을 증대시키고 있었으며 PRI 국가가 정치적, 사회적 생활의 모든 측면들을 지배하는 숨막히는 현실을 중단시키는 데 대해 어떠한 양보도 하지 않고 있었다. 멕시코의 실제적인 정치적 조건들은 극히 억압적이다. 매주 평균 2명의 PRD 지도자들이나 활동가들이 죽음을 당하고 있으며 이들의 수는 세디요 대통령의 당선 이후 250명 이상에 이른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만약 사파티스타가 밀림에서 나와 본격적인 조직활동을 시작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상상할 수 있다.
마르코스는 농업 개혁과 문화적 자율성이 모든 농민 거주지의 핵심적 사안임을 강조했다. 마르코스와 EZLN에게, 토지 분배라는 쟁점은 인디오 공동체들의 자치와 연관되어 있다. 멕시코 정부는, 볼리비아, 과테말라, 에콰도르의 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인디오 문화라는 쟁점을 사회-경제적 변화들 및  자율적인 정치 권력[이라는 쟁점들]과 괴리시키려고 시도하고 있다. 어떤 경우, 정부의 협상대표들은 바깥의 반란 지지자들을 지치게 만들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고 소모전을 벌이길 꿈꾸면서 아무런 의미있는 양보도 제시하지 않고 있으며 재산몰수를 통해 공동체들을 황폐화시킨 뒤 기습적인 군사 공격을 가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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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넷 <읽을꺼리> 2호에서 퍼왔습니다. (http://copyle.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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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나는 라틴 아메리카 민중운동 / 제임스 페트라스  
                      
라틴 아메리카의 좌파는 일종의 대귀환을 연출하고 있다. 대부분의 저술가들, 저널리스트들, 현학자들, 정부와 세계 은행(World Bank) 간부들이 모두 ‘신자유주의’의 승리를 축하하거나 통탄하는 동안, 다른 한 편에서는 저항세력이 성장하고 있고 이들은 조만간 자유시장 권력 구조의 지배 전체에 도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새로운 저항세력들은, 비록 아직까지는 서로간에 느슨하게--포럼, 세미나, 그리고 국제적 모임의 형태로--결합되어 있지만, 이미 다수의 나라들 내에 각각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그 지지기반을 특수한 지역과 계급으로부터 다수의 국민적 대항-헤게모니 블럭의 건설로까지 확장시키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좌파 일반(the Left)’을 말한다는 것은 오류인데, 왜냐하면 그곳에는 한 종류의 좌파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보다 낡은 어떤 종류의 좌파들은 마치 시든 포도덩굴처럼 새로운 사회-정치적 운동의 출현을 가리는 역할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변덕스러운 관측통들, 적지 않은 수의 저널리스트들과 현학자들은, ‘좌파’라고 말하면서, 이미 오래 전에 계급투쟁을 저버리고 많은 부분 자유주의적 정치기구나 NGO라는 그 변방에 흡수되어버린 ‘대상들’까지 이에 포함시킨다. 현재 라틴 아메리카 좌파들 내부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이러한 방식의 전향을 고려할 때에만 이해 가능하다. 전(前)좌파들이 빈번히 의지하는 지적 제스쳐는 예전의 입장을 ‘보수적’이라거나 ‘시대에 뒤떨어’졌다거나 혹은 ‘정통적’이라고 이름 붙이면서 현재의 자신들을 시대에 걸맞는, 혁신된, 현대화된, 포스트 어쩌구라고 불리는, 민주적인 좌파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새로운 혁명적 좌파의 출현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선 ‘좌파’ 내의 차별적 조류들을 식별하고 그것들을 서로 구별하는 게 중요하다. 두 번째로는, 그들의 공간적(spatial)이고 경제적인 초점, 사회적 토대, 정치활동 양식과 정치적 전망을 논의해야 할 것이며, 세 번째로는, 이러한 막 움트고 있는 사회-정치적 운동이 맞부딪히고 있는 성장과 모순들, 정치적 도전들을 실증하는 자료들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미국-주도의 ‘신자유주의적’ 권력 블럭과의 현재적 대결, 그리고 사회주의 이행을 위한 잠재력과 함께, 새로운 좌파와 과거 운동들 사이의 관계가 검토될 것이다.


