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무어(Michael Moore)가 좋다. 이 뚱뚱하고 유쾌하게 생긴 백인 아저씨가 정말 좋다. (그렇다고 그를 '갖고' 싶다는 건 절대 아니고..;; 한번쯤 만나보고 싶다는 야그)
처음 그를 알게 된 건 2~3년 전쯤 <멍청한 백인들>이란 책을 통해서였다. 백인이 스스로 자신의 종족 전체를 일컬어 '멍청한 놈들'이라고 욕하다니, 다나카 요시키의 신랄한 일본 정계 비판을 접했을 때와 같은 즐거움이 밀려왔다. 고어가 부시의 농간 때문에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했을 때 먼 남의 나라 일이지만 참으로 안타까웠던 나는 마이클 무어의 부시 비판에 열렬히 동조했다.
얼마 후 <볼링 포 콜럼바인> 얘기를 들었고 그 과감한 기획에 혀를 내둘렀었다. 그 다큐멘터리에 상을 준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의 그의 수상소감도 그야말로 속이 시원했었고.. (부시, 정신 차리래잖아!)
그리고 이번에 칸 영화제에서 <화씨 911>이 황금종려상을 받았을 때는 벌떡 일어나 기립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미국에서는 제대로 배급도 못했던 영화가 유럽땅에 가서 최고의 인정을 받았으니 마이클 무어의 팬이 아니더라도 정말 놀랄만한 일이다. 수상 후 배급 계약이 다시 이뤄졌다고 하니 부디 멍청한 미국 정치인들이 그 영화를 보고서 느끼는 바가 좀 있어줬으면 한다.
그런 그가 6월쯤에 한국에 올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들었다(수상 후 몇 배 더 바빠졌으니 정말 올지는 미지수지만). 만사 제쳐놓고 달려가서 만나보고 싶다.
아래는 작년과 올해 필름2.0에 실린 그의 소식.
칸을 열광시킨 마이클 무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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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무어 <화씨 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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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28 / 주성철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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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무어는 부시 대통령이라는 접근할 수 없는 대상을 만나면서, 자신의 방법론을 여전히 유지하는 가운데 오히려 더욱 담백하고 성숙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냈다.
작가 영화의 산실이자 당대 영화 미학의 구심점이나 다름없는 칸영화제를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부시 행정부를 공격하는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멘터리 <화씨 9/11 Farenheit 9/11>은 올해 다른 어떤 극영화 경쟁작들보다 열광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할리우드 리포터’지는 “지금껏 공개된 경쟁작들 중 15~20분에 이르는 가장 오랜 기립 박수를 받았다"고 보도했다. 영화가 끝난 뒤 마이클 무어가 레드 카펫을 밟으며 퇴장할 때는 존 레넌의 ‘이매진’이 흘러나와 영화제 기간 중 가장 감동적인 순간을 연출했다. 보통 해당 영화의 주제곡이 흘러나오는 관례와 비교해보면 사뭇 다른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전작 <볼링 포 콜럼바인>을 통해 2002년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도 초청된 적이 있는데, 당시 경쟁 부문에 다큐멘터리가 포함된 것은 자크 쿠스토와 루이 말의 <침묵의 세계> 이후 무려 45년 만의 '사건'이었다. 그런데 같은 감독의 두 편의 다큐멘터리가 유례없이 칸에 초청된 것이다.
<화씨 9/11>은 암전된 상태에서 9.11 테러 당시의 폭발음과 거리의 소음들, 그리고 사람들의 비명 소리를 들려주며 시작한다. 테러가 남긴 황폐한 사회의 풍경, 늘어가는 미국의 실업률, 팔다리를 잃고 피투성이가 된 이라크인들의 모습, 테러로 부상당한 미군들의 모습, 계속 늘어만 가는 민간인 피해자들, 전쟁을 조장하는 듯한 매스미디어, 그리고 그 꼭지점에는 늘 멍청한 부시 대통령이 자리하고 있다. 마이클 무어의 장기는 여전해서 9.11 테러가 일어난 바로 그때, 한 유치원을 방문 중이었던 부시 대통령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동화책을 들여다보는 장면 등 시종일관 조롱과 야유를 서슴지 않고 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 또한 짧고 멍청하게 등장해 실소를 안겨준다. 의사당에 들어가는 의원들을 일일이 붙잡으며 "당신 아들도 이라크에 파병하도록 서명해 주시죠"라고 묻는 마이클 무어의 공격적인 모습 또한 그의 이전 다큐멘터리들과 맥락을 함께하는 부분이다.
