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balmas > 서평에 대한 반론-역사적 파시즘 체제를 둘러싼 논점들

 

 

역사적 파시즘 체제를 둘러싼 논점들- 홍양희의 문제 제기에 답함
전시동원체제와 파시즘 구분해야

2005년 10월 02일   권명아 연세대 이메일 보내기

▲권명아 / 연세대, 국문학 ©
필자의 '역사적 파시즘: 제국의 판타지와 젠더 정치'에 대한 홍양희의 서평은 일제 말기 연구에 있어서 고민해야 하는 핵심적 논점들을 제기하고 있다.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홍양희가 제기한 논점들에 대한 답변을 중심으로 필자의 입장을 제시하고자 한다.


홍양희가 제시한 세 가지 논점을 필자 나름대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전시 동원 체제의 역사적 특성을 이전 시기와 관련하여 어떻게 규명할 것인가? 홍양희의 문제제기는 주로 이전 시기의 특성과의 연속성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필자의 입장에서는 이는 좀 더 구체적인 논점을 토대로 논의 구도를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인다.


이는 먼저 일본의 동화 정책과 황민화 정책을 어떤 관련 속에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담고 있다. 이 논점은 대만과 조선의 식민 경험에 대한 논의에서 중요하게 제기되고 있는 논점이다. 필자의 경우는 황민화를 동화의 연장선으로 보는 관점과 입장을 달리하면서(물론 황민화가 동화와 전혀 이질적이라는 차원이 아니다), 황민화 고유의 특성과 역사적 성격을 강조하는 입장에 서 있다. 즉 필자의 논의는 황민화와 동화의 차별성, 특히 황민화가 사회적, 정치적인 적대적 갈등을 정체성 투쟁으로 전환시켜서 황민화를 존재론적 투쟁으로 만드는 특성에 주목하고 있다.


또 전시 동원 체제와 이전, 이후 시기와의 관계는 전시 동원 체제의 주체화의 역학(황민화와 관련된)이 근대 체제의 일반적 속성의 연장선에 있는 것인가, 또는 파시즘 체제의 특수성에 의해서 더욱 지배적으로 규정되는 것인가 라는 논점으로 구체화 될 수 있다. 일례로, 가족이 사회의 기초 단위로 설정되는 것은 지역을 막론하고 근대 체제 일반의 공통적 성격이다.

그러나 가족을 국민 구성의 기초 단위로 정치화하는 가족 국가주의는 일본의 근대 구성과 식민 통치의 종별적 성격이기도 하다. 필자의 가족 국가주의에 대한 논점 역시 이 문제를 규명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또 이는 파시즘 체제가 근대성의 일반적 특성에 의해 규정되는가, 혹은 파시즘 체제 고유의 성격이 보다 지배적인가 하는 논점을 내포하는 것이다.

필자는 파시즘 체제(역사적 파시즘 체제)를 근대성의 예외적 국면으로 보는 관점과는 기본적으로 입장을 달리한다. 즉 파시즘 체제는 근대성의 역사적 전개 과정의 산물이라는 관점에 필자는 서 있다. 그러나 필자는 동시에 파시즘 체제의 역사적 특성이 모두 근대성 일반의 속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점 또한 중요하게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파시즘을 근대성의 경향적 특성으로 탈역사화하는 관점을 비판하면서 역사적 파시즘 체제라는 규정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시기 구분의 문제는 전시 동원 체제의 특성을 전시 체제 일반의 공통적 특성, 식민지 조선의 고유한 특성과 관련하여서 어떻게 구별적으로 논의할 것인가 하는 논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 논점과 관련하여 홍양희가 사례로 제시한 전시 체제하 여성 동원의 문제를 논하고자 한다. 남성들이 전선에 나간 후방의 노동력 부족을 위해서 여성을 동원하는 것은 이차 대전기 전 세계적으로 공통된 양상이다.

