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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공부할 대상과 공부하는 사람과의 '순수하고 맑으며 고독한' 대결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공부>도 일종의 제도라서, 공부하는 주체들은 그 한계와 제약과 구차스러 보이는 여러 '조건'들과 대결하고 교호해야 한다. 이런 문제에 관심이 많은 우리는 이 선생이 하고 있는 <공부>의 이면에 대해서도 질문해야 했다.

1959년생이시면, "이미" 불혹을 넘긴 나이신데, "아직" 선생님은 제도 바깥에서 공부하고 있는 건데요.  
이성형> 뭐ㅡ 제도 밖에 있었던 것도 아니죠. 대학교 연구소에 소속된 상임 연구자로 있었기 때문에 금전적인 어려움도 덜 했고, 또 비교적 자료에 대한 접근도 쉬웠고요. 비교적 좋은 조건에서 공부했다고 볼 수 있죠. 2000년 하반기부터 이제 바깥에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아바나』의 서문에 보면 "지역연구의 한이 많은 나로서는 여행기를 통해서 여러 가지를 발언하고 싶었다"는 구절이 있던데요?
 이성형> 우리나라는 지역 연구가 많이 필요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참 현실은 다르죠. 왜 그런 이야기를 하냐면요... 우리가 '우리의' 지식세계를 구축하고 만드는 과정이라는 것은 우리 중심의 분업구조를 갖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라는 건 스스로 구성되는 게 아니라 타자와의 접촉, 충돌, 대면 속에서 만들어지지요. 그런데 우리는 늘 두 가지 극단적인 태도를 반복해온 것 같아요. 하나는 바깥 세계에 대해서 국수주의적이고 편협한 태도를 가지고, '우리 것'을 무조건 강조하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외국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잡식적인 태도로 가리지 않고 삼키고 보는 태도죠.
외국이론이나 문화에 대해서나. 소비행태에 있어서 안정감이 없죠. 그래서 제가 <과식과 설사>의 싸이클이라 쓴 적이 있어요. 잔뜩 먹고, 한순간에 잊어버리는 - 이런 불안정한 시선이 왜 반복될까 하는 의문을 가졌는데ㅡ, 이는 우리가 자신감이 없고 외국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우리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탓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좀더 개방적이면서도 외국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연구해야 우리의 학문이나 지식세계를 가질 수 있다고 봐요. 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사실 막연히 동의하면서도 진짜 별로 행동에 옮기지는 않거든요.
  

 

왜 그럴까?나는 그 이유가 우리의 지식세계를 조직하고 조절하는 지도가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자아준거적 정체성의 부재(不在)야말로 가장 큰 문제인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그린 지도가 없기에, 우리가 만든 현장교범이 없기에 우리 지식의 세계는 과식과 설사의 사이클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지적 자원이 낭비되고 중복 투자되고, 결국은 앵무새처럼 유행가만 반복하다 지쳐 쓰러지고 말게 된다. 그 결과 머리통은 자그마하고 몸통은 우스꽝스럽게 큰 공룡과 같은 지식세계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인지지도를 다시 그린다는 것은 지난 50년간 폭발적으로 팽창한 지식과 지식인사회를 재점검하고,'지금 이곳'의 현실과 코드를 맞추고 화해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신토불이(身土不二)를 외치며, 우리의 것이 마냥 좋다는 토착주의자들의 한풀이가 될 수도 없고, 영어(논문)만이 살 길이라는 무차별적 개방주의자들의 주장이 될 수도 없다.
- 이성형, <위기의 지식사회에 묻는다 - 우리만의 지식은 있는가>, 『중앙일보』, 2001년 10월 25일자

 

김영삼 정부가 들면서 세계화다, 하면서 그런 생각이 힘을 받던 시절이 있었죠. 그래서 서울대를 비롯하여 유수 대학교의 국제대학원에 5년간 1,000억을 주는 프로젝트로 연결되었지요. 그런데 이 대학원이 어찌된 연유인지 지역연구를 제대로 하는 곳이 아니라, 국제관계나 국제통상을 주로 하는 교육기관으로 변질되어 버려요. 물론 학내의 힘관계나 갈등에 기인한 바가 크지요. 지금도 지たП만?제대로 하는 대학원이 하나 없다는 것이 참 아쉽게 생각됩니다.

두 번째는 지적하고 싶은 것은요, 제대로 된 지역연구를 위해서 필수적인 것은 제대로 된 좋은 도서관과 자료입니다. 정말 기본을 갖춘 지역연구 자료실 내지 도서관이 국내에는 한군데도 없습니다. 신문, 도서, 잡지, 영상 및 음반 자료 등이 모여 있는 데가 하나도 없죠. 그래서 그런 것을 한번 제대로 만들어 보는 게 꿈이었는데... 잘 안 됐죠. 언젠가 기회가 오겠죠 뭐.

지금부터는 어떨 것 같습니까? 특별히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요?
이성형>  현재 초고가 완성된 것이 두 가지 있어요. 하나는 정복과 현대 라는 주제로 500년 전의 정복사를 다룬 것으로 정복이 현재까지 남긴 유산에 대해 음미하는 것이지요. 한 1천매 정도 썼는데, 아무래도 자료들을 좀 더 읽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좀 시간을 두고 출판을 할까해요. 다른 하나는 <라틴 아메리카의 교훈>이라는 제하에 그동안 계간지, 월간지 등에 기고했던 입문적 성격의 글들입니다. 이 글들은 우리 학계나 사회에 편재해 있는 잘못된 해석, 오해, 문제점들을 주로 지적한 것들로, 대중들이 라틴아메리카 사회의 문제점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쓴 것들이지요. 겨울 방학에 작업을 해서 봄학기에는 출간할까해요.  

선생님 작업을 보면 진보적인 학자나 이론 전통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 같고, 실제로 하신 작업도 진보적이거나 좌파적인 관점에서 해 오신 걸로 보입니다만.
이성형> 꼭 진보다, 보수다라기 보다는 저는 아무래도 크리티칼 퍼스펙티브(Critical Perspective 비판적 시각)로 접근하는 쪽으로 공부를 했죠. 왜냐하면 텍스트나 지식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어떤 면에선 구성이 되는 건데, 항상 구성하는 사람의 시각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거고. 그래서 만들어진 지식은 수용자가 속기 쉽잖아요. 속기 쉬운 지식의 세계에서 좀 덜 속으려면 삐딱하게 보는 수밖에 없죠. 그것이 하나의 방법이죠. 왜냐하면 우리가 익숙하고 접하기 쉬운 것은, 지배적인 패러다임에서 만들어진 것 - 미디어나 돈을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그런 것이 되잖아요.
 

- "지역연구"의 알파 & 오메가 -

지역연구(Area Studies)이란 것이 제국주의적인 기원과 목적을 가지고 출발한 학문이라는 것을 누구나 인정합니다. 그리고 현재에 그것은 '제국주의적인' 의도가 아니라도, 지역연구가 국가나 기업의 정치 경제적 이해와 긴히 관련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런 걸로부터 자유로운 지역연구가 어떻게 성립하는 것일까 하는 점이 궁금한데요.

이성형> 네ㅡ. 맞습니다. 제국의 경영과 이해를 위한 지식세계를 건설한 게 지역연구죠. 국가나 기업으로부터 굉장히 많은 돈을 받아서 키운 거죠. 그래서 에드워드 사이드는 '지역연구'라는 말이 '추악한 신조어'라고 말한 적이 있고요. 분명히 지역연구나 인류학이 다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말하는 지역연구는 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어죠. 그것이 지식세계에 자극과 활력을 줄 수 있는 이유는ㅡ, 기존의 학문 체계가 너무나 분과학문적인 데 머물러 있고 전체에 대한 윤곽은 잊어버리고 전문화되고 세분화된 지식만 생산한다는 거거든요. 뉴튼 물리학적인 세계를 사회과학에 대입해서 만든 그런 근대 학문의 체계가 복잡하게 변화하는 세계를 설명할 능력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그런 체계가 모더니티의 위기상과도 관련된다는 생각이거든요.

지역연구가 이런 데서 탈출구가 될 수 있는 것은 분과학문의 벽을 헐어가면서 학제간 연구(interdiscipline study)가 가능한 분야이기 때문입니다. 월러스타인(I. Wallerstein) 같은 사람도 『사회과학의 개방(Open Social Sciences)』과 같은 데서 지역연구의 잠재력을 적극적으로 평가합니다. 미국 같은 데서도 분과적인 학문 체계가 너무 강력했기에 지역연구가 발전할 수 없었어요. 혹자는 학과 제국주의(departmental imperialism)란 표현도 썼지요. 그런데  최근 미국에서도 지역연구에 대한 입장이 많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지역연구에 돈을 많이 대줬는데 국익에 기여한 바가 뭐냐 하는 건데요. 국정 담당자들이 그런 판단을 하기 때문에 이제 돈을 많이 안 준다는 건데요.
예를 들어 소련 연구자들이 많았지만 망하는 그 순간까지도 소련 붕괴를 아무도 예측하지도 못했죠. 미국의 러시안 스타디는 동유럽과 소련에서 건너온 유태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는데 소련을 무슨 "惡의 제국"이라는 식의 종교적인 멘탈리티로 봐서 실상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고 해요. 물론 수정주의적인 시각이 나오는 80년대 이후에는 좀 달라졌다고 하지만.











모든 지역에 대한 연구가 다 그런 실정인까요?
이성형> 지역마다 좀 다른데요. 라틴아메리카 연구의 경우, 80년대 레이건 행정부의 대 중남미정책을 굉장히 비판했어요. 그라나다 침공이나 니카라과 문제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국무성 당국자들은 화가 났지죠. "실컷 돈 줘서 연구하라 그랬더니 국가 정책이나 비판하고 말야"이지요. 수없이 그런 일이 반복되었죠. 그래서 90년대 이후에는 아젠다가 바뀝니다. 글로벌 세계가 되니까 글로벌 스타디를 해야 한다고.
그런데 한국에서는 야, 미국도 안 하는데, 우리가 그런 걸 왜 해야 되냐? 이런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거야말로 맥락을 모르면서 하는 말이죠.

말씀하시는 "타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목적으로 하는" 지역연구라는 것은 인문학의 냄새를 많이 풍기는데요, CIA 같은 기관이 필요로 하는 학문(?)까지는 아니라 해도 분명히 여타 인문사회과학에 비해 실용성을 많이 가진 학문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은데요.
이성형> 세부 분야별로 좀 다를 수 있겠죠, 경제나 정치를 연구하는 것과 문화 연구를 하는 것이 다르니까요. 그러니까 지식의 용도를 일괄적으로 규정할 수는 없잖아요. 굉장히 실용적인 것고 있고 인문학적인 지평을 넓히기 위한 것도 있고요. 지역연구를 한마디로 뭐라고 규정하기보다는 마치 코끼리 같은 거라서, 코도 있고 다리도 있다고 해야겠지요.
그리고 꼭 실용주의적인 연구가 나쁘다고도 할 수 없죠. 상호 관계를 맺거나 교역을 하려면 그런 지식이 요긴하잖아요. 어차피 상호의존적인 세계니까요. 그런데 다만 과거에 지역연구가 가졌던 어두운 그림자는 정확히 밝히고 그것을 극복하면서 우리가 기여할 수 있는 것을 찾으면 되죠.

현장에 많이 가셨겠지요.
이성형> 인디오 마을 같은 데도 많이 다녔고 할 이야기도 많은데, 과연 여행기 책 안에다 그런 내용을 쓰면 읽힐까 하는 의구심이 들어서 『아바나』에서는 이야기를 별로 안 했어요. 멕시코에서도 한국 여행객들이 쉽게 잘 가는 데만 포인트만 잡아서 쓴 건데도 양이 그렇게 나온 것이거든요. 그렇게 써도 책이 어렵다는 말이 나오잖아요.