1. 좌파 부활의 조짐들과 그 실체

좌파 부활의 거점은 농촌 지역에서 발견된다. 많은 나라들에서 1990년대는 무토지 농민들의 대규모 토지 점거운동으로 특징지워져왔다. 이들중 가장 중요한 것은 브라질의 무토지농촌노동자운동(Landless Rural Worker's Movement, MST)이다. 이 운동은, 농촌 지역의 수백명의 농민 조직가들과 수만명의 활동적인 지지자들의 투쟁을 통해, 모든 정당들 사이에서 농지개혁 문제에 대한 국민적 논의가 일도록 만들었다. 대부분의 브라질 정치 관측통들은 MST가 현재 브라질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최고로 조직화되었으며 가장 효과적인 사회운동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볼리비아에서는 대부분의 주석 광산의 폐쇄와 값싼 수입품의 대량 유입, 그리고 정부의 묵인하에 이루어지는 밀수 등으로 말미암아 광산 및 산업 부분의 노동조합들이 약화되었다. 이를 대신하여 주로 코카 재배 농민들로 이루어진 농민총연맹(peasant confederation)이 국가와 미국에 대한 주요 대결을 이끌고 있는데, 고속도로를 봉쇄하거나 총파업의 선두에 나서 온 나라를 마비시켜버렸다. 파라과이에서는 전국농민연맹(National Peasant Federation)이 군부독재의 재개를 막고 토지문제를 정치논의의 중심사안으로 강제한 정치적 동원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맡고 있다. 이 조직은, 다른 농민조직들과 함께, 아순시온의 거리에서 출발해 대통령궁과 국회의사당에까지 도달한 5만명의 시위대를 이끌었다. 멕시코에서는 농촌지역에서 주요 민중 투쟁들이 벌어졌다. 즉 게레로(Guerrero), 치아파스(Chiapas), 그리고 오악사카(Oaxaca)에서 농민들과 국가 사이의 대규모의 대결이 발생했다. 에콰도르, 콜럼비아, 엘 살바도르에서도 유사한 농민 동원의 과정들이 국민적 정치 의제를 재규정하기 위해 출현하였다.
하지만 좌파 부활의 사례들이 농촌 지역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다음과 같은 사례들이 있다. 콜럼비아에서의 공공노조의 혁신, 노조에 대한 칠레공산당의 점증하는 영향력, 베네주엘라와 아르헨티나에서의 도시기반 운동들(urban movements), 북부 멕시코 자동차 노동자들과 멕시코 시티 노동자들 사이에서의 독립적이고 ‘계급 지향적인’ 노동조합주의의 출현, 브라질의 전국노동총연맹(National Labour Confederation, CUT) 내의 내부 반대파적이고 전투적인 부분들, 점차 맑스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어가고 있는 볼리비아, 파라과이, 칠레, 멕시코, 브라질에서의 전투적 교원노조들 등등. 이렇듯 조직화된, 도시 기반의 노동계급 운동들이 투쟁의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어떤 사례들에서는 중심적 역할을 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좌파의 부활 과정에서 진정으로 혁명적인 활동과 운동들은 농촌에 존재한다.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같은 걸출한 이들을 비롯한 많은 논평가들과 분석가들이 자신들의 저작을 통해 농민층의 정치적 쇠퇴(political eclipse)를 말했다. 농촌 노동력의 규모가 감소중이라는 인구학적 논의들에도 불구하고 왜 이것이--적어도 라틴 아메리카의 대부분에서는--그 자체 필연적으로 정치적 분석으로 전환될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이유들이 존재한다. 첫째로, 비록 백분율상으로는 감소하는 중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수천만 가구가 농촌지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무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둘째로, 도시와 산업 지역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위기들, 특히 점증하는 실업과 빈곤 때문에 도시는 더 이상 젋은 농민들의 유인 배출구가 되지 못한다. 셋째로, 토지 점거가 의제에 오르자, 지방 소도시들과 대도시들로부터 농촌으로 돌아가는 인구 이동의 가능성이 등장하고 있다. 즉 ‘재농민화’ 효과. 넷째로, 자유주의 경제가 소생산자들을 강타하고 그들이 생산하는 품목의 가격을 낮추며 부채를 증가시키자 토지 공세에 참여중인 대부분의 젊은 무토지 농민 자녀들 사이에서 가족적이고 사회적인 유대가 창출되었다. 