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의 네 얼굴
퀜틴 스키너 지음 / 강정인, 김현아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
나, 철학이라는 걸 한 번 공부해보려고 해. 10년지기 친구에게 syo가 말했다. 물론 전자과를 관두고 철학과로 옮기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알 건 다 아는 스물한 살이었다. 친구가 대답했다. 그래,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자기만의 철학이 있어야 해. 그 옆에 있던 7년지기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인생철학이 확고한 사람이 참 멋있더라고. syo는 우리의 대화가 삑사리났음을 내색하고 싶지 않아서 얼른 앞에 놓인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젠장, 잔이 비어 있었다. 야, 이 양반들아, 그 철학 말고. 친구들은 이 새끼가 결국 취하고 말았군, 하는 표정으로 syo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철학, 철학 말야, 플라톤, 응? 아리스토텔레스, 응? 알겠어? 아, 그 철학? 플라톤 그거, 아리스...토...그거? 당연히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친구가 대답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근데 그걸 왜?
syo가 철학에 관심을 두기 전 살아왔던 인생은 저런 양상이었다. 오로지 미분적분확률통계수열급수행렬벡터로 끈적거리던 이과의 길. 그 길을 걷는 자들에게 철학이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으며, 오히려 알지 말아야 할 것에 가까웠다.『수학의 정석』은 있었지만 딱 한 글자 다른『철학의 정석』은 없었으므로, 학생들은, 특히 이과생들은 철학에 관심을 둘 이유도 시간도 없었다. 그 삭막하고 기계적인 교육과정을 뚫고 공대에 입학한 syo 역시, 친구들에 비해 나을 게 1도 없었다. 철학, 철학 말야, 플라톤, 응? 아리스토텔레스, 응? 이 다음에 몇 명 더 갖다 붙이고 싶었는데 아는 이름이 없었던 것이다. 하이....하이 뭐라는 애 있었는데, 하이마트는 아니고,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성의 원리고, 하이.....그레? 하아. 솔직히 그때까지 아리스토텔레스도 "아리스토 텔레스"인줄 알았다. 텔레스 집안의 애교많은 막내 아리스토.
그런 syo가 철학책이라는 것을 난생 처음 읽어보겠다며 읽을 책을 좀 골라달라고 부탁했을 때, 어린 날 syo의 한없이 순수했을 눈동자를 보고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없이 버트런드 러셀의『서양철학사』를 권했던 그 몹쓸 사이코패스의 앞길에 빅똥이 있기를! 그 작자 덕분에 철학은 플라톤에서 시작해야만 되는 줄 알고, 플라톤만 보다가 마침내는 학을 떼고 눈물로 베갯잇을 적시던 슬픈 젊은날이 아른거린다. 젠장, 플라톤 다 주우우욱가라 그래!
그로부터 10년, 아직도 철학의 길 초입에서 관광안내도나 기웃거리고 있는 형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확실히 알게 된 것은, 철학은 플라톤으로부터 시작했고, 읽다보면 어쩐지 칭송을 받든 엿을 먹든,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이 자꾸 튀어나오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작자들 책부터 읽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어떤 분야를 공부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 그 공부의 끝에 밥벌이가 있는 심각한 상황이 아니라 그저 syo처럼 쫄레쫄레 나타나 몇 권 읽고 또 다른 곳으로 쫄레쫄레 가는 식으로 하는 공부라면, 그 분야의 발원지에 시작점을 찍고 물길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는 방법을 취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그 버릇을 고치기가 쉽지는 않았는지, 작년 여름쯤 정치학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어디선가 현대 정치학의 시작점으로 마키아벨리를 짚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혹해서 읽었다. 물론 그 동네에서도 제대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결국 깡패 지존 플라톤과 다시 맞닥뜨릴 수밖에는 없겠지만, 이제 그 이데아 덕후 영감은 정말이지 꼴도 보기 싫었다. 게다가 마키아벨리는 프사부터가 어쩐지 쉽게 곁을 내줄 것처럼 다정하게 생겼다. 아이고, 호락호락할 것 같은 저 미소 좀 보라지. 그리하여 한 계절, 마키아벨리를 읽었다. 역시 syo가 늘상 그렇듯이 입문서 위주로 쓸데 없이 중복으로. 그 결과 두 가지를 알게 되었는데, 시중에 도는 마키아벨리 책의 절반이『군주론』한 권을 다루고 있는 지극히 편향된 현실과, 그런 의미에서 진짜 마키아벨리의 사상 전반을 아우르는 입문서 중 맨 처음 볼만한 책은 바로 이『마키아벨리의 네 얼굴』이라는 것.
