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할 때를 알아채는 것은 너무 힘들어

 

1

 

친구가 출근하고 비어 있는 방을 열고 들어가 토스터를 켰다. 식빵 네 쪽이 익는 동안 여행 에세이 몇 쪽을 읽었다. “대학교를 자퇴한 이후로 줄곧 여행과 밥벌이 사이를 오가며 1,000일 이상을 해외에서 떠돌았다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지은이는 지금도 늘 다 때려치우고 떠나고 싶다고. 게다가 이 호기로움이라니.


 

어떤 사람의 이루지 못한 꿈은 다른 사람의 꿈을 이루어준다고 한다삶과 여행을 일치시키고자 한 나의 꿈이 또다른 누군가의 꿈을 완성시켜 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7)

박 로드리고 세희나는 평생 여행하며 살고 싶다

 

아삭거리는 식빵을 씹으며 생각했다. 나는 무엇이 무거워/무서워 이 자리에 목줄 매어 있는가를. 바싹 익은 부분이 맛있었다. 떠나기 위해 버리는 것과 버리기 위해 떠나는 것 사이에 발이 묶여 버리지도 가지도 못하고 나는 바스라지고 있는 것 같다. 바싹 익은 부분은 맛있지만 어쩔 수 없이 부스러기를 남긴다. 이곳에 남으면, 나는 부스러기 같다. 부스러기는 나 같다.



여행을 떠나 가장 서글퍼질 때는 저녁 무렵 공원 벤치에 앉아서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볼 때다그때 거울로 내 얼굴을 비춰 보면 유형지를 떠도는 죄수나 갈 데 없는 노숙자처럼 지치고 비참해 보였다. (...) 그럼에도 나는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다음 여행을 계획했다나는 대체 왜 그렇게 떠나고 싶어 했던 걸까?

한수희우리는 나선으로 걷는다

 

 

2

 

방에 돌아와 차를 끓였다. 찻물이 다는 동안 종아리를 긁었는데 살펴보니 피가 난다. 같은 자리를 계속 긁었던지 이미 한 차례 앉은 딱지가 다시 떨어지고 있었다. 딸깍, 하고 포트 스위치가 내려갔다. 종아리를 오래 내려다보다가 한 번 만져주었다. 말을 걸었다. 미안해. 내가 그간 너무 신경을 못 썼지? 종아리가 대답했다. “종아리가 대답을 하겠냐?”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는 참 빨리, 그리고 예쁘게 우러난다. 한 모금 호로록 들이켜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제는 시원해서 참 달릴 만했는데 오늘은 어떠려나. 에어컨이 상쾌하게 날숨을 내뱉는다. 바나나 하나가 그 바람을 맞으며 거무튀튀해지는 중이다. 달리지 않으면, 나는 바나나 같다. 바나나는 나 같다.



삶은 목적 없이예측할 수 있는 규칙 없이그러나 경쾌하게 흘러간다우연과 기쁨은 사이가 좋다말과 침묵이 그렇듯이혹은 걷기와 절뚝거림처럼걷기살기말하기생각하기는 모두 하나다그러나 그 무엇도 직각이 아니고곧지도 않고고정된 것도 아니다그리고 그러는 편이 낫다우리가 춤추기 때문이다그렇다우리는 춤춘다이 최초의 괴리 때문에계속되는 어긋남 때문에 춤춘다.

로제 폴 드루아걷기철학자의 생각법

 

걷기'도 태도이고 '요리하기'도 태도인 것이다어떤 사람을 말해주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다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어떤 행동을 반복해서생각해서 하다보면 결국 하나의 태도삶에 임하는 태도가 되는 것이다땅을 밟는 것이길을 걸으며 들꽃을 꺾는 것이 좋은 사람은 많이 걸을 것이다많이 걷다 보면 걷는 것은 그가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태도요방법론이 된다자동차는 조금 덜 타고 조금 더 걷는 삶두 다리를 써서 생각하는 삶그가 말한 실수하기신뢰하기실패하기...... 모두 같은 맥락이다성자의 숭고함도인생 선배의 귀띔도바르게 사는 사람의 도덕률도 아니다작업을 하며 살아가는 한 작가의 '태도들'인 것이다실수에 열려 있고믿음을 잃지 않고실패에서 배우는.

