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길의 '남미 리포트' <4> 페론 사망 30주년을 맞아

- 프레시안, 2004. 07. 02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장기집권(3선)을 했고 아르헨 정치인 가운데 가장 유명한 후안 도밍고 페론이 사망한 지 7월 1일로 30년이 지났다.
  
  아르헨티나의 모든 언론들은 페론 사망 30주년을 맞아 페론의 업적 재평가 작업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유력 일간지들은 페론의 업적과 당시의 보도 자료들을 재구성해서 특집을 꾸미는가 하면 TV매체들은 페론 집권 당시의 업적들을 화면으로 구성해 하루 종일 내보내고 있다.
  
  아르헨티노들의 뿌리깊은 반미정서, 국민들 사이에서 식을 줄 모르는 페론에 대한 향수, 한국이 정치ㆍ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마다 반면교사로서 단골 메뉴로 활용되는 포퓰리즘과 페론이즘의 실체는 아르헨 현지 학자들간에도 서로 그 평가가 서로 엇갈린다.
  
  한국의 대다수 아르헨 분석가들은 아르헨을 경제적으로 가장 실패한 나라, 지구상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 쯤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아르헨의 몰락은 페론이즘이 불러 왔다는 섣부른 평가를 내리고 포퓰리즘의 대명사로 아르헨티나를 지적한다.
  
  과연 그럴까. 필자 역시 20여년 동안 현지 학계와 정치인들 그리고 사회 지도층 인사들과 포퓰리즘과 페론정권의 정치적 업적에 대해 논쟁을 벌여왔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명쾌한 답변을 보류한 상태이다. 그러다 우연히 지난 3월 주아르헨 한국대사관(대사 최양부)이 주최한 경제 강연회에서 이와 같은 의문들에 대한 회답을 듣게 되었다.
  
  ‘미국과의 뿌리깊은 반목의 역사’세미나의 연사로 초청된 경제학자이자 역사학자인 마리오 라포포르트 Bs.As대학 교수의 아르헨 역사와 페론에 대한 평가를 요약한다.
  
  “1800년 말에서 1930년대까지 세계의 곡창으로 불리웠던 아르헨티나는 인구는 적었으나 연간 3억의 인구를 먹일 만큼의 식량을 생산했다. 그리고 전국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쇠고기는 유럽시장을 독점했다. 물론 당시 세계를 주름잡았던 영국의 경제에 종속된 상태였지만 아르헨티나는 그야말로 태평성대를 누렸다.
  
  아르헨산 곡물과 육류를 수입해 가던 미국이 유럽시장에서 주도권을 잡자 1926년부터 미국과 아르헨티나는 경쟁국가로서 대립의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노들은 유럽을 겨냥한 곡물 경쟁에서 미국인들의 단결된 힘에 곡물 수출 1위 자리를 내놓게 된다.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마라'로 유명한 에비타 페론과 다정했던 한때. ⓒ김영길

  그때부터 아르헨티나는 세계시장에서 미국에 밀리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의 뿌리깊은 반미 역사는 이렇게 시작이 됐다. 당시 아르헨의 소수의 대지주들은 드넓은 기름진 땅에서 생산되는 곡물로 넘쳐나는 부를 주체하지 못하고 유럽의 부유층과 귀족들과의 교류만을 경쟁적으로 고집했고 가진 재산을 흥청망청 소비하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그들은 주체할 수 없는 재산을 재투자라는 개념보다는 소비하는 데 전념, 미국과 유럽자본이 아르헨으로 들어와 각종 기간산업에 투자하는 모순을 낳게 한다. 따라서 아르헨티나의 국부는 자연스럽게 해외투자가들 손에 넘어가게 된 것이다.
  
  미국과의 악연은 지난 70년대 군정시대와 90년대 정권을 잡은 메넴으로 이어진다. 자유시장과 금융시장 개방 물결을 탄 미국 자본은 소비를 미덕으로 아는 아르헨티노들에게 다가와 돈을 쉽게 쓸 수 있게 빌려주고 상황이 불리하면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려 아르헨정부의 외채는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그리고 정권유지를 위해 외국에 손을 벌리는 아르헨 정치가들에게 국제시장에서는 몇 배나 높은 이자를 책정, 돈을 빌려주어 지금의 대다수의 외채는 이자에 이자가 붙은 액수다.
  
  여기에는 아르헨티나의 국가신용도를 매기는 미국계 신용평가 회사들도 한몫 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국가 위험도가 높을수록 많은 이자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남미의 대국 아르헨티나가 아프리카 대륙의 미개국보다 국가위험도가 몇배나 높은 것은 좋은 본보기일 것이다.
  
  이와같은 미국의 견제로 한때 아르헨 국채는 미 월가에서 액면가 1백달러 짜리가 20~30달러로 거래되기도 했다.최근 아르헨정부가 원금의 75%를 탕감하자고 버티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아르헨티나가 가장 많은 외채를 기록했던 메넴정권 당시에는 민영화라는 허울을 내세워 모든 민간차관을 정부가 보증을 해주는 제도를 도입하기까지 했다. 이에 따라 부패한 지방관리들은 미국계 은행과 연계, 유령회사를 차려놓고 차관을 제공받아 부도를 내는 등 대다수의 외채는 정부가 알지도 못한 부채라고 할 수 있다.
  
  미국과 아르헨티나의 뿌리깊은 반목은 이제 IMF가 이어받은 셈인데 국제통화기금이라는 게 민간 투기펀드 투자자들의 변호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르헨 중산층의 대부 페론과 포퓰리즘’
  
  혹자는 ‘아르헨티노들이 페론이즘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아르헨티나의 장래는 없다’고 평가한다.그러나 라포포르트 박사는 아르헨 역사상 소득의 분배가 가장 잘 이루어지고 산업이 활발하게 움직였던 시기가 페론집권 시절이였다고 반박한다. 계속해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페론집권 시기인 1949년에서 1976년까지 국민총생산은 127%의 성장을 기록했고 개인소득은 232%가 증가했다. 이런 수치의 발전은 아르헨 역사상 처음이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페론은 정권초기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으나 아르헨 역사상 가장 많은 산업투자를 단행했고 아르헨이 농업국가에서 공업화로 가는 데 이바지했다. 그리고 모든 기간산업을 국유화 시켰다.
  
  이 과정에서 지방의 토호세력들과 해외 자본가들과의 마찰은 불가피했고 이런 불만세력들이 군부를 움직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는 산업의 국유화가 세계적인 추세였다. 물론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명분도 있었지만. 76년 정권을 잡은 군부는 페론의 업적을 말살시켰으며 국민들을 세뇌시키는 작업을 단행했다.
  
  따라서 페론의 업적이 아직까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것이다. 페론은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가 아닌 자본주의 사상을 지녔지만 소득의 재분배에 심혈을 기울여 소수에 몰린 부를 다수에 재분배하는 데 기여했다. 이 기간동안 아르헨 국민가운데 60%를 차지했던 극빈서민들이 전체 국가소득의 33%를 분배 받았다. 이 또한 아르헨 역사상 처음 있는 부의 재분배 현상이었다.
  
 
  취임연설을 하고 있는 후안 도밍고 페론장군. ⓒ김영길

  다시 말해서 그때까지 소작인들과 대지주로 구분되던 아르헨티나에 중산층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시작했다. 페론은 몇몇 대지주들에 편중된 부를 서민들에게 분배, 60%에 가까운 중산층을 만들어 당시 세계에서 가장 두터운 중산층을 형성하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대중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즘의 시조로 페론을 꼽는데 나는 이에 동의할 수 없다. 페론은 대중을 이용해 자신의 집권 연장을 노리거나 선거에 이용하지 않았다. 지방 토호세력과 대지주들에 착취당하던 민중들이 페론을 통해 자신들의 권리를 찾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페론을 못 잊어 하는 것이다.
  
  아르헨티나에 연금제도와 휴가, 상여금, 무료의료혜택 등 사회보장 제도가 생긴 것도 페론의 업적이었다. 그리고 페론은 여성들의 참정권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 전까지는 일반국민들은 대지주들이나 자본가들에게 노예와 별반 차이가 없이 착취를 당했다는 말이다. 이 과정을 통해 국민들은 아직까지 페론의 업적을 고맙게 여기는 것이다. 이것이 포퓰리즘이란 말인가.
  
  군부는 페론의 이와같은 업적을 말살하고 그의 부인 에바를 내세워 페론을 무능하고 부패한 통치자로 만들었던 것이다. 페론의 업적이 언젠가는 제대로 평가를 받겠지만 한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아르헨티나는 아직까지 정치 통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아르헨티나의 경쟁국이었던 미국이 빠른 기간안에 세계 최대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민자 누구에게나 쉽게 시민권을 주어 참정권을 행사하게 하고 국가에 봉사할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는 아무에게나 시민권을 주지 않았다. 이것은 정치통제를 위한 것이었으며 부정선거에 이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방토호세력과 연방 대부호들의 끼리끼리 문화가 성행, 새로운 이민자들이나 인재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막았다는 말이다.”
  
  "아르헨티나는 1990년대초 자칭 페론주의자라고 부르짖는 카를로스 메넴이 집권을 했다. 그러나 메넴은 페론주의자가 아니며 좌도 우도 아닌 특색없는 정치가였다. 그는 집권기간동안 페론이즘을 적절히 활용했을 뿐이다. 그와 운명을 같이한 미 하버드대학 출신의 까발로 경제장관의 등장으로 아르헨 경제는 유럽에서 미국에의 종속으로 바뀌게 된다. 그 당시 아르헨티나는 모든 통화를 달러화시켜 완전히 미국에 종속되려고 하는 시도도 있었다.
  
  친미파였던 그는 무분별한 투기펀드의 유입으로 경제 위기를 가속화 시켰으며 막대한 외채의 증가만을 남긴 채 냄비부대에 의해 쫓겨나는 신세로 전락했다. 까발로의 가장 큰 실책은 외자유치를 위해 모든 민간 차관을 정부가 보증해 주는 실속 없는 정책과 4백억 달러에 달하는 연금기금을 민영화한 데 있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정부는 상시 활용이 가능한 4백억 달러 정도의 예비비를 민간인들에게 이양하는 실수를 범한 것이다.
  
  그로 인해 자금 고갈을 느낀 까발로는 일반예금을 동결하고 델라루아와 함께 몰락의 길을 걷게된 것이다. 그리고 대책없이 태환을 장기간 실시하고, 수입을 자유화 함으로써 국내산업이 경쟁력을 잃고 공업분야가 연쇄 도산하는 우를 범한 것이다. 또한 자금시장의 자유화로 많은 민간자본이 해외로 유출됐다. 메넴과 까발로 집권기간 동안 해외로 빠져나간 민간 자본은 1천억 달러가 넘는다.
  
  마지막으로 나는 페론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나 역사학자로서 나는 전 세계에 흩어진 아르헨티나의 역사적 자료와 각종 경제지표의 사료를 모으는 데 한 평생을 바쳤다. 따라서 오늘 이 세미나의 자료들은 내 개인적인 생각이 아닌 확실한 증거 자료들에 의한 것임을 밝힌다.”
  
