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닮은 책이 좋아요.
 

  나는 시간에 쫓기는 중이다. 언제 깰지 모르는 갓난아기의 낮잠 시간 동안 집안일도 해야 하고, 샤워도 해야 하고, 화장실도 다녀와야 한다. 친정엄마에게 아기를 맡기고 외출을 하더라도 밥은 체하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차는 테이크아웃으로, 대화나 용무는 용건만 간단히 해야 한다. 그런 와중에도 일주일에 세 번 큰아이의 수영을 따라 가는 1시간씩은 여유가 보장된다. 그리고 그 시간에는 꼭 책을 읽는다. 일부러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커피를 사야 앉을 수 있는 자리로 숨어 들어가 꼭 책을 읽는다. 이때가 아니면 책을 읽을 시간을 기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굳이 사람까지 피해가면서 책을 읽는 것일까?

  아이의 수영 수업을 바라보면서 가장 근래에 읽은 책이 김영하의 [말하다]이다. 이 책을 읽으며 아들이 좋아하는 그림책의 제목(미야니시 다쓰야의 [나를 닮은 당신이 좋아요])이 자주 생각났다. 그것은 내가 작가님께 하는 말이기도 했고 더 나아가 나와 같은 생각을 품은 글들에게 해주고픈 말이기도 했다. ‘나를 닮은 당신이, 아니 당신들이 좋아요.’ 그리고 그 생각들을 글로 써 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아마 내가 굳이 사람들을 피해가면서까지 책 읽는 시간을 확보했던 것은 이렇듯 책 속에서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

  어릴 적부터 개인주의 성향이 강했던 나는 지금도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가 개인주의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심 죄책감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김영하 작가는 그 앞에 ‘건강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을 보고 무릎을 탁 쳤다. 수십 년간 나는 그 표현 하나를 기다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그 표현이 반가웠다. 이제는 어디 가서 나는 ‘건강한 개인주의자’라는 말을 하고 다니면 되겠다.

 

 

건강한 개인주의란 타인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독립적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 안에서 최대한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라 정의하고 싶습니다.

(p28)

 

 

  건강한 개인주의자가 추구하는 즐거움이 내게도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 즐거움이 예술적이고 생산적인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작가님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어릴 적에 백일장에 나아가 상 한 번 타보지 못했지만 내가 즐거움이라고 느낄 수 있는 예술 행위는 그나마 글쓰기밖에 없는데 근래에 처음과 끝이 있는 글을 제대로 써 본 기억이 없다. 그런 생각을 하자니 무언가 쓰고 싶은 욕구가 생겼고 그 욕구의 발현이 바로 이 글이다. 무용하지만 그러하기에 즐거움이 될 수 있는 것, 내겐 글쓰기가 그러하다. 그러나 김영하 작가가 말한 ‘아무도 침입해오지 않는 고요한 공간’은커녕 확 트이고 언제 깰지 모르는 아기와 아무 때나 문을 벌컥 여는 친정엄마의 침입에 가슴 졸이며 여전히 시간에 쫓기듯 쓰기에 힘과 매력은 저 멀리 명왕성 끝자락에나 있을까말까 하지만 말이다. 소설도 아니면서 글의 향방을 알지 못한 채 써 나아가지만 말이다.

  작가와 나는 많은 면이 다르지만 그의 글에서는 적지 않게 나를 볼 수 있었다. 스무 살 무렵부터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그의 소설을 꾸준히 읽은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다른 점이 아니라 닮은 점을 더 크게 느끼는 것을 공감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의 소설부터 이 책에까지 많은 공감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이 책은 그의 생각을 조금 더 정제하였을 뿐 직접적으로 드러낸 ‘말’을 옮긴 책이라 그 공감이 더 밀접하게 느껴졌다. 그 말들이 위로가 되고 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힘이 되어주었다.

