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바스티앙 살가도(Sebastiao Salgado)사진전
'ESSAYS'
 
2005년 7월 7일 ~ 9월 3일 서울갤러리 (프레스센터 서울신문사)

20세기 최고의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추앙받는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사진을 한국에서 최초로 기획ㆍ전시한다. 인본주의에 입각한 살가도의 사진은 보도와 기록이라는 다큐멘터리의 본질을 넘어서 지역과 계층을 막론한 모두에게 범인류애를 일깨워준다.

이번 전시는 살가도가 1977년부터 2001년까지 24년간 찍은 일련의 작업 중에서 직접 심혈을 기울여 선택ㆍ사인한 오리지널 프린트 총 173점을 선보이는 전시로 <라틴 아메리카>, <이민ㆍ난민ㆍ망명자>, <노동자>, <기아ㆍ의료> 총 4 섹션으로 나뉘어 선보일 예정이다. 최초의 세바스티앙 살가도 한국전은 현대 다큐멘터리 사진의 진정성과 지향점을 제시할 전시라는 점에서 향후 한국 사진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대규모 기획전이다.
- 라틴 아메리카 -

살가도가 70년대 중반 사진 찍기로 마음먹고 첫 번째 프로젝트의 주제로 자신의 고향인 라틴 아메리카를 선택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살가도는 1977~1983년까지 부유한 북아메리카 미국과는 대조적으로 육체노동으로 삶을 살아가는 인디언 농부들의 모습을 기록하기 위해 7년 동안 중남미 지역을 돌아다녔다.
 
며칠씩 걸어서 벽지의 산속 마을들을 찾아 다니며 작업한 끝에 그는 가난과 고립된 환경 속에서도 금욕적이고, 위엄있고, 힘이 넘치는 인디언 농부를 담은 사진집 ‘다른 아메리카’인 을 출판했다.

사진집 에 담겨진 그들의 삶은 말그대로 전 세계에 걸친 이동 그 자체였다. 어디로 이주하고 정착하였든지 가난한 브라질을 강타한 자본주의 물결에 그들은 정든 집을 버려야했고 정든 고향을 떠나서 빈 몸뚱이만으로 여러 도시로 떠밀려 가야만 했다. 살가도는 자신의 사진의 본질을 절망과 희망의 복잡한 심경을 동반하는 이주의 풍경에서 찾고 있다.

포토 저널리스트로서 살가도의 근본은, 그 실제 풍경을 이제는 찾아 볼 수 없다 해도 여전히 브라질 내 원초적이고 소박한 삶에 놓여 있다. 섬유질 중심에 물을 저장함으로써 가뭄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가시 많은 선인장, 그 등 뒤로 빛을 떨구는 거룩한 아침, 날개달린 하얀 천사 옷을 입고, 첫 번째 성찬식에 참가할 준비가 되어 있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소녀들의 꼭 다문 입술, 세르탕 황무지에서 생명을 다하고 가혹한 태양에 말라붙은 채 내버려진 당나귀나 들소의 뼈를 블록처럼 가지고 노는 벌거벗은 아이들, 살가도는 이렇게 단순하고 황량한 풍경들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 노동자들 -
 

살가도의 노동자 시리즈는 150년 전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끝나고 전형적인 육체노동자들은 사라지게 될 것이므로 그전에 그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이었다. 즉 고대 산업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수공업자의 모습, 로봇이나 전자컴퓨터가 이어받기 이전의 생산의 협동작업 등 노동자에 대한 기록이다.

브라질 금광에서 천 한 조각만을 몸에 두르고 금을 캐는 하루 3만명이나 되는 인간군상들은 생존의 치열함을 느끼게 하는 노동자들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진흙 속에서 일 하고 있는 수백 명의 사람뿐만이 아니라, 사탕수수 농장에서 힘들게 일하는 노동자, 제철소에서 위험한 작업을 하는 사람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거대한 배를 만들고 있는 노동자들은 사라져가는 다양한 육체 노동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살가도는 이 촬영을 위해 1987년부터 1993년까지 7년이란 세월의 열정을 보였으며, 중국,인도,소련,방글라데시,쿠바,프랑스,브라질,미국 등 세계 26개국에 흩어져 있는 40-50개의 작업현장을 방문하여 촬영하였다. 이 사진들을 통해 육체 노동의 신성함과 원초적 삶의 건강함을 보여줌과 동시에 인간이 자신의 근원적 모습인 자급자족의 삶의 방식을 스스로 폐기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육체 노동자들은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는 고사하고 자신이 생산한 생산품조차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살가도는 도대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이들은 노동을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질 육체 노동을 기록함과 동시에 현대 문명이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과 병폐를 고발하고 있다.
- 이민, 난민, 망명자 -

이민,난민,망명자 시리즈는 1993년에 시작하여 7년 동안 세계 43개국을 돌며 매년 9개월 동안 그들과 함께 하며 이 사진들을 완성하였다. 20세기는 전쟁과 피난의 세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특히 마지막 10여년은 더욱 그러했다. 여러 갈등 속에서 피난민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많은 이민,난민,망명자들이 생겨났다. 전 세계에 걸쳐 난민수는 4억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고슬라비아와 체첸의 독립전쟁, 르완다의 민족분쟁, 이라크 걸프전처럼 강대국들의 이익에 따라 지배되는 아프카니스탄 문제 등 이루 말할 수 없다. 보스니아에서는 이슬람 교도들과 세르비아인 그리고 크로아티아인들이 모두 함께 살고 있다. 세르비아인들은 독립을 넘어 다른 민족들을 깨끗이 제거하기 위해 민족 정화 운동을 시작했고 이로 인해 세 민족 간에 전쟁이 일어남으로써 대량학살이 차례로 이어졌다. 살가도의 사진은 전쟁의 최대 희생자인 민간인들의 참상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분쟁이 가득한 아프카니스탄에서 폐허가 된 도시를 목발을 짚은 채 걸어가는 한 남자의 실루엣을 보여주는데 이는 전쟁의 비극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사람들은 고향을 버리고 안전한 은신처를 찾아서 떠나면서 난민이 된다. 베나코 탄자니아 캠프의 아침을 찍은 사진을 보면 비극으로 슬픔에 쌓인 캠프의 모습이 아침 햇살에 비춰져 아름다운 희망이 샘솟는 모습으로 느끼게 한다.

살가도는 자신의 사진은 예술도, 인간의 비극을 기록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의 사진으로 단지 최악의 조건에서도 끊임없이 투쟁하는 인간 존재의 존엄성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살가도의 사진은 휴머니즘 자체인 것이다.
- 기아, 의료 -

1984년부터 1985년까지 찍은 사헬(Sahel)은 사헬의 기아로 알려진 아프리카의 참혹한 상황을 다루어, 저널리스트로서 그의 지위를 확고히 해주었다. 그곳에서 살가도는 국경 없는 의사회 회원들과 더불어 가뭄이나 홍수 같은 자연재해나 내전으로 고통 받는 아프리카를 촬영하여 책으로 출판하였다.

극심한 가뭄, 식량과 식수의 부족, 청결하지 못한 위생 상태는 아프리카인들의 생존 자체를 위협한다.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지만 극심한 가뭄으로 식량을 생산해 낼 수 없고, 찾아냈다 하더라고 청결하지 못한 위생상태에 놓여 있던 물과 식량은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진 아이들에게는 치명적인 독약으로 작용한다. 세계적인 구호물자와 대대적인 방역, 예방 접종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의 상황은 악순환을 되풀이하며 점점 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 놓인 그들은 쉽게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는 가벼운 전염병이나 질병에 고통 받는다.

이런 아프리카의 생활을 몸소 겪으며 그 모습을 촬영한 살가도의 사진은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 기아, 질병으로 고통 받는 그들의 모습을 가감없이 전달해 준다. 풀 한 포기 찾아 볼 수 없는 황량한 모래벌판을 지팡이 하나에 의지해 지나가는 한 아이는 손에 쥔 마른 나뭇가지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야위어 있다. 전쟁이나 질병이 아니라 단지 굶주림만으로 죽어가고 있는 아이들은 몸은 앙상하지만 눈망울만은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살가도의 사진에서 드러나는 피사체의 존엄성은 이 작업 태도에서 알 수 있다. 다른 매체들은 아프리카의 사헬의 기아를 취재하기 위해 짧게는 두 시간에서 길게는 2일 정도 머물렀던 것에 비해 그는 몇 주씩 그곳에 살면서 현지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단 한 순간의 보도나 잡지 몇 쪽을 장식하는 기사거리 용도로 생각하지 않았고, 그들의 힘든 삶을 피부로 느끼고 체험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피사체와의 교감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는 좋은 사진이 나온 것이다.

살가도의 사진은 한 장의 사진으로 모든 것을 보여주고 승부하는 사진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살가도는 자신이 직접 필름을 감아서 쓰고, 하루에 16시간 동안 직접 수천 장의 작은 시험 인화지를 만들고, 그렇게 하여 살가도는 사헬지역, 샤드, 에티오피아, 말리, 수단에서 장기간에 걸쳐 촬영하며, 그 지역의 사람들에게 위압감이나 거리감을 주지 않기 위해 자가용이 아닌 대중 교통을 이용하여 언제나 홀로 촬영을 다녔다. 살가도의 사진은 그 지역의 사회, 문화와 역사 전반의 이해를 바탕으로, 그들의 삶을 진정으로 공유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부단한 노력으로 탄생한 사진으로 전체가 하나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장엄한 서사시와 같다.

살가도의 사진은 이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질문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현대화라는 미명하에 우리는 좀 더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가난한 자들은 그 이익을 얻지 못하며 그들의 상황은 점점 더 악화 되어만 간다. 이 세상에는 여전히, 어떻게 하면 좀 더 풍요롭게 살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 생명을 하루만이라도 더 연장할 수 있을까라는 원초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들의 모습은 한없이 비참한 것도 아니며 단순한 동정이나 연민을 불러 일으키지도 않는다. 살가도는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 또한 우리와 마찬가지로 존엄한 생명을 가진 인간임을 깨달았고 가장 극한 상황에서도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이는 그들의 숭고한 몸짓을 극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살가도의 사진은 현대 사회의 가장 진실한 보고서임과 동시에 20세기 가장 감동적인 다큐멘터리 사진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진은 미국 29회, 프랑스 18회, 독일 14회, 스페인 13회, 브라질 12회, 이탈리아 10회 일본, 중국 등 전 세계 29개국에서 총 154회 전시를 통해 수백만의 관람객을 사로잡았다.

이번 전시는 완벽한 미학적 구도 속에 삶의 모습을 진실하게 기록하고 있는 살가도의 20여년에 걸친 사진세계를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감상할 수 있는 특별한 전시가 될 것이다. 또한 살가도의 오리지널 작품 173점을 보여준다는 의미를 넘어, 현재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고 ‘인류애’라는 보편적 감성을 불러 일으켜 어려운 이웃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촉구한다는 점에서 사회, 문화적으로도 의미 있는 사진전이 될 것이다.

휴머니즘에 바탕한 살가도의 사진은 인본주의적 사진에 수여하는 유진 스미스 상을 수상했다. 또한 프랑스, 독일, 영국, 네덜란드, 스페인, 스웨덴, 미국, 일본 등의 여러 사진 협회로부터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중요한 사진상을 모두 수상했다. 그는 올해의 작가상, 올해의 보도 사진작가로 선정되었으며, 다른 나라의 언론 협회에서 수여하는 해외 보도 사진상을 수상했다.

 

- from [사진예술] (http://www.photoa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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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8-19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 사진이 끝내주는구만요.
휴가 잘 다녀왔어요?
눈에 띄지도 않게 구석에 댓글 달아놓고...흥=3
뒤늦게 봤어요.^^

urblue 2005-08-20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다녀왔습니다. 잘 다녀와서 또 노는 중이어요. ^^
로드무비님 방에는 항상 댓글이 많이 달린다는 거 알고 있지만, 눈에 띄지도 않는 구석이라니...아...

2005-08-20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구두 2005-08-20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살가도... 찔리네...

urblue 2005-08-20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설마 그것 때문이겠어요. 무슨 일이 있는지...이따 전화나 한번 해 보려구요.

바람구두님, 흥입니다, 흥. 오늘 보러 가요.

2005-08-21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 글은 '다함께'가 주최한 '박노자 초청강연회'의 강연 내용과 사회자와의 대담을 녹취한 것입니다.
이 강연은 2005년 7월 2일 오후 4시에 연세대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한국의 민족주의와 좌파운동'이라는 주제로 열렸고, 1천여 명이 참가했습니다. 강연과 대담 녹취록을 꼼꼼히 검토해 주신 박노자 선생님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한국의 민족주의와 좌파운동

  전문 내려받기


<강연>
방금 소개를 받은 박노자입니다. 오늘 강연의 주제는 보시다시피 민족주의와 좌파사상, 사회주의 사상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제가 강연을 시작하기 전에 한가지 말씀드려야 할 것은 민족주의에 대해 비판이나 분석적인 이야기를 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대목이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이라크에서 미 제국의 침략을 반대하는 무장투쟁이 전개중인데, 그 투쟁의 성격이 미국 신문에서 얘기하는 바와는 달리 실제로는 다분히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한 거죠. 종교적인 성격보다는 그쪽 독립군의 주된 세력들이 세속적인 민족주의자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 같은 경우에는 그분들의 투쟁을 현실적인 입장에서 전폭적으로 지지하는데 그분들의 투쟁을 지켜보면서 그분들의 민족주의적인 신념을 문제삼기가 정말 힘듭니다.

