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고는 자신이 되찾은 유일한 친구 베스코비와 함께 무도회장으로 들어가면서, 최상의 기쁨을 느꼈다. 이미 봄이긴 했지만 밤은 길 테고, 시간은 영원에 가깝게 이어질 터였다. 그러니까, 새벽이 오기 전까지 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

어떤 가능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런 제약 없이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꽤 긴 시간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분명했다.

바이올린 선율은 점점 더 희미해지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자 더는 춤추는 사람이 없어서 말 그대로 허공을 향해 울려퍼지고 있었다. 드로고는 씁쓸한 입맛을 느끼며 정원의 나무들 사이에 자리잡고 앉았다. 축제의 마법이 풀리고 새벽이 가까워진 하늘이 천천히 푸르스름한 빛으로 변하는 사이, 그는 왈츠의 어렴풋한 메아리를 들었다.

별들이 저물어가는 동안 드로고는 나무와 풀들이 드리운 검은 그림자 사이로 그날의 새로운 하루가 떠오르는 것을 지켜봤다. 그러는 동안 화려한 마차들은 하나둘 저택을 떠나갔다. 이제는 바이올린 연주자들도 잠잠해졌고, 하인 한 명이 방을 돌아다니며 불을 껐다. 드로고 바로 위에 있는 나뭇가지에서 어느 작은 새의 높고 청명한 지저귐이 들려왔다. 하늘이 점차 밝아지는 가운데 주위의 모든 것이 기분좋은 하루를 기대하며 조용히 쉬고 있었다.

어머니는 오직 그의 발소리에만 깨어났는데, 그 소리가 대단히 시끄러워서가 아니었다(사실 조반니는 발끝으로 걸어다녔다). 어떤 특별한 이유도 없었다. 오직 그가 아들이라는 사실, 그뿐이었다.

우스운 우연이겠지. 하지만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면서도, 과거의 애정이 훼손된 듯 쓸쓸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마치 떨어져 있던 시간과 거리가 그 둘 사이에 서서히 이별의 장막을 드리운 것만 같았다.

그는 자신이 예전 그대로라 믿었다. 어깨가 조금 넓어지고, 피부는 뜨거운 태양에 구릿빛으로 변하긴 했지만, 여전히 똑같은 모습이라고. 그녀 또한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둘 사이의 무언가가 변해 있었다.

드로고가 보기에 달라진 점은 없었다. 오히려 사 년 동안 한 여자에게 눈에 띄는 변화가 전혀 없었다는 데 적잖이 놀랐다. 그는 묘한 실망감과 냉랭함을 느꼈다. 더이상 과거의 분위기를, 그들이 남매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상처 주지 않으면서도 마음껏 농담을 주고받던 시절의 분위기를 되찾을 수 없었다.

그의 앞에 있는 그녀는 생각을 알 수 없는 낯선 타인이었다. 어쩌면 그 자신도 더이상 과거의 그가 아닐 수 있었다. 게다가 잘못된 분위기로 시작한 사람은 정작 그였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정말 그들 사이에는 뭐라 정의내릴 수 없는 미지의 베일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것은 사라질 생각이 없었다. 어쩌면 그 베일은 오래 헤어져 있는 동안 둘 중 누구도 모르게 하루하루 그들을 갈라놓으면서 천천히 커졌을지 모른다.

드로고는 벽난로의 장작 받침대에 시선을 고정했다. 요새에 있던 것과 정확히 똑같은 받침대였다. 그 우연이 그에게 작은 위로를 주었다. 무엇보다, 요새와 도시가 똑같은 삶의 습관을 가진 하나의 세계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모든 게 끝났음을 깨달았다. 이제 그들은 다시 멀어졌다. 그들 사이에 어떤 틈이 벌어졌다. 서로에게 닿고자 손을 뻗는 건 소용없는 일이었고, 매 순간 그 거리는 점점 늘어났다.

잊힌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먼저 나설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드로고 홀로 그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삶에 대해 생각했다. 많은 동료가 영영 떠나버릴 바로 그 시기에, 그는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머물러야 할지 알지 못한 채 요새로 돌아가고 있었다. 동료 장교들이 한발 더 빠르기도 했지만, 실제로 그들이 더 우수할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고 드로고는 생각했다. 과연 이 점으로도 설명이 가능할 터였다.

세월이 흐를수록 요새는 그 중요성을 잃었다. 오래전 과거에는 중요한 요충지였거나 적어도 그렇게 여겨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인원이 절반으로 감축된 요새는 전쟁의 모든 전술에서 전략적으로 제외된, 그저 하나의 방어장벽에 불과했다.

