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루스 노부스 - 탈근대의 관점으로 다시 읽는 미학사 진중권 미학 에세이 2
진중권 지음 / 아트북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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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 전에 이 책을 읽었었다. 진중권 작가를 좋아하는 지인의 추천이었을 것이다. 딱히 이 책을 권해준 것은 아니었는데 도서관 책꽂이에 꽂힌 책 중에 이 책에 눈이 자꾸 갔다. 아마 '앙겔루스 노부스? 이게 무슨 뜻이지?'이런 단순한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참 희한한 것이 책에는 그 답이 분명 있는데 십여 년이 흐른 지금 나는 다시 묻는다. '앙겔루스 노부스? 이게 뭐였더라?'라고. 이 책을 처음 읽고 나서 진중권의 책을 찾아 읽기도 했다. [교수대 위의 까치], [서양 미술사] 등.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분명 [앙겔루스 노부스]를 읽고는 지인이 왜 진중권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는데 다른 책에서는 [앙겔루스 노부스]가 흥미있었다는 것조차 아리송해졌다. 그리고 우연히 아트북스의 서평 이벤트로 인해 다시 읽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저자의 필력이 아주 잘 느껴지도록 흥미롭다, 그리고 일반 독자들도 충분히 이해하기 쉽도록 쓰여졌다.

 

총 10장으로 구성된 본문을 읽기 전에 2판의 서문을 참고했다. 1판의 서문보다 더 친절해졌기에 읽어나가면서 중심을 잃지 않는데에 도움이 되었다. 그는 10편의 에세이에서 존재미학과 생태미학으로서의 '숭고'의 개념을 수시로 노출한다. 그는 이를 두고 '확장된 숭고'의 다양한 측면이라고 말했고, 그를 통해 '숭고'라는 말이 지닌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새로운 것을 공감하며 알게 된다는 것은 무척 설레는 일이다. 하지만 이 책의 리뷰를 어떤 식으로 써야하는가에 대해서는 어려움이 있다. 유난히 밑줄도 많고 책 한 쪽에 끄적거린 부분이 많아 그 부분들을 정리해보는 것으로 대신할까한다.

 

1장에서 플라톤의 미학에서 '미의 이데아'을 쾌락을 추방하는 것이 아닌 길들이는 원리라고 말하며 진중권은 플라톤의 미학이 포스트모던의 정신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플라토닉러브는 플라톤과는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기존의 틀을 엎는 발상인데 설득력이 있다. 쾌락을 무조건 거부시하지 않고 내가 주체가 되어 쾌락을 길들인다니 인간의 존재가 굉장히 있어 보인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포스트모던은 쾌락을 길들이는 수준 그 너머인 것 같았다.

 

존재미학. 철학과 섹스가 하나가 되어 미를 향해 상승하는 영적, 육체적 생식의 시대. 삶이 예술이 되고, 모든 인간이 예술가가 되는 시대. 그리하여 예술가가 되려고 예술가가 될 필요가 없는 시대. 인간이 창조자가 되어 자기 앞의 생을 예술작품으로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시대. 우리의 '포스트모던'은 왜 그런 시대를 열지 못하는 걸까? (42쪽)

 

또한 2장에서 플라톤이 피그말리온의 꿈이 이루어지던 마법의 시대와 과학의 시대 그 사이에 있다고 한다. 우리가 플라톤의 시대로 돌아가는 길,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술'인데 이것이 바로 미메시스의 힘이라고 말한다. 옛사람들이 사물에까지 영혼을 부여했다면, 우리는 영혼까지도 사물화한다.(65쪽)는 그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무척 안타깝다. 6장에서 나오는 생명과 신체의 도구화, 화폐화에 대한 씁쓸한 이야기들이 이어지는데 그중 니체의 행동이 무척 인상적이다. 데카르트의 먼 훗날 사람인 니체가 어느 날 지나가던 말을 끌어안고 눈물을 터뜨리며, 그를 기계로 간주한 데카르트를 대신하여 사죄를 했다고 하는데(159쪽) 낡은 시대의 오류를 벗어나고자 하는 그의 행위에 대하여 우리의 낡은 시대에 대한 오류를 벗어나고자 노력할 이의 눈물이 아쉽게 느껴졌다. 8장과 9장에서 나오는 숭고의 생태론적 미학, 자연미에 대한 이야기는 읽는 이를 숙연하게 만든다.