대학원에서 지역학 연구를 위해 트레이닝 차원에서 학생들에게 강조하시는 게 있다면요.
이성형> 인류학자가 아니지만, 저는 인류학적 훈련을 강조합니다. 제가 지역연구입문을 가르칠 때에는 항상 오리엔탈리즘, 옥시덴탈리즘을 첫순서로 읽히지요. 이건 시선의 문제이기 때문이죠. 필드(현장)를 갔을 때 늘상 생길 수 있는 많은 문제, 즉 '시선의 문제'들을 대비하기 위해서지요. 그리고 어떤 정보나 데이타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 - 예컨대 음반이나 영상자료 같은 다양한 자료도 많이 활용해야 된다는 것도 이야길 많이 하죠.  
그 다음에 지역연구 하려면 소설책을 많이 읽어야 된다는 것도 말하지요. 직접 안 가본 다음에야 리얼리티에 가장 밀접히 접근할 수 있는 건 역시 문학작품이기 때문에. 자기 연구하는 지역 작가가 쓴 소설책 최소 20권은 읽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현대작가부터 고전에 이르기까지.

현지조사라든가 오리엔탈리즘, 옥시덴탈리즘과 관련하여 권할만한 책이 있다면요?
이성형> 오리엔탈리즘, 옥시덴탈리즘과 관련해서는 재미있는 책이 많아요. 저자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Colornizing Egypt』라는 책의 일부를 읽힌 적도 있어요. 1899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참가한 이집트 사람이 본 서구인들의 '이상한' 행태에 대한 분석인데요. 굉장히 재미있는 글이예요. 페르난도 코로닐(Fernando Coronil)과 같은 인류학자의 책도 큰 도움이 되죠.

탈오리엔탈리즘, 탈식민주의가 근래 인문사회과학에서 각광을 받는 한 시각인데요. 물론 많은 이쪽 연구자가 제3세계 출신이라는 점이 있긴 해도, 그 시각이 결국 미국과 미국 내의 잘 짜여진 제도와 학제 안에서 만들어진 시각이라, 이게 역동성이나 전복성을 갖기에는 한계가 있을 거라 느낌이 저는 들었거든요.
이성형> 아시다시피 탈식민주의론은 여러 계통의 연구가 하나로 만난 거잖아요. Subaltern Studies,   마르크시즘, 페미니즘, 인도인에 의한 인도사 서술(Indian Historiography)로부터 영향을 받았잖아요. 이제 연륜도 꽤 되었고 대학교의 교과과정에도 들어갔으니, 아무래도 그 다이내미즘이 많이 떨어졌겠지요. 제도화된 측면이 많으니까요. 그래서 우리한테도 그런 시각을 적용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시각을 개척하는 게 중요한 거죠.

남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위하여 독자에게 권하고 싶은 소설이나 책을 추천하신다면요?
이성형> 번역본을 중심으로 말씀드리지요. 소설로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백년간의 고독>... 사실 이외에도 <사랑과 또 다른 악마>, <에렌디라>, <족장의 가을> 등등도 좋은 작품들인데요...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녹색의 집>,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아르테미오 크루스의 죽음>... 문명비판을 다룬 <태내의 크리스토퍼스 Cristobal nonato>는 좀 어렵지만, 작가의 바로크적 언어감각과 문명사적 비전을 잘 볼 수 있고요. 영어본을 구해볼 수 있을 겁니다. 후안 룰포의 <뻬드로 빠라모>,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 그리고 자서전적 전기로 리고베르타 멘추의 <나, 리고베르타> 등이 있어요. 사실 좋은 작품들이 정말 많이 있지만 번역이 되지 않은 것이 많아서 위의 책들이 대표적인 것이라고 말하긴 좀 힘든다.

첨언해서 영어로 된 훌륭한 르포로는 <뉴요커> 지의 정기기고자인 알마 기예르모쁘리에또(Alma Guillermoprieto), <마이애미 헤럴드> 지의 중견기자 안드레스 오펜하이머(Andres Oppenheimer)의 저작들이 있어요. 아마존 같은 데서 쉽게 구할 수 있을 겁니다.

 

글-정리 : heutekom@personwe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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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리브적 지식을 위하여 -

 

애초에 우리가 만나려 한 사람은 '아르헨티나 전문가'가 아니라, 지난 가을에 발간된 한 책의 저자였다. 표지 장정이 아주 매력적인 이 책은 "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라는 독특하고도 낭만적인 제목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보기 드물게도 한국인의 손으로 씌어진 라틴 아메리카 여행기였다. 이 책을 두고 우리는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이야기를 좀 편하게 들어볼 작정이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를 빼면 이성형 선생을 만나고 난 뒤에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경계 없고 자유로우며 전방위적(全方位的)인 지식」에 대하여 생각하여야 했다. 화제가 되었던 『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창작과 비평사, 2001, 이하 『아바나』로 줄임)에서 이성형 선생의 해박은 음악·신화·문학 등등을 포함한 라틴아메리카의 문화 전반에 대한 소개에서 이미 드러나 있지만, 직접 만나서 본 그것은 호사나 개론(槪論)의 차원이 아니었다.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에 국한된 것도 아니었다.

그날 나는 전혀 '문외(門外)'인 인류학에서 시작하여, 이성형 선생을 따라 보들레르에서 도정일에 이르는 세계의 문학가들과 살만 루쉬디의 『악마의 시』에서부터 황석영의 근작 『손님』에 이르는 세계 문학 작품을 따라다녀야 했고, 마르크스에서 에드워드 사이드에 이르는 여러 대가들의 책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느라 바빴다. 책 읽는 데 게으르며, 쓸데없이 많은 지식이야말로 때로 생(生)에 진짜 해(害)가 된다고 믿기도 하는 나로서는 이런 대단하고 자유로운 넘나들기와 뛰어다니기가 어디에서 왔는가/올 수 있는가 하는 의아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기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무엇보다도 우선 - 그가 생각하는 자기 전공학문, 즉 지역연구(Area Studies)가 가져야 할 요건이 넘나듦이었다. 제대로 된 "지역(地域)"연구는 국지(局地)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전방위적으로 '글로벌(Global)'스럽게 구성된 지식세계를 필요로 하는 것이라 했다. 그것을 위해서 대상 지역과 나라의 역사, 문화, 정치, 경제에 대한 '기본'적 지식 뿐 아니라, 세계의 리얼리티를 보여주는 문학·음악·영화로 된 자료들을 섭렵하여 그에 대한 형상적 지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그 공부를 위한 요건을 어떤 사람이든 다 가질 수도 없고, 다 가진 것도 아니다. 모든 지역 연구자나 인류학 전공자가 그처럼 넘나들고 섭렵하지는 않기는 때문이다. 뭔가 타고난 「끼」와 노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인 것이다. 이성형 선생은 이를 가진 듯했다. 그리고 여기까지라면, 내가 이렇게 많은 지면(화면)을 할애하여 어떤 이의 해박과 유식에 대한 문장을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식세계의 일꾼들 중에는 박식한 사람이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부하는 어떤 사람을 가리켜 '참 해박하다'고 하는 것이 결코 칭찬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성형 선생은 차고 넘치는 그저 박식한 사람의 하나가 아니었다는 것인데, 다시 이는 그가 지역연구가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지역연구는 다른 「공부」처럼 방구석에 틀어 박혀 수만 권의 책과 씨름한다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발로 뛰며 사람들 속에 자주 부지런히 섞임으로써 가능한 공부이기 때문이다. 그 지식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과 말과 그들이 호흡하는 살아 있는 공기와 그 역동을 통해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화 속에서 그러한 지식은 그의 세계관 자체와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성형 선생은 넘나듦을 삶과 앎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로 삼은 그것을 '카리브적 감수성'이라 썼던 것 같다.(이성형, <위기의 지식사회에 묻는다 - 우리만의 지식은 있는가>, 『중앙일보』, 2001년 10월 25일자 참조) 좁고 편협한 국수주의적 태도와 동전의 양면이 되어 있는 편협한 서구-미국 지향성을 넘어서는 것이 한국 지식사회의 중요한 과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아바나에 이르기까지 -

이성형 선생은 1959년생. 부산대 회계학과를 1982년에 졸업했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1987년부터 라틴아메리카의 정치와 문화를 공부하기 시작하여 「라틴아메리카 사회구성체 논쟁 : 1960∼1980년대의 논의를 중심으로」(1990)로 박사 학위를 땄다. 1997-2000년에 서울대 국제지역원 초빙교수를 지내다, 멕시코에 1년 나가 있으면서 그만 두었다고 한다.
이 때의 경험을 중심으로 해서, 지난 해 10월 하순, 『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라는 독특하고 흥미로운 기행기가 책으로 묶였다. 현재 초판 4천부를 다 팔고 2쇄 2천부를 '소화'중이라는 이 책은 "우리 사회에 라틴아메리카를 제대로 소개하고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킬 수 있는 중요한 기념비적 저작"(손호철, 「서평-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 『시민의 신문』)으로 꼽히며 선생을 유명하게(?) 만들기도 했다.
귀국한 이후 이 선생은 서울대 국제지역원과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강의를 맡고 있다. 우리가 만난 날도 서울대 대학원의 2학기 막바지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국내에 라틴아메리카 관련 강의가 얼마나 개설되어 있나요?
이성형> 사실 별로 없지요. 가끔 '중남미 정치론'이 간헐적으로 개설되긴 하는데요. 서문학과에서 중남미 역사나 문화 강의가 한 두 과목 개설되는 편이고요. 전체적으로 보면 거의 없다고 보면 됩니다. 아직 우리한테는 라틴아메리카란 게 굉장히 생소하고 먼 대륙이니까요. 서울대의 경우에도 문학 전공자외에는 관련 전공 교수가 하나도 없지요. 반면에 학생들의 관심은 꽤 큰 것 같아요.

 주로 중남미 정치 관련 강의를 하시는 거죠?
이성형> 예, 그런 편인데 국제지역원에서는 중남미 역사도 강의하고 있지요. 왜냐하면 그 쪽을 전공한 사람이 없어서요. 저도 공부를 해 가면서 강의를 했어요. 저한테는 큰 다행이었고, 도움이 많이 됐지만, 처음에 강의를 들은 학생들한테는 미안한 생각이 들어요. 왜 명의가 되려면 사람을 많이 죽여야 된다는 말이 있지 않아요, 하하하. 아직 저는 명의는 아닙니다만. (웃음)

그래도 늘 "라틴 아메리카 전문가"라 손꼽혀 일컬어지시는데요.
이성형> 하하, 그 말이 웃기는 게. 워낙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저 혼자 노는 거지요.  

<라틴아메리카 학회>가 있는 걸로 아는데요.
이성형> 예-. 거기 문학하는 사람도 많이 있고, 인류학, 정치학 하는 사람들도 좀 있는데요. 그렇지만 관련된 논문을 매년 1-2편씩 쓰는 사람은 희소합니다. 중남미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도 한국정치를 주 전공으로 하면서 곁가지로 그걸 다루는 경우가 많지요.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이나 공부를 하는 이들은 평범하지 않은 길을 걸어온 경우가 많다. 국내에서 드문 "라틴아메리카 전문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캐물었다.
이 선생은 부산상고와 부산대 회계학과를 졸업했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은 우등생들이 빨리 자립하기 위해 가는 학교 중에 하나가 이전의 부산상고였는데, 처음부터 관심은 딴 데 있었다고 한다.

이성형> 대학 다니기 시작한 79년이나, 80년때는 학교 문이 닫혀 있었어요. 거의 수업을 안 했어요. 81년도에도 그랬던 것 같고. 매일 레포트나 내 주고 그랬죠. 전공 과목에 관심이 없어서 그 쪽 과목은 다 C, D만 받았는데, 다행히 수업을 거의 안 하니까 그냥 혼자서 읽고 싶은 책만 읽는 거예요. 전두환의 은덕을 받은 셈이죠. (웃음)

 그래서, 어떤 책을 주로 읽었나요?
이성형> 문학 책을 많이 읽었어요. 소설책, 시집 등 이것저것. 보들레르나 랭보에서 프랑스 실존주의 작가들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어학 공부겸 원어로 읽었지요. 역사 책 읽는 것도 참 좋아했어요. (선생은 지금도 '애들 기죽일 때' 보들레르나 랭보의 시를 불어로 왼다고 한다.)   

그런데, 정치학 공부를 하려고 대학원에 간 것은요?
이성형> 그 때는 또 정치의 시대였잖아죠. 정치학과 과목을 청강했는데 그걸 공부해 봐야겠더라고요. (보충이 필요한 대목이 아닌가 합니다.) 대학원을 가지말라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갔고요.
생각해보니까 '전공'을 제대로 한 게 없는 거 같네요. 대학원 가서도 정치학이 아니라 주로 맑시즘 공부했지 뭐, 정치학과 전공 공부를 팠던 건 아니거든요
.