그의 눈앞에는 요새가 있었다. 요새는 더이상 처음과 같은 불안한 비밀을 품고 있지 않았다

하나의 신비가 해자 구석과 참호의 그늘에 고집스럽게 남아, 앞으로의 일들에 관해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이곳은 뭐랄까, 유배지 같은 곳이지. 그러니 어떤 분출구를 찾아야 할 필요가, 무언가를 바라고 기대할 필요가 있어. 어떤 자가 그런 생각을 떠올렸고, 그때부터 사람들이 타타르인들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네. 맨 처음 누가 그런 얘기를 했는지는 알 수 없네.

드로고의 마음에는 그가 바라는 먼 세상에 대한 생각이 느닷없이 떠올랐다. 가령 부드러운 여름밤 바닷가의 저택에서 그의 곁에 앉은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인들과 음악을 듣는다거나 하는, 청년기에 무고하게 생각에 빠져 상상해봤음직한 행복한 이미지들이었다.

밤을 온통 지새울 수도 있고, 잠으로 도망치지 않아도 되며, 뒤처짐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그리고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지켜보며 고뇌 없이 자기 앞에 놓인 영원한 시간을 음미할 수 있는, 그런 이미지들을 드로고는 떠올렸다.

언제부터인가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불안이 쉼없이 그를 따라다녔다. 뭔가 중대한 일이 일어나 그를 두렵게 하리라는 예감이 시도 때도 없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자기와 같은 유배지에 살고 있는 장교들을 보면서 위안을 삼았다. 그들이 약자일 수 있다는 생각도, 승자일 수 있다는 생각도, 그가 따라야 할 마지막 본보기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초라하든 영광스럽든, 그 자체로 만족스러운 저마다의 도착점이 있는 셈이었다.

다시 한번 삶의 사건들이 그의 뜻과는 완전히 다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자네하고는 농담을 할 수가 없군. 자네는 전부 진지하게 믿어버리는 게 탈이야. 꼭 어린아이 같잖나."

요새의 단조로운 삶에서 그에게는 전환점이 필요했다. 시간은 그가 셈하기도 전에 지나가버렸다.

여전히 사랑하는 자신의 집을 찾아갈 때면, 그의 마음은 설명하기 어려운 괴로움으로 가득찬다. 집안은 거의 매번 쓸쓸히 비어 있다. 어머니의 방은 영영 주인을 잃었고, 형제들은 끝없이 떠돌아다닌다. 한 명은 결혼해서 다른 도시에 살고, 다른 한 명은 여행을 계속한다. 방과 거실에 가족들이 함께했던 삶의 흔적은 더이상 찾아볼 수 없고, 목소리는 과장되게 울린다. 햇살을 향해 창문을 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불행히도 그는 자신이 크게 변했다고 느끼지 않는다. 시간은 정신이 나이들기도 전에 너무나 빨리 흘러버렸다.

오, 처음으로 한 번에 한 계단씩 오르기 시작한 날 저녁에 그가 이 사실을 생각했더라면! 그는 약간 피곤을 느꼈고, 실제로 머리에 어지럼증이 있었으며, 평소 하던 카드게임에도 아무런 의욕이 없었다(사실 그전에도 몇 번인가 일시적으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계단을 뛰어오르길 포기했었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의심할 수 없었다, 그날 저녁이 그에게는 매우 슬픈 순간이고, 그 계단에서, 정확히 그 시간에 그의 젊음은 끝나가고 있었음을. 다음날이면 특별한 이유 없이 더는 예전의 방식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임을. 그다음날도, 그후로도, 그리고 영원히 말이다.

정확히 그날과 똑같군. 그는 생각했다. 차이점이라면, 이제 위치가 바뀌어 드로고 자신이 바스티아니 요새를 수백번째 오르는 나이든 대위였고, 새로운 중위는 낯선 인물인 모로였다. 그사이 한 세대가 끝나버렸음을, 자신이 어느덧 인생의 정점을 지나, 오래전 그날 오르티츠 대위가 그렇게 보였듯이 장년층에 다다랐음을 드로고는 깨달았다. 내세울 만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마흔 살을 넘긴 것이다. 자식도 없이, 정말로 세상에 혼자였다. 그는 기울어가는 자신의 운명을 느끼면서 심한 공포감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드로고의 심장이 옥죄어왔다. 그는 아득한 시절의 꿈과 인생의 아름다운 것들에 영원한 안녕을 고했다.

어느 누구도, 방금 태어나 아직 이름을 갖지 못한 어린아이들조차도 시간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요새에는 시간의 작업과 다가오는 최후의 순간에 무방비한 가련한 인간들이 살고 있었다.

하늘에 떠가는 구름의 그림자가 풍경에 특이한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아니길 바랐다. 사실 그는 드로고 또한 자기처럼 군인으로서 큰 행운을 누리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가길 빌었다. 그러지 않으면 억울한 기분이 들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드로고에게 우정을 느꼈고, 그가 잘 지냈으면 했다.)