  ‘키르츠네르 대통령에 대한 평가’
  
 
  재 집권에 성공한 페론이 퍼스트레이디가 된 에스텔라 페론과 함께 유명한 카사로사다 발코니로 오르는 장면. ⓒ김영길

  “지난해 중반 정권을 잡은 키르츠네르 정부는 지난 40년대 말 산업화를 주장했던 정치인들을 대거 기용, 국내시장의 활성화를 이룰 것이다.그리고 그 기초위에 해외시장 확대라는 목적을 달성할 것으로 보인다. 키르츠네르 정부가 미국주도의 ALCA나 IMF의 압력에 자신있게 대항하는 것은 메르코수르라는 인구 2억 이상의 시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브라질이라는 거대한 시장이 아르헨으로서는 미국에 대항할 응원군이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영국과 미국에 끌려다녔던 역대 통치자들과는 다르게 당당하게 미국에 맞서 외채협상을 벌이는 모습은 국민들에게 옛 페론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키르츠네르 대통령이 80%에 가까운 지지도를 유지하면서 페론 이후 가장 인기 있는 대통령이 된 비결이다.키르츠네르 정부는 페론이즘의 재건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남미 대국 아르헨의 실체’
  
  한국의 언론들과 아르헨 전문가들이 주장하는 실패한 경제, 그리고 국민의 대다수가 헐벗고 굶주린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현실과는 너무나도 차이가 있다. 물론 미국 주도의 언론플레이의 영향이겠지만 말이다. 정부가 디폴트를 선언하고 국가신용도가 몇천 %로 치솟아도 아르헨티나의 중산층은 별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들은 평상시와 다름 없이 주말에는 각종 파티에서 포도주와 샴페인을 터트리며 축구와 예술을 논하면서 즐겁게 살아간다.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웰빙’의 의미를 생활 속에서 가장 잘 누리고 사는 게 아르헨티노들이라면 틀림이 없을 것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아르헨티노들은 매년 여름이면 우루과이나 브라질 휴양지의 개인 별장으로 느긋한 여름 휴가를 떠난다. 그 숫자가 극소수일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매년 12월부터 다음해 3월초까지 아르헨은 전국의 거리가 한산할 정도로 국민 대다수가 휴가를 떠난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한국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일까. 단순하게 각종 실업자 수치와 극빈자 비율 등만을 본다면 아르헨티나는 가난한 나라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언론이나 학자들이 잘못 평가하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은 국경의 사방이 열려 있는 아르헨티나로 ‘아르헨 드림’을 찾아 오늘도 국경을 통과하는 주변국가 극빈자들의 수가 많게는 수천에서 수만에 이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르헨티나에는 볼리비아, 페루, 브라질, 우루과이, 칠레에서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체류자 수가 1천만명을 육박한다. 지방의 상황도 거의가 비슷해서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들 불법, 혹은 정식으로 고용된 외국인 인부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페론의 장래식행렬. ⓒ김영길

  물론 외신들의 입장에서는 볼때 이들 주변국가 노동자들도 같은 언어와 문화를 가진 남미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다같은 아르헨티노로 볼 수는 있다. 아르헨티나에 경제적인 파동이 일어날 때마다 떼를 지어 몰려드는 외국언론들, 특히 한국의 TV매체들은 이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주변국가의 불법 체류자들의 생활이 아르헨티나 전체국민들의 모습인 양 방영을 한다.
  
  이것은 마치 한국의 실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외신들이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동남아 근로자들의 생활상을 카메라에 담아 이것이 한국사람들의 생활 모습이라고 방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는 정치가 부패하고 부정 부패가 어떻고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라는 독설을 퍼붓는다면 한국 언론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한국의 언론 매체들이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아르헨티나에 대한 이런 악의적인 보도가 주한 아르헨 대사관 관계자들에게 알려지고 이들이 아르헨 현지 언론에 이런 사실을 귀띔해 준다면 결국에는 아르헨 현지에 살고 있는 한인동포들에게 그 불똥이 튄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몇년 전 한국의 한 유력 TV방송이 아르헨티나 특집을 방영한 후 그 내용이 아르헨티나 언론에 알려지고 난 후 아르헨티나 언론들은 재아 한인들이 불결하고 불친절하며 탈세의 주범들이고 불법고용을 일삼는다고 연일 대서특필한 사례도 있었다. 이를 현지 한인들은 4월사태라고 부른다.
  
  이 때문에 상당수의 한인 동포가 이곳을 떠나는 잊지 못할 경험을 하기도 했다. 이는 순전히 한국언론과 아르헨을 잘 알지 못하는 엉터리 전문가들의 논평이 낳은 쓰라린 해프닝이다.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불법 체류자들에 대해 아르헨 정부는 한국과는 달리 관대하다. 이들이 각종 범죄 연루와 사회불안 요소가 되고 있는데도 말이다.최근 아르헨 입법부는 이들 불법 체류자들을 사면해서 정식으로 이곳에 정착하게 하자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들의 인권이나 개인 수익을 착취당하는 것을 막아주자는 조치인 것이다.
  
  세계화를 외치는 한국도 이제는 아르헨티나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내릴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김영길/언론인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urblue 2005-05-24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따우님, 밤에는 주무세요. 도대체 뭐하시는 겝니까!

urblue 2005-05-24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그렇군요. 조교에 알바까지 하는 대학원생이로군요. 저런저런...

부리 2005-05-24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론주의, 우리나라 보수언론들이 맨날 공격하는 소재죠. 페론이 물러난 지 30년이 흘렀지만, 아르헨티나가 위기만 닥치면 페론주의 운운하더이다. 제가 알기에 최근 대통령들은 페론주의랑 아무 상관이 없었는데 말이죠.... 아르헨티나가 잘나가면 "대통령이 페론주의 버리고 신자유주의 해서 그렇다"고, 노무현 좀 반성하라고 하다가, 다시 경제가 악화되면 "페론주의 탓"이라고 하는 걸 무수히 봤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페론주의에 대해 제가 오해하고 있던 것도 있고, 더 결정적으로 아르헨티나 중산층의 삶에 대해 오해를 했네요.
 

정병기
월간 『노동자의 힘』제41호(2003.10.20)

 

'조합주의'와 코포라티즘

 코포라티즘은 20년 전에 '조합주의'란 용어로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그러나 조합주의라는 용어는 노동조합론에서 말하는 노동조합주의(trade unionism)나 생디칼리즘(syndicalism)과 혼동되는 난점을 보인다. 뿐만 아니라 '조합'이라는 말은 계약에 기초한 근대사회의 다원주의적 이익대표 개념에 더 가깝기 때문에 코포라티즘이 함축하고 있는 유기체적이며 공동체적인 의미를 표현하지 못한다. 코포라티즘은 사회적 권리와 의무를 전제로 자율적 직능집단의 정책결정 참여를 통해 안정된 사회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던 중세 장원제도에서 연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코포라티즘'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적절한 용어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적절한 용어가 발견될 때까지는 코포라티즘이라는 영어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고자 하는 학회의 한 결정을 따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된다.  

 

 코포라티즘의 개념

 코포라티즘은 1970-80년대에 사회과학의 주요 논쟁 대상이 되었는데, 그 정의와 접근방법은 학자마다 매우 달랐다. 자본주의 체제의 정치적 하부구조 중의 하나로 파악하거나, 포드주의적 축적양식과 연결하여 케인즈주의 양식이 사라지고 포스트포드주의로 이행과는 과정으로 파악하는 학자가 있는가 하면, 수렴이론의 입장에서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를 대체한 것 혹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간의 제3의 체제적 대안으로 보거나, 적절한 위기관리 방식으로 보는 학자도 있었다. 이 중에서 마지막 입장은 노조가 국가조절기제에 결합함으로써 등장한 독일의 코포라티즘과 관련해 특히 주목받는 입장이다.

이와 같이 다양한 여러 입장들 중에서도 코포라티즘의 공통적 특징이 되는 이론적 핵심은 '국가기구의 적극적 중재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사회집단들의 독점적·기능적 이해관계 대변조직들이 이해관계대변과 국가 정책집행을 연결하는 고리로서 노·사·정 3자의 정치적 교환에 참여하는 사회정치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 때 사회집단은 물론 사안에 따라 의약 집단이나, 종교집단 등 다양한 사회집단들을 포괄하는 의미이다. 그러나 산업자본주의 국가에서 노사의 대표조직은 다원주의자들이 비차별적으로 등치시키는 사회 내의 무수한 다른 조직들과는 상이한 핵심적 이해관계대변조직이라고 보아야 한다. 노사 대표조직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적 요소인 자본과 노동을 대표하는데, 특히 코포라티즘적 체제에서는 독점적으로 대표하고 통제할 뿐만 아니라 국가와 정부정책의 정치적 정당성의 확보에도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코포라티즘의 분류

 코포라티즘의 분류도 학자마다 매우 다양하며, 그 분류의 기준에 따라서도 매우 상이한 개념들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에도 대개는 근대사회의 코포라티즘을 양차대전 사이에 나타났던 코포라티즘과 2차대전 이후 서유럽에서 나타난 코포라티즘으로 구분하는 것에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전간기의 나치즘과 파시즘 등 독재정치의 사회통제 메커니즘을 의미하는 전자를 주로 국가 코포라티즘이라고 한다면, 의회민주주의 체계에서 나타나는 후자는 흔히 네오 코포라티즘이나 사회 코포라티즘 혹은 민주적 코포라티즘으로 불린다. 여기에서는 국가코포라티즘의 대당적 의미를 살리기 위해 사회 코포라티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국가 코포라티즘이 부르조아가 약해지거나 분열되어 자유민주주의 지배질서에서는 비특권계층의 합법적 요구에 대응할 수 없기 때문에 국가가 억압적 방식으로 지배계급을 대신하는 것이라면, 사회 코포라티즘은 안정된 의회민주주의적 부르조아 지배체제에서 피억압 계급을 체제에 통합시키는 방식으로서 사회 갈등을 평화적 방법으로 해소하는 것을 의미한다.

  

1960년대 말 70년대 초중반 독일의 사회코포라티즘

 독일은 사회 코포라티즘의 측면에서 볼 때에는 라틴유럽 국가들에 비해 강력하지만,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나 오스트리아에 비해서는 약한 코포라티즘 국가이다. 그러나 히틀러의 나치정권이 국가 코포라티즘의 전형적인 예에 속했으며,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중반의 독일은 사민당 주도의 연립정부아래 사회 코포라티즘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국가의 하나였다. 이른바 독일 모델이 독일의 특수한 제도적 특성과 정책적 특수성으로 인해 분명한 사회 코포라티즘의 형태를 구성했던 것이다.

당시 독일의 사회 코포라티즘은 1966/67년의 경기후퇴에 대한 대응으로 사민당과 기민/기사연의 대연정이 '경제안정·성장촉진법'을 도입하여 경제에 개입할 것을 시도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그에 따라 1967년 6월에 연방의회는 가격안정, 완전고용, 외부재정균형, 적절한 경제성장을 국가정책의 4대 경제목표로 설정하였고, 정부로 하여금 5개년 재정계획을 세우도록 하고, 협주행동(Konzertierte Aktion)의 도입을 규정하였다.

특히 협주행동은 사회 코포라티즘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조절기제였다. 당시 경제장관이었던 칼 쉴러(Karl Schiller)가 경제전문가위원회, 연방은행, 사용자단체, 독일노련 등 관련 6개 부문의 대표들을 소집하여 거시경제적 목표와 구조정책 및 소득정책에 관해 토론하고 협의한 것이다. 쉴러는 관련단체들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사용자측으로부터 가격안정을 보장받고 노동자측으로부터는 임금인상의 양보를 얻어내어 인플레이션 억제와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이루고자 했다. 그에 대해 사용자측은 조세부담인하와 공공비용절감을 기도했고 노동자측은 실업문제의 해결과 정책참여를 요구했다.

