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린
오테사 모시페그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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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부터 매혹적인 작품.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데도 계속 읽게 만드는 힘을 지닌 작품.... 그런데 정확히 279쪽부터 드디어, 이야기가 폭발한다. 대단하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 콜필드처럼 도무지 잊기 힘든 그녀의 이름은 ‘아일린’. 이 책을 읽는다면 당신도 아마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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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19-06-22 1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아일린 이 여자 안 잊혀져요ㅎ
 

지난 토요일 늦은 오후, 걸으려고 집을 나섰다. 내내 화창하던 하늘에 그때쯤엔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지나가는 비겠지, 하고 우산 하나 챙겨서 나갔다. 잠시 걸으니 빗방울이 떨어진다. 그래도 걸었다. 좀 더 걷다보니 빗줄기가 꽤 거세졌다. 집으로 돌아갈까 싶기도 했으나 지난밤 확인한 일기예보에서는 오후 6시에 잠깐 비가 오고 그 뒤로는 맑음 표시였다. 다시 걷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폭우처럼 쏟아지는 빗줄기 때문에 도저히 우산에 기대서 걷기가 불가능해졌다. 어쩌지? 하다가, 가까운 곳에 있던 맥줏집으로 들어갔다. 카페에 가도 됐을 텐데, 그날 이미 커피를 마신 터라...... 아니 그냥 날 밝을 때 맥주가 마시고 싶던 터라.....

유리창으로 쏟아지는 비를 보며 맥주 한 잔과 치킨을 비우고 나오니,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이 하늘이 맑게 갰다. 공기는 더욱 깨끗해졌다. 그래서 다시 걷기 시작. 한참 걷다 보니 목이 말라서 또 다시 맥주를 마시러 들어갔다. 그러다 보니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밤이 깊어졌다. 어느덧 밤 열두시를 넘긴 시간, 갑자기 출출해져서 근처에 있던 24시간 콩나물국밥집에 갔다. 거기서 해장을 하고 집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 시간에도 꽤 많은 손님들이 있다. 아마 나처럼 한 잔 걸치고 해장하고 집에 돌아가려는 사람들이었으리라. 테이블 자리는 이미 다 차서 나는 사람들 무리와 떨어진 방으로 올라갔다. 좌식 자리에 앉은 건 우리뿐이었다.

주문을 마치고 사람들이 열심히 지켜보고 있는 텔레비전을 한번 바라보니, TV에서는 축구 경기를 중계하고 있었다. 아아, 그래서 오늘 사람들이 삼삼오오 술집에 많이 모여 있었구나. 나는 그저 토요일이라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모두의 눈이 텔레비전에 쏠려 있을 때, TV를 보지 않고 있는 한 남자의 등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이제 예순을 조금 넘었을까. 일어선다면 160을 조금 넘을 키에 60킬로그램도 채 되지 않을 것 같은 작은 체구를 지녔다. 그가 내 눈길을 끈 이유는 홀로 잔뜩 취한 채 웅얼웅얼 뭔가를 내내 중얼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환한 국밥집에서 혼자 취해 허공에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내 밥상에도 국밥이 올라왔고, 나는 밥을 먹는 일에 열중했다. 그런데 그때 들려오는 소리, “아, 여기서 이러지 마시라니까. 안받아주려다 받아줬더니 또 그러네. 얼른 드시고 가.” 고개를 돌려보니 우리 테이블에 국밥을 주고 돌아가던 가게 아주머니가 아까 그 취한 사내에게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는 자주 이렇게 취한 상태로 와서 옆자리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거나 하는 모양이었다. 그 남자 옆 자리에는 40대로 보이는 한 남자가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묵묵히 국밥을 입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국밥을 다 먹은 그 남자는 금세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계산대로 향했다. 계산을 치른 그 남자는 갑자기 등을 돌리더니 아까 그 노인을 향해 폭언을 퍼붓기 시작했다. “밥 좀 편하게 먹자. XX야. 나이 처먹으려면 곱게 처먹어. 그 꼬라지니까 그 나이에도 그렇게 혼자 밥 처먹으면서 남한테 시비나 걸고 있지 XX야. 너, 내가 손봐주려다 오늘 바빠서 그냥 간다. 새꺄” 등등. 아까 가게 아주머니가 한 소리하는 걸 듣고 기세가 등등해진 것인지, 꼭 저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을 정도로 폭언을 퍼부었다. 노인에게 한창 퍼부으면서 헬멧을 쓰는 폼과 차림새를 보니 그는 늦은 밤까지 택배를 나르고 뒤늦게 식사를 하던 사람인 듯싶었다.