매듭처럼 이상한 무언가 때문에 그의 목이 메었다.

그는 인생의 좋은 시절을 흘려보냈고, 적어도 지금은 마지막 순간까지는 기다리고 싶었다.

"하느님, 저를 낫게 해주세요. 간절히 애원합니다. 적어도 엿새나 이레만이라도 제발." 드로고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어떻게든 성벽에 가서 시메오니를 만나고 싶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우지 않는 사람임을, 평소와 같이 자기 자리에서 책임을 다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그는 격렬하고 쓰라린 분노를 느꼈다. 두 눈이 흐릿해져 그는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야 했다. 그토록 약해진 자신의 상태를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최대한 스스로를 추슬렀다. 적대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끔찍하게 혼자인 기분이었다. 물론 모로처럼 그를 따르는 젊은 중위들이 몇 명 있기는 했지만, 부하 장교들의 지지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오, 하느님, 오, 하느님.’ 그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청했다. ‘저를 좀 도와주세요!’

그 순간 드로고는 오르티츠에게 하듯이 진정한 친구로서 마음을 열고 시메오니와 대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시메오니 역시 한 사람 아닌가.

"오히려 자네에게 고맙게 생각하네. 좋은 의미로 그랬다는 거 알아." (그는 생각했다. 오, 이런 인간을 우정으로 대하기란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그곳에서 그는 세상과 분리되어 살았고, 적군을 기다리며 삼십 년이 넘는 시간을 고통스럽게 지냈다. 그리고 외국의 적들이 도착한 지금, 동료들은 그를 쫓아버렸다. 한편 그의 친구들과 타인들은 저 아래 도시에서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고, 이제 목적지에 도달하여 우월한 경멸의 미소를 지으며 전리품을 거머쥐고 있었다.

그들은 남든지 떠나든지 하는 일에 별 관심이 없었다. 터무니없는 망상으로 괴로워하지도 않고, 그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삶을 택할 뿐이었다.

그 작은 생명 안에는 아직 산란한 꿈들이 생겨나기 전이었다.

그도 언제인가 그 아이처럼 잠들었었다. 그 역시 사랑스럽고 순수했었다. 어쩌면 어느 늙고 병든 장교가 발걸음을 멈추고 쓸쓸한 놀라움으로 어린 그를 바라봤을지도 모른다. "불쌍한 드로고." 그는 중얼거렸다.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무엇보다 자신이 세상에 혼자이며, 스스로를 제외하고는 다른 어느 누구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음을 그는 깨달았다.

대단한 행운을 누리지 않는 이들에게도 틀림없이 행복한 저녁이리라.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희망의 이유를 지니고 있었다. 비록 작은 이유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니까 삶은 일종의 장난으로 전락한 것이다. 자부심을 내세운 내기를 위해 모든 것을 잃고 만 것이다.

만일 모든 게 속임수라면? 만일 이 용기가 열정의 도취에 불과하다면? 단지 황홀한 일몰과 향기로운 공기 때문에, 그리고 잠시 멈춘 육체의 고통과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노래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면? 몇 분이나 한 시간 뒤라도 다시 나약하고 패배한 이전의 드로고로 돌아가야 한다면 어찌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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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4-08 17: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야 인용도 대단하십니다.

거창한 리뷰 기대해 보겠습니다.

라로 2022-04-11 15:10   좋아요 0 | URL
죄송해요,, 읽은 지 며칠 지났다고 벌써 까묵;;;
나이가 드니까 머리에 들어가는 즉시 나가버리네요. 흐윽
 

밤이 깊어가면서 어두운 골짜기에서 두려움의 숨결이 올라왔다. 짙어가는 어둠 속에서, 드로고는 점점 작고 외로워지는 기분이었다.

아, 단 한 명이라도 가까이에 동료들이 있었다면 달랐을 텐데. 드로고는 농담할 기분을 되찾았을 테고, 새벽을 기다리기가 지금처럼 괴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윤이 나는 검은색이 풍경 속에 하나의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있었다.
그 자체로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지만, 말 뒤에 분명 다른 것들이 오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말 안장은 방금 전에 올린 듯 제대로 자리잡혀 있었다. 그러니 전설은 끝난 게 아니었다

어제까지 터무니없고 우스꽝스러운 미신으로 여겨졌던 이야기가 사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자 밤에 느낀 두려움이 싹 가시면서 불현듯 어떤 난관이 닥치든 자신은 각오가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문 앞에 자기 운명이 와 있다는 예감에 기쁨으로 충만되었다. 이는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만족스러운 운명이었다.

사막이 더없는 고독으로 빛나는 가운데, 말은 잠이 들었는지 아니면 새벽의 기운을 찾아 두리번거리는지 거의 꿈쩍도 않고 그 자리에 있었다.

