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히피드림~ > <펌>피카소와 결혼했던 7 명의 여인



※ 첫번째 연인-페르낭드 올리비에

피카소와 동갑이었던 그녀는
검붉은 머리에 키가 크고 균형잡힌 몸매를 가진 육감적인 여자였는데
항상 쾌활한 성격으로 피카소를 기쁘게 했다.
피카소는 페르낭드를 만나면서 청색시대를 마감하고
장밋빛 시대로 접어든다




※ 두번째 연인- 에바구엘

피부가 무척 하얗던 여인.
피카소는 구년에 걸친 페르낭드와 동거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그녀를 선택한다.
유달리 몸이 약했던 에바. 1차세계대전 이듬해인 1915년 12월 14일 이 젊은 여인은 결핵으로 죽는다.




※ 셋번째 연인- 올가 코클로바

<퍼레이드> 공연 때 만난 러시아 무용수,
피카소가 서른 여섯 살 때 처음으로 결혼을 한 여인이다.
올가는 서민적이고 편안한 것을 즐겼던 피카소와 달리 깔끔하고
상류사회적인 기질을 가졌다.
그녀는 피카소의 첫 아들 파울로를 낳는다.




※ 네번째 연인- 마리 테레즈 발터

피카소가 마흔다섯 살이 되던 해인 1927년 당시 열일곱 살의 건강하고 관능미 넘쳤던 소녀.
페르낭드와 에바, 올가가 갈색 머리카락을 가졌던 것과 달리 그녀는 금발이였다.
피카소의 두 번째 아이 딸 마야를 낳는다.
피카소에게 가장 창조적인 영감을 준 여성이었다고 전해진다,




※ 다섯번째 연인-도라 마알

친구인 폴 엘뤼아르의 소개로 만난 화가이며 사진작가.
피카소의 다섯 번째 연인인 도라는 지적이고 교양을 갖춘 여성으로
현대 미술에 열중했으며 특히,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 여섯번째 연인-프랑스와즈 질로

2차 세계대전 중에 만난 그녀는 아주 젊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류화가이다.
피카소가 예순세 살 때인 1945년부터 함께 살게 되는데 이 때, 그녀는 스무 살이었다.
완벽주의자이고 독점력이 강했던 프랑스와즈는 아들 클로드와 딸 팔로마를 낳는다.
피카소는 이 때 자신의 아이들을 소재로 해 매혹적이고도 생동감 넘치는 초상화들을 남겼다.
여기서 아이들은 때로는 어머니의 품에 안긴 모습으로,
때로는 자기들끼리 놀이에 빠져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 1953년,72세에 만난 자클린 로크

피카소의 마지막 연인이 된 그녀는 커다랗고 짙은 눈망울을 지닌 지중해 풍의 여인이다.
자클린은 1961년 피카소와 비밀 결혼식을 올린다.
후에 서른 살의 젊은 여인이 어떻게 곧 여든이 되는 사람과 결혼을 할 수 있느냐는 말에 그녀는 말한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년과 결혼했어요. 오히려 늙은 사람은 나였지요"
그녀는 피카소에게 헌신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바친다.
피카소가 죽고 난 며칠 뒤 그녀도 그를 따라 죽음을 선택한다.
 
 
 
 
 출처- 다음> 미디어 다음>세계엔(n)>월드 랭킹 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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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도스토예프스키 비판에 관하여

 

 

 

 

3년전에 '한겨레21'의 칼럼에서 러시아계 한국인 박노자 교수의 도스토예프스키 비판이 두 차례 실린 적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카페도 운영하고 있었던지라 그와 관련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 적은 생각들을 (그닥 달라진 바 없기에) 그대로 여기에 옮겨놓는다. 그리고 후반부엔 그때 다른 분이 퍼온 칼럼을 붙여놓는다. 그 글들은 <하얀 가면의 제국>(한겨레신문사, 2003)에 재수록돼 있다(나는 책을 갖고 있지만 다시 읽어보진 않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나라, 러시아'란 제목의 첫머리에.(사실, 그 글들의 초점은 도스토예프스키 자체라기보다는 러시아에 대한 한국인들의 스테레오타이프적인 선입관이 교정될 필요가 있다는 문제제기에 있다.)

기본적으로 나는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와 인간 도스토예프스키는 분리해서 고려해야 한다는 보는 입장이다. 인간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의 증언대로라면), '위대한 인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작가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는 위대하다. 그것이 차이이다. 박노자 교수는 대개 (잡지 발행인으로서도 활동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시론(時論)을 근거로 하여 그의 국수주의적이고 반동적인 태도를 비판하지만, 그것인 도스토예프스키의 전모를 대신할 수는 없다(한 작가의 세계관이나 정치관이 그의 문학의 크기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박노자 교수도 작가의 '위대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 '거인'의 명암을 올바로 보자고 제안할 뿐이다. 내게 그 명암이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러한 '결함'이 도스토예프스키를 더욱 신뢰하도록 만든다(나이브한 이들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을 지지하며, 그의 정치학이나 윤리학은 자신의 <작가일기> 등에서 공표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대심문관' 편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만 작가로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의 현실과 인간조건을 (단순하게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대단히 복잡하게 사고했다. 소설은 복잡성의 정신이라는 쿤데라의 주장에 따라 그것을 달리 '소설의 승리'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정치관에 대한 질문을 받고 쓴 답장입니다. 박노자 교수의 도스토예프스키 비판과 관련한 저의 견해이기도 하니까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정치와 별 상관이 없긴 하지만 좋아하는 작가인만큼 궁금하고, 또 박노자의 칼럼으로 더욱 궁금해졌거든요. 박노자의 말을 받아들인다 해도 그 과정이 이해가 되는것도 아니구요. 그와 같이 다층적인 성격을 가졌던 사람이 황제에게 충성한 보수파였다거나 평생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지요."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이 정치와 별 상관이 없다는 건 좀 편향된 의견입니다.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한 특징은 시류적인 문제들에 대한 작가의 의견이 강하게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투르게네프가 그러하고(그의 성격은 비사교적, 비정치적인데, 벨린스키와의 교우가 그를 사회소설 작가로 이끕니다. 하지만 그의 성격이 어디 가지는 않아서 대개의 소설이 페시미즘적인 결말을 갖고 있습니다), 고골과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러합니다. 톨스토이는 푸슈킨과 마찬가지로 좀 예외인데, 이들은 서구식 미학주의를 수용한 경우입니다. 즉 미는 진과 선의 영역과는 좀 다른 걸로 생각하는 것이죠.

