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에게 계급은 상처이자 부끄러움이다.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는 충격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부끄러움>은 계급에서 비롯된 상처와 부끄러움의 절절한 자기고백적 기록이다. 아버지가 엄마를 죽이려고 했다는 문장만 보면 이제까지 소개된 아니 에르노의 작품들 <남자의 자리>, <한 여자> 또는 <단순한 열정>에서처럼 가족이나 자기 자신과 얽힌 부끄러움에 관한 지나치리만큼 솔직한 기록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물론 <부끄러움>은 아니 에르노가 열두 살 무렵, 6월의 어느 오후 아버지가 엄마를 낫으로 죽이겠다고 위협하던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이야기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아버지의 폭력은 아니 에르노가 속한 세계, 배우지 못한 하층 노동자 계급의 삶과 관련되어 있음을 곧 알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이 속한 계급의 그 삶을 ‘부끄러움’으로 인식한다.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는 절대로 갈 수 없었던, 아니 대부분이 가지 못하는 사립학교에 다니게 되면서부터 자기가 이 사립학교의 여느 아이들과 다르다는, 그리고 그 ‘다름’은 곧 자신이 속한 세계, 즉 계급이 그들이 속한 세계와 다르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스스로 ‘사립학교의 품위와 완벽함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고 느끼면서 ‘부끄러움 속에 편입되었다’고 생각한다. 마치 영화 <기생충>에서 가난을 숨길 수 없는 ‘냄새’로 묘사하듯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남루한 삶을 ‘부끄러움’이라는 단어로 정의한다. 아니 에르노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부모의 직업, 궁핍한 그들의 생활, 노동자였던 그들의 과거, 그리고 우리의 존재 양식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

자신이 속한 세계,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이 하층 계급의 세계를 부끄럽다고 말하는 열두 살 소녀에게 누가 가난을, 네가 속한 계급을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 그러면 못쓴다고 탓할 수 있을까? 숨길 수 없는 가난의 ‘냄새’처럼 아니 에르노가 속했던 계층의 사람들-그러니까 아버지와 어머니로 대표할 수 있는-은 레스토랑에서 우아하게 음식을 주문할 줄도 모르고, 월말이 되면 가게에서 팔다 남은 통조림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이며 집안은 늘 폭력이 난무한다. 그러고도 언제 악다구니를 쓰며 싸웠냐는 듯이 다시 웃고 떠들어댄다. 아니 에르노는 ‘범람하는 폭력, 알코올의존증, 정신병의 세계’에 자신이 원치 않았어도 ‘소속되고 만’ 것이다. 그녀가 속한 세계는 사생활이 존중받을 수 없는, 언제나 남에게 노출되기 쉬운 환경이다. 그렇기에 ‘점잖은 언행을 하고(욕이나 상스런 표현, 험담을 하지 않는 것) 분노나 슬픔 같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질투나 호기심 혹은 소문의 대상이 될 만한 것은 모두 감추게’된다. 이 세계에서 ‘예의란 일종의 보호 장벽인 셈이고, 따라서 부부 사이나 부모와 자식 사이의 예의는 위선이나 악의처럼 느껴져서 불필요한 것’이다. ‘거칠고 노골적이고 악을 쓰는 것이 정상적인 가족 간의 대화’이다. 이 계층에 속한 남들과 똑같이 ‘살자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목표이자 성취해야 할 이상’이며 이런 세계에서 ‘개성은 일탈, 심지어 조금 미친 것 같은 증세로 간주’된다.