드로고의 시선은 먼 곳을 향해 나아갔지만, 새롭게 눈에 띄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언제나 똑같은 돌투성이 평야와 덤불, 북쪽 끝의 안개가 전부였다. 저녁이 다가올수록 그것들은 점차 색깔이 변해갔다.

북쪽에서 빠르게 내려오는 구름들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는 밤이었다. 구름은 암벽 봉우리들을 훑고 지나가며 작은 조각들을 남겨놓았다. 대단히 중요한 뭔가가 부르고 있는 듯, 구름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직접 질책하는 데 소질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분노로 얼굴이 하얗게 변할 뿐, 할말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꿈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꿈에는 언제나 부조리하고 혼란스러운 뭔가가 있는 법이라, 모든 건 가짜고 때마침 깨어나게 되리라는 막연한 느낌이 결코 가시지 않는다.

좋은 날들마저 항상 무언가로 오염되는 저 아래 세상과는 분명 다른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포병들은 자기들끼리 농담을 주고받으며 잘 관리된 짐승들처럼 포대 주변에서 포격 준비에 돌입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충분히 연습하지 않은 걸 후회했다.

과신이라니! 오, 그가 스스로에게 바라는 것이 바로 과신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살기 위해 인생을 보냈고, 그에게는 몇 년의 임기밖에 남아 있지 않다. 이 일이 진정 좋은 기회가 아니라면, 아마 모든 가능성은 끝나버릴 것이다. 그를 머뭇거리게 하는 건 두려움도 아니고,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아니다. 그런 생각은 아예 그의 머릿속에 없다.

그는 너무나 많이 속아왔고, 그만하면 충분했다.

어떤 나이에 이르면 희망하는 데 큰 수고가 따르고, 더는 스무 살 시절의 믿음을 되찾지 못한다.

그로서는 운명적인 일을 부추기듯이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고 마냥 기다리는 편이 더 좋은데 말이다.

가끔 사람들은 자신의 상태가 괜찮다고 착각하지. 설사 늦었다 해도 말하는 게 좋아."

지금은 그 역시 한밤중의 폭풍 속에 있더라도 그곳에 올라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기회가 가까이 왔었건마는, 그는 그 기회를 떠나보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어, 안구스티나? 말도 다 끝맺지 않은 채 가버리다니. 아마도 바보 같은 얘기였겠지. 어쩌면 터무니없는 희망이었을 테고, 어쩌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거야.

"가끔 이런 생각이 드네. 우리가 전쟁을 원하고, 절호의 기회를 기다리고, 불행에 화를 내는 이유는 결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이지.

어쩌면 피로 물든 모습이었을 희망의 눈부신 깃발들은 서서히 내려가, 병사들의 마음은 다시 일상의 평온한 상태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하늘은 텅 비어 있었다. 경비병의 눈길은 지평선 경계 끝에서 여전히 무언가를 찾고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정말이지 죽기에 적당한 순간을 알았네.

영웅 같았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군. 물론 어느 누구도 그를 쏘지 않았지만 말이네. 그러한 죽음은 그날 그와 함께 있던 다른 모든 병사들한테도 똑같이 주어진 기회였지. 더 쉬운 기회야 있겠지만 어쨌든 그 상황에서 그가 특별히 더 유리했던 게 아니었다 이 말이야. 하지만 다른 병사들은 대체 뭘 했나? 그들한테는 여느 날과 별반 다르지 않은 하루였던 거지.

"결국 그에 걸맞은 때야 늘 누구한테든 오지. 예를 들어 안구스티나는 비싼 값을 치렀지. 하지만 우리는 아니야. 어쩌면 모든 문제가 거기에 있는지 모르지. 우리가 지나치게 망설이는 건 아닌가 싶어. 실제로 그럴 만한 때는 언제나 있는데 말이야."

하지만 모두가 영웅이 되려고 태어나는 건 아니니까.

그들은 더이상 떠날 재간이 없었네. 서른 살에 이미 노인이 되어버렸으니까.

수많은 희망이 옳았음을 보여줄 만한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루하루의 나날들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평화가 세상을 다스렸고, 경비병들은 경보를 울리지 않았으며, 변화가 일어날 조짐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나간 세월과 다를 바 없이 이제 다시 겨울이 다가와 북풍의 바람결이 병사들의 총검에 부딪히며 약한 휘파람소리를 냈다. 오르티츠 소령은 여전히 그곳, 제4보루의 테라스에 서서, 자신이 내뱉은 지혜로운 말들을 믿지 못하고 북쪽 땅을 한번 더 쳐다봤다.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그만이 유일하게 그 땅을 바라볼 권리가 있고, 그곳에 남아 있을 권한이 있는 듯 보였다. 어떤 의도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마침내 요새 테라스에 쌓인 눈이 녹기 시작해 진흙에 발이 빠지는 시절이 왔다. 어느 순간 가장 가까운 산맥에서 갑자기 부드러운 물소리가 들려왔고, 산봉우리들의 경사면 여기저기에는 흰 눈 줄기가 수직으로 길게 나타나 태양빛에 반짝였다. 이따금씩 병사들은 여러 달 동안 부르지 않던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자신들의 모습에 놀라곤 했다.