-<안나 카레니나>를 쓴 이후의 톨스토이는 물론 자신의 그런 미학관을 포기/비판하고, '미=선'의 자리로 복귀합니다. 반면에 고골과 도스토예프스키는 <친구들과의 왕복서한>이나 <작가일기> 등과 같은 저널적인 글들에서 아주 노골적으로 국수적인 슬라브주의와 러시아 정교주의를 지지하고 옹호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왈, "인간(유럽인들)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먼저 러시아인이 되어야 한다."(*고골의 <친구들과의 왕복서한>은 근간 예정이고, 도스토에프스키의 <작가의 일기>(벽호, 1995)는 발췌역으로 나왔었는데 현재는 절판됐다.) 

"하지만 그의 타민족에 대한 관점은 상당히 편벽되고 유치한 수준이니(폴란드, 독일, 동양에 대한 경멸, 프랑스에 대한 선망과 멸시 등등. 러시아에 대한 자학적인 비판도 만만치 않지만), 그에겐 사회적인 시각에 대한 균형이 결여되어 있었다고도 볼 수 있을까요?"

-적어도 인간 도스토예프스키의 경우(저는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와 인간 도스토예프스키가 좀 구별된다고 봅니다)는 유치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건 그의 전기들에 묘사되고 있는 기묘한 성벽들을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회적 시각에 대한 균형의 결여'는 좀더 탐구해야 하는 주제인데, 가령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와 나치즘의 관계가 도스토예프스키의 경우와 유사하지 않을까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어떻게 그처럼 위대한 철학자가 국수적 민족주의(나치즘)에 동조할 수 있었을까? 그건 어떤 '실수'가 아니라 그의 사상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어떤 성향의 발로로 보는 것이 최근의 시각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경우도 비슷하지 않을까요?(이 문제는 좀더 세밀한 논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인지 도스토예프스키 특유의 '혼의 리얼리즘'은 곧바로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비약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에게 <죄와 벌>은 황당한 작품이었지요. <죄와 벌>을 읽은때가 몇 년 전인데, 그때는 라스콜리니코프가 자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훨씬 자연스러웠거든요. 그렇게 치밀하고 논리적으로 파격을 행했던 사람이 갑자기 회심을 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때 느낀대로 하자면 '자존심도 없는' 결말이었지요. 자기를 그렇게 솔직하게 드러내는 작가인데도 도스토예프스키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인물입니다."

 

 

 

 

-<죄와 벌>에 관한 건 좋은 지적이십니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논란이 되는 문제이구요. 라스콜리니코프의 '회심'은 정확히는 에필로그에서 이루어집니다.(이 주제에 관해서는 르네 지라르의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김현 편, <르네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에 부록으로 실려 있습니다.) 따라서 이 에필로그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비판적인 의견이 있었고, 저도 그러한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 적어도 소설의 본문에서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서 회심이 계기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죠(그러면 에필로그의 회심은 좀 억지스러운 것이 될 터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페테르부르크라는 폐쇄적(악마적) 공간에서 그러한 회심이 가능하지 않게 묘사한 것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볼 수도 있습니다.

 

 

 

 

-(독백적인!) 시사적인 글들 속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의 이문열이나 조갑제 스타일의 인물처럼 보입니다.(이문열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아주 좋아합니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사정이 좀 다르다고 봅니다. 바흐친이 다성악적 소설이라고 했지만, 거기엔 작가의 이념적 목소리는 결코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이 (도스토예프스키적) 소설의 승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의 소설들에선 어떠한 문제도 단순하게 처리되고 있지 않습니다. 비판의 표적이 되고 있는 <악령>만 하더라도 단순한 (소설이 아닌) 정치 팜플렛을 의도했지만, '소설'로 확장된 <악령>은 거대한 형이상학적 심연이 되고 맙니다. 그것을 단순한 정치적 주장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좀 무리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의 소설들은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를 뛰어넘고 있다고나 할까요(이 점이 도스토예프스키와 이문열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박노자의 세계와 한국] 2002년08월13일 제422호

거인 도스토예프스키의 명암

-그의 끔찍한 군사주의·배타주의 사상은 빨갱이 딱지를 떼기 위한 노력이었나

1877년 말, 러시아와 터키의 전쟁이 막바지를 향할 무렵이다. 우세한 무기를 갖고 있는 러시아 군대는 터키의 수도인 이스탄불(비잔틴 제국 시절의 옛 이름은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할 정도로 확실한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서구의 금융자본에 의한 착취, 러시아의 끊임없는 남하, 근대화 부진으로 ‘유럽의 병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약해진 터키 제국은, 발칸 지역에 대한 패권을 러시아에 넘겨주는 셈이 되었다.

-독일인과 손잡고 프랑스를 박살내자?

30여년 뒤에 바로 발칸의 패권 문제가 발단이 되어 러시아 제국을 무너뜨릴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질 줄 알 리 없는 러시아의 보수적 지식인들은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이라는 이슬람식 명칭을 그들은 외면한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토론하고 있다. ‘러시아 문명론’을 내놓은 당대 우파의 유명 논객 다닐레프스키(N.Y.Danilevsky)는, 콘스탄티노플을 “러시아를 위시한 모든 동방민족을 위한 자유 도시로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당시의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꽤 관대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서구에 대한 멸시와 러시아의 ‘영성’에 대한 거의 광적인 집착에서 다닐레브스키보다 한수 위인 우파의 저명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1821∼81)는 “그 따위 비열한 타협”이라며 단호하게 반대한다:

“러시아인과 기타 슬라브 민족들이 서로 비교라도 될 만한가? 러시아는 기타 슬라브의 각 민족보다 위대하고, 모든 민족들을 하나로 묶어도 그들보다 위대하다. 거인이 난쟁이들 보고 평등을 설교해봤자 쓸데없는 일 아닌가? 우리가 점령한 콘스탄티노플은 영원히 우리만의 도시로 남아야 하고, 콘스탄티노플과 인근 지역, 그리고 흑해와 지중해 사이의 해협을 지키기 위해 육·해군을 주둔해야 한다”(<작가의 일기>,1877년 11월)

이 정도면, 도스토예프스키를 ‘도덕성의 절대성과 인간의 심층적인 심리를 매우 깊숙이 아는 작가’로만 알고 있는 한국의 일반 독자는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무고한 생명을 살해한 일은 절대로 선(善)이 될 수 없다”는 이념을 기조로 전 세계의 독자를 매료시킨 <죄와 벌>을 쓴 사람이, 콘스탄티노플을 ‘우리 도시’로 만들기 위해 어느 정도로 많은 무고한 생명들이 죽어야 하는지는 몰랐던 것일까? 위대한 인본주의자로 알려진 사람이 폭력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일에 왜 그토록 열중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1인 잡지인 <작가의 일기>를 읽으면, 더 큰 수수께끼에 맞닥뜨린다. 왜냐하면 그 다음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짐승 같은’ 터키인들을 쫓아낸 뒤에 “사회주의의 모태가 된 프랑스를 독일인과 함께 손잡아 박살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늘어놓기 때문이다. 즉 권위주의적인 독일 제국과 함께 사회주의를 허용할 만큼 ‘타락한’ 민주적 프랑스를 멸망시키는 것이 러시아의 ‘민족적 사명’이라는 이야기다. 그 과정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슬람 짐승들과 적그리스도인 사회주의를 예수의 이름으로 이기는 성전(聖戰)”이라고 부른다.

