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고는 자신이 되찾은 유일한 친구 베스코비와 함께 무도회장으로 들어가면서, 최상의 기쁨을 느꼈다. 이미 봄이긴 했지만 밤은 길 테고, 시간은 영원에 가깝게 이어질 터였다. 그러니까, 새벽이 오기 전까지 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

어떤 가능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런 제약 없이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꽤 긴 시간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분명했다.

바이올린 선율은 점점 더 희미해지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자 더는 춤추는 사람이 없어서 말 그대로 허공을 향해 울려퍼지고 있었다. 드로고는 씁쓸한 입맛을 느끼며 정원의 나무들 사이에 자리잡고 앉았다. 축제의 마법이 풀리고 새벽이 가까워진 하늘이 천천히 푸르스름한 빛으로 변하는 사이, 그는 왈츠의 어렴풋한 메아리를 들었다.

별들이 저물어가는 동안 드로고는 나무와 풀들이 드리운 검은 그림자 사이로 그날의 새로운 하루가 떠오르는 것을 지켜봤다. 그러는 동안 화려한 마차들은 하나둘 저택을 떠나갔다. 이제는 바이올린 연주자들도 잠잠해졌고, 하인 한 명이 방을 돌아다니며 불을 껐다. 드로고 바로 위에 있는 나뭇가지에서 어느 작은 새의 높고 청명한 지저귐이 들려왔다. 하늘이 점차 밝아지는 가운데 주위의 모든 것이 기분좋은 하루를 기대하며 조용히 쉬고 있었다.

어머니는 오직 그의 발소리에만 깨어났는데, 그 소리가 대단히 시끄러워서가 아니었다(사실 조반니는 발끝으로 걸어다녔다). 어떤 특별한 이유도 없었다. 오직 그가 아들이라는 사실, 그뿐이었다.

우스운 우연이겠지. 하지만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면서도, 과거의 애정이 훼손된 듯 쓸쓸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마치 떨어져 있던 시간과 거리가 그 둘 사이에 서서히 이별의 장막을 드리운 것만 같았다.

그는 자신이 예전 그대로라 믿었다. 어깨가 조금 넓어지고, 피부는 뜨거운 태양에 구릿빛으로 변하긴 했지만, 여전히 똑같은 모습이라고. 그녀 또한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둘 사이의 무언가가 변해 있었다.

드로고가 보기에 달라진 점은 없었다. 오히려 사 년 동안 한 여자에게 눈에 띄는 변화가 전혀 없었다는 데 적잖이 놀랐다. 그는 묘한 실망감과 냉랭함을 느꼈다. 더이상 과거의 분위기를, 그들이 남매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상처 주지 않으면서도 마음껏 농담을 주고받던 시절의 분위기를 되찾을 수 없었다.

그의 앞에 있는 그녀는 생각을 알 수 없는 낯선 타인이었다. 어쩌면 그 자신도 더이상 과거의 그가 아닐 수 있었다. 게다가 잘못된 분위기로 시작한 사람은 정작 그였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정말 그들 사이에는 뭐라 정의내릴 수 없는 미지의 베일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것은 사라질 생각이 없었다. 어쩌면 그 베일은 오래 헤어져 있는 동안 둘 중 누구도 모르게 하루하루 그들을 갈라놓으면서 천천히 커졌을지 모른다.

드로고는 벽난로의 장작 받침대에 시선을 고정했다. 요새에 있던 것과 정확히 똑같은 받침대였다. 그 우연이 그에게 작은 위로를 주었다. 무엇보다, 요새와 도시가 똑같은 삶의 습관을 가진 하나의 세계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모든 게 끝났음을 깨달았다. 이제 그들은 다시 멀어졌다. 그들 사이에 어떤 틈이 벌어졌다. 서로에게 닿고자 손을 뻗는 건 소용없는 일이었고, 매 순간 그 거리는 점점 늘어났다.

잊힌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먼저 나설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드로고 홀로 그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삶에 대해 생각했다. 많은 동료가 영영 떠나버릴 바로 그 시기에, 그는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머물러야 할지 알지 못한 채 요새로 돌아가고 있었다. 동료 장교들이 한발 더 빠르기도 했지만, 실제로 그들이 더 우수할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고 드로고는 생각했다. 과연 이 점으로도 설명이 가능할 터였다.