지켜보니 노인은 시비를 건다기보다는 이 사람 저 사람 가리지 않고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옆 자리 건너 자리 사람들에게도 말을 걸고 있었다. 웅얼거림이나 마찬가지라, 시비라고 보기에도 어려웠다. 노인의 옆 건너 자리에 있던 그들은 30대로 보이는 건장한 남자 셋이다. 그들 중 하나는 몸집이 노인의 두 배는 돼 보였다. 그는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줄곧 노인을 쏘아보더니 담배를 피우러 나가다가 노인에게 덤벼들 기세를 취했다. 그때 나머지 둘이 그를 말림으로써 아무 일도 일어나지는 않았다.

노인의 맞은편 자리에는 남녀가 앉았다. 그런데 그들 중 여자가 아까부터 노인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웃고 있었다. 조롱이랄까. 여자는 이제 주변의 그런 분위기에 고무됐는지, 아니면 자기 앞에 남자가 앉아 있기에 안심이 되었는지 급기야 노인에게 “할아버지, 쉿!쉿!”하면서 껄렁껄렁한 얼굴로 노인을 계속 비웃었다. 나는 여자의 그 조롱이 아까 폭언을 퍼붓던 남자의 태도 못지않게 섬뜩하고 불쾌했다. 저 여자가 혼자 국밥을 먹으러 왔어도 저럴 수 있을까? 아니, 저렇게 홀로 술을 마시면서 웅얼대는 저 노인이, 건장한 30~40대 남자였어도 다들 저럴 수 있었을까? 물론 내가 그 노인 옆자리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그가 계속 그렇게 술 취해서 중얼중얼 거린다면 나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노인을 향한 그 주변 남자들과 그 여자의 태도에는 분명 지나친 무엇인가가 있었다.

텔레비전 속 축구 경기에서 우리나라가 1대 0으로 앞서나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노인 주변 사람들은 축구경기보다 노인을 조롱하거나 위협하는 일을 더 즐기는 듯했다. 여자의 얼굴은 개미집을 발견해서 마구 짓밟아버리는 심술궂은 아이의 얼굴에나 있을 법한 그런 웃음이 스며있었다. 나는 얼마 전 본 영화 <기생충>이 떠올랐다. 기우네 가족과 입주 가사도우미 문광이 서로 죽일 듯이 싸우던 그 장면……. 그 국밥집에서 나를 불편하게 만든 것은 술 취한 노인의 웅얼거림이 아니라, 그에 대응하던 남자의 폭언과 또 다른 남자의 살기어린 눈빛과 여자의 비웃음이었다. 노인보다 젊고 힘세고 곁에 무리가 있고, 남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그 행동들. 그런데 그들은 모두 그 시간에 4천 원짜리 국밥으로 한 끼를 때우고 있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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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9 17: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19 17: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 글자 사전
김소연 지음 / 마음산책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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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두고 계속 보고 싶은 책. ‘책 : 인간의 사유와 인간의 말이 얼마나 정교하고 아름다운지 책을 통해 목격하는 행위는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에 대해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한 글자 사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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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을 들춰보지 않은 지 꽤 됐다. ‘들춰보지’ 않았다고 쓴 까닭은 여기서 말하는 사전이란 종이 사전을 뜻하기 때문이다. 온라인 사전은 하루에도 여러 차례 보면서 종이 사전은 언제부터인가 펼쳐보지 않게 된 것이다. 오래 전부터 사전의 중요성은 익히 들어왔다. 지금도 국어사전 뜻풀이를 보면서 가끔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언어를 습득하기 위해 사전을 ‘읽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고개를 갸우뚱한 적이 많다. 내게 사전은 ‘찾는’용도였다. 사전을 ‘읽고’ 있기에는 다른 재미난 책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만일 뜻풀이가 색다른 사전이 있다면 어떨까? 그런 사전은 신기한 느낌에 ‘뜻풀이’를 보는 재미로 읽고 싶을 것도 같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뜻풀이로 이뤄진 사전이 있다면 더 궁금하지 않을까?