아무래도 그분들의 현실적 입장이라든가 미 제국의 침략을 받고 싸우는 지금의 현실을 생각해보면, 그분들에 대해서 지지한다는 말씀 빼고는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그런 부분이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제3세계의 저항적 민족주의에 대해서 얘기할 때, 제3세계에서 민족이라는 기치 아래 전개되는 각종 해방운동들에 대해서 얘기할 때, 아무래도 비난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는 발언을 하기가 대단히 힘든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민족주의, 저항적 민족주의를 포함한 민족주의를 놓고 보면 사람들을 쉽게 끌고 갈 수 있는 여러 가지 소지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민족주의는 도덕론이 대단히 강한 사상의 복합체 아닙니까? 구한말을 생각해보면 신채호 선생이나 박은식 선생 같은 분들이 유림에서 민족주의자로 쉽게 전환될 수 있었던 것은 실제로는 그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유교 사상 못지 않게 그들의 민족주의는 민족의 국가에 봉사하는 일종의 공공 도덕, 일종의 헌신적 도덕을 많이 강조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도덕론을 중심에 놓고 보는 사상 체계인 만큼 유림에서 민족주의자로의 전환이 어떤 분들 같은 경우에는 가능했던 것이죠. 물론 끝까지 민족주의자로 전환하지 않았던 유림들이 대다수였지만 말씀입니다.

그런 도덕론, 민족주의 도덕론은 민족주의의 하나의 강점이지만, 사실 그것은 위험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민족주의는 도덕을 완전히 전유,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결국에는 민족주의와 무관하거나 약간의 관계만을 갖고 있는 운동들이 비민족적 내지 반민족적 운동으로 치부되기 쉽습니다. 민족주의의 도덕의 독점화는 대단히 위험한 현상이기도 한데, 어쨌든 민족주의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을 끌고 갈 수 있는 부분이죠.

또 하나는 민족주의의 현실성이라는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제국주의 침략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는 당장 투쟁에 투신하는 민족주의자들은 당연히 현실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려는 영웅으로 보이기가 쉬운 것입니다. 일제시대 말기에 김일성이 거의 신화적인, 전설적인 인물이 되어서 일종의 전설적인 영웅처럼 조선 각지에서 찬양됐던 것을 생각해보시면, 제국주의 억압을 받는 민족의 입장에서 민족주의적 투사가 어떻게 인식되는지 상당히 잘 알 수 있습니다.

민족주의의 힘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예컨대 주체사상에도 소위 품성론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지도자의 성격, 지도자의 품성, 또는 지도자를 따르는 일꾼의 품성을 강조합니다. 지도자를 일종의 이상적인 어른으로 만드는 것인데 그건 주체사상뿐 아니라 대다수의 민족주의 사상들이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의 보편적인 특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특히 어른에 대해서 굶주림을 가지고 있는 사회,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는 사회에서는 그런 부분이 상당한 매력으로 작용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말로 매력 포인트라고 하나요?

1980년대 후반을 생각해 보시죠. 수많은 학생운동가들한테 남한 사회가 거의 어른이 없는 사회, 어른이라고 하면 다 어용화되고 존경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보였을 때 주체사상의 품성론이라는 것이 어른에 대한 굶주림을 약간 해결해 주는 것으로 작용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실, 1980년대 후반에 주체사상이 남한 운동사회 일각에서 퍼질 수 있었던 기반 중의 하나는 바로 이와 같은 어른 없는 사회에서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는 부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런 어른의 이미지를 조작하고 반포시키고, 그런 식으로 영웅이 없는 사회에 영웅을 만들어 주는 것도 민족주의의 대단한 힘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모든 여러 요소들이 민족주의를 상당히 매력이 있는 사상으로, 수많은 운동사회들에게 매력 있는 사상으로 만드는데, 그런 측면에서는 민족주의에 대해서 정말로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민족주의 사상을 믿고 계시는 분들을 위해서라도, 또는 민족주의 사상을 반제국주의 운동의 하나의 방편이라고 생각하고 반제국주의 운동의 일환에서 그 사상을 받아들이는 분들을 위해서라도 이 사상의 문제점 그리고 이 사상이 과연 제국주의라는 세계 체제를 전복할 수 있는 사상인가라는 부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라크에서 미 제국의 군대를 축출하는 것이 당장 단기적인 반제국주의 운동의 목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베트남의 전례도 있고 하니까 이라크의 독립군이 장기적인 게릴라전을 통해서 미군의 축출이라는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민족주의라는 사상을 가지고 이라크를 미국으로부터 해방시킬 수는 있지만, 과연 이라크인을 계급 사회의 노예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가 또는 제국주의라는 세계 체제를 전복시키는데 그것이 도움이 되는가에 대해서 아무래도 얘기를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시간이 없으니까 민족주의에 대해서 이론적인 검토로 들어가서 장황하게 얘기하기보다는 단적인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민족주의의 가시적인 문제점이 무엇인지, 민족주의가 왜 인간의 해방과 지구의 해방, 이 두 가지 과제에 모자라는 부분이 있는지에 대해서 제 생각을 얘기할까 합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한겨레> 구독자가 많이 계시겠죠? 아마도 전부는 아니겠지만 일부라고 생각하는데, <한겨레 21>이라는 잡지를 잘 아시고 계시겠죠? 그 잡지의 557호를 보시면 상당히 재미있는 특집이 있었습니다. 무슨 특집인가 하면 사이공 함락 또는 베트남 해방 30주년이 돼서 구수정 특파원이 베트남인들의 해방 전쟁 총사령관이었던 보응웬잡 장군이라는 전설적인 인물을 인터뷰한 것입니다. 보응웬잡 장군의 인터뷰를 보셨죠? 만감이 교차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것을 보면서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됐어요.

만감이 교차됐다는 것이 무슨 얘기인가 하면 한편으론 보응웬잡 장군이 이끌었던 베트남 해방군이 남베트남을 해방시킬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 그 당시에 미 제국의 패배가 결국에는 미 제국 헤게모니의 종말을 고했다는 것에 대해서 저는 당연히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기쁨을 느끼는 동시에, 보응웬잡이 인터뷰에서 자기 생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을 보면서 한가지 질문이 생긴 것이죠.

보응웬잡의 인터뷰를 기억하는 분이 계시겠지만, 보응웬잡이 초기 반프랑스 항불운동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아주 재미있는 발언을 했습니다. 아마 그 발언을 눈여겨본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 같은데, 상당히 재미있었어요. 그게 어떤 얘긴가 하면, 처음에 정글에 들어가서 항불 무장 독립운동을 시작했을 때 보응웬잡이 어떤 식으로 행동했는가 하면, 본인 말대로 "우리가 프랑스 군대한테 거의 모든 것을 배웠다. 특히 우리가 프랑스 군대한테 배웠던 것이 제식훈련이었다."[는 겁니다.]

제식훈련이란 말, 다들 아십니까? 행진이예요, 행진. 학교 교련시간 때 해보신 분들이 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소련 말기에 좀 해보긴 해보았습니다. 제식훈련이라는 것이 다들 열을 정리하여 동시에 행진하는 훈련인데, 보응웬잡 인터뷰에 의하면 본인이 자기 게릴라한테 훈련을 시킬 때 아예 프랑스식으로 '하나둘 하나둘' 이렇게 맞춰서 행진하도록 한 것이죠.

사실, 어찌 보면 논리가 없는 것 아닙니까? 프랑스 군대를 이기려면 프랑스 군대의 규율, 프랑스 군대의 훈련법, 프랑스 군대의 제식훈련까지 배워야 된다면 어쨌거나 논리가 되기는 되지만,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제식훈련이라는 게, 하나의 열을 이루어서 행진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상징하고 인간의 신체에 어떤 미시적인 작용을 일으키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역사를 생각해보면, 사회주의 10월 혁명 이후에 초기 소련에서는 적군에서 제식훈련이 폐지됐습니다. 왜 폐지되었는가 하면 그 내재적인 억압적 성격 때문이었습니다. 제식훈련이라는 것이 일체의 병졸들이 장교의 말 몇 마디에 따라 동시에 로봇처럼 행동하는 것을 뜻하는 것인데, 결국에는 신체의 자동화, 신체의 기계화를 뜻하는 거죠.

그런데 보응웬잡 같은 경우에는 자기 게릴라부대를 훈련시킬 때 제식훈련을 시킨 데 대해서 별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민족주의자의 입장에서는 ― 그 당시에 보응웬잡은 좌파적 민족주의자로 받아들여졌는데 ― 프랑스식 훈련법으로 프랑스를 이긴다는 데 대해 의심이 없었던 거죠.

보응웬잡의 전기를 읽어보면 재미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보응웬잡이 미국을 이긴 몇 안 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보응웬잡 장군의 전기가 여러 가지 많이 나옵니다. 하도 드문 경우니까요, 아무래도. 그분의 전기를 보면 어렸을 때 가장 흠모했던 사람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그분이 항불운동 하시는 분인데, 프랑스를 반대하는 운동을 하시는 분인데, 가장 흠모했던 사람이 나폴레옹이었답니다. 그것은 사실 초기 민족주의 사상으로서는 아주 이색적인 것은 아니예요. 실제로 한국의 초기 민족주의자들, 구한말의 민족주의자들을 보면 가장 존경했던 사람이 대개 비스마르크와 나폴레옹이었습니다. 그건 그 당시의 계몽 잡지에서는 확연히 나오는 이야기이고,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좌파를 제외한 1930년대 후반의 상당수 독립운동가들이 무솔리니를 대단히 존경하기도 했습니다.

보응웬잡이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나폴레옹의 전쟁을 분석하고 본인도 그렇게 해보고 싶다고 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배경은 무엇이었는가 하면 그 아버지가 부유한 지주였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베트남의 민족주의적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을 보면 대다수는 유교적 관료나 지주들의 자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처럼 싸우고 싶고 나폴레옹 군대처럼 자기 군대를 훈련시키려고 했던 보응웬잡이나 그 동료들이 과연 자기 휘하의 병졸을 자기와 동등한 사람으로 볼 수 있었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선 우리가 약간 의심을 가져볼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보응웬잡의 <한겨레21> 인터뷰를 보면서 제가 또 한가지 질문을 발견을 하게 됩니다. 호치민으로부터 보응웬잡이 들었던 가장 감동적인 말이 하나 있었다던데 그것이 뭐였는가 하면, 한문 고사성어로 이공위상(以公爲上), 공적인 것으로 가장 높은 것을 삼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 당시 베트남의 좌파 민족주의자들한테 유교적 사상이 얼마나 강력하게 남아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유교적 사상에서는 호치민 같은 아주 청렴결백하고 개인숭배 같은 것을 전혀 허락하지 않았던 지도자가 나올 수는 있지만, 유교사상에 평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있을 수가 없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베트남 혁명 지도부의 사상적 성격 또는 그들이 프랑스나 제국주의를 봤던 그 세계관을 보면 민족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개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평민의 자손일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고, 평민이라 하더라도 결국에는 자수성가한, 교육이라는 채널을 통해서 어느 정도 신분 상승한 평민들입니다. 이와 같은 유식층, 유산층 중심의 민족주의자들이 대개 이상으로 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제국주의 열강을 모범으로 해서 하나의 국민국가를 만드는 것이고, 그 국민국가의 독립을 위해서 제국주의와 싸우는 것입니다. 즉, 제국주의와 싸우는 것이 계급 사회를 없애고 모두가 완전히 평등하게 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열강을 참작한 또 하나의 국민국가를 만들겠다는 것이 민족주의 사상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되는 겁니다.

물론 베트남이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북의 경우에는 열강을 모방할 필요가 없이, 그 당시 국가자본주의 사회들인 소련이나 동유럽에서 하나의 모델을 찾을 수 있었고, 또 그것을 독자적으로 본국의 조건에 잘 적용시켜서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가지 눈여겨볼 만한 것이 좌파적 민족주의자들이 세운 사회들이 ― 동유럽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나서 베트남이 그렇게 했고, 동유럽 사회가 무너지기 전에 중국이 이미 그렇게 했지만 ― 얼마나 빠른 속도로 세계 제국주의 체제, 세계 자본주의 체제와 손을 잡을 수 있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1970년대 경제 개방이 완전히 되기 전까지 등소평을 대단히 나쁘게 묘사했던 서방 언론들은 1980년대 들어 등소평을 금년을 여는 [인물로] 선전합니다. 참, 공산당의 당수라는 사람이 자본주의 언론의 영웅이 된다는 것은 문제가 큰 겁니다. 그런데 중국 같은 경우에는 구공산당 관료들에 의한 자본화의 속도, 또는 제국주의 세계와의 화해 속도가 정말 놀라웠습니다.

실제로 중국의 자본화는 1980년대 후반에 서구 국가들도 생각하지 못한 수준으로 발전됐습니다. 예컨대 중국에 가보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중국 대학교에는 등록금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상교육이 아닌 것이지요. 1980년대 후반부터 그래왔습니다. 사실, 서구의 경우에는 대다수 국가에서 대학까지 무상교육을 보장하는데, 중국은 아직 혁명의 열기가 남아 있었을 때는 그렇게 했다가 세계 제국주의 체제와 화해에 들어갔을 때는 그것을 아주 빨리 폐지시켜 버렸습니다.

