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첩방은 남의 나라
12784보를 걸었다. 길 위로 새하얀 나비 한 마리 팔랑팔랑 낮게 날고 있었다. 어쨌거나 이래도 한 살이, 저래도 한 살이라고 생각했다. 답안지를 채우는 데 필요치 않은 책 300쪽을 읽었다. 이것들이 답이 되는 문제를 언젠가는 만날지도 모른다며 위로하고 독려했다. 1.7리터의 물을 끓이고, 740밀리리터의 커피와 350밀리리터의 홍차를 마셨다. 보이차와 레몬밤도 우렸다. 입 안이 자꾸만 텁텁해진다. 한 차례 수음을 했다. 조금 비참해졌다. 하루가 가도록 팔굽혀펴기 100개를 해내지 못했다. 더욱 비참해졌다. 두 끼만 먹고 나머지 한 끼를 상상했다. 상상은 칼로리가 없지만 칼로리가 없어서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다. 휴지가 동나고 치약이 다 떨어졌다. 책꽂이에는 사례집과 판례집과 문제집이 있고 고집과 맷집과 네가 사는 집은 없다. 아무도 찾지 않았고 아무도 찾아주지 않았다.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 종일 나만 만난다. 만 보를 걸으면 땀이 난다. 여름인가 봐, 내가 말했다. 봄 된지 얼마 됐다고, 내가 대답했다. 그러자 내가 손을 뻗어 내 이마를 만져주었다. 다정하게 땀을 훔쳐 주었다. 나는 내가 고마웠다.
어쨌거나 이래도 여름, 저래도 여름이 올 것이다. 저녁에도 에어컨이 가동된다. 3분만 지나도 으슬으슬 추워지는 좁은 방이다. 에어컨이 멈추면 3분 안에 다시 꿉꿉한 훈기가 도는, 역시 좁은 방이다. 고시원은 남의 나라 같다. 남의 나라에, 봄이 물러난 만큼 밤이 길어진다.




고독하다는 것은 어떤 기분인가? 그건 배고픔 같은 기분이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잔칫상에 앉아 있는데 자기만 굶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창피하고, 경계심이 들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기분이 밖으로도 드러나, 고독한 사람은 점점 더 고립되고 점점 더 소외된다. 그것은 감정적인 측면에서 상처를 입히며, 신체라는 폐쇄된 공간 내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발생하는 물리적 결과마저 낳는다. 그것은 앞으로 나아간다. 무슨 말이냐 하면, 고독은 얼음처럼 차갑고 유리처럼 맑으며 사람을 집어삼킨다는 뜻이다.
_ 올리비아 랭, 『외로운 도시』
마음속에서 자기파괴가 시작될 때, 그것은 그 크기가 단지 모래알 정도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두통이요, 가벼운 소화불량이요, 오염된 손가락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은 8시 20분 기차를 놓치고 신용기한 연장정책에 관한 회의에 늦게 도착한다. 점심을 함께하기로 한 옛 친구는 갑자기 당신의 인내심을 바닥내고 이에 당신은 유쾌해지기 위한 노력으로 석 잔의 칵테일을 들이켠다. 하지만 그때쯤이면 이미 하루는 그 형태를, 그 의미와 감각을 잃어버린다. 어떤 목적과 아름다움을 되살리고자 당신은 너무 많은 칵테일을 마시고 너무 많은 얘기를 하고 다른 누군가의 아내를 유혹하면서 결국은 바보스럽고 외설스러운 어떤 일로 치닫게 되며 아침이 되면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심연에 빠지게 된 경로를 되돌아보려 할 때 당신이 발견하게 되는 것은 모래알뿐이다.
_ 존 치버, 『존 치버의 일기』
이 이중의 움직임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런데 이 움직임은 대단히 특이하다. 스스로를 거역하고, 자기 자신에 맞서서 끊임없이 자신을 파괴하는 움직임이다. 아니, 항상 스스로에 맞서 싸우는 동시에 자신을 연장하고 지탱하고 영속시키는 움직임이다. 우리는 줄곧 불균형을 향해 자신을 던지고 다시 균형을 잡는다. 불안정한 가운데 안정적이다. 우리는 불균형을 키우고 기획하고는 거기에 정착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이동한다. 이처럼 걷는 방식이 우리의 특징이다.
_ 로제 폴 드루아,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
삶이 까탈을 부릴 적마다 책이 도와준다. 때 묻은 자리를 지르잡아 주고, 곤두선 마음의 끝자락을 눅게 해 준다. 살아가는 일이 상처받는 일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생긴 생채기를 아물려 주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책을 섭렵하고 거기 담긴 지혜자의 지침을 따른다 해도 해결되지 않는 삶의 완강함에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날이 있다. 하기야 책이 인생의 신열을 단방에 떨어뜨리는 딸기향 해열제로 쓰일 수 있다면 그만큼 삶을 모욕하기도 힘을 것이다. 책으로 삶이 바뀐다면 삶은 물론 책까지 욕보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_ 박총, 『읽기의 말들』
+ 필립 로스의 부고를 접했다. 읽으며 보내드려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