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22 #시라는별 68
김치 담그는 날
- 오지연
쓰윽쓱 양념을 칠하시는
엄마 손도 빨갛고
버무려진 배추들도 빨갛고
한 포기 두 포기
배추김치가 차곡차곡 쌓여 갈수록
코 훌쩍이며 소매로 땀 훔치시던
엄마 볼도 빨갛고
찔끔찔끔 맛보던
내 혓바닥도 빨갛다
하아, 하아
부엌은 온통 불바다
온 집안이
고추 냄새로 포위됐다.
1968년생인 오지연 시인은 제주 출신의 아동문학가로 1998년 제주문학 동화부문 신인상을 수상한 후 동시를 계속 써오고 있다. 2003년 동시부문 새벗문학상을 비롯해 여러 상을 수상했고 2009년 개정 초초등 국어 교과서에 <버려진 개들>과 <개날리 플루트>라는 시가 수록되기도 하였다. <김치 담그는 날>은 2013년 12월 2일자 경상일보에 발표한 동시라는데, 출간된 동시집들 중 이 시가 실려 있는 시집은 없었다.
2021년 11월 20일 토요일. 시댁에서 월동 준비 중 하나인 김장을 했다. 올해는 50포기. 해마다 이맘때면 한 달 내내 주말마다 김장 품앗이를 다녀야 했다. 시댁 식구들이 엄마표 김치를 원체 좋아해 집당 30포기에서 80포기씩(후덜덜) 김장을 했다. 그런데 여자들도 직장
전선에 뛰어들고 어머님이 연로해지면서 하나둘 김장 포기를 선언했고 올해는 우리집과 막내네만 김치를 담근다. 옆지기와 막내 아가씨는 앞으로 30년 이상 김장을 할 것 같다. 김치 욕심이 드글드글하고, 엄마표 김장에 목을 매기 때문이다.
김치는 속에 들어가는 양념만큼 사랑과 정성이 듬뿍 배는 음식이다. 절인 배추를 사서 예전보다 품이 조금 덜어지긴 했지만 김장은 손이 많이, 아주 많이 가는 작업이다. 절인 배추 물 빼기, 무우 씻어 채 썰기, 갓 씻어 싹둑 썰기, 쪽파 껍질 까서 씻은 후 대가리 십자모양으로 칼집 내 싹둑 썰기, 양념 버무리기(진짜 힘든 작업이다), 배추에 양념 발라 김치통에 차곡차곡 쌓기, 김치통들 김치냉장고에 넣기. 여기까지는 내가 본 과정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는 맛난 양념을 만들어 주기 위한 시어머님의 보이지 않는 노고는 빠져 있다. 마늘 까서 빻아 놓기, 고추 빻기, 새우젓 곱게 빻기, 육수 내 찹쌀 풀 만들기 등등등. 시어머니는 올해 팔순이시다. 허리와 어깨 수술까지 하신 분이 고단함을 밀어내고 이 많은
일들을 해내시는 걸 볼 때면 감탄을 넘어 존경심이 파도처럼 밀려든다. 내 어미가 내게 하던 말을 이제는 시어머니께 듣는다.
ㅡ 야야, 니는 어째 그래 일머리가 없냐.
ㅡ 그죠 어머니. 암만 봐도 잘 모르겠고 손이 빨라지질 않아요.
ㅡ 니가 이걸 다 배워야 하는디 . . . . . .
ㅡ 어머니~~~~ 아범 있잖아요. 저것 보세요. 눈도 빠르고 손도 빠르고. 기가 막히게 잘하잖아요.
ㅡ 하기사. 쟈는 잘못 태어났는갑다. 내 아들이지만 차암 잘한다.
옆지기는 자기 엄마를 닮아 일머리가 끝내준다. 결혼 후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살림에 점점 도통해지고 있다. 나는 이 사람의 욱하는 기질이 싫어 때로 갈라서고 싶다가도 그가 만들어주는 얼큰 찌개에 그 마음을 내려놓곤 한다. 어쩌면 나의 노후는 편해질지 모르겠다 생각하며.^^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부의 미래』에서 ˝세상은 서서히 발효의 시대로 옮겨 가고 있다˝면서 제1의 맛은 소금, 제2의 맛은 양념, 제3의 맛은 발효라고 예견한 바 있다. 서양의 발효 음식을 대표하는 것이 치즈라면, 대한민국 발효 음식의 대표주자는 김치일 것이다. 맛있게 익은 작년 김치가 아직 한 통 남아 있고, 1년 내내 식구들 입맛을 돋우고 배를 불려줄 김치통이 산처럼 쌓였다. 몸은 진짜 노곤노곤하지만 맘만은 흐뭇흐뭇하다.
《김치특공대》는 2년 전 아들과 읽은 어린이책이다. 글밥이 제법 많지만 그림만 보며 읽어도 아이들의 김치 입문서로 손색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