마이클 무어 다큐의 재미는 권력자에 대한 인정사정 볼 것 없는 공격에서 유래한다. <로저와 나>(1989)에서 제너럴 모터스사의 회장 로저 스미스, <빅 원>(1997)에서 나이키 회장 필 나이츠, <볼링 포 콜럼바인>(2002)에서 총기협회 회장 찰턴 헤스턴 등 마이클 무어는 쫓아다니고 거절당하고 또 카메라를 들이대면서 싸워왔다. 주류 시스템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그를 받아들였고 성공만큼 비판도 많았다. '좌파 출세주의자'라는 비판에다 저명한 영화평론가 폴린 카엘도 그를 '정신 나간 선동가'라고 공격했다. 하지만 '모든 영화는 선동 영화'라는 에이젠슈테인의 명제에 충실할 때 그의 다큐는 공적 매체들의 객관성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쾌감을 선사한다. 더구나 9.11 사태를 암전으로 처리한 것은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2001년 9월 11일, 오사마 빈 라덴이 CIA로부터 배운 전문 기술로 3천 명을 살해했다'라는 자막과 함께 9.11 사태를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로 도배했던 것에 대한 일종의 반성이다. 그는 부시 대통령이라고 하는 접근할 수 없는 대상을 만나면서, 자신의 방법론을 여전히 유지하는 가운데 오히려 더욱 담백하고 성숙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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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라, 멍청한 백인들아! |
양심 폭탄을 든 다큐멘터리 감독 마이클 무어 |
2003.04.05 / 김영진 편집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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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은 발칙한 말썽꾼 이름의 기록을 남겼다. <로저와 나> <보울링 포 컬럼바인>으로 유명한 마이클 무어 감독은 공개석상에서 미합중국 대통령 부시에게 수치스럽다고 일갈하고 야유와 박수를 동시에 받았다. 그는 어디에 가나 야유와 박수를 동시에 받는다. 평생 일관해서 대기업과 정치가들을 공격하고 다니는 이 게릴라 영화감독의 삶은 행동하는 양심의 살아 있는 표본이다.
마이클 무어의 이력서. <로저와 나> <보울링 포 컬럼바인> 등으로 유명한 다큐멘터리 감독. 타고난 반골로서 보수적 사람들에겐 다소 ‘돌아이’로 대접받는다. 부시 집권 이후 부시의 대통령 당선이 막무가내식 개표 조작에 따른 일종의 쿠데타라고 주장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반 부시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위험 인물이다. 유엔의 코파 아난 사무총장에게 부시를 하야시키기 위한 유엔군 파병을 요청하는 공개 편지를 보낼 만큼 비상식적이고 엉뚱한 언행을 일삼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저널리스트 출신으로 반 대기업, 친노조 성향 때문에 온전히 직장 생활을 하지 못하고 근근이 프리랜서로 먹고 살았던 전력이 있다. 생전 처음 잡은 영화 카메라로 제너럴모터스 기업의 전횡을 고발한 <로저와 나>로 삽시간에 유명 인사가 됐다. 활발한 문필 활동을 병행하며 ‘멍청한 백인들’이란 제목의 책으로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그는 멍청한 백인들로 가득 찬 미국 사회는 희망이 없다고 여전히 생각하고 멍청한 백인들 위에 군림하며 대기업과 교묘하게 결탁해 사리사욕을 챙기는 권력 엘리트 때문에 미국이 망하기 일보 직전이라는 과격한 주장을 조금이라도 더 전파하지 못해 안달하는 중년 남자다.
재미있는 영화감독, 동시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사회 운동가인 무어가 올해 아카데미 다큐멘터리 작품상을 탔다.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처음 소개됐으며 미국 내 흥행에서도 좋은 반응을 일으킨 <보울링 포 컬럼바인>으로 이 괴짜 반골이 화려한 아카데미 시상식 쇼 무대에 올랐을 때 누가 다음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겠는가. 수상자로 마이클 무어를 호명했던 다이안 레인은 기뻐 활짝 뛰었고, 무어가 무대로 걸어나가는 동안 객석에는 기립 박수의 분위기가 일었는데 이 괴짜 인간 무어는 그 존엄한 시상식장에 화끈하게 찬물을 끼얹었다. 애초에 수상을 예상하지 못했던 그는 얼떨결에 무대에 올라가 자신에게 주어진 45초의 연설 시간 동안 침묵으로 반전 메시지를 전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속사포처럼 전쟁을 비난하는 말을 쏟아놓았다. “우리는 허구의 선거 결과로 가짜 대통령을 뽑았고, 그 결과 지금 허구적인 원인으로 전쟁을 벌이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 전쟁이 수치스럽다. 부시가 수치스럽다.” 객석에서 야유가 나왔고 무어는 연설을 계속했으며 이윽고 종결을 알리는 오케스트라 음악이 울리자 무어는 웃으며 연설을 마쳤다. 객석의 할리우드 스타들은 당황하거나 웃거나 무뚝뚝한 표정으로 이 희대의 반골 감독을 바라보고 있었다. 멋지다. 무어!
