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 - 앤드루 숀 그리어 장편소설
앤드루 숀 그리어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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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본 미국드라마 <퀴어 애즈 포크 Queer As Folk>는 게이들의 일상을 다룬다. 그 드라마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대부분의 게이들이 그 무엇보다 젊음을 높이 사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젊은 육체와 절정기에 이른 아름다운 외모가 노화로 인해 사라질까봐 노심초사하는 장면들이다. 그래서 드라마 속 인물들은 대개 끊임없이 운동을 하면서 자신의 외모를 가꾸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금씩 시들어가는 젊음, 불쑥불쑥 나타나는 노화의 증거들…. 이런 징후들을 그들은 대부분 두려워했다. 젊음이 사라지고 그래서 외모가 볼품없어지면 또 다른 파트너를 만날 가능성이 줄어든다고 강박적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어디 그 드라마 속 인물들만 그러할까. 현실의 이성애자는 물론 바이,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등등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이 노화를,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기를 꺼려할 것이다. 그런데 유독 그 드라마 속 게이들이 젊음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에는 어쩐지 안타까운, 연민이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들은 이성애자들처럼 어떤 제도화된 체제, 즉 결혼이라는 틀로 어느 정도의 안정적인 파트너십을 만들기가 어려웠다(물론 나는 결혼이 꼭 안정을 보장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어떤 게이들에게는 그런 제도조차 부러울 수 있다). 그중에는 운이 좋아서, 또는 서로 매우 성실한 파트너를 만나 결혼이라는 체제 안에 이르게 되는 커플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그래서 끊임없이 누군가를 찾아 헤매야 하는 대다수 게이들에게 젊음은, 그리고 그 젊음에서 비롯된 아름다움은 목숨을 걸고 붙잡아야만 하는 그 무엇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젊음은 곧 외로운 처지를 벗어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셈이다.

<레스>를 읽다가 문득 그 게이 드라마가 떠오른 이유는 바로 그런 점 때문이었다. ‘레스’는 더는 젊지 않다. 중년에 접어든 지 이미 오래이며 이제 곧 쉰을 바라본다. 눈부셨던 젊음은 이미 그 곁을 떠났다. ‘어머니들이 두려워하는 것보다 더 높은 데까지 나무를 오르’던 열 살 도 지났고, ‘침대에 잠들어 있는 연인을 놀라게 해주려고 기숙사를 기어오르’던 스무 살도 지났으며 ‘인어처럼 푸른 바다 속으로 뛰어’들던 서른 살도 지났다.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짓던 마흔 살도 훌쩍 넘었다. 마흔아홉, 이제 무엇을 위해 뛰어들어야 할지 모를 나이이다. 어디 젊음만 그러한가. 그의 곁을 오래도록 지키던 젊은 연인 ‘프레디’도 떠났다. 9년 동안 함께 지냈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청첩장을 들이민 것이다. 상대는 레스 그 자신이 아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젊음도, 젊은 연인도 모두 한꺼번에 레스를 떠난 것이다.