연애(恋愛): 특정한 이성에게 특별한 애정을 품고 둘만이 함께 있고 싶으며 가능하다면 합체하고 싶은 생각을 갖지만 평소에는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아 무척 마음이 괴로운 (또는 가끔 이루어져 환희하는) 상태.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제3판
백도: 과즙이 많고 맛있다.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제4판
대합: 먹는 조개로서 가장 평범하고 맛있다.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제4판
붉돔: 얼굴은 붉은 도깨비 같지만 맛있다.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제3판
쑤기미: 꼴이 흉한 머리를 하고 있지만 맛있다.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제3판


‘연애’를 합체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표현하다니, 그런 뜻풀이가 사전에 실리다니! 두 눈의 동공이 커진다. 게다가 백도, 대합, 붉돔 등등에 ‘맛있다’는 주관적인 표현을 쓰다니? 그 점도 놀랍다. 이것은 일본에서 가장 많이 팔리고 있는 사전 중 하나인 <신메이카이 국어사전>에 실린 용례 중 하나이다. <새로운 단어를 찾습니다 - 4천만 부가 팔린 사전을 만든 사람들>은 일본 사전계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겐보 히데토시’와 ‘야마다 다다오’ 두 사람의 관계를 중심으로 그들의 만든 사전의 특색을 살펴보고 그것을 통해서 말과 사전의 의미를 되짚어본다. 사전에 별다른 관심이 없으면서, 그것도 우리나라 사전이 아닌, 일본 국어사전을 다룬 이 책에 흥미가 생겼던 까닭은 바로 사전이 ‘말’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일본이라고 하면 쉽게 떠오르는 이미지, ‘오다쿠’ 같은, 그 이미지를 떠올리며 사전에 영혼을 바친 이 두 남자는 과연 얼마나 말에 미친 모습을 보여줄지 내심 기대했다. 그렇게 한 분야에 몰입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자극 받고 싶은 기분도 있었다.

저토록 주관적인 뜻풀이를 한 사람은 ‘야마다 다다오’로 그는 ‘겐보 히데토시’와 함께 한때는 같은 사전을 편찬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겐보와 야마다 두 사람은 도쿄 대학 동기생이고, 처음에는 힘을 합쳐 <메이카이 국어사전>을 만들던 협력자이자 친구 사이였다. 그런데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시점을 경계로 결별한다. 그 뒤 한 출판사에서 성격이 완전히 다른 국어사전 두 권이 탄생하게 된다. 야마다가 중심으로 편찬한 <신메이카이 국어사전>과 겐보가 중심으로 만든 <산세이도 국어사전>이 그 주인공이다. 두 사람이 내놓은 국어사전은 누적 합계 약 4000만부의 발행부수를 기록했고, 일본 전후 모든 세대가 두 사람의 사전을 접해왔다. 겐보가 만든 <산세이도 국어사전>을 살펴보자.


연애(恋愛): 남녀 사이의 그리워하는 애정(남녀 사이에 그리워하는 애정이 작용하는 것). 사랑(恋). -<산세이도 국어사전>, 제3판
백도: 과실의 살이 연노랑색의 복숭아. 흰 복숭아. -<산세이도 국어사전>, 제3판
붉돔: 도미와 비슷한, 몸체가 가늘고 긴 생선. -<산세이도 국어사전>, 제3판


야마다의 <신메이카이>에 비해 겐보의 <산세이도>는 큰 특징이 없어 보인다. 개성도 없는 듯하다. 무난하다. 늘 우리가 보아왔던 사전 그대로의 뜻풀이에 충실하다. 여기서 잠시, 우리나라 국어사전에서는 ‘연애’를 어떻게 풀이하고 있을지 궁금해서 찾아봤다.