그렇기에 전형적인 하층 계급 출신의 아버지는 갈등이 일어났을 때 조목조목 대화를 통해 풀기보다는 어머니에 대한 분노를 낫을 들고, 죽일 듯이 위협하는 것으로 표현하며(그것이 이 계층의 일상과도 같은, 정상적인 삶이기에),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폭력을 내면화한 채 살아간다. 때로는 그런 폭력을 자신의 딸을 향해 아무렇지 않게 쏟아내는 폭언과 손찌검으로 대물림하기도 한다. 이런 세계에서 ‘부끄러움’은 그녀와 그녀 가족의 존재 양식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으며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던 그 사건에서, 부끄러움은 그녀의 삶의 방식이 된다. 그리고 이런 인식은 학교에서 밤늦게 돌아온 어느 날, 선생님과 친구들이 아니 에르노를 집까지 데려다 준 그날, 극대화된다. 어머니는 ‘구겨지고 얼룩덜룩한 속옷 바람으로, 잠이 덜 깨 입을 굳게 다물고 머리를 산발한’ 채 현관 불빛 아래 나타난다. 그때 그녀는 처음으로 어머니를 사립학교 세계의 시선으로 본다. 그리고 그녀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 했던 장면과 아무 상관없는 이 장면은 ‘그것의 연장’으로 생각된다. ‘아무렇게나 풀어헤쳐진 이상한 셔츠 사이로 내비친 어머니의 알몸뚱이를 통해 우리의 진면목,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발각된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눈을 뜨자마나 허둥지둥 옷을 입고 일터로 나가야 하는 우리 부류의 여자들에게 잠옷이나 가운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이상한 사치품으로 여겨졌다. 잠옷이 존재하지 않는 나의 사고 체계 속에 살면서 부끄러움에서 벗어나기란 불가능했다. (<부끄러움>, 119쪽)


그녀가 이런 부끄러움을 통해 인식하는 깨달음은 단순한 물질적인 궁핍함에서 비롯된 수치심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녀는 자신의 수치심은 지배계층의 생활양식과 언어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열등감임을 깨닫는다. 잠옷이 이상한 사치품으로 여겨지고, 예의와 개성이 비정상적인 일탈로 여겨지는, 그런 세계에 속한 아니 에르노에게 오페라 <골콩드의 왕비>, 영화 <선셋 대로>, 아이스크림, 초원처럼 1952년에 그녀를 꿈꾸게 했던 단어들은 영원히 어떤 무게도 지니지 못할 것이다. 어릴 때부터 똑똑하고 남달랐기에 자신이 속한 Y시에서는 드물게 사립학교에 갔고, 대학에 진학해 문학교수가 되었으며,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는 작가가 된 아니 에르노. 그녀가 이 책에서 말하듯 ‘사진 속 여자아이와 지금의 나 사이에는 이제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그저 그녀 스스로 ‘이 책을 쓰게 만든 6월 일요일의 그 장면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이 속했던 계급을 벗어나 다른 계층으로 이동했기에, 유년 시절의 부끄러움과 열등감을 글로 쓰는 일, 그 상처와 아픔을 다시 헤집어 전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그럼에도 아니 에르노는 <부끄러움>을 통해 그녀와 가족, 그들이 속한 집단이 겪었던 소외감의 근원, 그 뿌리 깊은 불평등을 담담히 써내려간다.

아니 에르노는 스스로 ‘나 자신의 인류학자’가 되리라는 다짐 아래 언제나 자신이 속한 계급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를 멈추지 않았다. <남자의 자리>의 아버지의 일상, <한 여자>의 어머니의 삶,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였던 <단순한 열정>에서도 계급차이가 있는 두 남녀의 사랑을 그렸다. 그녀의 작품이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바로 그 말하기 어려운 하층 계급의 삶을 지독하리만치 건조하고도 담담한 문체로 써내려갔기 때문은 아닐까. 프루스트의 작품이나 사르트르의 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프랑스적인 삶, 그 귀족적인 ‘고급진’ 삶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아니 에르노는 때로는 자기파괴적으로 느껴질 만큼의 적나라한 글을 통해 보여준다.

