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와 편견의 세계사
헨드릭 빌렘 반 룬 지음, 김희숙.정보라 옮김 / 생각의길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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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제는 <tolerance 관용>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는 '관용'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제목이 '무지와 편견의 세계사'일까? 이 점에 대하여 역자후기에서 자세히 밝힌 것을 토대로 정리해보자면 관용이라는 말이 주는 광범위함에 현대의 관용은 '무지와 편견'으로 인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자의 말과 달리 개인적으로 이 책에 '세계사'라는 말이 붙은 데에는 그다지 공감하기 어려웠다. 읽은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책은 주로 서양 종교사에 가깝기 때문이다.

 

뉴베리상 수상 작가라고 하는 반 룬의 이력에 흥미로울 것을 예상하였고, 글의 초반에 비유적 표현에 '역시 이야기꾼'이라고 기대감을 높였지만 결코 쉬운 내용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는 내가 전혀 알지 못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닌 종교의 역사이므로. 알고 보니 그가 받은 뉴베리상의 작품은 [인간의 역사]였던 것! 동화가 아니었어!!!

 

어찌 됐든 나는 이 책을 비교적 흥미롭게(처음의 기대와는 다른 지적 흥미) 다 읽었고, 내가 지금까지 세계사 시간이나 상식 선에서 배웠던 많은 사건의 전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나 싶게 엉터리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칼뱅이니 종교 개혁이니 프로테스탄스니 하는 것들, 이들을 긍정적인 사건이나 인물로 인식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개혁'이라는 말, '혁명'이라는 말이 주는 모순을 제대로 이해한 시간이었다.

 

처음의 의도가 어떻든 그것이 또다른 불관용을 저지른다면, 그것은 그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들이 깨부수고자했던 불관용과 다를 바 없다. 어떻게 소수의 사람 혹은 한 사람이 수천, 수만의 목숨을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반룬이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이 책을 썼기에 차마 그때의 이야기가 담겨 있진 못하지만 인간의 불관용이 어떤 처참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그 이전에 밝힌 장구한 역사 속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관용이란, 집단의 영역이 아닌 개인의 영역일 뿐일까? 에라스무스, 몽테뉴, 침묵의 윌리엄....세상을 등지듯 개인의 삶 속에서만 관용은 존재하는 것일까? 불관용이 미치는 힘은 이토록 잔혹한데, 관용이 미치는 힘은 얼마나 미약한지. 반룬은 이 책을 통해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도대체 관용은 어떻게 힘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그 해답은 대화, 그것 뿐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과연 세계를 움직이는 힘들 간에 대화라는 게 가능할까 싶은 의문이 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떠올려 본다. 나의 관용에 대하여 반성도 하고 다짐도 해 본다. 그것은 개인의 영역이다. 이러한 개인의 영역이 일반화된다면, 그것이 집단의 관용으로 이어질까? 가질 수 있는 희망은 그러한 개인이 많아지길 바랄 뿐이지 결코 그것을 희망적이라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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