연애: 남녀가 서로 그리워하고 사랑함. -표준국어사전
연애: 상대방을 서로 애틋하게 사랑하여 사귐. -고려대한국어대사전
연애: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해서 사귀는 것. -우리말샘


우리나라 국어사전은 겐보의 <산세이도>와 거의 비슷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나는 위의 뜻풀이 중 ‘연애’ 항목에서 그나마 가장 마음에 드는 뜻풀이를 고르라면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을 선택하겠다. 나머지 뜻풀이는 모두 연애를 남녀 또는 이성애로 한정짓고 있기 때문에 딱히 올바른 풀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말을 처음 배우는 어린 아이들이 ‘연애’ 항목을 찾아봤을 때 그 뜻풀이가 ‘남녀’로만 한정되어 있다면 그 뜻풀이는 곧 생각의 한계를 결정짓는다. 남자와 남자 또는 여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해서 사귀는 것, 서로 그리워하는 것은 연애가 아닌 비정상적인 행태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말의 정의와 그 정의를 담고 있는 사전은 한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겐보와 야마다 두 사람의 ‘다름’은 사전 곳곳에서 계속 드러난다.


독서: 책을 읽는 일 -<산세이도 국어사전>, 제2판
독서: ‘연구나 조사 때문이거나 흥미 본위가 아니라’ 교양을 위해 책을 읽는 일. ‘드러누워 읽거나 잡지/주간지를 읽는 일은 본래의 독서에 포함되지 않는다.’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제2판

범인(凡人): 보통사람. 하찮은 사람. -<산세이도 국어사전>, 제2판
범인(凡人): 스스로를 향상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거나 공명심을 갖고 있지 않거나 해서 다른 것에 대한 영향력이 전무한 채 일생을 마치는 사람. 가정 제일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는 대다수 서민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제3판


똑같은 단어임에도 이처럼 서로 완전히 다른 뜻풀이에서 인간과 삶, 언어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차이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뜻풀이만 보자면 야마다에 비해 겐보의 특장점이랄까, 개성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왜 겐보가 일본 사전계의 양대 산맥의 한 축을 이루는지 의아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단어를 찾습니다>를 읽다 보면 겐보가 거의 일본 사전계의 중심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말과 사전에 영혼을 팔아버린 이 남자의 삶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처음에 나 또한 솔깃했던 사람은 야마다 쪽이었다. 대체 왜 저런 풀이를 하는 거야? 풀이가 지나치게 자의적인 거 아니야? 그럼에도 인간적이군, 재미있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처음에는 야마다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지만 겐보라는 사람과 그의 작업 방식을 지켜보는 동안 그에게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존경심이 절로 든다.

겐보가 만든 <산세이도 국어사전>의 특징은 ‘객관적’이며 중학생이 읽어도 이해할 수 있는 ‘단문이고 간결한’ 뜻풀이에 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겐보의 사전은 사전계에서 가장 ‘현대적인’ 사전으로 꼽힌다. 물론 ‘객관성’이나 ‘단문이고 간결하다’는 다른 보통의 사전에도 해당되기 때문에 두드러진 개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때문에 <산세이도>의 가장 알기 쉬운 개성은 ‘현대적’이라는 점이다. 겐보는 “그 시대에 널리 정착한 새로운 말이나 표현을 적극적으로 사전에 싣는다.”는 태도로 말을 수집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글자 그대로 ‘워드헌팅’ 50년- 도쿄 대학 국문과를 졸업한 24세에 사전 편찬 작업을 처음 맡고부터 50년 동안, 세상에서 쓰이는 말의 용례를 모아 한 장 한 장 카드에 기록한다. 그 용례 카드만 145만 개에 이른다. 이 145만 개라는 숫자는 도저히 한 사람이 50년 세월 동안 만들 수 없는, 불가능한 개수다. 그럼에도 겐보는 그렇게 했다. 이유는 단 하나. ‘소리도 없이 변하는 말의 기준을 정하고, 그 시대에 살아있는 현대어를 사전에 담기 위해서’였다.

그의 수집 대상은 신문, 잡지, 주간지, 월간지, 단행본에서 문학전집, 텔레비전, 라디오, 팸플릿, 삽입 광고지, 우편 광고, 간판, 게시판, 담화, 인사 등에 이른다. 때문에 그는 거리를 걸을 때도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도, 가족들과 여행을 가서도 말 수집에 여념이 없다. ‘현대어 사전에는 살아 있는 표제어, 살아 있는 용례를 반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반영해 <산세이도 국어사전>의 제4판에는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영웅 이름이 실렸다.