<부끄러움>을 읽으며 떠오른 또 다른 책은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이다. <부끄러움>을 1952년 여름 프랑스 북서지방 소도시 Y시에 대한 상세한 사회학적 보고서라고 한다면 <사물들>은 1960년대 프랑스인들의 삶을 건조하리만치 세밀하게 보여준다. <사물들>에서 그려진 세계는 아니 에르노가 속했던 하층 계급은 아닌, 그렇다고 프루스트와 사르트르 같은 작가들이 속했던 상층 계급도 아니다. 평범한 중산층 젊은이들의 삶이라고나 할까? 아니, 중산층에 편입되고자 애쓰는 젊은이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사물들>은 어떤 집의 복도를 묘사하면서 시작한다. 이어서 그 집의 거실, 서재, 침실 등의 세부 묘사가 이어진다. 단순히 거실과 침실, 서재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 공간을 이루는 ‘사물들’의 세세한 묘사가 이어진다. 작가가 그리는 공간은 어디선가 많이 본 듯 익숙한 느낌이다. 프랑스에서 살아 본 적 없는 내게도 친숙할 정도이다. <사물들 : 60년대 이야기>라는 부제에서 눈치 챌 수 있듯 이 작품은 60년대 프랑스 사회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입하려는 스물넷의 제롬과 스물 둘의 실비. 별다른 배경이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고, 고만고만한 대학을 나온 이들. 첫 출발로 삼는 직업 또한 고만고만하다. ‘대부분의 동료들처럼 제롬과 실비도 선택이 아닌 필요에 의해 사회심리 조사원’이 된다. 그리고 그들은 그저 단 한 가지, ‘더 잘 살고 싶다’는 욕망만으로 가득하다. 학생 신분에서 벗어나 그저 그런 직업으로 돈을 벌기 시작하는 삶. 그 삶은 곧 ‘더 널찍한 방, 수돗물, 샤워실, 다양한 메뉴랄 것도 없이 단지 학교 식당보다 좀 나은 정도의 식사와 자가용, 음반, 휴가, 옷의 필요’를 느끼게 하는 삶이었다. 제롬과 실비는 현대인이라면 욕망할만한 집, 자동차, 물건들을 원하면서 그 욕망을 채우는 삶에 충실하게 적응해간다.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쿨하다고 여겨지는 상품을 욕망하고 소비하고, 그러면서 순간적인 만족을 느낀다. 그렇지만 곧 또 다른 ‘사물’- 광고, 잡지, 진열장 속의 사물들을 원하게 되는 삶. 현대인은 특별한 물건을 소비함으로써 자신이 남과 다르다고, 혹은 남들처럼 잘산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을 법한 ‘사물’을 갖지 못하면 불행해한다. 쳇바퀴 돌 듯 이런 삶이 반복된다. 그러면서 하루하루 늙어간다. <사물들>의 제롬과 실비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사물들>은 제롬과 실비가 학생 신분을 벗어나 사회에 진입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면서 현대인의 상대적 빈곤을 예리하게 보여준다.

한편, 똑같이 하층 계급에서 태어나 자신의 힘만으로 다른 계급으로 이동해간 여성의 삶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벨 훅스의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가 떠오르기도 한다. 이 책은 ‘계급’이라는, 사람들이 좀처럼 이야기하기 어려운 주제를 담고 있다. 벨 훅스는 “지금 당신은 어디에 서 있나요?”라고 입을 뗀다. 계급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서 있는 위치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며…….

벨 훅스는 흑인여성이다. 영문학 전공자로 젠더, 인종, 계급, 문화와 관련한 다수의 비평서를 쓰면서 문화비평가이자 페미니스트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흑인여성으로 페미니스트 운동을 하고 있다면 그녀가 속한 자리가 어디쯤일지 짐작은 갈 것이다. 남부 켄터키 주 흑인 분리 구역에서 태어나, 1973년 스탠퍼드대학을 졸업했다는 그녀의 이력을 보면서 흑인 분리 구역에서, 그것도 여자로 태어나 스탠퍼드대학을 졸업하기까지 얼마나 험난한 세월을 보냈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런 그녀의 고단한 삶, 그러므로 더욱 애쓰는 삶은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니 에르노의 부끄러움과 수치심의 정체를 사회학적으로 밝혀본다면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가 된다고나 할까?