프레디의 청첩장을 받은 레스는 고민한다. 둘이 오래도록 사귄 사이임을, 아니 동거한 사이라는 것을 결혼식장에 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알고 있을 터인데, 소심하기 짝이 없는 레스가 당당하게 결혼식에 참석할 리는 만무하다. 아니, 아무리 당당하고 쿨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토록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낸 연인의 결혼식에 맨 정신으로 참석할 수 있을까? 술에 만취하더라도 그런 일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쿨하게 외면하지도 못하고 핑계를 찾던 레스는 서랍 속에서 보물을 발견한다. 이름 없는 작가인 그이지만 그래도 세계 곳곳에서 각종 섭외 편지(아니 그런데 이게 어떻게 무명작가란 말인가? )가 와 있던 것이다. 베를린에서는 계절학기로 학생을 가르쳐달라고 하고, 멕시코에서는 문학 컨퍼러스 초청장도 와 있다. 이탈리아의 문학상 시상식, 일본 요리 탐방 기사 요청까지! 그동안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초대장들이 갑자기 눈에 들어온다. 그래 바로 이거야! 레스는 그 초대들에 응하기로 하고, 이를 핑계 삼아 프레디의 결혼식은 불참할 수밖에 없다면서 답장을 보낸다. 그러고는 드디어 이탈리아, 독일, 멕시코, 프랑스, 모로코, 일본으로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떠났으니 즐거워야 할 텐데, 그는 그렇지 못하다. 전 연인 프레디의 그림자가 곳곳에서 떠오르고 설상가상으로 프레디를 만나기 이전에 15년 동안이나 함께 지낸 ‘로버트’의 그림자까지 드리워진다. 왜 아니겠는가, 멕시코 문학 컨퍼런스는 시인으로 퓰리처상을 받았으며 레스의 오랜 연인이었던 로버트에 대한 심포지엄이다. 멕시코뿐만 아니라 어딜 가나 그의 옛 연인들, 그러니까 로버트 또는 프레디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당연하지 않은가? 15년, 또는 9년이나 함께, 그러니까 레스의 청춘, 그 젊음을 모두 함께 보낸 이들인데, 그 긴 세월이 여행지에서 쉽게 잊힐 수 있을까. 로버트와 함께 있었던 이탈리아의 호텔, 프레디와 함께 프랑스를 횡단했던 짧은 여행…. 이곳에서는 로버트와의 추억이 떠오르고 또 다른 곳에서는 프레디와의 일화가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그래도 여행지이다 보니 간간이 새롭게 만나는 누군가와 썸을 탈 기회도 주어지는데, 그래도 이 남자, 레스의 머릿속은 로버트와 프레디 그 두 사람이 가득 채우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레스의 모습을 뒤쫓다보면, 그의 일생, 적어도 스무 살 무렵부터 마흔아홉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생 전반을 쫓아다니는 기분이 든다. 그는 젊고 아름다운 시절에 그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로버트를 만났고, 둘은 뜨겁게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그렇게 15년을 보낸 뒤, 로버트는 갑자기 레스를 떠난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젊다고 하기 어려운 레스가, 그토록 아끼던 파란 정장이 조금 어색해질 나이에 이르렀을 즈음, 새파랗게 젊은 청년 프레디와 사랑에 빠진다. 레스도, 로버트도 결국 사랑했던 것은 푸르고 싱그러운 젊은이. 젊음. 다시 오지 못할, 그래서 더 소중한 그 젊음이 아니었을까. 때문에 그토록 자기의 젊음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두려워했던 것은 아닐까. 여행은 일정 기간이 끝나면 결국 다른 장소로 이동해야 하듯이, 인생 또한 줄곧 ‘현재’에 머무를 수는 없다. 다음, 다음으로 넘어가야 한다. 시간의 흐름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가 그토록 맞이하고 싶지 않았던 쉰 살 생일도 코앞에 닥친다.

결혼식을 피하는 목적은 이루었지만 여행은 프레디의 기억을 잊게 하는 데 딱히 도움이 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레스는 이 도피성 여행 중에 서서히 생각지도 못한 발견을 하게 된다. 그 깨달음. 아마 그래서 사람들도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닐까. 일상을 벗어나서 잠시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 그간 보이지 않던 것이 눈에 들어오게 되는 여행. 게다가 인간은 여행하듯이 이 사람, 저 사람의 마음속을 떠돌아다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사람 사이를 돌아다니다가 문득 어떤 작은 깨달음이라도 얻으면 좋겠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그 사람과 이 사람, 그리고 또 저 사람 사이를 오가면서 웃고. 행복한 기분에 잠기고, 또 때로는 상처받고 헤매면서 젊음의 한 때를 지나 서른을 넘고 마흔을 넘어 중년에 접어들고 그렇게 늙어가는 게 인생은 아닐까.

