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전야

 

 

1

 

2020년의 1/12이 끝난 지점에 서서 올해 내가 하고자 생각했던 일의 1/12이 이루어졌는지를 체크해 보면 숙연해진다. 읽는 것마다 영 재미가 없고 쓴 것들은 아무 맛도 없다. 운동을 하겠다더니 1달 동안 해치운 푸시업을 합쳐도 1,000개가 되지 않는다. 내일부터 당장 출근인데 머릿속에 든 건 하나도 없어서 구민 여러분께 송구스럽다. 엄마는 이런저런 이유로 서너 달 항암치료를 미뤘다가 최근에 시작했는데, 보니까 이미 재발된 상태였다고. 이번에는 수술도 불가하여 그냥 항암으로 눌러야 한다.

 

귤이나 까먹고 있다.

 

 

 

2



플라톤을 보고 있으면 가끔 자기 자신과 체스를 두는 사람이 떠오른다그것을 한번 해본 사람은 검은 말이 항상 게임에서 이긴다는 것을 안다흰 말이 게임을 시작하고 계획을 짜고 전략을 구상하지만검은 말은 그 모든 것을 알기 때문에 늘 흰 말보다 조금 더 똑똑하다플라톤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다그는 자신의 모든 가정이나 이론을 상대로 항상 좀 더 똑똑한 반박이 떠오른다그로써 플라톤의 사유는 복잡하게 꼬인다.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세상을 알라

 

플라톤을 읽고 있다 보면 재밌는 것은, 뜻밖에 소크라테스가 꿀릴 때가 많다는 점이다. 그가 현란한 말솜씨로 어떻게든 위기를 넘겨보려 허둥지둥한다는 느낌을 주는 대목이 꽤 등장하고, 심지어 그 반 대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아주 대놓고 아 진짜 그건 정말 모르겠는데요, 헤헤- 이러기도 한다. 그런 대목을 읽노라면 참 플라톤이라는 인물의 심리가 너무 궁금해진다. 플라톤의 대화편이 진짜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언어를 그대로 옮겨 담은 책들이라고 믿는 순진한 독자는 멸종했다.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자신의 사상을 피력하는 것이라 보면 괜찮겠지 싶은데, 소크라테스가 궁지에 몰리는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진짜 그런 게 맞나 싶기도 하다. 대화 속에서 소크라테스의 논리를 박살내는 인물의 대사 역시 플라톤이 직접 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 머리통에 박을 내리치는 꼴 비슷한데, 처음 몇 번은 이것 참 웃기구나 싶다가도 계속 보다 보면 이것 참 무서운 옛날 양반이로세 하며 고개를 젓게 되기도 한다.

 

 

 

3

 


1월에 읽기로 했던 여성주의 독서 모임 지정 도서를 읽지 못했다. 심지어 이 책은 syo가 읽자고 권했던 책이라 멤버들께 송구한 마음이다. 2월이 시작되었으니 2월의 책을 읽어야 한다. 1월의 책도 읽으면서 2월의 책도 같이 읽을 생각인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래저래 마음의 여유가 없다. 지금 생각하는 건 그냥, 출근 첫 주는 15털림 이하로 털리고 버텨내는 것, 딱 그거 하나 뿐이다.

 

 

 

4



사람들은 사회적 지지 혹은 구조에 의존한다생산적인 인간관계도사회적 원조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영구적인 단점을 안고 살게 된다반면에 고독에 대응하고 사회적으로 온전한 존재가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생존 가능성을 높이고 자신의 유전자를 보존할 커다란 기회를 얻는다이렇게 보면 고독감은 사회적 고립으로부터 야기될 가능성이 있되사람마다 허기를 다르게 느끼듯이 그 양상은 천차만별로 나타난다.

마즈다 아들리도시에 산다는 것에 대하여

 

syo는 스스로를 발랄한 사람이라거나 새로운 사람들과 능숙하게 대화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디서나 어색한 사람은 아니라고 철석같이 믿고 살았다. 그 믿음이 틀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젊은이들은 쾌활하고, 거침없고, 처음 보는 연장자(상급자)들과도 부드럽게 대화를 이어갈 줄 안다. 놀랐다. 새로운 채널을 만들지 않고 산 지가, 대화를 향한 첫 번째 삽을 뜨는 법을 놓치고 산 지가 오래되어서, 나는 뭔가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것을 잃어버려 놓고는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여기까지 와버린 것은 아닐까, 불안하다.