세월이 흐를수록 요새는 그 중요성을 잃었다. 오래전 과거에는 중요한 요충지였거나 적어도 그렇게 여겨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인원이 절반으로 감축된 요새는 전쟁의 모든 전술에서 전략적으로 제외된, 그저 하나의 방어장벽에 불과했다.

그의 눈앞에는 요새가 있었다. 요새는 더이상 처음과 같은 불안한 비밀을 품고 있지 않았다

하나의 신비가 해자 구석과 참호의 그늘에 고집스럽게 남아, 앞으로의 일들에 관해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이곳은 뭐랄까, 유배지 같은 곳이지. 그러니 어떤 분출구를 찾아야 할 필요가, 무언가를 바라고 기대할 필요가 있어. 어떤 자가 그런 생각을 떠올렸고, 그때부터 사람들이 타타르인들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네. 맨 처음 누가 그런 얘기를 했는지는 알 수 없네.

드로고의 마음에는 그가 바라는 먼 세상에 대한 생각이 느닷없이 떠올랐다. 가령 부드러운 여름밤 바닷가의 저택에서 그의 곁에 앉은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인들과 음악을 듣는다거나 하는, 청년기에 무고하게 생각에 빠져 상상해봤음직한 행복한 이미지들이었다.

밤을 온통 지새울 수도 있고, 잠으로 도망치지 않아도 되며, 뒤처짐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그리고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지켜보며 고뇌 없이 자기 앞에 놓인 영원한 시간을 음미할 수 있는, 그런 이미지들을 드로고는 떠올렸다.

언제부터인가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불안이 쉼없이 그를 따라다녔다. 뭔가 중대한 일이 일어나 그를 두렵게 하리라는 예감이 시도 때도 없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자기와 같은 유배지에 살고 있는 장교들을 보면서 위안을 삼았다. 그들이 약자일 수 있다는 생각도, 승자일 수 있다는 생각도, 그가 따라야 할 마지막 본보기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초라하든 영광스럽든, 그 자체로 만족스러운 저마다의 도착점이 있는 셈이었다.

다시 한번 삶의 사건들이 그의 뜻과는 완전히 다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자네하고는 농담을 할 수가 없군. 자네는 전부 진지하게 믿어버리는 게 탈이야. 꼭 어린아이 같잖나."

요새의 단조로운 삶에서 그에게는 전환점이 필요했다. 시간은 그가 셈하기도 전에 지나가버렸다.

여전히 사랑하는 자신의 집을 찾아갈 때면, 그의 마음은 설명하기 어려운 괴로움으로 가득찬다. 집안은 거의 매번 쓸쓸히 비어 있다. 어머니의 방은 영영 주인을 잃었고, 형제들은 끝없이 떠돌아다닌다. 한 명은 결혼해서 다른 도시에 살고, 다른 한 명은 여행을 계속한다. 방과 거실에 가족들이 함께했던 삶의 흔적은 더이상 찾아볼 수 없고, 목소리는 과장되게 울린다. 햇살을 향해 창문을 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불행히도 그는 자신이 크게 변했다고 느끼지 않는다. 시간은 정신이 나이들기도 전에 너무나 빨리 흘러버렸다.

오, 처음으로 한 번에 한 계단씩 오르기 시작한 날 저녁에 그가 이 사실을 생각했더라면! 그는 약간 피곤을 느꼈고, 실제로 머리에 어지럼증이 있었으며, 평소 하던 카드게임에도 아무런 의욕이 없었다(사실 그전에도 몇 번인가 일시적으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계단을 뛰어오르길 포기했었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의심할 수 없었다, 그날 저녁이 그에게는 매우 슬픈 순간이고, 그 계단에서, 정확히 그 시간에 그의 젊음은 끝나가고 있었음을. 다음날이면 특별한 이유 없이 더는 예전의 방식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임을. 그다음날도, 그후로도, 그리고 영원히 말이다.

정확히 그날과 똑같군. 그는 생각했다. 차이점이라면, 이제 위치가 바뀌어 드로고 자신이 바스티아니 요새를 수백번째 오르는 나이든 대위였고, 새로운 중위는 낯선 인물인 모로였다. 그사이 한 세대가 끝나버렸음을, 자신이 어느덧 인생의 정점을 지나, 오래전 그날 오르티츠 대위가 그렇게 보였듯이 장년층에 다다랐음을 드로고는 깨달았다. 내세울 만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마흔 살을 넘긴 것이다. 자식도 없이, 정말로 세상에 혼자였다. 그는 기울어가는 자신의 운명을 느끼면서 심한 공포감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드로고의 심장이 옥죄어왔다. 그는 아득한 시절의 꿈과 인생의 아름다운 것들에 영원한 안녕을 고했다.