울트라맨: SF 텔레비전 영화 <울트라맨>의 주인공. 우주에서 지구로 와서 정의를 위해 괴수들과 싸운다. -<산세이도 국어사전>, 제4판


제4판은 1992년에 간행되었다. <울트라맨> 첫 회가 일본 텔레비전에 방영된 해는 1966년이어서 산세이도 국어사전에 실리기까지 26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대체 어느 부분이 현대적인가 하는 의문이 들겠지만 국어사전 세계에서 이러한 채택 판단은 매우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편에 속한다고 한다. 이렇듯 <신메이카이 국어사전>이 ‘뜻풀이’에 중점을 두고 있는 데 비해, <산세이도 국어사전>은> 어떤 말을 사전에 올릴까하는 ‘표제어 선정’에 중점을 두었다. 철저하게 현대에 바탕을 둔 사전을 지향하는 <산세이도 국어사전>에는 ‘국어사전은 딱딱하다’는 편견을 깨는 말도 수록되어 있다.


엣치[H : Hentai(변태)] : 징그럽고 역겨운 (짓을 하는) 모습 -<산세이도 국어사전>, 제2판


또한 겐보는 ‘단어의 이미지’는 생활과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 즉 일상의 경험 속에서 추출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물’이라는 단어의 뜻풀이도 당시로서는 혁명적으로 바꾼다. 그때까지는 사전에서 ‘물’이라는 단어를 찾으면 주로 ‘수소와 산소의 화합물’이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아주 오래전 우리나라 사전도 이와 비슷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수소와 산소의 화합물이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물’의 이미지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


물: 수소2, 산소 1의 비율로 화합한 무색. 무미의 액체. 지구 표면의 대부분을 덮고 있다. -<메이카이 국어사전>, 개정판
물: 우리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투명하고 차가운 액체. -<산세이도 국어사전>, 초판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겐보는 여자를 인간에 대한 생리적 관점 대신 사회적 기능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방법으로 뜻풀이를 하기도 한다.


여자: 사람 중에서 다정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사람. -<산세이도 국어사전>, 초판
남자: 사람 중에서 힘이 세고 주로 밖에서 일하는 사람. 남성. -<산세이도 국어사전>, 초판


그리고 이런 뜻풀이도 있는데, 이 뜻풀이는 겐보 그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듯해, 책을 읽다가 한참 이 구절에서 눈이 머물렀다.


사랑: (상대의 행복이나 발전을 바라는) 따뜻한 마음. -<산세이도 국어사전>, 초판


이 ‘사랑’ 뜻풀이는 좋은 평가를 받아 그 후 다른 사전에도 비슷한 설명이 실리게 되었다고 한다. 평소에 겐보는 ‘사전에도 작가주의를 도입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사전 편찬자에게 지나치게 냉담하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진정 작가주의적 태도로 사전을 편찬했던 사람이 아닐까.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겐보 히데토시’에게 반해 그에 대해서 더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편 내가 좋아하는 인간 유형은 아니지만(이 책 독자라면 알 수 있을 ‘그 사건’ 때문에…….) ‘야마다’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야마다는 대체 왜 저토록 독특한 뜻풀이를 하게 되었을까? 그는 일본 사전계의 오랜 침체의 원인이 전근대적인 관행과 방법론의 무자각에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사전계에 만연했던 도용과 표절 관행을 뿌리 뽑고자 독특한 뜻풀이를 시작한 것이다. 기존의 사전과는 완전히 다른 풀이를 통해 ‘어디 표절해보려면 해봐라’하는 태도로 나온 것이다. 장문도 마다하지 않고 상세하게 뜻풀이를 쓴 그의 사전은 적잖은 파문을 일으켰지만, 사전을 ‘찾는’ 것에서 ‘읽는’ 것으로 바꿔놓았다. 특히 야마다는 ‘사전은 문명비평’이라는 관점에서 ‘존엄한 인간이 하나의 인격으로 취급되는 것처럼, 사전 한 권에는 마땅히 편자 특유의 맛이 배어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웃기다: 그 녀석이 의원이라니 웃기는군.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초판
공복(公僕):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봉사하는 자로서의 공무원을 칭함. [다만 실정은 이상과는 거리가 멀다.]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제3판
재산: 미술품을 재산으로 사는 놈이 있다.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제4판


이것 말고도 이 책에 실린 야마다가 쓴 <신메이카이 국어사전>의 뜻풀이를 읽고 있노라면 키득키득 웃음이 나오는 부분도 있고, 절대 동의할 수 없을 만큼 자의적인 풀이도 있다. 그럼에도 그 안에는 일종의 ‘풍자’가 깃들어있다. ‘말에는 표면적인 의미와 동시에 이면에 숨겨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 야마다. 그는 그 ‘이면의 의미를 숨기지 않고 지적할 수 있다면, 이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무척 기쁜 소식이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그 충실한 결과물이 바로 <신메이카이 국어사전>이다.