우리가 마키아벨리를 잔혹한 사이코패스나, 하다 못해 지옥에서 유치원을 다닌 사람 쯤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오롯이『군주론』때문인데, 실제 마키아벨리는 악당보다는 입신양명에 목숨을 건 인간 쪽에 가까워 보인다. 전체 저작을 통해 보면 마키아벨리는 골수 공화주의자고, 아무래도 그 점이 마키아벨리를 현대 정치학 공부의 시작점으로 추천하는 사람이 있는 이유인 것 같다.『마키아벨리의 네 얼굴』은 그의 저작을 크게 네 덩어리로 나누어 네 명의 마키아벨리를 독자 앞에 세워 놓는다. 『서한집』과『외교문서집』의 외교관,『군주론』을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군주의 졸개, 그와 완전 상반되는『로마사논고』의 공화주의자, 그리고 마지막으로『피렌체사』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역사가로서의 마키아벨리.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우리가 잘 모르는 3/4의 마키아벨리를 채워넣고 싶은 생각이 들 겁니다. 들더라구요.
자, 그렇다면 지금부터.
전반적인 기본서
1. 'How To Read' 가 등장하면 항상 하는 말이지만, 이 시리즈는 절대 쉽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래도 해석이 전형적이지만은 않고, 깊이도 있다는 장점이 있다.
2. 세창의『마키아벨리 읽기』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이 시리즈의 다른 책을 기준으로 판단하건데, 일독의 가치는 보장받았을 거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무방한지 아닌지 읽어보지도 않고 이렇게 쓰면 안된다는 걸 알지만, 요즘 읽을 책이 너무 많다.....
3. 하룻밤의 지식여행『마키아벨리』는 syo가 읽은 이 시리즈의 책 가운데 정말 알차다는 생각이 든 유일한 책이다. 삽화도 어쩐지 포스트모더니즘 양식이다.
군주론
1. 강정인, 김경희가 옮긴『군주론』이 가장 널리 읽히는 듯하다. syo도 꼬꼬마 시절 처음 읽었던 군주론이 이 책이었다. 그렇다는 말은 무난하다는 이야기겠다.
2. 박상훈이 옮긴『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은 최장집 선생님의 빼어난 서문이 달려 있다는 것으로 가치를 더했다. 솔직히 말해서, 최장집 선생님이 쓴 글만 꼼꼼히 읽고 본문은 설렁설렁 읽었다. 그렇다고 평을 못할 일도 아닌 것이, 지금 시점에서 기억이 잘 안나는 건 서문도 본문도 마찬가지라.....
3. 세 번째『군주론』을 옮긴 곽차섭은 그 이름만으로 책에 무게를 싣기에 충분한 마키아벨리 연구자다. 이탈리아어 원문 대역에다가, 비록 가격 때문에 욕을 먹지만 함량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길 출판사의 코기토 총서로 나왔다는 점도 신뢰를 드높인다.
4. 신동준이 옮긴『마키아벨리 군주론』은 표지에서부터 스스로 완역 결정판임을 자부하고 있다. 신동준 선생님의 책이 다 그렇듯, 어쩐지 넘치는 패기를 읽을 수 있다. 군주에게 간택받고자 저술한 군주론의 특성상 다른 역자들은 거진 다 존댓말로 옮겼지만 신동준 선생님만은 반말로 넘치는 호연지기를 보여주신다. syo가 가지고 있는 책이다.
