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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비발~* > 세기의 여성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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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쎈연필 > 조까라, 마이싱이다!

조까라, 마이싱이다!

글 박민규_소설가. 1968년생. 소설 『지구 영웅전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등

 

1. 도대체 마이싱이란

학창시절 학교를 주름잡던 1년 터울의 선배가 있었다. 그 형의 별명은 ‘마빈 헤글러’였다. 실제로 머리를 빡빡 깎은 그에겐 언제나 화려한 소문이 뒤따랐었다. 즉 3대 1이라든지, 칼을 든 2명이 포함된 4대 1이라든지. 그러나 그 소문에 비해 펀치는 한결 부드러운 것이어서(맞아봐서 안다) 나는 그가 마빈 헤글러라기 보다는, ‘마빡 헤글러’일 뿐이란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결국 하루는, 그래서 넌지시, 담배를 피고 있는 그에게 물어보았다. 형, 지난 번에, 그러니까 4대 1 그거요 그거 어땠어요? 묵묵히 하늘을 응시한 채, 선배는 전혀 뜻밖의 대답을 건네왔다. 조까라, 마이싱이다. 북북, 꽁초를 담벼락에 부비며, 나는 무척이나 당황했었다. 우선 말의 뜻을 짐작조차 못하겠거니와, 묘하게도 그 말을 듣는 순간 그가 과연 ‘마빈’일 수도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였다. 어쨌거나, 그런데 도대체 마이싱이란? 도대체 마이싱이, 뭐지? 나는 궁금했으나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세월은 흘러, 나는 작가가 되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대부분의 일들이 그러하듯 그냥 어느 순간, 무작정 글이 쓰고 싶었다. 요약하자면, 나에겐 그것이 전부이다. 무작정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 것도 보름 전의 일이었다. 어디신가요? <대산문화>입니다. 요는, 젊은 작가의 변(辨)을, 듣고 싶다는 얘기였다. 평소, 이를테면 학술재단 같은 곳과 교류를 하면 작가로선 끝장이란 소신을 갖고 있었는데, 예, 예 잘도 대답을 하고, 쓰겠노라 동의를 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바로 그 순간 심하게 이 글을 쓰고 싶었고, 바로 그 순간 아무런 까닭도 없이 ‘조까라 마이싱’의 기분이 들어서였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바로, 그래서다.  

2. 너가 당룡이냐

우선 나는, <대산문화>로부터 네 가지의 질문을 받았다. 해서, 짧게, 그것부터 답하고 보는 게 도리란 생각이다. 심사, 숙고 해보았지만, 4가지 질문 모두가 도무지 긴 대답을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유는 두 가지다. 내 무식(無識)의 소산이거나, 정답이거나. 정답은 늘, 짧고 간략한 것이기 마련이라고, 나는 언제나 생각해왔다. ①자신의 소설이 지향하는 바는, 혹은 소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답. 모른다. 내가 소설을 쓰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이, 나를 쓰고(用)있다. 그래서다. ②기존의 소설과 자신의 소설이 다른 점은 무엇인지? 답. 마치 ‘인류와 자신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의 질문을 받은 느낌이다. 나(내가 쓴 소설)는 유전자의 리바이벌에 불과할 따름이다. 흘러, 가자. 흘러가서, 전달, 하자. ③독자나 평론가들이 자신의 소설에 대해 오해, 오독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답. 누구에게나, 꼴린 대로 생각할 권리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④자신을 비롯한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 대한 선배문인들의 평가(<대산문화> 2004년 봄호 기획특집 참고)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답. 수고하셨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나도, 열심히 하겠다.

써놓고 보니, 마치 4대 1의 싸움이라도 한 듯한 기분이다. 그러니까 4대 1 그거요 그거 어땠어요? 묵묵히 하늘을 응시한 채, 나는 전혀 뜻밖의 대답을 건넨 건가?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대산의 질문들을, 나는 그런 분위기로 해석하고자 한다. 즉 70년대의, 이소룡 영화에서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너가 당룡이냐? 그렇다. 내가, 당룡이다.