전형적인 노동자 계급, 가난한 흑인 집안에서 태어나 ‘풍요로운 세상’으로 이동한 벨 훅스- 그녀는 계급 문제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음을 이야기한다. 모두가 ‘흑인이기’ 때문이라는 인종 문제와 ‘여자이기’ 때문이라는 젠더 문제로 계급 문제를 희석할 뿐이었지, 그 문제를 정면으로 언급하기를 꺼려해 왔고, 그녀 또한 자신이 속한 세계가 흑인이고, 여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다 마침내 대학에서 인종과 성(性 )문제보다 ‘계급’문제가 가장 뼈아프게 자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미국 사회 어느 곳에서도 ‘계급’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얼마든지 노력하고, 일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부’를 창출하는 능력을 단순히 개인의 문제(근면, 성실한 태도 등)로 치부하며 흑인은 게으르고 일하지 않기 때문에 가난할 수밖에 없다는 이념을 전파한다. 게다가 그런 가난한 자들을 부자들의 안락한 생활을 위협하는 존재(약물에 취해, 총기를 소지하고)로 설파하기까지 한다. 흑인도 노력하면, 여자도 노력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는데, 정상에 다다를 수 있는데 단지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벨 훅스는 만일 진실로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당신도 성공해서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 속의 ‘그 정상’이라는 위치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반문한다.

벨 훅스에 따르면 ‘지배 계급은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할까봐 약물 중독을 심고, 노동 계급에게는 쇼핑 중독을 심었다.’ 노동 계급이 계속해서 가난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그녀는 광고의 악영향을 이야기한다. 물건을 사면 그만큼 당신의 지위가 향상된다는 거짓말로 가난한 사람들을 현혹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는 <사물들>의 실비와 제롬이 떠오른다. 광고를 보고 물건을 사면서 자신들의 삶이 더 나아지고 있다고 믿는 착각……. 벨 훅스가 보기에 가난한 사람들은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가난하기 때문에 재테크라는 말 자체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악순환으로 모든 인종의 여자들과 흑인 남성들이 빠른 속도로 가난하고 혜택을 박탈당한 계급으로 유입되고 있음을 그녀는 지적한다. 그리고 벨 훅스는 ‘계급 문제를 직시하고, 더 많은 사실을 깨달아 경제적 정의를 위해 제대로 투쟁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계급 없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면 제일 먼저 공정한 경제 체제부터 만들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출발은 우리 모두가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직시하는’ 데부터 시작됨을 또 한차례 강조한다.

아니 에르노도, 벨 훅스도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었는지를 뚜렷하게 알고 있었다. 비록 그 위치가 자신에게 부끄러움과 상처가 됐을지언정 그것을 글로 써서 기록했다. 서로 다른 언어, 전혀 다른 표현이지만 그렇게 남긴 이유는 무엇일까? 신분제도가 사라졌으므로 자연히 계급도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순진한 믿음. 세계는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로 구별될 뿐 계급은 없다는 믿음, 모두가 부지런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안일한 믿음, 계급을 외면함으로써 그 계급에서 파생된 뿌리 깊은 불평등까지 덮어버리고 싶은 그 구조적 모순을 깨뜨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이런 책들은 프랑스나 미국이나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이나 모두 엄연히 계급과 계층은 존재하며 그것을 외면하고 모른척할 때, 오히려 거기에서 비롯된 불평등은 더 심화될 것이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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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니 에르노 지음, 이재룡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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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고 싶어했던 세계가 아니라,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가 속한 노동자 계급, 하층 계급의 세계를 죽이고 싶었던,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이야기. 계급적 상처와 그 부끄러움을 글로 승화한 용기는 참 대단하다는 생각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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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오레스테이아 열린책들 세계문학 197
아이스킬로스 지음, 두행숙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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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딸을, 아내가 남편을,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하는 패륜적인 사건들의 연속. 그 가운데 인간의 운명과 과연 정의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불현듯 이 작품을 읽은 까닭은 유진 오닐 <상복이 어울리는 엘렉트라>를 읽기 위해서였다. 이 가족 패륜 막장극을 유진 오닐은 어떻게 현대화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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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워치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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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비가 내렸다. 책을 덮으니 창밖으로 빗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 때문인가, 괜히 센티멘털해진 마음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 내가 누운 이곳이 런던이라면, 그리고 이렇게 하염없이 비가 내리는 깊은 밤이라면, 도저히 잠을 청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면 그 거리 곳곳에 그들이 있을 것만 같았다. 나처럼 잠들지 못하고 런던 골목, 골목을 그들이 정처 없이 떠돌고 있을 것만 같았다. 케이, 헬렌, 비브, 줄리아, 덩컨 그리고 프레이저……. 1947년의 그들, 그 후 그들의 삶은 어떻게 됐을까? 3년 후가 아닌, 30년 지난 1977년의 그들은? 그리고 또 30년이 흐른  2007년의 그들은? 노년의 케이는 돌봐줄 자식도 없이, 곁에 그 누구도 없이 썰렁한 침대에서 깨어나 쓸쓸히 아침을 맞이할까? 비브는 또 어떻게 되었을까? 헬렌과 줄리아, 덩컨과 프레이저는? 책을 덮고도 <나이트 워치> 속 여섯 사람의 그림자가 머릿속에서 쉬이 떠나지 않는다.


