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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 여든 앞에 글과 그림을 배운 순천 할머니들의 그림일기
권정자 외 지음 / 남해의봄날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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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이었던가, 순천 할머니들의 서울 전시회를 놓쳐서 무척 아쉬웠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할머니들의 글과 그림을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만날 수 있게 되다니, 정말 반가웠다. 이 책 출간 소식을 들었을 때, ‘어머 이건 꼭 사야해!’하고 생각했다. 나는 에세이집은 주로 도서관에서 빌려 읽거나 하는데, 이 책은 바로 구입했다. 몇 년 전 서울 전시회 소식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무엇이 그렇게 내 마음을 끌었을까? 글과 그림을 배우고 그 글과 그림으로 자기를 표현한다는 것. 누군가에게는 무척 쉽고 일상적인 일일 테지만 누군가는 평생을 간절히 바라고 꿈꿔왔을 일일 수 있다. 그럼에도 번번이 현실에 가로막혀 그 바람을 이루기가 도무지 불가능해 보일 때, 여든과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드디어 할머니들은 그 꿈을 이뤘다.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는 바로 그러한 꿈의 열매다.

이 책에 담긴 글과 그림은 얼핏 보면 초등학교 1~2학년 아이들의 그림일기를 보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내용은 정말이지 인생 그 자체이다. 산전수전도 모자라 공중전까지 겪은 이들의 굴곡진 인생이다. 글씨가 삐뚤빼뚤하고, 어린 아이들이 그린 그림 같아도, 그 안에 담긴 절절한 사연 때문에 탄식하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미소 짓기도 하다가 끝내 눈물 흘리게 된다.

할머니들의 사연은 어찌 보면 예상 가능하다. 그 세대 어른들이 살아왔을 법한 그런 삶이 짧은 글 안에서 꾸밈없이 그려진다. 딸이라고 구박받고, 딸이라서 배우지 못하고. 그러면서도 일찍부터 집안을 돕고 동생들 건사하며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얼굴도 모르던 사람과 선을 보고 집에서 쫓겨나듯이 결혼하고, 결혼 뒤에는 가혹한 시집살이가 기다리고 있다. 애들한테 흰쌀밥 먹였다고 시아버지가 밥상을 던지고 딸을 많이 낳았다고 구박받는 등등 무서운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로도 모자라 시누이는 또 시누이대로 못살게 군다. 남편이라도 따스하게 대해주면 좋을 텐데 이 책 속에 그려진 남편들은 대개가 술주정에, 바람에, 폭력에 난봉꾼들이 따로 없다. 그런 이와 살면서 이제는 딸을 낳았다고 구박받고, 자식들은 자식들대로 엄마 마음도 몰라준 채, 차별받고 자랐다면서 볼멘소리를 한다. 할머니들 인생 참 가엽고 안쓰럽다.

그런데, 도무지 행복하지 않을 것 같은 이런 인생에서도 할머니들은 참고, 견디고, 때로는 그 안에서 소소한 기쁨도 발견하면서 그렇게 살아간다. 이 삶의 무게를 견디고 보듬어 안는 그 마음들을 엿보노라면 자못 숙연해진다. 선본지 3일 만에 결혼한 어느 할머니의 사연은 참으로 기가 막히다. 할머니의 시댁은 너무나 가난했다. 시어머니가 잠잘 방이 없어서 하루는 형님 방에서 하루는 할머니의 신혼 방에서 잤다. 이 기막힌 현실 앞에서도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그때 시어머니는 우리와 함께 자면서 얼마나 불편했을까 생각하면 짠하다.’……. 치매 앓는 시어머니를  자식들이 서로 모시지 않겠다고 해서 4년 넘게 홀로 시어머니 병수발을 한 할머니도 있다. 이 할머니는 그런 시어머니가 가여워서 ‘어버이날이 되면 시어머니가 불쌍해서 꽃을 사다 달아 주면서 마음이 아팠다’고 말한다. 그렇게 모질게 구박받으며 살아왔으면서도 이런 마음을 품고 있는 할머니들 앞에 그저 마음이 먹먹해진다.