그런 점에서 홍양희가 제기하는 후방의 여성 동원 문제는 제국주의의 폭력성이라기보다 세계 대전기의 전시 체제의 공통적 속성이다. 오히려 가정의 정치화와 여성 동원은 이러한 세계 대전기 전시 체제의 공통적 속성과 함께, 일본의 전시 동원 체제의 특성으로서 가족 국가주의와 일본 여성과 달리 정치적 무능력자로 규정된 식민지 여성의 사회적 지위 사이의 불일치와 같은 문제들이 더욱 중요하게 논의되어야 한다.

필자는 주로 이 점을 중요하게 논의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여성들이 전시 체제의 동원 논리 속에서 일종의 정치 세력화와 권력을 얻게 되는 과정이 일본 여성들과 동질적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또 이 과정에서 일본 지식인 여성-조선 지식인 여성-조선의 이른바 여성 대중들 사이의 위계화와 서열화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단지 후방의 여성 동원을 강조함으로써 제국주의의 폭력성을 논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보인다.


두 번째 논점은 필자의 문제틀이 자칫 친일 협력의 문제를 어쩔 수 없는 행위로 정당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필자의 논의에서 중요하게 규명하고자 한 문제는 바로 이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욕망 추구 행위와 적대적 그룹에 대한 비난과 배제와 말살을 “어찌할 수 없음”으로 자기 합리화화는 정당화 기제에 대한 것이다.

이는 바로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여 살아가고자 했던 이들의 자기 정당화 기제라는 것이지, 이 자체가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실상 필자가 문제제기하고 있는 것은 민족적 정체성을 중심으로 한 기존 연구를 비판하는 것이 마치 이 시대를 살았던 ‘모든’ 이들이 폭력에 동참한 것으로 환원하는 논리이다.

또한 이 연장에서 사회적 소수자들이 파시즘에 동참하게 되는 요인들과 엘리트 집단의 동기, 욕망 구조들을 반사상이나 대칭상으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이 필자가 제기하는 중요한 논점이다. 이들이 결과적으로 시대에 편승했다는 동일한 현상을 보이지만, 실제 그 내부의 욕망, 배제 기제, 동기, 정체성 불안의 요인들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는 점이다.

실상 젠더사가 차이화의 역사적 경험에 대해 주목하는 것은 바로 엄연히 존재하는 역사적인 갈등과 배제의 폭력적 투쟁의 과정을 규명하기 위해서다. 또 민족주의적 역사관의 한계를 비판하는 것이 모든 차이화 과정을 대칭적으로 동일화하는 것일 수는 없다는 것이 필자가 제기하는 중요한 논점 중 하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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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05-10-02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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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almas > 논쟁 서평-역사적 파시즘

 

 

논쟁서평: 『역사적 파시즘-제국의 판타지와 젠더정치』(권명아 지음| 책세상 刊 | 2005| 511쪽)
단절론적 시각 문제..."무엇이 최소한의 생존이었는가"

2005년 10월 02일   홍양희 한양대 이메일 보내기

이 책은 오늘날의 한국의 현실을 파시즘의 유산이 살아 숨쉬는 사회로 보면서 그러한 폭력의 시대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저자의 자기 성찰적인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그 기원을 일제말기 전시동원체제의 경험에서 찾으면서, 그것의 역사적 특성을 파시즘과 젠더정치의 관점에서 고찰하고 있다.


저자는 수탈과 저항, 혹은 억압과 동의의 구조로 일제 말의 파시즘 체제를 분석하는 역사 연구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분법적 연구는 파시즘 체제의 폭력성을 단순화할 뿐만 아니라, 당시의 실제 모습과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파시즘의 속성, 즉 파시즘이 젠더, 지역, 인종 등을 기제로 식민지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전환시키는 체제라는 바로 그 점에서 비롯된다. 총후부인, 청년, 남방담론 등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따라서 전시동원체제 하의 파시즘 체제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서는 여성과 남성, 식민지라는 집단들 내부에 존재하는 정체성 투쟁의 양상들을 분석해야만 한다. 이를 통해 파시즘 체제를 유지시키고 대중을 그것에 합류하게 하는 근본 요인이 그들 사이의 경쟁에서 살아남고 이기려는 욕망이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특히 시선을 끄는 대목은 총후부인이나 스파이 담론을 통해 여성의, 모던보이나 애국청년 담론을 통해 남성의, 좋은 일본인 되기를 각각 분석한 2부와 3부의 젠더 관련 부분이다. 젠더 내부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정체성 집단간의 갈등과 투쟁의 모습을 포착한 점은, 여성과 남성 사이의 관계성에 초점을 맞춘 기존의 젠더사 연구에서 한 걸음 나아간, 이 책이 지닌 차별성 이자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황민화 정책과 그에 대한 저항이나 협력이라는 접근 방식과 달리, 식민지인들의 내부 투쟁을 통한 자발적 일본인 되기란 시각은 역사 연구자들에게 발상의 전환을 촉구하고 있다.