등소평은 초기에 좌파적 민족주의 혁명가라고 봐야죠. 물론 본인은 자기를 공산주의자라고 불렀지만, 조금 더 학술적으로 분류하자면 일종의 좌파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국민국가 건설자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이미 많은 연구가 돼 있습니다. 좌파적인 민족주의자, 좌파적인 국민주의자들이 얼마나 빨리 제국주의 세계와 손을 잡을 수 있는가를 보면, 자기 민족의 국민국가를 이상으로 꿈꾸는 사람들이 얼마나 제국주의 세계로부터 멀리 가지 못했는지, 얼마나 제국주의 세계에 대한 흠모가 많이 남아 있었고, 얼마나 제국주의를 많이 의식해서 혁명 사업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베트남만 보더라도 김우중을 그렇게 오랫동안 체류시켜 준다든가, 가끔 <한겨레>나 다른 한국 언론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해외, 즉 일본·한국·서양 남성들의 섹스 관광에 대해서 일년에 하루나 이틀은 단속을 해도 나머지 날들은 단속을 하지 않는 태도라든가 … 그러니까 섹스 관광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 이것은 제국주의 세계와 이 구공산당 관료들의 유착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또는 구공산당 관료들이 평등세상이나 여권, 인권에 대해서 처음부터 얼마나 자각이 없었는지를 우리가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사실, 베트남 혁명이 적어도 항미 투쟁에 성공해서 미제 군대를 축출시킬 수 있었던 것이 세계 민중의 경사 아니었습니까. 당연히 경사였죠. 지금도 세계 민중의 가슴에 새겨져 있는 이미지는 그 이미지 아닙니까. 사이공의 미국대사관에서 마지막 헬기들이 마지막 남은 미군들을 끌어넣고 도망치는 모습,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져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항미 투쟁이 성공해도 혁명이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혁명이 실패했다기보다는 처음부터 그것이 계급적인 차원에서는 성공할 수 없는, 처음부터 계급 문제가 아닌 민족 문제를 놓고 일으켰던 혁명이라는 부분이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가 호치민을 영웅으로 생각하고 저도 그런 면모가 있다고 보지만, 호치민의 또 하나의 일면을 이야기하자면 그는 소련의 노선을 그대로 따라서 남베트남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무자비하게 총살하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혁명가라 하더라도 새로운 소련형 국민국가를 만들지 않으려는 사람들에 대해서 호치민은 무자비했습니다. 왜 그 혁명이 성공적인 항미 전쟁이 될 수 있었어도 성공적인 계급 혁명은 될 수 없었는지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제, 저희로서 가장 어려운 얘기 중 하나인 이북의 혁명을 생각해 보죠. 이북 혁명의 과정에서도 제국주의 유산 또는 민족주의의 사상적인 유산이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는지 생각해볼 만한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북의 혁명이 심하게 일인 독재체제로 들어가기 이전이라 하더라도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북 같은 경우에는 1940년대만 하더라도 이남에 비해서 훨씬 선진적이고 민중 지향적인 사회로 보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1940년대 후반에 수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월북했던 것은 그만큼 이북의 혁명이 매력적이었다는 얘기가 되는 겁니다. 월북한 사람들의 상당 부분은 정확한 의미의 공산주의자라고 보기는 어렵고 민족적 또는 민중적 성향의 상당히 선량한 지식인들이 이북으로 많이 간 것입니다. 그 당시 이북의 토지개혁은 실제로 남한에서 토지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이북의 토지 개혁이라는 모범이 있었던 것이고, 이승만 정권이 '우리도 어느 정도 안 하면 이북과의 경쟁에서 진다'는 위기 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북의 혁명에 대해서 역사적 기여를 대단히 높이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 꽤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1946년 말부터 1948년까지 이북에서 전개되었던 일련의 캠페인들을 보면 우리가 조금 이상한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1946년 말부터 '건국사상총동원교양캠페인'이 시작됐는데, 건국사상의 교양을 위해서 모든 국민을 총동원해서 교육을 시킨다는 이야기죠. 그 당시 김일성의 말에 의하면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졌던 운동인가 하면, "새로운 민주조선의 일꾼들, 국민다운 정신과 풍습과 도덕과 전투력을 창조하기 위한 사상 혁명"이라는 운동입니다.

그런데 국민정신 또는 총동원이 과연 어떤 의미입니까? '총동원'은 일제가 일제 말기에 계속 이용해 왔던, 일제 말기 파시즘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말 중의 하나입니다. 총동원해서 사상 학습을 시킨다는 것이 일제 말기의 상투적인 표현입니다. 국민다운 정신, '국민정신', '정신'이라는 말은 일본 유학생들이 한국에 처음 들여온 일본말입니다. 그런데 '국민정신'이라는 말이 민족주의 패러다임에서도 일본을 모방해서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이북에서 그 당시에 국민정신이라는 말이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은 초기 민족주의 사상의 영향이기도 하고 아마 소련의 영향도 있었지만, 일제 말기에 상투적으로 이용됐던 말을 이북 정권이 거의 이어받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일제 말기에는 다른 나라 국민이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건국사상총동원교양캠페인'도 그렇고 다른 캠페인들도 그렇지만, 캠페인 진행 방식이 일제 말기의 '총후 보국 캠페인' 같은 대중 캠페인들하고 구별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선전원들을 대대적으로 보내고, 사람들을 강제적으로 동원시켜 학습시키고, 학습이 안 되거나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자아 비판시키고, 사상을 개조시키고 …. 그런데 일제 말기의 대화숙이라든가 하는 사상교양 기관에서 진행되었던 캠페인을 보면 그다지 다른 모습이 아니라는 게 눈에 띠는 대목입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국가를 만들 적에 국민국가의 규율, 국민국가의 억압과 통제장치들의 상당 부분은 김일성 장군이 그 때까지 용감하게 싸웠던 일제의 통치 메카니즘을 참작해서 들여온 것이 아닌가, 즉 민족주의자들이 만든 국가가 어쩌면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너무나 많은 유산을 받지 않았는가 하는 의심을 우리로서는 지우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 캠페인은 최초의 캠페인 중 하나였고 1950년대에도 계속 진행됐는데, 캠페인들에 대한 북한의 공식적인 역사책이 ≪조선전사≫입니다. ≪조선전사≫를 학생 때 읽은 적이 있었어요. 권수가 하도 많으니까 다는 못 읽었는데, 상당 부분은 저도 '학습'을 받아서 상당히 향수 어린 애착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1955년 4월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기본 사상교양에 대한 기본 방침을 세웠는데, 사상 교양이라는 것은 '당원에게 사회 발전의 법칙을 인식시키며, 사회주의 승리에 대한 필요한 과학적 지식으로 무장시키고, 불굴의 혁명 투사로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게 무엇입니까? 한국어의 언어적 구조를 한번 보시죠. '시키다'는 말이 가장 자주 나오는 거죠. 주민들이 스스로 터득한다는 얘기가 아니고, '무장시키고', '인식하게 만들고', '훈련시키고'라는 '시키다'는 말이 계속 등장합니다. 그런 언어를 써도 무방하다고 생각되는 사회에서 개인의 해방은 물론이거니와 개인보다 공동체가 우선이라는 것이 1940년대 후반에도 이미 주된 슬로건이었습니다. '공동체'라는 말은 일본에서 들여온 것인데, 사실은 그것도 일제 말기 파시즘의 키워드 중 하나입니다. 그것은 소련의 영향으로 치부할 수 있기도 합니다.

1950년대 캠페인들을 보면 개인 해방은 이미 꿈도 꿀 수 없는 것이고, 얘기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계급적 해방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사회주의 조국 건설'이라는 말이 나오지만, 어디까지나 강조하는 것은 조국, 국가, 민주조선의 통일과 해방의 기지, 그러니까 국가 건설이지 노동자들의 문화적 개인 발전이라든가 생산관계에서의 소외로부터 해방이라든가 하는 부분은 별로 강조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노동자들이 국가를 위해서 봉사하고, 국가 통일을 위해서 살고 죽어야 하고, 그 과정에 일꾼이자 희생자가 돼야 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맑스가 생각했던 개인과 사회의 자율적인 발전하고는 이미 거의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됐던 겁니다.

사실, 민족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이북의 역사에서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를 보면 대단히 재미있어요. 이북에서 나오는 책 중에 ≪철학사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1973년 ≪철학사전≫에서 민족에 대한 정의를 보면, 민족은 언어나 경제의 공통성을 위주로 한다고 돼 있습니다. 그런데, 1985년에 새로운 ≪철학 사전≫에서는 민족에 대한 규정이 달라져요. 어떻게 달라지는가 하면 혈통, 공통의 혈통이 드디어 우위로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북 같은 경우에는 1940년대 말,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민족주의라는 말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고, 대개는 사회주의적 애국심,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라는 언어를 썼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부터는, 위기에 봉착되고 동유럽권이 무너진 뒤에는 민족주의·민족에 대한 이야기도 그 위상이 확 달라졌습니다. <로동신문> 1991년 8월 5일에 '우리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자'라는 김일성의 담화문이 나왔는데, 여기에는 이북 체제에 대해서 너무나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는 재미있는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민족이 있고서야 계급이 있고, 계급적 이익을 민족적 이익 위에 올려 세우거나 계급 투쟁을 통일 투쟁과 대비시키는 일이 없어야 한다."

결국, 민족 투쟁을 지배 이념으로 삼는 사회에서 북한 노동자들 개개인의 이해관계라든가 계급으로서의 이해관계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북한 체제의 민족주의가 실질적인 지배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던 것이 1950년대 중반부터이지만, 그것이 표출되어서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 1980년대, 특히 1990년대 초반이 아닌가 싶습니다. 1960년대만 해도 이지린 선생 같은 이북의 유명한 학자들이 단군에 대해서 썼던 이야기[를 보면] 그 당시에는 단군을 신화로 봤습니다. 1990년대 단군릉을 보면 참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역시 이데올로기의 변천이 이 체제의 속성, 민족주의적 속성을 얼마나 잘 보여주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제 민족주의에 대한 결론을 내려야 겠습니다. 결국, 민족주의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3세계의 저항적 민족주의를 얘기하자면, 열강을 모범으로 삼아 열강에게 배워서 우리도 한번 열강처럼 돼 보자는 토착 지배층 일부분의 이해관계가 상당히 반영된 사상으로 볼 여지가 있습니다. 결국 대다수의 저항적 민족주의 운동들이 성공한 뒤에는 토착적 유식층, 유산층 중에서 이 운동을 지도할 만한 지적 능력, 재산, 또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 가장 득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항적 민족주의가 승리해서 제국주의 점령군을 축출한 사회는 재미있게도 나중에 식민 모국과 가장 친하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예를 들어서, 항불 저항의 전통을 계승한 알제리 정권들이 가장 친한 국가는 프랑스이지 않습니까. 이런 경우는 비일비재합니다.

누구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이북의 한 지도자의 최근 발언으로 기억이 됩니다. "만약에 미국이 우리 체제를 보장해 주면 미국을 우방으로 생각하겠다." 이것은 이북의 지도층, 이북 지배계급의 심사를 대단히 잘 반영하는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직까지 [북한이] 미국하고 대결하는 것은 미 제국주의가 헤게모니를 잃어가면서 발악적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또 북한에 대해서 실제로 갈등, 어찌 보면 거의 전쟁 분위기를 획책하는 미국 쪽의 사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북한 지배계급은 웬만하면 세계 제국주의 체제의 맨 위에 서 있는 미국과의 관계를 사실은 우방 관계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나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민족주의의 내부 모순성, 저항성과 협력성, 저항성과 모방성의 그 역설적인 이중성을 아주 잘 표현하는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도 말할 수 있는 것이구나' 하고 상당히 '감동'을 받기도 했습니다.

현실적인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북한의 지배층과 남한의 지배층, 미국 지배층이 서로서로 화친을 하고 평화공존 체제를 이루고 결국에는 통일로 가면 정말 좋은 것입니다. 저도 현실적인 차원에서 남북 지배층의 소위 '햇볕정책'이라는 이름의 평화공존 정책을 당연히 지지합니다. 남한 기업이 이북에 진출해서 거기에서 이윤을 추구하는 것도 현실적이고 당연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남한에서 심지어 민주노동당이라 해도 남한 기업이 이북 지역에 진출해서 이윤 추구하는 것이 노동자에 대한 착취라는 생각을 별로 안 갖고 있다는 데 대해서 약간의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연히 양쪽의 지배층들이 백성을 총알받이로 삼아 전쟁하는 것보다는 화친을 해서 폭력 없이 진행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이 과정에서는 한편으로는 우리가 총알받이가 안 되니까 득을 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세계 제국주의 착취 체제가 이제는 북한의 노동자층 역시 삼키고 말겠다는 것도 현실이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저로서는 우리 사회자분께 던져야 할 질문이 아닐까 싶은데, 과연 남한의 운동 사회에서 이 부분에 대한 의식이 있는가 하는 것을 [묻고 싶습니다.] 원래 사회자가 저에게 질문을 해야 하는데 약간 반대가 됐죠? 이제 이야기가 장황해져서 끝내야 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사회자와의 대담>

김하영*:
 

노자 선생님께서 오늘 강연해주신 내용이나 그 동안 민족주의와 좌파 운동에 관해 여러 책에서 주장하셨던 내용들 가운데서 제가 몇 가지 간단한 질문을 던지고 선생님의 답변을 들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아까 저한테 던지신 질문도 시간이 있으면 답변을 하죠.

