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29 #시라는별 69
구원
- 오은
이 시가 너를 살렸어
이 문장이 이 시를 살렸어
이 단어가 이 문장을 살렸어
네가 이 단어를 살렸어
네가 물속 깊이 잠겨 있던
이 단어를, 하나의 넋을 건져 올렸어
너와 말은 공생한다
힘들이지 않아서 힘들고
보잘것없어서 대단한
아름다운 공회전
너는 이제 지구 어딘가에서
돌 때까지
겉돌다가 헛돌다가 마침내 감돌게 될 때까지
이 단어가
이단의 언어가 될 때까지
너만의 단어가 될 때까지
네가 이 시를 완성할 때까지
내처 아름답다
오은의 세 번째 시집 『유에서 유』를 3분의 2쯤 읽었다. 편수(55편)는 많지 않으나 한 편 한 편의 길이가 길어 더디 읽힌다. 게다가 처음 대충 훑었을 때 받은 인상, 유쾌함 발랄함 흥겨움이 밀려나고 난해함과 난감함이 교차하는 중이다. 아이고. 난해한 시를 왜 자꾸 읽니? 라고 물으니 시인이 답을 준다. 시가 나를 살렸거든.
한 달 전 독서모임에서 내 인생의 숨구멍은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누구는 바느질이었고, 누구는 역마살이었고, 나는 책과 산이었다. <구원>이란 시를 읽으면서 나를 살게 하는 것들 말고 내가 살게 하는 것들, 내가 살리는 것들은 무엇인지 질문하게 되었다. 내가 건져 올렸을지 모를 ˝하나의 넋을˝. 나와 ˝공생˝하며 아름답게 ˝공회전˝하는 것들을. ˝겉돌다가 헛돌다가 마침내 감돌게˝ 되었을 것들을.
11월의 마지막 주말에 합천 가야산을 다녀왔다. 다음날 서울 나들이를 가는 차 안에서 옆지기에게 가야산에 대한 짤막한 감상을 털어놓았다.
ㅡ 여보, 설악산은 칼바람이 불어 바위들이 뾰족뾰족한데, 가야산은 순한 바람이 부는지 바위들이 모난 데 없이 둥글둥글한 거 있지. 아이들을 가야산처럼 키우면 좋겠다, 아니 사람이 가야산처럼 살아가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
그러자 뒷좌석에서 핸폰을 들여다보던 중딩 딸이 고개도 들지 않고 콧방귀를 뀌며 시니컬하게 대꾸한다.
ㅡ 하이고. 엄마의 바람과는 달리 우리집에는 날마다 칼바람이 분다지요.
ㅡ 뭐!!!
나는 딸의 칼에 정곡을 찔려 으하하하!! 너털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렇다. 칼바람 속에도 웃음꽃은 필 수 있다! 나를 살게 하고 내가 살게 하는 것들에는 이 무시무시한 가족도 있다. 하여 나는 이 시의 마지막 연을 이렇게 바꿔 읽었다.
˝당신이 이 삶을 내려놓을 때까지
내처 아름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