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브권 문학계 최근 동향

최건영(문과대학 교수/ 슬라브 문학)

1. 세기말의 러시아 문학-- 5월 10일 자 [연세춘추]
2. 최근의 동구문학 --- 5월 31일 자 [연세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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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기말의 러시아 문학


마침 19세기와 20세기 러시아문학을 대표하는 뿌쉬낀과 나보꼬프가 각기 탄생 200주년, 100주년을 맞은 러시아의 세기말 문단은 문학 그 자체는 물론 역사, 사회사상사, 문화사의 보고라 할만하다. 세기말의 러시아 문단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을 두 가지로 요약해서 살펴본다. 우선 해금작가, 망명이민 작가, '검열기피문학' 등이 합류하고, '또하나의 문학' 혹은 포스트모던의 창작경향, 추리소설과 대중소설이 혼재하고 있는 80-90년대의 문단을 살펴보고, 후반에서는 20세기 러시아의 사상문화사적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재해석하려는 평론의 출현을 논해보겠다.

검열과 통제가 사라진 고르바초프 이후의 러시아 문단은, 언어의 직선적 지시기능이 힘을 발휘하여 한때 사회평론적 문예비평이 큰 힘을 얻었다. 문단은 보수, 진보 양 진영으로 갈라졌고, 문예지는 극단을 치닫는 논쟁으로 메워졌다. 해금도서, 망명문학, 동시대 작가를 망라하여 모든 창작물은 두 진영의 아전인수적인 해석에 따라 심지어는 중복되어 인용되기도 했다. 이 두 부류에 속하지 못하고, 그 어떠한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지 않은 작품들을 지칭하기 위해 "또하나의 문학"이라는 용어가 탄생하기도 했다. 문학이 문학이상의 힘을 발휘하고, 작가가 사회의 교사로 존재하던 19세기 러시아의 전통적 사고가 이 시기에 부활하는 듯 했다.

그러나 뻬레스뜨로이까의 종언과 함께 문학의 사회적 영향력은 급속히 약화되기 시작했으며, 작가의 발언도 사회적 권위를 잃은 지 오래다. 80년대의 해금작가나 망명작가의 작품과 발언, 수백만부가 팔리는 문예지의 위력, 쏠제니찐의 권위, 사회적인 대 논쟁을 불러일으킨 아이뜨마또프나 르이바꼬프의 문제소설 등등 모두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9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들어오면서 순수 문학은, 각종 오락서, 추리소설 등과 경쟁하지 않으면 독자를 얻을 수 없게 되었다. 베스트셀러 만들기와 문학상의 출현이라는 러시아에서는 매우 낯선 시스템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재 진행중인 러시아의 사회현상을 다루는 리얼리즘계의 작품군이라도 해도 이는 사회의 사상적 리더로서의 문학이라는 의식보다는 차라리 사회의식을 철저하게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는 의미에서의 리얼리즘문학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기존의 전통적 리얼리즘 문학이 사회적인 메시지를 갖지 않고, 교사로서의 기능을 잃었다함은, 정치나 문학적 담론 모두를 신용하지 않게 된 사회의 의식과 생태까지도 문학적 소재에 포함시킬 수 있는 리얼리즘 문학의 출현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실제로 일부 러시아의 비평가들은 이러한 현상을 단순히 러시아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금세기 후반의 세계문화 전반에 나타나는 포스트모던이라는 사조와 연결시키기도 한다.