어느 누구도, 방금 태어나 아직 이름을 갖지 못한 어린아이들조차도 시간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요새에는 시간의 작업과 다가오는 최후의 순간에 무방비한 가련한 인간들이 살고 있었다.

하늘에 떠가는 구름의 그림자가 풍경에 특이한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아니길 바랐다. 사실 그는 드로고 또한 자기처럼 군인으로서 큰 행운을 누리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가길 빌었다. 그러지 않으면 억울한 기분이 들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드로고에게 우정을 느꼈고, 그가 잘 지냈으면 했다.)

매듭처럼 이상한 무언가 때문에 그의 목이 메었다.

그는 인생의 좋은 시절을 흘려보냈고, 적어도 지금은 마지막 순간까지는 기다리고 싶었다.

"하느님, 저를 낫게 해주세요. 간절히 애원합니다. 적어도 엿새나 이레만이라도 제발." 드로고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어떻게든 성벽에 가서 시메오니를 만나고 싶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우지 않는 사람임을, 평소와 같이 자기 자리에서 책임을 다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그는 격렬하고 쓰라린 분노를 느꼈다. 두 눈이 흐릿해져 그는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야 했다. 그토록 약해진 자신의 상태를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최대한 스스로를 추슬렀다. 적대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끔찍하게 혼자인 기분이었다. 물론 모로처럼 그를 따르는 젊은 중위들이 몇 명 있기는 했지만, 부하 장교들의 지지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오, 하느님, 오, 하느님.’ 그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청했다. ‘저를 좀 도와주세요!’

그 순간 드로고는 오르티츠에게 하듯이 진정한 친구로서 마음을 열고 시메오니와 대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시메오니 역시 한 사람 아닌가.

"오히려 자네에게 고맙게 생각하네. 좋은 의미로 그랬다는 거 알아." (그는 생각했다. 오, 이런 인간을 우정으로 대하기란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그곳에서 그는 세상과 분리되어 살았고, 적군을 기다리며 삼십 년이 넘는 시간을 고통스럽게 지냈다. 그리고 외국의 적들이 도착한 지금, 동료들은 그를 쫓아버렸다. 한편 그의 친구들과 타인들은 저 아래 도시에서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고, 이제 목적지에 도달하여 우월한 경멸의 미소를 지으며 전리품을 거머쥐고 있었다.

그들은 남든지 떠나든지 하는 일에 별 관심이 없었다. 터무니없는 망상으로 괴로워하지도 않고, 그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삶을 택할 뿐이었다.

그 작은 생명 안에는 아직 산란한 꿈들이 생겨나기 전이었다.

그도 언제인가 그 아이처럼 잠들었었다. 그 역시 사랑스럽고 순수했었다. 어쩌면 어느 늙고 병든 장교가 발걸음을 멈추고 쓸쓸한 놀라움으로 어린 그를 바라봤을지도 모른다. "불쌍한 드로고." 그는 중얼거렸다.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무엇보다 자신이 세상에 혼자이며, 스스로를 제외하고는 다른 어느 누구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음을 그는 깨달았다.

대단한 행운을 누리지 않는 이들에게도 틀림없이 행복한 저녁이리라.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희망의 이유를 지니고 있었다. 비록 작은 이유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니까 삶은 일종의 장난으로 전락한 것이다. 자부심을 내세운 내기를 위해 모든 것을 잃고 만 것이다.

만일 모든 게 속임수라면? 만일 이 용기가 열정의 도취에 불과하다면? 단지 황홀한 일몰과 향기로운 공기 때문에, 그리고 잠시 멈춘 육체의 고통과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노래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면? 몇 분이나 한 시간 뒤라도 다시 나약하고 패배한 이전의 드로고로 돌아가야 한다면 어찌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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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4-08 17: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야 인용도 대단하십니다.

거창한 리뷰 기대해 보겠습니다.

라로 2022-04-11 15:10   좋아요 0 | URL
죄송해요,, 읽은 지 며칠 지났다고 벌써 까묵;;;
나이가 드니까 머리에 들어가는 즉시 나가버리네요. 흐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