오늘 선생님께서 저항적 민족주의자였던 제3세계 지식인들이 해방된 조국에서 새로운 계급 질서가 세워지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다는 지적을 해주셨는데, 굉장히 공감이 됩니다.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어쨌든 자국의 노동자·농민을 착취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비판을 하면 그 나라들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 나라들이 제국주의 세계 질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많이 합니다. 이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답해야 할지 한번 생각해 봐야 되는데요, 선생님은 ≪나를 배반한 역사≫라는 책에서 "비록 한 국가의 울타리 안에서제국주의에 대응할 수 있는 대안이 없다 해도 지구 전체의 차원에서는 대안 마련이 꼭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고 지적하신 바가 있었습니다. 제국주의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에 대해서 어떻게 답변을 하시겠습니까?


*사회자 김하영은 '다함께' 운영위원이자 편집팀원이다.

저서로는《국제주의 시각에서 본 한반도》(책벌레, 2002)가 있다.

박노자: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노움 촘스키입니다. 그런데, 아시겠지만, 촘스키는 지식인으로서 또 정치사상가로서 출발점이 베트남 침략 반대였습니다. 1970년대, 특히 베트남이 해방된 뒤에 촘스키는 미국 침략이 성공했다고 보는 관점에 섰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미국이 축출을 당했다 해도 거의 4백만 명에 가까운 인명 피해를 봤고, 거의 전 국토가 초토화됐고…. 그 당시 촘스키가 한 얘기가 무엇인가 하면, '미제에 의해서 이처럼 초토화된 베트남은 더 이상 하나의 매력적인 모델이 될 수 없었다. 다른 제3세계의 종속화된 민족들에게 베트남이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없게끔 만든 것이 바로 미 제국이 바라는 바였다'는 것입니다. '베트남 혁명 노선은 올바랐는데, 미 제국의 무자비한 전쟁에 의해 황폐화되어서 다른 피억압 민족의 모델이 될 수 없게 됐다'고 은근슬쩍 얘기하는 것이죠.

물론 미 제국의 침략에 의한 피해가 엄청났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미국은 그 피해에 대해 보상하기는커녕, 재수교 협상 때 베트남을 강요해서 남베트남이 미국한테 졌던 빚까지 다 받아냈습니다. 미국에 의해서 황폐화된 나라가 미국에 돈을 지불하는 격이 됐으니, 이건 인간의 세상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수준이죠. 이런 게 다 맞는 얘기이고 촘스키 얘기에 찬성할 수 있습니다만,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예컨대 베트남이나 중국에서 노동자들은 자립적인 노조를 만들 수 없습니다. 자립적인 노조 활동이 불가능하고, 노조들이 당의 아주 심한 간섭을 받고, 중국의 경우 노조 활동가 중에 공산당 간부 출신이 거의 50퍼센트가 넘죠. 그러니까 실제로 노조가 있다 하더라도 유명무실하고, 독립적 노조를 산발적으로 만들면 당장 탄압을 받습니다. 만약 이런 일이 유럽이나 미국에서 일어났다면, 유럽이나 미국의 좌파한테 그런 파쇼적 탄압을 분명히 비판받았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이런 것을 단순히 미 제국과의 대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이것을 단순히 미군의 폭격이나 황폐화 작전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지금으로선 사실 대결하지도 않지만 말씀입니다. 물론 한 나라가 요새처럼 되는 분위기를 만든 것이 분명히 미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심한 피해를 본 지역이 아니더라도 새롭게 집권한 민족주의자들이 역시 계급 질서를 그대로 재현시키지 않습니까?

우리는 민중이 어느 정도 주체화가 됐는가 하는 문제부터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국가들의 주체화된 민중과 연대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베트남의 경우는 제가 잘 모르지만, 중국은 요즘 인민 저항이 많이 활성화됐습니다. 저항의 횟수만 해도 작년에 거의 5만 건에 가까웠고, 대규모 파업을 주도하는 지역적인 노동자들의 자율적 조직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사실, 전 세계를 위한 가장 나은 대안은 서구의 민중운동가들과 중국 등지의 운동가들이 서로 소통을 해서 연대하는 것입니다. 이게 가장 좋은 대안인데 아직까지 갖가지 제한이 대단히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베트남이나 중국의 좌파적 민족주의 세력의 승리에 대해서 단순히 기뻐하기만은 어려운 부분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김하영:
    이제, 구한말과 일제시대의 민족주의자들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를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은 당시의 주류 민족주의자들이 "적자생존", "우승열패"의 논리를 받아들였다는 점을 여러 책에서 지적해 오셨습니다. 유럽 자본주의의 가치를 받아들인 것이었죠. 그런데 이런 주류 민족주의자들은 식민지 지배 아래서 자신의 뜻을 이루지도 못했고, 결국에는 상당수가 일제에 투항했습니다. 강연에서 베트남의 민족주의 지식인들의 계급적 한계를 지적하셨는데,  구한말과 일제시대 주류 민족주의자들의 한계도 계급적 한계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박노자:
   우리가 마르크스주의식으로 역사를 본다면, 한 행위자의 역사적인 행동을 단순히 자율적이라고 볼 수는 없고, 그 행위자가 어떤 사상 체계를 왜 습득했는지, 어떤 계층의 지지자를 얻었는지, 어떤 계층을 대변했는지, 그 계층의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는 무엇인지]를 봐야 하지 않습니까?

실제, 구한말의 소위 민족주의자들을 보면, 재미있는 것이 대다수가 부유한 집안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장지영 선생 같은 경우에는 구미 지역의 장씨인데, 나중에 장직상1) 같은 친일 지주를 배출했던 유명한 문중입니다. 부유한 문중의 출신도 있었는가 하면, 물론 신채호 선생이나 박은식 선생처럼 비교적 가난한 선비 가정에서 태어난 분도 있었죠. 그렇다 하더라도, 신채호는 신기선2) 학부대신의 도움에 의해서 진출할 수 있었고, 박은식은 민병석3), 즉 당시 민씨 족벌의 핵심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의 문객이 돼 서울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사대부 사회의 관계자본, 관계 네트워크를 이용해서 진출하신, 그 사회의 생리를 거의 내면화하신 분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본인들의 문화 상징자본을 갖고 진출할 수 있었던 분들이었습니다. 즉, 초기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보면 경제적 자본이든 문화자본이든 관계자본이든 그 사회에서 어느 정도 밑천을 갖고 살았던 사람들이고, 어디까지나 가진 쪽을 대변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박은식 선생은 나중에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을 대단히 반겼어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과거 중국의 삼대사회와 같이 폭력이 없고 화목한, 침략적이지 않은 새로운 사회가 드디어 출현했다는 일종의 유교적인 이상을 떠올린 것입니다. 그런데, 박은식 선생님의 계몽기의 글들을 보면 소위 '식산흥업'에 대한 글이 꽤 있어요. 교육 입국에 대한 글도 있구요. '식산흥업'에 대한 그 분의 글이나 그 분이 발간했던 <서우>(西友)라는 잡지에 나왔던 글들을 보면, 가장 재미있는 것이 노동자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노동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씀입니다. '식산흥업'에 대한 글들의 논점은 대체로 산업을 위주로 해야 하는지, 농업을 위주로 해야 하는지였습니다. 이에 대한 그 당시 유산층 사이의 갈등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농업을 위주로 한다면 농지개량·가축개량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이 논점이었습니다. 노동자에 대해서는 단순히 노동력을 훈련시켜야 한다거나 노동하는 사람들한테 기초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 정도의 언급이 있었지, 노동자가 거의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 같은 운동의 계급적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초기 민족주의자였던 유길준은 노동야학을 위해서 교과서를 쓴 사람이에요. 그 당시 조선에서 노동자라고 해봐야 합방 시절에 약 1만 명, 회사는 약 250개 정도였습니다. 노동자라면 인력거꾼이라든가, 여러 가지 잡직, 인부 같은 사람들이었죠. 유길준은 노동자들의 야간학교를 위해서 <노동야학독본>이라는 교과서를 썼는데, 그것이 1907년에 나왔어요. 그 교과서를 보면 그 당시 유길준 같은 대지주 출신의 유식한 관료가 노동자들한테 어떤 사상을 심고 싶었는지 볼 수 있는데, 대체로 임금에 대한 충성, 국민으로서의 직분을 다하고 임금을 위해서 분골쇄신하는 정신 같은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 당시에 임금은 이미 일본의 괴뢰에 지나지 않았고, 유길준 본인도 그 상황을 타개하려 하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어쨌거나 그들이 계급적 질서를 노동자들한테 얼마나 내면화시키고 싶었는지 그 책에서 여실히 볼 수 있습니다.

구한말의 교과서를 읽어보시면 상당히 재미있을 겁니다. <노동야학독본>뿐 아니라 <여자독본>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 당시에 여학교는 약 120개 정도 있었는데, 부유층 여성들만 다닐 수 있는 특수 기관이었죠. <여자독본>이라든가 <여자초등수신서>, 즉 여자 초등학교의 윤리 교과서에서 여자가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되는지[를 규정하는] 여자 덕목의 맨 첫 부분이 뭔지 아십니까? "여자가 얌전해야한다."(청중 웃음) 이것을 다 읽으면 요즘에는 아마 커다란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1) 장직상(張稷相, 1883∼1947): 구한말 경북 관찰사 장승원(張承遠)의 둘째 아들. 그는 일제 초기 하향, 선산 군수를 지내다가 독립군 군자금 제공을 거부한 아버지가 대한광복회의 손에 살해된 뒤 공직을 떠났다. 1920년에 경일은행을 대구에 세웠고, 1930년에 내선일체를 선전하는 총독부 중추원의 참의가 됐다. 1940년에는 일본 전시 동원체제의 앞잡이였던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평의원이 됐다. 하리모토(張元稷相) 로 개명한 그는 1945년 일제의 전쟁자금을 조달하는 데 몰두했다. 해방 뒤 남선전기 사장으로 대구·경북 지역에서 사업을 하다가 1947년 사망했다. 동생 장택상은 미군정의 수도 경찰청과 초대 외무장관을 지냈다.

 2) 신기선(申箕善, 1851∼1909): 1877년(고종14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사간원정언·홍문관부교리·통리기무아문주사·통리내무아문참의 등을 역임했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개화당 정권이 들어서자 이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으로 임명됐고, 이 때문에 1886년에 전라도 여도에 유배됐다. 1894년 갑오개혁이 실시되자 유배에서 풀려나 호조참판·군부대신·중추원부의장 등을 지냈다. 1896년 을미사변 이후 일본과 친일 개화파 정권을 반대하는 의병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가 되어 의병활동을 진압하는 데 힘썼다. 1907년 대동학회(大同學會)를 창립해 회장을 지냈다.

3) 민병석(閔丙奭, 1858∼1940): 민경식(閔敬植)의 아들이고, 대법원장을 지낸 민복기(閔復基: 인혁당 사건 당시 법무장관)의 부친이다. 1879년(고종16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1883년에 승지, 1884년에 참의군국사무에 등용됐다. 같은 해 수구당(守舊黨)의 일원으로서 갑신정변에 실패한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하자 장은규를 자객으로 보내 암살하게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뒤 대사성·강화부유수·제도국총재·헌병대사령관 등을 지냈고, 1905년과 1909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시찰했다. 1910년 국권을 잃은 뒤에는 일본 정부의 자작 작위와 은사금을 받고 이왕직장관이 됐으며, 1939년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인 중추원 부의장을 지내는 등 친일 활동을 했다.

 

김하영:  
   오늘날의 한반도 주변 정세가 1백 년 전의 구한말과 비슷하다는 얘기를 요즘 종종 듣습니다. 물론 당시의 조선과 오늘날 남북한의 세계적 지위가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각축이라는 점에서 뭔가 비유해 봄직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특정 제국주의 세력에 기대거나,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세력균형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를 이루겠다는 생각이 많이 유포돼 있는 상황에서 이런 점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백 년 전의 역사가 오늘날 한반도의 상황에 어떤 교훈을 준다고 생각하십니까?

박노자:
   이건 참 쉽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1백 년 전의 상황을 아주 쉽게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이 지역의 구헤게모니 세력인 중국이 급격하게 약화되고, 신제국주의 세력인 일본이 세계 체제의 중심인 영국과 미국의 도움을 얻어서 구헤게모니 세력을 한반도에서 축출합니다. 그리고 한반도 민족주의자 중의 상당 부분을 협력자로 매수해 결국에는 한반도를 장악하고, 한반도의 유산계급과 일종의 공존 관계를 만들어 낸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즘 상황[을 보면,] 세계 제국주의 체제의 중심인 미국이 아직 그 당시의 청나라처럼 완전히 이빨이 빠질 만큼 약해지지는 않았지만 급격하게 쇠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특히 쌍둥이 적자를 보면 어쩌면 급격한 하락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달러가 너무 많이 남발됐고 군사예산의 지출이 지나쳐서, 미국에 투자된 외국 자금이 만약 일시에 빠져나갈 경우에는 급격한 하락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즉, 현재 헤게모니 세력인 미국이 상당히 약화돼 가는 것이고, 그 대신 지역의 새로운 헤게모니 세력인 중국이 조금씩 힘을 키워가고 있는 중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지역에서 헤게모니 세력의 교체가 이뤄질 수 있는 순간인데, 이 순간에 과연 한반도 국가들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가 문제가 되는 것이죠.