평론의 경우 세기말의 러시아를 논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에뜨낀뜨와 그로이스의 활동이다. 러시아에서의 정신분석의 역사를 논한 『불가능한 욕망』(1993)의 저자 알렉싼드르 에뜨낀뜨(1955-)는 스딸린시대의 전체주의적 사고의 기원이 20세기초 러시아 문화의 르네상스기에 있다고 주장하며, '은의 시대'에 대한 종래의 이미지를 부정한다. 문화 전반으로 보아서는 러시아 문화사 최대의 전성기였지만, 동시에 러시아사 최대의 비극을 준비한 시기이기도 했다는 인식이다. 그는 '은의 시대'를 분석하면서, 물적이고 카오스적인 자연을 정신적인 것으로서의 문화(코스모스) 속에 조직화하려 했던 욕망을 지적해낸다. 정치적 관념과 문화를 구체적 현실(자연)에 투영하면서, 현실을 억압 지배하려는 욕망은 혁명과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에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전체주의적 문화는 바로 정신적이고 관념적인 이데올로기를 통한 현실 재배, 개조를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한편 보리스 그로이스(1947-)는 『전체주의 예술 스딸린』(독어판 1988, 노어판 1993)에서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이, 사실은 전체주의 예술(가령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준비했다고 주장한다. 가령 테크놀로지는 전통적 자연의 통일을 파괴해서 자연의 재현을 전제로 하는 미메시스의 예술을 무의미화하고, 진리와 세계의 반영으로서의 예술은 사라지고 만다. 스스로 새로운 통일적세계를 테크놀로지를 사용하여 제로에서 인공적으로 재창조하는 것으로 이 상황을 타개하려고 했던 것이 아방가르드였다는 해석이다. 제로 상태에서 세계를 재창조하려면 아방가르드는 단순한 예술영역을 넘어서, 세계를 변혁시키고 지배하는 힘을 필요로했다는 것이다.

20세기 전반기에 대한 이러한 혁명적인 내용의 재해석과 함께, 20세기 후반기 각 시기에서 발굴된 문학작품, 망명 이민 작가의 귀환 작품, 포스트모던을 표방하는 나보꼬프 추종자들에 의한 90년대 작품들이 동시에 읽히고 있는 러시아문단은 현재 매우 세기말적이고 복잡하다.

 

2. 최근의 동구권 문학


우리의 언론을 보면, 사회주위권 붕괴 이후 동구, 러시아의 문화생활은 맥도날드, 헐리우드 영화, 서구대중소설로만 뒤범벅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냉전시절 그들에 대해 가졌던 우리의 이데올로기적 우월감이 천민 자본주의적 시각으로 대체된 것이라고나 할까. 언어의 절제와 비유 정신이 무기였던 작가들이 검열제도가 없어진 후 당황하는 상황이 있었다고는 해도 이는 어찌 보면 작가들의 겸허한 자세를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러시아 문학의 경우는 이전보다 더욱더 자유분방한 작품들이 분출하고 있으며, 서구에서는 전쟁중인 구 유고권의 문학(끼슈, 뻬끼치, 빠비치)을 포함하여 최근의 동구 문학 번역이 냉전시기 못지 않게 줄을 잇고 있다.

90년대 초 체코에서『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체코의 해금문학(주로 꾼데라, 끌리마, 슈끄보레쯔끼 등의 망명작가들)의 열기를 누르고 초 베스트셀러가 됐을 때, "쓰레기도 나름대로 팔려나가야 조이스도 책방에 놓이겠지" 라고 말한 것은 원로작가 즈데넥 우르바넥. 서구 오락물이 범람하여 대중들의 독서 취향이 진지한 담론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초조해하는 슈끄보레쯔끼에게 던진 한 마디이다. 아니나 다를까 작년 여름 필자가 가본 쁘라하 중심가의 책방에는 꾼데라, 끌리마, 슈끄보레쯔끼를 비롯하여 체코 현대 철학자들의 책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이제 동구의 최근 문학을 각국별로 살펴보자. 최근 20년 사이에 시인만 두 명(미워슈, 쉼보르스까)이 노벨상을 탄 폴란드 문학계에는 오랜만에 대형 소설가가 탄생했다. 등단하자 마자 세계적 명성을 얻은 빠베우 후엘레(Pawel Huelle 1957-). 1987년 처녀작『바이제르 다비덱』은 곧바로 영어 등 십여개국어로 번역되었다. 배경은 노조로 유명한 그단스끄. 유년기에 만났던 유태인 소년 바이제르에 대한 초자연적 분위기의 회상록이다. (바웬사의 노조운동을 통해 유명해진 이 도시는 2차대전 이전에는 주민 대부분이 독일인이었으며 독어로는 단찌히라고 불리었다. 이곳은 귄터 그라스의 고향이기도 하다.) 90년대에 들어서 낸 단편집 『이사하던 이야기』도 역시 전후 그단스끄를 배경으로 한 환상적 분위기의 자전적 소설이다. 피아노를 치는 독일 부인과 그 음악에 빨려드는 폴란드 소년에 대한 단편 「이사」의 경우, 극도로 섬세한 폴란드어 문체는 관능적이기까지 하다. (역시 그단스끄를 배경으로 소년 소녀의 격렬한 사랑, 에로스, 배반, 죽음을 묘사한 「첫사랑」도,「이사」와 함께 후엘레 최고의 결작으로 꼽을 수 있다.) 유년시절 일상의 디테일들 속에 화자가 아련하게 떠올리는 그 시절 신화에 대한 향수가 담긴 그의 문체는 짜릿함마저 맛보게 해준다. 94년에 시집과 희곡도 발표.