독일의 초기 사회 코포라티즘의 결과는 일정한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되었다. 1967년 봄에 62만9천명이었던 실업자가 같은 해 10월에는 34만1천명으로 감소하였으며, 이 해의 경제성장률도 5%에 이른 것이었다. 또한 공동결정법이 확대되었고 중하층 국민들의 교육기회도 증대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1972년 쉴러 장관이 사임한 후 협주행동은 형식화되었으며, 1974년 이후에는 노동시장 파트너들에게 국내외적 상황을 알리는 데에만 이용되었다. 그에 따라 노조 내에서도 비판이 거세어져 결국 독일노련은 1977년에 불참을 선언하였다. 사용자측도 같은 해에 공동결정법 확대(1976년)에 불만을 품고 참석하지 않게 되었다.

  

코포라티즘 종언론의 대두와 그 배경

 독일식 사회 코포라티즘의 특징은 조직된 이해관계집단들보다 정부가 주요정책결정을 발의하는 데 중심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사회 코포라티즘이 활성화될 수 있었던 조건은 안정된 행정지도력, 지속적 경제성장, 고용 등 노동시장 조건의 안정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의 쇠퇴기를 거쳐 1980년대에는 기민/기사연과 자민당의 신보수주의 정권이 등장한 이후 독일도 이른바 코포라티즘 종언론의 대두와 그 정치경제적 배경의 성숙을 피해갈 수 없게 되었다. 첫째, 서비스업의 확대, 화이트칼라층의 증대 등 산업구조의 변화로 인해 노동의 분화와 내적 이질화 현상이 심화되었다. 둘째, 포스트포드주의와 작업장의 유연적 전문화 등 자본주의 축적양식의 구조적 변화가 본격화되었다. 셋째, 1980년대 초반 이후 국제화와 세계화 물결이 거세게 불어닥치자, 국민국가적 중앙교섭이 기피되고 기업 혹은 초국적 기업 수준의 분산적 임금·고용협상이 더욱 선호되기 시작했다. 넷째,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가 심각한 재정위기에 처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업 혹은 노동자그룹 수준에서 노동과 자본간의 교환합의인 생산성연합(productivity coalitions)이 코포라티즘에 대한 대안으로 제기되면서, 노동측이 경영측과 협력하여 기업의 생산성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그 대가로 고용안정과 기업의 정책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받으려는 경향이 확대되어 갔다.

1980년대 초·중반은 독일 노동조합운동의 수세기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정치적 수세기와 탈정치화의 극복은 참으로 어두운 긴 터널을 마주하게 되었다. 코포라티즘의 관점에서도 독일은 신자유주의적 공세와 세계화의 광풍 속에서 노사정협의체제의 종말을 극복하지 못했다. 물론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성공적인 주35시간제 투쟁은 노사정협의체제의 종말이 아니라 코포라티즘과 노사정협의체제 자체를 극복하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러한 그 투쟁조차 노동시장 유연화와 교환된 반쪽의 성공에 불과했다.

  

적녹연정과 공급조절 코포라티즘

 코포라티즘 종언론을 종식시킨 것은 사회 코포라티즘의 새로운 등장이 아니었다. 1998년 사민당의 집권과 적녹연정의 성립은 한때 사회코포라티즘의 재시도를 예측하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3의 길'과 '신중도'로 포장된 사회조절정책은 이미 수요조절정책을 벗어난 지 오래였다. 사회 코포라티즘은 이제 수요조절 코포라티즘으로 치부되면서, 슘페터식 공급조절 코포라티즘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독일의 새로운 좌파정부정책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면, 경제정책에서 탈규제, 민영화, 조세인하를 중심으로 하고, 사회정책에서 재정적자 해소와 복지제도의 효율화와 감축을 추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국가와 기업의 경쟁력 제고를 강조하는 탈규제 정책을 대폭 수용한 점이 경제정책의 구체적인 내용이라면, 이른바 '근로를 촉진하는 국가'를 추구하며 실업을 해소한다는 명분아래 열악한 일자리조차 복지혜택의 조건으로 강제하는 것이 사회정책의 실상이다.

2002년 재집권에 성공한 슈뢰더 총리는 적녹연정 2기의 출범에 즈음하여, 연정의 정책목표는 '개혁과 지속 가능한 경제발전 및 사회적 통합'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서, 어려운 경제 여건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지켜온 복지국가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재정 절약을 비롯한 복지국가의 감축은 그 이후에도 지속되어 왔을 뿐 아니라, 적녹연정의 핵심적 사회정책의 하나인 고용창출정책은 임시노동과 비정규직 노동에 집중되었다.

이와 같이 '개혁, 정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목표로 '노동시장 개혁과 경제회생'에 중점을 둔다는 2기 적녹연정의 정책기조도 1기의 사회경제정책을 지속할 것으로 보이며 특히 재정정책과 관련해서는 긴축정책을 한층 강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코포라티즘의 관점에서 보면, 적녹연정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중반 '협주행동'의 경험을 살려 노사정간 새로운 고용협정을 추진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중도' 노선의 고용협정은 '협주행동'의 수준에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공급조절 코포라티즘로서 그 성격을 완전히 달리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적녹연정은 처음부터 고용협정의 협의 내용을 정책에 반영한다는 의지를 갖지 않은 채 정부 정책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는 정책적 동원기제를 구상한 것이다. 그것은 또한 국가 개입의 측면에서 직접 개입을 피하되 다른 한편으로는 이 협의기제를 통해 간접 개입은 확대함으로써 경쟁력뿐만 아니라 제반 분배조건도 개선하려는, 공급측 개입을 위주로 하는 코포라티즘적 사회통치(corporatist social governance)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수요조절 코포라티즘으로 불리는 사회 코포라티즘이 완전고용, 노사관계안정, 사회복지의 확대를 주요의제로 삼았다면, 공급조절 코포라티즘은 노동시장의 유연성확보, 생산성 증대, 그리고 사회복지지출의 통제를 통한 국제경쟁력을 강조하는 한편, 노동시장의 열패자에 대한 보호 및 재취업 기회 제공, 불공정해고의 제한, 그리고 경제성장 과실에 대한 공정한 분배 등의 이슈를 주요 내용으로 한다. 한마디로 독일 정부의 공급조절 코포라티즘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친화력을 가진 것으로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위한 사회적 동원과 통제의 기제로 이용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코포라티즘의 양면성

근대 독일 코포라티즘의 역사는 나치즘의 일방통행적 경험과 대연정과 적황연정의 자발적 협의기제 시도를 거쳐 적녹연정에서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친화성 있는 공급조절 코포라티즘으로 변해 왔다. 정부기구로부터의 억압의 경험에서 자발적 참여의 형태로 전환해 온 측면이 존재한다. 특히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중반의 '협주행동'은 당시 전통 사민주의 노선을 표방한 사민당의 집권이라는 정치적 조건 외에도 당시 유럽 전반을 휩쓸었던 자발적 노동투쟁의 힘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회 코포라티즘은 노동체계의 제반 갈등을 '노동시장으로부터 정치의 장으로 끌어들여 해결하고자 하는 '노동계급의 투쟁의 산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협주행동' 조차도 노조의 정치적 파업을 금지한 1952년 공장법 제정이후 특히 심화된 노조의 순치 및 지속적인 관료화의 영향뿐만 아니라 사민당의 우경화에 따른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다. 자발성을 띠었다고는 하나 전반적으로 정부주도의 성격을 처음부터 노정했던 '협주행동'도 이를 주도했던 경제 장관의 사임 이후 곧 쇠퇴한 것은 이러한 성격을 잘 증명해준다.

특히 최근 적녹연정의 공급조절 코포라티즘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 그 통제적 성격을 더욱 뚜렷이 하고 있다. 고용협정을 중심으로 하는 적녹연정의 삼자협의체제 시도는 자본주의 질서의 신자유주의적 재생산을 목적으로 국가와 자본이 노동계급을 회유·통제하기 위해 발전시킨 관리메커니즘을 구축하려는 것이다. 정부 주도의 사회적 동의 창출 기제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독일 노동측의 적극적 노력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독일의 경험은 사민당의 집권을 정치적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코포라티즘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의 위기극복과 구조조정을 위한 사회적 관리기제임을 시사해준다. '사회'적이든 '공급조절'적이든 코로라티즘의 기능적 핵심은 노동자들의 이익대표기제로서 적극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측면도 있지만, 계급성을 탈각한 사민당과 순치된 노조를 통한 노동자들의 탈정치적 동원기제라고 할 수 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urblue 2005-05-24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넹 ^^
 
 전출처 : 토토랑 > [펌] 5천원 이하 푸짐한 맛집

할머니가 말아주는 따끈한 온국수 한 그릇 옛집


 

삼각지의 한 주차장에 옹색하게 둥지를 틀고 있는 ‘옛집’. 시간이 멈춘 듯 손때 묻은 그릇과 주워왔다는 낡은 테이블 몇 개가 고작인 허름한 국수집이지만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곳이다. 옛집의 이름을 알린 메뉴는 2천원짜리 온국수. 껌값도 오른다는 요즘 이 집의 국수값은 11년째 요지부동이다. 큰 들통에 미역, 대파, 멸치, 다시마, 양파를 넣고 연탄불로 반나절 넘게 뭉근히 끓여 굵은소금으로 간을 맞췄을 뿐이라는데 그 육수 맛이 기막히게 시원하다. 사람들에게 흙 파서 장사한다고 오해 받을 정도로 넉넉한 인심을 지닌 배혜자 할머니가 이곳의 주인장이다. 부지런한 할머니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직접 육수를 우려내고 달라는 대로 막 퍼주는 김치도 정성스럽게 담가 상에 낸다.


단출하기 그지없는 메뉴판에 최근 이름을 올린 메뉴는 역시 2천원짜리 우거지탕이다. 새벽 6시부터 9시까지만 맛볼 수 있는데, 인력시장에서 허탕 친 사람들이나 빡빡한 세상살이에 아침 한술 못 뜬 직장인들을 위해 할머니가 특별히 준비한 음식이다. 재래된장에 직접 말린 우거지를 넣어 푹 끓여내는데, 어머니의 일을 거드는 딸 말로는 아무리 많이 팔아도 손해나는 음식이란다.


옛집에는 할머니만큼이나 유명한 것이 하나 더 있다. 손님들이 알아서 거스름돈을 챙겨가도록 한쪽에 내팽개쳐둔 ‘돈그릇’으로 욕심 없는 할머니가 만든 흐뭇한 계산법이다. 그러나 술이나 담배는 절대 입장불가이므로 기억해두시길.

 메뉴 온국수·우거지탕 2천원, 비빔국수 2천5백원
영업 시간 오전 6시~자정(명절날 휴무)
찾아가는 길 삼각지역 2번 출구 근처, 삼각주차장 내
문의 02-794-8364

 

 

인근 직장인들이 아침마다 기다리는 곳

                                   믹스 앤 베이크의 모닝 뷔페


 

화사한 색상의 인테리어가 눈길을 끄는 ‘믹스 앤 베이크’ 역삼점은 문을 열면서부터 줄곧 ‘모닝 뷔페’를 열고 있다. 단돈 3천원만 내면 호텔 모닝 뷔페가 부럽지 않은 다양한 메뉴를 만나볼 수 있어 아침 식사를 쉽게 거르게 되는 인근 회사원들과 외국인들에게 반응이 매우 좋다. 모닝빵, 우유식빵, 곡물빵, 마늘 바게트, 찰떡빵, 머핀 등 갓 구워낸 따끈따끈한 빵뿐만 아니라 한 조각에 3천원을 훌쩍 넘는 각종 케이크도 맘껏 맛볼 수 있다. 여기에 샐러드, 콘 플레이크, 커피, 홍차, 우유, 체다 치즈가 더해지고 요일에 따라 브로콜리 수프, 크램 차우더 수프, 콘 감자 수프 중 한 가지가 준비된다.