5. 이남석이 옮긴『군주론』은 그야말로 발군이다. 45500원에 달하는 가격에, 단연 압도적인 880페이지는 무엇을 말하는가. 미리보기만 열어봐도 정말 알차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해를 돕기 위한 구조도 하며, 지도 하며, 정말 대단하다는 느낌이다. 실제로 군주론은 읽다보면 600년도 더 전의 인물들이나 사건들을 읽는 이가 당연히 안다는 듯 설명하는 부분이 많은데, 대체로 주석이 달려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쉽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이 책은 그런 것 없다. 아, 정말 갖고 싶은 책이다. 핵비싸서 그렇지.....
6. 마지막으로 가장 최근 출간된 이종인 번역의『군주론 / 만드라골라 /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를 꼽아본다. 아직 읽어보지도 않았지만 추천에 올리는 이유로, 우선 다른 데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마키아벨리의 희곡 '만드라골라'와 영웅담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를 덤으로 볼 수 있다는 점도 들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역자다. 번역자 이종인이라면 더 말이 필요한가? 다만 분량으로 미루어보면 해제가 듬직하지는 않을 것 같다.
군주론 입문서 / 개설서
1.『마키아벨리를 위한 변명 군주론』은 청소년이 읽는 수준의 평이한 입문서다. 쉽다는 것 이외에 특별한 장점은 엿보이지 않는다.
2.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는 입문서로는 적당하지 않지만, 하나의 저작을 다른 다양한 사상가의 눈을 빌려 새롭게 풀어내는 컨셉의 훌륭한 책들의 모임이다.『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에도 스피노자, 마르크스, 그람시, 알튀세르, 들뢰즈를 만날 수 있는데, 이렇게 다른 누군가 읽고 공부해 준 책은 내용 자체는 물론,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를 알려준다는 점에서도 참 소중하다.
3.『그람시의 군주론』은 정확히 말하면 그람시 책에 가깝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사회주의의 다음 스텝을 위해 마키아벨리를 연구했음은 알려진 사실이다. 저자 김종법 선생님은 그람시에 관한 책을 간간히 출간하여 한국에서 그람시의 명맥을 가늘게 이어가고 있다. 그람시 없이 마키아벨리만 가지고 읽을 책은 아니겠다.
4. 이 카테고리에서 한 권을 추천한다면 단연『지배와 비지배』겠다. 더 말이 필요가 없다. 심지어 이 책 있으면 정작『군주론』을 안 사도 되겠다는 느낌까지 받았다. 배를 집어삼킨 배꼽이다.
로마사논고
『로마사 논고』(로마사론, 리비우스 강연 등등으로 불린다)만 되어도 번역된 종수가 확 떨어진다. 심지어『피렌체사』는 없는 건지 찾질 못하는 건지 하여간 그렇다. 이 저작 역시『군주론』처럼 강정인 번역이 시기적으로 선점했다. 그런데 그것만 읽지를 못해서 할 말이 없다. 동서문화사 책은 가성비가 있지만, 그 가성비 탓에 어쩐지 이미지가 좋지 않다. 시리즈 안에 발번역으로 이름 드높은 책이 몇 권 있어서 함부로 권했다가 욕 먹는다. 그런 핑계를 대며 읽어보지도 않았지만, 일단 있다는 것이라도 알리기 위해 이렇게 리스트에 올린다. 읽어 보신 분의 조언을 구합니다.
이종인 번역의『로마사론』은 보유하고 있고, 박홍규 선생님의『왜 다시 마키아벨리인가』는 사실 번역이 아니라 박홍규 선생님의 색깔이 듬뿍듬뿍 들어있는 '저작'이다. 결국 syo는 이 저작에 와서는『로마사론』한 권만 읽은 것인데, 그래도 호기롭게 한 번 추천해 본다.
마키아벨리의 진짜 가치는 역시 이 책에서 드러난다. 이걸 읽어야 마키아벨리 형아가 적그리스도의 졸개가 아니었으며, 저 순박하고 호구로운 미소 역시 가식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권 합쳐 1000페이지 가량 되는 이 책을 정복한다면, 웃으며 마키아벨리와 석별의 정을 나눌 수 있겠다. syo 역시 과녁에 매달아 놓고 긴 세월 이리저리 조준만 하고 있지 쉽사리 화살을 날리지 못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