역사 연구자, 특히 한국사 연구자로서 이 책이 준 유용한 자극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아쉬운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전시 동원 체제기와 그 이전 시대를 너무 단절시켜 보지 않느냐는 것이다. 특히 총후부인 담론이 자유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여성 정체성을 혐오하는 담론이었다는 점과 전시동원체제 하에서 가정은 새로운 정치적 단위가 되었다는 주장이 그러하다. 물론 총후부인은 전시체제기에 나오는 용어이기는 하지만, 가정 주부와 여성해방적인 신여성 사이의 정체성 투쟁이 과연 이 시기에 한정된 담론이었다고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담론은 식민지 초기부터 1920년대의 교과서와 잡지에도 빈번하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가정을 둘러싼 젠더정치는 일제 말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 젠더로 이분화된 국가 분업주의는 근대국가의 중요한 시스템이었고, 제국주의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여기서 가정은 국가로부터 개개인을 국민으로 자기 복제해 내는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그런 점에서 가정은 사적인 공간으로 은폐되어 있지만, 사실상 공적인 세계에 처음부터 열려있었다. 최근의 젠더사 연구가 사적 생활조차 정치의 문제로 파악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히려 총후부인이 그 이전의 여성 담론과 구별되는 것은 남자들의 빈공간을 메우기 위해 사회적인 진출을 일정하게 용인하였다는데 있다. 요컨대 저자는 여성들 사이의 정체성 투쟁과 가정의 정치적 성격이 제국주의의 폭력성에서도 기인한다는 점을 간과한 듯하다. 


둘째, “파시즘 체제의 욕망과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제한된 상황에서 그 폐쇄된 상황에서 적어도 자신을 파시즘적 폭력과 동일시하지 않도록 만드는 최소한의 도덕은 없는가”라는 논리 모순적 화두에 담긴 문제점이다. 이 질문은 불가피했을 것으로 보인다. 저자에 의하면 파시즘 체제는 국민의 일상 전체를 잠재된 적에 대한 공포를 통해 규율함으로써 일상적으로 끝없이 좋은 일본인 되기의 실천을 수행하게 하는 주체화의 역학이었다. 따라서 식민지 조선인은 그 체제의 그물망에서 벗어날 수 없고, 부지불식간에 일본 파시즘에 공범이 되고 만다.


이 논리의 연장선에 서면 친일 협력의 책임 부분에서 전시동원체제 이전과 이후의 친일 행위를 분리해야만 한다는 결론을 피하기 어렵다. 나아가 이후의 친일은 책임을 묻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위 자체가 정당화된다. 저자의 고민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하여 조심스럽게나마 “파시즘의 유산과 최소한이나마 거리를 두게 해주는 최소한의 도덕은 어쩌면 자기 안의 무한 증식하는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생존 그것인지도 모른다”는 또 하나의 화두를 던지고 있다. 그 경우 이번에는 무엇이 최소한의 생존이었는지 그 기준을 세워야 하는 또 다른 고민에 빠지게 된다. 식민지 조선인들이 일상적이고도 구조적인 폭력 체제 안에서 생존을 위한 힘겨운 선택을 강요받았다는 결론에 공감하면서도 저자의 화두에 공허함과 무력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어째서 일까.

홍양희/한양대·한국근대사

필자는 한양대에서 ‘조선총독부의 가족정책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으로는 ‘식민지시기 호적제도와 가족제도의 변용’, ‘식민지시기 남성교육과 젠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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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05-10-02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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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대중음악 전문지 스핀(Spin)이 배꼽부터 대머리, 엉덩이 등 락스타들의 매력적인 신체부위 리스트를 선정해 내놓아 화제를 모았다.

