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행 슬로보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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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를 즐겨 읽는 독자는 아닙니다만 20대 초반 많은 분들이 그러셨듯 [상실의 시대]는 어떤 전환점이었던 것 같아요. 그 때문에 무라카미 하루키를 몇 번 찾아 읽었지만 그때의 느낌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어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작가의 성향도 바뀌는 건가보다 했어요.

 

 

[중국행 슬로보트]는 [상실의 시대]보다 더 앞선 작품이고 단편이기에 이런저런 시도들이 엿보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의 매력을 다시금 느끼게 하는 것은 [상실의 시대]와 그리 멀지 않은 시기의 작품이라 그런건지, 아니면 작가가 공들여 다시 수정을 보아서 그런건지는 모르겠어요. 개인적으로는 '다시 하루키를'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 작품입니다.

 

늘 그렇듯 책을 읽으면 좋아하는 부분에 밑줄을 치고 옮겨 적고 그럽니다. 요즘엔 불안을 해소하려는 듯 허겁지겁 책을 읽고, 그도 모자라 손도 많이 놀립니다. 이 책도 책을 받고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그리고 밑줄을 치니 생각도 많아지고 그랬습니다. 가령,

 

심지어 그들에게는 이 문제가 절실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다음 광고까지 시간을 때우려고 떠들고 있을 뿐인 것이다.

나는 옆에서 훌쩍이는 여자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위로해주고 싶었다. 너는 전혀 잘못한 게 없다고,

<가난한 아주머니 이야기>

와 같은 구절들. 그동안 내가 쏟아낸 것들이 이 문장들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더 긴 부분들은 공책에 옮겨 적었습니다.

 

그 중 '기억'에 대한 부분들이 특히 많아 발췌해 봅니다.

 

하긴 내 기억의 대부분은 날짜가 없다. 내 기억력은 지독히 부정확핟. 지나치게 부정확해서 이따금 내가 그 부정확성을 근거로 누군가에게 뭔가를 증명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기분까지 든다. 하지만 그게 대체 무엇을 증명하느냐고 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애당초 부정확성이 증명하는 것을 정확히 파악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 아닐까. <중국행 슬로보트>

 

"그건 어렵죠. 한번 생겨난 것은 내 의지와 관계없이 계속 존재합니다. 기억과 마찬가지예요. 가령 잊고 싶은데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잖아요. 그런 것과 같죠." <가난한 아주머니 이야기>

 

기억이라는 건 소설과 비슷하다. 혹은 소설이라는 건 기억과 비슷하다.

나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 뒤로 그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기억이라는 건 소설과 비슷하다, 혹은 소설이라는 건 어쩌고저쩌고.

아무리 말끔하게 가다듬으려고 애써도 문맥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결국에는 문맥 같지도 않은 것으로 바뀐다. <오후의 마지막 잔디>

 

기억이라는 건(특히 나의 기억은) 별로 믿을 만한 게 못 된다. <작가의 말>

 

개인적으로는 <가난한 아주머니 이야기>와 <오후의 마지막 잔디>가 좋았지만 <캥거루 통신>도 매력적이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부분이요.

 

나는 동시에 두 군데의 장소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게 내 유일한 희망이에요.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나 자신이라는 개체성이 그런 내 희망을 방해하고 있어요. 몹시 불쾌한 사실 아닙니까? 불합리한 압박 같지 않습니까? 나의 이런 희망은 굳이 따지자면 소박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천재 예술가가 되겠다는 것도 아니에요. 하늘을 날겠다는 것도 아니죠. 동시에 두 군데의 장소에 존재하기를 원하는 것뿐입니다. 아시겠어요? 세 군데도 아니고 단 두 군데 입니다. 

어쨌든 나는 불완전함을 지향했어요.  <캥거루 통신>

 

끊임없이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어요. 전 이 작품들이 작가건 독자건 자기 자신에게 자꾸만 말을 걸게 한다는 점이 좋았어요.

 

하루키의 문장은 매력이 많아서 이렇게 옮겨 적고도 문득 넘기면 불쑥 눈에 들어오는 짧은 글들도 있어요. 동네 엄마들에게 책을 빌려주는 김에 책갈피를 끼워주기로 했어요.

    

    

온 나라가 비통함과 울분에 차 있는 때에 조잘조잘 흥을 내며 리뷰를 할 수는 없지만 좋은 책은 어느 때이건 누군가를 위로하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최소한 공감이라도요. 모두들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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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4-25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후의 마지막 잔디밭, 캥거루 구경하기 좋은 날씨 - 가 들어 있는 다른 작품집 <지금은 없는 공주를 위하여>를 읽어서 님이 읽은 것과 겹치는 것 같네요.

기억이라는 건(특히 나의 기억은) 별로 믿을 만한 게 못 된다. <작가의 말>
이건 제가 깊이 깨달은 적이 있어요. 제 기억이 얼마나 제멋대로인지 예전의 일기장을 보고
알았답니다. 일기장에 쓴 그때의 정황이 제가 기억하고 있는 정황과 아주 달라서 깜짝 놀랐어요. 일기장이 없었다면 제 기억이 맞는 것으로 알고 살 뻔했지요. 이래서 오해라는 게 생기기도 하죠.

사회 전체 분위기가 슬픔에 잠겨 있어서 저 역시 조심스럽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게 되어요.

그렇게혜윰 2014-04-25 17:17   좋아요 0 | URL
책을 빌려준 터라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이번 작품이 대폭적인 작가의 수정이 있었던만큼 몇몇 작품은 많이 달라졌다고 해요. 물론 어떤 작품은 거의 수정이 없었구요. 그게 기억이 명확하게 안나네요^^::

오늘 읽은 책에 이런 구절이 있더라구요,

진실과 기억 사이의 간극은 허구로 꾸며지게 된다,

구요. 그런데 그 허구가 있기에 삶이 풍성하다는 의미로 쓰여졌어요. 공감이 가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