<나이트 워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1947년에서 3년 전인 1944년, 그리고 거기서부터 또 3년 전인 1941년- 그러므로 이 책을 읽는 이들은 이 작품의 결말 아닌 결말을 시작으로 그들 여섯 사람의 인생을, 삶의 결정적인 한 때를 뒤쫓는 셈이다. 그런데 1947년을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서도 무엇 하나 또렷하게 결정된 것은 없다. 삶이 어떻게 흐를지, 그들이 앞으로 또 어떤 아픔을 만나고 그것 때문에 무너지고, 부서지고 또 나름 그것을 견뎌내며 살아갈지 알 수 없다. 그저 알 수 있는 것이라곤 3년 전의 그들, 그리고 6년 전의 그들 삶이 어떠했으며, 그 파장으로 말미암아 1947년, 현재 그들의 삶이 이렇게 된 것이구나 헤아릴 뿐이다. 지금도 그들은 여전히 젊기에 3년 후일 1950년, 그리고 또 3년이 지난 1953년에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마치 그 여섯 사람이 내 옆에서 살아 숨 쉬다가 책을 덮는 순간, 이제는 소식이 끊어진 그런 이들만 같다. 그래서 그들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여느 사람들과 조금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틀림없이 존재했음에도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인 삶을 살고, 그런 사랑을 했어야만 했던 그 쓸쓸한 이들의 그림자가 비 오는 밤 내내 내 마음을 휘젓는다. 부디 이렇게 내리는 비를 혼자 쓸쓸히 맞는 일은 없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전쟁이 삼켜버린, 먼지와 어둠과 침묵 속에 묻힌 온갖 비밀들’을 간직한 그들 모두가 외롭고 고독했기에…….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7년의 런던.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이는 케이다. 그녀는 전쟁의 상처를 지닌 채 유령처럼 거리를 떠돈다. 그러나 전쟁보다도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긴 것은 이 세계이다. 세상의 잣대와 시선, 그 자체가 케이에게는 상처이다. 멀리서보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남장 차림의 그녀. 1947년이기에 그런 케이의 옷차림과 행동은 더욱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밖에 없다. 곱지 않은 눈초리, 괴물을 보는 듯한 시선에 갇힌 그녀. 헬렌은 또 어떠한가. 결혼정보업체에서 누군가를 짝지어주는 일을 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사랑은, 자신의 반쪽은 세상이 알지 못하도록 꽁꽁 숨겨야 한다. 남들이 그렇듯이 사랑하는 이와 거리에서 키스를 하거나 애정행각을 벌이는 일도, 공원에서 여느 여인처럼 나란히 누워 있는 일도 할 수 없다. 심지어 거리에서, 아니 제집에서 목소리를 높여 싸우는 일도 모두 금지다. 그녀가 사랑하는 이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그녀를 누군가가 낚아채 갈 듯하고, 그래서 불안하고 외롭기 짝이 없지만 그녀에게 허리를 숙여 키스할 수도 없고, 그녀가 내 사람이라고, 내 연인이라고 세상 그 어디에도 말할 수가 없다. 그녀를 계속 붙들어놓을 만한 게 뭐가 있을까? 고민해보지만 그 어떤 제도로 묶어놓을 수도, 약속도 할 수 없는 현실 앞에 그저 쓸쓸히 침잠해갈 뿐이다.