봄이 온 지금 갈라져나간 나무의 온갖 조각들에서 영원히 점점 더 작아지는 생명의 고동이 다시 한번 깨어나는 것이다.

세면장에는 모든 것이 정돈되어 있다. 세면대는 청결하고, 바닥은 청소가 되어 있다. 틀어진 수도꼭지는 병사들의 잘못이 아니다.

창문의 유리들은 닫혀 있지만, 아마 오랫동안 청소를 하지 않았는지 구석에 거미줄이 쳐져 있다. 유리 너머로 하늘과 닮은 무언가가 보이긴 하지만, 그곳에 사람의 마음을 위로할 만한 건 전혀 없다.

어쩌면 장교는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똑같은 하늘과 태양이 그가 있는 쓸쓸한 세면장과 머나먼 초원을 동시에 비추고 있다고 말이다.

젊은 여자들은 꽃으로 머리장식을 하고 화려한 색상의 의상을 차려입었다. 언제라도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나리라 기대하는 듯, 모두 즐거운 모습이다.

그들은 알지 못하지만, 다른 장교들의 얼굴이 그의 신경을 거스른다. 항상 똑같은 얼굴들, 늘 똑같은 이야기들, 똑같은 임무, 그리고 똑같은 서류들을 그는 본능적으로 떠올린다. 동시에 그의 내면에서는 연약한 욕망들이 들끓는다. 그 바람들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내기란 쉽지 않다. 확실한 건 성벽도 아니고, 그곳의 병사들도 아니며, 나팔소리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니 작은 말이여 평원의 길을 달려라. 늦기 전에 달려가라. 푸른 초원과 친숙한 나무들, 사람들의 마을과 교회 그리고 종탑들을 보기 전까지는 피곤하더라도 멈추지 마라.

요새여 영원히 안녕, 더 머무는 건 위험할 테니. 너의 간단한 수수께끼는 풀렸고, 북쪽의 사막평원은 계속해서 황량하게 남으리라. 결코 적들은 오지 않고, 너의 먼지투성이 성벽을 공격하러 오는 이는 아무도 없으리라. 영원히 안녕, 오르티츠 소령이여. 더는 이 초막 같은 요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울한 친구여. 당신처럼 다른 많은 이들이 너무나 오래 희망을 고집해왔다. 시간은 당신들보다 훨씬 빨랐고, 당신들은 다시 시작할 수 없으리.

요새에 있는 요 몇 년, 그는 아주 좋은 결정적인 기회들을 몇 번 놓쳤다. 하지만 조반니는 아직 젊고, 그것을 보상할 수 있는 시간은 그에게 얼마든지 남아 있다.

더이상 요새를 생각하지 마라. 네가 고원 가장자리에 도착했던 그 시간을 뒤돌아보지 마라. 길은 이제 골짜기로 빠지려는 참이다. 뒤를 돌아보는 것은 아주 무모한 실수가 될 것이다.

말은 즐겁게 빨리 걸을 것이고, 날씨는 화창하며, 공기는 따뜻하고 가볍다. 그리고 아직 길게 남아 있는 인생은 여전히 출발점에 가깝다. 마지막으로 성벽과 포대, 보루 가장자리에 보초를 선 경비병들을 둘러볼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그렇게 인생의 한 장이 천천히 넘어가면서 이미 끝나버린 다른 장들과 합쳐지고, 맞은편에서 또다른 장이 펼쳐진다. 넘어간 쪽은 고작 얇은 층에 불과하고, 그에 비하면 앞으로 읽어야 할 장들은 무궁무진한 종이 뭉치나 마찬가지다.

다음으로 나아가려면, 언제나 삶의 일부인 또다른 장은 써버려야만 하는 법.

그 냄새는 그에게 까마득한 시절을, 일요일의 달콤한 기쁨과 즐거운 식사, 그리고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굳게 닫힌 창문과 숙제, 아침 청소, 질병, 말다툼, 쥐들에 대해서도 들려주었다.