 

 

 

5



형이상학도 신학도 혹은 자연과학조차도 인간의 언어와 사고에는 결코 이르지 않는 실재를 인간의 외부에 설정하고종종 현실과 이념이곳과 저편주체와 객체를 이분하는 세계관에 의해서 인간적 현실을 국한하고세계와 인간을 분단해 왔다그러나 그렇지 않고우리가 인지하고 경험하는 것은 모두 우리의 언어와 사고 속에서 생기(生起)하고이것에 의해서 제작되고영향받고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국가와 경제 같은 공공성의 차원에서 생겨나고 있는 사태또 우리가 자연으로 간주하고 있는 사상조차 우리의 관점·사고·언어의 바깥에는 있을 수 없다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세계에 끊임없이 관계하고 있고세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우노 구니이치들뢰즈유동의 철학

 

라고 말하지 못했다. 아이들이 철학책을 읽고 있는 나를 보고 경악했을 때, 형 이런 책을 읽으면 좋은 게 있냐고 물었을 때, 이런 격조 있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 말하지 못함이 어쩌면 철학책 읽기가 무용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어서 들뢰즈한테 다 미안할 지경이었다.

 

언어의 경계 바깥에서 사고하는 인간은 없다. 자신의 언어를 확장하면서 사고의 영역을 밀고 나갈 뿐이다. 쓰고 말하지 못하는 생각은 생각이 아니라 자아의 파편일 뿐이다. 내가 표현을 못 해서 그렇지 사실 아는 건 훨씬 많다, 이 책에 있는 말 이거 내가 평소에 종종 생각하던 것들이다, 이런 인식은 도리어 성장을 가로막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내가 철학책의 이점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면, 나는 그걸 모르는 것이고, 더 심하게 말해서 내게 그건 없는 것이다. 2019년의 400권은 어디로 갔나.

 

 

--- 읽은 ---



19. 실용커피서적 / 조원진 : 113 ~ 226

: 약하다. 어쩐지 자기계발서 계통의 냄새가 난다. ‘실용도 이유를 알 수 없다.

 



20. 세상을 알라 /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 489 ~ 671

: 고되다. 1독으로 뭐 어떻게 해보겠다는 욕심을 부린 건 아니었지만 재독할 생각을 하니 아찔하다.

: 그래도 딱딱한 지식의 나열도 아니고, 함량 자체가 부족하지도 않다. 제일 괜찮은 결과는 이 책의 내용을 몽땅 머릿속에 집어넣는 게 아니라, 앞으로 머릿속에 집어넣을 개념들을 이 책처럼 풀어낼 줄 알게 되는 것이겠다.


 


21.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김초엽 : ~ 341

: 리뷰 대회 참가하려고 급하게 읽었는데, 막상 튀어나온 것은 리뷰도 아닌 희한한 2차 창작물이었다.

: 처음 이 책을 읽었던 때는 워낙 괜찮다는 소문에 높아진 기대치 탓인지, 정교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크게 흠잡을 만한 것도 아니었던 문장들을 보고 과하게 감점한 정황이 있다. 그렇다는 걸 안 상태에서 한 번 더 읽어보니 문장이 아닌 것들이 좀 더 선명하게 다가왔고, 첫 읽기보다 만족한 상태로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



 

22. 문화재 해설사와 함께하는 창덕궁 / 창덕궁 문화재 해설팀 : 82 ~ 155

: 다녀오고 나서 읽으면 많이 보인다. 읽고 나서 다녀왔으면 더 많이 보였을까. 얇은 책이긴 하지만, 읽지 않고 다녀온 이들보다는 분명히 더 많은 것을 보게 해준다.

 

 

--- 읽는 ---

도시에 산다는 것에 대하여 / 마즈다 아들리 : 108 ~ 242

세계사 아는 척하기 / 후쿠다 토모히로 : ~ 123

단정한 기억 / 유성호 : ~ 159

들뢰즈, 유동의 철학 / 우노 구니이치 : ~ 30

대도시의 사랑법 / 박상영 : ~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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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02-02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근전야, 얼마나 설레고 걱정되고 두근댈까요. 편안히 잠 푹 주무시고 내일 하루 별 일 없이 즐거운 출근 첫 날 되시길 진심 기원합니다. 바쁘시겠지만 기다리는 알라딘 이웃들 위해 틈틈이 읽고 재미있는 글도 가끔 올려주세요.

syo 2020-02-03 23:07   좋아요 1 | URL
늦게까지 업무 관련 공부한다고 앉아 있는데,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는 게 없네요....
내일 하루도 실컷 어벙거리다가 저녁 7시 되겠군요. 어허허허.