영화감독, 사회 운동가, 싸움꾼
아카데미 시상식 다음날 'L.A 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무어는 “그날의 실수는 일종의 성당 미사 참회 고백 같은 것이었다”고 시치미를 뗐다. “그날 아침 아버지와 누이와 함께 참석한 성당 아침 미사에서 들은 사제의 강론 일부가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성당을 나와 푼돈을 청하는 홈리스들을 지나칠 때, 코닥 극장 주변에서 반전 시위자들이 연행되고 있는 모습을 지나칠 때도 내 머릿속은 정당방위가 아닌 한 인간을 죽이거나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얼떨결에 무대에 올라 나는 결국 내 양심에 따라 말하고 말았다. 그날의 실수를 하게 해준 교황에게 감사한다. 앞으로 오스카상을 받을 이들에게 충고 한마디 하겠다. 나처럼 실수하지 않으려면 교회 가는 것으로 그날 일과를 시작하지 않기를 바란다.”
마이클 무어는 눙치는 데 명수다. 눙치면서 그는 사안에 단도직입 돌진해간다. 그의 다큐멘터리는, 객관성을 신경 쓰는 신중한 접근 따위는 처음부터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 미국 내의 총기 사고 건수와 총기 산업 이해 관계자들간의 상관 관계를 파헤친 <보울링 포 컬럼바인>의 후반부에서 무어는 <벤허>로 유명한 전설적인 배우이자 전미라이플협회의 회장인 찰턴 헤스턴을 인터뷰하러 집요하게 시도한다. 드디어 헤스턴의 허락을 받은 무어는 예의 바르게 자신을 대하는 헤스톤과 마주 앉자마자 속사포처럼 빠른 공세적 질문을 퍼붓는다. ‘미국은 정의로운 폭력 위에 세워진 국가’라고 강변하는 헤스톤은 무어의 막무가내식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퇴각하는 노병처럼 자기 저택으로 쫓기듯이 들어간다. 악착같이 그를 쫓아간 무어는 그에게 사진 한 장을 내민다. 엉겹결에 그 사진을 받아든 헤스톤은 총에 맞아 죽은 6살짜리 소녀의 모습을 보고 얼굴이 흑빛으로 바뀐다.
지난해 칸에서 <보울링 포 컬럼바인>을 처음 봤을 때 나는 무어가 너무 한다고 생각했다. 헤스톤은 같은 영화인의 입장에서 무어의 인터뷰를 배려해준다. 무어는 그 고집불통인 노인을 무너뜨리는 방법을 알고 있다. 잽을 날리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고 바로 훅을 날려버린다. 무어의 기관총 같은 말 공세에 비틀거리며 등을 보인 노인 헤스톤에게 무어는 쫓아가 다시 한번 말의 어퍼컷 결정타를 먹인다. 그건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미국의 총기 사고의 책임이 헤스톤 개인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건 미국 사회의 엄청난 총기 폭력 사건이 시스템의 문제라고, 영화 내내 화끈하게 파헤쳤던 그 합리적인 논증의 진실을 감정적인 해소 차원에서 묻어버린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칸에서도 마이클 무어는 방약무인했다. 공식 기자 회견에서 부시를 끊임없이 욕했으며 깡패처럼 칸 해변을 가방 하나 달랑 메고 반바지 차림으로 어슬렁거렸다. 다큐멘터리를 찍는 예술가라기보다는 세상의 부조리와 언제든 한 판 뜰 자세가 돼 있는 싸움꾼처럼 보였다.
<보울링 포 컬럼바인>은 마이클 무어의 공세적인 지성으로 구축된 영화다. 화면 곳곳에 깔리는 마이클 무어의 내레이션은 걸쭉한 입담으로 관객을 낄낄거리게 만든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입을 다물어버리게 만드는 압도적인 박력으로 진실을 밝히는 것은 마이클 무어의 지성이다. 그는 게으른 저널리스트들을 비난하면서 어떤 신문 기사보다 꼼꼼하게 분석적으로 미국 총기 폭력 문화에 관한 리포트를 제출한다. 한때 전미총기협회의 평생 회원이었던 무어는 1999년 컬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에 충격을 받고 왜 미국인들은 총에 열광하며 총기 폭력 문화를 방기하게 됐는지를 자문한다. 그가 이 영화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던지는 질문은 간단하다. 미국의 폭력 문화는 거대한 비즈니스의 유착 관계의 산물은 아닐까? 총기 사업자들은 대중에게 총을 팔아 돈을 벌고, 정치인들은 총기 사업자들의 이익을 위해 총기 소유 권한을 보장해주는 검은 커넥션이 미국을 움직이는 게 아닐까라고 묻는 것이다.
