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파는 상점 - 제1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15
김선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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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닌데 17년 전 내가 했던 말을 아직 기억한다. 그 말인즉,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내는 것이다.”인데, 무슨 계기였는지는 역시 기억이 전혀 나지 않지만 당시 시간 대 인간주체와 객체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분명, 있었다고 본다. 그 때 내 나이 열여덟이었다.

  그 이후 내가 시간에 대하여 다른 의미를 부여한 기억은 없다. 그러니 열여덟, 그 즈음의 나이가 시간에 대하여 가장 진지하고 깊이 생각해보는 나이가 아닌가 하는 확신이 생겼다. 이미 어른이 된 우리는 시간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기엔 많이 늦었다. 아마, 어른들은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댈 테지만.

 

  그런 의미에서 김선영의 ‘시간을 파는 상점’은 우리가 기존에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부여해준 학교, 친구, 폭력 등에 대한 범주를 벗어나 철학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시간이라는 존재에 대응해야 하는 방향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놓는 특별한 책이다. 사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학교, 친구, 폭력 등과 같은 범주는 인간과 세계라는 큰 범주 안에 살고 있는 아이들에겐 너무나 제한적이고 편협한 범주에 불과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이 책을 읽은 아이들이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이야기의 주인공 온조는 알바비를 계산하다 시간이 돈으로 환급될 수 있음을 불현듯 깨닫는다. 시간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돈이라는 실재적 개념으로 전환되는 순간, 온조는 크로노스가 되고 ‘시간을 파는 상점’이 개업한다. 크로노스로서 시간을 파는 행위를 하는 온조도 처음엔 그저 시간이 돈이 되는 수단이라는 사실에만 주목했을 것이다. 얼핏 보면 도난 사건이나 강토 사건을 통해 온조가 시간을 물리적 수단이 아니라 의미적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보겠지만 사실 무심히 나눈 ‘아이린’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초등학생과의 대화에서 이미 온조는 시나브로 개념의 전환을 보이기 시작했다.

크로노스 : 네, 맞아요. 시간은 그냥 지나가는 게 아니라 어쩌면 우리 몸에 켜켜이 쌓이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아이린 님이 말한 건 기억이지만, 상상 속에서는 열세 시가 아니라 그 이상의 시간도 존재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어떤 이야기 속에는 단지 하룻밤 꿈을 꾸었을 뿐인데 60년, 100년이 흘러 젊은이를 노인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잖아요. 그렇다면 미래의 시간도 불러올 수 있을 것 같아요. 일테면 내가 스무 살이 된다면 난 반드시 무얼 하고 있을 것이다, 생각하며 행동하면 미래의 시간도 현재로 가져오는 것 아닐까요

  미래의 시간도 현재의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그 말은 결코 물리적 수단으로서의 시간이 아니다. 이후 강토 할아버지와의 식사 시간을 통해 온조는 카이로스의 존재를 느끼게 되며, 불곰이 말한 ‘절대 불변이라고 믿는 것들의 반란’에 대하여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작은 선생님의 편지를 전하면서 시간은 돈으로 환산될 수 없음을 알게 되며 이 순간은 온조에게 대단히 의미 있는 시점이다. 단순히 양적 의미로 시간을 팔기 시작한 온조가 보다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한 질적 의미로 시간을 규정짓는 시점. 온조에겐 바로 그 ‘지금’을 잘 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한 온조에겐 ‘지금’을 현명하게 보내고 또한 더 이상 크로노스가 아닌 카이로스의 관점으로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는 성장은 대견하고 아름답다.

 

  작가는 매우 세심한 사람이다. 삶의 어느 지점에서 읽어도 마음을 묵직하게 만들 이 이야기를 역시 삶의 어느 지점에서 읽어도 아름다운 말들로 문장을 꾸렸다. 작가가 택한 낱말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열여덟 즈음의 삶이 어른들이 만든 작은 세계에서만 살아가기엔 역시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래서 그가 택한 ‘시간’이라는 주제가 또 얼마나 의미 있는지, 다시 그가 택한 낱말들이 역시 얼마나 의미 있는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열여덟이었던 그 때보다 더 어리석게 시간을 보내는 지금의 나를 먼발치에서 바라본다. 나에게 ‘지금’ 이 시간은 마구잡이로 흘러만 가고 있다. 시간을 운용하기는커녕, 시간의 의미를 찾기는커녕, 할 일이 많다는 핑계로 주말만 찾으며 많은 시간을 급하게 흘려보내고 있다. 전혀 아름답지도 생명력이 있지도 않다. 펄떡이던 열여덟의 나는 시간을 보내며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온조의 마지막 마음을 끝으로 이야기를 마쳐야겠다. 다시 읽어보면 지금의 나도 조금은 살아 움직이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어떤 시간을 보내야할지 고민하는 마음으로.

온조는 지금 맞이할 이 순간을 먼 미래의 어느 시간에 맡겨두려 한다. 시간이라는 것이 지금의 이 상황을 어떻게 변모시킬지 궁금하다.

시간은 ‘지금’을 어디로 데려갈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지금의 이 순간을 또 다른 어딘가로 안내해준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그 시간을 놓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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