물론 사회자가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날에는 한반도의 이북도 이남도 이미 국민국가가 됐고 만만치 않은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한 같은 경우에는 거의 일종의 아류 제국주의로까지 얘기할 수 있는 수준에 올라 있기 때문에 1백 년 전처럼 제국주의 헤게모니 세력의 교체가 식민화로 이어진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1백 년 전에는 두 개의 전쟁을 거쳐서 헤게모니 세력의 교체가 이뤄진 것 아닙니까.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쳐서 신제국주의 국가 일본이 한반도를 확보한 것이죠. 만약에 한반도가 또 한번 전장화가 된다면 우리가 우리의 생존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노무현의 소위 '균형자론'은 어찌 보면 남한 지배계급의 가장 트여 있는 부분의 입장을 잘 대변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차피 헤게모니 세력이 교체되는 상황에서는 한쪽에만 붙는 것보다는 중간에 위치해서 사태를 관망하고, 교체되는 순간에 등거리 외교를 통해서 재빨리 재편을 선언하는 게(청중 웃음)…. 제가 만약 한국의 지배세력이었다면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런 일은 없겠지만요. 그러니까 그것이 남한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가장 압축적으로 잘 표현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 지배계급의 이해관계가 민중의 이해관계와 어디까지는 겹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전쟁이 일어날 경우에 중국의 민중과 남한의 민중, 그리고 미국의 민중이 들고일어나서 혁명을 일으킬 가망성이 현실적으로 보이지 않는 이상, 전쟁을 방지해야 한다는 입장에서는 우리가 지배계급과 어디까지는 이해관계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국주의 세력 간의 놀음이고, 우리가 아무리 '균형자론'을 십분 적용을 해서, 교체될 순간이 보이자마자 재빨리 바꾼다 하더라도 완벽하게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미국이 지금은 이라크 독립군에게 시달려서 그렇지, 이라크 독립군의 활약이 없었다면 벌써 이란→북한의 순서라든가, 북한→이란의 순서로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적 침략을 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우리 지배세력을 비롯해서 우리가 이라크 독립군에게 큰 절 한번 올려야 할 것입니다. 지금 당장 제국주의 세력들이 우리를 건드릴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청중 박수)

세력균형이라는 말을 1백 년 전에도 많이 써먹었거든요. 그런데, 그런 균형이라는 것이 우리의 안보에 완벽한 보장이 될 수는 없는 상황에서, 특히 남한의 진보세력은 중국의 진보세력 또는 미국의 진보세력과 연대하려는 노력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중국 같은 경우는 진정한 의미의 민중세력들이 아직 수면 위에서 전국적인 조직 활동을 할 수 없는 단계라서 당분간 현실성이 좀 결여됩니다.
 

김하영:
   지배계급의 입장에서는 균형을 잘 맞추는 줄타기를 해야 하지만, 우리들은 다른 나라 진보세력과 연대를 도모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박노자:
   그것이 원론적인 입장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은, 특히 중국은 지배세력이 민족주의를 강력하게 지배 이데올로기로 활용해서 민중의 의식을 상당 부분 순치시킨 것도 사실입니다.

김하영:
  그럼 이제 중국·일본·한국 등 동아시아 나라들의 민족주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지난해와 올해 동아시아 나라들의 민족주의가 이목을 끌었습니다.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 우익의 독도 망언 등의 배경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박노자:
  동아시아 지배계급들이 민족주의를 통치 도구로 사용한 지 일본 같은 경우에는 이미 1백 년이 넘었죠. 일본은 외부의 적을 하나 만들어서 소위 '국민정서' ― 이것도 사실 1백 년 전 일본말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이 말을 많이 쓰고 있지만 ― 를 거기에 맞춰 모든 국민적 콤플렉스·분노·에너지를 거기에 쏠리게 합니다. 이것은 일본 지배계급이 많이 구사했던 전략입니다.

예컨대 청일전쟁 때 일본내 분위기는 히스테리를 넘어서 거의 집단적인 정신병에 가까웠습니다. 당시 일본 신문의 만화판들을 보면 거의 돼지처럼 그려진 중국병들을 열심히 총검으로 죽이는 일본 군사들이 그려져 있었고, 중국을 비하하는 노래들이 동요가 돼 아이들이 거리에서 불렀습니다. 또, 후쿠자와 유키지 같은 거물이 "이것은 문명과 야만의 전쟁이다" 하고 한 마디 하고, 지식 사회가 다 재편이 돼서 가장 진보적이다 싶은 기독교인들까지도 '야만적인 중국을 처부셔야 한다'고 한 마디씩 보탰습니다. 이것을 일본의 공격적인 민족주의 대중화의 시초로 볼 수 있습니다.

러일전쟁 [때도 그랬습니다.] 잘 기억하시겠지만, 1905년에 일본 가쓰라와 러시아 비테가 담판을 해서 포츠머스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했는데, 실제로는 그 때 한반도의 식민화가 결정됐습니다. 이 때 러시아는 배상금을 물지 않았습니다. 러시아는 배상금을 무느니 차라리 전쟁을 계속하겠다고 했고, 일본은 이미 자금이 바닥나서 더 이상 전쟁을 못 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배상금 대신 받아먹은 것이 사할린 남부와 한반도와 만주의 일부 이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당시에 [일본] 언론들이 만들어 놓은 소위 국민정서상 ― '국민정서'라는 말이 그 때도 많이 쓰였습니다 ―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포츠머스 조약 소식이 알려지자 도쿄에서 대중 폭동이 일어난 겁니다. '어떻게 우리가 배상금도 못 받을 수가 있느냐. 이것은 제국에 대한 배반이다.' 엄청난 폭동이 히비야에서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언론이 대중 정서를 어떤 식으로 끌고갔는지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그 당시 도쿄에서 폭동을 일으켰던 일본인들이 외쳤던 슬로건은 '블라디보스토크부터 시베리아 절반 정도를 우리가 얻었어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신문들이 이와 같은 꿈을 심어 민중을 순치시킨 것이죠.

이런 경력이 있는 일본은 지금 이북을 일본을 위협하는 악마적 세력으로 만들고, 민족주의화 또는 재제국화의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김하영: 동북공정 또는 독도 망언에 대한 대응 등에 대해서 지적해 주실 부분은 없습니까?

박노자:
   동북공정[에 대해 얘기하면,] 요즘 중국에서 이북과 상당히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북은 1990년대에 신화를 역사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단군릉이 생겼고, 단군이 역사 인물이 됐습니다. 그리고 개성에서 고려 왕조의 수도라는 인식을 강력하게 심어줄 만한 대대적인 유적 개조, 개·보수가 이뤄지고 있지 않았습니까?

중국은 요즘 황제릉 ― 황제는 단군과 성격이 비슷한 중국의 전설적인 시조입니다 ― 에서 중국 공산당 간부를 비롯해서 동포인 화교들의 대표자까지 같이 제사 지내는 풍경을 연출하고, <인민일보>는 그 이야기를 커다랗게 씁니다. 공산당 간부가 전설적인 인물한테 제사 지내는 것을 생각해 보면 끔찍하죠. 또, 요즘 중국 고고학계에서는 근대적인 과학적 사학에서는 이미 1920년대부터 역사 인물이 아니라고 봐 온 요(堯)임금 시대 중국의 재복원 같은 프로그램을 실행하기도 합니다. 신화를 역사로 만들고, 중국을 세계 문명의 중심지로 만드는 아주 다방면적인 노력이 진행중입니다. 중국 고고학계의 정설들 가운데 가관 중의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구석기 시대의 소위 시난트로푸스를 중국인의 시조로 보는 것입니다. 시난트로푸스는 40만 년 전의 원인류입니다. 아직 호모 사피엔스도 아닌 것이죠. 그것을 시조로 보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이상 과학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1920년대에 주구점(周口店)에서 발견됐던 시난트로푸스의 해골이 우리 모두의 조상이라는 얘기가 교과서에 나옵니다. 뭐라고 할 말이 없죠.

동북공정은 이런 배경을 깔고 봐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국내 [논의]에서 제가 조금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저는 동북공정이 공격적이라기보다는 한반도가 통일될 경우 영토적인 요구에 대비하는 부분이 가장 강하지 않았던가 생각합니다. 물론 공격적인 면도 있을 수 있죠. 예를 들어서, 중국의 역사 지도를 보면 한사군(漢四郡)을 유달리 강조합니다. 한사군은 한나라 시대 때 있었지만, 당나라 시대의 지도를 봐도 꼭 보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북공정과 관련된 문건을 보면 한반도에 대한 공격적 야욕이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동북지역이 늘 중국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재의 국민과 민족국가를 과거에 투사시켜 영원불변의 위대한, 도덕적으로 가장 높고 세계 중심인 존재로 만드는 작업인 것 같습니다.

김하영:
   오늘날 한국의 민족주의에 대한 얘기를 나눠봤으면 합니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억압당한 기억을 가지고 있어 외세의 압력에 대한 반감이 있는 동시에, 다른 민족에 대해 고통을 주기도 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박노자 선생님은 "피해의식에 뿌리를 둔 민족주의가 '우리' 지배자들이 다른 나라 또는 다른 나라 사람들에 대해 저지르는 행위에 둔감하게 만든다"는 지적을 어느 글에선가 하신 바 있습니다. 좀 전에도 남한이 아류 제국주의 수준에 올랐다고 얘기하셨는데, 남한의 "아류 제국주의"로서의 면모에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노무현 정부가 미국의 이라크 점령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한 것도 그런 사례입니까?

박노자:

파병 당시에 <매일경제신문>은 '우리가 단순히 소수의 파병뿐만 아니고, 미국을 화끈하게 도와줘서 미국과의 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한편, 이라크에서 독립적인 영향권을 확보하자'고 했습니다. 그밖에도 여러 보수 신문, 극우 신문에서 '이라크에서 우리의 독립적인 이해관계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다' 하는 얘기가 적지 않게 나왔으니 아류 제국주의 같은 말이 나올 법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파병은 아류 제국주의라기보다는 오히려 남한 제국주의의 아류성 또는 종속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실제, 노무현 정권의 이해타산으로는 파병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노무현 정권 자체의 목표로 봐서는, 그리고 지지자들을 이탈시킨 부분이라든가 여러 정치적인 고려로 봐서는 차라리 안 하는 게 나은 계륵 같은 부분이었죠. 그래도 노무현이 파병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노무현 정권의 관료 기구들이 얼마나 미국쪽하고 가까이 지내고,  얼마나 미국적인 논리에 젖어 그것을 내면화했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국의 관료기구, 특히 파병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갖고 있는 외교 또는 국방 분야의 기구들이 얼마나 자국의 논리보다 제국의 논리에 충실한지를 보여주는 것이지 않나 싶습니다. 파병에 대한 결정, 정치적 결정은 대통령이 하지만, 실무 작업은 해당 관료들이 하는 것이고, 결국에는 해당 관료의 판단이 정치 판단의 근거가 됐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뿌리치려면 노무현으로서는 갖지 못한 용기가 필요했을 텐데, 결국 노무현이 실무자들의 판단을 따르는 듯한 인상을 많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파병을 한국 자본주의의 종속성 내지 예속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가 분류해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피해를 봤다', '우리가 피해를 줬다'는 이야기를 할 때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일제시대 때 당연히 조선 민족 전체의 지위가 강등됐고 모욕과 피해를 봤습니다. 하지만, 잘 아시겠습니다만, 일제시대 때 피해를 안 보고 영달한 사람도 좀 있지 않았습니까? 물론 피해를 본 사람이 대다수였지만  영달한 사람들이 꽤 있었고, 이 사람들이 지금도 일제에 대한 향수 젖은 글도 가끔 쓰지 않습니까? 본인 가문의 출세 배경이라든가 본인 계급의 등장 배경을 생각해서 가끔 일제에 대한 향수 어린 글을 쓰죠. 저는 한국 사학계의 나이 드신 분들 중에서 '나는 일본인보다 일본말을 훨씬 잘 한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청중 웃음) 이건 단순히 피해 본 것으로만 보기는 좀 곤란하죠. 그러니까 '우리'가 피해를 봤다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조선의 민중이 피해를 본 것이고, 유산층 또는 상당수 유식층은 새로운 체제에 적응해서 계급적인 지배를 유지·강화시킨 것입니다. '우리'라는 말이 여기에서 약간 기만적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피해를 준다'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베트남과 한국의 관계를 보면, 한국 남성들이 돈을 지불해서 베트남에서 섹스관광 하는 것이 베트남의 빈민층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이고, 많은 베트남인들에게 정신적인 상처를 남기는 일입니다. 그런데 한국 기업들이 베트남에 투자하고 교역을 넓히는 것이 베트남 간부층 또는 중간관리자층이나 전문가층한테 하나의 혜택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베트남 같은 곳에서 소위 '한류'가 인기를 얻을 수 있는 배경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경제적 진출이 그 곳 일부 계층에게 혜택을 주는 바가 있기에 한국의 연예인들이 그 곳 중산층 자녀들에게 모델이 될 수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라는 말이 참 기만적입니다.