여행 중에 레스는 자기에게는 본보기와도 같았던 루이스와 클라크 커플마저 파경을 맞이한 것을 알게 된다. 20년이나 함께 세월을 보낸 그들도 헤어진 것이다. 그때 루이스가 레스에게 한 말은 오래 곱씹어볼만하다.



“죽을 때까지 관계를 이어갈 수도 있다는 것도 사실은 사실이지. 사람들은 옛날부터 쓰던 식탁이 박살나고 있어도, 고치고 또 고쳤어도 계속 써. 그냥 할머니 것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말이야. 그렇게 마을은 유령이 되고 말아. 그렇게 집이 쓰레기 창고가 되는 거야. 그리고 내 생각엔, 사람들도 그렇게 늙는 거지.” (<레스>, 224쪽)


레스가 여행 중에 만났던 ‘조라’의 말처럼 사람들 모두에게 평생의 사랑 같은 건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사랑은 ‘다른 사람이 편히 잘 수 있도록 개를 산책시키는’ 것이며 ‘세금을 내는 거고 악감정 없이 화장실을 청소하는’ 것이다. ‘삶에 동맹을 두는’ 것이다. 사랑은 불도 아니고 벼락도 아니며 누군가와 나 자신이 늘 해왔던 그런 거라는 평범한 깨달음. 로버트도, 프레디도 레스를 결국 떠났지만, 그게 옳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며, 영원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붙잡고 있는 것들 때문에 유령 마을이 되고, 집은 쓰레기 창고가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15년과 9년, 그 기간 동안 레스는 로버트, 프레디와 삶에 동맹을 두고 후회 없이 사랑했다. 그렇기에 레스의 마흔아홉 살까지의 인생은, 비록 소소한 슬픔이 있을지언정 그 전반부 모두는 ‘희극’이리라. 그가 아무리 ‘모든 순간을 갈팡질팡 넘어가며 바보’가 되고 ‘오해하고 말실수 하고 우연히 마주치는 그야말로 모든 것에, 모든 사람에 걸려 넘어지고도’ 레스는 자기 삶에서 이긴 것이다. 그 자신은 자기 삶이 얼마나 행복으로 이어졌는지 깨닫지 못하더라도.

레스가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그의 소설 <칼립소>처럼 오디세이를 뚝심 있게 기다려준 페넬로페는 없을지라도 뜻밖의 선물이 그를 기다린다. 때문에 레스의 쉰 이후의 삶도 전체적으로는 희극이지 않을까. 로버트가 레스에게 이야기했듯이, 지금 만나는 사람들은 절대 젊은 레스를 상상할 수 없을지 모른다. 절대로 레스는 쉰 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그게 전부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젠 사람들이 항상 레스를 어른으로 생각할 테니까. 그를 진지하게 생각할 테니까. 많은 이들이 인생에서 젊음이 사라지고 나면 그 뒤의 삶은 그저 쓸모없이 덧붙여진 빛바랜 별책부록이 아닐까 회의감에 빠지곤 한다. 나 또한 그렇다. 그러나 레스의 좌충우돌 여행기를 읽어나가다 보면 한없이 비극 같은 인생도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희비극은 인생에 적절히 뒤섞여 오면서 삶 전체를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터덜터덜 지친 여행 끝에 집으로 돌아간 레스에게 뜻밖의 선물이 기다리고 있듯이, 아무것도 기대할 것 없을 것만 같은 인생 후반기에 놀랄 만한 선물 하나쯤은 누구에게나 다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리고 그 선물은 그래서 더 값어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레스>는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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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19-05-28 12: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휴...저 이 책 7일만에 된밥 먹듯이 꾸역꾸역 다 읽었네요.ㅎ 몇 번을 포기하려다 억지로 읽어 내려온게 아까워서요ㅎ 잠자냥님의 리뷰는 이렇게 재밌는데, 저는 이 작품이 어렵고 지루해서 혼났네요.ㅠ 우리의 레스, 마지막 장면은 이런 저에게도 선물같았어요. 글 잘 읽었습니다.