다섯째로, [이상의] ‘구조적’ 고려사항 외에도, ‘교육받은’ (초등학교나 중등학교 정도) 농민 지도자들의 새로운 세대가 지난 십년동안 출현했는데, 이들은 강력한 조직적 능력과 국민적, 국제적 정치에 대한 세련된 이해, 정치적으로 교육받은 간부진의 창출에 대한 깊은 몰두 등을 특징으로 지니고 있다. 지방의 남성, 여성 지도자들이 투쟁 지역에 개입하여, 애초에는 자생적이었고 쉽게 격퇴될 수 있었던 점거운동을 사려깊게 계획되고 실행되는 대중적 정치 행동으로 전환시켜냈다. ‘모든 성원이 한 명의 조직가(every member an organizer)’라는 원칙을 중심으로 구성된 새로운 정치 지도부의 성장과 구조적 조건들 사이의 결합은 ‘농민운동들’의 급작스러운 부상 과정에 유익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이런 운동들이 더 이상 전통적 의미에서의 농민운동이 아니며 이 운동에 참여하는 농민들도 도시적 생활이나 활동들과는 단절된 채 살아가는 농촌 경작자들이 아니라는 점이 지적되어야만 하겠다. 어떤 사례들의 경우, 새로운 농민들은 이전의 노동자, 특히 광부들로서 공장이나 광산의 폐쇄로 인해 원래의 거주지에서 쫒겨나게 된 이들이거나 한 세대 전에 농민들이었던 이들이다. 다른 경우, 새로운 농민들은 교회 기구에서 양육된, 농민들의 ‘과잉(excess)’ 자녀들로서 농촌투쟁에 연루되면서 교회를 버리고 토지 개혁 투쟁을 주도하게 된 이들이다. 많은 경우, 이들은 초등학교나 중등학교 정도의 교육을 받은, 소농의 딸들로서 도시로 이주하여 가정부가 되기보다는 토지 점거운동에 결합하거나 때로는 운동의 지도자로 나서는 것을 택한 이들이다. ‘새로운 농민층(new peasantry)’, 특히 그중에서도 투쟁을 주도하는 이들은 도시를 왔다갔다 하면서 세미나와 지도력 훈련 학교에 참여하며 정치적 논쟁들에 참여한다. 한마디로, 이들은, 비록 농촌 투쟁에 뿌리를 박고 있고 농촌 거주지에 살며 농업 경작에  종사하고 있지만, 일종의 코스모폴리탄적 영감을 지니고 있다. 이들 새로운 ‘농민 지식인들(peasant intell- ectuals)’의 양과 질은 나라마다 다양한 편차를 보이며 운동의 자원과 성숙도에 의존한다. 브라질에서 MST는, 그 수백명의 조직원들로 하여금 매년 다양한 수준의 사회-정치상의, 기술상의 교육과정을 통과하게 하는 지도자 훈련 과정에의 막대한 투자로 잘 알려져있다. 파라과이와 볼리비아의 경우 운동들은 여전히 잘 교육받은 소수의 지도자들에 의존하고 있다.  
‘새로운 농민층’의 또다른 특징은 이들이 어떠한 선거주의적이-고/거나 종파주의적인 좌파 정당들로부터도, 설사 그 정당이 가장 급진적이라 할지라도, 정치적으로 자율적이라는 점이다. 브라질의 MST는 노동자당(PT)과 ‘형제적(fraternal)’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래서 대체로 노동자당의 후보를 지지하거나 종종 그 자신의 후보를 노동자당의 이름으로 내세우곤 한다. 그러나 MST의 핵심 역량은 토지 침탈, 고속도로 봉쇄, 농지개혁기구(Agrarian Reform Institutes) 안에서 벌인 연좌농성 등을 포함하는 의회 외적 투쟁에 집중되어 있다. MST의 전술, 전략과 이데올로기적 논쟁들은 자체의 운동 안에서 결정되며 PT나 그 의회 대표들에게 종속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MST의 행동이 PT 지도부로 하여금 농지개혁 투쟁에 몰두하도록 만들었다. 최근 파라(Para)에서 있었던 학살사건은 이의 한 사례이다. 1996년 4월 19일에 주도(州都)로 향하는 평화적 시위 행진을 진압하기 위해 주지사가 군대를 투입하자 이는 10명의 농민들이 살해되는 학살로 비화되었다(4명은 ‘실종되었다’). 그러자 MST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는 PT 의원들 및 일련의 전국적 시위를 시작한 CUT에 대한 지원을 촉구하는 전국적 켐페인에 착수했다. MST는 저항운동의 촉매였으며, 이에 뒤따라 토지 점거운동의 새로운 물결이 일어나 카르두수(Cardoso) 대통령의 인기는 대통령 취임 이후 최저치인 30% 이하로 바닥을 헤멨다. 왜냐하면 그 억압적 주지사는 카르두수의 당 소속이기 때문이다. 유사하게, 볼리비아에서는 전투적 농민조직들이 민족주의 정당들이나 사회주의 분파들과의 과거의 연계를 대부분 청산했으며, 그들 자신의 정당 운동을 형성하는 것에 대한 내부 논쟁에 몰두하게 되었다. 파라과이에서는 전국농민연맹의 많은 지도자들이, 농민층이 전국적 관심의 초점이 되도록 애쓰는 한편, 최근 일종의 새로운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을 출범시켰다.    