 

1천원만 내면 스크램블 에그와 에그 베이컨 햄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데 주문 즉시 오픈키친에서 바로 만들어 따끈하게 서빙된다. 무료로 인터넷도 즐길 수 있고 핸드폰 충전기도 마련되어 있어 바쁜 아침, 시간에 쫓기기 일쑤인 직장인들에게는 더없이 고마운 곳이다. 

 

 

 메뉴 모닝 뷔페 3천원, 스크램블 에그·에그 베이컨 햄 1천원
모닝 뷔페 영업 시간 오전 7시 30분~9시 30분(월~토, 연중무휴)
찾아가는 길 지하철 2호선 역삼역 4번 출구에서 강남역 쪽으로 200m쯤 직진
문의 02-562-3048

 

 

맛깔스러운 음식을 입맛대로 골라 먹는

                                         서강대 한식 뷔페


 

부부가 운영하는 이곳은 서강대학교 학생들보다 교수와 택시 기사들에게 더 알려진 곳이다. 너무도 다양하고 풍성한 메뉴로 ‘과연 남는 것이 있을까?’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을 만큼 푸짐하다. 원래 이곳은 학생들이 줄을 서서 먹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던 분식점이었는데 주인 아주머니의 건강이 나빠진 이후 한식 뷔페로 업종을 바꾸었다고 한다. 분식점일 때보다 수입은 많이 줄었지만 학생들이 입맛대로 맛있게, 마음껏 먹는 모습에 마냥 흐뭇하다고.


제육볶음, 카레, 김치찌개, 우거지탕, 볶음밥, 콩나물밥, 고등어조림, 샐러드, 샌드위치 등 메뉴만 해도 20여 가지가 족히 넘는다. 게다가 겨울에는 뜨끈뜨끈한 팥죽과 호박죽, 여름에는 몸속까지 시원한 콩국수가 계절 특선 메뉴로 추가된다.


주인 아주머니는 학생들을 내 자식이라 생각하며 조미료와 설탕을 거의 넣지 않고 정직하게 음식을 만든다고. 또 음식이 남으면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눠주며 온정을 베풀고 있다. 이런 주인 부부의 따뜻한 사랑이 조미료보다 더 맛깔스런 맛을 내는 건 아닐까.

 

 메뉴 한식 뷔페 3천원(서강대학교 학생)·3천5백원(일반인)
영업 시간 오전 6시~자정(연중무휴)
찾아가는 길 서강대 후문에서 이대 쪽으로 100m쯤 직진
문의 02-702-1818

 

 

 정성과 사랑이 그득한 가정식 백반집 부산집


 

요즘에 헛헛한 배를 달래지 못하는 사람들이 과연 있을까 싶지만 주변에는 아직도 주머니 사정이 그리 넉넉하지 못한 이들도 많다. 낙원동을 거닐다 보면 유독 2천원대 음식을 파는 곳들이 많은데 부산집은 이 일대 2천5백원짜리 가정식 백반의 원조집이다. 노린동전으로 먹을 수 있는 식사에 의구심을 품을 법도 하지만 금세 밥상 위에 펼쳐진 음식들에 눈과 입은 놀라게 된다. 수북하게 담긴 콩밥과 국, 생선조림에 네댓 가지의 반찬이 함께 나온다. 음식은 얼마든지 더 먹을 수 있고 고등어와 조기 등 생선조림과 시래기국, 미역국, 봄동무침, 파 겉절이, 김, 장아찌, 나물무침, 갓김치 등 갖가지 메뉴가 번갈아가면서 제공되니 매일 찾아도 질리지 않는다.


든든하게 한끼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식당을 찾은 손님들이 혹 마음이 상할까봐 10여 년 동안 같은 가격으로 음식을 베풀고 있다는 주인 할머니의 미소 속에서 그리운 친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메뉴 가정식 백반 2천5백원, 돼지 갈비탕 3천원
영업 시간 오전 7시 30분~오후 9시(명절날 휴무)
찾아가는 길 5호선 종로 3가역 4번 출구의 낙원오피스텔 건너편
문의 02-744-2331

 

 

 싸고 푸짐한 콩비지가 일품인 신토불이


 

이제는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게 된 옛 시골장터의 구수한 맛이 가끔은 궁금하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이른 시간부터 다닥다닥 붙은 허름한 의자에 앉아 국밥 한 그릇과 소주 한잔을 기울이며 고단한 삶을 위로 받던 어른들의 모습. 이곳은 그러한 풍취가 익숙한 곳이다. 전날 불려놓은 콩을 갈아서 만든 신선한 콩비지찌개가 막 끓을 무렵, 과음으로 뒤집힌 속을 달래려는 주당들과 일찍 하루를 여는 일꾼들이 하나 둘 이곳을 찾는다.


푹 삶아둔 뼈다귀와 국물에 얹어주는 담백하고 구수한 뼈다귀 콩비지와 얼큰하고 시원한 맛의 황태국이 이 집의 별미. 야박하게만 느껴지는 도심 속 정서와 동떨어진 넉넉하고 푸근한 인심이 훈훈할 따름이다.

 

메뉴 콩비지·황태국·생굴 순두부 2천원, 황기닭곰탕 2천5백원, 뼈다귀 콩비지 3천원
영업 시간 오전 6시~오후 9시(명절날 휴무)
찾아가는 길 종로 2가 탑골공원과 경찰서 사잇길로 직진
문의 02-766-5789

 

 

 국내 최고령 셰프의 아주 특별한 돈가스

                                            할아버지 돈까스


 

수진역 지하상가에는 유명한 돈가스집이 있다. 항상 깔끔하게 다린 셰프복을 입고 우렁찬 목소리로 손님을 맞는 주인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할아버지 돈까스. 45년째 요리를 하고 계시다는 할아버지는 연세에 비해 매우 젊어 보이지만, 1926년생이시니 국내 최고령 셰프가 아닌 듯싶다. 큰아들 내외가 할아버지의 손맛을 전수 받았지만 할아버지는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 5시 30분에 가게로 나선다. 할아버지만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 특제 소스는 토마토, 당근, 양파 등의 채소와 과일을 넣고 3시간 이상 푹 고아 만든다. 새콤달콤한 맛이 담백하고 부드러운 고기와 궁합을 이루는데 돈가스만 20년 이상 만드셨다는 할아버지만의 노하우가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 감동적인 맛일 수밖에.


근처에 중·고등학교가 많기 때문에 단골은 대부분 학생들이다. 먹고 뒤돌아서면 배고픈 한창 때의 식성을 지닌 학생들을 위해 큼직한 돈가스에 밥과 샐러드를 푸짐하게 담아주는데 물론 밥과 샐러드는 공짜로 얼마든지 더 먹을 수 있다.

 

 메뉴 돈가스 3천5백원(학생)·4천원(일반인)
영업 시간 오전 10시~오후 9시 30분(매달 첫째, 셋째 화요일 휴무)
찾아가는 길 지하철 8호선 수진역 1번 출구, 지하상가 내
문의 031-722-1991

 

 무한정 리필 해주는 생선구이집 대풍


 

5천원만 내면 생선구이를 실컷 먹을 수 있는 대풍은 요즘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집이다. 친절한 주인 부부의 넉넉한 인심이 양념처럼 뿌려진 맛집으로 15평 남짓한 실내에는 주황색 드럼통으로 만든 테이블 11개가 빼곡히 놓여 있다. 한쪽 벽에 삼치구이, 고등어구이, 조기구이 5천원이란 메뉴판이 붙어 있는데, 뭘 먹을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많이 먹든 적게 먹든 일인분에 5천원이면 그릴에 구운 큼직한 삼치 반 쪽과 자반고등어 한 마리, 조기 한 마리가 김치, 서너 가지의 반찬, 밥과 함께 한상 차려 나온다.


바닷가 출신인 주인 아주머니는 매일 새벽 가락시장으로 출근해 그날 팔 생선을 선발해오는데 목포에서 공수한 간수를 뺀 소금을 뿌려 하루 정도 숙성시켜야 비린맛이 가시고 육질도 쫄깃하다고. 생선구이만 무한정 제공되는 걸로 소문이 자자하지만 반찬도, 밥도 양껏 먹을 수 있다.

 

 

 메뉴 특선 정식 1인분 5천원
영업 시간 오전 9시 30분~오후 9시 30분(일요일 정오~오후 9시 30분, 연중무휴)
찾아가는 길 잠원동 강남웨딩문화원 뒷골목, 패밀리마트 맞은편
문의 02-518-7357(본점), 02-3444-3003(별관)

 

 

80여 가지 퓨전 돌솥밥 전문점 오며가며


 

성신여대 정문 앞에서 20여 년 동안 돌솥밥 하나로 젊은이의 입맛을 사로잡은 오며가며. 돌솥 제육볶음밥, 돌솥 김치불고기밥 등 기본 메뉴와 돌솥 바나나 칠리 피자치즈, 돌솥 하니 참치치즈밥 등 이름만 들어도 어떤 맛일까 궁금해지는 특별 메뉴를 포함해 총 80여 가지 돌솥밥을 입맛대로 골라 먹을 수 있다. 맛의 비밀은 독특하고 새로운 맛을 찾는 젊은이의 취향을 고려해 주인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개발한 소스에 있다. 맛장 소스, 칠리 소스, 간장 소스, 고추장 소스, 머스터드 소스를 기본으로 메뉴에 따라 다양한 소스로 변신한다.


주문 즉시 요리를 시작하기 때문에 조금 기다려야 하는 게 흠이라면 흠. 일행이 같은 메뉴를 주문하면 일인당 5백원씩 값을 깎아주기도 하지만, 이보다는 친구들과 함께 가서 이곳의 갖가지 메뉴를 주문해 이것저것 맛보는 재미가 더 쏠쏠할 듯.

 

메뉴 80여 가지 퓨전 돌솥 비빔밥 3천~4천원
영업 시간 오전 10시~오후 10시(공휴일, 일요일 휴무)
찾아가는 길 성신여대 정문 앞 사거리 오르막길에 위치
문의 02-923-6447

 

 

 

 

 

우직한 주인 아저씨가 만드는 수타 자장면 신성각


 

물어물어 찾아가야 하는 이곳은 신공덕동 주택가에 자리한 자그마한 중국집이다. 1981년에 문을 열고 줄곧 주방을 지켰다는 주인 아저씨는 그때나 지금이나 수타 자장면을 고집하고 있다. 주문과 동시에 탁탁 면 뽑는 소리에 이어 달그락달그락 채소 볶는 소리가 나더니 곧 수타 자장면이 등장한다. 잘게 썬 양파와 양배추, 자르르 기름기 도는 춘장, 얼른 비우지 않으면 불어버리는 수타면이 최고의 외식 메뉴였던 자장면에 대한 옛 향수를 자극한다.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있으니 바로 신속배달이다. 배달이 생명인 중국집에서 하루에 두어 곳, 많아야 다섯 곳 정도 배달한다고 하니까 말이다. 너무 멀거나 주문 양이 많으면 곧바로 ‘배달불가’라는 대답이 떨어진다. 이유인즉슨 수타로 뽑은 면은 기계로 뽑은 면보다 훨씬 빨리 불어 맛이 없기 때문이라고. 또 이곳에서의 음주도 불가다. 어른들이 술을 마시면 아이들이 마음 편하게 자장면을 먹으러 오지 못한다는 이유에서다. 동네가 개발되면서 자장면을 찾는 고객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만, 주인 아저씨는 한 사람이라도 찾을 때까지 수타면을 고집하며 ‘자장면의 혼’을 지킬 작정이라고.