거실에 앉아 쏟아지는 많은 질문에 대답하려고 애쓰는 동안 그는 행복감이 무기력한 슬픔으로 변해가는 걸 느꼈다. 예전에 비해 집이 허전해 보였다. 형제들 중 한 명은 외국으로 떠났고, 또다른 한 명은 어딘지 모를 곳에서 여행중이었으며, 세번째 형제는 시골에 있었다. 오로지 어머니만 집에 남아 있었는데, 그녀 역시도 잠시 후에는 성당 봉사를 위해 외출해야 했다. 그곳에서 어머니 친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드로고의 방은 책 한 권 옮겨지지 않은 채 그가 떠날 때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어딘가 다른 사람의 방처럼 보였다. 그는 소파에 앉아 거리를 지나는 마차 소리와 부엌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중얼거림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홀로 자기 방에 있었고, 어머니는 성당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으며, 형제들은 모두 멀리 있었다. 그렇게 세상 전체가 조반니 드로고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창문을 열어 회색빛 집들과 서로 맞닿은 지붕들을, 그리고 안개 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런 뒤 서랍에서 낡은 공책들과 여러 해 동안 간직했던 일기장, 몇몇 편지를 찾았다. 그는 자신이 적어둔 내용을 보며 몹시 놀랐다. 정말이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던 일들, 까맣게 잊고 있던 이상한 일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는 피아노에 앉아 조율을 해보다가 다시 건반 뚜껑을 덮었다. 이제 뭘 하지?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밤에는 유쾌하게 즐겨보려는 결심으로 늦게까지 집밖에 있었다. 매번 젊은이답게 사랑을 찾고 싶은 평범하고 막연한 기대를 품고 외출했지만, 매번 실망하여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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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벌어지고 있는 일의 실체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대저택의 거실은 헛되이 어린 주인을 기다릴 테고, 여인의 두 손은 떠난 이가 열어놓은 창문을 조용히 닫을 것이며, 다른 창문들 역시 빗장이 채워진 채 어둠 속에서 눈물과 탄식에 잠기리라.

그 꿈이 그의 마음에 굉장히 깊은 인상을 남긴 터였다. 그가 특별히 미신을 믿지 않는다 해도, 그 꿈은 틀림없이 미래의 일과 어둡고 부정적인 연관성이 있는 것만 같았다.

일몰은 희망의 시간이었고, 그는 영웅담을 상상했다. 아마도 현실에서는 결코 증명해 보일 수 없을 이야기들이지만 인생에 용기를 북돋아준다는 쓸모가 있었다.

불길한 무언가가 생겨나려는 것처럼 그 땅은 아직 잠들지 않았다.

수녀처럼 보이는 검은 돌이지.

운명의 중요한 순간들이 우리에게 다가오지도 않은 채 눈앞에서 지나가버리는 순간, 그래서 우리가 수북이 쌓인 낙엽 사이에 홀로 남겨져 잃어버린 일생일대의 기회를 생각하며 슬퍼하는 동안 그 찰나의 울림이 멀리 사라져가는 순간에 선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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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절대로 떠나지 않을 겁니다. 사령관이신 대령님과 다른 많은 군인들은 죽을 때까지 여기에 남을 거예요. 일종의 병이지요. 중위님도 조심하십시오. 갓 부임하셨으니 시간이 있을 때 조심하셔야 합니다……"

"요새가 매우 중요하고, 그래서 뭔가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요."

"대령님, 스티치오네 대위님, 오르티츠 대위님, 그리고 중령님을 보십시오. 그분들은 마음 편히 쉴 수 있을 때까지 늘 그런 식으로 해마다 뭔가가 일어나길 기다리지요."

그 순간 지하의 정적 속에서 드로고는 격렬하게 요동치는 심장의 고동을 느꼈다. 그러니까 지하창고에서 붙박이처럼 계산 일을 하는 이 노인 역시 영웅적인 운명을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음울하고 초라한 이 피조물도 예외가 아닌 것인가?

조반니가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자 노인은 침울하게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마치 사실이 그러하며, 뚜렷한 해결책이 없음을 의미하는 듯한 몸짓이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이며, 결코 나아지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그들의 행운과 모험, 그리고 적어도 각자가 한 번쯤은 경험할 기적 같은 시간이, 저 북쪽 사막으로부터 올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불분명해지는 이 막막한 우연을 위해, 군인들은 인생의 전성기를 요새에서 소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 똑같은 희망을 품고 모여 살면서도 그 희망을 결코 입 밖에 내지 않았는데, 이는 그들이 그에 대해 달리 생각을 하지 않아서거나, 단순히 군인정신에서 비롯된 투철한 자제심을 지닌 군인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트롱크는 규정 조항들과 세부 규율을 철저히 따랐고, 강한 책임감에서 오는 자부심을 추구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 그에게 살아 있는 동안 끝까지 아무것도 바뀌는 게 없을 거라고 말해주었더라면, 그 역시 정신을 차렸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고 그는 말했으리라. 이미 다 끝났다 해도 뭔가 다른 일, 진실로 가치 있는 무슨 일인가가 닥쳐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으리라.

포도주 탓인지 밤이라서 그런지 모두들 다소 흥이 오른 상태다. 그들이 내는 목소리가 잦아들자 밖에서 비 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는 언제나처럼 농담조였지만 다들 그 말이 진심임을 알고 있었다.