북다이제스터 2020-02-02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일 첫출근 축하드립니다. ^^

syo 2020-02-03 23:07   좋아요 1 | URL
망했어요.... 일 너무 어려워요....

2020-02-02 2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03 2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20-02-02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장 생활에 잘 적응하실 거라 믿습니다.

syo 2020-02-03 23:08   좋아요 0 | URL
그래야 할 텐데요.... 직장인 여러분들이 존경스럽습니다.

다락방 2020-02-02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드디어 첫출근입니까?! 자고 있나요? 아무쪼록 적응 잘 하시고 강동구가 쇼님을 따뜻하게 맞아주길 바랍니다. 그럴겁니다, 강동구는. 다락방이 있는 곳이니.. 따뜻할거야.. 샤라라랑~

syo 2020-02-03 23:09   좋아요 0 | URL
강동구는 따뜻하다 못해 뜨겁습니다. 좋은 분들한테 열심히 배우고 있답니다 ㅎㅎ

페넬로페 2020-02-02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출근 축하드려요!
행운을 빕니다^^

syo 2020-02-03 23:0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일이라는 게, 굉장히 어렵고 힘든 거였네요....
직장인 여러분 리스풱...

초딩 2020-02-02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근 축하드립니다~~

syo 2020-02-03 23:09   좋아요 0 | URL
초딩님, 감사합니다 ㅎㅎㅎㅎ

2020-02-03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03 2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름숲 2020-02-03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근 축하드립니다! 이곳 경기도, 지금 나폴나폴 눈이 내립니다. 흰눈같은 축복이 쇼님과 함께하시길요~~

syo 2020-02-03 23:11   좋아요 0 | URL
말씀 듣고 힘내겠습니다.... 진짜 열심히 해야지...

단발머리 2020-02-03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출근 축하드려요! 매일 매일 즐거운 출근길, 더 행복한 퇴근길 되시길요. 화이팅!

syo 2020-02-03 23:11   좋아요 0 | URL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무거운 마음과,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에 대한 실망감과.... 으흑.

2020-02-03 05: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03 2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연 2020-02-03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근 축하드려요! 어머니 항암치료도 잘 되길 기도드립니다.

syo 2020-02-03 23:13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 엉엉.... 엄마나 저나 열심히 버텨낼 예정입니다.

수이 2020-02-03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출근! 두근두근. 가고 오는 길 강동구 계신 syo님 잘 하실 겁니다!

syo 2020-02-03 23:13   좋아요 0 | URL
오늘 제가 뭘 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ㅋㅋㅋㅋ 첫 출근은 다 이런 건가요?
아님 나만....

초록별 2020-02-03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생활 응원합니다 ~~^^

syo 2020-02-03 23:13   좋아요 0 | URL
초록별님, 응원말씀 언제나 감사합니다^-^

stella.K 2020-02-03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요즘 젊은이들이 그렇습니까?
그러고 보니 저도 젊은이들과 대화해 본 적이 없슴다.
젊은이들과 함께 하면 금방 다시 좋아질 겁니다.
사람은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거든요.
어쨌든 스요님한테서 그런 얘기를 들으니 웬지 좋은 느낌입니다.
세대 차이야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렇다고 대화까지 단절시킬 필요는 없는 건데
세대 차이가 대화 단절까지 논할 일은 아니지 싶습니다.

지금 일터에서 정신이 없겠군요. 힘내십쇼!
그나저나 엄니가 건강하셔야 할 텐데...

syo 2020-02-03 23:14   좋아요 0 | URL
일터에서도 정신이 없고, 돌아와 집에서도 정신이 없습니다.
정신 그거 어디 간 걸까요.....

내일은 또 어떻게 될까요.... 으아아아...

Angela 2020-02-08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무원˝의 첫 출근은 어떤가요? syo님이라면 무척 적응을 잘 하실것같습니다~^^

syo 2020-02-11 00:35   좋아요 0 | URL
적응은 어떤지 모르겠고, 업무는 손에 빨리 익지 않네요....
얼른 한 사람 몫을 하고 싶은 마음뿐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