 

 

메뉴 수타 자장면 3천원, 간자장·짬뽕 3천5백원
영업 시간 오전 11시 37분~오후 8시 30분(일요일·명절·여름휴가 휴무)
찾아가는 길 신공덕동 대한노인회 맞은편
문의 02-716-1210

 

 

 

 

무한정 리필되는 3천원짜리 커피 서래커피집


 

이곳은 대문이 크지 않다. 간판이 화려하지도 않다. 그래서 쉽사리 눈에 띄지 않고 찾기도 어렵다. 하지만 이곳을 한번 들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단골이 된다. 그냥 서래마을을 지나다 커피 한잔 마시러 들르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단골들의 귀띔으로 찾게 되는 곳이다.

 

빌라 1층 가정집을 개조해 만들어 아늑함과 따듯함이 느껴지는 이곳은 원래 고지선 사장에게 2년간 커피를 가르쳐준 이정기 선생의 로스팅 공장이었다고. 고 사장은 자신의 꿈을 키워가던 이곳에 대한 애착 때문에 유동 인구가 많지 않은 곳에 과감히 카페를 열었는데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는 다양한 커피 기구와 커피잔, 각종 차와 차 액세서리도 예쁘게 진열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모든 커피는 이정기 선생이 직접 개발한 로스팅 방법과 추출법으로 드립한다.

 

그중 에티오피아산 ‘이르가체프’의 맛이 일품인데 다른 커피에 비해 짧게 볶고, 추출 시간도 최대한 줄여 홍차 빛을 띠는 게 특징이다. 카페모카나 카페라테 등 10여 가지의 메뉴는 모두 3천원이며 리필이 가능하다. 매주 토요일에는 이정기의 커피교실과 커피와 차, 케이크 등을 만드는 강좌도 마련되어 있다.

 

메뉴 하우스 스페셜 마일드·카페라테·아메리카노 3천원
영업 시간 오전 9시 30분~오후 10시 30분(일요일 휴무)
찾아가는 길 방배동 서래마을 파리크라상 골목, 김가네김밥 옆
문의 0502-3651-085

 

 

 

 

배부를 때까지 퍼주는 리필 떡볶이, 달볶이


 

숙명여대 학생들 사이에 이 집 모르면 간첩이라는 소리를 듣는 달볶이. 3평 남짓한 가게 안에서 편안하게 앉아서 떡볶이를 먹기란 가뭄에 콩 나듯 어려운 일이다. 빈자리가 생길 틈도 없이 끊임없이 손님들이 들이닥치니 줄을 섰다 먹는 것이 기본. 여대생들에게 인기몰이를 하는 것은 맛도 맛이지만 1인당 1천5백원만 내면 배부를 때까지 무한정으로 떡볶이를 퍼주는 주인 아저씨의 넉넉하고 푸짐한 인심 때문이다.
현재 동덕여대점, 용산점, 성균관대점, 성신여대점, 상명대점 등 총 6개의 지점을 두고 있으며 앞으로 대학가를 중심으로 지점을 늘려갈 계획이라니 조만간 대학생들 사이에 배부를 때까지 떡볶이를 퍼주는 달볶이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나돌지도 모를 일이다.

 

메뉴 떡볶이·순대·튀김·오뎅 1천5백원
영업 시간 오전 10시~오후 11시(주말 오전 10시~오후 9시, 연중무휴)
찾아가는 길 숙대 정문에서 지하철 4호선 숙대입구역 쪽으로 100m쯤 직진
문의 가게에 전화가 없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흑 가보고 싶은 곳이 좀 되네..

작년엔 회사 지하 빵집에서 3800 에 아침 부페가 있었는데.. 스프 한가지, 베이컨, 계란, 소세지가 따스하게 제공되고 샐러드 1가지, 야채샐러드, 빵 4가지, 과일 , 드레싱 3가지, 버터, 잼 2가지, 우유, 쥬스, 홍차, 커피 이렇게 나와서 종종 가곤 했는데.. 게다가 베이컨이나 소세지는 절대 고급이고.. 스프도 제대로 끓여내는 크림슾 이었는데(인스턴트가 아니구 말이다...) 없어져서 넘 아쉽당..

저 돈까스도 맛나보이는데.. 넘 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인간아 > 코소보 독립 분쟁

코소보 독립 분쟁

개요

코소보는 중세 세르비아 왕국이 처음 세워진 발원 성지였으나 , 터키제국이 세르비아왕국을 점령한 이후 코소보에 알바니아인을 집단 이주 정착시키면서 민족ㆍ종교적으로 알바니아인과 세르비아인간의 갈등이 발생하였다.

1945 티토 주도하에 구유고슬라비아 성립 후에는 코소보에 자치주의 지위를 부여하였으나, 1989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은 '대세르비아 건설'이라는 민족주의적 기치아래 코소보의 지치권을 박탈하였다. 코소보 알바니아인(전체 200 주민의 90%)은 이에 대항하여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요구하였고 양 민족간 갈등은 증폭되었다.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은 1992 마침내 코소보공화국을 선포하였고, 알바니아계와 세르비아계 간의 빈번한 무력충돌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발칸반도의 정세는 보스니아 사태의 중요성이 워낙 엄중하였으므로 상대적으로 코소보 문제는 쟁점화 되지 못했다. 그러나 1995 12 데이튼 평화협정에 의해 보스니아 사태가 진정의 기미를 보이자 코소보 알바니아계는 코소보해방군(KLA) 결성하여 본격적인 무장 투쟁 양상을 보였고, 이에 대해 세르비아도 코소보 해방군에 대한 전면적인 소탕작전을 감행하였다.

1998 2월말 신유고 남부 알바니아계 밀집거주지역인 코소보에서 알바니아계 코소보 분리주의자들과 세르비아공화국 경찰과의 무장충돌로 알바니아인 16명과 세르비아 경찰 4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3 들어서는 세르비아의 무력사용에 항의하는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의 대규모 시위가 계속되고 세르비아가 강경 진압으로 대응하는 분쟁이 확산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은 신유고연방에 유사시 군사개입 경제제재 가능성을 강력히 경고하면서 평화적 해결을 위한 당사자간 대화를 촉구하였다. 특히 미국은 신유고연방과의 관계개선 방침을 철회하고 EU 의장국인 영국도 밀로셰비치통령을 만나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신유고연방은 코소보문제를 순수한 국내문제로 간주하여 국제사회의 개입 코소보의 분리독립을 거부하였으며, 이에 대해 코소보 알바니아인은 국제사회의 적극적 개입을 유도하였다.

NATO 세르비아에 대해 즉각적으로 코소보에 대한 만행을 중지하라고 촉구하였으며, 만약 사태가 평화적으로 종결되지 않는다면 군사개입을 감행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NATO 이러한 입장에 대해 러시아와 중국은 코소보 사태에 대한 해결을 UN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나토의 군사개입은 국제사회의 새로운 긴장을 고조시킬 뿐이라는 입장을 취하였다.

국제사회는 코소보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코소보내 나토 평화유지군의 주둔을 골자로 하는 랑부예 평화협정을 세르비아가 수용하기를 요구하였으나, 밀로세비치는 외국군대를 자국내에 주둔시킬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며 평화협정 체결을 거부하였고, 결국 세르비아에 대한 나토의 공습이 1999년 3월 24일부터 UN의 의결을 배제한 채 감행되었다.

나토의 공습이 감행되자 밀로세비치는 세르비아인들의 민족주의를 부추키며 결사항전의 의지를 확고하하였으며, 러시아는 나토의 유고공습이 제국주의적 만행이라고 비난하며 유고와의 연대를 표명하였다. 한편 러시아는 흑해함대 소속 함대의 군함 7척을 아드리아해에 파견하는 등 군사적 시위를 벌였다. 러시아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힌 나토는 해결 과정에서 러시아의 역할과 지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러시아는 코소보분쟁 해결과정의 주요 주체로 부상하였다. 중국 역시 러시아와 보조를 같이 하면서 나토의 유고 공습에 반대하였으나 이는 미국의 입장을 고려한 소극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5.7. 나토의 중국대사관 오폭사건이 발생하자 중국은 극렬히 미국을 비난하는 가운데 중국의 반미감정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공습 초기 단기간의 공습으로 군사적 목표 달성을 자신했던 미국은 러시아의 강경한 태도와 제2의 베트남전을 우려하는 국내 여론에 밀려 지상군 파견을 하지 못한채 공습만을 계속하였다. 공습이 계속되는 가운데 나토와 러시아는 코소보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협상을 계속하였으며 5.20. G7과 러시아는 코소보 평화안의 초안에 합의하였다. 5.29. 유고는 코소보 평화안의 수용을 처음으로 밝히면서 코소보분쟁은 해결의 실마리를 풀게 되었다. 6. 3. 유고정부는 마침내 코소보평화안을 수용할 것을 발표하면서 코소보 분쟁은 사실상 종결되었으며 6.9. 나토와 유고는 유고군의 코소보 철군에 관한 군사실무협정에 합의함으로써 78일간 지속되던 코소보전쟁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코소보에서는 평화유지군의 진주로 안정을 회복하는 듯이 보였으나 알바니아계 주민들의 세르비아계 주민들에 대한 역테러가 자행됨으로써 코소보지역은 새로운 불안감에 싸여 있다.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는 인권보고서에서 알바니아계 어린이들까지 가담한 대세르비아 폭력사태가 빈발하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 같은 코소보에서 알바니아계의 역테러는 코소보 북부 미트로비차에서 '00년 2월부터 특히 극심하게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OSCE는 코소보 현지에서 75명의 요원을 고용하여 코소보 인권상황을 감시하고 있으나 폭력사태를 예방하기엔 역부족이라고 보고서에서 밝히고 있다.

코소보에서 크고 작은 폭력사태가 벌어지는 가운데 유고연방의 정국은 혼미를 거듭하고 있었다. 임기가 '01년 여름까지 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흔들리는 권력을 다시금 공고히 하기 위해 밀로세비치는 조기 대선을 계획하였고, 대선은 '00년 9월 24일 실시되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선거에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대선을 준비한 밀로세비치였으나, 이미 민심은 밀로세비치를 떠나 있었고 야당 연합 후보로 나선 코슈투니차에게 유고 국민들의 관심은 모아지고 있었다. 선거가 끝나고 개표가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고연방 정부는 개표 결과를 발표하지 않아 국민들의 의혹은 더욱 증폭되었다.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불신이 커져 가는 가운데 유고연방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선거 무효를 발표하자 국민들의 분노는 일순간에 확대되면서 밀로세비치 퇴진을 외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실시되었다. 국제사회의 여론도 밀로세비치의 퇴진을 기정사실화하면서 밀로세비치의 마지막 지지국이었던 러시아마져 밀로세비치의 퇴진을 종용하자 밀로세비치는 마침내 10월 6일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면서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그간 발칸의 히틀러로 불리우며 서방의 고민 거리였던 밀로세비치가 물러나자 서방은 유고 재건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면서, 각종제재조치의 해제와 함께 EU는 2006년까지 총 23억 유로달러를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으며, 미국도 5억 달러의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유고연방의 정국이 혼란을 겪는 가운데 코소보에서는 10월 28일 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920명의 지역의원을 뽑는 지방 선거에서 온건파인 아브라힘 루고바가 이끄는 코소보민주동맹(LDK)이 압승하였다. 코소보 선거 감시단체인 KACI는 LDK가 프리슈티나를 포함한 대도시에서 크게 승리했다고 밝혔으며, LDK도 자체 조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으리슈티나에서 약 68%를, 다른 주요 도시에서 50%이상을 득표했다고 밝혔다.

