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CinDi영화제 섹션별 추천작
<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8월 3주
날씨 더웠음.
영화제에 참석할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언제나 새로운 작품을 만나는 설렘이 주가 된다. 어떤 작품은 잘 알고 있는 감독의 새로운 작품일 수도 있고, 어떤 작품은 여러 영화제를 거치며 입소문을 탄 작품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 신디에서 만난 작품들은 (한 편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이제껏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작품들이었다. 이런 작품들을 만난 내 느낌은, 정말이지 발가벗겨진 기분이 든다. "음, 영화, 내가 좀 알지!"하는 오만한 생각이 아주 박살이 난다고 할까. 이런 부끄러움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난 지금까지 할리우드와 충무로, 그리고 유럽에서 제작되어 한국에서 개봉하는 영화들에 얼마나 많이 길들여져 왔던가. <인셉션>의 표현을 조금 빌리자면, 영화제의 영화들은 주류 영화 속에 잠들어 있는 나를 깨워주는 킥이다. 오늘 본 영화들은 충분히 그럴만한 위치에 있는 영화들이다.
리 홍치 감독의 <겨울방학(寒假)>은 시간으로 다루면, 겨울방학이 끝나는 이틀간에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다. 아이들은 할 일 없이 거리를 방황하고 친구 집에 놀러간다. 새로운 일은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게 반복되는 쳇바퀴 도는 일들의 연속이다. 개학이 되도 달라진 것은 없다.
리 홍치 감독은 고정된 카메라에 일상의 권태와 을씨년스러운 공간을 잡는다. 이런 것은 마치 늘어지는 시간의 흔적을 잡으려고 애쓰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이들은 시간을 버린다. 어른들도 시간을 버린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흐르지만, 모두들 시간을 죽이기만 한다. 아이들에겐 꿈이 없다. 그들의 꿈은 여자 친구와 결혼해서 자신의 씨를 자손만대로 퍼뜨린다거나, 혹은 이 지긋지긋한 가족들에게 벗어나 고아가 되는 것이다. 이 아이들이 자라면 영화에 나오는 어른들(그들의 부모들)처럼, 이혼을 하거나, 정신이 나가거나, 모든 일에 무심해질 것이다. 영화에서 모든 행동들이 두 번씩 반복됐듯이.
개학이 되어도 여전히 죽어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리 홍치 감독은 절규와 탄식을 오간다. 아쉬운 점은, 이 모든 것이 탄식하는 것에서 멈춰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세상에 개입할 수 없고, 결국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인가?
리우 용홍 감독의 <올가미(夜郎)>는 두 쥔이라는 한 경찰의 이야기다. 그에겐 만삭의 아내가 있다. 아내는 곧 출산할 예정이다. 그는 양 밍이라는 옛 애인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녀의 동생 양 즈를 경찰로 취직시켜 같이 일한다. 두 쥔은 동생 두 리를 데리고 병원에 가 낙태를 시킨다. 모든 게 잘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모든 사건이 꼬이기 시작하면서 두 쥔은 이성을 잃는다.
영화에서 주인공 두 쥔을 둘러싼 등장인물들의 관계는 한 번에 설명되지 않는다. 처음에 양 밍이 등장했을 때, 그녀가 두 쥔의 동료 형사인지, 아니면 범인인지, 아니면 아내인지, 아니면 애인인지를 보는 사람들은 알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두 쥔의 동생 두 리가 등장했을 때, 그녀가 창녀인지 부인 몰래 만나는 애인이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이런 내러티브의 전개는 관객들에게 서사의 흐름을 뺏는 대신에 인물간의 관계와 인물 그 자체에 더 몰두하게 만든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이야기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게 함으로써, 우리는 두 쥔의 삶을 구경거리로 보지 않고 그 내면에 다가가기 위해 더 마음을 열어놓을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여전히) 암울하고 어둡다. 머리는 깨어나지만, 가슴은 (아직까진) 울리지 않는다.
<신디 익스트림 2: 퍼스널 아카이브>는 아피차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7편의 단편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자리였다. 그 목록을 열거하자면, <0116643225059>, <빛을 찾는 사람들>, <우리 어머니의 정원>, <창문>, <아시아의 유령>, <에메랄드>, <뱀파이어>다. 아피차퐁 위라세타쿤 감독을 하나의 키워드로 설명한다면, 바로 데이빗 린치다. <0116643225059>는 <6명의 아픈 사람들>이 떠오르고, <우리 어머니의 정원>은 <할머니>가 감히 떠오를 정도다. 확실히 데이빗 린치와 아피차퐁 위라세타쿤 감독은 빛과 어둠, 꿈과 무의식, 그리고 미지의 존재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효과는 사뭇 다르다. 데이빗 린치는 무의식의 공포를 다루지만, 아피차퐁 감독은 애도와 그리움을 다룬다. 특히나 그의 작품 중 가장 무시무시한 <뱀파이어> 조차도 공포를 다루기보다는 미지의 존재를 소환하는 것 같은 주술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가장 기대했었던 <에메랄드>는, 글쎄, 내 허접한 안목으로는 입에 거품을 물 정도는 아니었고, 짧게 "아!"하는 감탄사를 뱉는 정도랄까. 오히려 모르고 봤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를 폄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의 내가 그를 따라잡기에는, 그는 너무 멀리 가 있다는 거다. <창문>에서 브라운관에 비치는 그 황홀한 빛의 윤무를 생각해보면, 감탄을 넘어 탄식을 불러일으킨다. 갑자기 그의 전작들을 모두 보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쳐 오른다.
장철수 감독의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해원(지성원)의 이야기이다. 해원은 서울에서 은행 일을 하고 있다.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외면하는 그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은행에서의 실수로 그녀는 휴가를 구실로 회사에서 쫓겨나고, 그녀는 계속 연락이 오는 복남(서영희)에게 간다. 무도에서 살고 있는 복남은 마을 사람들에게 개, 돼지 같은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다. 복남은 딸과 함께 서울로 도망가려 하지만, 남편에게 잡히고, 딸도 죽게 되는 비극을 맞는다.
영화의 주인공은 복남이라기 보다는 그녀를 지켜보고 방관하는 해원이다. 복남의 살인으로 해원은 타인의 위험을 외면하지 않는다. 복남이 낫을 들었던 것처럼, 해원은 볼펜을 든다. 하지만, 해원이 세상과 맞서기 위해, 복남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나! 우리가 깨어나기 위해선 그만큼의 많은 피가 필요한 것일까? 깨달음은 쉽게 얻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정리하니 벌써 새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