이렇게 말과 사전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 못지않게, 겐보와 야마다 두 사람이 결정적으로 헤어지게 된 계기가 무엇일까 쫓는 과정 때문에 이 책은 매우 흥미롭다. 마치 추리 소설의 단서를 하나씩 발견하듯이 저자는 두 사람이 편찬한 사전에서 그 이유를 추적한다.


시점: “1월 9일”이라는 시점에서는 그 사실이 판명되지 않았다. -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제4판

실로: 조수 자리에 있었던 기간이 실로 17년[=놀랄 만하게 17년이나 되는 긴 기간에 이르렀다. 견디게 만드는 사람도 사람이지만 견디는 사람도 대단하다는 감개가 포함되어 있다]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초판


유독 1월 9일이라고 특정 날짜를 표기한 야마다, 그리고 자신이 겐보의 조수로 17년이나 있었다고 투정하듯이 뜻풀이에 쓴 야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서 저자는 겐보와 야마다의 주변 인물과 그 무렵 출판사 관계자, 사전 편찬 협력자 등을 만나 그 둘이 멀어지게 된 결정적인 원인을 쫓는다. 그렇게 해서 밝혀진 그 사건의 진상 또한 어찌 보면 ‘말’의 의미를 두 사람이 전혀 다르게 받아들인 것에서 비롯되었기에 참으로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다.


사고(事故): 사건. 고장. -<산세이도 국어사전>, 초판


사고(事故): 그 일의 실시. 실현을 방해하는 좋지 못한 사정.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초판


겐보와 야마다는 그 1월 9일을 기점으로 결별해 죽을 때까지 서로 다시는 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기가 만든 사전 속에서 한때 소중했던 벗에 대한 마음을 표현한다.


~면: 야마다라면 요즘 못 보는군. -<산세이도 국어사전>, 제2판

알력: 그런 일로 알력이 생겨 결국 헤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제4판


무엇보다도 세월이 흐를수록 야마다의 심경 변화가 큰 듯하다.


실로: 조수 자리에 있었던 기간이 실로 17년[=놀랄 만하게 17년이나 되는 긴 기간에 이르렀다. 견디게 만드는 사람도 사람이지만 견디는 사람도 대단하다는 감개가 포함되어 있다]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초판


실로: “이런 좋은 벗을 잃는다는 것은 자신에게도 실로 커다란 불행이라고까지 말했다.”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제4판


야마다는 ‘실로’라는 표현을 오래 전에는 자신이 17년이나 겐보의 조수로 일했다고 불평하듯이 뜻풀이를 해놓더니 제4판에서는 ‘실로’의 의미를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하며 ‘좋은 벗’을 잃어버린 슬픔을 말하는 용례로 바꾸었다. 게다가 ‘은인’이라는 단어의 뜻풀이도 크게 변한다.


은인: 은혜를 받은 사람. 신세를 진 사람.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제4판

은인: 재난에서 구해주거나 물심양면에 걸쳐 지원의 손길을 뻗어주거나 분발할 기회를 주는 등. 그 사람이 그 후 무사하고 안온하게 살아가는 데 크게 이바지한 사람.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제5판


‘실로’와 ‘은인’의 뜻풀이 변화와 겐보가 쓴 ‘~면’의 뜻풀이에서 나는 조금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전과 말에 미친, 그래서 그 밖의 것에는 관심도 없는 듯 보였던 그들이었지만 인간이었기에 실수도 있고, 분노도 하고, 시기심도 있고, 자신만의 과업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는 결국 회한에 찬 마음으로 자신의 벗이자, 은인을 용서하고 또 고마워하게 된다. 일본 작가 이노우에 히사시는 사전의 정의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비범한 사람이 평범하지 않은 생활을 해서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 사전’이라고. 겐보와 야마다 두 사람에게 꼭 맞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물: 가장 무미의 맛. 그러므로 가장 최고의 맛. 그렇지만 가장 나중의 맛. 그럼에도 가장 최초의 맛. 바라보면 가장 평화의 맛. 뛰어들면 가장 쾌락의 맛. 범람하면 공포의 대상. 부족하면 궁핍의 요인. 한 모금으로 목을 적시고, 한 됫박으로는 나무를 적시고, 한 양동이로는 몸을 적신다.  -김소연, <한 글자 사전>