게다가 새로운 농민운동들은 일종의 고전적 맑스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으며, 그와 구분되는 맥락에서, 종족적(ethnic), 성적, 생태학적 관심들의 영향도 받고 있다. 파라과이에서, 그리고 특히 볼리비아에서 사회 해방과 농촌 투쟁의 문제들은 소수민족적이며 언어적이고 문화적인, 그리고 심지어는 민족적인(national) 요청들의 재확인과 강하게 결합되어 있다. 브라질과 볼리비아에서는, 농민 여성들의 조직화된 그룹들로 인해 운동이 보다 강대한 영향력과 대표성을 부여받고 있다.  
새로운 농민운동들은 모두 라틴 아메리카의 지역권적(regional) 조직인 라틴 아메리카 농민조직회의(Congreso Latinoamericano de Organizaciones del Campo, CLOC)에 결합되어 있으며, 최근들어 더욱더, Via Campesino라고 불리는 국제적 기구에 활발히 참여하여 농촌 투쟁들과 관련된 생각들과 경험들을 논의하고 있다. 이러한 네트워크나 그 외의 것들을 통해 ‘국제주의적인’ 의식과 실천이 출현하고 있다. 예를 들면, 브라질 MST의 투사들은 국경을 넘어 파라과이의 동료들과 함께 작업하고 있으며, 보다 드문 경우이지만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농민운동과도 연대하고 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1990년대 농민운동들의 부활은 1960년대 운동들의 단순한 재연이 아니다. 많은 경우, 이전 운동들의 성공과 실패는 충분히 학습되고 토론되었다. 소수의 예전 투사들이 새로운 운동에 참여하고 있고 새 운동의 지도자들중 일부가 과거 활동가 세대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옛 운동과 새 운동 사이에 어떤 연속성이 존재하긴 하지만, 전술적, 전략적, 정치적인 수준뿐만 아니라 조직적 수준까지 포함하는 일련의 중요한 차별점들은 새로운 운동들이 풍부한 가능성을 지닌 창조적 정치 세력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농민운동들의 재출현은 변화중인 복잡한 정치적 맥락에서 발생했다. 그 첫 번째 사례로서, 신자유주의 정권의 정책들은 부르주아지의 일부까지 포함하는 사회집단들의 엄청난 부분들에게 상처를 입혀왔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도시기반 운동과 노조운동은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쇠퇴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운동들의 부상은 바리케이드 저편의 집단들로부터도 신자유주의 정책들의 적용을 탈정당화하거나 약화시키는 기제로서 환영받았다. 가령 이에 따라 농민운동에 대해 우호적인 신문 및 기타 언론 보도들이 종종 등장했는데, 이는 브라질에서 특히 그러했다. 필자가 1996년 5월에 브라질에 방문했을 때 부르주아지 내 일부 분파들의 MST 지지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이 당시 기업가 집단들은 농지개혁에 대한 자신들의 지지를 표현하기 위해 MST를 위한 점심만찬을 조직했다.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농민운동들은 중도좌파 선거연합에 의해 방기된 정치적 공간을 채워냈다. 중도좌파는 선거에서 승리하는 데에 실패하거나 자유주의적 정치에 흡수되었고 어떤 경우에는 신자유주의 정권에 결합하기까지 했다. 선거주의적 중도좌파 저항세력의 썰물은, 일부는 반(反)노동자적 입법, 대규모 실직, 높은 실업률의 결과로서, 그리고 또 일부는 노조 지도부의 순응적 태도 때문에, 많은 경우 노조의 약화와 함게 했다. 따라서 농촌지역에서의 계급 전쟁의 폭발은 정권의 총체적 정치 기획을 의문에 부치고 공공의 논쟁을 점화하는 ‘불꽃’이 되었다.