그 때는 대학원생들도 모여서 세미나 많이 했죠? 어떤 걸 주로 읽었어요?
이성형> 예. 주로 복사본으로 된 원전을 많이 읽었죠. 하하하. 마르크스부터 시작해서요. 레닌, 알튀세르까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런 공부가 어쩌면 학문을 황폐화시킨 면도 있는 듯한 것 같고 그래요. 시대가 그래서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남이 하면 다 같이 하나만 하잖아요.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사실 알튀세르 『자본을 읽자』가 사실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잖아요? 그 서문이야 재미있지만 본론 부분은 지금 하나도 기억이 안 나거든요. 『마르크스를 위하여』 는 비교적 흥미롭게 읽었지만요. 당시는 레닌주의의 정통이니 해서 모두 알튀세르를 읽었지요. 도그마티즘이 강했던 시대였지요. 세미나가 가지고 있는 단점이기도 하죠. 오소독스(정통)를 따지는 것도 우습고요.

"정통"을 따지던 시대였죠, 정말.
이성형>  정통에 대해서 한마디 할께요. 제가 학부 졸업할 때에는 종속이론이 유행했고, 좀 지나니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이, 프랑스의 조절 이론 책들이 소개되더라고요. 또 동시에 유럽의 현존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유로코뮤니즘 계열의 저작들도요. 제가 대학원 석사과정 공부를 할 때에는 지적인 분위기가 비교적 개방적이었고, 토론도 자유로왔지요. 그렇지만 198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갑자기 언로가 경색되면서 소위 '정통' 시비가 벌어지더라고요. 세계체제론도 가짜고, 조절이론은 변절한 사민주의자들의 푸념이라는 둥, 사이비 시비가 점차 확산되더라고요.
그 다음 유행한 것이 레닌의 저작물들, 나아가 맑스의 원전 읽기로 확장되었지요. 20세기 말의 정보화 사회에서  레닌의 저작으로 호흡을 하려했으니, 얼마나 우스꽝스런 일이에요. 물론 경색된 정국이나, 차갑게 얼어붙은 학원가의 분위기가 이런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일조했겠지요. 그러나 주변에는 그런 획일성에서 과감히 벗어나서 "이게 아니다"라고 외친 사람은 참 드물었어요.    
요즘 생각하니, 학부 때 공부했던 것 - 소설책이나 역사책이나, 평전들이 머리에 많이 남고, 지금도 많이 써 먹는 것 같아요. (웃음)

처음부터 라틴아메리카 정치를 전공하고자 서울대 대학원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석사논문(「국가개입에 관한 한 연구 : 8·3조치(1972년)를 중심으로」)도 전혀 다른 영역의 것이었다. 논문은 제3공화국 말기의 사채 동결령을 정치경제학적으로 분석한 것이라 한다. 그런데 중요하고 결정적인 삶의 많은 순간이 그러하듯, 라틴아메리카를 전공하게 된 데에도 우연의 옷을 입은 '운명'과 계기가 찾아왔다.

이성형> 제가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소 조교를 했는데, 그 때 소장님이 김세원 선생님이었어요. 조교를 마칠 때쯤 그동안 수고했다고 외국여행을 보내주신데요. 유럽에 갈 수도 있었는데... 미국과 남미로 가볼 기회가 생겼어요. 우연한 선택이었어요. 남미를 한 번 그냥 가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브라질까지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너무 멀고 그래서 브라질까지 가는 여비는 반납하고 멕시코까지만 가서 한 3주정도 있었어요. 그게 제가 한 첫 번째 외국여행이었어요. 그게 멕시코였다는 게 박사논문을 그 쪽으로 쓰게 된 계기죠.

첫 남미(멕시코)여행에서 본 것이 무엇이었길래 그랬습니까? 무엇이 운명적인 힘으로 작용했나요?
이성형> 아무래도 서점에서 만난 책들이었던 것 같아요. 스페인어 책을 읽을 수는 있어서 거의 매일 서점가를 돌았는데, 제가 처음 접한 지식 세계여서 거의 황홀한 기분이었어요. 참고로 스페인어권은 4억이 넘습니다. 그래서 영어, 불어, 독어, 이탈리아에서 나온 주요 서적들이 금방 번역되어 나오고, 또 자체의 언어권에서 쏟아져 나오는 지적 성과도 대단합니다. 그 다음 반한 것이 라틴 음악이었어요. 당시 멕시코에는 중남미에서 망명온 수준높은 음악인들이 다수 있었고, 이들이 연주하고 노래부르는 <알 라 뻬냐> 라는 술집이 있었어요. 그곳에 두어 번 갔었는데, 저녁 8시에 가면 꼭 연주가 끝날 새벽 1-2 시쯤에 돌아왔지요. 물론 구할 수 있는 테이프와 음반도 꽤 샀지요.
아마도 여비로 받은 대부분의 돈으로 책만 샀지요. 당시 소개받았던 선배집에서 숙식을 해결했기에, 꽤 많이 샀지요. 책 짐이 약 100kg 정도 되었지요. 짐 끌고 다니느라 캘리포니아를 여행하려니 고생 많이 했죠. 국내선 탈 때는 오버차지 40 달러 정도를 내기도 했고요. 돌아와서  그 책들을 정리하고 읽으면서 새로운 세계에 빠져들게 되었지요.
그러다 박사 학위 논문 준비를 하게 됐는데, 사회과학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중남미를 전공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으로 이런 공부를 시작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88년에도 다시 멕시코로 가셨다면서요.
이성형> 예, 그 다음에는 88년인데, 논문을 쓴다는 목적의식을 좀더 분명히 하고 주제를 정하고요, 조교하면서 모아뒀던 돈을 다 털어서 갔다왔죠.

제가 '이성형'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고 지금껏 기억하는 게 선생님이 『현실과 과학』 같은 잡지에 쓰신 글 때문인데요. 그 때 이야기를 해 주세요.

호랑이 담배 피던, 1988년에 창간된 『현실과 과학』이라는 무크(아마 1500원쯤 했을 거다)를 알면 당신은 구세대다. 이 잡지는 1991년까지 발간되며 당시 PD 그룹의 가장 강력한 이론적 지렛대 구실을 했다. 윤소영, 이진경, 서관모 등의 이론가가 편집을 맡았던 발간 초기에 이 잡지의 반향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른바 반제반독점민중민주주의혁명, 즉 AIAMC_R을 알기 위해 대학생들은 이 책을 들고 '공부'를 하곤 했다. 1988년 겨울에 나온 『현실과 과학』의 제2호는 "사회구성체의 이론적 규명"을 특집으로 했고, 이진경·서관모·윤소영·이성형의 글을 차례로 게재했다.

 이성형> 제가 『현실과 과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것은 아니고요ㅡ 라틴아메리카 사회구성체 논쟁에 대해 기고해달라고 부탁이 왔어요. 알다시피 윤소영, 서관모 같은 분들이 편집을 했잖아요, 참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죠. 근데 저는 그때 생각하면 약간 쓰라린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요?
이성형> 부끄러웠어요. 제가 살아온 연륜, 무게에 맞지 않는 글들을 썼다는 약간의 자괴감이 있기 때문이지요. 직접 운동권에 속해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마치 운동에 자그만한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착각도 있었던 것 같았고요. 여하튼 글과 삶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은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아요.

임영일 선생하고 같이 낸 『국가란 무엇인가』(한울, 1985)가 알려져 있던데요. 어떤 책입니까?
이성형> 예... 편역인데 풀란차스 논쟁 같은 거 다룬 거거든요. 그 책은 최근까지도 조금씩 나간다고 합디다.  

그럼 인세를 받으셨겠네요?
이성형> 아뇨, 석사과정 당시 그 때는 거의 매절이었어요. 1984년도에 2,500원씩 받은 거니까 잘 받았죠, 그걸로 아마 한 학기 등록금도 내고 술값으로도 좀 쓴 것 같아요.

박사논문 쓴 과정을 돌아 보시면요...?
이성형> 중남미에 대해서 누군가로부터 배우면서 공부한 게 아니기 때문에, 굉장히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처음 어떤 주제를 잡아야 할지부터 힘들더라고요. 그러다가 그 쪽 지성사의 흐름을 정리할 수 있는 주제를 정해보자고 생각했어요. 대단한 업적을 내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쿠바혁명 이후 2-30년간의 지성사의 흐름을, 특히 라틴아메리카의 지식인 세계를 지배하는 좌파 지식인의 사상을 정리해보고 싶었어요, 그게 제 박사논문이고요.

아무도 공부하지 않은 분야에 뛰어들 수 있었던 데는 그전부터 그가 기본적으로 스페인어를 읽고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성형 선생은 영어와 스페인어 외에도 불어, 포르투갈어, 등을 읽고 쓴다.

 공부라는 게 원래 '혼자'하는 거긴 하지만, 선생님처럼 특히 거의 동학이나 선배가 없는 그런 상황에서 공부한다는 게 뭘까 궁금해집니다. 책을 읽다 모르는 게 있으면 누구한테 물어보고, 뭘 쓰면 누구한테 검토를 받아보고 하는 일이 일종의 공부하는 방법 자체이기도 한데 말이죠.
이성형> 전혀 없었는 건 아니죠. 문학이나 인류학 쪽에도 한두 명씩은 있고. 자그마한 커뮤니티도 있다고 볼 수 있죠. 그런데 사회과학 쪽 특히 정치학 쪽에서는 스페인어나 포르투갈어를 잘 하면서 하시는 분들이 거의 없어요. 혼자 하는 거니까 책 구하고, 읽어 내는 일도 벅찼지요. 1997년부터 대학원에서 라틴아메리카 근현대사 수업을 했는데, 닥치는 대로 읽었지요. 혼자 하는 거니까 그런 어려움도 있지만 장애물이 없어서 좋은 점도 있고요, 심심하기는 하지만 걸리는 건 없고, 넓은 바다에 혼자 헤엄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오히려 노는 물이 괜찮은 거라 할 수 있는 거죠.

일본 같은 경우엔 전통적으로 남미와 관계가 많은데, 공부하시면서 일본 책을 많이 참고하셨는지?
이성형> 일본 같은 경우에는 남미 연구 전통이 상당히 오래되었죠. 그 역사나 연구자들 숫자도 대단하고요. 뭐 비교할 수 없는 정도죠. 이런 예를 들면 될 것 같은데, 일제시대 때 경성제국대학에도 남미연구자가 있었어요. 서울대 도서관 구장서관에 가면 1930년대 아르헨티나 일간지가 보관되어 있는 정도니까요.  

아 그래요?
이성형> 저도 깜짝 놀랬는데, 일간지를 받아볼 정도였으니까 그 시스템이나 연구자들의 수준이 대단한 거죠.

 여기서는 어떤 학생들이 남미 관계 수업을 듣는지요?
이성형> 어문학 전공하는 학생들이 국제지역원에 많이 오지요. 어학능력이 있으니 사회과학 쪽 공부를 대학원에서 하고 관련 분야에 취직을 하려는 학생들이죠. 취직은 잘 되는 것 같아요. 라틴아메리카 쪽은 사실 직업과 관련해서는 기회가 많이 있어요. 재벌기업들도 많이 뽑고요. 삼성, SK부터 은행에 이르기까지. 자동차나 가전제품을 남미에 많이 팔고 있거든요. 최근 통계는 못 봤지만 멕시코만 해도 20억 달라정도 흑자를 남길 걸요.

박사학위를 쓰고 난 뒤에, 멕시코에는 몇 번 더 다녀오셨나요?
이성형> 멕시코는 학위 논문을 끝난 뒤 평균 2년에 한번 꼴로 다녀왔어요. 1990년대에 들어와서 교육부의 해외지역연구비가 대폭 늘어서 현지연구 기회가 많았거든요. 1993년부터 4번의 현지조사를 거쳐 낸 것이 1998년도에 서울대 출판부에서 낸 <<IMF 시대의 멕시코: 신자유주의 개혁의 명암, 1982-1997>> 이었어요.