 

책을 읽다보면 사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철학이 상당히 다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날 수 있다. 플라톤이 마법과 과학의 이행기라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이성)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3장에서는 '시'에 대한 상반된 입장을 드러낸다. 플라톤은 시의 힘을 너무나도 강하게 믿고 있어 시인들이 신을 격하시킬 수 있다고(시인을 능력자로 보고 있다.) 생각하여 시가 위험한 것이라고 믿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는 그저 기술(테크네)일 뿐이고 영향력이 별로 없으니 이를테면 뻥을 더 쳐도 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신적 힘과 기술이라는 명확하게 상반된 입장인데도 아이러니하게도 뭐가 더 시인에게 좋은지는 모르겠다.  저자는 물론 플라톤의 시대 및 그 이전에 가진 시의 힘을 더 좋아한다. 나는 고민을 좀더 해봐야겠다. 플라톤의 시대라면 모를까 그 이전까지 받아들이기에 나는 너무 아리스토텔레스적이 되어버렸나 보다. 그래도 에술에는 규칙보다는 +a가 더 중요하다고는 생각하고 있다.

 

4장 이후에는 '숭고'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이 개념은 롱기누스라는 사람이 쓴 [숭고에 관하여]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후의 다른 편에서 보면 프랑스와 영국에서 각각 다르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아마 요즘도 그렇듯이 자기들 생각에 맞는 부분만 끼워넣으면서 쓴 모양이다. 진중권은 포스트모던을 바로 숭고의 미학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숭고는 인간 내면의 파토스(폭풍우)를 일으켜야 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칫 이것을 아무 데나(이를테면 정치적인 일)에 갖다붙이면 매우 우스꽝스러워진다는 점도 경고한다. 최초의 번역자인 부알로가 고전주의 추종자라는 점에서 프랑스에서의 '숭고'의 개념은 오역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7장에 나오듯 롱기누스의 정신은 반고전주의 즉 바로크 옹호자들의 입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진중권의 표현대로라면 '접신'의 개념으로.

 

내가 처음 디오게네스에 대하여 깊게 인상이 새겨진 책이 바로 [앙겔루스 노부스]이다. 한 편의 에세이에 디오게네스를 할애해준 점이 다시 읽어도 무척 고맙다. 지금은 그때와 달리 그에 관해 이것저것 많이 주워들은 입장이라 놀라는 것은 좀 덜하지만 지금이나 십여 년 전이나 그는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빛이 난다! 아마 내가 보기엔 디오게네스가 곧 숭고이다. 억지로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말지어다. 그 점이 디오게네스를 볼 때마다 내가 파토스를 느끼는 지점이다.

 

 

앙겔루스 노부스, 파울 클레의 천사. 진중권은 이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데 이를 두고 그림을 보기 전에 읽은 관련 글 때문이라고 말해서 그런가 나도 처음 이 그림만 봤을 때에는 묘한 느낌만 있었지 어떤 감정이 없었는데 진중권의 글을 읽다보니 괜히 울컥해진다. 내 마음이 착해진다고 해야할까? 헛된 저항을 하는 날개를 편 천사라니! 답답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날개조차 펴지 못하는 나 자신에 비하면 그는 얼마나 위대한가를 떠올릴 때 울컥해진다. 지금 나 대신 수많은 날개를 펴고 있는 이 땅의 모든 분들의 숭고함에 대해 울컥해지는 것이다. 진중권이 포스트 모던을 이야기하면서, 숭고를 이야기하면서, 존재미학과 생태미학을 이야기하면서 왜 이 그림의 제목을 책의 제목으로 했는지 공감이 된다. 어쩌면 이 책은 날개를 잃어버린 우리들이 날개를 편 천사에게 바치는 그리움의 편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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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4-01-08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중권의 책들은 여태 한 권도 읽지 못해서 뭐라 댓글을 달기가 주저됩니다만, '숭고에 관한' 얘기는 무척 흥미롭게 읽게 됩니다. 그건 아마도 제가 때마침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었기 때문이에요. 그 책에 보면 '시인'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명백한 입장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거든요. 그리고 또 그 책에는 롱기누스의 『숭고에 관하여』도 함께 온전히(물론 완전히 전해지지 않고 없어진 부분은 제외하고) 실려 있더라구요.

니체의 책들은 오래 전에 몇 권 읽은 적이 있지만 '숭고'에 관한 기억은 전혀 떠오르는 게 없는데, 그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쇼펜하우어가 '숭고미'를 다룬 '절창'은 아직도 뚜렷이 기억납니다.(어떤 분들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놀라운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 '숭고미'를 다룬 부분이라고도 평가하더군요. 물론 저는 그런 해석에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더군요.)

그렇게혜윰 2014-01-08 17:51   좋아요 0 | URL
이 책에서는 숭고에 대한 이런 저런 해석들을 알려주기도 하고 진중권 자신이 생각하는 숭고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기도 합니다. 아직 이러저러한 판단력이 없는 저로서는 진중권이 말하는 숭고의 의미가 공감이 되긴 하더라구요.

서양철학사 책을 읽었을 때 쇼펜하우어가 참 좋던데 '숭고미'를 다루었군요! 어떤 책일까요? 어쨌거나 '숭고'라는 말이 문득 참 멋진 개념 같이 느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