잠자냥 2019-05-28 13:13   좋아요 1 | URL
하하하 ‘된밥 먹듯이‘라는 비유에 빵 터졌어요. ㅋㅋㅋㅋㅋ 그래도 마지막 장면은 괜찮았죠? ㅎㅎㅎ 책보다 재미난 리뷰라니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이 책 찾아보니 번역문장 때문에 잘 안 읽힌다는 사람들도 많더라고요.)

coolcat329 2019-05-28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힘들게 읽었지만 레스는 미워할 수 없네요^^

다락방 2019-05-28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는 읽기전에 리뷰 제목부터 너무 좋았어요. 완전 훅- 들어오는 제목입니다.

그나저나 이 책도 읽어야지.. 생각한 책인데 또 벌써 읽고 리뷰를.
잠자냥 님.. 오늘도 정말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제가 잠자냥 님 리뷰 읽으려고 알라딘 계속 하는 것 같아요. 감사해요 ㅠㅠ

잠자냥 2019-05-28 14:27   좋아요 0 | URL
저를 비롯해서 젊음이 사라져가고 있는 분들에게는 더 위로가 될 책 같아요. ㅎㅎ
다락방 님이 알라딘 서재 메인이나 다름 없는 분이신데! 멈추지 말고 쭉~ 하셔야죠! 화이팅입니다~!!
 
레스 - 앤드루 숀 그리어 장편소설
앤드루 숀 그리어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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큭큭 웃다 보면 묘하게 가슴이 저릿해 오는 이상한 소설. 파란 정장이 더는 어울리지 않을, 청춘을 지나버린 이들이 읽는다면 더욱 공감할 작품. 인생은 희극 같으면서도 비극이고 비극 같으면서도 희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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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19-05-26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지금 이 책 반 정도 읽었는데 왜이리 재미없고 지겨운지요ㅠ 문장 자체가 쉽게 읽히지 않아 저의 문해능력에 심한 회의감이 드는 중이에요ㅠ

잠자냥 2019-05-26 22:12   좋아요 0 | URL
하하... 재미없을 수도 있지요. 퓰리처상 수상작은 저도 늘 기대했다가 기대에 못 미치는 작품이 많더라고요.
 
[eBook] 인생의 친척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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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의 죽음 뒤 부부의 태도가 확연히 다른 점이 흥미롭다. 남편은 자학/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데 비해 ‘마리에‘는 그 고통을 짊어지고 말 그대로 ‘성녀‘가 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묘사 모두 불편하다. 모성의 신화는 이렇게 재생산되는가? 오에의 작품이지만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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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의 성정치 - 여혐 문화와 남성성 신화를 넘어 페미니즘 - 채식주의 비판 이론을 향해 이매진 컨텍스트 68
캐럴 J. 아담스 지음, 류현 옮김 / 이매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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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감동으로 북받치게 하고, 또 어떤 책은 앎과 깨달음으로 전율이 일게 한다. <육식의 성정치>는 후자에 속한다. 도서관에 신청해서 읽은 책이기에 마음대로 밑줄은 긋지 못하고 따로 메모해두고 싶은 구절이 나올 때마다 포스트잇을 붙였다. 다 읽고 나서 보니 책 전체에 포스트잇이 빼곡하게 붙어 있더라. 그런 책은 참 오랜만이었다. 집에 한 권 사두고 틈틈이 다시 읽어도 좋을, 아니, 그래야만 하는 책이다. 알라딘 별점 평가에서는 별 다섯 개까지만 가능한데, 솔직히 열 개를 줘도 아깝지 않을 그런 책이랄까.

