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요시다 슈이치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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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 몇 마디만 나누고 돌아올 거니까, 이미 정해진 결론만 통보하면 그걸로 끝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라며 현승이 등을 토닥여 주었지만 미래의 큰 눈동자는 금방 정돈되지 않았다. 미래가 물었다. “얼마나 걸릴까?” “왕복 세 시간 잡고, 세 시간 반 정도면 되지 않을까?” 미래는 자기 자신을 잘 알았다. 지금부터의 세 시간 반은 삼 년 육 개월 같은 긴 기다림이 되겠지. 난 그 속에서 끝없이 조바심내고, 불안해하고, 의심할 거고, 시계에서 눈을 떼지 못할 테고, 분침이 예정된 시각을 한 칸만 앞질러도 바닥없이 허물어지고 말겠지. “왜 이렇게 불안해 해.” 현승은 품에 안긴 미래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이런 문제에서, 정해진 결론 같은 건 없어. 몇 마디뿐일 거라고 네가 자신했던 말은 곧 수십, 수백 마디의 길고 뜨거운 말로 끝없이 이어질 거고, 그 말들이 곧 너희의 추억을 헤집어 놓을 거고, 이루지 못한 많은 약속들을 떠올리게 할 거고, 아마 그 사람은 울겠지. 그렇게 되면 정해 놓은 결론 같은 거, 그거 그 눈물에 녹아 정말 먼지처럼 사라질 거잖아. 나한테 오지 않을 거잖아. 미래의 눈이 그렇게 많은 말을 내비치는 동안, 미래의 입은 딱 한 마디만을 보탰다. “, , 여기로 다시 올 거지?” 현승은 고개만 끄덕였다. 미래는 현승의 턱이 자신의 정수리 근처를 두 번 스치는 것을 느꼈다. 한숨 같아 못내 불안하지만 그래도 따뜻해서 끝까지 믿고 싶은, 현승의 날숨이 느껴졌다. 그리고 세 시간 반이 시작되었다.

 

 


2

 

에어컨에서 뿜어져 나온 냉기가 서려 서늘해진 차창에 머리를 대고, 현승은 유진에게 할 말을 이리저리 배치하고 있었다.

 

네가 시간을 좀 갖자고 말했을 때, 난 분명히 이야기 했어. 네가 원한다면 그러겠지만, 돌아오면 내 옆에 네 자리, 없을 수 있다고.’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이었다. 이건 꼭 이야기하고 시작해야겠어.

 

어차피 어떻게든 한 번 어긋난 인연이면, 다시 이어 붙이는 건 어렵다고 생각해. 억지로 봉합하려 해 봤자 금 간 자리는 사라지지 않는 거잖아.’ 이 말은 저쪽에서 먼저 헤어지자고 할 때도 쓸 수 있겠다. 빠뜨리지 말아야지.

 

난 별로 좋은 사람 아니었나 봐. 이제 겨우 한 달 지났는데, 네가 정말 많이 희미해졌어. 그러니까 우리 이렇게 헤어지는 게, 너한테도 잘 된 일이라는 거지, 내 말은.’ , 사실은 사실이니까.

 

이미 난 다른 사람이 생겼어. 지금도 그 사람하고 있다가 여기 온 거고, 너랑 이야기 끝나면 바로 그 사람한테 갈 거야. 그러니까 이제, 우리한테는 어떤 가능성도 없는 거야.’ 이 말은 하지 말까? 너무 나쁜 놈 같아 보이는데. , 모르지. 저쪽에서도 비슷한 말을 할지도 모르는 건데. 일단 넣어 둬.

 

말은 풍성했지만 대체로 식상했다. 현승은 말의 앞으로 말을, 말의 뒤로 말을 옮겨 붙여가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참 식상한 사랑이었던 거지. 별 거 없는 16개월이었던 거지. 이렇게 끝내는 게, 맞는 거지. 차체가 흔들릴 때마다 창에 기댄 머리도 함께 떨렸다. 그 진동에 기대어, 현승은 쉼 없이 무언가를 털어내고 있었다. 애정의 잔해, 미련, 좋았던 추억, 좋았을지도 모를 두 사람의 미래, 그리고 죄책감. 죄책감.