안구스티나, 저 저주받은 속물은 도대체 왜 지금도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는가? 왜 그토록 병들었음에도 짐을 챙겨 떠날 준비를 하지 않는가? 그러기는커녕 왜 자기 앞의 어둠을 응시하고 있는가? 대체 무얼 생각하는가? 어떤 비밀스러운 교만이 그를 요새에 붙잡아두고 있나?

그들은 지성과 교양 면에서는 거리가 먼 자들로, 서로의 다른 점을 사랑하는 다른 두 사람이었다. 둘이 늘 함께 있는 모습만 봐도 놀라웠는데, 누가 봐도 안구스티나가 더 뛰어났던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친구였다. 모든 사람들 가운데 오직 라고리오만이 본능적으로 그를 이해했고, 오직 그만이 친구를 걱정했으며, 그의 앞에서 떠나는 것이 보기 흉한 과시라도 되는 듯 부끄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제 같기만 한 시간이 모든 사람한테 똑같이 일정한 리듬으로 그렇게 사라져갔다. 행복한 사람이라고 해서 더 느리게 흐르지도, 불운한 사람이라고 해서 더 빠르게 흐르지도 않았다.

드로고는 창밖을 내다보느라 그의 말을 무심결에 흘려들었다. 그 순간 뜰의 노란 성벽이 투명한 하늘을 향해 높이 치솟은 듯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로 더 높은 곳에, 예전에 결코 알아차리지 못했던 외따로이 떨어져 있는 탑들과 비스듬히 기울어진 눈 덮인 거대한 성벽이, 공중에 훤히 드러난 보루와 작은 요새들이 보였다. 서쪽 방향에서 태양의 밝은 빛이 아직 비추는 가운데, 그것들은 불가해한 생명력으로 신비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요새가 그토록 복잡하고 거대한지 드로고는 미처 깨닫지 못했었다. 믿기지 않을 만큼 높은 위치에 골짜기 방향으로 열린 어느 창문(아니면 총안일까?)이 보였다. 그 아래에는 분명 그가 모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어쩌면 친구가 될 수도 있을 다른 장교들인지도 몰랐다. 성채와 성채 사이의 깊은 심연이 기하학적인 그림자를 드리운 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지붕 사이에 걸쳐진 간이 다리들, 성벽과 수평을 이루어 빗장을 채운 이상한 문들, 폐쇄된 옛 돌출회랑, 세월에 구부러져버린 긴 마룻대도 보였다.

일어나야만 했던 일이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을지 모른다. 드로고가 평지 가장자리에서 오르티츠 대위를 처음 마주했던 그날, 정오의 강렬한 햇빛 아래로 요새가 나타났던 까마득한 그날부터였을 것이다.

어떤 욕망에 이끌린 결정이었지만 단순히 비장한 마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순간 그는 어떤 고귀한 일을 해냈다고 믿으며 자신한테 생각지도 못한 선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 이미 무감각하게 길든 습관들이, 군인으로서의 다소 과한 자부심과 이제 일상이 된 성벽을 향한 가족 같은 애정이 자리잡은 터였다. 단조로운 리듬으로 이어진 군복무는 넉 달 만으로도 충분히 그를 유혹하고 남았다.

그가 이제 잘 알고 지내는 동료들과의 생활 역시 익숙한 습관이 되었다. 비록 가장 세밀한 속내를 털어놓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저녁마다 그들은 도시에서 일어난 일들을 소재로 오랜 시간 함께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만큼이나 도시의 소식은 그들에게 끝없는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맛있는 음식이 나오는 편안한 식당과 밤낮으로 늘 켜놓는 대기실의 아늑한 벽난로, 그곳의 유능한 당번병인 제로니모의 친절한 태도 역시 익숙한 습관이 되었다.

저녁에는 인내심이 필요한 체스게임이 벌어져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다. 승리는 종종 드로고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오르티츠 대위는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 "언제나 그래. 신참들이 항상 이기지. 모두에게 똑같이 일어나는 일인데, 자기가 정말 대단하다고 착각하기 쉽네. 하지만 문제는 새로운 방식일 뿐이야. 결국 다른 사람들도 그 방식을 따라 배우게 되고, 언젠가는 꼼짝없이 지고 마는 거지."

우기에 문을 두드리는 빗소리, 평소 창문 안으로 달빛이 비쳐드는 지점과 시간에 따라 천천히 이동하는 그 움직임, 매일 밤 정확히 한시 반에 아랫방에서 들려오는 니콜로시 중령의 뒤척임도 그에게는 습관이 되었다. 그 시간이면 중령은 오른쪽 다리에 입은 오래전 상처의 통증이 이상하게 되살아나 잠에서 깨어나곤 했던 것이다.