 

의미 영향

코소보사태가 발칸지역의 다른 분쟁과 확연히 구분되는 것은 나토가 창설 이후 처음으로 직접적인 무력 개입을 시도함으로써 지역분쟁에서 국제문제로 비화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러시아의 맹렬한 반대와 UN 안보리의 의결을 배제한 채 미국 주도하의 나토가 단독으로 공습을 감행하였다는 점에서 코소보사태가 향후 유럽의 안보질서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국제안보구도 형성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중요한 동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코소보사태의 해결과정에서 코소보사태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한 국가들의 위상 변화가 이루어 지고 있으며, 이는 향후 새로운 국제 문제 해결과정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향후 전망

코소보사태는 일단 UN의 평화유지군(KFOR)이 코소보에 진주함으로써 전쟁이 재발하거나 발칸 전역으로 분쟁이 확대될 가능성은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코소보사태 역시 발칸지역의 다른 분쟁과 마찬가지로 민족, 국경, 종교문제가 복잡하게 얽힌 분쟁의 특성상 근본적인 해결은 난망하다고 할 수 있다. 세르비아는 결코 코소보를 포기할 수 없는 입장에 있으며, 코소보 알바니아계도 독립 의지를 강하게 나타내고 있어, 현재의 코소보 평화안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할 수 있다. 또한 해결과정에서  표출되었듯이 러시아와 나토간의 이견은 상존하고 있으며, 특히 수년내에 반드시 거론되어야할 코소보의 자치권 획득과 분리 독립에 대해 양측의 의견 대립이 있을 경우 코소보사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을 수 있다. 유고연방에서 밀로세비치가 물러나고 코슈투니차정권이 출범하였고 코소보 지방선거에서 온건파인 루고바가 승리하였으나 양측의 입장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고 평가된다. 즉 코슈투니차는 코소보의 독립을 허용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고 루고바는 자신의 목표는 코소보가 세르비아로부터 독립하는 것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따라서 향후 코소보 문제의 해결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발칸반도의 인적 구성과 같이 쉽사리 해결될 기미는 없다고 보인다. 단지 현재로서 국제사회의 최선책은 코소보지역에서 더 이상 폭력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자료

코소보평화안 주요 내용

ㅇ 유고군의 코소보내 폭력, 탄압의 즉각적이고 검증 가능한 중단

ㅇ 유고군을 포함한 경찰과  모든 준군사조직의 코소보에서 신속하고 검증 가능한 철수

ㅇ 코소보에 UN이 감시하는 효율적인 국제 민간치안군 배치

ㅇ UN안보리 의결에 따라 코소보에 임시 정부수립

ㅇ 코소내에 있는 세르비아의 유적 보호를 위해 추후 일부 유고병력 귀환 허용

ㅇ 난민의 안전한 귀향과 인권보호단체의 제한없는 코소보 방문

ㅇ 코소보자치를 보장할 임시적인 정치합의서 완성을 위한 정치협상 개최

ㅇ 유고 및 주변지역의 경제발전과 안정을 위한 포괄적인 접근

 

유고군의 코소보철군을 위한 군사실무협정 주요 내용

ㅇ 1999. 6. 10. 일출과 동시에 유고군,경찰,준군사조직의 검증 가능한 단계적 철수 개시

ㅇ 철수 24시간내 유고 군용기의 코소보 상공 비행 및 방공망, 레이다 작동 중지

ㅇ 철수 48시간내 유고의 지뢰, 폭발물, 부비트랩 등 매설위치 나토에 통보

ㅇ 철수 72시간내 유고의 모든 방공포, 지대공 미사일, 항공기 코소보에서 철수 완료

ㅇ 철수 시작 6일내 유고군 병력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접경지역에서 철수

ㅇ 철수 시작 11일내 유고군 코소보에서 완전 철수

 

△ 주요 일지

1989

10. 유고연방, 코소보자치주 자치권 박탈

1991

9. 구유고연방 해체를 계기로 알바니아인들은 독립헌법 채택

1992

5. 코소보 자체 총선 실시 독립운동 전개

1993

2. 알바니아, 신유고연방 비난, 코소보에 대한 연방정부의 무력개입시 군사대응 불사 선언. 신유고-알간 긴장고조

1996 코소보해방군(KLA)결성

1998

3.8. 세르비아, 코소보 반군 소탕작전

3.13 유럽 26개국, 코소보에 대한 탄압 지속시 UN 세르비아 제재조치지지

6.11 NATO 세르비아에 군사압력 가하기로 결정

8.25. UN 안보리, 코소보사태 당사국에 정치적 해결 촉구

9.23 UN 안보리, 코소보 결의안 채택(세르비아에 내전 종식 촉구)

9.25  NATO, 코소보 군사개입 준비령 발동

10.12. 홀브룩 미특사, 밀로세비치 유고연방 대통령과 평화 협상

10.14. 나토, 유고연방간 평화협정 체결

1999년

1.   세르비아와 코소보해방군간 전투재개

2.6. 2주간의 코소보 '평화회담' 파리 근교의 랑부예에서 개막.(유고 연방, 코소보 알바니아계 대표, 6개

      중재국 참석)

2.19. 나토군, 유고공습 대비 전진 배치

2.23. '코소보 평화회담' 결렬. 미국 협상 결렬에 따라 4척의 군함과 B-52 폭격기, F-117 전폭기 등 260여대의

       항공기 아드리아해에 배치.

       코소보 북부 부치코른에서 유고연방군과 KLA간의 교전. 세르비아경찰 5명 사망.

3.19. 랑부예 평화협정, 유고연방의 거부로 결렬. 알바니아 코소보계 평화안에 서명

3. 21. 홀브룩 미국 특사 유고연방에 파견 . 밀로세비치와 협상

3.23. 홀브룩-밀로세비치간 회담 결렬

3.24. 나토 유고연방에 공습 개시. 옐친 러시아대통령 나토에 경고 메시지 발표

3.27. 나토군 유고의 미그기 2대 격추. F-117A 스텔스 폭격기 유고군에 의해 격추

3.29. 강택민 중국 국가주석, 나토의 유고 공습 비난. 양측에 평화적 해결 촉구

3.31. 미군 3명 유고군에게 체포

4.3. 러시아, 나토에 대응하여 흑해 함대 소속 정보수집함을 포함한 함정 7척 아드리아해로 파병 발표.

4.4. 나토, 유고연방 산업시설에 대한 폭격 개시

4.6. 유고연방, 일방적 전투중단 선언. 나토, 거부

4.9. 미국 민주 공화 양당 의원들, 클린턴 대통령에 지상군 파견 촉구

      나토군, 유고의 미그-29기 절반 파괴 발표

      나토군, 유고의 민간인 거주지역 공습으로 민간인 124명 사상

4.10. 미국, 전투기 82대, 아파치 헬기 24대 추거 파견 발표. 영국 항공모함 인빈서블호와 호위함 2척, 전투기

7대, 헬기 10대 추가 파견

4.11. 유고군, 나토 전투기 2대 격추 주장

4.13. 유고군, 알바니아 국경마을 2곳 점령.

       승객 3백 93명이 탄 국제 열차가 나토군의 미사일에 피격돼 10여명의 사망자와 수십명의 부상자 발생.

       올브라이트 미국무장관과 이바노프 러시아 외무장관 회담, 러시아를 포함하는 평화 유지군 파견에

       양국 이견

4.14. 코소보 남서부 국경지대에서 알바니아계 난민대열에 나토군 소속 전투기들이 폭격을 가해 최소 75명이

       사망하고 25명이 부상했다고 유고 발표  

4.19. 나토, 아파치 헬기 24대와 미 제82 공수사단 병력 알바니아에 배치 발표

4.20. 독일 녹색당, 나토의 유고 공습 중지 촉구 서명

4.23. 나토 창설 50주년 기념 정상회의 워싱톤에서 개회

4.25. 나토, 신전략개념' 채택 발표

4.27. 미국 국방부, 7함대 소속 '키티 호크'호의 아드리아해 파견으로 인한 한반도에서 전력 손실을 보완

       위해 육상기지에서 발진하는 공군력을 한반도로 이동시켰다고 발표

4.28. 미국 하원, 유고에 미 지상군 파견시 의회의 사전 승인을 받도록 한 법안 통과 (249:180)

       밀로세비치, 부크 드라슈코비치 부총리 해임

4.29. 옐친, 전술핵 개발계획안 서명

5.5. 미국, 러시아 코소보 평화절차에 대해 합의

5.7. 나토군, 중국대사관 오폭. 중국 대사관원 3명 사망, 1명 실종, 20여명 부상

5.8. 중국 대사관 오폭관련, UN안보리 소집

5.10. 중국, 미국과 인권대화 중지, 군사접촉 연기 등을 포함한 외교적 보복조치 발표

5.11. 코언 미국방장관, 유고 공습중 한반도 분쟁 발생시 미 본토 군사력 동원 발표

5.14. 나토군, 코소보 남부 코리사 마을 폭격으로 민간인 87명 사망

5.18. 나토군, 유고군 포로 2명 석방

5. 20. G8, 코소사태 해결을 위한 평화안 초안 마련

5.22. 유고군, A-10A 지상공격기 1대 격추 발표

        나토군, 인도, 파키스탄 대사관 오폭. 인명 피해 없음. 인도 총리 나토 유고공습 중단과 UN이 즉각 사

        태 해결에 나설것을 촉구하는 성명 발표

5.26. 나토군, 유고공습 이후 최대 출격 기록. 284회의 폭격용 축격을 포함 총 650회 출격

5.27. UN 유고전범재판소, 밀로세비치를 전범으로 기소

5.29. 유고, G8 평화안 원칙 수용의사 표명

6.2. 체르노무르딘(러시아측 특사). 아티사리(EU측 특사) 베오그라드에서 밀로세비치와 회동

6.3. 유고정부, G-8이 제시한 신 코소보평화안 수락 발표. 유고 의회 평화안 수용 승인(찬 136:반 74)

6.5. 미 국방부, 코소보 평화협상의 타결에 따라 약 5만명의 평화유지군이 5개지역으로 나눠 평화유지

      업무를 수행할 것이이며, 러시아는 평화유지군 파견을 밝히지 않았으나 러시아와 협상을 통해 러시아의

      평화유지군 파견을 논의할 것이라고 발표

      러시아 국방장관 약 1만명의 러시아군을 코소보에 파견할 준비를 마쳤다고 발표 

6.7. UN안보리에 산정할 코소보 평화결의안 마련을 위한 G8외무장관 결렬. 20개항복 중 17항목에

     합의하였으나 나토의 공습전명 중단 시점, 유고 지도자들의 전범 기소 문제등에서 러시아의 반대로

     최종 결정 연기

6.9. 나토와 유고는 그동안 난항을 거듭하던 유고군의 코소보 철군에 관한 군사실무협정에 서명함으로써

      유고군 코소보에서 철군 시작 확인. 개전 78일만에 코소보전쟁 종결. 나토 공습 중단 발표

6.10. 나토, 코소보 평화유지군(KFOR)에 코소보 진주 명령 하달 발표. 12일 선발대 1만9천명 코소보 진주

       예정

6.12. 러시아군 200여명, 나토에 사전 통보없이 코소보 주도 프리슈티나에 전격 진주

        영국, 프랑스 연합군 러시아군에 이어 프리슈티나에 진주

6.13. 나토군과 유고군간 코소보 곳곳에서 유혈 충돌로 10명 이하의 유고군 사망. KLA, 세르비아계 공격

       최소 5명 사망

        KLA대변인, 무장해제 하지 않고 정규군으로 전환할 것이라고 발표하여 코소보에 새로운 긴장

6.18. 코언 미국방장관과 세르게예프 러시아 국방장관은 헬싱키에서 3일간의 협상을 마친 뒤 코소보

       평화유지군에 참여하는 러시아군의 역할(러시아군에게 책임구역 할당하되 나토사령부의 지휘권에

        협력)에 관한 협정에 서명.