 


 

3

 

죄책감은 지금 어딘가에서 조용히 현승을 기다리고 있을 또 다른 여자의 이름에 들러붙은 감정이었다. 유진으로부터 한 달만 시간을 가져보자고 통보받은 바로 그날, 바로 그 순간까지도 현승은 아무런 낌새도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시끄럽게 분노했다. 분노로 부끄러움을 덮어 보려 큰 소리를 쳤다. 나는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가 헤어졌다고 생각할 거라고 윽박질렀다. 유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조용히 일어나 전철에 올라탔다. 전철의 뒤꽁무니가 희미해져 가는 플랫폼에서 현승은 주먹을 쥔 채 오래 서 있었다.

 

그날 밤 현승은 미래를 불러냈다. 미래를 알게 된 지는 채 1년도 지나지 않았고, 같은 인터넷 동호회 회원이었던 그들은 그날 전까지는 실제로 만난 적이 단 한번밖에 없는 희미한 관계일 뿐이었다. 그런 미래를 불러 술을 마신 것에 의도가 있었음을 현승은 인정했다. 일주일에 열 번쯤 술을 마시는 사내놈들이 현승의 주변에 득시글거렸으므로 그저 술을 같이 마실 사람이 필요한 것뿐이었다면 현승은 그 조용하고 아늑한 술집으로 굳이 미래를 부르진 않았을 것이다. 테이블 위에 향초가 있고,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에 알록달록한 비즈 커튼이 둘러져 있는 술집이었다. 아른거리는 촛불이 두 사람의 몸과 마음에 분위기 있는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그림자를 표정에 두르고 현승은 실연당한 슬픈 남자 연기를 시도했다. 일부러 슬프게 웃었고, 가끔 먼 곳을 응시하는 것처럼 초점 없는 시선을 촛불에 던져 넣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진짜 눈물이 났을 때, 미래는 놀랐고 현승은 더 크게 놀랐다. 아니, 슬픈 척 하는 건데 왜 진짜 슬프고 지랄이지, 우는 척만 하면 되는데 왜 진짜 울고 지랄이지. 울음은 참으려 애를 쓸수록 자꾸만 덩치가 커졌다. 훌쩍거리다 이내 꺽꺽 큰 울음이 몰아쳤고 현승은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 펑펑 울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다 망하는 건데. 에이 씨. 현승은 울다 마셨고, 마시다 울었다. 미래는 그 모습을 담담히 지켜보며 조용히 제 술잔만 비웠다.

 

그리고 현승의 잠을 깨운 것은 미래의 입술이었다. 현승의 눈에 들어온 것은 미래의 방 천장이었다. 좁은 미래의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것은 현승이었고, 미래는 침대 아래에 앉아 상체만 현승의 상체 위로 포개고 있었다. 현승은 생각했다. 미래에게 기대다시피 하여 걸어 온 골목길의 풍경이 단편적으로 떠올랐다. 미래가 라면을 끓여줬던 것 같다. “아니, ......그게.” 침대에 누운 채 현승이 머리를 긁적였다. “잘 잤어요?” 미래가 현승의 눈앞에 가까이 와 있었다. “, , 잘 자긴 했는데, 이게......” 미래가 웃었다. “라면 먹은 거 기억나요?” “.” “내가 현승 씨한테 라면 먹고 가라고 했었어요. 그게 필요한 것 같아서. 그래서 나 부른 것 같아서. 근데, 현승 씨 정말 우리 집에 오자마자 식탁 앞에 앉더라고요.” “.....” “거기 앉아서, 라면 해준다더니 뭐하고 있냐는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라구요.” “, ......” “그래서 라면을 끓였어요. 라면 먹고 가랬더니, 정말 라면을 먹더라구요.” “?” “현승 씨, 그 영화 안 봤어요?” “? 무슨 영화요?” “......아뇨. 현승 씨가 라면을 되게 맛있게 먹었어요.” “, . 맛있었던 것 같아요. 솔직히 기억은 잘 안 나지만.” “, 맛있었나 봐요. 정말 맛있게 먹었어요. 내가 끓인 라면 제일 맛있게 먹은 사람이에요, 현승 씨가.” “......” “그래서 좋았어요. 라면을 맛있게 먹어서요.” “......” “현승 씨도, 내가 좋았으면 좋겠어요.”