-끈질긴 ‘훈육주의’경향

작품 속에서는 ‘생명 존중’을 그토록 강조한 도스토예프스키가, 왜 자신의 사회 참여적인 잡지에서 이처럼 끔찍한 군사주의적·배타주의적 언어를 썼을까? 일설에 따르면 자신의 농노를 학대하다가 살해당한 가혹하고 속물적인 아버지를 두었고, 군사기술자학교(일종의 사관학교)에서 온갖 집단 괴롭히기를 목격·체험한 도스토예프스키는, 젊었을 때부터 악(惡)의 문제에 대해 매서운 성찰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1840년대)에 그는 초기 사회주의적 성향의 혁명가와 어울려 개혁·혁명을 통한 악의 제거와 인간·사회의 개선을 꾀했다.

그러나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젊은 도스토예프스키의 구도(求道)를, 제정 러시아 정권은 가혹하게 차단해버렸다. 갑작스러운 체포(1849년)와 사형 선고, 총살 현장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영원한 듯한 수십분, 그리고 마지막 순간의 감형(사실 ‘훈육을 위한 연극’이었다.). 그 뒤 4년간 시베리아 감옥살이를 하고 졸병으로 오지에서 4년간 복무한 그에게는 ‘사상범 전과자’라는 빨갱이 딱지가 붙었다. 혁명적 신념이 강한 사람이라면 그러한 상황에서 망명을 하거나 혁명에 투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베리아에서 사회주의를 포기한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때부터 정반대 길을 가기로 한다. 그는 자신의 ‘불온한’ 과거를 애써 부정하고 오히려 반사회주의운동의 선봉에 서는 특별한 ‘충성’을 보인다. 특히 귀족계·황실과 관계가 가까워진 1870년대 후반에 그는 ‘빨갱이 딱지를 떼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일제 시대의 많은 전향자들처럼 러시아 제국의 국체(國體)인 정교회 신앙과 관제 민족주의로 돌아온 전향자 도스토예프스키는 ‘국체 명징(明徵)’- 즉 어용적 이념의 강조·선포- 에 남다른 공을 들였다.

‘전향’ 이후에도 그의 평생 화두인 ‘악의 문제’에 대한 고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고민의 형태는 완전히 바뀌었다. 악을 가능하게 하는 환경을 ‘단순한 표피’로 규정한 채 도스토예프스키는 ‘영혼 속의 악의 본질’에 대한 탐구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종교적 색채가 강한 이러한 탐구는 종교를 명분으로 내거는 제정 러시아 사회에서 환영할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영혼 속에 악한 본질이 내재돼 있다는, 성악설(性惡說)적인 면모가 짙은 그의 결론은 러시아 국교인 정교회의 교리보다는 고대·중세의 신비주의적 이단인 그노시스교(Gnosticism·靈知敎)에 더 가깝기도 했다. 자신의 ‘온건함’을 입증하려는 욕망에 불탄 도스토예프스키는 교회와 국가의 역할을 더 강조했다. 러시아 진보진영으로부터 오랫동안 비웃음을 받아온 최초의 ‘반사회주의적 소설’ 가운데 하나인 <악령>을 쓴 1870년대의 도스토예프스키는, 교회와 국가가 없는 한 인간의 악한 본질이 그대로 드러나 사회가 생지옥이 될 것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 ‘기독교적 국가’의 광신도였다.

“하나님이 없는 한 모든 것들이 다 허용돼 있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명언은, “하나님의 신앙을 강요·훈육하는 교회와 국가가 없으면 모든 악이 허용돼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작가의 일기>에서 체벌과 범죄에 대한 엄벌을 옹호한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끈질긴 훈육주의적 경향과 연결지어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악을 억제해주는’ 국가와 교회를 비판하는 사회주의자들은 물론 제1호 적이었다. 19세기 초반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책을 읽었을 뿐, 그 외의 진보운동 관련 소식을 보수적 신문을 통해서만 읽은 도스토예프스키는, 모든 사회주의자들을 ‘억제를 받지 못해 악한 본질이 발전된 적그리스도형 인간’으로 취급했다. 노동자들이 빼앗긴 여유의 자유, 경영 참여와 정치 참여의 자유를 노동자에게 돌려주려는 것이 사회주의의 취지였다는 것은, 사회주의를 배태한 유럽의 문화토양을 매우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는 도스토예프스키로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작가로서의 위대성을 바로보기 위하여

그는 사회주의를 배태한 유럽- 특히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강한 프랑스- 의 자유주의마저도, ‘하나님의 은근한 부정’으로 규정해 저주하기에 이르렀다. 기독교 문화권인 유럽에 대한 인식이 그 정도였으면 러시아 제국의 경쟁자인 터키 같은 비유럽 국가에 대한 그의 생각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결국 ‘인간의 악한 본질을 억제하는 구세(救世)의 위업(偉業)’으로서 가장 ‘건전한’- 즉 보수적이며 권위주의적인- 러시아와 독일의 세계 제패는 그의 열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위에서 언급한 <작가의 일기> 1877년 11월호에서 러시아 육·해군에 대한 애착과 관심의 비결은 바로 이 같은 세계관과 욕망의 구조였다.

이념가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가 광적인 수구주의로 기울어졌다고 해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천재성을 간과할 수는 없다. 천부적 재능에 고생과 고민으로 점철된 그의 인생은 그를 위대한 작가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소설의 저변에 흐르는 인간에 대한 불신과 ‘외부로부터의 훈육’에 대한 기대 심리, 국가 권력에 대한 거의 맹목적 시각 등을 바로 이해해야 그의 작가로서의 위대성도 바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거인의 명암을 다 아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거인에 대한 존중이 아닌가 싶다.

-이 글은 410호에(아래 참조) 실린 ‘도스토예프스키를 선망한다고?’를 읽은 독자들이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내용을 요청해 쓴 것입니다. 편집자 
[ 박노자의 세계와 한국] 2002년05월22일 제410호

도스토예프스키를 선망한다고?