꾼데라와 하벨에 가려 우리에게 덜 알려져 있으나 못지않게 중요한 체코의 작가로 요젭 슈끄보레쯔끼(Josef Skvorecky 1924-)와 이반 끌리마(Ivan Klima, 1931-)를 들 수 있다. 슈끄보레쯔끼는 1968년 망명, 현재 캐나다 거주. 자전적 작품이 많고, 속어와 시어를 섞은 독자적 문체로 유명하며 서구에서는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으나 우리말 번역은 아직 보지 못했다. 국내에『하룻밤의 연인 하룻낮의 연인』『사랑과 쓰레기』가 소개된 쁘라하 출생의 유태계 작가 끌리마 역시 자전적 요소가 강한 소설을 많이 썼다. 그는 소년기에 강제수용소 생활을 체험했으며 60년대에는 쿤데라 등과 함께 자유화 운동에 참가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경험이 작품에 많이 투영되어 있다. 대표작은 600쪽이 넘는 장편『자비의 재판관』이 있다. 사회주의 시절 체코슬로바키아가 배경. 사형제도에 반발, 공권력의 압력에 버티며 소신을 지키다가 직장과 결혼생활 모두를 잃게 되는 재판관의 이야기로, 자전적인 요소를 포함하여 소설 전체가 마치 체코 현대사의 축소판처럼 느껴진다.

노벨상을 수상한 이보 안드리치와 뻬끼치 등이 소개되어 있는 구 유고권에서는 밀로라드 빠비치(Milorad Pavic 1929- )를 대표작가로 꼽을 수 있다. 베오그라드 출신으로 집필언어는 쎄르비아어. 전설 속으로 사라진 하자르 민족을 다룬 사전 형식의 실험 소설『카자르 사전』('하자르'의 오역)이 최근 국내에 번역 소개되었다. 세계적 화제작인 이 소설이 국내에서는 이해할 수 없게도 주요 일간지나 서평지의 주목을 전혀 받지 못했다. 그의 최근작으로는 3세기 로마제국 지배하의 발칸반도를 배경으로 한 동화 형식의 연애담 『어피 모자』(1996년). 역시 쎄르비아어로 집필한 다닐로 끼슈(Danilo Kis 89년 사망)도 부르노 슐츠, 카프카, 싱어, 코신스키의 계보에 연결되는 유태계 동구 작가로 서구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유고권의 대표적 현대작가로 꼽히고 있다.

언어문화적 구분으로는 슬라브권에 속하지 않지만, 알바니아 출신으로는 1990년 프랑스에 망명한 이스마일 까다레(Ismail Kadare 1936-)가 있다. 그는 최근 수년간 노벨상 최종후보 리스트에 빠지지 않고 오른다. 대표작 『죽은 군대의 장군』(1970)과『부서진 사월』(1982)이 한국어로 출판되어 있다. 사람들의 꿈을 모아서 분석하여 숨겨진 의미를 해독하는 정보기관을 그린 1990년의『꿈의 궁전』을 비롯하여 전후 알바니아 독재 체제를 비판한 우화적 소설들이 많다. 그에게는 안드리치, 꾸스뚜리짜, 드라큘라 전설을 연상시키는 발칸의 뿌리깊은 그로테스크적 상상력이 물씬 느껴진다.

이렇듯, 슬라브권 현대작가들은 자신의 개인적 일상과 이 일상의 틈새마다 가득차 있는, 20세기 그들이 겪어야 했던 사회역사적 경험을 작품 속에 자전적 요소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대의 자전적 요소와 함께, 과거 공동체의 신화·전설이 갖는 환상적 요소를 접목하여 독특한 자신들의 작품세계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도 최근 수 년간 불가리아, 우끄라이나, 리투아니아, 헝가리, 중앙 아시아(압하지아, 끼르기스)의 작품들도 적으나마 번역되어 이제 슬라브 및 동구문학의 고전을 포함한 다양한 작품이 빠른 속도로 소개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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