3. 푸트웍 좀 해보자, 개새끼야

이른바 ‘등단’을 한 지, 이제 꼭 1년이 지났다. 소설이 무언지는 애당초 몰랐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란 생각이다. 그것이 나란 인간이다. 그냥 쓰고 싶고, 쓰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다. 시간이, 없다. 오로지 그럴, 따름이다.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꼴린 대로 쓸 권리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 글을 쓰는 것인가? 그 이유를 나는 지금에서야 어렴풋이 깨닫고 있다. 그러니까 돌대가리. 이, 마빡만 헤글러!

이유는 짜증이다. 짜증, 이라기보다는 하소연이고, 하소연, 이기보다는 외로움, 같은 것이다. 이런 얘길 할 수 있는 지면이, 도대체 없었다. 그래서다. 그래서 이것은 젊은 작가의 변(辨)일수도 있고(참, 어지간히도 젊다!), 변(便)일 수도 있다. 왜 그럴까? 이제 겨우 2권의 책을 냈을 뿐인데, 그리고 구만 리의 앞길이 남아 있는데. 바로, 그래서다. 이 구만 리의 앞길을, 또 다른 누군가가 밟고, 지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나로선 길을 가야 할 이유가, 또 그들을 위해 길을 열어야 할 이유가 있다, 그래서다. 문단인지 평단인지, 아니 세상이여! 우선 말하겠는데 제발 좀 문학의 위기, 소설의 위기라고 떠들지 마라. 호들갑 좀, 떨지 말아라. 나는 어디 핵이라도 떨어진 줄 알았다. 쉰 소리 하려면 집에서 쉬어라, 나오지 마라. 그것이 문학을, 또 우리를 도와주는 길이다. 단언컨대, 지금의 위기는 문학의 위기가 아니다. 문학의 위기를 떠드는 놈들의, 위기일 따름이다. 아이고 귀야. 귀에 슨 녹슨 못을 뽑아내며, 나는 중얼거린다. 너무 그러니까 니들이 마치 ‘문학’ 같잖아? 니들이 ‘문학’이냐?

두 번째, 궁상 좀 떨지 마라. 즉 그것이 이곳의 풍경인데, 마치 위기론에 이은 예비군 훈련이나, 민방위 훈련을 지켜보는 기분이다. 작가는 잡문으로 뺑이를 쳐야 하고, 또 그걸 당연한 걸로 생각한다(생각해야 한다). 안 팔려요. 안 팔리면 어쩌죠? 몇 푼의 계약금에도 손을 내밀기가 민망하고, 생활은 점점 좀스러워진다. 요는, 위기를 떠드는 놈들이 이 땅의 작가들을 자꾸만 작게 만든다는 것이다. 좀스럽고 비참하게 만들며, 왜소하고 말랑말랑한 인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몇 푼의 선인세와 생활비에 손을 떨고 연연해야 하는 인간이, 과연 얼마나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런 글이라면, 우선 나부터도 읽고 싶지가 않다.

세 번째, 근친상간 그만하자. 내가 볼 때 이 땅의 소설이 망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각설하고 찢어지자. 그 동안 즐거웠다. 어찌나 문단속을 잘 했던지, 이곳에는 여지가 없다. SF도 추리도 공포소설도, 심지어 제대로 된 하이틴 로맨스도 있어야 정상이 아닌가? 아아 줄리엣, 우리 아버지들은 언제 죽을까? 오오 로미오, 오빠가 자꾸 나를 건드려요. 헤이 유! 근친상간이 바보를 만든다는 거, 꽤나 알려진 의학 상식 아닌가? 쪽 팔려, 박수 좀 치지 마. 어이, 저리 가! 접붙이지 마.