-한국과 러시아, ‘서구인들이 강요한 색안경’을 벗고 서로의 진실을 아는 길

88올림픽 때 미국과 축구 경기를 벌인 옛 소련팀이 한국 관중의 응원을 받아 미국인의 질투를 산 획기적인 사건이 어언 15년이 지났다. 두 나라의 관계가 그동안 온갖 기복을 거듭했지만, 민간교류는 꾸준히 증가해왔다. 한국 유학생들이 러시아 대학의 외국 학생의 주종을 이루고, 러시아 출신의 노동자·기술자·상인·프로그래머 수천명이 한국의 곳곳에 흩어져 있는 현재, 두 나라의 민간인들은 더 이상 서로에게 생소하지 않다. 그러면 그들은 이미 낯익은 서로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가? 어떤 스테레오타이프(고정관념)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가? 한·러 교류의 발전을 지켜봐온 필자는 이에 대해 간단한 인상을 적어보겠다.

-사실과 허위의식의 비율

한국과의 교류에 관여하는 러시아인 쪽의 ‘눈’을 이야기하면, 맨 처음 느끼는 것은 한국의 과거나 역사·문화에 대한 무지다. 한국학(내지 인접 학문)을 직업으로 하는 극소수를 제외한다면, 대다수의 한국 인식 수준은 서구인의 평균과 다르지 않다. 무지의 원인인 자국(自國)과 서구·미국 중심의 편향된 오리엔탈리즘적 학교 교육과 매체의 보도를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지만, 러시아에서 살고 있는 한인 교포나 러시아와 한국의 해방운동의 역사적인 관계를 생각하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흥미로운 것은 그나마 영문 자료라도 읽어가면서 ‘한국 공부’를 조금씩 하려고 하는 재한 프로그래머나 교수 등과 달리, 한국과 업무상 관련이 있는 고급 관료들은 그러한 노력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몇해 전 협상에서 통역을 맡은 부장관급의 러시아 관료와 사석에서 나눈 대화가 지금도 기억난다. 한국의 경제발전으로 화제를 돌리자, 원래 직업이 교육자(!)인 부장관이 마치 상식적인 사실을 이야기하듯 “100년 전에는 동굴에서나 살던 한국 사람들을 고층 아파트에서 살게 한 것이 미국의 원조지 딴 요인이 있나”와 같은 말을 거듭 했다. 주변부 국가의 매판형 지배층다운 그런 관료들의 숭미(崇美)의 병과 한심한 무지는 두 나라 관계에서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기 쉽다. 러시아를 독일 중심의 유럽에 예속시키려는 푸틴 정권의 종속적 노선은, 고질화된 오리엔탈리즘의 병폐를 고치기는커녕 오히려 심화시킨 셈이다.

러시아를 보는 한국인들의 눈은 과연 얼마나 다를까? 러시아에서 오랫동안 머물고 있는 한국인들의 러시아어나 문화에 대한 학습 열의는, 주한 러시아인의 한국에 대한 관심도보다 더 높다는 것도 필자가 많이 본 일이다. ‘학이시습’(學而時習)을 이상시한 조상의 문화정신에 감사해야 하는지, 아니면 주러 서구인들이 주한 서구인들보다 주재 국가의 문화에 대한 관심도가 높다는 사실과 연결시켜야 되는지는 모르겠다. 문제는, 한국인들이 알고 있는 러시아에 관한 상식에서, 사실과 서구·미국의 프로파간다에 의한 허위의식의 비율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제정 러시아 관료층의 위선과 아첨, 철저한 인간성의 말살을 천재적으로 풍자한 살티코프-시체드린(Saltykov-Shchedrin)보다 관료층의 상부와 밀접하게 유착한 골수 보수주의자 도스토예프스키를 ‘대표적인 지성인’으로 꼽는다는 것은, 미국·서구 보수층의 ‘가치 서열’을 그대로 따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적인 인간의 해방을 갈망한 미래 지향적인 스크랴빈(A.Skryabin)의 음악보다 보수적인 차이코프스키를 선호하는 것도, 서구의 ‘정전’(正典·canon)을 추종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한 마디로 ‘평균적인’ 한국인이 러시아에 대해 덜 무지하지만, 러시아를 ‘서구인의 러시아관(觀)’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경향은 마찬가지다.

-상인과 노동자의 판이하게 다른 만족도

두 나라를 오가는 사람들의 서로에 대한 만족도는 어떤가? 필자의 관측으로 체감적인 만족도는 객관적인 현실뿐 아니라 주관적인 기대의 수준에도 많이 달려 있다. 물론 기대의 주체인 여행자의 사회·경제적인 신분도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면 한국의 공산품을 사러 다니는 러시아의 상인(‘보따리꾼’이라고 하지만, 그 규모는 ‘보따리’의 수준을 넘는다)들은, 한국을 ‘바이어’가 장사를 편하게 할 수 있는 세계적 규모의 ‘무역 대국’이라는 기대를 안고 온다. 필자가 지켜본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기대는 충족됐다. 기대 이상의 상운(商運)을 만난 일도 많았다. 한국을 늘 만족해하는 한 상인이 필자에게 “한국은 실제로 기적의 나라야! 아니, 재고에 없는 물건마저도 주문하기만 하면 1주 내로 이렇게 많이 만들다니, 라인을 어쩜 이렇게까지 돌릴 수 있어?”라고 묻곤 했다. 외국인 노동자와 한국인 비정규직들이 하루에 10∼12시간씩 고함소리를 들으며 사람을 기절시킬 만한 속도로 일한 그 공장의 라인이 돌아가는 모습을 상인이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한국에 노동(특히 미등록 막노동)을 하러 오는 러시아 출신들이 한국을 ‘착취와 폭력의 대국’으로 본다는 사실이 과연 이상한 것일까? 그들의 실망의 정도를 이해하려면, 한국의경제 기적과 근대화를 찬양하는 주류 신문 외에 한국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접하지 못한 그들은 한국의 ‘합리적인 노무 관리’(?)에 큰 기대를 걸고 온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한국에 대한 러시아인의 만족도는 한마디로 한국 근대의 어느 측면을 접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수출 능력으로 득을 얻는 사람의 ‘한국’과, 그 수출 능력을 뒷받침해주는 착취공장에 건강과 인권, 생명까지도 바쳐야 하는 사람의 ‘한국’을 보는 눈은 천양지차다.