2. 라틴 아메리카 좌파의 세 차례의 물결

최근 25년간 좌파는 세 번의 서로 구별되는 물결을 통해 역사 속에 등장했다. 현재 진행중인 사회-정치적 운동들의 중요성과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선 이를 선행의 흐름들과의 관련 속에서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
현대적 좌파의 첫 번째 물결은 1960년대에 시작되어 197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이는 대규모 사회운동들, 게릴라 부대들, 그리고 선거정당들을 포함했다. 때때로 계급과 군사적 활동들은 서로 융합되었다. 때때로 선거 정치와 노조 정치가 서로 융합되었다. 이는 ‘신좌파’--친모스크바적 공산당들의 지배에 도전했던 운동들과 정당들--의 시기였다. 이중에는 마오주의자들, 피델주의자들[카스트로주의자들], 트로츠키주의적 사고에 영향받은 이들, 그리고 기독교적 운동과 인민주의적 운동들로부터 성장한 또다른 이들이 있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독재정권들은 이 물결을 압살했다. 수만의 활동가들이 죽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강제 추방당했다. 억압,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적 기구들과의 해외 연계의 결과로, 이 물결의 참여자로서 이후 정치에 복귀한 이들 중의 다수는 사회민주주의자가 되어 있거나 때로는 신자유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좌파의 두 번째 물결은 독재 기간과 그 직후의 시기에 등장했다. 처음에는 권위주의적 체제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그 뒤에는 ‘신자유주의적 의제’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이 물결은 사웅 파울로 포럼(Foro of Sao Paulo)을 통해 자신을 드러냈으며, 엘 살바도르의 FMLN, 산디니스타, 브라질의 노동자당, 우루과이의 확대전선(Broad Front), 베네주엘라의 카우사 R(Causa R), 멕시코의 혁명민주당, 아르헨티나의 대전선(Frente Grande)을 포함했다. 하지만 이들 정당들, 연합체들, 전(前)게릴라 운동들은 점차 선거주의 정치에 삼켜져버렸고, 민영화, ‘세계화’, 그리고 다른 이슈들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정책들에 순응해가기 시작했다. 얼마 안 있어 이들은 좌파 정당으로서의 자신들의 정체성의 어떤 좋은 부분을 잃어가기 시작했으며, 판자촌, 농촌지역, 공장 등에서의 민중 투쟁들과 점점 더 단절되어갔다. 어떤 이들은 NGO라는 틀 안에 흡수되어 버렸으며, 그래서 세계 은행(World Bank)의 자유시장과 반(反)국가주의적 정책이라는 보금자리 안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들 정당들과 운동들의 대다수는 [현재에도] 좌파적이고 행동주의적인 흐름으로 남아 있지만, 존경심의 대상으로서는 주변화되어버렸다.
현재 출현하고 있는, 운동의 세 번째 물결은 두 번째에 속하는 집단들과 중첩되어 있지만 보다 막강한 힘과 복원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 지지자들은 대개 20대 초반에서 30대 초반 사이의 젊은이들이며, 농민들, 지역 노조들, 학교 교사들로부터 충원되고 있다. 이들 활동가들은 그들의 선행자들과는 심대한 차이점들을 지니고 있다. 우선, 대학 출신들이 아니다. 지식인들은 아직도 대개 중도좌파 선거 조직이나 전문직 경력을 지향하고 있다. 두 번째로, 새로운 운동들은 재정적 재원들을 거의 지니고 있지 못하지만 엄청난 활력과 ‘비법(mystique)’을 지니고 있다. 지도자들은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버스로 (때때로 30시간에서 40시간 동안이나) 여행하며, 자신들의 임금이나 경작 수입으로 살아가고 있고, 청빈한 사무실을 지니고 있다. 그들 중에 상근 전업 간부들은 별로 없으며 따라서 결코 관료가 아니다. 그들에게 특전이란 없다. 즉 차도 없고, 사무실 집기도, 참모도 없다.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재정 문제와 인간관계에 대해서 성실하고 지조있는 ‘도덕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중에 ‘개인숭배주의적(personalist)’ 지도자는 거의 없다. 오히려 그들은 회의중의 격론을 선호하며 집단적 지도부의 일부를 이룬다. 새로운 조직들의 이상은 각각의 조직원들이 다 한 사람의 조직가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 지도자들은 선거주의적 좌파나 NGO 지식인들의 기회주의에 대해 극히 비판적인데, 이들은 이 자들을 외부의 고객(client)들에게 봉사하는 기만적인 아웃사이더들로서 경험하곤 한다. 이전에 게릴라 투쟁에 참여했던 이들 역시도 오늘날에는 이러한 조직들에서의 수직적 지도 양식과 ‘전달 벨트’로의 오용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다. 그들은 선거 기계상의 톱니바퀴가 되길 거부하고 그 대신에 사회적 기반에 보다 깊이 밀착하길 선택한다. 하지만 이러한 세 번째 물결이 신자유주의라는 짐에 대한 비타협적 저항을 대변한다 하더라도 이는 완전히 정교화된 권력 장악의 계획은 아직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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