네 번째, 거 참 말 많네! 거 참, 말이 많다고 나는 생각했다. 정말이다. 말이 많은 건, 어쨌거나 말이 많은 것이다. 그뿐이다. 지금껏 나는 네 개의 질문을 받고, 네 개의 답변을 하고, 네 개의 푸념을 늘어놓았다. 요는 무엇인가? 나는 당룡이고, 그냥 날 내버려두란 얘기다. 어떤 면(面)에서 세상은 분명히 달라졌다. 네가 당룡이냐? 끄덕끄덕. 삼가 한수를 배우겠소. 오호라 학익(鶴翼)의 품세를, 그렇다면 용호(龍虎)의 권세로! 쿵후라는 이름만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숨을 죽이던 시절이 있었다. 비록 좋은 시절이었지만, 이제는 먼 옛날의 이야기이다. 마찬가지다. 문학이라는 이름만으로, 또 소설이란 이름만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숨을 죽이던 시절이 있었다. 좋은 시절이었지만,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나 역시 과거의 문학을 동경해 작가가 된 인간이다. 눈물이 날만큼, 그때가 그립다. 누군들, 품세의 아름다움을 취하고 싶지 않으랴.

마치 문학처럼, 언제부턴가 복싱도 시시해진지 오래이다. 때문에 나는 이종격투기를 관람한다. 얼마 전 열린 이종격투기 대회에서의 일이다. 종이 울리자마자, KO로 승부가 난 경기가 있었다. 복서 출신의 패자는 습관처럼 푸트웍을 밟아보려다 불의의 기습을 당했다. 선공을 하지 말란 법은 없었지만, 뭐랄까 그런 기분이었다. 즉 삼가 한수를 배우겠, 에서의 ‘퍼벅’의 느낌. 정신을 차린 그의 표정에서 나는 그런 문장을 읽을 수 있었다. 푸트웍 좀 해보자, 개새끼야. 수건을 던지지 마라 안젤로 던디(수많은 세계 챔피언들을 길러낸 많은 저명한 복싱 트레이너)여. 나 역시 푸트웍 한 번 밟아보는 게 꿈이다.

4. 조까라 마이싱!

세상은 나의 문파와 나의 품세 따위에 관심을 접은 지 오래이다. 작가로서, 이제 나는 실제로 충격을 주고, 파괴하고, 저것을 쓰러트려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 이 싸움은 더욱 실질적이고(비록 폼은 없어도), 냉정한 것이 되었다. 약속대련과 근친상간을 벌일 여유가, 나에겐 없다. 나는 실제로 강해야만 하고, 또 강해지고 싶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세계의 룰은 이 땅의 문학에도 어김없이 적용되었다. 우루과이 라운드가 어디 농업만의 문제이겠는가? 이제 이 땅의 문학은 제조업인가 서비스업인가? 텍스트와 번역의 댐이 언제까지 이곳을 지켜줄 것인가? 수입인가 내수인가? 질문은 끝이 없고, 간략한 정답은 보이지 않는다. 간략하게 - 나는 정말이지, 강해야 한다.

그래도 이 땅에 ‘작가’들이 있었다. 그래도 이 땅에 ‘소설’이 있었고, 나는 그 아름다웠던 싸움들을 가슴 속 깊이 저장하고 있다. 내게 힘을 주는 것은 바로 그들이고, 다름 아닌 그들의 소설이다. 경건하게, 나도 싸워나갈 것이다. 그 외의 문제라면, 몰라, 조까라 마이싱이 아닐 수 없다. 좋은 시절은 다 갔다는 느낌이지만, 어떤 면(面)에서의 세상은 또 분명히 좋아졌다. 지금 내가 쓰는 컴퓨터는 아폴로를 달에 착륙시켰던 컴퓨터보다 정확히 3배가 더, 뛰어난 것이다. 내 책상 밑으론 인터넷이 들어와 있고, 나는 더 이상 도서관이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뒤적이지 않아도 된다. 이런 환경에서 당신을 화성에라도 보내줄 만한 소설을 쓰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조까라 마이싱이다. 큐빅 퍼즐을 맞출 때의 요령으로, 어떻게든 그 좋은 면들을 나는 맞춰나가야 한다. 이 글을 쓰는 사이 시인 구상이 이 별을 떠났다. 구상 선생님 편히 잠드세요. 당신의 싸움은 아름다웠습니다. 저도, 힘을 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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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endo > thinking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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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레이저휙휙 > 펜타포트 시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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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레르몬토프의 고독