<새로운 단어를 찾습니다>를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방 한쪽에 꽂혀있는 김소연의 <한 글자 사전>이 눈에 들어왔다. 이 사전에 혹시 ‘물’이 있나 하고 찾아보니 있었다. 시인의 눈으로 풀이한 ‘물’이기에 그야말로 한 편의 시와도 같다. 그러면서도 담아야 할 의미는 모두 갖추고 있다. 아니,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한 글자 사전>을 다시 펼쳐 읽어본다. <새로운 단어를 찾습니다>를 본 후, 읽으니 이것이 왜 사전이 아니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야마다의 <신메이카이 국어사전>이 독특한 뜻풀이로 일본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면 김소연 시인의 <한 글자 사전>도 당당히 사전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표제어가 더 많다면 사전이 되고도 남음직할 것이다. 특히 ‘울’과 ‘멍’이라는 단어의 뜻풀이는 여러 차례 감탄하게 된다.


국: 아버지가 없는 밥상에서 더불어 없어졌던 메뉴
님: 옛날에는 사모하는 단 한 사람에게 사용한 가장 귀한 말이지만 이제는 친근한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두루 사용하는 가장 손쉬운 존칭.
득: 이것 없이는 이제 사랑도 하지 않는다.
등: 동물은 평화롭고 생선은 푸르며 사람은 애처롭다
땅: 생명이 싹트는 곳에서 돈이 싹트는 곳으로 바뀌었다.
멍: 다친 부위는 아름다움에 가까워진다. 노랑, 초록, 파랑, 보라, 절반 이상이 무지개와 같은 색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창안하였으나 권력을 비호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여: 여자들은 환영받지 못한 여동생으로 태어나 여고생이 되었다가 여대생이 되고, 여급에서 여사원에서 여사장이, 여가수나 여의사나 여교사나 여교수나 여류 화가나 여류 작가로 산다. 남자들은 환영받는 남동생으로 태어나 고교생이 되었다가 대학생이 되고, 사원에서 사장이, 가수나 의사나 교사나 교수나 화가나 작가로 사는 동안에.
울: 찬물에 조물조물 비벼 빨아야 한다. 세게 비틀지 않아야 한다. 뉘어서 말려야 한다. 그래도 바닥에 물이 울음처럼 뚝뚝 떨어진다.
티: 가난함은 티가 나고 부유함은 티를 낸다.  -김소연, <한 글자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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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6-18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한글자사전 을 사야겠어요. 방금 주문 마쳤는데 취소하고 다시 해야하나..

잠자냥 2019-06-18 14:45   좋아요 0 | URL
<한 글자 사전>은 전자책도 나와 있어요. ㅎㅎ

잠자냥 2019-06-18 14:51   좋아요 0 | URL
그나저나 병원 탈출하자마자 책 사시는 이분.... ㅋㅋㅋ

다락방 2019-06-18 15:05   좋아요 0 | URL
점심 먹고 들어와서 책 주문하고 여태 졸았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휴 이제 정신 좀 차려야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19-06-18 15:19   좋아요 0 | URL
정신 좀 차리면 퇴근할 때~ 퇴근하고 나면 완전 멀쩡한 정신~ 밤이면 더 또렷해지는 정신~ 그것이 인생입니다. 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06-18 15:23   좋아요 0 | URL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사는거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새로운 단어를 찾습니다 - 4천만 부가 팔린 사전을 만든 사람들
사사키 겐이치 지음, 송태욱 옮김 / 뮤진트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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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사전에 사로잡혀 평생을 사전에 바친 두 남자의 이야기. 둘 관계가 어쩌다 틀어졌는지 쫓는 과정도 흥미롭고, 그들 관계 변화에 따라 둘이 만든 사전의 용례 변화가 생기는 점도 무척 흥미롭다. 그들 인생을 뒤쫓으며 말의 의미를 생각하다 보면 먹먹한 감동이 밀려온다. 강추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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