김하영:
   몇 가지 질문이 남아 있지만,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청중석으로 마이크를 넘겨서 질문이나 주장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청중석 질의·주장 생략)

 김하영:
    이제, 정리 발언을 해주실 시간인데요, 정리 발언을 하시면서 한두 가지 질문에도 함께 답변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요, 선생님의 지적대로 민족주의는 노동자 계급과 지배계급을 하나로 묶어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배계급이 제국주의에 저항해 싸워주기를 희망하죠. 동시에, 우리 나라 좌파 민족주의자 동지들이 그렇듯이 미국 제국주의와 정권에 맞서 싸우기도 합니다. 저는 이들과 함께 투쟁하면서도 민족주의가 진정한 대안이 아님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민족주의의 극복은 어떻게 해야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두 번째 질문은요, 선생님께서는 "개인주의가 사회·정치적 무관심을 의미한다는 오해만큼이나 지배층에게 유리한 오해는 없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하신 적이 있습니다. 박노자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건강한 개인주의와 사회·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조직적 저항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다고 보시는지, 오늘날 진보적인 젊은이들이 반전·반자본주의적 저항들과 어떻게 연관을 맺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시는지에 대해 얘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박노자:

민족주의가 대안이 아니라는 것을 과연 어떻게 가장 가시적인 방법으로 보여줄 수 있는가. 예를 들어서, 1980년대 후반이나 1990년대 초반에 전대협 등의 학생운동 단체에서 분명한 민족주의적 색깔을 가지고 활동했던 고급 활동가 일부가 지금은 어디에 가 있는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보시죠. 지금 정권과 국회에서 가장 부끄러운 것입니다. 한나라당에도 그런 활동가들이 있다는 것이 더 부끄럽지만요. 이 사람들이 굉장히 쉽게 자유주의적 부르주아들에게 합류하지 않았습니까? 노무현이 대표하는 중간 자유주의자들, 중간 부르주아지들과 좌파적 민족주의를 표방했던 전대협의 옛 지도자들 같은 분들이 아주 쉽게 어울릴 수 있는 배경을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동기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자기합리화의 논리를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민족을 위해서, 통일을 위해서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헤게모니 장악이다.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서는 우리가 연합을 해야 되고, 중간파 부르주아지와의 연합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서는 이라크 파병에 대해서도 할 말을 못하는 것인지…. 이것이 이분들의 실천입니다. 그러면, 민족통일을 위해서 이라크 파병을 해야 한다는 것인지 그분들한테 그냥 물음을 던지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민족주의적 색깔을 가지고 있던 주로 유식층 내지 유산층 출신의 활동가들이 중간파 부르주아지들과 이렇게 쉽게 어울릴 수 있는 배경이 민족주의 사상 자체에도 있다는 것을 우리가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민족주의의 본질이라든가 민족주의의 효과들을 설명하려면, 앞서 얘기했듯이 좌파 민족주의자들이 해방 전쟁에 성공했던 여러 나라들이 과연 나중에 어떤 계급 구조를 이루고, 어떻게 발전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컨대, 우리가 북한의 역사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 것이 문제인 것 같은데, 이북 역사에서 계급 구조가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발전했고, 실제 계급 사회의 작동이 어떤지 우리가 조금 더 정확하게 실질적인 사례를 가지고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개인주의를 정확하게 번역하면 '개인자율주의'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레닌이 죽기 직전에 이미 혁명이 왜곡되고 변질돼 가고 있다는 것을 보면서, 레닌 전집 제45권인 것 같은데, 1921년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우리한테 지금 필요한 사람들이 바로 자기 양심을 절대로 거스를 수 없는, 그리고 늘 양식과 양심에 기반해서 행동하는 동지들이다. 그런 동지들이 없다면 이 썩어빠진 관료 기구가 결국 당을 장악할 것이다.' 레닌은 혁명이 이미 왜곡돼 가고 있고, 패배의 씨앗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죽은 겁니다. 그리고 레닌은 자기 양심을 거스를 수 없는 사람, 그런 당 활동가들이 있어야 혁명의 왜곡을 방지할 수 있다고 본 것이죠. 레닌이나 볼셰비키의 구지도층이 생각했던 혁명가 상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율적으로 자기 자신이 어느 정도 마르크스주의를 터득하고, 늘 자기 자신의 생각과 양심에 따라서 행동할 수 있는 인간형이 출현하기를 바랐던 것이고, 그런 사람들을 자신과 동등한 동료로 생각했던 것이죠.

어차피 지금 존재하는 모든 체제들이 불완전한 것이고, 또 어떤 사상도 실현 과정에서는 온갖 문제를 일으킬 수 있고, 권력 관계가 존재하고 있는 세계에서는 어떤 사상도 권력 담론이 되기 쉬운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개인주의는 이런 상황에서 사상의 권력 담론화를 방지할 수 있는 사람, 자기 양심에 거스르지 않고 자기 조직 안에서도 조직의 문제점을 제기해서 조직을 더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아주 역설적인 얘기이지만, 그런 의미의 개인주의자가  어떤 조직 안에 없다면 그 조직은 부패하고 말 것입니다. 조직을 위해서라도 그런 사람이 존재해야 합니다. 결국 그런 면에서는 개인의 행복과 조직의 행복이 둘이 아니고 하나일 것입니다. 불교에서 가장 좋아하는 말 중에 하나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인데,(청중 웃음) 제가 생각하는 개인주의 그리고 집단과 연대 행동의 가능성은 제가 보기엔 둘이 아니라 하나일 것입니다. 이제 사찰에서 하는 법문 같아져서 마쳐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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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05-08-18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갈게요. 나중에 천천히 봐야겠네요.

urblue 2005-08-18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직 안 읽고 있습니다. ㅎㅎ

sudan 2005-08-18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번째 시도.

sudan 2005-08-18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기. -_-

urblue 2005-08-19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단님, 흠, 그래도 박노자의 책은 재밌는 편인데, 다시 한번 시도해 보시죠? ^^a

sudan 2005-08-19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시도.

sudan 2005-08-19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길다니깐요. -_-

urblue 2005-08-19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눠서 읽으세요. ㅎㅎ
 
 전출처 : 라주미힌 > 김지하는 왜 파시스트로 전락했는가?

  "김지하는 왜 파시스트로 전락했는가?"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6> 바그너와 김지하
  2005-08-11 오전 11:57:06
  파르지팔
  
  2001년 12월 런던에 도착한 이틀 후 아직 시차에 적응하지 못한 채로 코벤트가든의 로열오페라하우스를 향했다. 사이먼 래틀의 지휘에 의한 바그너의 <파르지팔(Parsifal)>의 공연날인 것이다.
  
  나는 오페라 애호가이지만 바그너에 한해서는 불과 세 번째 관람이었다. 분명히 말하자면 멀리해 온 것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십수 년 전에 빈국립가극장에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보고 아주 따분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건 내가 미숙했던 탓일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바그너와 반유대주의, 바그너와 나치즘이라는 곤란한 문제이다.
  
  뛰어난 예술을 정치적 이유만으로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은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바그너의 경우, 그렇게 말하고 끝내기에는 문제가 너무도 크다. 나치가 바그너를 이용했다고 하는 옹호론이 있는데 1850년에 '음악에 있어서의 유대성'이라는 논문을 공표했듯이 그자신이 19세기의 반유대주의이데올로기의 주요한 제창자였던 것이다.
  
  히틀러는 바그너에 심취한 사람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할 때 배낭에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악보를 넣어가지고 지냈다고 전해진다. 바그너의 음악자체에도 나치를 매료하는 요소, 국수주의나 파시즘에 이어지는 요소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것에 무경계해도 될 것인가? 이점을 바그너 애호가로 불리는 몇명에게 물어 본적이 있지만 속 시원한 대답을 들은 기억은 없다.
  
  그런데 실은 그 전해인 2000년 여름 잘츠부르크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본 것이다. 지휘는 병중인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대신해 로린 마젤. 나에게 있어 두 번째 바그너 체험이었다. 그게 좋았던 것이다. 불가해한 감동이었다. 더 알고 싶다는 강한 호기심이 솟아났다. 위험한데, 라고 생각한다. 생각하지만 호기심의 수위가 경계심보다 높은 것이다.
  
  공연은 오후 4시부터의 마티네였다. 토요일 오후인만큼 주위는 대단한 인파이다. <파르지팔>은 중세의 <성배전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로, 바그너 자신이 '무대 신성 축전극'이라고 부른 그의 생애 최후의 악극이다. 1882년에 이 작품을 완성해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에서의 초연을 성공리에 마친 후 바그너는 베네치아로 정양을 떠나 이듬해 거기서 세상을 떠났다.
  
  * * *
  
  스페인 북부의 산지 몬살바트의 성주이자 성창(聖槍)과 성배(聖杯)의 수호자인 암포르타스왕이 요녀 쿤드리를 향한 애욕에 눈이 멀어 사악한 마법의 신 클링조르에게 성창을 빼앗기고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순수한 바보'인 파르지팔에 의해 구제되어 성창을 되찾는다. 파르지팔은 성금요일에 왕의 후계자가 된다.
  
  이런 식으로 줄거리를 써 본들 동화로밖에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이 단순한 스토리를 상연하는데 3막, 5시간 남짓의 시간을 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생각해 제 정신이라고 보기 어렵다. 바그너의 세계를 외부에서 바라보는 한 그것은 이해곤란이며 편집광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그 안에 들어가면 상황은 달라진다.
  
  나치제3제국의 선전 담당 장관 괴벨스는 1938년 "유대성과 독일음악은 그 성질부터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당연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독일적인 음악과 유대적 음악을 명확하게 구별해 인식하는 선을 긋는 것은 불가능하다. 제3제국의 문화 정책 이데올로기 이론에서는 바하, 베토벤, 헨델, 모차르트는 모범적이고 독일적으로 간주되었으며, 멘델스존, 말러, 쇤베르크, 코른골트, 쿠르트바이엘 등의 유대계 작곡가의 작품은 독일 음악의 모방에 불과하며, 기법에 치우치고, 깊이가 없으며 진부하거나 부도덕하다는 평가되었다. 힌데미트는 유대계는 아니었지만 문화 볼셰비키여서 배척당했다.
  
  이와 같은 나치에 의한 사이비 이론화 작업을 유리하게 만드는 데 대대적으로 인용된 것이 바그너였다. 나치즘 미학에서 바그너야말로 이상적으로 독일적이었던 것이다.
  
  '성배'란 예수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에서 쓴 식기로, 십자가 위의 예수의 상처에서 솟는 피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11세기부터 12세기에 걸쳐 이와 같은 '성유물'에 대한 숭배가 유럽전역에 퍼졌다. 십자군이 원정에 의해 동방으로부터 갖고 돌아 왔다고 하는 성유물,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피', 성인의 유골, 성의(聖衣)등이 성스러운 것으로 받들어져 그것을 모시는 성당이 각지에 세워졌다. 당시의 사람들은 그 성유물들이 실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부조리한 열광이 이교도인 이슬람교도나 유대교도에 대한 적의와 하나였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스도 수난극'도 이 시기에 전파되어, 일반 민중들 사이에 '유대인'은 '그리스도의 살인자'라는 반감을 심게 되었다. 각지에서 유대인 학살 사건도 다발했다.
  
  '성배'를 찾는 행위는 절대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행위의 은유이다. 암묵리에 소박하고 순진한 그리스도 교도인 파르지팔에 대비되는 것은 교활하고 신용할 수 없는 '유대인'이다. '유대인'을 타자로서 배제하고 그것과는 다른 '그리스도교도', '아리아인종', '독일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나르시스틱하게 강조하는 것에 성배 전설은 크게 기여했던 셈이다. 그에 더해 바그너는 이 전설을 먼 과거에의 동경, 헌신과 자기희생에의 도취, 초인이나 천재의 찬미와 같은 낭만주의 미학에 의한 일대 그림극으로 그려내었던 것이다.
  
  * * *
  
  이런 것들를 알고 경계심을 잔뜩 가지고 관람을 시작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다섯 시간 남짓한 상영 시간 내내, 시종 바그너의 악극이 지닌 불가사의한 광택에 매혹당하고 말았다. 내 머리 속에 전에 함부르크에서 본 프리드리히의 그림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높은 봉우리의 정상에 선 남자. 멀리 보이는 저편에는 험한 산봉우리가 이어지고, 지상은 구름의 바다에 덮여 보이지 않는다. 고독, 우울, 그리고 차가운 고양감. 프리드리히는 독일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바그너의 음악세계는 프리드리히의 회화 세계와 강렬한 친화성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통설을 몸으로 검증하고 있는 심정이다.
  
 
Caspar David Friedrich, , Oil on canvas, 94 x 74.8 cm, Kunsthalle, Hamburg, 1818. ⓒ프레시안  

  베토벤에서는 문제 있다고 생각되었던 래틀의 지휘가 바그너에서는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왕의 역을 맡은 토머스 함프슨의 가창도 일품이었다. 막이 내린 후 나는 흥분과 동시에 크게 당황했다. 한편에는 크나큰 감명이 있었으며 다른 한편에는 깊은 의문이 있었다.
  
  게다가 교양 있는 백인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관객들이, 오늘날의 이른바 '아우슈비츠 이후의 세계'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바그너에 도취되어 있는 것도 나에게는 섬뜩한 것이다. 또한 백인들과 마찬가지로 도취되어있는 일본인 관객의 대부분이 아마도 이와 같은 위험성에 무지할 것이 불안해 견딜 수없는 것이다.
  
  바그너의 음악에 자주 쓰이는 것이 '무한선율'이다. '무한선율'이란 '리듬적, 화성적인 단락의 느낌, 종결의 느낌을 가지지 않는 자유로운 선율'을 의미한다. 즉 '네, 그럼 여기서 일단락'이라거나 '자 이걸로 끝'과 같은 마디를 의식적으로 없애고 있는 것이다. 높이 올라갔는가 하면 다시 내려오고, 내려갔는가 싶으면 다시 올라간다. 커다란 음향이 귀를 울리는가 하면 가늘게 잦아들어가고, 사라졌는가 하면 다시 울려퍼진다. 끝없이 파도치고, 너울거리며,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계속된다. 드디어 끝났나 싶으면 다시 다음 물결의 너울이 밀려온다.
  