러시아 시인 레르몬토프의 시에 곡을 붙인 '나 홀로 길을 나선다'를 그냥 흥얼거리다가 문득 예전 모스크바 통신에서 '레르몬토프의 고독'이란 페이퍼만 유독 정리해놓지 않은 걸 알게 됐다(이것도 그의 고독에 대한 배려였을까?). 바쁠 때일수록 이렇게 딴짓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의 고독에 대해서 다시 정리해놓는다(모스크바통신에서는 푸슈킨 시와의 비교도 다루었었는데 그건 생략하도록 한다). 참고로, 시 '나 홀로 길을 나선다'에 대해서는 '왕가위와 레르몬토프'(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CID=1909487&paperId=800466)를 참조하실 수 있다. 러시아 가수 올렉 포구진이 부르는 노래는 http://www.youtube.com/watch?v=DcNMQIT-FCo에서 들어보실 수 있고(예전에 국내 드라마에서는 여자가수가 부른 버전이 주제가로 쓰였었다).

 

지난번 통신문에서 레르몬토프의 마지막 <나 홀로 길을 나선다>에 대해서 몇 마디 언급했는데, 나는 이 50번째 통신문에서도 그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한다. 유리 미하일로비치 레르몬토프(1814-1841)에 대해서 말이다. 푸슈킨에게서는 기념비란 테마가 시인 자신에게서조차 주제화되며, 그의 예언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탄생 100주년(1899), 사망 100주년(1937), 탄생 200주년(1999) 등이 매번 성대하게 치러진 반면에, 고독의 시인 레르몬토프는 그의 문학적 유언(<나 홀로 길을 나선다>)에 걸맞게 언제나 혼자였다(*이 시마저도 종종 푸슈킨의 시로 오해받는다고 한다!)

시인의 탄생 100주년이 되던 1914년에는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사망 100주년이 되던 1941년엔 2차 세계대전 중이었다(2차대전은 1939년에 발발하지만, 소련은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던 독일의 공격을 받고 나서야 뒤늦게 비로소 참전한다). 해서, 러시아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시인/작가이자 러시아 낭만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국 러시아에서 한번도 제대로 기념되지 못했다(그의 지명도에 비추어보면, 거의 미스터리한 일이다). 그리고 올해(*2004년)는 그의 탄생 190주년이 되는 해였지만, 역시나 그와 관련된 행사들은 (내가 아는 한) 치러지지 않았다(체홉 사망 100주년에 묻혀서). 그저 문학신문의 기념 기사 한 자락 정도.

하다못해 2주전 일요일에는 그의 탄생 190주년을 기념하여 대표작인 <우리시대의 영웅>(1964) 등이 문화채널에서 영화로 방송됐지만, 그날 따라 나는 저녁 늦게야 TV프로그램을 확인했다(그의 탄생일은 1814 10 3일이다. 2일 밤인데, 보통 3일로 기록한다. 이게 구력일 것이기 때문에, 지난 17일이 신력에 따른 생일이었을 것이다. 결투로 인한 사망은 1841 7 15. 황제 니콜라이 1세는 그의 죽음에 대해서 개죽음이로군!이라고 간단히 언급했다. 한편 최초의 레르몬토프 전기는 파벨 비스코바트이의 것이며 1891년에 나왔다. 이 책은 올해 재출간됐다). 나는 레르몬토프를 전공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닌데, 그렇게 무심하게 지나쳐버린 일이 한동안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사실 그에 대한 본의 아닌 홀대는 나만의 것이 아니다. 나의 조국 한국에서는 레르몬토프를 거의 읽을 수가 없다. 지난 1999년에 전집이 간행된 푸슈킨과 다르게 그나마 우리말로 번역/출간된 레르몬토프의 시집과 소설 <우리시대의 영웅>(한길사, 조선대출판부)은 진작에 품절되었다(<우리시대의 영웅>은 영어 중역본도 나와 있었지만 역시 품절. 참고로 영역본 <우리시대의 영웅>은 나보코프가 그의 아들과 함께 옮긴 것이다). 그의 드라마 <가면무도회> <러시아희곡1>(열린책들)에 들어가 있지만, 이 책 또한 품절인 걸로 안다(그의 <가면무도회>는 지금도 모스크바의 무대에 올려지고 있으며 이번 시즌에 포킨이 연출한 고골의 <외투>와 함께 내가 가장 보고 싶어하는 레퍼토리이다).

