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변함없이 12시가 다 되어서야 귀가한 동생. 집에 들어서자마자 엄마아빠를 모시고 뭔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기색이다. 별 관심 없어서 나가보지도 않고 있었는데, 조금 전 왠지 심난한 기색으로 베란다에서 달구경중인 엄마와 마주쳤다. 날 끌어앉혀놓고 엄마 하는 말, 동생이 사귀는 남자를 데리고 와서 인사를 시키겠다고 했단다. 결혼하겠다고..
평소 결혼 안 하고 집에서 치대는 딸들이 눈엣가시 같고 심장에 박힌 대못 같았던 우리 엄마. 이런 얘기를 들었으니 당연히 희색이 만면하여 '꿈은 이루어진다'를 외치실 만도 하건만 안색이 왜 저러실까아..
아니나다를까. '그 남자'가 맘에 안 드시는 거다.
모든 면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맘에 드는 부분이 단 하나도 없단다.
직업도 맘에 안 들고, 출신학교도 탐탁치 않고, 집안도 영 맘에 걸리고, 외모조차도 눈에 안 차고 등등등. 아니, 내 동생은 뭐 그리 잘나서? 어느 부모에게나 자기 자식이 단연 최고고, 그 배필로 어울릴 만한 적당한 사람 찾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으므로, 이런 모습은 당연한 반응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정말 너무한다. -_-
그러면서 한 술 더 떠서 평소 눈여겨보던 신랑감이 하나 있는데 기어이 그쪽에 동생을 갖다붙여봐야겠다는 거다. 거기는 집안도 훌륭하고 본인도 훌륭하며 온갖 배경조건이 다아 훌륭하다나? 아니, 그렇게 따지면 그쪽에서는 우리 집을 뭐 탐탁히 여길까? 엄마가 지금 동생 애인 집안 바라보듯 우리 집안을 바라보겠지.
절대, 죽어도 결혼 안 하겠다는 나와 달리(엄마아빠도 이런 내 뜻을 존중하겠다고 굳게 약속했었는데, 요새는 가끔 건망증에 걸린 척을 하신다. -_-) 동생은 결혼 지망형이었으니까 어떤 남자든 찍어붙여주면 결혼하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자기가 좋다는 사람이랑 결혼하게 놔두는 게 좋지 싶은데.. 누구랑 살든 사는 건 다 비슷비슷하드만.. 내가 동생 사는 데 관심이 없어서 그런지는 몰라도(어렸을 때야 쌍둥이처럼 컸지만 대학 들어간 이후로는 서로 사는 방식이 너무 달라 굉장히 소원해졌다) 나는 어느 쪽이랑 결혼하든 큰 상관 없을 듯하다. 물론 엄마 앞에서야 또 삐질까봐 엄마 편을 들어줬지만...
엄마는 동생한테는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단다. 아마 엄마가 점찍어둔 집안과의 뒷공작(?)을 마무리지은 후에 말씀하시려나 보다. 하지만 동생도 어느 정도는 눈치채지 않았을까 싶다.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아니까..
동생은 어렸을 때부터 반항의 외길을 걸어온 나와는 달리 엄마아빠의 입 안의 혀처럼 굴던 애다. 학교도 엄마아빠가 원하던 좋은 학교 갔고, 대학도 간신히 마친 나와 달리 공부도 꾸준히 계속했고, 직장도 아빠가 원하던 데로 들어가서 거의 아빠의 후계자 행세를 하고 있고..
물론 그 과정에서 일방적인 자기희생을 강요당한 건 절대 아니고 자기한테 유리하다 싶은 길을 찾아간 거긴 하지만, 그렇게 살던 애가 이번엔 과연 엄마아빠한테 반항의 기치를 높이 쳐들 수 있을까? 으음.. 귀추가 주목된다. (생각해 보니 이 말은 언니로서 무지하게 무책임한 발언인 것 같다; 역시 결혼은 안 하는 게 속편한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