AP 통신은 23일 이 잡지 기사를 통해 마이클 스타이프의 대머리와 엘비스 프레슬리의 골반, 마돈나의 배꼽으로 만들어진 프랑켄슈타인 락스타를 상상해 볼 수 있다고 전했다.

이 소식에 따르면 잡지 스핀은 '락스타 최고의 신체부위' 리스트를 최근호 특집기사로 내놨으며 마돈나의 배꼽을 1위로 선정했다.

잡지 수석 기자 마크 스피츠는 "마돈나의 배꼽은 주류를 선동하는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2위는 롤링스톤스의 기타리스트 키스 리처드의 강한 간(肝)이 선정됐으며 잡지 기자는 "키스 리처드가 죽은 뒤 그의 간 조직으로 우주선 외장을 만들어도 될 것"이라고 기사에서 밝혔다.

R.E.M의 리드보컬 마이클 스타이프의 대머리(사진)는 3위로 손꼽혔으며 선정 이유에 대해 잡지는 "모비의 대머리보다 높지도, 시네이드 오코너의 그것보다 낮지도 않은 보기 좋은 머리모양"이라고 설명했다.

그밖에 엘비스 프레슬리의 골반, 진시몬스의 혀, 티나터너의 다리, 50 Cent의 가슴팍, 브루스 스피링스턴의 엉덩이 등의 '락스타 최고의 신체부위'로 선정됐으며 머틀리 크루의 드러머 타미 리의 '그것'도 순위에 올랐다. ⓒ changgo.com


 

음악창고 Breaking News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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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8-31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드 머큐리의 다리를 좋아하던 친구가 생각나네요^^

urblue 2005-08-31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디 머큐리 다리는 별로 안 예뻤던 것 같은 기억이...-_-

비로그인 2005-08-31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육점에 걸린 부위별 등급을 보는 것만 같아..어째..좀..긁적적..ㅡㅡa
근데 사진 속의 저 남자는 혹시..'스매싱 펌킨스'의 빌리 코건 아닙니까?
어..아닌가보네..마이클 스타이프라는 작자인가 봅니다.

urblue 2005-09-01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정육점이요..음..-,.-
네, 마이클 스타이픈가 뭔가 랍니다. 잘 모르는 사람이어요.
저는 전 판테라 보컬이었던 필립 안젤모의 대머리를 좋아했습니다만.

2005-09-03 07: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크리스 하먼] 저절로 만들어지는 네트워크는 없다, 자율주의 반대한다
라은영 기자 hallola@jinbo.net
19일 고려대학교 '학우 강당'에서 진행된 크리스 하먼의 '자율주의'에 관한 강연 내용을 정리한다. 자율주의는 맑스주의에 뿌리를 두고,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을 배경으로 1980년대 이후 철학과 실천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운동적 조류이다. 자율주의와 관련한 대표적인 이론가들은 안또니오 네그리, 쎄르지오 볼로냐, 마이클 하트 등이 있다.
이날 강연에서 하먼은 이들의 '자율주의'에 대한 강한 반대의 입장을 밝혔다. 자신이 보기에 '자율주의가 아니키즘은 차이가 없'고 '정당과 혁명적 경향을 가진 사람들을 부정'하며 이런 자율주의가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에 '강한' 우려를 표했다. 또한 네그리의 '자본은 한국가의 경계를 넘어 네트워크 형태로 주권화 한다'는 주장에도 '자율주의자들이 자본이 네트워크에 의해 저절로 움직인다고 하지만, 네트워크를 통해 움직일 경우 결정적인 상황에서는 전술을 짜고 행동에 옮길 구심의 조직이 없다는 것이 문제'라며 반박하기도 했다. 이하는 강연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강연을 하고 있는 크리스 하먼.
반자본, 반세계 운동의 부흥