멕시코 초빙연구원 시절(2000. 3.-2001. 2)에 관한 이야기 좀 해주세요...
이성형> 멕시코 방문은 멕시코 외무부에서 주는 연구비로 다녀왔지요. 원래 6개월을 예정하고 연구비를 신청했는데, 예정된 3월에 나가려는 2월 20일이 되었는데도 연락이 오지 않아요. 안된 것도 아니래요. 그러다가 신학기 전에 보길도에 놀러 간 적이 있었어요. 멕시코 대사관에서 두 주 후의 비행기표가 도착했으니 받아가라나요. 황당하기도 했지만, 놓칠 수도 없는 기회라서 무리를 해서 갔지요. 6개월간은 <멕시코 혁명 벽화에 대한 정치적 독해> 라는 주제로 연구를 했지요. 나중 논문을 외무부에 제출했고요. 이 부분의 연구결과는 멕시코 기행부분에 반영이 되어 있어요. 벽화 운동 세 거장의 차이점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해석이지요. 과달라하라에 있을 때 이 논문을 조그만 학자들 소모임에서 발표한 적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흥미를 표하더군요. 아직 멕시코 잡지의 지면에 발표하지는 못했지만 시간이 허락하면 손질을 해서 보내려고 합니다.  
6개월을 보내고 나니, 좀 아쉽더군요. 뭘 제대로 구경도 못했는데, 떠날려니... 그래서 국제지역원에 폐를 끼치기도 그렇고 해서 사표를 내고 6개월간 더 멕시코 시티에 머물렀지요. 그 이후는 쿠바, 페루, 칠레 등지에 여행을 다녔고, 그 기록이 바로 <<아바나>> 입니다.

2000년에서 2001년까지, 정확히 말하면 9.11 테러 이전까지 표피적인 것에 가까운 것이기는 하지만, 한국에는 "라틴 붐" 비슷한 게 일었다. 라틴 댄스와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을 비롯한 쿠바 음악, 게바라 평전 등을 중심으로.

 『아바나』 자체가 기획된 것도 그런 라틴붐과 무관하지 않은 듯한데요. 그래서 아마 9.11 테러가 없었으면 라틴 붐은 더 확대되었을 수도 있고 『아바나』는 더 많이 팔렸을 것이다, 는 말들을 하기도 하던데요.

이성형> 그런 소식을 듣기는 했는데(작년에 그는 멕시코에 있었다), 저는 국내사정과 관계없이 책을 썼고요. 라틴 음악이나 댄스붐 같은 것은 어쩌면 아주 옛날부터 있었던 거라고 할 수도 있어요. 춤바람은 언제나 라틴댄스 바람이었잖아요. 정비석의 <자유부인> 에 나오는 댄스 열풍도 아마도 그랬을 거예요. 맘보, 차차차, 탱고 같은 거요. 게바라 평전 같은 경우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사실 전 약간의 불만이 있어요. 그 게바라 평전은 그 많은 전기 가운데서도 족보에 쳐주지 않는 것이거든요. 근데 아마 몇 10만부가 팔렸다죠?

 저도 그 게바라 평전(실천문학사에서 발간된 빨간색 표지의 책)읽고서 좀 문제가 많다고 느꼈는데요. 왜 하필 그 책이 번역되었을까요? 게바라 평전 중에 유명한 건 따로 있죠?

 이성형> 게바라 전기를 전부 조사해서 고른 것이 아니라서 그랬겠지요. 여하튼 많이 팔려서 다행입니다. 책도 운명이 있는 모양이지요. 게바라 평전 중에 유명한 거는요, 멕시코 기자인 따이보 2세(Taibo II)가 쓴 것이나, 현재 외무부 장관을 하고 있는 호르헤 가스따녜다(Jorge Castaneda)의 것을 최고로 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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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틴아메리카에 대해 관심 많은 사람들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는 것 같은데요. 일반독자들한테서는 어떤 반응이 왔는지요?
이성형> 예, 반응이 있어요.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는 반응도 많았고요. 약간 어렵다는 반응도 많았어요. 특히 교수들에게서도 어렵다는 반응을 받았을 때 약간 실망스러웠죠. 요즘 지식인이란 게 너무 전문적인 분야에만 매몰되어 그런지... 그렇지만 여성 독자로부터 점수를 많이 받은 거 같아요.(웃음) 특히 교수들한테 책을 주면 자기가 직접 안 읽고 일단 부인한테 먼저 주거든요. 아무래도 학부 학생들이 읽기에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좀 있을 거예요. 학부 수준에서는 좀 접해 보기 힘든 인류학이나 음악 이야기 같은 게 많은 있는 편이니까요.

책 안에서 쿠바여행 가이드북의 '과장'(쿠바에서는 남녀 물문하고 눈을 맞추지 말라)을 지적하셨던데, 어떤 책이었어요? 『Lonely Planet』은 아니고.....?
이성형> 『Lonely Planet』은 아니고 그 비슷하게 많이 팔린 책이 있어요. 『Lonely Planet』이야 아주 좋은 책이죠.

『아바나』는 쿠바, 멕시코까지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그런데 세 번째 부분까지는 보통 설명하고 말하는 투로 되어 있는데, 마지막 부분은 "그러면 당신은 어디로 갈 것이다..."는 식의 2인칭으로 씌어져 있는 걸 보고 뭐가 좀 다르다고 느꼈는데요. 멕시코 부분에서 서술체가 달라진 이유가 있어요?
이성형> 예-. 멕시코는 상대적으로 너무 오래 있었으니까요. 너무 익숙하고 자주 봤고 하니까요, "내가 어느 날 어딜 가서 무엇을 봤고..."하는 식으로 쓰지를 못하는 거예요. 실제로 내가 한국에서 오신 분들을 위해 가이드를 몇 번 하기도 했거든요. 그 분들에게 풀었던 이야기를 써 놓은 거라 보면 돼죠. 아직 멕시코에 못 가보신 분들을 위해 가이드북처럼 쓴 것이기도 하고요. 그 부분은 먹물 좀 먹은 사람들을 위한 가이드라 보셔도 됩니다. 하하하.

책의 멕시코 부분에 보면 토도로프가 한 해석을 뒤집어 설명하는 부분이 나왔는데요, 이런 부분이 저한테는 무척 인상적이었거든요.

 

Tip for You... 구조주의 문예이론가이며 저명한 기호학자인 츠베탕 토도로프는 『아메리카의 정복』이라는 책에서 아즈텍 문명이 유럽인들에게 쉽게 절멸한 이유를 '커뮤니케이션의 실패'에 있다고 설명한 것이다. 글쓰기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고 낮은 단계의 커뮤니케이션 체계만이 있었기에, 타자성이 있는 대인적 커뮤니케이션이 발달한 유럽 정복자들에게 패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명은 「아즈텍인 = 낮은 단계의 문명 / 유럽인 = 높은 단계의 문명」과 같은 이분법을 전제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고야말로 유럽중심적이며 오리엔탈리즘적인 것이라는 것이 비판의 요지이다. (『아바나』, 224-5쪽)

 

이성형> 츠베탕 토도로프 같은 경우는 워낙 유명한 학자이니까요, 그 권위가 대단하죠. 그 사람이 해석한 걸 보고 저도 처음엔 "참 잘 썼다, 기호학으로 정복사를 그렇게 쓸 수 있다니"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러다가 나중엔 그래도 정복은 전쟁이고 힘 문제인데 기호론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의심을 좀 해봤어요. 정복사에 관심을 갖고 이 책, 저 책을 읽어보니까 거짓말 같아요. 처음부터 정복자들이 이긴 전쟁이 아닌 거거든요. 첫 번째는 실패했지요. 두 번째에 와서 주변의 동맹을 잘 활용하고, 또 무엇보다 무기의 압도적인 우세를 앞세워 쓰러뜨린 것이지요. 전쟁하는 방식도 다른 것도 중요했지요. 아스텍 사람들은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 상대방을 생포하려 했지, 칼로 사람들을 한 방에 죽이는 그런 개념의 전쟁에 익숙하지 않았지요. 전쟁사를 조금만 읽어보면 토도로프 논리는 상당한 과장이라는 걸 알게 되죠. 그래서 구체적인 역사 분석이 중요하지요.  

 그리고 저는 칠레에 대한 서술에서, 다른 라틴아메리카인들과 구별되는 칠레인들의 국민성이랄까요, 그것이 기실 정치적 무의식의 발로이며 역사적 연원을 갖고 있는 것이라는 서술이 인상적이고도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혹시 이 부분과 관련하여 하고 싶은 말씀이 있는지요?  
이성형>  칠레의 근현대사는 광업의 역사입니다. 초석 광산과 구리 광산이 이 나라 국민들의 밥줄이었던 셈이지요. 최근에는 과일과 포도주 산업이 부가되었습니다만. 광산 경기란 것은 세계자본주의에 그만큼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흥청망청하다가도 금방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것이지요. 어쩌면 칠레 노동자들은 맑스주의 세계관을 받아들이기에 가장 적합한 환경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예요. 게다가 광산주는 대부분 외국인들이었으니. 개인의 삶은 항상 경기부침에 따라 격변하니, 자연히 계급주의적인 사고가 노동자들에게 깊숙이 파고듭니다. 반면 광산주들이나 지주들 역시 이런 거친 민중세력을 통해 이윤을 극대화하려니, 자연히 억압과 폭력에 의존할 수 밖에 없지요.
그래서 칠레 정치는 19세기부터 날카로운 대립의 계급정치를 학습했고, 또 오랜 시행착오를 거쳐 이를 제도화하려고 노력을 해왔다고 할 수 있지요. 아옌데의 인민연합, 그리고 그를 뒤이은 피노체트의 쿠데타는 20세기 후반에서 그런 학습이 끝나지 않았음을 증명해 준것이지요. 민주화가 되어 많이 순화되긴 했지만, 지배층의 권위주의적인 정치문화랑, 민중의 투쟁적인 전통이 묘하게 어우러져 있는 나라라고 평가할 수 있어요.

 멕시코 외에 다른 나라들 관련해서 어떻게 준비를 하셨는지?
이성형> 그동안 이 책 저책 가리지 않고 읽었지만, 여행을 가기 직전에 다시 한번 정리를 하기도 했지요. 쿠바의 경우에는 가장 최근의 정치 상황에 대해 미국 학자가 쓴 책을 한권 읽었고요. 제가 있던 콜레히오 데 메히코의 쿠바 관련 장서들도 많이 참고했어요. 쿠바 음악이나 문화에 대해서는 평소에 관심 갖던 것이어서 새로울 게 없었지요. 페루의 경우는 잉카 제국의 역사 책 몇 권을 뒤졌어요. 칠레는 대학원 수업에서 가끔 다루었기에 별 어려움이 없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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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슨웹에서 퍼왔습니다. (www.personweb.com)

 

 


 

< 1 > < 2 > < 3 >
 

인터뷰를 하고 글을 정리하는 동안, 나는 쓰고 있던 글의 1절과 3절의 순서를 바꾸기로 했다. 그리고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글을 시작하게 되었다.

순전히 아르헨티나 때문이다. 아르헨티나는 불과 2주 사이에 대통령을 5번 갈아치우며 세계기록을 수립하고, 세계를 상대로 「채무불이행」을 선언했다. 보르헤스와 게바라, 마라도나의 고국은 그렇게 '망'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태」가 도무지 「남의 일」 같지 않은지, 한국의 모든 매체가 아르헨티나 사태를 다루고 있다. 다루되  그냥 「팩트 fact」만이 아니라, 뭔가 저마다 해석을 곁들이고 태도를 갖추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실 글을 처음과 전혀 다르게 쓰게 만든 건 아르헨티나 때문이라기보다 아르헨티나 사태를 다루는 한국 언론의 태도와 관련된다. 이 해석적 태도는 비단 아르헨티나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머리 속에서 막연히 뭉뚱그려보는 남미 라틴아메리카 전반에도 걸쳐 있다. 일단 이를 편하게 「남미 담론」이라 불러보는데, 「담론」이 된 남미에는 결코 편하지 않은 「한국의 상황」이 「낑겨」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담론을 둘러싼 조용하지만 결코 간단치 않은 싸움을 이성형 선생과의 인터뷰를 기록하는 일의 중심으로 바꾸기로 한 것이다.  
 이성형 선생과의 첫 번째 만남에서도 한국에서의 「남미 담론」이 갖는 양상이 중요한 화제이기는 했다. 그러나 처음 인터뷰하기로 했을 때나, 두 번째 만날 약속을 잡았을 때나 특히 아르헨티나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일이 긴박하게 돌아가게 될 줄을 전혀 몰랐다. 두 번째 만남을 약속했을 때도 처음 만남이 「차(車)」 때문에 건조하게 끝난 것에 대한 미련 때문에, 「술 한 잔」을 약속한 것이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한국에서 몇 안 되는 남미 전문가의 한 사람인 이성형 선생은 아르헨티나 사태 때문에 아주 바쁜 연초를 보내고 있다고 한다. 이 선생은 약속한 토요일 저녁에도 「CBS 시사쟈키」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왔으며, 우리에게 와서도 신문 기고문 하나를 다듬어 전송하고 나서야 술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다 아르헨티나 사태 「덕분」이었는데, 그 자리들에서 『조선일보』를 위시한 한국 신문의 사태 「왜곡과 무지」를 「씹어주고」 왔다고 했다.