  처음에는 당혹감이 있고, 따분함과 피로감이 있지만, 일단 그 무한의 물결에 몸을 맡겨버릴 수만 있다면, 불가해한 관능과 고양감에 잠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장치가 되어있는 것이다. 아마도 다섯 시간이라는 긴 무대에서 오는 피로나 일종의 감각의 마비가 관객의 감성에 가져오는 효과까지 계산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바그너의 '종합예술'의 경우도 부르크너의 교향곡의 경우도, 음악과 듣는 이의 관계는 말하자면 '대등'한 것이 아니다. 바그너의 장대한 '물결의 너울거림' 속에 청자는 '몸을 맡겨야'하며 몸을 맡긴 청자는 부르크너의 음의 신전을 '우러러야' 한다. (클 H 케이터, <제3제국과 음악>, 아카시마 사노리 옮김, 水声社) 바그너는 물결의 너울거림에 몸을 맡기자, 바로 이게 특징이다.
  
  개인의 취향이나 취미, 의심이나 비판, 위화감이나 저항, 그와 같은 감정을 어쨌든지 일단 젖혀두고 말하자면 몰주체, 몰아의 경지로 나아가 거기에 몸을 두고 크나큰 물결의 너울거림에 몸을 맡기는 것, 그것이 바그너의 음악에서 감명과 도취를 얻는 최상의 방법이다. 그리고 그런 태도만큼 파시즘에 바람직한 것은 없는 것이다.
  
  예술과 정치는 별개다, 라는 말을 들을까? 그러나 나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범용한 예술이라면 어떤 정치와도 타협할 수 있을 것이다. 바그너의 예술이 뛰어난 점은, 바로 그 둘이 별개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그래서 고민스러운 것이다.
  
  성배민족(聖杯民族)
  
  코벤트가든에서 지하철을 갈아타고 본드스트리트에서 내려, 조용한 밤길을 걸어 호텔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와 침대에 누워도 아직 바그너의 무한선율이 몸속을 흐르고 있어 신경이 흥분되어 잠이 올 성싶지 않다.
  
  잠들지 못하는 채로 일본에서 가져온 잡지를 집어 들었다. <현대사상(現代思想)> 2001년 12월호, '내셔널리즘의 변모'라는 특집호이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는 바빠서 아무리 해도 읽을 시간이 없어, 그대로 여행 가방에 넣어가지고 온 것이다.
  
  거기에 실린 연세대학교 교수 김철의 '한국의 민족-민중문학과 파시즘 김지하의 경우'라는 논문을 무심히 읽기 시작했는데 금세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논문에 김지하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민족은 사명과 과제를 가진 민족입니다. 뛰어난 전통, 영적인 전통을 가졌으면서 오랜 고난 속에서 수난만 받아온 고난의 민족입니다. 한 문명의 쇠퇴기에는 반드시 인류의 새로운 생의 원형을 제시하는 민족이 나타납니다만, 그 민족을 성배의 민족이라고 합니다.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지배할 당시에는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지금은 한민족입니다. (<사상기행 2>)
  
  또 '성배'라니. 이것은 어찌된 우연인가. 바그너로부터 기분을 바꾸려고 하는 참인데 여기서도 '성배'와 만나고 만 것이다.
  
  김철의 논문은 1970년대 한국 민주화 투쟁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민족-민중문학론(그 대표적 표현자인 시인 김지하과 이론가인 백낙청)이, 오늘날에는 과거에는 투쟁의 대상이었던 파시즘과 심정과 이론을 공유하고 상호침투해 마침내는 공범관계를 이룬다고 하는 빠져나갈 길이 없는 모순과 배리에 빠져버렸다, 이렇게 주장한다. 과거에는 식민지주의나 파시즘에 대한 저항의 정신적 근원이었던 내셔널리즘이, 오늘날에는 국수주의, 파시즘사상으로 전락해버렸다, 그 주된 원인은 민족-민중문학론이 '민족'이나 '민중'이라는 개념을 근본적으로 묻지 않고, 자기완결적으로 절대화해 온 것이 있다는 것이다.
  
  논문을 읽고 심경이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논자의 주장에 반대해서가 아니다. 그 반대인 것이다. 이와 같은 논의는 내게는 처음이 아니었다. 나 자신 1995년에 '김지하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을 통해 그의 국수주의 사상으로의 전락을 비판한 적이있다. (<분단을 산다>, 影書房)
  
  김철의 논문이 지적하듯, 김지하가 하는 말은 어리석고 황당하고 논리성을 결여하며 전형적인 국수주의성향을 보이는 것은 틀림없다. 그 점을 다시 한번 인식해야만 하는 것은 유쾌하지는 않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어버렸는가. 저 80년대의 어둡고 험난했던 날에 김지하라는 이름이 얼마나 특별한 것이었는지 상상할 수 있을까.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타는 목마름으로>, 창비, 1982)
  
  1970년대의 김지하의 대표작 <타는 목마름으로>이다. 이것은 신에게 선택받은 위대한 '성배민족'을 찬양하는 노래가 아니다. 뒷골목에서 흐느껴 울며, 나무 판자에 남몰래 '민주주의만세'라고 쓰는 사람들의, 자유를 갈망하는 노래이다. 여기에는 의심할 바 없이 한국이라는 하나의 국가를 꿰뚫는 보편적인 인간해방에의 지향이 있다.
  
  나 자신, 1970년대초 두 형이 투옥돼 재일조선인으로서 일본에 살면서 바로 타는 목마름으로 자유, 자립, 한국의 민주화를 절절히 바라고 있었다. 당시 나는 한국이 민주화되어 형들이 해방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마음으로부터 믿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런 날은 끝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인생을 의의 있는 것으로 만들기를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나는 주관적 상상에 있어서는 김지하로 대표되는 민족-민중문학을 매개로 해 민주화 투쟁를 하는 한국의 동포들에 속해 있었다. 그것은 내가 일본이라는 장소에서 사는 재일 조선인 2세로서 스스로의 생의 의의와 방향성을 모색하는 데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살기 위해 필요했다고까지도 할 수 있다.
  
  그랬는데, 지금은 어떤가? 그 무렵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형들은 둘 다 살아서 감옥으로부터 풀려났으며 한국사회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민주화의 길을 걸었다. 잇따른 시련이 계속되고는 있으나 저 '한 시대'는 과거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탑과도 같이 우뚝 서 있던 시인은 '성배의 민족' 운운하는 국수주의자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이전에 1970년대 한국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진정으로 괄목할 만한 움직임을 보였던 한국 민중 신학이 지금은 김지하와 '선민사상(選民思想)'을 공유해 '일종의 자기중심주의, 나르시시즘'에 전도해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우려를 표한 적이 있다. 그리고 재일 조선인과 같은 '디아스포라의 조선인'을 시야의 밖에 두지 말고 오히려 어떻게 하면 '디아스포라'와 과제를 공유할까를 생각하는 것이 자기 중심주의의 함정을 피하는 길에 통할 것이라는 생각을 썼다. ('재일 조선인은 민중인가', <반난민의 위치에서>, 影書房)
  
  물론 김지하 한사람이 1970년대 저항 내셔널리즘의 대표는 아니다. 이 시인은 오히려 과격한 예외라는 견해가 있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왜 70년대를 그와 함께 겪은 사람들 속에서 강하고 이성적인 비판이 나오지 않는 걸까.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내가 피억압민족에 의한 해방과 자립을 위한 운동들이, 언제든 어디에서든 불가피하게 자기중심주의나 국수주의에 전락해버리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고 결론짓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을 외면한 시니컬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생각은, 식민지지배의 책임을 인정하게 않으면서 피억압민족의 저항을 눈의 가시처럼 느끼는 사람들에게만 환영받을 것이다.
  
  내셔널리즘을 넘는다는 것은 '선진국'이라는 안락한 장소에서 '선진국'으로서의 기득권을 의심 없이 향수하면서 타자를 내셔널리스트라고 지칭하면 그걸로 되는 것이 아니다. 피억압자가 저항을 위해 내셔널리즘을 필요로 하는 상황, 피억압자를 내셔널리즘에 결집시키는 억압구조,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방향성을 결여한다면 그 담론은 '내셔널리즘'이 아니라 '저항'을 무력화시키는 힘으로만 작용할 것이다.
  
  197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내셔널리즘'이라는 한 마디로 아우르는 것도 하물며 그것을 김지하로 대표하게 하는 것도 단락적인 시각에 불과하리라. 그것은 무엇보다 해방과 자립을 위한 투쟁이었다. 그것은 내셔널리즘에서 기독교, 자유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정치적 입장의 상이를 지니고, 군사 독재 타도라는 공통의 목표로 묶인 일군의 사람들이 진 역할이었다. '김지하'란 그와 같은 다양한 사람들의 집합을 상징하는 집합명사였다. 시대의 변화, 상황의 진전은 그 집합적 '인격'의 분열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분열과정을 거쳐 한국의 저항 내셔널리즘이 더 보편적인 인간해방의 사상을 향해 스스로를 열어 가는 가능성을, 나는 단념하고 싶지 않다.
  
  지금의 한국에서는 1970년대, 1980년대에 군사 정권과 싸운 세대가 사회 각 분야의 중핵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의 대부분은, 하나의 시대, 하나의 사회의 주인공으로의 자신에 넘쳐있다. 김철이라는 논객도 자신이 한국이라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시련의 한 시대를 살아왔다는 자각에는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그의 논의는 저항 내셔널리즘의 바람직한 분열과정을 촉구하고, 그 최량의 자산을 내일에 살리는 것에 기여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해서 어떤 한시대의 변혁을 중심에서 짊어졌던 '우리'는 해체돼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답할 수 있는 다음의 '우리'가 형성된다. 다이나믹한 분열과 종합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새로운 시련에 맞서는 새로운 운동과 사상이 단련을 받아갈 것이다.
  
  내 심정이 혼란되어 있는 것은, 나 자신이 그와 같은 다이나미즘의 '밖'에 놓여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한국의 동포들과 똑 같은 고통을 체험한 것은 아닐지라도, 나 또한 '시련의 시대'의 수인(囚人)의 몸이었다고 하는 것은 아마도 허락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난 30년을 '밖'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20대부터 50대라는, 사람의 인생의 중심을 이루는 세월이었다.
  
  나와 같은 디아스포라와 한국 동포들이 투쟁을 통해 '합류(合流)'하는 것이 1970년대초에 내가 막연하게 지니고 있던 비젼이었다. '합류'란 한국 민중 신학의 용어이다. 그러나 '합류'는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 나는 자신이 여전히 '밖'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 인생의 유한한 시간이 그렇게 지나갈 것이라는 것을 런던의 오래된 호텔에서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번역 : 김혜신 가쿠슈인대학 강사(미술사)
   
 
  서경식/일본 게이자이 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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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5-08-12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김지하가 어떤 일을 하던 비난하지 않습니다. 유신시대에 김지하만큼 일관되게 박정권과 투쟁한 사람은 없거든요. 저희 세대는 그분에게 빚을 졌습니다. 그분이 비록, 91년에 그 유명한 봉창을 뚫었다 할지라두요....

2005-08-12 1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urblue 2005-08-12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바람구두 2005-08-12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그런데 어째서 테베 시민들은 오이디푸스를 추방했을까요?
테베 시민들은 모두 오이디푸스에게 빚을 졌었을 텐데요...흐흐
 
 전출처 : 릴케 현상 > 파시즘에 있어서 '대중의 국민화'-강유원

파시즘에 있어서 '대중의 국민화'

임지현/김용우(엮음), <<대중독재>>, 책세상, 2004.
김용우(지음), <<호모 파시스투스>>, 책세상, 2005.

'대중독재'라는 술어로써 포괄되기에는 통일성이 부족 -- 이 부족함은 성급하게 만들어진 듯한 술어 자체의 모호함에서 기인하기도 하는데 -- 해보이는, 불균질한 논문 18편을 묶은 <<대중독재>>는 자료집으로 규정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니, 파시즘이 서유럽, 중유럽, 동유럽, 한국, 일본에서 어떻게 대중을 동원하고 그것에 대중이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가담했는지에 관한 기본적인 자료와 연구사적인 성과, 참고문헌이 필요한 이들에게만 소용될 책이다.

엮은이 중의 한 명인 임지현은 프롤로그에서 '대중독재'라는 술어를 채택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대중독재mass dictatorship라는 새로운 용어로 좌파 독재와 우파 독재를 아우르려는 이 프로젝트의 시도도 같은 맥락에 서 있다. 즉 강제와 폭력이라는 피상적 이미지의 물밑에서 작동하는 대중의 자발적 동원 매커니즘을 드러냄으로써, 아래로부터의 시각에서 20세기 독재체제를 이해하자는 것이다." 이 술어를 도입하면 파시즘의 핵심 규정 중의 하나인 '대중의 밑으로부터의 동원과 이들의 국민화nationalization를 위한 운동'을 부각시키는 장점이 있기는 하겠으나, 원칙상 대중독재 --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중기반 독재'일 것이다 -- 는 파시즘의 하위 요소인데도 그것이 파시즘과는 구별되는 또다른 체제를 가리킨다는 오해를 낳을 수도 있다. 달리 말해서 파시즘의 개념을 명료하게 규정한다면 -- 예전과는 달리 이제는 이것이 어렵지 않다 -- 굳이 따로 고안한 술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더나아가 파시즘을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의 역동적 상호관계를 함께 고찰해야만 총체적 이해가 가능할 터인데도, 그 측면만을 떼어낸다면 오히려 그러한 이해를 저해할 우려마저도 생겨난다는 것이다.