그러나 동성의 연인을 사랑하는 헬렌만이 그 사랑을 숨겨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창 눈부실 나이인 비브 또한 외롭기는 마찬가지이다. 연인과 거리를 거닐 때면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볼까봐 늘 주위를 둘러봐야만 한다. 극장 바깥에 표를 사려고 서 있는 연인들과 부부들을 언제나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연인과 어딜 돌아다닌 적이 한 번도 없다. 나이트클럽이나 레스토랑에 가본 적도 없고, 그저 외진 곳만 줄기차게 찾아다녔다. 아니면 그의 차 안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앉아 있는 게 고작이다. 한집에서 함께 잠들 수도 없고, 당당하게 둘이 손을 잡고 거리를 거닐 수도 없다. 비브의 연인은 결혼한 남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다가 비브에게는 또 하나의 숨겨야할 존재가 있다. 교도소를 다녀온 남동생 덩컨의 존재가 바로 그렇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하는 헬렌과 비브는 서로의 사랑과 관련한 이야기도, 자신의 가족사도 털어놓지 못한다. 그녀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축을 이루는 사랑과 가족은 꽁꽁 숨겨야만 하는 그 무엇이다. 틀림없이 존재함에도, 보이지 않는 사랑, 삶……. 투명인간 같은 그들이 서 있는 쓸쓸하고도 황량한 세상을 지켜보노라면 마음 한구석이 저릿해온다.