‘육식의 성정치’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으리라. 어떤 이는 제목만으로도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짐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육식에도 성정치가 있을 수 있지, 페미니스트 중에 채식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은 까닭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이런 정도의 생각을 하면서,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육식의 성정치’라고 하니, 할아버지나 아버지, 또는 아들 등 집안의 남자 구성원들 식탁에는 고기가 올라가고(그렇지 않더라도 생선이나 달걀 등 고기를 대체할만한 단백질 식품), 여성 구성원들의 밥상에는 그런 음식은커녕 풀 잔치(채소)만 벌어지는 광경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남녀 구분 없이 한 식탁에서 밥을 먹는 오늘날에도 고기 같은 음식은 남성 구성원 위주로, ‘그’에게 ‘먼저’ 주어지는 상황을 떠올릴 수도 있다. 요즘 어떤 집이 그러느냐고 반문할 사람들도 있겠으나, 가족 중 남자 구성원 없이 엄마와 딸 둘만 밥을 먹을 때 식탁이 어떻게 차려지는지 관찰해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육식의 성정치>에서 이야기하는 ‘성정치’ 사례 중 이런 예는 아주 초보적인 수준에 속한다. 이 책은 ‘성정치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구조화되는 방식이 우리가 동물, 특히 소비하는 동물을 바라보는 시각에 연관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가부장제는 인간과 동물 관계 속에 내재된 젠더 체계이다. 이 젠더 구조는 성별에 따라 알맞은 음식을 교육하는 교육 체계도 포함된다. 앞서 말했듯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식탁에는 고기가 올라가고, 여자들의 식탁은 채소만으로 채워져도 된다는 생각 등이 그 단적인 예이다. 이것은 특권의 문제가 아니라 상징의 문제로, 남성다움은 육식에 접근할 권리와 타자의 신체에 대한 통제를 통해 우리 문화 곳곳에 스며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여성들은 남편에게 고기를 내놓아야 한다고 믿음으로써, 남자란 강해지려면 고기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저녁 식탁에 뭘 놓을지도 남성이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육식의 성정치를 영속화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여성에게 육식은 배우자의 욕구를 가장 먼저 생각하는 자기 부정의 또 다른 수단이 된다. 

한 집안에서만 그치는 문제가 아니다. 고기는 늘 권력을 쥔 자가 먹었다. 유럽의 귀족 사회는 온갖 고기로 가득찬 음식을 소비한 반면 노동자들은 탄수화물을 먹었다. 이 책에 따르면 식습관은 계급구분을 명확히 해주며 가부장제에 기초한 구분도 확실히 한다. ‘2류 시민’인 여성이 먹는 음식, 그러니까 채소, 과일 곡식 등은 가부장제 문화에서 2류 식품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육식에서 드러나는 성차별은 형식은 다르지만 계급 차별로 되풀이된다. 고기는 남자의 음식이고, 육식은 남성적 행동이라는 신화가 모든 계급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 줄곧 듣는 옛날이야기에서 음식과 성역할의 상관관계를 흔히 접한다. 옛날이야기 속에 곧잘 등장하는 식인 풍습은 대개 남성이 하는 행위다. 모든 나라의 구전 이야기를 살펴보면, 거인은 남자이자, ‘인간을 잡아먹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에 비해 여성은 주로 ‘제물’로 바쳐진다. 마치 제사상에 올리는 고기처럼 말이다. 고기가 남성의 특권이라는 점은 성서에도 나온다. 게다가 거의 모든 문화마다 금기시되는 음식은 대부분 고기와 관련이 있고, 이런 제약은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더 많다. 전근대 문화에서 여성에게 고기를 금지하는 관습은 고기의 위상을 높이는 구실을 한다. 여성이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경우는 남편이 조금 남겨줄 때뿐이다. 고기 분배 체계가 남성의 사회적 위상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런 가부장제 관습은 전 세계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아시아의 몇몇 문화에서는 여성에게 생선, 해산물, 닭고기, 오리고기, 달걀 등을 먹지 못하게 한다. 반면 채소 또는 고기 아닌 음식은 여성만 먹는 음식으로 여겨진다.