 

 

 

4

 

그리고 며칠이었다. 미래의 바람대로 현승 역시 미래를 좋아하게 된 것은. 유진이 던져놓고 간 짧은 시간 안에, 현승은 미래에게 사랑을 말했다. 미래는 울었다. “, 한 달 안에 현승 씨가 그 말을 해 주지 않으면 어떡하나 너무 무서웠어.” 현승이 말했다. “솔직히, 지금 이 순간 유진이보다 널 더 사랑한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어. 오래 만난 사람이고,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정말 조금만 더 있으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 하나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넌 그만큼 좋은 사람이고, 이미 결정된 일은 결정된 일이니까.” 믿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기에 미래는 믿었다. 그렇지만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제보다 오늘 더 행복한 만큼 오늘보다 내일 더 불안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불안이 함께 눈을 뜬다. 그리고 현승이 와서 그 하루를 행복으로 바꾸어 놓고 간다. 오늘도 무사하고 행복했어. 하루를 마무리하는 주문처럼 되뇌며 잠을 청한다. 잠들기 전이 가장 행복했다. 행복과 불안 사이의 시공간에 쏘아 놓은 살처럼 빠르게 달력은 넘어갔다. 그리고 지금, 드디어 현승이 유진을 만나러 갔다. 한 달을 채울 땐 그렇게 미친 듯 달리던 시간이 멈춰선 것처럼 느리게 가는 좁은 방 안에서, 미래는 주문을 외고 있었다. 오늘도 무사하고 행복했어. 오늘도 무사하고 행복했어. 제발. 한 달보다 더 긴 세 시간 반을 그저 무사하고 행복하기만을 바라면서 미래는 기다렸다.

 

 

 

5

 

둘이 자주 가던 공원, 자주 시간을 보내던 작은 벤치에 앉아 유진은 현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승이 오는 방향을 미리 알고 바라보고 있었다. 현승은 언제나 약속 시간에 5분을 늦는 남자였고 유진은 그런 현승을 10분 기다리는 여자였다. 현승이 나타나기 전 10분 동안, 버스 안의 현승처럼 유진 역시 말을 고르고 있었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올 법한 낯간지러운 대사가 몇몇 떠올랐지만 유진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떤 말도 잘 할 자신이 없었다. 기쁨이 제가 먼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어차피 어떤 말보다 표정으로, 몸짓으로 더 많은 말을 하게 될 테지. 유진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현승은 한 달 만에 보는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한 달 동안 더 많이 사랑하게 된 사람이었다. 처음 현승과 단둘이 만났던 그날보다, 유진은 더 많이 떨고 더 많이 설레고 있었다.

 

작은 화단을 꺾어 돌자 현승의 눈에 벤치에 앉은 유진이 보였다. 유진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유진이 벌떡 일어나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미소를 마주한 순간, 현승은 준비해 온 첫 번째 말을 버렸다. 저게 내가 사랑하던 미소였어. 한 번 보겠다고 별의 별 애교를 다 부리던 그 미소였어. 저 미소를 앞에 놓고, 이제 네 자리가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현승은 쭈뼛쭈뼛 다가가 벤치에 유진의 옆에 앉았다. 유진이 현승의 손을 꼭 잡았다. “오빠, 잘 지냈어?” “, , 그렇지.” “뭐야, 잘 지냈어? 왜 잘 지냈어. 난 오빠 보고 싶어서 엄청 힘들었는데.” 현승은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잘 지냈냐면 말이지...... “오빠, 사실 나, 오빠한테 엄청 당당하게 한 달이라 그래놓고, 사실 일주일 만에 두 손 들었었다? 단축번호만 누르면 바로 오빠 목소리 들을 수 있는 거잖아. 하루에도 몇 번씩 1에 손가락을 올렸다 내렸다...... 진짜 겨우 겨우 한 달 참아낸 거야. 자존심 지키겠다고.” “그랬어?” “, 근데 지금 오빠 보니까, 왜 그랬나 싶어. 그냥 내가 잘못했다고, 지금 너무 보고 싶다고 말하면 됐던 건데. 보니까 이렇게 좋은데. 자존심, 그게 뭐라고.” 부끄러워 살짝 붉힌 뺨으로 또 한 번 미소가 앉았다. 그리고 현승은 두 번째 말을 버렸다. 과연 우리가 어긋난 인연이었던 걸까? 우리 사이에 금이 갔다고, 그냥 그렇다고 내가 오해했을 뿐일지도 몰라. 싫어서 안 본 것도 아니고, 그동안 이렇게 내가 그리웠다잖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웃으며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건 아닐까? 수많은 이야기가 쉼 없이 오갔다. 유진과 현승은 떨어져 지낸 한 달 같은 건 애초에 없었던 사람들처럼, 어제 만나 속삭이던 사랑의 다음 이야기를 오늘 이어나가는 사람들처럼 웃고 떠들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는데, 유진이 흘끗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 벌써 30분이나 지났네. 이것 봐, 우리 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하네.”