한국의 언론은 입맛대로 저 먼 나라에 대해 「팩트」 자체를 왜곡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한다. 이러한 왜곡이나 의도된 무지에 대해 싸우는 것이 이성형 선생 자신의 중요한 과제이며 임무라 생각한다고 지난 번 만남에서도 밝혔다.

 한국에서는 <남미>라는 코드를 둘러싼 좌우파의 담론이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우파 담론은 한 마디로 "남미처럼 되지 말자!"는 말로 집약되는데 (특히 경제 문제에 있어) 남미를 피하거나 닮지 말아야 할 어떤 것으로 상정하고요, 반대로 좌파의 경우에는... 사실 남미에 대해서 말하는 것 자체가 우리 스스로를 제3세계적인 정체성으로 바라보고, 종속이나 파시즘의 문제를 비판적인 시각에서 제기하는 것과 관계 깊었거든요. 70년대나 80년대에 특히 그랬었죠. 우리를 제3세계라고 규정하는 것이 허구적인 제1세계인의 의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대항적인 정체성을 갖는 것이라 생각한 적도 있었고요.
그러니까 이전에는 남미에 대해서 실제로 아는 것이 거의 없으면서도 좌우가 다 그것을 굉장히 정치적인 담론으로 사용해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지금은 남미라는 <코드>에서 정치적인 색깔이 많이 탈색되고, 문화적인 착색이 많이 됐거든요. 북한의 몇 안 되는 맹방이라는 "쿠바"음악을 들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거든요. 물론 포퓰리즘 문제는 또 좀 다르지만요.

 이성형> 남미라는 하는 땅이 "정체와 종속"이라는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고,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는 것도 맞지요. 실제로 남미의 정치경제적인 모델은 대부분 실패, 파산해왔고요. 그래서 "남미병"이 객관적인 실재로 인정이 되죠. 또 그 안에서도 "아르헨티나 병"도 있고 "베네수엘라 병"도 있어요. 이런 말들은 학술적으로 정립이 되기까지 했어요.
그런데 과연 「그 병의 기원이 뭐냐?」 하는 문제가 있어요. 그 문제에 있어 신비화가 시작되는 거죠. 그래서 아주 통속적인 답으로는 아르헨티나 같은 경우, 병의 원인이 포퓰리즘(populism)이나 노동조합이다... 그러죠. 사실 굉장히 익숙한 담론이죠.

 아래 두 글을 보면 한국의 보수언론이 아르헨티나 사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2002년 경제 위기의 원죄가 1940년대의 정권과 그에 의하여 시행된 정책에 있다는 기괴한 논법이다. 사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건 그 논법보다도 「동아일보」와 「한국경제신문」의 사설 담당자가 얼마나 서로 입이 잘 맞는가 하는 점이다. 발상법과 표현이 너무 유사하여 한쪽이 표절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1930년대까지 세계 7위의 경제력을 자랑하던 나라가 오늘날 이 지경이 된 데는 한 두 정권의 정책실패로는 설명할 수 없는 '원죄(原罪)'같은 이유가 있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1940년대에 노조세력을 바탕으로 집권한 후안 페론의 포퓰리즘 정책이 두고두고 후대에 고통을 물려주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페론은 집권내내 노조의 무리한 임금인상과 연금확대 등의 요구를 수용하는 등 노동계층에 편중된 각종 사회·경제정책을 시행함으로써 국력을 탕진했다. 생산력은 도외시한채 분배에만 관심을 두는 정책은 결과적으로 사회에 무절제한 욕구와 이기주의를 증폭시키게 됨을 페론주의는 확인시켜 주었다. 연이은 쿠데타와 집권세력들의 부정부패가 국가기강을 무너뜨리게 되었던 것도 페로니즘의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 [한국경제신문 사설] (1월 4일자) "아르헨사태 病根은 무엇일까"

 20세기 중반까지 손꼽히던 경제대국이던 아르헨티나가 오늘날 왜 이 지경이 되었는가. 한 정권의 경제정책 실패로는 설명할 수 없는 ‘원죄(原罪)’ 같은 이유가 있어 아르헨티나가 경제난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누적된 과거 정부의 잘못과 이로 인해 아르헨티나 사회에 가득 찬 불신, 이기주의가 바로 그것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노조세력의 지지를 바탕 삼아 집권한 후안 페론은 집권 내내 노조의 무리한 임금인상 요구를 수용하는 등 인기영합주의(포퓰리즘) 정책으로 일관해 후대에 고통을 물려준 대표적 지도자로 꼽힌다
- 동아일보 「사설」(12월 21일자) "아르헨 사태 강 건너 불 아니다"

 

이성형> 그런데 실제로 제가 싸우고 싶은 게 바로 그런 겁니다. 과연 남미병이란 게 그래서 만들어진 거냐? 아르헨티나 페론 대통령의 포퓰리즘도 그렇게 역사적으로 간단한 게 아니거든요.
오히려 페론 대통령은 아르헨티나에 뿌리깊은 왜곡된 토지소유구조 - 극소수가 대규모 토지와 부를 편중되게 갖고 있는 - 가 온존할 때 대통령이 되었는데, 대중의 열망을 실제로 등에 업고 있었어요. 물론 그 사람이 실수를 많이 했고 그 실수가 경제 실패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런 실수는 부차적인 거고, 본질적으로는 지주과두제의 시스템을 고치고 깨기 위해서 나온 것이 포퓰리즘이예요. 또 본질적으로는 대중의 사회경제적 욕구를 표출한 것이고요. 이런 맥락을 다 빼버리고 이야기하면 안 돼죠. 그건 주객을 전도시키는 거잖아요. 그렇게 단순화될 수 있는 게 아닌데 말이죠. 물론 포퓰리즘도 예산 낭비라든가, 잘못된 사회 행태를 만들어낸 문제아라는 점도 인정하지만요.

아르헨티나가 월드컵 우승후보라는데, 저러다가 출전 못하는 거 아녜요? 어떻게 전망하세요?
이성형> 아르헨티나는 사실 미래가 없는 나랍니다. 정말 크게 망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중산층이 거의 몰락해가고 있거든요. 아르헨티나를 규정하는 단어가 '르쌍티망(resentment)'일 겁니다. 계급 계층간에, 또 정치적 파벌간에 원한 감정이 있는 거죠. 예컨대 페론주의자와 반페론주의자 같은 대립 세력들 사이에 절벽 같은 게 놓여져 있어요. 서로 대 놓고 이야기는 안 하지만, 뒤에서는 서로 죽이려 그러죠. 에비타만 해도 그렇거든요. 한쪽은 에비타를 성녀라고 하고, 다른 쪽은 창녀라 부릅니다.

이성형> 참으로 놀라운 일인데 아르헨티나는 한 번도 State Building(국민국가 형성)을 이뤄보지 못한 나랍니다. 헤게모니를 가진 계층은 자기네들을 무슨 유럽인인양 착각하고요, 최상층 지배계층이나 최고위직 관료들이 유럽 나라(이탈리아, 독일 등)의 국적을 갖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 이런 사실을 숨기거나 부끄러워하지도 않고요.

대부분의 매체가 아르헨티나 사태의 '원인(原因? 遠因?)'으로 페로니즘을 드는데요. 선생님이 보시기에 원인이 뭔가요?
이성형> 한마디로 「잘못된 개방 정책」 때문입니다. 신자유주의가 오늘 사태의 원인이지요. 개방 정책이 잘못되면서 국제 투기자본이 어떤 규제나 룰없이 단물만 쏙 빼먹고 토껴도 되는 데가 된 거죠. 그게 가장 직접적인 원인입니다.  

포퓰리즘에 대해 의도된 「단순화, 무지한 척」이 많은데요. 원론적으론 문제에 대한 그러한 단순화가 한국 사회의 기득권층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사용하는 한 방법이겠죠.
이성형> 예. 실제로 남미병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병의 원인에 대해서 왜곡하지 말라는 겁니다. 칠레의 기적에 대해서도 왜곡이 많아요. 그런 걸 제대로 정리하고 싶습니다.

 오늘, 「남미 담론」에 「낑겨 있는」 한국의 상황이란 무엇일까? 지구 정반대편에 있는, 평생 한 번 가볼 수 있을까 말까한 나라의 사태가 신자유주의 개방·개혁 정책의 공과, 인민주의(포퓰리즘 populism)와 페론주의(peronism)에 대한 역사 해석, 김대중 정권의 성격과 그 정책에 대한 평가에 대한 담론 투쟁과 결부되어 있다.

지난 여름 이후 우리는 「남미 담론」이 한국의 좌/우 대결(?)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대한 생생한 실례를 볼 수 있었다. 정치인과 한국의 언론인들이 라틴아메리카산(産) 포퓰리즘을 놓고 논란을 벌인 것이다. 논란은 김만제라는 기업 회장 출신 한나라당 정책위 의장이 김대중 정권의 언론개혁과 세무정책을 "남미식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했던 것에서 시작되었다.
매우 상투적이고 악의적인 용어사용과 역사 해석에 기반한 이런 선동은 정부와 전쟁을 벌이던 조중동에 의해 매우 크게 다루어졌다. 당시 보도는 "김만제정책위의장, 언론탄압, 남미식 선동정치 정점"이라는 식으로 「미다시」를 뽑았고, "김 의장은 포퓰리즘은 서민 노동자 시민단체를 선동적으로 동원해 재정을 마구잡이로 퍼 쓰는 것이라 규정하고 현 정권은 국론을 개혁과 반개혁으로 분열시키면서 세몰이를 하고 있다"(2001년 7월 4일 한국경제신문)는 주장까지 여과 없이 실었다. 이런 주장은 곧 정권의 정책에 대한 색깔론으로 이어져나갔다. 포퓰리즘은 곧 사회주의적인 정책이라는 것이다.

정권측도 이에 맞서서 포퓰리즘에 대한 다른 해석을 내놓았는데, 제일 들을만했던 것은 노동부장관의 설명이었다. 김호진 장관은 "노동정책 포퓰리즘 아니다"는 제목이 달린 통신문을 보내 "정치권 일부에서 노동정책을 포퓰리즘이나 심지어 사회주의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 타당성과 실증성이 없는 소모적 정치논란"이라고 반박하고 "그는 노동관련 대학교수를 지낸 장관답게 포퓰리즘의 의미와 사례 등을 들며 아르헨티나 페론정권이 군사쿠데타의 위협 앞에 전전긍긍하고 배우 출신의 영부인이 대중의 열광과 환호를 즐기는 가운데 그 나라는 고통과 희생이 따르는 경제살리기보다는 박수갈채가 쏟아지는 포퓰리즘의 길을 택했다"(8월 6일 연합뉴스)고 설명했다는 것이다. 

'포퓰리즘'이란 용어가 동원된 참으로 쓸 데 없는 말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중에서 우리를 가장 「즐겁게」 하는 용례는 한나라당과 관계가 틀어진 자민련이 쓴 방법이다. 좌-우가 아니라 「보수 반동」 「저거끼리」 벌어진 정쟁에서도 「포퓰리즘」이 동원된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는 함부로 만들어진 '남미'의 부정적 이미지가 얼마나 무책임한 '말'로 사용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자민련 대변인 정진석이라는 사람이 성명을 통해 "한나라당은 한때 김대중 대통령을 향해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했는데, 표피적인 여론에 이끌려 교육정책(교원 정년 연장 문제)을 대권 전략화하는 이회창 총재의 자세야말로 신포퓰리즘의 전형"(12월 4일 인터넷 중앙일보) 이라고 비난한 것이다. 정말 지하의 페론을 모독하는 언사가 아닐 수 없다.