‘고기는 왕’이다. 고기를 지칭하는 왕이라는 명사는 남성 권력을 지시한다. 육식인들이 고기가 아닌 다른 모든 음식을 지칭하는 데 쓰는 단어인 채소는 고기가 남성에 연관되듯 여성에 연관된다. 남성이 지배하는 육식 세계에 여성이 종속돼 있기 때문에 여성이 먹는 음식도 남성 지배에 종속된다. ‘2류 시민’인 여성의 음식은 열등한 단백질로 여겨진다. 고기가 간접적으로는 채소이고(인간이 먹는 고기의 근간은 풀을 뜯어먹는 초식 동물이다)이고 채소가 고기보다 평균적으로 두 배나 더 많은 비타민과 미네랄을 공급하는데도 여성은 자립적이지 못하다고 여겨지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채소가 그것 자체로 식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고기는 강력하고 둘도 없는 음식으로 추앙받는다. 여기에 담긴 메시지는 명확하다. ‘노예인 채소는 자기가 타고난 운명에 만족해야 하고, 왕인 고기의 자리를 탐내서는 안 된다’는.

또 다른 의미에서 ‘육식의 성정치’란 ‘여성을 동물화하고, 동물을 성애화하고 여성화하는 태도이자 행동’을 말한다. 여성을 동물화하고 동물을 성애화한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을 것이다. 이 지구에 사는 거의 모든 사람이 육식의 성정치에 영향을 받는다. 시카고의 한 레스토랑에서 ‘더블 디 컵 칠면조 가슴살 샌드위치. 이 샌드위치는 성인용입니다.’는 문구가 달린 음식을 먹을 수 있으며 올빼미 눈을 로고로 하는 레스토랑 체인점 후터스에서 밥을 먹을 수도 있다. 이 레스토랑 메뉴에는 ‘유방’의 속어인 ‘후터스’라는 이름의 연원이 자세히 적혀 있다. 또 ‘우르술라 햄드레스(Ursula Hamdress)’의 그림을 보면 여성의 동물화와 동물의 성애화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이런 예는 겉보기에는 동물을 대상으로 삼지만, 그 지시가 가리키는 진짜 대상은 다름 아닌 여성이다.


'우르술라 햄드레스(Ursula Hamdress)'



<육식의 성정치> 구판 표지로 쓰여던 이미지로 알고 있다. 이런 이미지는 쉽게 찾을 수 있다....



비단 저 먼(?)나라에서 예를 들 것도 없다. 얼마 전 이 땅에서도 한 찜닭 업체가 상호와 음식 이름에 ‘계집애’라는 단어를 넣어 여성혐오 논란에 휩싸였다. 이 식당은 주로 배달 전문 앱을 이용해 음식을 판매했는데, 상호와 메뉴에 ‘계집애’라는 말을 넣어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했다. 이 식당 메뉴 중 매운 찜닭은 ‘화끈한 계집애’, 닭 반 마리 찜닭은 ‘반반한 계집애’라고 이름 붙였다. 사장은 손님의 리뷰에 “계집애는 원하는 거 다 해드림”이라는 글을 덧붙이기도 했으며, 메뉴를 본 손님들은 “반반한 계집애로 가져다주세요.”라고 주문하기도 했단다. 논란이 커지자 이 업체 사장은 억울하다면서(!) “이게 강간을 의미하고 여성을 비하한다는 반응은 좀 과한 것 같다. 닭을 사랑한다는 의미로 닭 계(鷄)를 붙여서 계집애라는 표현을 썼다”고 했단다.




문제가 되었던 '계집애' 메뉴판과 상호



이 책에 따르면 육식의 성정치를 통한 이런 이미지 소비는, 이 이미지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의식하지도 못하면서 여성의 대상화에 관해 공공연히 농담을 주고받는 문화의 한 방식이다. 이 방식은 남성들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여성혐오로 전환될 수 있다. 또한 여성의 지위 하락은 하나의 입심거리나 해롭지 않은 ‘순전한’ 농담의 소재로 여겨지게 된다. 그렇게 때문에 모든 사람이 여성의 지위 하락을 거리낌 없이 즐길거리로 삼을 수 있게 된다. “돼지를 보고 있을 뿐이야” “샌드위치일 뿐이야” “후터스에서 밥 먹을 뿐인데” 등등. 저 찜닭짐 사장의 말도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닭을 사랑한다는 의미로 썼을 뿐이야. 여기서 강간을 본다니, 농담도 이해 못해? 너희들이 지나쳐.”