한국의 근대성에 큰 기대를 걸고 오는 러시아인과 달리, 러시아로 가는 한국인들은 역시 서구·미국의 매체를 따르는 한국 매체의 보도대로 ‘위험한 후진국’으로 가는 줄로 알고 경계심·체념의 태도를 미리 준비한다. 그들이 실제로 부정적인 경험(경찰관의 돈 갈취나 폭력·사기·범죄)을 할 때마다, 실망보다는 “역시 생각대로구나!”를 반복한다. 처음의 상상조차 뛰어넘을 만한 정도의 부정적인 경험만 아니면, 러시아에서 체류하는 한인은 쉽게 분노를 터뜨리지 않는다. 경찰이 이유 없이 돈을 요구해도, 학교 당국이 노골적인 전횡을 저질러도, 행정 관료들이 뇌물 갈취에 혈안이 돼도, 재러 한인의 대다수는 “후진국은 다 그렇지”라고 하며 그대로 따른다.

현재 러시아 관료들의 저질성에 대해서는 필자도 의심하지 않는다. 문제는 ‘돈 먹는 하마’인 러시아의 관료 체제에 돈을 계속 먹인다고 해서 선진화의 날이 오겠는가? 서로의 앞날을 위해서라면 러시아의 발전을 막는 관료 기구들에게 오히려 당당한 모습으로 맞서는 것이 낫지 않을까?

-'제정 러시아’흠모와 ‘소련’혐오

스테레오타이프를 이야기하자면, 역시 서구적인 오리엔탈리즘 식으로 한국인들을 ‘동양인’으로 여겨서 역대 극우정권이 악질화·고질화한 온갖 봉건적인 폐습들을 ‘동양 문화의 유산’으로 오해하는 러시아인들의 태도부터 꼬집어야 한다. 즉 주한 서구인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러시아인들도 학교 체벌을, 동양 사회에서 동양인의 사고방식이나 체질상 없어서는 안 될 문화 형태로 보고 있다. 제정 러시아에서도 만연한 체벌들을 레닌의 초기 공산당 정부가 전면 폐지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물론 주머니 사정이 허락한다면 주한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의 귀한 ‘서양 아이들’을 외국인 학교로 보내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군번·학번을 숭배하는 권위주의 사회가 낳은 연령 차별주의나 연소자 하대를, ‘동양 사회에서 당연한 일’로 취급하여 본인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한 분통을 터뜨리지 않는다. 많은 한국인들의 스테레오타이프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으로, 서구·미국의 보수주의자들에게서 배운 듯한 제정 러시아의 ‘고급 문화’에 대한 흠모와, 옛 소련 시기를 ‘기형’으로 보는 태도를 꼽을 수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로마노프 왕가의 왕궁(겨울 궁전)의 사치 앞에서 넋을 잃는 한국 관광객들을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지만, 70%의 문맹률과 흉년마다 아사자 몇십만명씩을 낸 제정 러시아를 흠모하는 것은 고혈을 빼앗긴 백성에 대한 모독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너무나 많은 면에서 서로 닮은 한국과 러시아는 지금 서구인들이 강요한 ‘색안경’을 끼고 서로를 쳐다보는 셈이다. 주한 러시아인들이 갖고 있는 ‘한강의 기적’, ‘무역의 대국’, ‘유교적인 규율과 서열의 나라’의 이미지도, 러시아를 접촉하는 많은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도스토예프스키와 차이코프스키의 찬란한 고향, 공산주의 때문에 후진국이 된 나라’라는 생각도, 결국 냉전시대의 미국·서구의 보수 언론·학계가 만들어낸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스테레오타이프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 상대 나라 민중의 고생과 투쟁의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길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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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드림~ 2005-11-13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읽는데 시간 많이 걸렸어요.^^;; 그래도 잘 읽었습니다.

urblue 2005-11-13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는데 시간 많이 걸렸어요. ^^;
로쟈님 글은 전문적이면서도 재미있지요.
 
 전출처 : 로쟈 > "요즘 시 어떻습니까?"

오늘자 한국일보 문화란에 '요즘 시'의 경향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오늘이 '시의 날'인 걸 기념해서인 듯한데, 며느리도 모를 법한 이 날의 유래는 이렇다고: "11월1일은 제19회 '시의 날'이다. '시의 날'은 우리나라 현대시의 효시로 알려진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1908년 11월 잡지 '소년' 창간호에 실린 것을 기념해 1986년 제정됐다." 1986년이면 전두환 정권하이다. 5공 때 이어령 선생이 문화부 장관을 한 적도 있으니 그 분 아이디어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딱 이어령표 마인드의 산물 같다. 어쨌거나, 그런 날이 벌써 19번째이건만, 무슨 행사를 벌인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시시한 날인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저런 기념일을 챙기는 건 문화부 기자의 본분에 충실해 보이며, 덕분에 나는 아침부터 '요즘 시'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연예인들만한 사이즈로 지면에 오른 요즘 시인들의 면면들을 구경해볼 수 있었다. 혹 기사를 지나쳐버린 분들을 위해서 내용을 정리하고, 생각할 거리를 챙겨두도록 한다.

"일군의 젊은 시인들에 의해 시도되고 있는 우리 시의 새로운 경향을 짚"고자 하는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요즘 시(詩)가 어려워졌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시인 평론가들조차 불편함을 토로할 정도다. 한 두 사람 한 두 편의 돌출적인 현상이 아니라, 최근 등단했거나 한 두 권의 시집을 낸 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뚜렷한 경향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 경향을 다른 말로는 '엽기시'라고 한다.

 

 

 

 

얼마전 미당문학상 수상작이 발표되었는데, 수상자는 작년에도 시인들이 뽑은 최고작을 쓴 바 있는 문태준 시인이며 수상작은 <누가 울고 간다>이다. 짧은 시이므로 옮겨본다.  

밤새 잘그랑거리다/ 눈이 그쳤다

나는 외따롭고/ 생각은 머츰하다

넝쿨에/ 작은 새/ 가슴이 붉은 새
와서 운다/ 와서 울고 간다

이름도 못 불러본 사이
울고/ 갈 것은 무엇인가

울음은/ 빛처럼

문풍지로 들어온/ 겨울빛처럼
여리고 여려

누가/ 내 귀에서
그 소릴 꺼내 펴나

저렇게/ 울고
떠난 사람이 있었다

가슴속으로/ 붉게/ 번지고 스며
이제는/ 누구도 끄집어낼 수 없는

특별히 덧붙일 것도 뺄 것도 없는 소품인데, 사실 이런 정서와 리듬감, 시상 전개 등이 한국 서정시의 주류를 형성해왔다(문태준 이전에는 장석남이 있었다). 기형도 이후에, 혹은 장정일, 유하 이후에 여전히 이러한 시가 씌어지는 것은 어찌보면 '퇴행'이면서도 '관례'이다. 유구한. 그리고 그런 시인과 시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건 당연해 보인다. 2000년도 이후에 나는 시도 쓰지 않고 읽는 것도 게을리 하고 있지만(나는 시에 대한 '기대'를 거의 접었다) 요즘 동태를 보아하니 그 사이에 꽤 특이한 젊은 시인들이 여럿 등장한 모양이다. 세태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문학적 성감을 찾아나선 이들의 이름은 김행숙 황병승 김민정 김근 김언 이민하 김이듬 등이다. 기사에는 8명의 시인들이 8인방처럼 거명돼 있는데, 요약하면 1:8이요, '문태준과 아이들' 혹은 '문태준과 엽기들'이다. 이들을 차례로 호명해보자.