    - 미래를 향한 남미라는 상상력 -

 왼쪽과 관련해서 이야기를 좀 해보면요... 80년대에는 식민지자본주의나 사회성격 논쟁에서도 라틴아메리카의 경험이 상당히 중요한 것으로 논의가 되었고, 아옌데 정권이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같은 것이 가진 상징성도 대단히 크게 받아들여졌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좌파들에게 있어서도 남미는 많이 의미가 달라졌죠?
이성형> 그렇죠, 그동안 남미 자체가 신자유주의 개혁 노선과 담론에 따라 죽 왔었고 또 그게 사실상 실패로 귀결되었죠. 오히려 요즈음은 신자유주의 개혁 실패의 반면교사로서 남미가 중요해졌는데요, 근데 그런 것에 대한 분석은 많이 된 것은 아닙니다.

 좌파와 관련해서는 두 가지가 당장 머리에 떠오르는데요. 사파티스타 운동과 쿠바의 미래...
이성형> 사파티스타 운동의 경우, 지금 세기에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둘로 정리되는데요... 하나는 신자유주의 개혁의 극단적인 폐해와 그 효과에 관한 것인데요. 살리나스 정부의 농지개혁이란 게 기존에 공유지였던 것을 다 민영화하고 야만적인 시장의 논리에다 맡긴 거잖아요. 살 사람은 살고, 죽을 사람은 죽으라는 식으로. 거기에 적응할 수 없었던 농민들이 그런 식으로 반발을 하고 나온 것이고요.

두 번째로는 망각되었던 인디언들의 세계의 복원에 관한 것이었거든요. 인디언들은 끊임없이 수탈당하고 자기들의 정체성을 해체할 것을 강요당하면서 살아왔는데요. 5백년간의 저항과 수탈의 역사가 있었던 거죠. 이 사람들이 일어나면서 내건 중요한 단어가 "존엄성'입니다. 자기들이 이어온 언어, 생활방식, 문화의 존엄성을 위해 투쟁한다는 거거든요. 이거는 멕시코에서 그동안 수없이 시도되었던 진행되어온 서구적 근대화 논리에 저항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근대화라는 게 당신들만의 논리가 모두가 아니다, 우리에게도 우리만의 습속이 있고, 합리성이 있고 우리가 추구하는 유토피아 프로젝트도 있다 - 이거를 내세운 거죠. 일종의 공동체주의이기도 한데요. 그런 것들을 한쪽에 강하게 내세운 거죠. 그걸 대변하는 이데올로그로 마르코스가 나온 거고요.

기존의 근대화논리에 대항하는 굉장히 강력한 새로운 유토피아 담론이라 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그것이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논리는 아니고 그 사람들의 지역적인·국지적인 논리이기에 어디에서나 적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요구하는 건 다원주의 질서 안에서 우리 목소리를 인정해달라, 한편으로는 문화적 권리선언이기도 한 거고요. 자기들 아이덴티디가 새롭게 정립하고자 하는 기획이기도 하죠.   

 마르코스의 말에서 사회학적 해방적 상상력이 대단하다고 느꼈는데요, 말씀처럼 마르코스가 말하는 것이 분명히 그 민족과 지역적 정체성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기는 한데, 분명 기존의 서구의 진보 운동 - 서구의 68이나 신사회운동, 또 남미의 좌파 운동 등의 논리와 전통을 종합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거든요. 마르코스가 인텔리 출신이라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우리나라에서도 마르코스의 책이 많이 팔리고 대학생들이 좋아한 이유가 그의 논리가 보편성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이성형> 서양 지식인들이 마르코스에게서 다시 보는 것은 잃어버린 68세대의 새로운 얼굴이 아닐까요? 68세대가 추구했던 유토피아 프로젝트 같은 거는 지금은 다 파산했고 지금은 생동감 있게 그걸 추구하는 게 불가능하니까요. 그래서 그런 걸 보면서 대리충족을 하는 게 아닐까요. 사실 그런 서구 지식인의 시각에 대해서 멕시코 지식인들은 정작 비판적인 게 많죠, "너희는 우리에게서 고귀한 야만(bon sauvage)를 보고 싶어하는 것일 뿐이다"는 비판이죠.

어쩌면 왼쪽에서 만들어진 오리엔탈리즘 같은 거네요?
이성형> 그렇죠. 실제로 그렇게 비판을 하죠. 로헤르 바르트라(Roger Bartra)라는 유명한 인류학자가 그런 비판을 했어요.

쿠바의 미래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요?
이성형> 『아바나』에서도 그런 이야길 썼지만 사실 쿠바란 나라가 가진 조건이 열악하지요. 인구도 1100만밖에 안되고, 생산하는 자원도 아주 제한되어 있고, 그래서 수입에 많이 의존해야돼요. 대단한 산업국가가 되리라고 생각이 되지도 않고, 탄탄한 경제구조를 가진 것도 아니거든요. 그런데 미국이 규제만 풀면 충분히 먹고 살고 잘 살 수 있어요. 원래 그 나라는 사탕수수나 담배, 그리고 음악 - 이런 거 해서 먹고 살 수 있거든요. 관광이나 야구선수도 그렇고...  

이전 시스템으로 돌아가야 할 부분이 생길 텐데, 그래도 쿠바 혁명 이전의 나라로 돌아가진 않을 거예요. 혁명 이전에는 사실 나라가 미국의 창녀촌 비슷하게 굴러 갔거든요. 그런 데로 다시 돌아가진 않을 거고요. 사회복지, 의료, 교육 같은 것이 잘 갖춰져 있어요. 그래서 심지어 카스트로가 없어진다 해도 쿠바는 사회민주주의적인 가치 같은 것이 잘 보존된 사회로 남을 가능성이 큽니다. 개방이 되더라도. 최소한 사회복지정책은 유지되면서 민주화되는 사회로 이행할 가능성이 크죠. 그건 무엇보다 쿠바 국민들이 그동안 40년동안 하나의 '국민됨'을 경험했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특히 최근에는 쿠바의 경제 사정 자체가 좋아졌고요.

 남미가 가진 문제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종속, 특히 대미 종속인데요. 남미에 있어 미국이란 나라가 어떤 거라 생각해야 됩니까?
이성형> 종속이라는 게 다양한 차원일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종속된 거야 부인할 수 없을 거고요  그러나 단순히 미국이라는 존재 때문에 그 사회가 엉망으로 되었다고 단순화시키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외국세력과 유착되어 있는 국내의 과두제 세력이 더욱 문제이죠. 그런 세력이 또 내외 독점자본과 연합 종속적인 관계를 맺고 있고, 그런 시스템 때문에 종속이 내면화되어 있는 거죠.  문화적 종속을 매스미디어 부문에 있어 많은 논의를 해 왔는데, 남미에 있어서는 크게 문제 안됩니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남미 문화라는 것은 끈질깁니다. 미국문화에 저항하고 자기 정체성을 보존하는 능력은 대단하다고 봅니다. 음악이나 다양한 사회운동으로 표현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니까 그런 경제적 종속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거지요. 그런 것들은 종속이라는 쉬운 한 단어로 말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의 반면교사로서의 남미를 말씀하셨는데요. 경제적 구조의 취약함 때문에 신자유주의 개혁이 실패하거나 희생이 가중되었을 듯한데요. 신자유주의 개혁과 관련하여 반면교사가 될 수 있는 어떤 방향을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성형> 20여년간의 과정을 죽 보면요,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교범에 충실하게 따른 나라들이 멕시코와 아르헨티나 등입니다. 그런데 아르헨티나는 경제가 굉장히 심하게 망가졌고, 멕시코는 중간정도로 망가졌죠. 칠레는 성공한 걸로 되어 있습니다만, 그 경우는 시장개혁 자체가 성공한 것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국가가 굉장히 강력하게 규제를 행한 경우입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동아시아적인 모델과 가깝다고 할 정도로 시장 개혁과 정부의 적절한 규제가 결합된 거죠. 그런데 「칠레의 기적」을 말할 때 시카고보이 이야기만 하는데, 사실은 잘못된 이야깁니다. 시카고보이의 잘못된 점을 정정했을 때 경제가 나아졌거든요. 그래서 이런 것도 정확하게 소개될 필요가 있습니다.

 

 Tip for you  * 워싱턴 컨센서스 = 미국식 시장 경제체제의 대외 확산 전략을 뜻하는 말. 미국의 정치경제학자인 존 윌리엄슨이 지난 89년 자신의 저서에서 제시한 남미 등 개도국에 대한 개혁 처방을 "워싱턴 컨센서스"로 명명한 데서 유래됐다. 이후 90년대 초 IMF와 세계은행, 미국내 정치경제 학자들, 행정부 관료 들의 논의를 거쳐 "워싱턴 컨센서스"가 정립됐다. (야후 경제용어 사전) 워싱턴 컨센서스는 개발도상국 등 제3세계 국가들이 시행해야 할 구조 조정 조처들을 담고 있다. 이 조처들은 정부 예산 삭감, 자본시장 자유화, 외환시장 개방, 관세 인하, 국가 기간산업 민영화, 외국자본에 의한 국내 우량기업 합병·매수 허용, 정부 규제 축소, 재산권 보호 여덟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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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5-05-25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분을 만나본 적이 있는데요, 글은 정말 좋은데 말씀은 참 못하세요 ^^

urblue 2005-05-25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가요? ^^
지금 <신자유주의의 빛과 그림자> 읽고 있거든요. 책은 재밌어요.
 
 전출처 : balmas > 사회화와 노동 265호-룰라, 한국에 오다

265호 2005년 5월 24일(화)


룰라, 한국에 오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소중한 만남




5월 23일부터 26일까지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이하 룰라) 브라질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한다. 공식적인 명분은 유엔과 한국 정부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제6차 정부혁신 세계포럼에 참가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190여명의 기업인이라는 방문단의 구성과 한국에 이어 일본까지 방문하여 브라질 투자유치 설명회를 개최한다는 계획이 보여주듯이 기실 주된 목적은 한국과 일본, 나아가 아시아 지역의 브라질에 대한 투자유치를 촉진시키는 것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투자설명회를 개최하고 외국자본에게 투자를 구걸하며 온갖 반-노동자적, 반-민중적인 조치들을 약속하는 것은 더 이상 놀랍지도 않고 반-주변부 국가수반들에게는 일상 활동이 되었지만, 룰라가 적극적으로 그 대열에 동참했다는 사실을 일상다반사로 넘기기는 어려울 듯하다. 노동자 출신이며, 노동자들의 정당을 통해 대통령이 되었고, 한때 전 세계 좌파의 강력한 희망으로 부상했던 그가 투자유치단의 단장 역할을 성심을 다해 수행하고 있는 현실은 단지 씁쓸하게 비웃고 말 수 있는 해프닝이 아니다(당선 이후 그는 이미 수십 차례 이런 역할을 수행했다). 왜냐하면 이런 현실은 단지 룰라 개인이 초심을 잃고 변절했기 때문도 아니고, 미국과 국제금융기구, 초민족적 자본의 압박 속에서 룰라가 어쩔 수 없이 택한 고육지책도 아니기 때문이다. 룰라는 집권 이후 경제, 사회 전반에서 일관되게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실행했고, 향후에도 이런 정책들은 심화되면 심화됐지 룰라 스스로 철회할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룰라가 노동자의 대변자를 자처하면서도 신자유주의의 첨병으로 거듭난 과정과 원인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현재의 룰라 정부의 행보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는 단지 지구 반대편 먼 곳의 일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노무현은 이미 지난 해 브라질을 방문하여 자신과 룰라가 비슷한 경력과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과거 경력의 유사성 정도보다 현재 누구보다 강력하게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는 유사성이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룰라 정부에 대한 평가와 브라질의 상황은 무엇보다 한국의 사회운동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룰라의 당선 배경: 심각한 사회·경제 위기와 '잃은 자들의 동맹'

룰라의 대통령 당선에는 당시 브라질이 겪고 있었던 경제위기와 그에 따른 사회적 불만, 그리고 이에 조응하는 선거 캠페인 방식, 무엇보다 근본적으로는 노동자당의 성격과 활동 변화라는 조건이 놓여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브라질에서 본격적으로 시행된 신자유주의 정책의 내용은 무역과 금융의 자유화, 공공부문과 국유기업에 있어서 대규모 사유화, 경제적 탈규제화, 환율 안정화를 위한 '헤알 플랜', 강력한 긴축 정책 등이다. 이런 정책들은 브라질 경제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을 뿐이다. 1990년부터 2002년까지 브라질 경제성장률은 평균 1.7%로 1980년대 '잃어버린 10년'보다 더 낮았다. 이런 정책들은 외채를 줄이기는커녕 두 배로 증가시켰고, 국가 소유의 그나마 수익성 있는 기업들을 외국 자본에게 팔아넘기는 효과를 낳았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기업들(특히 제조업)이 초국적 자본의 소유로 넘어갔거나 그들의 영향력 하에 놓였고, 그 결과 산업 자체가 외국인 투자자와 외국 시장에 종속되었다. 이런 정책의 결과는 브라질 국내외 초민족적 자본과 지배 엘리트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다수에게는 심히 불만스러운 것이었다.