이와 비슷한 사례로 <치킨의 50가지 그림자 Fifty Shades of Chicken>라는 음식 책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 묻어가는 책일 뿐이지만, 또 다른 진실을 드러낸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에서 ‘죽은 닭’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여주인공 ‘아나스타샤 스틸’이고 죽은 닭을 묶고, 꿰고, 조리하는 셰프는 곧 아나스타샤 스틸의 연인이라는 진실을 보여준다. 조리사는 단순한 남자가 아니라 인간이고, 소비되는 대상은 단지 여자가 아니라 동물이다. 그러므로 이런 패러디는 남성-여성이라는 젠더 이원론이 인간-동물 이원론과 지배-종속 이원론하고 교차하는 방식을 상기시킨다. 때문에 ‘섹시하다’와 ‘맛있다’는 둘 다 불평등하다. 한편, 성폭력과 육식은 서로 별개의 폭력 형태로 드러나지만 성폭력 문화의 이미지들과 현실에서 자행되는 성폭력은 종종 동물이 어떻게 인간에게 도살되고 먹히는지에 관련된 우리의 앎에 의존한다. 변태적 성행위 도구인 체인, 소몰이 막대, 올가미, 개 목걸이, 로프 등은 동물을 대상을 한 통제를 암시한다. 여성이 폭력의 희생자라고 할 때 이런 도구들은 여성이 동물과 똑같은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환기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에서도 동물과 여성은 비슷한 운명을 겪고 있다. 명명의 권력을 이용해 여성과 동물에게 가해지는 중첩된 억압은 타락의 책임을 물어 뱀과 여성이 동시에 비난받는 <창세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성과 동물은 경우에 따라서 선 또는 악, 선의 화신 또는 악의 화신, 마리아 또는 이브, 반려 동물 또는 짐승, 귀여운 짐승들 또는 더러운 짐승들로 상징된다. ‘기혼 여성(femme covert)’과 ‘가축(beste covert)’이 법률적으로 같은 범주에 속하며 여성 생식 체제에 연관된 이름들은 일종의 모욕이 된다. 암소(cow 살찌고 주책맞은 여자), 돼지(pig 불결한 여자), 암퇘지(sow 추녀), 암탉(hen 수다쟁이 여자), 병아리(old biddy 말 많은 노파), 암캐(bitch 화냥년) 등이 모두 부정적 의미를 지닌다. 이런 단어들은 재생산에 관련된 선택을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여성에게서 유래한다. 우리나라 속담에서도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거나 ‘계집이 늙으면 여우가 된다’ 등은 물론 ‘여우같다’ ‘꼬리친다’ 등등 동물과 여성을 동일시하면서 부정적 의미로 쓰이는 말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육식의 성정치>에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여성화된 단백질’이라는 개념이다. ‘여성화된 단백질’이란 동물 암컷이 재생산 과정에서 당하는 착취를 표현하는 특수 개념으로, 이를 테면 우유와 달걀은 암컷의 몸에서만 생산된다. 대부분의 식용동물은 다 자란 암컷이나 어린 동물이다. 동물 암컷은 살아 있을 때는 물론 죽어서도 이중으로 착취당한다. 동물 암컷은 자기의 여성성 때문에 억압당하고 대리 유모가 되는 것이다. 재생산 능력이 퇴화화면 도살돼 동물성 단백질 또는 살코기 형태의 단백질로 바뀐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고기를 남성 지배의 상징이자 이 지배를 찬양하는 도구로 이용되게 했을까? <육식의 성정치>는 젠더 불평등이 육식이 선포하는 종 불평등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에서 한 가지 이유를 찾는다. 대부분의 문화에서 고기를 수중에 넣은 쪽은 남성이기 때문이다. 고기는 가치 있는 경제 상품이고, 이 상품을 통제하는 사람들이 권력을 획득했다. 남자들이 여성보다 훌륭한 사냥꾼이기 때문에 이 경제적 재화를 통제하는 일도 남자들의 손안에 들어갔다. 전근대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고기가 차지하는 사회적 비중하고 반비례 관계에 있었다. 고기 단백질을 섭취하는 과정에서 이런 위계관계의 설정은 인종, 계급, 성의 위계를 강제한다.