6.19. UN 고등판무관실(UNHCR) 대변인, 코소보에서 세르비아계 7만명 떠났다고 발표

6.20. 나토사령부, 19일 자정을 기해 코소보에서 유고군 철수 완료 발표 

7. 4 미국의 요청을 받은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가 러시아 병력 수송기가 통과할 영공을 잠정 봉쇄하여

      러시아군의 코소보 파견대의 출발을 연기.러시아는 약 200명의 공수부대원을 실은 일류신 -76 2기를

      코소보로 파견, 주둔 병력을 강화할 예정이었다.

7. 5 나토군사대표단과 러시아는 '러시아 코소보 평화유지군의 코소보 주둔위치와 역할에 관한 협상을

      타결하였다고 발표. 러시아군 3,600명을 미국, 프랑스, 독일의 관할 구역에 분산 배치한다는

      합의에 성공

7.30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프리슈티나 방문

7.31 코소보해방군(KLA) 사령관 아김 체쿠장군 러시아 평화유지군 병력에 한 때 구금

7.31 프리슈티나 시내에 신축중이던 세르비아계 정교회 건물에 대형 폭발 사건 발생

8.7 몬테네그로 정부, 유고연방 탈퇴안 승인.

     * 몬테네그로는 유고연방과 느슨한 형태의 연합을 유지하면서 독자적인 군대와 외교권 통화를 보유하는 안을 통과. 미국은 몬테네그로의의 안에 환영을 하였으나 완전 독립은 발칸반도에서 또 다른 분쟁을 야기할 수 있다고 보고 반대 입장 표명

8.29 리처드 홀브룩(미국, 전 발칸 특사) 코소보 방문

9. 14  리플랸시에서 17세의 알바니아계 청소년이 세르비아계 노인을 흉기로 찔러 살해

9.20 코소보 해방군(KLA)와 코소보 평화유지군(KFOR)은 KLA의 비무장화와 순수 민간단체로의 전환을 골자로 하는 무장해제        협정에 서명했다고 KFOR 발표

9.22 코소보 보호단(KPC, KLA의 전신) 활동 개시

       * KPC는 5,000명으로 구성되며 단장은 아김 체쿠 장군이 임명. 주민들의 보호를 위해서만 제한적으로 무기사용이 허용

10.11 코피 아난 UN 사무총장 코소보 방문

         UN 코소보 파견단 민간부문 소속 직원 부임 첫날 프리슈티나에서 피살

12.5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코소보 인권 보고서 발표.

2000년

1. 15.  보스니아내전과 코소보분쟁 당시 인종청소로 악명을 떨치던 세르비아계 전범 아르칸(47. 본명 젤리코 라즈나토비치)이           베오그라등의한 호텔에서 무장괴한들의 총격을 받고 피살

1. 16.  코소보 동부지역에서 국제평화군의 일원으로 복무중인 미군병사 1명이 11세의 알바니아계 소녀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로

          구속기소되었다고 코소보 주둔 미군 발표

2. 2.  미트로비차에서 알바니아계, 유엔 버스와 세르비아인이경영하는 카페에 수류탄을 투척하여 세르비아계 주민 2명 사망

2.3  헤닝 필립 KFOR 대변인, 코소보자치주 북부 코소보스카 미트로비차에서 유혈 폭력사태 발생 발표. 알바니아계 주민 3명이        사망하고 10여명의 세르비아계 주민들 부상 발표

2. 7.  밀로세비치의 측근인 파블레 불라토비치 유고 국방장관이 베오그라드의 한 식당에서 괴한에게 피살

2. 13.  코소보스카 미트로비차 마을에서 코소보평화유지군과 알바니아계 주민들간의 총격전 및 주민에 대한 수류탄 공격 발생, 1명이           숨지고 14명 부상

2. 21.  미트로비차에서 알바니아 주민과 코소보 평화유지군 충돌 수십명 부상

2. 23.  프랑스와 미국은 미트로비차에 폭력사태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프랑스는 6백에서 7백명의 병력을 추가 파병하고 미국도 1개            해병부대를 미트로비차에 투입 발표

2.29, 코소보와 세르비아계 국경지역에 유엔관리가 피격 * 코소보 북부지역 세르비아계와의 경계지역에서는 양측간의 소규모의         산발적인 충돌 지속

3. 20. 유럽연합(EU)은 유고연방에 대한 9개월 동안의 항공봉쇄 조치를 해제했다고 발표. 그러나 다른 경제 제재조치는 강화할          것이라고 밝힘 

4. 4. 프리슈티나에서 미군과 폴란드의 평화유지군과 세르비아계 주민들간의 충돌로 수십명의 부상자 발생

4. 14.  알바니아 온건파 지도자 루고바는 코소보의 독립이 허용되지 않을 경우 또 다시 전쟁에 휘말릴 것이라고 경고

4. 14.  유고연방 야당과 반정부 인사 등 10만여명은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밀로세비치 대통령의 퇴진과 조기 총선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

4. 25.  밀로세비치 대통령의 측근인 유고연방 국영 항공사(JTA) 사장 지카 페트로비치가 베오그라드에서 괴한의 총격으로 피살

7. 10.  밀로 주카노비치 몬테네그로공화국 대통령은 유고연방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몬테네그로는 더 이상 연방 선거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발표함으로써 유고연방은 또 다시 분열에 직면

8. 1.  코소보에서 평화유지군으로 근무하다 현지의 11세 소녀를 성폭행한 뒤 살해한 미군 하사 프랭크 롱이에게 종신형을 선고

9. 2.  미트로비차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세르비아계 죄수들 15명의 탈옥사건 발생

9. 22.  유고 정부는 영국 데일리 텔레그라프 특파원 등 외신기자 10명을 추방. 그러나 UN은 선거 참관인 200명을 코소보 지역 등에            파견하겠다고 발표

9. 24.  유고연방의 대선과 총선 투표 실시

9. 25.  세르비아 민주야당(DOS)의 코슈투니차 후보는 자체 집계 결과  결선 투표없이 1차 투표에서 이긴 것이 확실하다고 일방적으로           승리 선포. 그러나 유고연방 선거 관리위원회는 개표 결과 발표를 지연.

9. 25.  슈뢰더 독일 총리는 모스크바에서 푸틴 러시아대통령과 회담한 뒤 "우리는 유고 국민들이 민주적 변화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함께 인정했다"고 밝힘으로써 러시아도 더 이상 밀로세비치를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

9. 26.  미 국무부, 밀로세비치가 패배한 것이 확실하다는 성명 발표

9. 26. 세르비아 민주야당(DOS) 대변인 은 97.5%의 개표 결과 코슈투니차 후보가 55%를 득표해 35% 득표에 그친 밀로세비치 대통령을          물리친 것으로 확인 됐다고 발표. 이에 대해 여당은 개표가 끝나지 않았으며 현재 밀로세비치가 46% 대 41%로 코슈투니차를          앞서고 있다고 주장

9. 27. 베오그라드에서 밀로세비치 퇴진을 요구하는 약 20만명의 군중 운집. 노비사드, 니슈시에서도 약 3민명의 반 밀로세비치 시위대          운집

9. 27.  유고연방군 사령관 네보이사 파브코비치 장군은 폭동사태와 같은 내부적인 일엔 개입하지 않겠다며 정치적 중립을 선언

9. 30.  유고 국영 TV 방송국 RST는 밀로세비치는 결선 투표를 강행하기로 하였다고 발표

10. 2.  밀로세비치의 퇴진을 요구하는 유고연방의 총 파업이 유고 전역에서 시작

10. 3.  스위스 정부는 밀로세비치 측근들의 은행 계좌 1백여개를 동결했다고 발표

10. 4.  유고정부는 밀로세비치의 퇴진을 요구하며 7천5백여명의 광원들이 엿새째 파업 중인 콜루바라 탄광에 중무장한 경찰 1백여명을            파견

10. 4. 유고 관영 탄유그통신은 유고연방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선거의 일부를 무효화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

10. 5.  베오그라드에서 20만명 이상이 참여한 밀로세비치의 퇴진을 요구하는 격렬한 시위 발생. 시위대는 연방 의회 의사당과 국영 TV           방송사 건물을 점령.

10. 6. 대통령 관저를 떠나 잠적했던 밀로세비는 베오그라드에서 이고르 이바노프 러시아 외무장관에게 퇴진의사를 밝혔으며, 국영           TV에서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정권 이양을 선언

10. 7. 코슈투니차는 베오그라드유고연방 의사당에서 대통령 취임식을 갖고 정권 인수 작업에 착수

10. 9. 유럽연합은 99년 발효된 유고연방에 대한 석유금수조치를 해제

10. 12. 코슈투니차 유고연방 신임대통령은 몬테네그로가 원한다면 유고연방에서 탈퇴를 용인하겠다고 발표  

10. 17. 듀카노비치 몬테네그로 대통령은 연방정부를 함께 구성하자는 코슈티나차 유고연방 대통령의 제의를 거절

10. 28. 코소보 지방선거에서 온건파인 아브라힘 루고바가 이끄는 코소보 민주동맹이 압승했다고 코소보 선거 감시단체(KACI)가 발표

10.29 세르비아공화국과 코소보 접경지대에서 무력충돌을 벌여온 유고연방과 알바니아계 반군이 무기한 휴전에 합의. 이 충돌은 지난 10.21 UCPMB 반군이 프레세보계곡에서 세르비아 경찰 4명을 사살하고 세르비아내 검문소를 점거하면서 시작한 것이다. 이때 유고정부가 탱크와 군대를 이 지역으로이동하면서 위기가 고조된 바 있다.

11. 30. 밀로세비치 전유고연방 대통령이 권좌에서 축출된지 7주만에 세르비아 사회당 당수로 복귀 

2001.

2.17 코소보 북부지역에서 16일 세르비아인들을 태우고 가던 버스가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로 추정되는 세력의 폭탄 공격을 받아 적어도 10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했다고 코소보 주둔 영국군측이 밝힘. 세르비아 북부 도시 니스를 떠나 코소보의 세르비아계 마을인 포두예보로 향하던 버스는 이날 오전 11시30분(현지시간) 코소보 국경을 넘자마자 폭탄 공격을 받았다고 영국군은 전했다. 현재 코소보의 2백만 주민들 중 약 90%를 점하고 있는 알바니아인들은 10년간 유고슬라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대통령의 독재에 시달린 뒤 강력하게 독립을 요구해 왔다.

