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와 분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3
윌리엄 포크너 지음, 공진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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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말에 독서모임에 참여했다. 1년만의 오프라인 모임이었다. 코로나 상황에도 불구하고 오프라인 모임에, 그것도 1시간도 넘게 걸리는 지역에서 하는 모임에 참여하는 데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책이 바로 [소리와 분노]였다. 도대체 몇 년간 세계문학책장에 꽂혀만 있었던 것일까? 이 책이 울부짖는 소리와 분노가 드디어 내 귀에 닿은 듯 나는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이 책의 첫번째 섹션인 1부 벤지 섹션에서부터 난관은 시작된다. 많은 사람들이 1부를 넘어가면 그래도 쉽게 읽을 수 있다고들 하였으나 개인적으로는 2부 퀜틴 섹션이 훨씬 힘들었다. 버지니아울프의 의식의 흐름에 조금은 익숙한 탓인지 벤지섹션의 변주는 긴장되면서 흥미로웠다. 어떤 이들처럼 집요하게 읽지는 않았다. 그저, 시간의 변화를 벤지처럼 감각적으로 느끼고 싶었고 그렇게 읽으려고 했다. 그러니 오히려 더 내 이야기인듯 다가왔다.  1-2-3-4-1-2의 순으로 읽으라는 충고들이 많았다. 그 충고는 새겨들을 만 했다. 두번째 읽은 벤지 섹션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사건을 명명하는 대신 감각(특히 후각)으로 두서없이 표현하는 벤지의 표현력은 관념과 감정에 치우친 퀜틴과 제이슨에 비해 훨씬 객관적이었으며 그 객관성이 주는 아름다움이 내겐 어마어마했다. 이 소설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색깔 하나로 변주를 드러내는 것이 불친절하다고도 느낄 수 있겠지만 나는 그마저도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마저 했었다. 


두번째 읽은 퀜틴(퀜틴 섹션 = 퀜틴 자신)은 처음 읽은 퀜틴보다는 공감하기 쉬웠으나 그래도 내겐 너무나 벅찬 캐릭터였다. 몰락하는 집안의 기대주로서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을 법도 한데 그는 오직 캐디만을 생각했다. 캐디의 타락과 결혼과 불행을 받아들일 수 없는 퀜틴은 그녀를 구해내지 못한 자신의 과거를 용서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 집안의 문제는 언제나 벤지로부터 시작하는데 퀜틴에게 벤지는 그다지 중요한 의미는 아닌 걸로 봐서 가족으로서의 소속감은 가장 적은 인물이다. 인두 두개를 준비할 정도로 치밀하면서 삶을 나아갈 치밀함을 갖지는 못한 퀜틴에게 공감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시간과 과거와 인간의 삶을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들이 가득찬 퀜틴 섹션을 읽으며 그 관념적인 생각들이 모조리 똥처럼 느껴지는 건 내가 너무 현실화되었기 때문일까? 소싯적 멜랑꼴리와 친했고 오늘 아침에도 감성적이라는 말을 들은 사람으로서 100% 현실적 인물은 아닌데 퀜틴을 이해하기는 두번 모두 어려웠다. 차라리 제이슨을 이해하는 것이 쉬웠다. 


퀜틴의 머릿속을 빠져나오니 3부 제이슨이 기다리고 있었다. 화자가 말하는 시점으로 보자면 1910년 퀜틴을 제외하곤 제이슨은 가장 빠른 날짜인 1928년 4월 6일을 살고 있다. 미스퀜틴(캐디의 딸)을 드잡이하고 빨강 넥타이와 일거에 잡으려는 제이슨의 하루. 그의 하루 동안 내뱉은 말들을 보면 '폭력적'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그래, 엄마의 삐뚤어지고 부담스러운 기대에 진절머리가 날 만도 하지. 아버지도 장남도 아닌데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가족을 부양할 책임을 몽땅 짊어지는 데다가 고용된 흑인 가정까지도 책임을 져야하는 삶의 무게가 내게도 가혹하게 느껴졌다. 오히려 강물에 뛰어들고 싶은 사람은 제이슨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아남을 것이다. 캐디의 돈을 꿍쳐놓으며 엄마와 미스퀜틴을 속이면서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뻔뻔하게 그들 위에 군림하는 제이슨이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기 어려웠을 제이슨이 가엾기도 했다. 