<육식의 성정치>는 여성과 동물이 가부장제 세계에서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깨달음, 곧 그 둘 모두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취급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지적한다. 가부장제와 착취는 동의어이고, 채식주의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제 문화가 여성을 부재하는 존재로 만들 뿐 아니라 동물을 부재하는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에 채식주의가 가부장제에 저항하는 한 형식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 책은 묻는다. ‘가부장제 권력의 상징을 먹으면서 어떻게 그 권력을 전복할 수 있을까?’라고. 그리고 가부장제 소비문화를 뒤흔들려면 가부장제 육식을 중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죽음과 폭력에 기초한 이런 문화를 재생산하고 강화하는 육식주의의 폭력성과 대상화에 맞선 도전을 촉구한다. 때문에 이 책에서 인용한 이사도라 던컨의 말은 책을 덮고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우리 몸 자체가 살해된 동물의 살아 있는 무덤이면서, 어떻게 이 지구상에 안녕이 오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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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19-05-21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려주신 찜닭 메뉴 이름들 진심으로 역겨워요. 우웩!!!! 저걸 농담으로 생각하고 하하호호 하는 사람과 정말 상종도 하기 싫네요.

잠자냥 2019-05-21 11:00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올린 이미지들이 제가 보기에도 모두 혐오스러워서 다른 분들께 정신적 해를 끼칠 듯해서 염려스러웠어요. 알라딘 블로그 기능 중에 ‘more/less(접기/펼치기)‘ 기능이 있었다면 그걸 썼을 텐데 여기엔 그런 기능이 없어서 그냥 이미지를 노출하고 말았습니다... ㅠ_ㅠ

고니 2019-12-19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이 책을 봐서 잠자냥님 글을 읽게 되었는데 책 읽기도 전에 분노가 이네요. 좋은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착잡하네요

잠자냥 2019-12-19 17:43   좋아요 0 | URL
책에서는 제가 글로 담아내지 못한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꼭 한 번 읽어보세요! 더 분노하게 되겠지만.... 앎이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ㅠㅠ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썰렁한 개그, 쿨함, 삐딱한 태도, 블랙유머 등 뭔가 그 나이대 교수들과는 조금 다른 척 가장하고 있지만 읽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꼰대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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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19-05-20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분 라디오에 나온 걸 한번 들어서 책이 어떨지 궁금했는데.. 역시 별로군요. (소개글에서 책속 발췌한 글 보니 별로일 거 같긴 했습니다 ㅋ)

잠자냥 2019-05-20 10:27   좋아요 1 | URL
하하하. 이분 글 좋아하는 사람들도 꽤 많은 것 같아요. 근데 저는 이분을 널리 알려지게 한 그 ‘추석이란 무엇인가‘ 그 글은 좀 신선한(?) 작법이 눈에 띄긴 했으나 그렇게까지 좋지는 않았거든요. 그래도 꽤 많은 사람들이 칭송(?) 해서 한 번 읽어봤는데, ‘추석이란 무엇인가‘ 투의 글이 계속 반복되니까... 질린다고나 할까... 썰렁한 개그 그것도 좀 읽다 보니 억지스럽고. 공감보다는 ‘지적질‘ ‘꼰대질‘에 더 초점이 맞추어진 글이 많아서 저는 그냥 그랬습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분 책을 또 읽을 것 같지는 않아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