 

30! 그때서야 현승은 누군가가 떠올랐다. 지금 이 순간 아무렇지도 않게 잊어버린, 혹은 그런 적이 없었다고 믿고 싶은, 바로 그 한 달이라는 시간을 누구와 함께 보냈는지 떠올랐다. 그 사람에게 무슨 약속을 주고 이 자리에 나왔는지가 겨우 떠올랐다. 그리고 그제야, 현승은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깨달았다.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될 것을 하찮게 여겼고, 쉽게 생각해선 안 될 것을 쉽게 생각했음을 알았다. 그 오만과 방황의 대가로, 이제 현승은 전부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이에게는 커다란 잘못을 했기에 돌아갈 수 없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님을 확실히 깨달았으므로 다른 이에게도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망쳤어. 내가, 모든 것을 망쳤어. 현승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챈 유진의 눈에 불안이 감돌기 시작했다. 유진이 힘주어 말했다. “오빠, 우리, 오늘 같이 있자. 나 많이 생각했었어. 오빠가 같이 있자고 할 때마다 너무 매몰차게 거절했었지. 나도 그런 맘이 아닌 건 아니었는데, 너무 쉬운 여자로 보일까 봐 그랬던 것 같아. 또 그놈의 자존심이었지 뭐. 이제 그런 거 안 하려구. 오빠가 같이 있자 할 때, 나도 같이 있고 싶으면 그냥 같이 있을래. 앞으로 그럴래.” 유진의 표정에 어린 그 감정의 정체를 현승은 정확히 짚어낼 수는 없었지만,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몇 시간 전에 보고 나온 미래의 표정이었다. 지난 한달 내내 미래가 언뜻언뜻 비추었던 감정의 조각이었다. 지금이 바로, 세 번째 말을 할 때라고, 내가 얼마나 나쁜 놈인지, 그 동안 네가 얼마나 희미해졌는지, 그래서 우리가 지금 헤어지는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를 말해야 하는 순간이라고, 현승은 생각했다. 그러나 벌어진 현승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온통 울음뿐이었다. 미안함, 자책, 고마움, 한없이 거지같은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 너무도 명백히 남아 있는 사랑,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 이 순간을 영원히 지속하고 싶은 마음, 그런 감정들이 현승의 안에서 짓뭉개져 울음으로 터져 나왔다.

 

그렇게 두 사람은 벤치에서 한참을 울었다. 현승은 짐승처럼 크게 울었고, 유진은 아이처럼 작게 울었다. 작은 울음이 먼저 여유를 찾았다. 말했다. “, 사실 불안했어. 오빠가 그랬잖아. 한 달 지나면 나 안 받아줄 수도 있다고. 그때, 오빠가 말은 그렇게 해도 그런 사람이 아닐 거라고 믿었으니까 꾹 참고 돌아섰지만, 내내 불안했어. 한 달 동안 내가 오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만 계속 재확인하면서, 점점 더 많이 좋아지면서, 자꾸 불안했어. 그래서 좀 필사적이었던 것 같아. 오늘 만나서 오빠가 무슨 말을 할지는 모르지만, 내가 듣기 싫은 말, 들어선 안 될 말이 나온다면, 어떻게든 그 말을 틀어막겠다고. 오빠가 말하기 전에, 내 마음 다 말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거 다 해서 덮어버리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왔어. 그랬는데.....” 조금씩 잦아드는 울음 속에서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가린 채, 현승은 생각했다. 지금이 네 번째 말을, 네 번째 말이라도 해야 할 때라고. 말 해. 말 해. 다른 사람 생겼다고, 빨리 말 해. 제발, 너도 인간이라면, 제발 그 말이라도 해. “그랬는데, 정말 그렇게 됐네. 정말. 이렇게 됐네. 오빠. 정말, 내 자리가 없어졌어?” 말 해. “다른 사람 생겼어?” 말하라고. “이제, 나 사랑하지 않게 됐어?” 제발...... 현승은 다시 무너져 내렸다. 울음이 그쳐가던 벤치는 다시 축축히 젖었고, 현승은 울부짖느라 끝내 말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참말도, 이젠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짓말도.