어떤 사연은 너무나도 충격적이다. 열한 살 때 피난길에서 동생이 죽은 할머니는, 죽은 동생을 어디다 두고 갈 수가 없어서 하루 종일 업고 다녔다고 한다. 지금도 죽은 동생을 잊을 수 없다는 그 짤막한 일기에는 더없이 큰 아픔이 담겨 있어 어떤 말도 쉽사리 나오지 않는다. 죽은 동생을 업고 하루 종일 다니는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리고 그 일을 평생 잊지 못하고 이렇게 일흔, 여든을 지나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글을 배워 그때 그 일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은 또 어떤 심정일까. 나로서는 도저히 헤아리기 어렵다.

할머니들도 ‘딸’이었던 시절이 있었기에 엄마를 그리워하는 마음도 일기 곳곳에서 보인다.



큰집에는 딸만 있고 아들이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큰어머니 몰래 사람을 얻어 아들을 낳게 했습니다. 나중에 큰어머니가 알고 그 여자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것을 봤습니다. 우리 엄마는 얼른 치맛자락을 펴서 내 눈을 가리고 못 보게 했습니다. 나는 살면서 힘들 때마다 엄마를 생각했습니다. (‘훌륭한 우리 엄마’, 16쪽)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에서 느끼는 감동은 글과 그림을 배우고 익혀서 자신을 표현하고, 그래서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할머니들 모습을 볼 때 가장 크다. 글을 몰라 평생 죄지은 것처럼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떨며 살았던 할머니들은 글씨를 배우고 그림을 그리면서 조금씩 그전까지는 몰랐던 또 다른 인생의 즐거움을 알아간다. 은행에 가는 일도 더는 두렵지 않고, 계약서도 이제는 직접 쓴다. 핸드폰으로 자식들과 남편에게 문자를 보내며 소통한다. 무엇보다도 글과 그림으로 자기 안에 있었던 상처를 치유한다.

아버지, 그 많던 재산을 술과 여자, 노름으로 다 없애고 가난뱅이가 된 아버지, 엄마는 아버지 때문에 병을 얻어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다. 학교도 안 보내 주고 술 먹고 노름하고 여자를 집까지 데려와 엄마랑 셋이 함께 잠을 자고 밥상까지 차려 바치게 했던 아버지. 엄마가 돌아가신 뒤 그런 아버지와 인연을 끊고 살았다는 어느 할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엄마 산소에 갈 때도 아버지 묘는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할머니는 글을 배우면서 조금씩 마음을 열었고 드디어 처음으로 아버지 산소에 절을 올렸다. 글과 그림이 주는 치유의 힘은 이렇게도 크다. 게다가 할머니들은 글을 배우고 가족들한테 칭찬을 들으니까 ‘보약 먹은 것처럼 힘이’ 난다고 말한다. 글 가르쳐 주는 선생님은 ‘청소나무 때는 아궁이처럼 열심히 가르쳐’ 주신다고도 말한다. 이런 살아있는 표현력에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어엿한 작가와 화가가 된 할머니들은 글과 그림을 배움으로써 여든, 아흔의 나이에도 또 다른 꿈을 꾼다. ‘앞으로 내 꿈은 글을 많이 배워 우리 동네 이장이 되는 것입니다.’ 라고. 할머니들의 꿈을 진심으로 응원하게 된다.