박상미나의 사적인 도시


 

3

 

공간이 솔다보니 샤워를 하고 나면 잠깐 사이에 방에 습기가 찬다.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침대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괜히 폼 잡아봤다. 눈 감고 속으로 반야심경도 왰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하는데 속세에서 부른다. “저기요.” 슬며시 눈을 떴더니 복도에서 복스럽게 생긴 시주님께서 반쯤은 웃고 반쯤은 무서워하는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말씀하시지요.” “제가 오늘 처음 들어와서요. 여기 복도에 있는 이 건조대, 주인 있는 건가요?” “(시주님, 주인이라니요. 색즉시공 공즉시색일진대 소유가 다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전 잘 모르겠는데요. 어떤 건 주인이 있고 어떤 건 공용이지요.” “, 그렇구나. 그 작은 선풍기는 어디서 사셨어요?” “(허허, 바람이 있건 없건 흔들리는 것은 오직 시주님의 마음이거늘, 굳이 바람을 사려 하시는구려, 라고 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인터넷이요.” “, 고맙습니다.” “별 말씀을요. (성불하시기를)”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syo는 불교학교 나왔습니다. 옴마니반메훔. 이러고 나니, 나는 궁예 같다. 궁예는 나 같다.

 


천진과 유머를 잃지 않으면 각자가 알맞은 형태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우리가 겪는 삶은 훼손을 통해 훼손될 수 없는 고유 영역이 내재함을 알려 주려 한다그러므로 천진과 유머를 잃어버릴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오늘도 햇빛이 알맞다알맞다는 '최소'의 적정함이 존재한다는 것그러므로 오늘은 심장을 유머러스하게 옮겨 보는 것인간이라는 생물이 사랑을 탄생시키는 최소의 방식.

이원최소의 발견

 

듣기 싫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나는 '독특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이 말은 논리적이지 않다그것은 말하는 사람 입장이지내가 보기엔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나랑 다른 독특한 사람이다누가 차이를 규정하느냐의 문제이지사람은 누구나 개별적이고 독특하다자신을 자명하게 일반보편정상의 범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자신과 다른 타인을 '독특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정희진정희진처럼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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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1 0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01 0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lavis 2018-06-01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진님이 그런 말씀을 들었다니..저도 왕왕 듣고 왕왕 시무륵했었는데 좋네요 저 🐎♥잉블을 아시다니♡더 좋습니다요♥저도 요즘 한국말 책 끊었다가 요요와서 쇼님을 기리던 중이랍니다ㅠㅠㅠㅠㅠㅠㅠ

syo 2018-06-01 18:08   좋아요 1 | URL
한국말 요요를 syo로 해결하려 하시다니 불행한 선택입니다..... 타지에 계시지만 부리 우리 말 버리지 마시고 좋은 독서 하시기를^-^

stella.K 2018-06-01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관심법에 대해 좀 아시겠군요!ㅎㅎㅎㅎ
전 중학교를 불교학교 나왔는데...

저도 왕년에 독특하다는 소리 솔찮니 들었는데
난 그게 듣기가 나쁘지 않았는데...
평범하지 않아서.
받아들이기 나름 아닌가요?ㅋ

syo 2018-06-01 18:10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관심법은 고1 때 필수과목으로 가르쳤지요. 저는 관심법 2등급입니다.

독특하단 소리 저도 좋아했습니다. 정확히 제가 들은 말은 ‘또라이‘였지만, 뭐 그게 그거 아닌가요 ㅎㅎㅎㅎ

stella.K 2018-06-02 16:51   좋아요 1 | URL
헉, 관심법이 필수과목이었어요?
더구나 2등급!
그럼 꽤 높은 등급 아닌가요?
전 몰랐슴다. 이게 등급제가 있는 줄.
언제고 관심법에 대해 페이퍼 좀 올려줘요.
솔직히 전 이름만 들었지 아는 건 없습니다.ㅠ

근데 독특하다는 것과 또라이가 같은 말인가요?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스요님은 어떨지 몰라도 저는 아니라고 박박 우기고 싶군요.
음...제가 좀 모범생꽈였거든요.
그러니 독특하단 말에 환장하는 거죠.
남과 같다는 건 재미없고 앞으로 그 말은 거의 모독에 가까운 말이 될 겁니다.
암, 그렇고 말구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