 
지난 6년 동안 세계 전역에서 대중적인 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봐 왔다. 씨애틀에서의 투쟁을 시작으로 반자본 운동이 부흥했고, 대중적인 반전운동도 일어났다. 남미지역의 저항운동을 봐 왔다. 당시 운동의 새로운 물결에 감동한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실용적인 논쟁을 할 시간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런 모든 다양한 운동이 수렴되고, 모두 모여서 자본주의를 공격하면 된다는 희망이 팽배했다. 하지만 2가지 사건이 발생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전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됐다.
두 가지 사건. 그중 하나는 2001년 7월에 진행된 G8 반대 투쟁이다. 당시 시위 진압과정에서 '카를로 줄리아니'가 과잉진압으로 인해 사망하게 됐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사람들은 '싸워야 한다'는 필요성의 강조뿐만 아니라 '어떻게 싸워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세계무역센터를 강타한 911사건 이후에도 아프간, 이라크 전쟁이 이어지면서 사람들은 우리가 저항하고 있는 상대가 얼마나 강력한 상대인지를 새삼 깨닫게 됐다.
그리고 그 이후의 집회, 시위, 모임 등에서는 3가지의 뚜렷한 경향이 나타나게 됐다. 이 세가지 트렌드, 경향은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 아닌 내부의 논쟁을 통해 발생, 나타나게 된 것이다. 첫번째는 개량주의적인 경향으로, 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압력단체로써 조금씩 국가를 압박하고, 영향을 끼쳐 개혁조치를 취하게 해서 개혁조치를 통해 자본주의를 통제할 수 있다는 것. 이런 경향은 비교적 규모가 큰 경향이었다. 두번째 경향은 그에 비해 규모가 작은 혁명적 경향이다. 대표적인 혁명적 조직들이 주장했는데, 영국 사회주의 노동자당, 프랑스 혁명당, 한국의 다함께도 포함되지 않을까. 세번째 경향은 규모나, 영향력 면에서도 뚜렷한 성장을 나타낸 자율주의라고 지칭하는 경향이다. 이들은 운동자체의 추동력과 모멘텀을 칭송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정당, 조합을 불신하는 자율주의에 대해

 
자율주의자들은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투쟁이 자치적이고 생명력이 넘쳐나기 때문에 그 하나만으로로 싸움의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경향을 가진 사람들은 개량주의 정당이나 노동조합 모두를 불신한다. 혁명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까지도 불신한다. 이들은 혁명가들이 '운동자체를 자기들의 목적에 맞게 이용하려 한다'며 혁명 단위들을 비판한다. 물론 운동 내에서는 여러 경향과 견해가 있고, 요소에 따라 자율주의적인 요소들을 일정정도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을 조금씩 보이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자율주의자라 칭하지 않지만 자율주의적 사고를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
NGO 활동가들도 알고보면 자율주의 활동가라 할 수 있다. 멕시코의 사파티스타를 동경하는 활동가들은 자율주의자들이다. 남미의 억압받는 선주민들과 함께 활동하는 사람 중에도 자율주의자가 많다. 그리고 아르헨티나에서 전투적인 운동을 펼치고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도 자율주의 사상을 수용한 사람들이 많다. 그 운동의 주변부에서 함께 하고 있는 블랙블로크(통역자 설명:반자본주의 시위가 벌어지면 불지르거나 까만옷을 입고 마스크를 쓰고 다니면서 부수고 다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 중에도 자율주의자가 많다.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은행에 불을 지르면 자본주의가 망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고 이들 중에도 자율주의자들이 많다. 개인적으로 돈을 찾아야 하는데 블랙블로크들이 은행에 불을 질러 못 찾은 경험도 있었다.