 

 

 

 

 

 

 

 

 

 

모두가 올해 데뷔시집이나 새시집을 낸 젊은 시인들이다. 김이듬, <별모양의 얼룩>(천년의시작, 2005); 진수미, <달의 코르크마개가 열릴 때까지>(문학동네, 2005); 김근, <뱀소년의 외출>(문학동네, 2005); 김언, <거인>(랜덤하우스중앙, 2005); 이민하, <환상수족>(열림원, 2005); 김민정,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열림원, 2005); 황병승, <여장남자 시코쿠>(랜덤하우스중앙, 2005); 김행숙, <사춘기>(문학과지성사, 2005)

(평론가 이장욱에 의하면) '외계어'로 시를 쓰는 이들은 (평론가 권혁웅에 의하면) 우리 시단의 '미래파'이다. 물론 이들이 떼로 몰려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외계인들끼리는 소통가능한가?) 하여간에 앞에서 인용한 문태준류의 시와는 달리 알아먹을 수 없다는 것이 이들 시의 특징이고 특장이다. 기자도 이 점을 표나게 지적하고 있다: "그 변화의 선두에 김행숙(35) 시인의 비교적 짧은 시 ‘달무리’를 보자. “그의 진동이 그에게 후광을 만든다. 그가 문둥이같이 뭉개질 때/ 배는 출렁이고 있었다. 내가 깔고 누운 파랑은 나를 통과한 그의 뒤편일까? (중략) 그의 뭉개진 코가 킁킁대며 누구니? 누구니? 묻고, 다시 물을 때// 아으, 부풀어 오르는 한 그루 버드나무.” 그의 시는 이성적 사고체계로 스며들지 않는다. 오히려 무의식과 느낌, 환상ㆍ분열적 내면 풍경에 철저히 기대고 있는 듯하다. 전통 서정시의 독법에 따라 어떤 의미나 이미지를 포착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고 무모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사실 알아먹을 수 없는 시가 문학사에 새로운 건 아니다. 이미 1930년대의 이상이 '욕먹는' 시 <오감도>를 썼다. 1950년대에는 '초현실주의 시'를 쓴 조향 시인 같은 분도 있었고(<조향 전집>(열음사, 1994)),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시나 이승훈 시인의 비대상 시들도 다 낯선 시들이었다. 그렇다고 이성복과 황지우의 시는 주류적인 시였나?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요즘의 '엽기시' 경향에 대해 특별히 호들갑을 떨 이유는 없어 보인다. 다만, 최근의 나온 시집들이 주된 경향을 이루면서 하나의 '트렌드'를 형성하고 있다는 게 눈에 띌 뿐. 더불어, 현란한 이미지들이나 수사의 국적, 계보, 혹은 전통을 종잡을 수 없다는 게 이채로울 뿐. 해서 새로운 시 독법이 필요하다? 

"이들 시의 메커니즘은 다양하다. 빛이나 공기 입자의 산란처럼 어지럽게 좌충우돌하는 사유의 혼종성, 세계와 자아의 대립과 반영을 넘어 자아분열적이기까지 한 현란한 이미지, 성적ㆍ관능적 환상과 잔혹하고 그로테스크한 상징 등…. 이성과 관념 이전의 원초적 시어들이 은닉하고 있는 ‘무엇’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 독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 김행숙 시인은 문학적 감성의 변화를 말한다. “어떤 시는 시인/평론가보다 시를 잘 알지 못하는 일반 독자들이 오히려 뜨겁게 반응합니다. 폭 넓게 소통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좁은 대신 깊이 소통하는 층이 분명히 있어요.” 그는 그것을 생물학적 세대차이라기 보다는 차별화한 문화체험에서 비롯된 문화적 세대차이일 것이라고 말했다."(강조는 나의 것) 참고로 기자가 나열하고 있는 찬반론은 이렇다. 

이들 시에 대한 비판도 있다.

-문학의 본령이 문자언어를 통한 소통이다. 암호에 가까운 자의적 기호와 자폐적 무의식의 흔적들이 어떻게 문학인지 모르겠다.

-환상이 없는 문학은 없다. 두보의 시에도, 카프카의 글에도 환상은 있다. 하지만 이들의 시는 삶의 리얼리티를 상실한 채 머리(환상) 속에서 떠오른 느낌들을 시적 긴장 없이 풀어놓은 것 같다.

-하나 하나의 작품을 놓고 보면 참신하지만 모아놓고 보면 시를 형성하는 문법이나 문장을 엮는 방법 등이 흡사하다. 일종의 유행 같다는 생각이다.

그에 대한 반론이다.

-나는 말쑥하고 균형 잡힌 시를 혐오한다. 안정감 있고 깨달은 자는 침묵하면 좋겠다. … 나는 내가 쓴 시에 관해서 말하기가 뭐하다. 낯설고 잘 모르겠고, 몰라서 쓴다.… ‘노력’해야 한다면 그때는 안녕.(김이듬, ‘시와 반시’여름호-현대시와 퇴폐)

-시단에서 유일하게 죄악인 것이 있다면 바로 다양한 꼴을 못 보아주는 태도이다. 시적으로 봐도 그렇고 생물학적 측면에서도 굉장히 위험한 태도다.… 자신 안에 스스로 잡종의 비율을 높여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김언, ‘웹진 문장’ 10월호-우리 시의 다양성과 새로움)

-아름다움은 움직이는 거다. …최근 시들을 비판하는 이들이 논거로 삼은 자리는 절대로,항구적인 진리의 자리가 아니다. 차라리 최근 시들이 진리로 간주되어온 그 자리를 비판의 대상으로 겨누고 있다고 말해야 옳다. (권혁웅 비평집 ‘미래파’-2005년 젊은 시인들)

긍정적인/전향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경향을 바라보는 세 평자의 의견:

-황현산(고려대 불문) 교수는 “한국 현대시단의 양대 흐름을 형성했던 농경사회적 정서와 도시적 정서의 굳은 틈을 비집고 서울의 하위정서 혹은 지방도시적 정서들이 새로운 경향을 형성하는 듯하다”며 “하기에 따라서는 향후 2~3년 내에 우리 시단의 지형도가 바뀔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통의 문제와 관련, 그는 “승리한 자의 말은 상식에 근거하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소통되지만, 억압 받는 자는 말 한 마디 하기도 힘들고 하더라도 타박 당하기 일쑤”라며 “하지만 그 말은 우리가 반드시 소통해야 할 말“이라고 말했다.