"'대중독재'의 지형도 그리기"라는 제목을 가진 프롤로그에서 임지현은 대중독재의 지형도는 차치하고라도 책에 들어있는 논문들의 개괄마저도 제시하지 못하며, 독자가 프롤로그 자체를 요약하는 일도 어렵게 만듦으로써 술어의 불필요함, 불명료함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는 일정한 틀을 가지고 주어진 자료를 재구축한뒤 핵심으로부터 주변으로 서술을 전개하지 못하는, 저널리스틱한 글쓰기가 가진 무능력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학자는 이야기꾼이 아니라 체계적 학자여야 한다는 것을 각성시켜주는 사례라 하겠다.

김용우의 <<호모 파시스투스>>는 "프랑스 파시즘과 반혁명의 문화혁명"이라는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프랑스 파시즘에 관한 책 -- 이 역시 자료집 수준이다 -- 이다. 체계를 갖추고 쓰여진 진정한 의미의 단행본이 아니라 1994년부터 2002년까지 여기저기에 기고한 11편의 글들을 2005년에 묶어낸 것이다. 책을 만들기 위해 오래 전에 쓴 글들까지 집어넣다보니 한참 옛날 이야기를 하고 있는 상황마저 보인다. 이를테면 제1부 제1장 '파시스트 이데올로기' 첫 문단은 다음과 같다: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이즘' 가운데 파시즘만큼 의미가 불명확하고 논란이 많은 용어도 드물 것이다. 파시즘의 이러한 모호성은 먼저 파시즘이라는 용어 자체와 이 말의 남용에서 연유하며 또한 그것이 포괄하는 대상이나 시기의 다양함 때문이다." 이 글이 쓰여진 1994년에는 이 언명이 유효하였을지 모르나 10년이 지난 지금 파시즘에 관한 책 첫머리에 쓰여지면 엉뚱한 것이요, 지난 10년 동안 이 입지로부터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있었음을 자백하는 것이다.

출판사의 관대함에 힘입어 세상에 나온 두 권의 책에 관한 간략한 언급을 그치고 <<대중독재>>의 몇몇 글들과 그것들에서 참조하고 있는 다른 책들에서 이끌어낸 파시즘의 대중동원 기제에 대하여 몇가지를 서술해보기로 하자.

황보영조는 "프랑코 체제와 대중"이라는 논문에서 대중의 개념을 파시즘과의 연관 속에서 잘 정리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대중masses이라는 용어는 19세기 중엽(영국의 경우 1830년경, 스페인의 경우 1870년경) 나타난 것으로, 산업 프롤레타리아나 도시의 하층계급, 곧 토지를 떠나 자본주의적 공업화나 도시화 과정에 편입된 사람을 의미한다." 이는 대중이 시기적으로는 근대의 산물이며, 공간적으로는 도시에 국한되는 존재임을 뜻한다(그런 까닭에 황병주가 "박정희 체제의 지배담론과 대중의 국민화"라는 논문에서 농촌 새마을 운동을 사례로 들어 사태를 분석할 때에는 이러한 대중 개념을 적용할 수 없을 것이나 그는 그러한 것에 민감하지 않다). 근대 도시에서 형성된 대중은 지역공동체나 혈연과 같은 과거의 전통과 철저하게 단절된 상태이고, 새로운 유대는 아직 생겨나지 않았으며, 근대라고 하는 낯선 시대가 가져다 준 "물질적 고통과 무력감, 자본주의적 생산이 옛 생활 유형을 파괴한 데서 오는 상실감과 소외감"만이 증폭되고 있었다. 근대의 이러한 부정적 측면을 극복하기 위해 대중은 "나름대로 노조와 정당을 결성하기는 했지만 노동 단체가 제공하는 사회.문화적 네트워크에 편입된 대중은 의외로 소수에 불과했고, 대다수는 존재의 의미와 소속감을 느낄 대안적 구조에 접근하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지역적 공동체에 기반한 노동자 결집에 위협을 느낀 부르주아-반동 연합은 파리 코뮌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철저한 폭력으로써 그들을 제거해나갔다. 파편처럼 흩어진 대중 -- 이것이 바로 "파시즘의 대중적 기초를 형성해 나갈 공간을 제공해 주었다. 이탈리아 파시즘과 독일 나치즘 뿐만 아니라 스페인의 프랑크 체제도 이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나름의 정책을 펴나"갔거니와 그것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은 바로 전간기戰間期의 현실 파시즘이 그 증거로 제시될 수 있겠다.

그람시는 <<옥중수고>>에서 파시즘의 이러한 성공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그러한 파시즘의 도식이 특히 도시와 농촌의 광범한 소부르주아지와 같은 이탈리아의 특정 사회 집단들에게는 기대와 희망의 시대를 창출할 수 있다는 -- 그리고 실제로 창출하였다 -- 사실이다. 그리하여 그 도식은 전통적 지배계급들의 수중에 있는 헤게모니 체계와 군사적.시민적 억압의 힘을 강화시킨다. 따라서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수동적 혁명'이 정치 영역에서 작동했던 것처럼 국제 경제의 영역에서 '진지전'의 요소로서 작용한다. 1789년부터 1890년까지 유럽에서는 프랑스 혁명에서의 (정치적) 기동전과 1815년부터 1870년까지 계속된 장기적 진지전이 있었다. 최근에는 1917년 3월에서 1921년 3월까지 기동전이 정치적 측면에서 일어났으며 그 이후에는 진지전이 -- 실천적(이탈리아)이면서 이념적(유럽)으로 -- 이어졌는데, 그것을 대표하는 것이 파시즘이다."

그람시의 이러한 언급을 통해서 우리는 파시즘이 대중을 지도하는 힘을 획득했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전간기 이전인 1815년부터 1870년까지의 장기적 진지전을 참조함으로써 전간기 파시즘만을 진정한 파시즘으로 보는 해석을 논박할 수도 있겠는데, 이때 핵심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대중운동이라는 계기일 것이다. 대중운동과 대중민주주의는 전간기 파시즘이 그것을 활용하기도 전부터 오랜 발전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이를 개입시키면 지도자와 대중의 대립, 대중에 대한 폭력 등을 주장하는 전체주의적 이론의 한계를 지적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파시즘은 어떤 매카니즘을 통해서 열광적인 대중동원을 이룩하였는가? 주지하듯이 이 점에 관해서는 그람시가 자신의 지식인론, '대중의 상식으로서의 철학' 등의 테제 등에서 표명한 바 있으니 우리는 근본적으로 그것을 참조하면서도 그것에 덧붙여 우선은 벤야민의 '정치의 심미화' 개념을 거론할 수 있겠거니와, 이 개념이 직접적으로 나타난 것은 그의 서평 "독일 파시즘의 이론"과 논문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의 추기追記이다. 그는 파시즘의 정치경제학적 특징에 주목하여 "파시즘은 대중이 폐지하고자 하는 소유관계는 건드리지 않은채 새로이 생겨난 프롤레타리아트화한 대중을 조직하려 한다"고 하며 이를 위해 대중에게 "의사를 표현하게 하는 데에서 구원을 찾고자 한다"고 지적한다. 대중에게 의사표현의 기회와 기구를 제공하는 것 -- "주간 뉴스 영화"와 같은 현대의 테크놀러지는 이것에 봉사한다 -- 이 정치의 심미화의 첫 단계라면 "인류 스스로의 파괴를 최고의 미적 쾌락으로 체험케 하는" 영원한 전쟁은 그것의 완성이라 할 수도 있겠다.

과연 벤야민의 정치적 심미화 개념은 파시스트 체제가 생산해내는 넓은 의미의 문화적 산물들을 정치적으로 파악하고 비판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해주나 그 과정에서 대중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측면까지 포괄하고 있지는 못하다. 대중은 파시스트 체제가 현대의 테크놀러지를 활용하여 만들어낸 스펙터클을 소비하는 수동적 존재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벤야민은 자신의 논문에서 제시하고 있는 대중의 적극적인 계기, 이를테면 "러시아에서 영화에 접하게 되는 배우의 일부는 우리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배우가 아니라 스스로를 연출하는 민중"이라는 관점을 진전시키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물론 그는 그에 이어 곧바로 "서유럽에서는 영화의 자본주의적 착취가, 오늘날의 사람들이 재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당한 요구, 고려를 금지하고 있다"는 제한을 덧붙이고는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정치의 심미화를 보완할 수 있는 매카니즘을 찾아야 할 것인데, 그것은 '정치 종교' 또는 '정치의 신성화'이거니와 이는 조지 모스George Mosse의 <<대중의 국민화The Nationalization of the Masses>>에서 분석되고 있다.

모스는 어떤 문화적 기제가 작동했기에 나치 체제에 대한 대중의 자발적 지지, 더 나아가 대중의 열광, 합의가 도출되었는지를 묻고, 파시스트 정치학의 본질을 이루었던 신화와 의례의 중요성을 지적하며, 대중을 체제 안으로 포섭하여 새로운 주체로 만든 나치 정치를 '신정치New Politics', 또는 정치종교라고 규정하였다. 얼핏 보기에는 이는 정치의 심미화와 잘 구별되지 않는다. 나치가 "축제, 대중행진, 조형물 등과 같은 여러 차원의 대중 미학을 통해 문화 예술 영역, 일상생활과 공적인 정치 영역을 서로 뒤섞이게 만들어 지속적으로 대중을 매혹했고, 심지어 나치의 폭력마저 미적인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게 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정치종교는 정치의 심미화 이상이며 나치즘은 분명 정치종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정치종교는 먼저 집단 정체성을 창출하기 위해 전통을 재구성한다. 그러고 나서 한 개인이나 어떤 집단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한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감정적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제스처와 상징의 그물망 속에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묶어줄 수 있는 공격적 의례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본다면 "반유대주의, 인종주의, 민족공동체와 같은 나치의 정치 이데올로기들은 종교적 언어상징, 의례 및 경배의식 등을 통해서 신성화"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정치의 심미화가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히틀러 신화는 나치의 정치적 메시아주의의 맥락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또한 나치의 정치적 메시아주의의 근저에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그들의 종말론적이고 묵시록적인비전이 자리잡고 있었음이 강조되어야 한다. 히틀러는 단순한 정치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는 예언자로, 심지어 구세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기제들을 통해서 국민화된 대중들은 파시즘 체제의 암묵적 동의자로서, 적극적 가담자로서, 체제의 핵심 세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그들의 그러한 행태는 <<나치시대의 일상사>>, <<나치의 자식들>>을 통해서 확연히 알아볼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대중을 국민으로 만드는 것'이 파시즘의 핵심 요소 중의 하나이며, 그러한 것을 성취하기 위해 작동하는 매커니즘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대중의 국민화'는 근대 이후의 국가에서는 어디서나 수행되어 왔던 일이기도 하니 그것에만 지나치게 주의를 기울인다면 어떤 국가이든지 파시스트 체제의 징후를 가진 것으로 판단하게 될 것이며, 이는 '여기저기에 파시즘'이라는 지표를 남발하는 경고과잉을 초래하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파시즘에 관심을 가진 이는 여타의 요소들과의 역동적 관계파악이라는 원론적인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요구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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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04 2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출처 : 물만두 > 오, 자히르 중에서

얀트 법 (the law of Jante)

Janteloven은 덴마크에 전해져 오는 일종의 관습법이다. Aksel Sandemose(1899 - 1965)가 정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3년 작품인 'en flygtning krydser sit spor'(A refugee crosses his track)에 실렸다고 한다. 모세의 율법처럼 열 가지 지켜야 할 것을 담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Du skal ikke tro du er noget.
  2. Du skal ikke tro at du er lige så meget som os.
  3. Du skal ikke tro du er klogere end os.
  4. Du skal ikke bilde dig ind at du er bedre end os.
  5. Du skal ikke tro at du ved mere end os.
  6. Du skal ikke tro at du er mere end os.
  7. Du skal ikke tro at du dur til noget.
  8. Du skal ikke le ad os.
  9. Du skal ikke tro at nogen bryder sia am dig.
  10. Du skal ikke tro at du kan vere os noget.

이것을 (영문으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1. You shall not believe you are anything. (skal = shall, tro = believe)
  2. You shall not believe you are as worthy as us. (os = us)
  3. You shall not believe you are any wiser than us. (klogere = wiser)
  4. You shall not imagine you are better than us. (bilde = imagine, bedre = better)
  5. You shall not believe you know more than us. (ved = know)
  6. You shall not believe you are more than us.
  7. You shall not believe you are good at anything.
  8. You shall not laugh at us. (le = laugh)
  9. You shall not believe anything cares about you.
  10. You shall not believe you can teach us anything.

내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대개 "당신이 잘났다고 믿지 말라"는 내용이다. 겸손함을 강조하는 덴마크의 모습이 엿보인다.

물론 현대의 생활에 비추어 내용이 좀 진부한 감은 있다. 재밌게도 실제로 이 법에 대한 반대자(Anti-Janteloven)들도 있어서 일부러 거꾸로 행동하는 ("shall not"을 "shall"로 옮겨서 행동한다.) 사람들이 덴마크에 꽤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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