자율주의의 대표주자, 마이클 하트와 안또니오 네그리

 
자율주의 사상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이론적 작품이 있다.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가 쓴 '제국(empire)'이라는 저서이다. 이책은 문장 이해도 버겁고 내용이 어렵다. 읽은 사람이 별로 없을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책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자율주의가 결국 하려는 말은 모든 사람들이 지금 체제에서 희생자들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희생 때문에 결국 저항을 할 것이고, 이런 저항은 조직화 할 필요가 없이 자동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붕괴시키는 무기가 될 것이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자율주의적인 경향을 가진 이 많은 운동들이 주장하는 것이, 정당은 우리 운동에서 설자리가 없고, 해야할 역할이 없다는 내용이다. 역사적인 경험을 예로 들면서 스탈린주의적 정당과 유럽 사민당의 사례들을 봐도 이런 정당들은 '일정정도 운동이 성장하면 운동에 기대 지배하고 지도하려고 든다'는 것이다.
또한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저항을 하면서 이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 것이기 때문에 전략도 필요 없고, 조직도 필요 없고, 우선순위를 정할 필요도 없다고 주장한다. 자율주의 운동을 신봉하는 사람이 많다. 이들 중 상당수가 이전에 스탈린 주의자들이었거나 개량주의자들이다. 자율주의자들이 제 3세계 NGO에서 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공산당 처럼 위계질서가 강한 곳이나 단체에서 활동했던 활동가들의 경우 그 반발심이 계기가 되어 자율주의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보다 건강한 계기나 동기를 가진 젊은이들도 많은데, 스탈리주의나 사민주의자들이 운동을 이용해 먹으려고 조직들의 죽은, 낡은 전략들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반발심으로 자율주의 사상을 신봉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자율주의자들은 아래로부터의 대중 활동, 참여, 대중적인 활동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지난 6년 간 실질적 경험에 비춰보면 오류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자율주의의 오류, 모든 운동이 자동적으로 네트워크 되지 않는다

 
우선 주장하는 것 중 모든 운동들이 자동적으로 단결할 수 있다고 했지만 이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 억압당하는 여성들이 무슬림들의 운동과는 전혀 결합하지 못하고 따로 노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영향력이 센 여성단체가, 프랑스 정부가 이슬람 여성들을 억압하는 것을 지지하기도 한다. 실업노동자들이 직업이 있는 노동자들과 자동적으로 연대한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문제이다. 실업노동자들이 불만을 터트릴 수도 있다. 내가 일자리가 없는 것은 '너 때문이다' 라는 인식 때문에. 반면 일자리가 있는 노동자들은 실업자들을 동지가 아닌 기생충으로 보고 억압하는 지배계급의 편을 들 수도 있다. 유럽에서도 억압받는 흑인들이 투쟁하는 과정에 똑같이 억압을 받는 이슬람 사람들과 연대하거나 단결하지 않는다. 노숙자, 실업자, 장애인 운동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인종 차별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남미에서 선주민 운동 권력 쟁취를 위해 운동하는 사람들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가난하고, 소외 받는 사람들이지만, 단지 백인이라는 이유로 적으로 삼는 경우들이 있다.
단결은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나서고, 투쟁을 조직하고, 단결이라는 사상을 가지고 조직하지 않는 이상 자동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반전운동 과정에서 이슬람 사람들의 역할도 있고,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 많은 노력들이 있었다. 남미의 예를 들면, 아르헨티나의 경우도 실업자들과 일자리 있는 노동자들간에 엄청난 싸움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반자본 운동이 성장할 수록 국가 권력의 탄압이 거세진다