누구나 슈퍼마켓에서 총알을 살 수 있는 미국에선 한 해에 총기 사고로 1만 명이 넘는 사람이 죽는다. 마이클 무어는 거리에 나가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난다. 권세 높고 교양 있는 사람들은 미국의 폭력 문화가 할리우드, 록 음악, 결손 가정, 경제난, 흑인 인종 문제 때문에 불거진 것이라고 말한다. 마이클 무어는 단순하게 되묻는다. 일본과 캐나다에선 할리우드영화와 록 음악을 즐기지 않는가? 그런데 왜 캐나다와 일본에선 미국만큼 총기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가. 컬럼바인 사건의 배후 책임자로 비난받았던 록 가수 마릴린 맨슨은 마이클 무어에게 말한다. “나는 록 가수일 뿐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다른 나라에 수백 개의 폭탄을 떨어뜨리며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다. 방송은 그런 현장을 뉴스로 보여준다. 폭력성을 부추기는 데 대통령의 영향력이 크겠는가, 록 가수인 내가 더 크겠는가?”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
<보울링 포 컬럼바인>에서 마이클 무어가 담는 것은 미국 지배층이 대중에게 부추기는 공포의 문화다. KKK단이 그랬던 것처럼 권력층은 멍청한 백인들에게 끊임없이 공포를 부추기고 대동단결해서 누군가를 척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선동한다. 그리고 여기에 돈의 이해 관계가 끼어든다. K마트에서 총기 사업자들이 대중에게 총을 팔아 돈을 챙길 때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가들은 총을 지닐 수 있는 권한을 보장해주며 사업가들의 돈을 챙긴다. 정치가들은 총을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외치며 유권자의 표도 동시에 챙긴다. 가끔씩 웅변조의 내레이션으로 미국 사회 내의 폭력, 미국이 다른 나라에 가한 폭력의 역사를 추적해가던 무어는 자유 국가라는 명분을 걸고 교묘하게 이뤄지는 자본과 권력의 공통된 이해 관계의 그물을 파헤친다. 그 결과는? 해마다 영국에서 68명, 캐나다에서는 165명, 프랑스에서 255명의 총기 사상자가 나는데, 미국에서는 1,100명이 총에 맞아 죽는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12명의 학생과 한 명의 선생이 동료와 제자에게 총에 맞아 한꺼번에 사살당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상황이 이런데도 찰톤 헤스턴 선생은 “미국은 자신과 가정을 지키기 위해 라이플을 드는 용기로 건설된 나라”라고 웅변한다. <보울링 포 컬럼바인>의 중반 장면에서 마이클 무어는 전미총기협회의 행사장에서 열변을 토하는 찰톤 헤스톤과 총기 사고 유가족들의 시위 장면을 교차해 화면에 담는다. 두 쪽의 주장은 만날 수 없다. 마이클 무어는 분개한다. 명명백백한 증거가 있는데도 비즈니스의 검은 이해 관계를 명분으로 포장하는 엘리트를 용서할 수 없다. 해결책은 그들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것이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을 때는? 찾아가는 것이다. <보울링 포 컬럼바인>의 마지막 장면은 그렇게 이어진다. 찰톤 헤스톤의 대저택의 문이 열릴 때 무어는 <십계>에서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에서처럼 환희를 느꼈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러나 무어에게 홍해가 갈라지는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무어는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 같은 존재다. 그는 달걀로 바위를 치는 짓을 끈질기게 되풀이하며 물고 늘어진다. 그런 무어를 골치 아프게 여기는 미국의 일부 계층에선 ‘무어 워치’란 인터넷 사이트를 만들어놓고 이 작자를 감시하고 고발하자고 선동하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이클 무어는 지금도 활동중이다. 그는 한참 탄력이 붙은 반전 운동 대열에 동참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걸 다큐멘터리 영화로 찍고 있다. 무어는 수치심을 느낀 세상에 대해 응대하는 법을 알고 있다. 바로 행동에 나서는 것이다.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지식인 예술가의 사명을 그처럼 의기양양하게, 웃으면서, 대담하게, 부지런히 해내는 영화감독도 드물다. 그의 눈에는 미국 사회에 고쳐야할 게 너무 많다. 그는 멍청한 대다수 백인들을 대신해 부지런히 미국 사회의 구멍난 곳에 회개와 공격의 못질을 해대고 있다. 마이클 무어 감독 잘해 보시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