-2003년 김행숙씨의 첫 시집 ‘사춘기’(문학과지성사)의 해설에 이장욱(시인ㆍ소설가ㆍ평론가)씨는 “우리가 도달해가는 현대시의 어떤 징후”라는 조심스러운 표현을 쓴 바 있다. 이제 그 징후는 좋든 싫든 하나의 도도한 경향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최근 젊은 시인들의 경향이 우리 현대시의 다양성을 확장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지배적 경향을 형성할 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최근 낸 비평집에서 이들 젊은 시인들의 경향을 ‘미래파’라 명명한 권혁웅(시인ㆍ평론가)씨는 “60년대의 김수영, 80년대의 이성복이 당대 시단에 충격을 준 것처럼, 이들 시가 낯설고 불편한 것은 새로운 미학과 세계관을 한 발 앞서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라 했다. “먼 훗날, 이들의 작품이 낡았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날이 분명히 올 것이다. 다르게 말해서 이들의 작품이 가까운 미래에 우리 시의 분명한 대안이라는 것을 인정할 날이 올 것이다.”(‘미래파’ 171쪽)

이어서 기자는 두 편의 시를 예시하고 있다. 나의 독후감으론 황병승과 진수미의 예시된 시는 종류가 좀 다르다. 그것은 시가 그 독법에 있어서 어느 만큼의 논리를 허용하는가, 혹은 어떤 종류의 논리를 요구하는가에 달려 있다. 더불어, 시의 난해성이 시적 주체의 개성과 연관되는 것인지, 아니면 개별성 이전의 전주체성(presubjectivity)과 연관된 것인지 구별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요즘 시'를 한번 읽어보시라. 그리고 해독/해석해 보시라. 나의 생각은 조만간 다른 자리에서 정리해두도록 하겠다.

▲ 커밍아웃 / 황병승

나의 진짜는 뒤통순가 봐요
당신은 나의 뒤에서 보다 진실해지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얼굴을 맨바닥에 갈아버리고
뒤로 걸을까 봐요

나의 또 다른 진짜는 항문이에요
그러나 당신은 나의 항문이 도무지 혐오스럽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입술을 뜯어버리고
아껴줘요, 하며 뻐끔뻐끔 항문으로 말할까 봐요

부끄러워요 저처럼 부끄러운 동물을
호주머니 속에 서랍 깊숙이
당신도 잔뜩 가지고 있지요

부끄러운 게 싫어서 부끄러울 때마다
당신은 엽서를 썼다 지웠다
손목을 끊었다 붙였다

백년 전에 죽은 할아버지도 됐다가 고모할머니도 됐다가…

부끄러워요? 악수해요

당신의 손은 당신이 찢어버린 첫 페이지 속에 있어요

▲ 그러다가 어느 날 / 진수미

유방은 부풀어오른다 터질 듯이 고요한 프로펠러
갈증을 느낀 비행선이 그림자를 몰고 나타난다.
보라색 태양일랑 내가 오려냈다오.

승냥이들이 거품 무는 파도가 쫓아오고
내장 없는 배의 항로를 걱정하는
어머니, 이 배에 앓는 항구가 누워 있어요.

사랑스런 임차인들아,
나는 그들에게 돌려줄 것이 있다오.

당신의 장기를 물어뜯는 거리의 개들
적선은 더 큰 바람을 부를 거예요.

소유를 짤랑이는 열쇠와 함께
집달리들이 득달같이 들이닥친다.
그들은 신부의 의상을 하고 있어요.

냉장고는 머리가 깨져 시큼한 국물을 지리는데
벌레들이 바람의 커튼을 흔들며 날아올라요.

뒤엉킨 서랍의
껍질 벗고 교미하는 실뱀 한 꾸러미,
그들은 신부의 의상을 하고 있어요.

05. 1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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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dan 2005-11-01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론가 이장욱이라 하면, 혹시 [내 잠속의 모래산]이라는 시집을 낸 그 시인인가요?
좋아하는 시집인데.
물어보면 답해주실수 있을려나. 문학적인 얼블루님.

urblue 2005-11-01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시랑 평론이랑 다 안 친합니다. 결국 안 문학적인거였어요. 흑.
 
 전출처 : merced > 캘리포니아

어느 미국인이 그랬다. 미국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뉴욕시, 캘리포니아주, 그리고 나머지 진짜 미국. --아하!

뉴욕은 그러니까, 미국적이라기보다는 세계 속에 따로 떼어놓고 싱가포르처럼 한 나라라도 해도 좋을 만큼, 뉴욕적이라 해야 할까 그런 독특함이 있다. (뉴욕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자.) 캘리포니아는 <심슨 가족>과 더불어, 가장 미국적이면서 또한 가장 미국적이지 않다. 무슨 말인가 하면...

가장 미국적인

미국은 이민으로 만들어진 나라이다. 다인종 국가로서 인종차별 폐지-평등한 인권을 표면에 내세우지만 여전히 백인 중심적이고 glass ceiling (여성과 유색인종이 승진 또는 권력의 사다리에서 올라갈 수 있는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백인 사회에 잘 어울린 것 같지만, 어느 순간 머리 위로 텅 부딪히는 최고강도 유리천장)은 절대로 깨지지 않고 있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더라도 유색 인종은 비제도적인 (그래서 더욱 견디기 힘든) 억압과 무시를 경험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도, 백인들만 또는 흑인들만 모여 사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는 이처럼 "섬세한" 인종 차별이 일상적으로 경험되는 것은 아니다. (관광객을 대하는 태도는 이민자에 대한 태도와는 또 다르다. 신비함, 신기함, 손님에 대한 예의 등으로 적의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캘리포니아는 20세기 후반 미국 이민사, 그리고 새로운 이민이 만들어내는 미국 문화의 변화에 첨단에 있다. 20세기 초까지의 꾸준한, 그리고 2차 대전 직후의 독일계 유태인을 위주로 한 대량 유럽 이민의 관문이 동부의 항구 도시들이라면 (특히 뉴욕), 지난 반세기 급격하게 늘어난 아시아계와 남아메리카계 이민의 관문은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멕시코-미국 국경)이다. 캘리포니아는 이민으로 이루어진 다인종 국가로서의 미국의 특징을 집약하면서 인종 차별 또는 인종간 대립을 첨예하게 드러낸다.