4.22 몬테네그로 공화국 총선에서 독립 지지파가 승리함으로서 코소보를 포함한 발칸 반도내 알바니아계의 분리독립운동에 새로운 변수로 등장. 2001년 2월 발생한 마케도니아 사태시 몬테네그로의 알바니아계 반군은 거의 연대투쟁 직전까지 갔으나 NATO군의 국경봉쇄로 인해 직접적인 개입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밀로 주카노비치(39)대통령이 이끄는 독립지지파인 `몬테네그로 승리연합` 은 23일 99% 개표 결과 42%의 지지율을 얻어 40.6%를 기록한 연방유지파인 `유고와 함께 동맹` 을 제쳤다.
당초 여론조사에서는 몬테네그로 승리연합이 압승, 전체 77석 가운데 과반수를 확보할 것으로 전망됐으나 실제 투표에서는 독립 신중론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분석됐다. 주카노비치는 개표 후 기자회견을 열고 "곧 독립을 결정하는 국민투표를 실시해 오는 7월 13일 이전에 몬테네그로는 독립국으로 다시 태어날 것" 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몬테네그로 헌법이 공화국의 지위변경 같은 중대 사안은 의회의 3분의2 이상의 찬성을 요구하고 있어 독립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게다가 발칸에서의 분리주의 확산, 특히 코소보 사태의 재연을 우려하는 유럽연합(EU)과 미국의 반대도 큰 걸림돌이다.
또 보이슬라브 코슈투니차 유고연방 대통령 등 유고연방 지도부가 몬테네그로의 독립을 극렬 반대하고 있어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는 상당한 진통이 따를 전망이다.
밀로 주카노비치(39)대통령이 이끄는 독립지지파인 `몬테네그로 승리연합` 은 23일 99% 개표 결과 42%의 지지율을 얻어 40.6%를 기록한 연방유지파인 `유고와 함께 동맹` 을 제쳤다.
당초 여론조사에서는 몬테네그로 승리연합이 압승, 전체 77석 가운데 과반수를 확보할 것으로 전망됐으나 실제 투표에서는 독립 신중론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분석됐다. 주카노비치는 개표 후 기자회견을 열고 "곧 독립을 결정하는 국민투표를 실시해 오는 7월 13일 이전에 몬테네그로는 독립국으로 다시 태어날 것" 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몬테네그로 헌법이 공화국의 지위변경 같은 중대 사안은 의회의 3분의2 이상의 찬성을 요구하고 있어 독립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게다가 발칸에서의 분리주의 확산, 특히 코소보 사태의 재연을 우려하는 유럽연합(EU)과 미국의 반대도 큰 걸림돌이다. 또 보이슬라브 코슈투니차 유고연방 대통령 등 유고연방 지도부가 몬테네그로의 분리독립을 극력반대하고 있고 2001년 마케도니아사태시 나토가 유고정부군으로 하여금 코소보와 마케도니아의 완충지대를 점령하도록 허락한 바 있기 때문에 이러한 추세라면 소수민족의 분리독립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획득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 질 전망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인간아 > 보스니아 내전

보스니아 내전

개요

구유고연방이 해체될 즈음인 1992 3 3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국민투표를 통해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독립의 선포는 분쟁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독립을 주도한 세력은 회교도가 중심을 이룬 보스니아 이슬람 정부와 이들 세력에 협조하는 보스니아내 크로아티아인들이었다. 그러나 보스니아내 30% 차지하는 세르비아인들은 보스니아에서 분리독립을 주장하며 유고연방에서 독립의 가부를 묻는 선거에 불참하면서 보스니아 독립선언 다음날인 3 4 독립을 선언하였다. 1992 4 6 EU 보스니아의 독립을 승인하자 보스니아는 본격적인 내전상태에 돌입하였다. 유고연방군의 지원을 받는 세르비아계는 내전 초기 보스니아 영토의 70% 일거에 장악하는 기세를 올렸다.

보스니아 사태가 위험 수위를 넘자 UN 동년 5 신유고연방에 대한 전면적인 금수조치, 항공봉쇄, 자산동결을 내용으로 하는 제재 조치를 취하였다. 신유고연방군은 휴전에 합의하였지만 보스니아내 세르비아계는 휴전에 동의하지 않은 전쟁을 계속하여 갔다. 냉전이 종식된 후의 유럽에서 냉전 시에도 없었던 민족간의 유혈사태가 내전으로 발전했음에도 UN 군사행동의 가능성을 시사할 직접적인 군사행동은 취하지 못했다. 그러나 보스니아 내전중 세르비아계는 소위 '인종청소'라 불리는 만행을 저지르자 여태껏 미온적인 태도를 취해온 UN 1992 8 군사개입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3 여명의 평화유지군이 보스니아에 파견되었으나 평화유지군의 역할은 미미하기만 하였다. 내전은 휴전과 재확전이 반복되는 악순환을 되풀이되었다.

이러한 상황아래 러시아는 1995 3 보스니아사태 해결을 위한 새로운 제안을 하였다. 세르비아계를 암묵적으로 지원하고 있던 러시아는 세르비아공화국이 보스니아 회교정부와 크로아티아정부를 승인하는 대가로 세르비아에 대한 UN 제재를 해제하자는 것이었다. 같은 맥락으로 미국의 주도하에 보스니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내전 당사국들과 미국, EU, 러시아 중재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1995 11 1 미국의 데이턴에서 평화협상이 개최되었다. 난항을 거듭하던 평화협정은 1995 12 데이턴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보스니아에 평화가 정착되는 시금석을 마련하였다. 이로써 20 이상의 희생자를 내고 230 명의 난민을 발생시킨 보스니아 내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평화협정 체결후 미국과 독일이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에 대한 경제제재 무기금수해제 결의안을 24시간 내에 채택해 것을 UN 요청하였고, NATO 6 명의 다국적 평화유지군을 투입할 차비를 갖추었다. 다국적군중 미군은 최대 병력인 2 4천명을 투입하게 되고 영국은 1 3천명을 투입하였다. 또한 러시아도 2천명 이상의 병력이 투입되어 냉전 이후 처음으로 미ㆍ러가 군사작전을 갖게 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과 러시아는 보스니아에서 평화유지를 위해 세르비아의 협조가 최우선이라 보고 밀로셰비치 세르비아대통령을 적극 지원하였다. 한국도 OSCE 협력 동반자국으로서 1996 9 보스니아 선거시에 선거감시단으로 12명을 파견하였으며 1998 9월에 실시되는 보스니아 선거에 감시단을 파견하였다.

의미 영향

구공산권의 몰락 이후 유럽에는 항구적인 평화가 도래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인종, 영토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발칸반도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구유고연방이 해체되면서 인위적으로 획정된 국경에서는 여러 민족간의 갈등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쟁의 요인들은 냉전 시에는 잠재적으로만 존재할 뿐이었지만 냉전이 종식되고 나서는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점에서 보스니아사태는 발칸반도의 특성이 가장 나타난 분쟁이라 하겠다. 분쟁이 시작되고 나서 발칸반도에서 여러 분쟁들이 표출되기 시작했고 이는 결국 유럽 안보 전체를 위협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추후전망

보스니아는 민족ㆍ종교적 이질감이 강하고 중앙정부의 권위가 약하여 통일된 주권국가로서의 한계를 노정하고 있고, 보스니아내 세르비아계를 얼마나 통제하느냐에 따라 평화가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가 결정될 것이다.

참고자료

주요 일지

1993

8. UN EC 2 평화안 발표:3 공화국과 3 민족으로 구성되는 보스니아공화국연합, 영토배분(세르 52%, 회교31%, 크로아17%), 조인 7 일내 모든 전투중지, 회교계만 반대

1994

3.1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정부는 러시아 외무장관 코지례프와 회담 국가연합(Confederation) 합의

7.5 . . . . 5, 내전종식 위한 민족별 영토분할안 제시. 수락여부 결정에 3주시한 부여 '94.8.30 세르비아 투표에서 90%거부

1995

1.1 보스니아 내전 당사자 4개월간 휴전 합의

3.20 보스니아 내전 휴전 3개월 만에 재격화/ 회교 정부군이 3 전선에서 총공세 개시 세르비아계 대규모 반격

4.30 보스니아 휴전기간 만료

5.1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휴전기 만료 내전 격화

6.1 미국 로버트 프레슈어 특사 세르비아 파견/세르비아의 보스니아 승인 세르비아계 인질 조기 석방 촉구

6.2 F-16, 보스니아 비행금지구역 정찰비행 세르비아 민병대의 미사일에 피격(NATO, 6 8 해군 특공대가 조종사 스코트 오그래디 대위를 구출했다고 발표)

6.18 보스니아내 세르비아계 유엔평화유지군 잔여 인질 26 전원 석방

8.10 터키-보스니아, 군사교류협력 협정 체결

9.8 미국의 중재로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신유고 3개국 외상이 제네바에서 회담, 영토 분할안 기본합의

9.26 보스니아ㆍ크로아티아ㆍ신유고연방 3개국 총리 뉴욕에서 평화 3원칙 합의

10.12 보스니아 휴전 발효 (60일간)

12.7 OSCE 외무장관회의 부다페스트에서 개최

보스니아 지원 협의, 감시단 창설 결정

12.8 보스니아 평화실시 국제회의 개최(런던, 44개국ㆍ10 기관 참석): 인도주의ㆍ난민ㆍ선거ㆍ복구문제협의/런던 문서 채택: 복구자금 3년간 49$ 필용 표명

12.10 보스니아ㆍ크로아티아 세력, 평화협정 승인

12.14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평화협정, 파리에서 미ㆍ러ㆍ영ㆍ불ㆍ독 5개국 정상의 입회하에 조인. 평화 실시부대(IFOR) 창설 파견 결정

1996

1.4 보스니아 군축협상, 빈에서 개최

1.12 러시아군 1 1,500 보스니아 도착(2차대전후 최초로 미군과 연합행동)

9.14 보스니아 자유총선 종료/ 3 동안 '인종청소와 증오'로 얼룩진 보스니아 내전 공식 청산(OSCE관리/IFOR 5,200명이 경계. 33개국 2,000명이 선거 입회)

11.18 NATO, 보스니아 평화안정부대(SFOR) 병력파견 합의

11.27 NATO이사회 , 보스니아 다국적 평화실시부대(IFOR) 임기 1 합의

12.4 보스니아 평화정착 이행 계획을 위한 런던회의 개최

12.6 러시아, 보스니아 국교수립 서명

12.16 NATO 위원회 (16개국 대사로 구성), 12 20일부로 주둔기간이 만료되는 '보스니아 평화이행군(IFOR: NATO 예하병력 6 ) 후속군으로 '평화안정군'(SFOR) 대해 합의( 30개국 지상군 31,000 , '96 12월부터 18개월간 파병)

12.20 '보스니아 평화이행군(IFOR: NATO 예하병력 6만명) 임무완료, '평화안정군'(SFOR) 임무 승계

1998

5. NATO, 보스니아에서 무기수거 작전 수행(일명 추수작전)

참고사항

데이턴 평화협정: 협정 당사자인 밀로세비치 신유고대통령, 투즈만 크로아티아 대통령, 이제트베고비치 보스니아 대통령 미ㆍ러ㆍ영ㆍ불ㆍ독 Contract Group 1995 11 21 미국의 데이턴에서 가서명후 12 14 파리에서 정식으로 서명하였다. 평화협정의 정식 명칭은 General Framework Agreement for Peace in Bosnia and Herzegovina. 주요내용을 살펴보자면 보스니아에 대한 국제적 승인 현재의 국경으로 단일 국가 유지 회교-크로아티아계 연방(51%) 세르비아계 공화국으로 1국가 2체제로 연방을 구성하며, 사라예보를 통합 수도로 지정하였다. 난민 귀환을 허용하고 NATO주도의 평화이행군(IFOR) 6만명이 배치된다.

* 98년 이후 대체로 평온한 상태를 이루고 있으며 99년 발생한 코소보사태가 발칸반도에서 워낙 중요한 사태로 진전됨에 따라 주목할 만한 상황 진전 없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