2002년 대선에서 룰라가 당선될 수 있었던 데에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이 큰 역할을 했고, 룰라는 이런 불만들을 적절히 조직하는데 성공했다. 룰라는 결코 균질하지 않고, 심지어 서로 적대적인 계급, 계층의 불만을 '변화'라는 모호한 수사로 조직했다. 이는 당시 룰라를 지지했던 사람들의 구성과 이를 활용한 선거 캠페인 방식을 살펴보면 분명해진다. 물론 대선 당시 룰라의 지지자들의 가장 큰 부분은 전통적인 노동자당 지지자, 즉 조직된 노동자, 숙련-반숙련 노동자, 진보적 지식인, 비공식 부문 노동자, 농민들이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들과 적대적이었던 계급의 구성원들도 룰라를 지지했다는 점이다. 우선 제조업의 자본가들이 있다. 이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이 추진한 긴축 정책과 자유화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룰라가 당선되면 다시 민족 자본을 활성화하는 정책을 쓸 것으로 기대했다. 또 다른 지지자들은 토지귀족으로서 오랫동안 과두제를 형성하여 지역을 지배해왔던 계층이 있었다. 이들은 금융의 이해가 우선되면서 자신들의 지배력이 침식당했다고 생각했으며, 룰라를 지지함으로써 의회와 지방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도시의 중간 계층 사람들은 룰라나 노동자당이 가지고 있는 급진적인 수사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신자유주의 하에서 직업의 불안정성이 증대되고 각종 공공 서비스의 축소로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던 불만으로 룰라를 지지했다. 노동자당의 전통적인 지지자들을 포함하여 이런 불균등한 지지자들의 공통점이라고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잃은 것'이 있다는 점밖에 없었지만, 룰라는 이것을 '잃은 자들의 동맹'으로 조직했다.

물론 이렇게 갈등적이고 모순적인 이해관계와 기대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룰라는 구체적인 정책과 전망 제시는 회피한 채, 모호한 수사와 감수성을 자극하는 언사들로 집권에 성공했다. 대선 당시 룰라가 제시한 가장 구체적인 약속이 카르도주(그도 한 때 종속이론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시절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유지하겠다는 IMF와의 협정이었다는 사실은 룰라가 '잃은 자들'의 요구를 "온정적인 동북부인, 룰라", "새로운 현실주의" 등의 수사로 동원했던 측면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지점이다.

 

룰라의 강력한 신자유주의 정책

현재 룰라 정부가 그 이전의 카르도주 정부보다 더 강력하게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룰라 자신은 이런 정책이 경제를 안정화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극약" 처방이며, 이를 통해 경제가 안정화되면 민중적 의제를 추진할 수 있으니 브라질 민중들이 조금만 더 "인내"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룰라가 후보 시절부터 일관되게 유지해 온 정책 기조와 그 정책을 고안·집행하는 내각의 성격을 봤을 때, 그리고 실제 집권 이후 보여준 룰라의 행보를 봤을 때, 이런 요구는 신뢰성이 떨어진다.

룰라는 후보 시절 IMF와의 협약을 통해서 카르도주 시절의 경제 정책의 기조를 유지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외채 지불과 강력한 긴축정책, 인플레이션 억제, 민영화/사유화 정책 고수, 노동부문 개혁 등이 그 내용이다. 당선 이후 그는 외채 지불을 충족시키기 위한 흑자 재정 비율을 카르도주 시절 IMF와 약속했던 GDP 대비 3.75%에서 4.25%로 상향조정했다. 외채 지불을 위한 흑자 재정은 대부분 사회 복지 예산의 삭감으로 충당되었다. 이런 정책은 외국인 투자자와 브라질 수출업자들에게는 거대한 이윤을 가져다주었다. 인도, 러시아, 중국과 함께 브릭스(BRICs)로 주목받고 있는 현재 브라질 경제의 본질은 바로 이것이다.

외국인 투자와 수출 산업이 성장의 엔진이라고 굳게 믿는 룰라 정부의 철학은 외국인 투자자들에 대한 각종 인센티브 제공, 전미자유무역협정(FTAA) 추진, 노동과 복지 관련 제도 완화, 연금 개혁, 노동자들의 임금 삭감을 비롯한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세계 최대의 고금리에서 비롯되는 이윤과 각종 신자유주의 정책은 주식시장에 거품을 형성하고 채권시장 수익률 상승을 이끌며 투기성 자본을 유인하고 있다. 게다가 룰라 정부는 외국인 직접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각종 세금 면제 조치를 고안하고 있다.

브라질의 수출산업을 이끄는 것은 주로 농산물과 철광석, 펄프, 석유 등의 원자재 산업이다. 룰라 정부는 이런 분야의 수출을 증대시키기 위한 최선의 방향이 자유무역의 확산이라고 믿는다. 농산물, 광물, 석유 부문의 거대 수출기업들의 활로를 위해 그는 WTO와 FTAA 협상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새로운 무역파트너 형성을 위해 세일즈맨이 되어 전 세계를 돌아다닌다(방한 기간 중 가지는 투자유치 설명회를 보라). 브라질은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5차 WTO 각료회의를 무산시킨 농산물 수출 개도국들(G-21)의 반발을 주도했는데, 이는 브라질의 농산물 수출기업들을 보호하고 미국 시장에 대한 접근권을 확보하기 위한 룰라 정부의 전투적인 방어였지 세계화나 WTO 체제를 반대하고 제3세계 가난한 농민, 농업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함은 결코 아니었다. 같은 맥락에서 룰라 정부는 FTAA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사실 남미의 많은 민중들은 FTAA의 파괴적 효과를 인식하고 다양한 투쟁을 통해 FTAA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왔다. 룰라의 바로 곁에도 FTAA를 반대하는 무토지농민(MST) 조직, 사회운동 조직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2002년에 FTAA 반대 국민투표를 조직하여 천만 명 이상 참가, 95% 이상의 반대라는 결과를 얻었다. 하지만 룰라는 그 투표에 참가하기를 거부했고, 노동자당에도 투표에 개입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당선이 된 후에는 서비스 시장, 투자, 지적 재산권에 대한 미국의 개방 요구를 수용하고, 그 대가로 미국이 농산품 등의 분야에서 무역장벽이 낮출 것을 요구하면서 오히려 FTAA 협상에 주도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브라질 민중에게는 거대한 부담을 지우고, 빈부 격차를 더욱 확대하고 있다. 흑자 재정 4.25% 유지, 세금 제도 개혁, 복지 축소와 같은 조치는 브라질 노동자, 빈민, 농민으로부터 금융자본, 수출기업, 외국인 투자자 및 채권자로 소득이 이전되는 효과를 낳았다. 뿐만 아니라 실업률은 9.6%로 여전히 높고, 그나마 창출된 일자리의 대부분은 비공식 부문 노동, 비정규직 노동이다. 대선 당시 브라질 민중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며 장담했던 "기아 제로" 프로그램과 토지 개혁은 지금까지 실행되지 않고 있다.

 

'잃은 자들의 동맹'을 관리하기

신자유주의의 첨병인 룰라가 신자유주의로부터 '잃은 자들'의 지지를 동원하여 당선되었다는 점은 일견 모순적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룰라 정부의 성격을 보여준다. 노동자 출신이고 노동자당의 후보였지만 룰라의 전략과 전망에서 노동자와 민중의 미래를 고려하지 않았다. 룰라는 쿠바의 사회주의 모델이나 베네수엘라 차베스가 보여주는 인민주의 모델(양자 모두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도)조차 고려해보지 않았다. 오히려 FTAA 국민투표 거부, IMF와의 협약 등이 보여주듯 철저하게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에 편입할 준비를 해왔다. 그가 '잃은 자들'의 대변자를 자처했던 것은 그들의 지지를 동원해야 당선될 수 있고, 그들의 불만과 갈등을 관리하는 것이 자신의 전망을 실행하는데 관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선거에서 구체적인 실행계획과 비전은 회피한 채, 누구나 각기 다른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변화"라는 모호한 수사를 활용하고, 온정주의적이고 인민주의적인 자신의 이미지를 극대화하여 대중의 감수성에 호소했다.

집권 이후 실제 정책의 실행 과정에서 룰라는 자신의 온정주의적이고 인민주의적인 정치 스타일을 바탕으로 신자유주의 정책 추진을 위한 조건을 만들어왔다. 우선 그는 자신의 과거 경력과 비천한 출신으로서 피지배계급에게 가지는 정서적 동정심을 활용한다. 그는 가난한 어린이를 마주하고는 실제 눈물을 뚝뚝 흘리고, 무토지 농민들을 만나서는 장난스럽게 그들의 모자를 쓰고 친밀감을 표시한다. 이런 모습은 노동자 출신, 운동의 경력 등과 결부되어 강력한 진실성을 획득하고, 그의 "극약" 처방이 끝나면 민중에게 혜택이 돌아오리라는 기대를 자극한다.

룰라는 노동자에게 공격적인 정책을 추진하면서 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사회경제위원회를 구성했다. 여기서는 노사정 사이의 사회협약이 추진되었는데, 그 내용은 법인세 감축과 외국인 투자자 세금 혜택을 골자로 하는 세금 개혁, 노동 비용 절감과 복지 정책에서 후퇴를 골자로 하는 사회안전망 개혁이었다. "노동자 대통령"이 노동자들을 후려치고 있는 꼴이지만, 노동자당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브라질노총(CUT)은 룰라 정부의 퇴행적이고 반동적인 노사정 협의에 대한 반격을 조직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거기에는 브라질노총의 상층부를 정권의 자문단, 입각 내정자, 노동자당의 선거 후보자로 흡수하고 보조금 등을 통해 포섭하는 룰라의 실질적 혜택도 작용한다.

게다가 룰라는 자신의 개인적인 지도력과 카리스마를 통치의 기반으로 활용하고, 자신의 내각, 특히 재무장관 팔로치를 중심으로 한 경제팀에 권력을 집중시키고 있다. 실제 브라질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정책이 거기에서 나오고, 일단 제출된 정책은 과감하게 실행된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당은 룰라의 정책을 승인하여 정당성을 부여하는 거수기로 전락하고 있다(선거 시기가 되면 선거 캠페인 수단으로 활용된다). 노동자당이 룰라 개인과 그 측근들의 정당이 된 것은 오랜 일이지만, 집권 후 룰라의 정책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측근들의 비리가 드러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심화되었다. 룰라는 자신에 대한 반대나 자신이 제출한 정책을 반대하는 노동자당 의원들에게는 출당의 위협을 가하면서 자신의 권위와 지시를 관철시키고 있다.