 
두 번째로 자율주의 사상의 오류는 어떤 운동이든 간에 운동이 발전할 수록, 이념적으로 여러갈래로 나뉘고, 이념적인 다양성이 대두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시애틀 투쟁에서도 자발적인 논쟁,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이라크 전쟁, 아프간 전쟁을 반대해야 하냐, 반대하지 않아도 되냐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남미에서는 에콰도르에서는 논쟁이 격렬해져서 정권을 타도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논쟁도 있었다. 싸움이 승리 해서 대통령이 퇴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승리 이후에도 큰 논쟁이 자발적으로 벌어졌다. 선주민과 노동자로 구성된 정부를 세울 것인가, 대리인이 임기를 마칠 수 있게 하고 다음 선거를 준비하고 기다릴 것인가에 대해서.. 처음에는 단결된 운동 같지만, 이후 자발적인 이념논쟁이 발생하고, 수면위로 떠오르면서 논쟁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세번째로. 운동이 발전하면 국가권력에 폭력적인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 폭력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가 남는다. 운동이 발전해 자본주의 체제에 위협이 될 수 있을 만큼의 힘을 키우면 국가가 우리를 가만두지 않게 된다. 한국에 있는 동지들은 국가권력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잔인한지는 알고 있을 것이다. 한국의 경우도 몇 년전만 해도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했다는 이유만으로 투옥이 되기도 하지 않았나. 남미에서도 70-80 년대 국가 권력이 국가적인 폭력을 휘두른 권력에 의해 칠레에서만도 만 명의 사회주의 활동가가 학살 당했고, 아르헨티나에서는 3만명, 중미에서는 10만-20만명이 살해됐을 것이다.
지난 5년의 경험을 보면 그 정도의 국가권력의 폭력을 아직은 경험하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우리운동이 계속 발전해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심각한 도전과 위협이 되면 우리는 이런 문제에 당면하게 될 것이다. 실질적으로 맞서야 하는 상황이 되면 자율주의자들은 선택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내 목숨이 걸려 있는데, 국가가 나를 죽이려 하는데 국가를 그냥 무시해 버릴 수 없다. 양자간의 선택을 해야 한다. 그럼 그 자리에서 나를 죽이려고 덤벼드는데 그냥 무시하고 자발적이니까 운동으로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을 순 없는거 아닌가.
여기서 선택을 해야 한다. 국가를 어떤 방식으로 개혁을 해야 한다거나 국가를 개혁하던지, 전복시키던지. 그런 선택의 기로에서 자율주의자들은 혁명가가 되거가, 개량주의자가 되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이번 여름 볼리비아에서 자율주의자들이 이런 선택의 기로에 놓인 것을 확인했다. 그 당시에 볼리비아에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노동자운동이 심각한 위협을 끼치고 있었다. 당시 볼리비아 의회는 우파정부를 세우겠다고 협박을 했고, 우파 정부는 노동운동을 완전히 박살 낼 것이라고 협박했다.
이런 협박을 받으며 대중운동에서는 즉각적으로 두가지 경향이 나타났다. 하나는 지금하고 있는 운동을 멈추고 정부, 의회와 타협을 해 다음 선거 때 우익정부가 집권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고 주장, 당시 자율주의 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 이런 식으로 주장했다. 반대되는 주장으로 노동자 조직, 농민 조직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준비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 쪽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전략을 짤 수밖에 없고, 어느 세력이 국가에 잘 대응하고 저항할 수밖에 없는지 선택할 수밖에 없다.
크리스 하먼의 강연은 만석이었다.