  나를 닮은 대상이 함께 사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상적이지만 근래 들어 감정 소모가 심해질 때면 그런 관계를 더욱 꿈꾸게 된다. [아내를 닮은 도시]를 쓴 강병융 작가가 그런 예가 되지 않을까? 들어본 적도 없는 류블랴나의 거리를 글과 사진으로 함께 거니는데 그 도시의 곳곳엔 그의 아내가 있었다. 책에 펼쳐진 이 낯선 도시는 온통 아름다웠다. ‘길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은 걷는 이의 마음인가 보다.’(p74)는 문장처럼 그의 마음은 길 위에서 사랑스러웠다. ‘아름다움 앞에서 떠오르는 사람이야말로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p83)이라는 그의 말은 아내에 대한 프로포즈였고 그는 이 도시에서 내내 프로포즈 상태였다. 서로를 닮다 못해 살아가는 공간마저 닮게 만드는 사랑의 힘은 책을 읽는 내내 순간순간 사랑의 달콤함을 잔뜩 느끼게 했다. 아직은 나를 닮은 도시를 발견하진 못했겠지만 내게도 작가만큼이나 아내를 사랑해주는 남편이 곁에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라는 것을 새삼 알게 해주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마음이 막 엄마가 된 나에게 주어진 의무가 아니라면 박은정 시인의 시집의 제목처럼 ‘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버린 공허함이 요즘 큰 것도 사실이다. 용기가 있다면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을 만큼 주어진 자리에 대한 부담이 크다. 누군가의 아내로서, 엄마로서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남편은 말하겠지만 그건 내가 아니라 그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오늘 이 자리,

용기가 있다면 자리를 박차고 나가겠지만

모두들 처음 보는 사람처럼 앉아

손뼉을 치며 웃는다

(<대화의 방법> 중)

 

 

그것을 고통이라고 부르긴 미안하지만 고통이 아니라고 말하기엔 솔직하지 못하다.

 

 

나는 왜 여기에 없고

너는 왜 여기에 있는가

 

고통스러운 두 사람을 본다

 

내가 만지는 네가

웃고 있는 풍경

(<풍경> 중)

 

 

  시의 ‘나’와 ‘너’는 마치 아름다움과 공허함 사이에 놓인 내 스펙트럼의 양 끝처럼 느껴진다. 시집 전반에 흐르는 쓸쓸하고 어두운 기운이 갓 아이를 낳은 여인에게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겠지만 그런 감정들이 가장 깊어지는 시간도 이때임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아내를 닮은 도시]에서 발견한 내가 아름답고 행복한 이상적 모습이라면, [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에서 발견한 나는 스스로도 눈치 채지 못할 나의 본질이 담겨있었다. 전혀 다른 두 책 속에서 읽혀진 나는 전혀 다른 모습이지만 둘 모두 나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었다. [말하다]에서 시시콜콜히 드러난 모습과도 다른 모습이지만 세 책 모두에 내가 그득히 담겨 있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식상한 표현을 빌리자면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어떤 책은 전혀 나를 찾지 못하기도 하지만 어떤 책은 책 곳곳에 내가 숨어 있다. 나와 내 곁의 사람들을 닮은 글들은 내가 꿈꿔온 모습이기도 하고 내 안으로 침잠해 들어간 나의 본질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작가가 써 놓은 글에 귀를 기울이며 차츰 나는 나와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쓴다. 내게 주어진 짬짬의 시간들을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결코 느낄 수 없었을 ‘닮음’을 발견하며 일상과 이상을 동시에 충족하려 애쓰는 나를 이 글로 따뜻하게 쓰다듬어 본다.

  임신을 핑계로 남편과 큰 아들을 나 없이 둘만 여행을 보내곤 했다. 지금도 둘은 그렇게 강원도를 여행하고 있다. 여행 중에도 그들은 내게 수시로 사진을 보내고 전화를 한다. 좋은 곳에 가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내 생각을 제일 먼저 한다. 이제는 남편에게도 [아내를 닮은 도시]를 권해볼 만 한 것 같다. 아마 책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언젠가 그에게 이 글을 보여줘도 되겠다. 나는 이렇게 책에서 나를 발견하는 걸 좋아한다고, 그리고 그것을 이렇게 글로 쓰는 것을 즐거워한다고. 만난 지 10년쯤 되는 어느 날에서야 그는 그걸 조금은 진짜로 알게 되지 않을까? 그날이 오면 나를 닮은 책이 좋다고 말하는 대신, “나를 닮은 당신이 좋아요.”라고 말하려나? 그건 너무 꿈같은 이야기이다. 난 그때에도 ‘나를 닮은 책이 좋아요.“라고 말하며 책에 펼쳐진 ’나‘와 ’나‘의 긴 스펙트럼 안에서 노니는 것을 더 좋아할 것이다. 그건 분명하다. 간밤에 글을 마무리하려는데 아기가 유난히 잠에서 자주 깼다. 여전히 나는 시간에 쫓기는 중이고, 잠깐의 여유로 책을 즐긴다. 그리고 오랜만에 그 안에서 최대한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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