 

 

 

6

 

돌아오는 버스에서 현승은 물기 없는 표정으로 밤의 서울을 내다보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울었는지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에게 상처를 주었는지, 누구를 불안하게 했는지, 누구로부터 멀어지고 누구에게 가까워지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하지 않았다. 눈은 부었고 목은 쉬었다. 잃어버린 사랑보다, 이래저래 잃어버린 물들 때문에 목이 타고 몸에 힘이 없었다. 소진된 인간은 감정에 소비할 여력이 없으므로 몸뚱이가 그를 지배했다. 버스 맨 뒷자리에서 현승은 휘청거리며 밤을 되짚어 어딘가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몸이 기억하는 곳에서 내릴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정류장에 내린 다음 누구의 집으로 향할지, 현승은 알지 못했다. 알지 못하고, 현승은 내렸다. 그리고 현승의 눈앞에, 정류장의 작은 의자에 미래가 작게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눈을 맞추었다. 둘의 눈이 닮아 있었다.

 

현승이 미래의 옆에 앉았다. “왜 나왔어, 더운데. 집에 있지.” 도로 쪽으로 시선을 두고 현승이 말했다. 같은 곳을 보며 미래가 대답했다. “나도 잘 모르겠어. 현승 씨가 올까봐 나온 건지, 안 올까봐 나온 건지.” “그랬어?” “. 그랬어. 그래서 많이 생각했어. 현승 씨가 나한테 올지 안 올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내가 현승 씨를 기다린다면, 나는 어디까지 마중을 나가도 되는 걸까 하고. 우리 집이야 확실히 내가 당신을 기다려도 되는 곳이겠지만, 우리 처음 그날 같이 걸었던 골목은 어떨까. 그날 그 술집은? 내가 거기까지 가서 현승 씨를 기다려도 되는 걸까? 당신 사는 곳까지는 안 될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 그래서 좀 마음이 아프기도 했어.” “그랬구나.” “. 그랬어. 그렇지만 용기를 냈어. 여기 이 정류장까지는 괜찮지 않을까 하고. 만약 현승 씨가 오늘 돌아온다면 여기서 내릴 거고, 내려서 우리 집으로 올지 당신 집으로 갈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여기서 내릴 거니까.” “내가 안 왔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그러니까. 내가 어쩌려고 이랬을까.” 미래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현승 씨. 혹시 내가..... 내가 주제넘게 너무 큰 용기를 낸 걸까?” 현승은 고개를 돌려 미래를 보았다. 미래는 계속 도로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승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미래는 끝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미래의 눈이 무거워졌다. 현승은 미래의 눈에 무겁게 차오르는 물을 보았다. 그 물이 다시 현승의 마음을 헤집고, 더는 남아 있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물들을 찾아내 퍼 올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밤 속에 오래 앉아 있었다. 많은 버스가 그들 앞에 멈춰 문을 열어보였지만, 끝내 그들을 태우지 못하고 조용히 정류장을 떠났다.

 


 

 "보고 싶어."

 이번에는 진지하게 말했다수화기 너머에서 유리코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지금 갈게."

 그렇게 말했다대답이 없다언제나 그랬다헤어진 뒤에는 전화를 해도보고 싶다고 말해도유리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싱고를 받아들여 주었다기뻐하지도 않고 불평하지도 않고.

싱고는 택시를 타고 유리코의 아파트로 갔다.

 평소 같으면 직접 아파트를 찾아갔을 테지만이날 밤에는 한참 앞에서 차에서 내렸다찾아가면 유리코가 받아줄 거란 자신은 있었지만지금까지처럼 무신경함을 가장하고 받아들여 달라고 할 자신이 없었다.

산책길의 작은 광장에 들어가 낙서투성이인 공중전화로 유리코에게 전화를 했다유리코는 바로 받았다.

 "아무래도 너를 좋아해."

 짦은 침묵 뒤에 그 말만 했다마음 한편으로 유리코가 기뻐해 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난 말이지이제 싱고를좋아하지 않아."

 들려온 것은 그런 말이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지금까지 연락을 하면 만나 주었잖아좋아하지 않는다면 어째서 지금까지 만나 준 거야.

 금방이라도 그런 말이 입에서 튀어나올 것 같았다그러나 애써 삼키고 "......알아"라고만 했다. "우리이미 헤어졌다는 거."

 유리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태연히 만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산책길의 작은 광장에 벤치가 있었다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어깨를 떨며 앉아 있었다. (5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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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9 1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9 1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8-05-29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이 책을 읽으면 이 리뷰를 이해할 수 있는거지요? 리뷰의 행간 말입니다.

syo 2018-05-29 10:52   좋아요 0 | URL
사실 리뷰도 아니고 행간 없어요 ㅎㅎㅎ 그냥 요런 식의 짧은 이야기들이 몇 개 들어있는 책이에요.

마지막에 인용해놓은 구절을 보고 생각나서 끼적여본 건데 혼란을 야기하고 말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