“사랑과 전쟁은 모두에게 공평”하다고 케이는 묻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녀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사랑은 그들에게 공평하지 않다. 원자폭탄과 강제 수용소와 가스실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사랑 때문에 행복에 잠기면서 죄책감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그 사랑은 공평하지 않다. 자신들이 사는 방식 때문에 좌절할 수밖에 없다. ‘몰래 다니는 것도 신물 나고, 구질구질하게 살금살금 다니는 것’도 싫다면서 ‘결혼만 할 수 있다면, 아니 그 비슷한 거라도.’ 라고 말하는 연인에게 그 어떤 대답도 해줄 수 없다. ‘좋아해서는 안 되는 것을 좋아하고, 느껴서는 안 되는 기분을 느끼는’ 케이, 헬렌, 비브, 줄리아, 덩컨, 프레이저. <나이트 워치>는 그들의 삶이 이렇게 덧없이 꼬여버렸는지를 뒤쫓는다. 오래된 골동품을 모으면서 옛날 물건에 집착하는 덩컨, 스스로 자신을 가둬둔 덩컨, 그는 왜 감옥에 다녀온 왔으며 프레이저와는 어떤 관계인지, 헬렌과 비브는 어쩌다 한 공간에서 일하게 된 것이며, 케이는 전쟁 통에 무슨 일을 겪었기에 저토록 유령 같은 삶을 살아가는지, 그리고 줄리아, 그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는 이들과 또 어떻게 얽혀있는지……. 이토록 쓸쓸하고 고독한 삶을 사는 그들에게 몇 년 전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궁금증에 그들 인생을 지켜보는 일을 멈추지 못한다. 책장을 넘긴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생생한 이야기. 삶이라는 전쟁, 그 전쟁을 거친 이들의 이야기가 내내 마음을 울린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그들의 인생 또한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으로, 그 사랑이 빚어낸 아름다움으로 빛나던 시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따금 그 사랑 때문에 고통스럽기도 했을 테지만 그조차 눈부셨다. 그러나 전쟁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그 사랑과 삶은 이제 빛이 바랬다. 꼭 물리적인 전쟁의 폭격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되돌아보면 나 또한 인생의 한 순간 순간에 전쟁 같은 시기가 있고 그것이 지나가면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남긴다. 그 고비를 넘기고 나서 사람은 또 살아가지만 퇴색해 버린 것은 고스란히 간직한 채 묻어둘 수밖에 없다. ‘당신은 무엇을 잃었습니까? 잘 지내십니까? 그걸 어떻게 견디는 겁니까? 뭘 하고 삽니까?’(152쪽) 케이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관찰하며 이렇게 묻는다. 이 질문은 문득 나에게도 묻게 된다. 세상이 완벽하지 않고, 사람은 더더욱 완벽하지 않기에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것을 잃어버리고, 그러고 나서 뒤늦게 깨닫고는 통렬하게 아파하기도 한다. 마치 헬렌이 잃어버린 잠옷 한 벌. 그 진줏빛 새틴 잠옷이 ‘지금까지 그녀가 본 중에 가장 아름다운 잠옷’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듯이 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 ‘이런 끔찍한 아수라장에 이처럼 생생하고 이토록 티 없이 깨끗한 존재가 숨겨져 있었다니,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660쪽)를 읽노라면 누구에게나 있었을 그 한 순간, 언젠가는 잃어버릴지언정 틀림없이 누구에게나 존재했을 그 찬란했던 한 순간의 기억 때문에, 그것을 잃어버린 그들의 쓸쓸한 뒷모습 때문에 마음에서 내내 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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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19-06-10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에 비가 내리다니 너무 멋진 표현이예요! 근데 잠자냥님께서 말씀하신 누구에게나 존재했을 찬란한 순간 같은 거...저에겐 없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도 젊은 시절은 있었지만 젊기만 했지 놀라울 정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심심하기만 했거든요. 뭐 꼭 엄청난 사건이 벌어져야 눈부시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잠자냥님 리뷰를 읽으니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아름다운 시절에 있어선 난 정말 소외된 사람이란 생각이 갑작스레 들면서 서글퍼지네요.. 더 세월이 지나면 그때가 눈부신 시기였다고 나름대로 정의할 수 있는 어떤 기간이 생기려나요. 괜한 푸념이었습니다! 오늘도 정말 좋은 감상문 감사히 읽었습니다!

잠자냥 2019-06-10 15:53   좋아요 1 | URL
케이 님이다! ㅎㅎ <나이트 워치> 주인공 중 한 사람 이름이 ‘케이‘라서 이 책 읽다가 저도 모르게 케이 님 떠올리기도 했었답니다. 찬란한 순간..... 주제넘지만 케이 님이 좋아하는 책 읽으면서 어떤 구절에서 웃거나 행복해했던 순간도 어쩌면 찬란한 순간일지도 몰라요. 가끔 몸이 아프거나 아주 괴로운 일이 있을 때는 그런 아주 소소한 일상도 찬란한 한때로 여겨지더라고요. ㅎㅎ 헬렌이라는 인물이 잃어버린 잠옷의 가치를 아주 나중에야 깨닫듯이 말이에요. 그럼에도.... 케이 님의 삶에서 이제까지 그런 때가 없었다면 앞으로 살아갈 나날들 중에 꼭 그런 순간이 오기를 진심으로 바랄게요!
 
진정한 장소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미셸 포르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1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글쓰기와 책 읽기에 관한 짧지만 깊이 있는 아니 에르노의 생각들. 그녀의 작품 전반에 대해 이해의 폭을 크게 넓혀준다. ‘스스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가장 잘 느끼는 곳’ 글쓰기가 ‘진정한 나만의 장소’라는 말 진심으로 멋진 말 아닌가. 이 인터뷰를 읽으니 그이의 모든 작품이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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