딜지의 시선도 아닌데 딜지 섹션이라 이름붙은 4부.  마지막 장면에서 평소와 다른 방향으로 마차를 모는 것을 못 견딘 벤지가 그간의 끙끙댐이 아니라 울부짖음을 토했다. 그런 벤지와 러스티를 집으로 돌려보내던 제이슨의 말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거칠었지만 왠지 거기에서 나는 이별을 느꼈다. 4부에 딜지를 내세운 것은 교회에서 "제이슨은 집에 집에 오지 않을 거야. 나는 처음과 마지막을 봤어."라는 복선을 드러내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어찌 보면 작가의 생각이 직접적으로 드러난 듯도 하지만 윌리엄 포크너는 대답할 수 없으니 그냥 그렇게 짐작한다. 물론 딜지는 실재적 부모가 없는 콤슨가에서 실질적 모성을 담당하는 인물이니 충분히 하나의 섹션을 차지하는 것이 부당하지 않지만 캐디를 능가할 정도의 존재감은 아니니 딜지의 섹션 그것도 전지적 작가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4부는 결국 제이슨의 떠남을 말하고자 함이 아닐까? 벤지만 남겨두고 모두가 떠나는 그 마지막을 위해서 말이다. 


천치의 감각에 의존한 문체, 수재의 관념으로 가득찬 문체, 감정을 그대로 대사로 드러낸 문체,  사건의 처음과 끝을 아우르는 듯한 문체.  이처럼 [소리와 분노]는 그 내용적인 면에서는 인간 몰락의 향연같았지만 다양한 문체의 향연이라는 매력도 있다. 내용적인 면은 내가 당시 상황에 대한 배경 지식이 전무하여 복잡한 해석은 할 수 없지만 남북 전쟁이 끝난 후에 몰락된 가정이 어디 콤슨가 뿐이랴? 싶은 생각은 든다. 콤슨가는 당시 몰락할 수 있는 한 가정의 끝판왕으로서 의미가 있으리라. 형식적인 면에서 한 섹션도 차지하지 못했지만 네 개의 섹션에 고르게 존재하는 사랑스러운 캐디에 대해서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벤지에게 친절했던 캐디, 퀜틴을 불안하게 했던 캐디, 제이슨의 도구였던 캐디, 미스 퀜틴의 원천인 캐디. 콤슨 가에 가면 캐디가 사랑스럽고 다정한 미소로 반겨줄 것만 같은데 캐디도 미스퀜틴도 그집에선 살아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요상한 자존심과 집착으로 사람을 질리게 하는 이 집의 엄마같은 사람이나 있을 수 있는.  그런면에서 타락을 선택한 두 여성을 더 지지하고 싶다. 타락이란 무엇인가? 캐디와 미스퀜틴을 타락이라고 할 수 있나? 그때는 몰라도 지금의 관점에서 그들을 타락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도리어 무너져버린(몰락) 아버지, 퀜틴, 제이슨에 비해 캐디와 미스퀜틴에게선 생명력마저 느낄 수 있었다. 


어려운 소설임은 분명하다만 흥미로운 소설이고 읽고나면 이름 붙이기 어려운 충만한 마음이 드는 소설이다. 이 소설을 가지고 다양한 방면으로 해석이 가능한 모양이다. 윌리엄 포크너는 말이 없으니 그 다양한 해석이 모두 신기하다.  내가 둔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목대로 <소리>와 <분노>는 잘 느끼지 못했다. 소리라곤 벤지의 끙끙거림이요, 분노라곤 제이슨과 미스퀜틴의 폭발이다. 제목이 은유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아마 나는 퀜틴을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너무 아픈 은유는 은유가 아니었음을......백치가 된 기분으로 끙끙대다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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