 

 

해서, 아마도 당장에 서점에서 구할 수 있는 레르몬토프는 내가 아는 한 없을 듯하다(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건대출판부에서 나온 작가론 <레르몬토프>를 소략한 대로 참조할 수 있다). 요컨대, 그는 우리말로 쉽게는 읽을 수 없는 시인/작가인 셈이다(참고로, 레르몬토프의 러시아어 전집은 2권짜리에서 10권짜리까지 다양하며, 보통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은 4권짜리 전집이다(*이미지는 단행본 <우리시대의 영웅>).

 

 

한편, 푸슈킨과 마찬가지로 그는 장교시절에 포르노그라피적인 시들도 썼는데, 그런 시들만을 따로 묶은 <성인을 위한 레르몬토프>도 올해 출간됐다. <성인을 위한 푸슈킨>과 함께. 두 책 모두 이 시리즈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도색화보들이 잔뜩 들어가 있어서, 한국에서라면 도색잡지로 분류돼 판금될 만한 책들이다).

 

해서, 생전에나 사후에나 고독한 그의 운명과는 비록 다소 걸맞지 않아 보일지라도, 약소하지만 이 50회 통신문은 (무심코 지나친 그의 생일을 기념하여 뒤늦게) 그에게 바치고자 한다(이런 걸 뒷북이라고 한다. 하지만, 마음의 부담을 덜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뒷북이라도 치는 것이다). 이건 며칠 전에 작정한 것인데, 좀 전에 혼자 저녁을 먹으면서 오늘 해치우기로 했다. 그렇다고 새로 무슨 글을 쓰는 건 아니고(그럴 형편이 안되므로), 이전에 쓴 글을 약간 편집하는 정도이다(휴식시간 동안 그 일이 끝나기를 바란다).

 

글은 주로 레르몬토프의 연애시에 대한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푸슈킨과의 대비 속에서 레르몬토프를 이해하기 때문에, 푸슈킨의 연애시에 대해서도 언급될 것이다(*이번엔 생략한다). 사실 레르몬토프가 시인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되는 것은 1837년 푸슈킨을 죽음을 권력층의 음모로 비판한 시 <시인의 죽음>을 발표하면서이다. 푸슈킨의 죽음에 부친 시이면서도 정작 푸슈킨이란 이름은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 그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시인이 죽었다! - 명예의 노예 -

헛소문과 비방으로 쓰러졌다,

가슴에 복수의 열망과 총알을 박은 채,

당당한 머리를 숙이고 쓰러졌다!

시인의 영혼은 사소한 모욕의

불명예를 참지 못하고,

그는 세상의 소문에 대항하여 일어섰다

혼자서, 예전처럼... 그리고 살해당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이 일로 유배당하며, 그에 대한 황제의 미움은 거기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이후에 불과 4년을 더 살았을 뿐이다.

 

레르몬토프 전공자들이 흔히 하는 얘기지만, (레르몬토프와 마찬가지로) 27살에 죽었다면 역시나 총각으로 죽었을 시인 푸슈킨(1799-1837)의 문학적 명성이 레르몬토프를 크게 앞지르진 못했을 것이며, 고골(1809-1852) <검찰관>(1836) 공연의 스캔들로 아마 상심해서 죽었을 것인바 아주 재미있고 재능 있는 괴짜 정도로 기억됐을 것이고, 톨스토이(1828-1910)는 자전 3부작이나 끄적거리다가 문학사의 여백으로 사라져버렸을 것이며,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 또한 페트라셰프스키 사건(1849)으로 말미암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버렸을 것인바 고골의 아류 작가 정도로 기억됐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런 것도 다 팔자인 걸 어떡하랴   

 

04. 10. 26/ 07. 06.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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