요새를 떠나려면 얼마나 안간힘을 써야 하는지, 또 요새의 삶이 하루하루 별반 다르지 않은 나날들을 얼마나 어지러운 속도로 삼키게 될 것인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어제는 그제와 똑같았고, 그는 그날들을 더는 구분할 수 없을 것이었다. 사흘 전 일이든 열이틀 전에 일어난 일이든 똑같이 까마득하게 여겨질 터였다. 그렇게 그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 시간은 도피하고 있었다.

그날 밤 테라스 가장자리에서 바람에 휘날리는 멋진 망토를 걸친 자기 모습이 자부심 넘치는 군인다운 아름다움을 풍기는 것만 같았다.

드로고는 홀로 남았고, 실제로 행복감을 느꼈다. 요새에 남기로 한 결정이 자랑스러웠다. 그는 오래도록 지속될 커다란 선의를 위해 소소하되 확실한 기쁨을 포기했다는 씁쓸함을 자부심 어린 마음으로 음미했다(어쩌면 언제든 적당한 때에 떠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그에게 위로를 주었을지 모른다).

고귀하고 위대한 일들에 대한 예감이?아니면 단순히 희망이었을까?그를 요새에 남게 했다.

어떤 행운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그의 앞에 놓인 그 시간이라니! 단 일 년도 그에게는 영원처럼 여겨졌고, 인생의 좋은 시기는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다. 바닥이 드러날 리 만무한 기나긴 시절, 아직까지 보물이 고스란히 간직된, 싫증내기에는 너무나 위대한 시절이 가고 있는 듯했다.

벌써 청춘은 저물어가기 시작했건만 삶은 그에게 지칠 줄 모르는 집요한 환영으로 나타났다. 드로고는 시간에 대해 알지 못했다. 신들이 그렇듯이, 눈앞에 수백 년의 젊음이 있다 하더라도 그 역시 불행일 수 있었다. 더구나 그는 단순하고 평범한 삶, 인간다운 짧은 청춘, 고통스러운 은총의 소유자였으니, 모두 열 손가락으로 세기에 충분하고 미처 알기도 전에 사라져버릴 것들이었다.

바람이 길게 내려오는 물줄기를 흔들고, 메아리가 수수께끼 같은 놀이를 벌이는가 하면, 물이 바위에 부딪혀 서로 다른 소리가 나면서 끊임없이 말하는 인간의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언제나 이해를 갈구하지만 결코 그에 도달하지 못한, 우리 삶의 말들이었다.

경비병이 흥얼거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추위나 처벌에, 사랑에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 적대적이고 거친 산의 소리였다. 얼마나 서글픈 오해인가, 드로고는 생각했다. 어쩌면 모든 게 이런 식일지 모른다. 주위에 우리와 비슷한 존재가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얼음과 바위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친구에게 인사를 하려 하지만 팔은 힘없이 떨어지고 미소는 사라져버린다. 우리가 철저히 혼자임을 깨닫게 되므로.

천천히, 그러나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밤길을 걸어가며 새벽을 재촉한다. ‘쿵쿵.’ 조반니 드로고의 가슴에서는 심장이 뛴다.

스물두 달은 긴 시간이요, 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이다.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이 태어나 말까지 할 수 있는 시간이고, 풀밭에 불과했던 땅에 커다란 집이 생겨날 수 있는 시간이며, 아름다운 여인이 늙어버려 더는 아무도 그녀를 원하지 않게 될 수 있는 시간이다. 또 (당사자는 이 사실을 모른 채 별다른 걱정 없이 지내지만) 오랫동안 앓게 될 질병이 진행되어 육체를 천천히 잠식하고, 언뜻 짧게나마 호전되는 듯 보였다가, 다시 병이 깊어지면서 마지막 희망을 앗아가고, 결국은 죽은 이가 묻힌 뒤 잊히고도 남을 시간, 이후 그의 아들이 다시 웃을 힘을 되찾아 저녁마다 여자들을 데리고 아무 생각 없이 묘지 울타리를 따라 거리를 돌아다니게 되고도 남을 긴 시간인 것이다.

그러나 드로고의 존재는 멈춰 있었다. 똑같은 일들을 반복하는 변함없는 일과가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감 없이 몇백 번이나 되풀이되었다.

시간의 강은 요새 위로 흘러가면서 성벽에 균열을 일으키고 그 아래 먼지와 돌멩이 조각들을 끌어모았으며 계단과 사슬들을 낡게 했지만, 드로고에게는 무의미하게 지나갔다. 그는 여전히 도망치듯 사라지는 시간을 붙잡아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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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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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은 지루했고, 가끔 지금과 좀 다르니까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좋은 부분이 더 많다. 고양이가 인간을 바라보는 모습처럼 썼다고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그때나 지금이나 대부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 몇 년 후 다시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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