물론 '잃은 자들의 동맹'이 룰라에 대한 각기 다른 기대를 실리적으로 조직, 동원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룰라의 실질적인 행보와 정책이 브라질 민중들의 삶을 개선하기는커녕 더욱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는 점에서 룰라가 이 동맹을 언제까지 관리할 수 있을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룰라의 정치 스타일이 이런 불만과 갈등의 폭발을 잠재워온 측면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룰라의 정치 스타일은 철저하게 권위주의적이고 인기 영합적이며 온정주의적인 수사를 활용하고 있지만, 이런 행태는 대중의 실리적인 기대를 자극하고 사회운동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

 

브라질 사회운동의 도전과 시사점

룰라 정부의 반-민중성이 점차 명확해지면서, 룰라를 비판하고 대안적인 운동을 만들려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 지난 1월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 참가자들은 룰라에 항의하는 시위를 조직하기도 했고, 룰라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그것을 당내에 관철시키는 독단적인 방식에 반대하는 지식인, 활동가들이 노동자당을 탈당하여 새로운 당을 만들기도 했다. 룰라에 반대하는 공공부문 노동자들, 금속 노동자들, 도시의 불법 점거자들의 파업과 투쟁도 있었다. 이런 투쟁은 아직 소극적으로 룰라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수준이고, 그것을 뛰어넘는 대안으로 발전하지는 못하고 있다. 또 한 축에는 무토지농민운동(MST)이 있다. 대선 시기 룰라는 무토지농민운동이 자신의 당선에 방해물이 되지 않기를 바랐고, 따라서 이들에게 모든 대중행동을 중지해줄 것을 요청했다. 물론 그 대신 당선 후 토지 개혁을 통해 농지를 분배할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룰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이들은 다시 투쟁에 나섰다. 무토지농민운동은 지난 5월 2일부터 농지 개혁 실행과 미국의 자유무역 반대, 이라크에서 철수 등을 요구하며 전국 순회 투쟁에 돌입했고, 17일 브라질리아 대통령궁 앞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이런 투쟁이 룰라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반대의 요구를 결집시키고, 새로운 대안을 형성해갈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는 문제다. 투쟁과 저항이 거세질수록 룰라의 정치 행태도 강화될 것이다. 대중의 실리적인 기대의 일정 부분은 포섭하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은 배제하면서 투쟁의 통합력과 운동의 단결을 해치려 할 것이다. 실제로 룰라는 연금개혁에 반대하는 공공 부문의 파업은 무참히 짓밟았지만, 금속 노동자들에게는 일정 정도의 임금인상을 보장했다. 그리고 룰라가 언젠가는 초심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도 운동이 직면한 난관 중 하나다. 룰라는 초심을 잃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해방은 스스로의 투쟁과 운동으로 쟁취해야 하고 자신의 해방이 다른 사람의 해방과 맞닿을 수 있는 보편적인 권리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운동의 이념과 원칙을 잃은 것이다. 결국 룰라는 점차 대중운동과 멀어졌고, 자신이 인민의 권리를 대변하는 정책으로 인민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노동자민중에게 인내를 강요하는 것 아닌가! 따라서 그가 충실한 신자유주의 추종자가 된 것은 우연도 아니고, 외부의 압력 때문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새로운 운동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룰라의 당선과 그가 처한 현실적 어려움에 일희일비할 것도 없고, 노동자 출신의 대통령을 만드는 것이 운동의 중요한 과제일 것도 없다. '잃은 자들의 동맹'은 신자유주의 정치 공학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인민의 삶을 볼모로 한 자본주의 위기 지연 방식인 한에서 '잃은 자들'의 불만은 언제나 존재할 것이고, 이를 대변하겠다고 자처하는 이들은 언제나 선거 전에는 가장 강력한 신자유주의 비판자였다. 선거 이후에는 이런저런 변명과 현실적인 이유들로 가장 충실한 신자유주의 추종자가 된다(노무현도 마찬가지다). 변절한 지도부를 비판하는 것은 쉽지만, 대통령을 바꾸는 것만으로 사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배신은 반복될 뿐이다. 신자유주의 개혁 세력이 대중의 불만을 관리하며 삶을 파괴하는 것에 맞서 대중이 스스로의 투쟁을 조직하고, 상호 연대하고, 그들의 투쟁과 연대가 보편적인 권리와 요구로 확장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것, 그것이 사회운동의 과제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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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5-25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년 전, 민주노동당의 필독서였던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를 읽었어요. 농업에 기반을 두고 대다수가 빈민층인 브라질 사회와는 다른 구조를 가진 한국이지만 룰라정권의 집권 과정이 지금 진보정당이 겪고 있는 현실과 비슷해서인지 당원들에게 많은 공감대를 이끌어냈었건 분명한 거 같아요. 우리도 저렇게 해낼 수 있겠구나, 라는 일말의 기대감 같은 거 말입니다. 잘린 손가락, 가난한 금속 노동자가 상징하듯이 노동자 룰라였기에 뭔가 보여줄 거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신자유주의의 추종자가 되어버린 룰라와 노동자당을 보면서 정말 대통령 하나 바뀌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았더랬습니다. 노동자당의 '행복해지는 걸 두려워하지 말라' 는 감성적인 슬로건이 좋았고 룰라 티셔츠까지 구입했었는데, 흑..ㅠ,,ㅠ

urblue 2005-05-25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보니 우리나라 대학생들에게 호감도 높은 외국 지도자 1위가 룰라더라구요. 그랬죠, 대통령 당선될 때까지만 해도.
그의 변신은, 한편 놀랍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라틴 아메리카의 한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씁쓸합니다. 메넴이나 후지모리도 좌파적 공약을 내걸고 대통령에 당선된 후 변신했다고 하니까요.
흠..아무튼, 요즘 흥미롭게 라틴 아메리카를 보고 있습니다.
 

김영길의 '남미 리포트' <22> 

- 프레시안, 2004. 10. 11 

  노동운동 하면 아르헨티나를 연상할 만큼 아르헨티나 노총은 세계적으로 유명했다. 한국의 기업들은 아르헨티나에 투자를 하고 싶어도 노조 때문에 엄두도 못 낸다고 손사레를 칠 정도다.
  
  한국에도 이제 귀족노조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데 귀족노조의 원조 격인 아르헨티나 노동운동의 역사를 알아 본다.
  
  농.축산업 국가인 아르헨티나에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찾기 위해 조직화 되기 시작한 건 1930년 세계적인 경제 공황 때였다. 그러나 당시 노조의 조직은 유럽에서 사회주의사상을 가진 노동자들이 주축을 이루어 점 조직 형태로 시작이 되었다. 지금도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이 유난히 좌익 성향이 강한 건 이런 영향 때문이다.
  
  그 당시 정부는 이들을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공산세력으로 단정, 경찰과 군인들까지 동원하여 조직 자체를 무력화 시켰다.
  
  아르헨 노조의 창시자 페론
  
  오늘날 노조를 제치고 과격한 시위로 아르헨티나를 무정부 상태로 몰고 간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피켙테로(실업자 시위대)의 시작인 셈이다. 그리고 노동자 총연맹(CGT)의 노조지도자들은 거의가 대중적인 인기를 발판으로 정계에 진출을 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에는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정당은 없다. ‘노동자들을 위한 사회주의운동당’이라는 정당이 하나 있기는 하지만 친목단체 수준의 미니정당일 뿐이다. 노조 출신의 정치인들은 하나같이 정의당 다시 말해서 페론당 소속으로 정계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사진은 최근 철강회사 노동자들을 방문한 키르츠네르 아르헨티나 대통령. ⓒ프레시안

  지난 한국의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다수가 진출하자 아르헨티나 정계와 노동계, 그리고 학계의 화제가 됐는데 이것은 노동자천국이라는 아르헨티나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졌었다.
  
  가우초와 흑인노예들의 역사
  
  역사적으로는 광활한 농토와 목초지를 기진 아르헨티나는 국민전체 인구보다 몇 배나 더 많은 가축을 사육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에서 농촌은 가우초라는 남미인디오들이, 도시에서는 아프리카의 흑인노예들이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을 대표했으나 1816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후 아르헨티나의 곡물과 육류가 유럽시장을 휩쓸자 유럽의 이민자들이 아르헨티나 드림을 찾아 모여들기 시작, 아르헨티나는 유럽노동자들이 넘치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유럽의 기술을 익히고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은 유럽의 노동자들은 쉽게 자립을 하거나 고소득을 올리는 반면 흑인노예들과 가우초들은 그야말로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된다.
  
  1880~86.1898~1904년 2대에 거쳐 집권을 한 훌리오 로까 대통령은 교육을 받지 못한 노동자는 아르헨티나에 살 필요가 없다며 인디오들과 흑인노예 말살정책을 펼쳤다. 아르헨티나는 미주대륙에서 유일하게 흑인이 없는 나라다. 흑인노예 처리에 골머리를 앓던 정부는 당시 세계를 휩쓸던 황열병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창궐하자 모든 흑인노예들을 지금의 보카 지역에 집결시켜 놓고 그 외곽을 군인들을 투입, 굳게 지키고 흑인들을 고립시켰다. 그때까지 아르헨티나에 살고 있던 흑인노동자들은 의약품이나 물 한 방울 공급되지 않은 상태에서 죽어갔고 극소수가 라 플라타 강을 건너 우루과이나 브라질로 도망을 가게 된다. 이렇게 해서 아르헨티나에서 흑인노예들의 씨를 말린 것이다.
  
  기름진 라 팜파스의 평원에서 조상 대대로 평화롭게 살아가던 잉카의 후예들인 인디오들 역시 로까 대통령의 인디오 토벌정책에 밀려 북부 정글지대로 피신을 하거나 짐승들처럼 도륙 당했다. 지금까지 살아남아 가축을 키우는 남미의 카우보이들인 가우초들은 정벌 당시 인디오 여인들과 정벌군 사이에서 생겨난 혼혈들이다.
  
  아르헨 노동시장은 주변국 빈민들이 장악
  
  아르헨티나 노동시장이 도시에서는 흑인에서 유럽이민자들로, 농촌에서는 가우초들로 바뀌자 공장과 부두 등에서는 단순노동자 기근현상을 느끼게 된다. 그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아르헨티나 산업은 호황기를 맞으면서 부족한 일손을 주변국가 빈민들을 불러와 채우게 된다. 다시 말해서 아르헨티나의 3D업종은 파라과이, 볼리비아, 칠레 빈민들의 몫이 된 것이다. 철강노조, 공무원노조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아르헨티나의 노조지도자들 가운데 유럽출신 이민자 후예를 찾아 볼 수가 없는 건 바로 이런 이유 에서다. 따라서 이들에게 국가관이나 애국심, 애사심 등이 없는 것은 당연지사일 것 이다.
  
 
철강노조를 발판으로 아르헨 역사상 가장 강력한 노총을 이끈 사울 우발디니 전 노총위원장. 지난 90년도 초 국회에 진출한 그는 현재 뻬론당 소속으로 국회 노동위위원장직을 맡고 있다. ⓒ프레시안  

  이런 구조를 가진 아르헨티나 노조는 최근 장기불황으로 인한 실업자 증가와 노조지도자들간의 파워게임으로 노동자들이 지도부에 등을 돌려 실질적인 파워는 예전에 비해 미미한 수준이다. 노총지도부가 총파업을 선언해도 참여 노동자수는 15%~20% 수준을 맴돈다.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이 노총지도부를 바라보는 눈은 한마디로 차갑다. 노조지도자 출신들은 모두가 현직을 떠나면 사설경호원을 10여명씩을 거느리고 정치적인 자리에만 찾아 다니는 ‘뚱보’(귀족 노조)가 되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의 아킬레스건 피켙테로
  
  이제 아르헨티나에서 정부에 압력수단이 되고 있는 것은 노조가 아니라 피켙테로라는 실업자 연맹이다. 이들의 조직은 아직은 불법단체이지만 점점 그 세를 불려 정부와 기업들을 압박하고 있다. 이들 역시 주변국가에서 아르헨 드림을 찾아 국경을 넘어온 정식 혹은 불법 이민자들이 대다수를 이룬다. 정부가 이들 주변국가 이민자들의 처리에 골머리를 않고 있는 것은 경제가 호황일 때는 이들이 필요했지만 불경기인 지금 먹을 것과 주택, 의료혜택 등을 요구하며 과격시위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매월 150페소의 생활비와 무료 의료혜택을 베풀어 주지만 이들의 요구는 점점 더 늘어나 생활보조금 인상과 주택마련을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부에노스주 실업자시위대들은 그 악명이 높은데 정부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건 전국 유권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이들의 숫자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의 노동자문제는 역사적으로 이런 복잡한 요소를 갖추고 있어 정부의 개혁의지에 발목을 잡고 있다. 역사적으로 아르헨티나 역대 통치권자는 노조를 어떻게 장악하느냐에 따라 국정의 능력을 판가름하는 ‘바로미터’가 되었다. 현 대통령인 키르츠네르 대통령도 이들의 등을 두드려주고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점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노조 지도자들이 몇몇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전체 노동자들을 거리로 내몰아 불법적인 시위를 일삼아 국정을 마비시키고 치안불안 요소가 되고 있는데도 이들이 아르헨티나 최고의 정치세력인 집권 페론당원들 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을 더 해주고 있다.
   
 
  김영길/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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