반자본운동과 노동자의 역할

 
맑스가 노동계급을 강조했다. 노동계급이라고 해서 사회 다른 계층이나 계급보다 더 많은 희생이나 고생을 강요 당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많은 지역에서 자본가들이 일을 시키기 위해 돈을 줘야 하는 '굶주린' 농민들이 훨씬 더 고통 속에 있을 수 있다. 자신의 성 정체성 때문에 아웃팅 당하고, 폭행당하는 레즈비언이 노동자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 있다. 집단, 사회세력들은 더 큰 고통을 당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에 도전하고 권력을 장악할 수 있을 만 한 힘이 없다는 것이다. 노동계급이야 말로 자본체제가 계속 운영될 수 있도록 하는 기반이기 때문에 노동계급만이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국가권력에 억압적인 도구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방해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계급도 노동계급이다. 왜냐하면 국가권력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석유 의존도, 항공, 항만 등과 같은 교통수단이나 철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시설을 보호, 유지, 만드는 것은 결국 노동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힘이 있고, 악명 높은 테러리스트들이 폭탄을 설치했다는 것보다 노동자들의 대중 파업을 더 위협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이런 대중운동은 끊임없이 조직화되고, 다양한 계급과 집단과 단결을 해야만 대중적 운동이 만들어 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당의 역할에 대해 얘기할 수밖에 없다. 노동운동이 성장하고, 전략을 얘기할 때 정당 이야기는 나올 수밖에 없다. 운동 내에서 양분이 되었다. 단결 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한다. 정당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과거의 경험에 비춰 정당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오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맑스주의 정당에 대한 해석은 다르다. 맑스주의적 정당에 대한 해석은 단순한 관철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노동자들, 자본주의에 대항하고자 하는, 사상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은 한 마디로 매우 많다.
때론 이렇게 세뇌 당하기도 한다. 나는 국가를 장악하고 국가를 운용할 수 있는 역량도 안되고 능력도 안된다는 것을 스스로 믿게 만든다. 파업현장 예를 들면, 자본주의의 세뇌를 극복하고 자본주의 체제에 도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행동, 실천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 반대 급부로 사측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쪽도 있다. 그래도 파업에 동참하는 것은 직장동료들에게 망신당하지 않기 위해 참석하는 극과 극 사이에 왔다갔다하는 세력이 있다. 이렇게 세 부류로 나뉘기도 한다.
자율주의자들은 한 사업장에 다른 현상이 있다는 것을 무시한다. 노동자들 중에서 인종차별주의자가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데 구분하지 않게 된다. 마오주의 경향을 가진 노동자, 여성을 차별하는 사람도 있고, 성차별 없애야 한다는 입장이 있기도 하다.
정당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노동자들 중에서 사측에 자본가들에게 저항하고, 도전하려는 의지가 강한 사람들, 성, 인종 차별에 가장 반대하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 노동세력이 이 사회에서 묶는 역할을 하는 것이 정당이다. 자율주의의 가장 큰 비극은 자율주의자들도 인종, 성차별 반대하고 자기결정권을 가진 것이 중요하다고 믿으면서 스스로를 조직화해야 할 필요성을 못느낀다는 것이다. 운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논쟁을 벌여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큰 비극이라 생각된다.
자본가는 우리 운동에 그런 식으로 개입하는 것에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 매일 같이 하루가 멀다하고 언론을 통해 자신들의 모든 수단을 동원해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하라하면 '무시하라'고 세뇌한다. 그리고 파업을 하면 중도파 지도자를 따라 '급진파의 지시를 따르지 마라'는 등의 내용을 계속 세뇌, 주입한다.
이런 자본가들을 보면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기 위해 가장 퇴행적이고 퇴보적인 사상을 가진 노동자들을 노동계급으로 위장시켜 투입시킨다. 노동자들도 가장 계급적인 신념을 가진 사람을 조직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정당을 이야기 할 때 정당이 운동을 이용하려 한다, 나머지 운동하려는 사람들간의 대결구도다 라고 보면 안된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정당에 대해 말할 때는 운동의 한 본분으로 존재하며, 함께 투쟁하면서 자신들이 가진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는 집단이 바로 정당인 것이다. 그래서 노동현장, 대학, 모든 곳에서 논쟁하고, 자본체제에 도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논쟁을 벌일 수 있는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만들기 위해서 정당을 건설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노동운동은 다른 운동과 배치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제 3세계 국가의 농민들이 진정한 농민해방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자본가들을 전복시키고, 파괴할 수 있는 파괴력을 가진계급과 결합하는 수밖에 없다. 노동계급이 제 3세계의 국가 수도에서 자본가들의 뿌리까지 뒤흔드는 파괴력을 보이고, 가열찬 투쟁을 보일 때만이 농민들도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느낄 것이다.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의 대 투쟁이 일어났을때, 남성 노동자들이 먼저 나섰을 경우 가열찬 투쟁을 하고 있고 성공하는 것을 보았을 때 보고 있던 여성노동자들도 여성해방의 가능성을 느끼고 신념을 가지고 함께 투쟁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노동운동, 계급을 중요시하는 것은 노동계급이 잘나서가 절대로 아니다. 구조적으로 노동 계급만이 힘과 역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를 뒤흔들 수 있어야 우리를 억압하는 요소가 함께 흔들릴 수 있는 것이다.
선의를 가진 자율주의자라 해도 우리는 , 자율주의자들이 같은 목표를 가지고 같이 싸우고 있다면, 제대로 싸우려면, 진정한 맑스주의에 기반을 가지고 아래부터 함께 투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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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nrim > 날개님, 바탕화면용 사진이어요.~!

필름스캔한건데, 질감이 좀 있네요.
클릭해서 크게보면 괜찮을거에요..
원본 크기 그대로 올렸습니다.

첫번째 갯벌사진 크게보니 일하고 계신분들도 다 보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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