미국적이지 않은

그러나 20세기 후반 서부의 아시아계와 남아메리카계 이민은 동부의 유럽 이민과는 성격이 다르다. 유럽계 이민들이 백인 중심의 사회에 일조하고 비교적 쉽게 융화될 수 있었고 이민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이미 어느 정도 정착한 반면, 또 흑인들이 백인과 유색인종 모두를 배제하며 (노예 해방 이후로도 끝없이 인종차별에 맞서야 했고 여전히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박탈을 대물림하기에 반작용으로 생성된 "역차별" 태도이기도 하겠지만) 자기들만의 어투와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어쨌거나 미국의 "당당한 구성원"이라는 입지를 차지한 한편, 이민의 역사가 짧은 아시아와 남미의 이민의 문화는 그야말로 마이너리티이며 독특하다.

캘리포니아는 다국적, 다문화적이다. 캘리포니아의 인종 비율은 다른 주와 다르고, 상이한 소수 문화들간 부대낌이 가장 첨예한 곳인가 하면, 미국에서 다양한 문화들이 가장 존중받고 "다름"이 어색하지 않고 열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주민이 가져온 본국의 다양한 전통, 본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이민자들만의 문화 (이민자 그룹마다의 미국 문화를 수용하는 방식이 다르므로 이것도 천차만별이다), 이민 1세대와는 또 다른 2세들의 문화 등 다양한 문화가 캘리포니아에는 공존한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melting pot 이라는 널리 받아들여졌는데, 한물 갔다. 여러 문화들이 만나 이도저도아닌 어떤 것으로 섞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색깔들이 공존하며 새롭고 다양한 것들을 만들어낸다는 쪽으로 인식이 바뀌고 있다. 이러한 문화에 대한 반가운 인식의 변화는 민간 영역에서 국제 교류가 큰 폭으로 확장된 지난 20년간의 세계적인 경향이기도 하겠지만, 캘리포니아에서는 일상적으로, 현실적으로 여러 문화의 생명력과 접점을 경험하게 된다.

미국의 초기 이민이 다들 그렇듯이, 시민권을 갖지 못한 캘리포니아의 많은 이민 1세대들은 백인들이 꺼리는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며 (뉴욕의 택시 운전사들은 엑센트가 제각각인 여러 유색인종 이민이며 미국 남서부 식당설거지, 청소, 공장, 건설현장의 노동자들은 대부분 영어를 아예 못하는 히스패닉이다) 아메리칸 드림 실현과 정착을 시도하고 있다. 한편, 근래의 아시아계 이민들은 이와는 조금 다르다. 가진 것 없이 몸만 달랑 왔던 초기 이민자들과는 달리, 부유한 한국계와 중국계 투자(또는 투기) 이민들은 미국 땅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미국의 부동산 경기나 산업관례 등을 빠르게 변화시키며 막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시 미국적인

그러나, 캘리포니아의 이러한 특징은 이내 미국 전역으로 확산된다. 영어와 스페인어 공용화는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먼저 시행되었지만 이제는 미국 전역에서 일반화되었다. 아시아계와 히스패닉의 비율이 미국 전역에서 빠르게 높아지고 있다. 아시안과 히스패닉에 대한 미국 전역의 인식도 전처럼 마냥 타자가 아니다.  

반면, 캘리포니아에서는 다양한 문화들에 열려 있는 태도 이면에 서둘러 정착하고자 하는 욕망에 얼른 돈 벌고 자리잡아 "나와 내 가족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지극히 미국적인 개인주의와 천박한 상업주의가 이민자들 스스로에 의해 여과없이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를 테면 "성공한" 이들이 다른 소수민족과 덜 가진 이들을 나서서 차별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단순한 역차별--그러니까 제 민족과 다른 소수를 감싸고 백인들을 차별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이해하기가 쉽겠지만).

캘리포니아에서 어느 정도 충돌과 변형을 경험한 문화들이 이제는 "미국의 일부"로 미국의 다른 지역에서 비교적 유연하게 수용되며 파급되는 반면에, 캘리포니아에서는 "미국적인" 인종차별과 불평등이 재생산, 복제되고 있다.

그나저나, 캘리포니아에 대한 지리적인 이야기

원래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잘 살고 있던 곳을 18세기부터 스페인이 선교사와 병사들을 이끌고 와서 식민지로 만들었다. 1822년 스페인으로부터 멕시코공화국이 독립하면서 멕시코령이 되었는데, 1848년 미국-멕시코 전쟁으로 미국 영토가 되었다. 대부분의 지명이 스페인어이고, 카톨릭 성자 이름이 많다. 뺏어서 잘 개발해서 잘 쓰고 있다. 애리조나에서 끌어다 쓰는 물로 야채, 과일, 유제품, 소고기 생산 미국 1위. 닭고기 칠면조는 미국 2-3위. GNP의 45%는 항공, 우주, 전자 등 첨단산업이 차지한다. 공업은 미전역의 10%. 시멘트 1위, 광업 2위, 석유 4위. 캘리포니아 주만 따로 떼어놓아도 경제적 생산력이 세계 10위 안에 든다.

1920년대에 미국 8위였던 인구수가 쑥쑥 자라 1970년대 이후 줄곧 미국 1위. 미국에서 남아메리칸, 아시안 인구가 가장 많은 주.

북반은 대체로 서안해양성, 남반은 포도가 잘 자라는 사시사철 온화한 기후. 여름이 길고 건조하며 겨울에 비가 내린다. 눈 펑펑 내리는 고산지대가 있는가 하면 사막도 있다. 서부 해안선을 따라 불안정한 지반으로 때때로 화산도 폭발하고 자주 크고 작은 지진이 일어난다. 다양한 기후와 변화가 많은 지형, 태평양 해안 등으로 자연 경관이 뛰어난 곳이 많아 관광객, 휴양객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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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ky 2005-11-02 0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캘리포냐 주민으로 공감 많이 하며 읽었어요. ^^ 미국 이곳 저곳을 다녀봐도, 캘리포냐만큼 다양한 이민족이 섞인 곳도 없는 것 같더군요. 그만큼 인종차별을 몸으로 느끼진 않고 살 수 있는 것 같아요. (비록 안보이는 인종차별이 있을진 몰라도..)

urblue 2005-11-02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쓴 친구가 미국서 공부하고 직장도 다니고 했는데, 아마 캘리포니아였던가...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러니까 썼겠죠? ^^;;
 
 전출처 : 비연 > Vincent van Gogh : Paris 시대




Paris 시대 (1886~1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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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드림~ 2005-10-19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고흐의 전형적인 스타일과는 차이가 있네요. 자기 스타일을 찾아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볼 수 있겠네요.^^ 그림들이 너무 어두워서 맘이 좀 착 가라앉는 듯,,, ^^

urblue 2005-10-19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로등 늘어선 그림이 맘에 들어 퍼 왔어요. 좀 가라앉긴하지만, 나름 매력있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