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아 작가의 소설 속에서 어쩌면 작가가 의도한 것처럼 길을 잃었다. 그리고 여니를 따라 나는 다른 세계로 옮겨갔다. 소설은 나를 다른 세계로 이끌기 위한 호그와트의 1과 1/2정거장과 같았다. 루소의 <꿈>과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가 떠오르기도 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마음에 턱 걸리곤 했다. 문장들도 그러했다. 그 문장들을 소개해 본다.

 

 

 

시인들 말입니다. ---일단, 첫눈에 보았을 때 그들은 거의 예외 없이 늙고 음울하며 회색빛 형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형상뿐 아니라 그들의 육체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의 입자들이 그러했어요. ---그래요 그들은, 그들은 마치 죽은 사람들 같았습니다. (55-56쪽)

 

시인에 대한 생각을 나타낸 부분들이 많다. 아무래도 시인 여자나 김철썩 시인이라는 인물이 나오기 때문이기도 하고 부하의 꿈이 시인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비극적 인상임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 시인은 동경의 대상이다. 어떤 부분은 그 자체가 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 팔을 잡아요. 이 도시의 숨겨진 이름은 '비밀'이랍니다. 이 도시에서 사람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서로를 잃어버리게 되어요. 모든 것은 너무 빠르게 세워지고, 너무 빠르게 사라져버린답니다. 기억도 마찬가지예요. 집을 나와 열 발자국을 걸은 다음 뒤를 돌아보면, 거기 항상 서 있던 집이 보이지 않는 일도 일어날 수 있어요. 그러면 자신의 집이 어디인지 영영 알지 못하는 거죠.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이 도시의 숨겨진 이름은 '비밀'이랍니다. 그러니 내 팔을 잡아요. 당신은 전화기도 없으니 서로 헤어지면 찾을 방법이 없잖아요.' (158-159쪽)

어쩌면 작가의 어릴 적 꿈은 시인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 외에도 추상에 추상을 더한 표현들이 매혹적이었다.

 

"소리의 그림자라면?"

"알려지지 않은 목소리 같은 것." (11쪽)

 

열대의 시간이 끝나갈 즈음 그들은 재만 남았다. 그들은 불투명한 회색빛 유령이 되었다. (25-26쪽)

 

나는 하나의 감정이에요, 하고 말하는 얼굴. (124쪽)

 

사진은, 본래의 의도나 목적과는 다르게, 유령으로서의 인간을 증명하는 유일하면서도 강한 선언이다, 하고 볼피는 생각했다. (151쪽)

 

다음에 그녀의 소설을 읽을 땐 좀더 신 나게 길을 잃어봐야겠다.

 

리뷰는 http://blog.naver.com/93tiel/10167606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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