책을 읽노라니 괴팍하기만 하던 우리 할머니 생각도 난다. 할머니도 글을 모르셨는데, 내가 글을 깨우칠 무렵, 그 괴팍하고 성마른 노친네가 아주 부끄러운 얼굴로 ‘이게 무슨 글자냐’ 묻던 모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딸이라고 구박하고, 엄마를 구박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던, 내게는 악마 같기만 했던 할머니인데도 그때만큼은 글자를 아는 아이 앞에서 얌전한 양이 되었다. 할머니 때문에 글을 모른다는 건 이렇게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일이구나 생각했던 것 같다. 할머니도 그때 글을 배우셨다면 성마른 성미가 조금은 누그러지지 않았을까, 엄마를 덜 괴롭히지 않았을까……. 이제는 이 세상에 계신 분이 아니니, 내가 글을 가르쳐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모진 시집살이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남편 때문에 괴롭게 살았던 엄마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싶다. 엄마는 나보다 더 크게 공감하다가 책을 다 읽을 무렵엔 활짝 웃으실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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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 여든 앞에 글과 그림을 배운 순천 할머니들의 그림일기
권정자 외 지음 / 남해의봄날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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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다. 따뜻하다. 뭉클하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할머니, 엄마, 딸, 아내, 여자의 삶... 글도 그림도 결국 대단한 수식이나 지식이 필요한 게 아니라, 진솔함 그 자체에서 아름다움과 감동이 묻어나온다는 진실을 다시 깨우친다. 다 읽고 나니 엄마한테 왠지 한 권 선물하고 싶어지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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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속의 항해 창비세계문학 66
진 리스 지음, 최선령 옮김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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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출신에 영어를 쓰지만 뭔가 다른 억양, 백인도 흑인도 아닌, 영원한 이방인 애나가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은 애처롭기 짝이없다. 가진 것 없는 젊은 여성이 처절하게 버티고 견디는 가혹한 삶, 시대를 떠나 말 그대로 ‘어둠 속의 항해‘이다. 진 리스의 명백한 자전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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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해 거짓말
필립 베송 지음, 김유빈 옮김 / 니케북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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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베송의 <이런 사랑>을 우연히 읽은 뒤 10년이 훌쩍 지났다. 그때 아마 서점에서 책을 들췄다가 문체가 마음에 들어서 읽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 뒤로도 그의 작품이 번역되어 나오면 습관적으로 읽었다. <10월의 아이>, <포기의 순간> 같은 작품들. 필립 베송의 문체는 담백하고 건조하고 쓸쓸하다. 그리고 그런 이들의 삶을 말한다. 실화를 소재로 한 <10월의 아이>를 제외하고 <이런 사랑>과 <포기의 순간> 두 작품만 보자면,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경계에 선 자들이다. 중심에 속하지 못하고 주변부를 겉돌기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문학 작품을 읽을 때 작가의 성 정체성이 중요하지는 않다. 딱히 궁금하지도 않다. 그런데 때로는 그런 정보가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필립 베송의 <그만해 거짓말>을 읽으니, 이제야 그의 작품들이 왜 그토록 경계에 선 사람들, 아니 경계 너머에 있는 이들의 삶을 쓸쓸히 그리고 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게이인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삼각관계를 그린 <이런 사랑>을 읽을 때만 하더라도 필립 베송 그 자신이 게이일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아니, 관심이 없었다고 해야겠지. 그런데 필립 베송은 열일곱 소년들의 사랑을 그린 <그만해 거짓말>에서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토록 진솔하게.

<그만해 거짓말>의 화자인 ‘나’는 명백히 필립 베송 그 자신이다. 그리고 그가 사랑한 ‘토마’는 ‘나’ 그러니까 필립 베송의 첫 사랑이다. 이 책을 펼치면 맨 앞에 ‘토마 앙드리외를 기억하며’라는 구절이 보인다. 작품이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토마’라는 이름이 등장하기 때문에 <그만해 거짓말>은 필립 베송이 자신의 눈부신, 그러나 너무나도 아팠을 첫사랑인 ‘토마’에게 바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은 ‘토마 앙드리외를 기억하며’라는 말 바로 다음에 토마의 생몰연도가 적혀있다. 때문에 책을 읽는 이들은 토마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작품을 읽게 된다. 죽은 첫사랑을 기억하며 회한에 잠겨 쓰는 글들은 어떠할까? 더군다나 그 사랑이 어떤 세계에서는 여전히 허락되지 않는, 때로는 그 때문에 목숨을 읽어야만 하는 사랑이라면…….

<그만해 거짓말>은 십대 소년들의 사랑을 섬세하게 그려나간다. 어떤 사람에게 반하고 서로 만나게 되고 뜨겁게 사랑하고 질투하고 아파하고 헤어지는 모든 연인들의 익숙한 과정이 고스란히 그려진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고 그 사람을 몰래 엿보며 마음을 키워나가다가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 같음을 알게 되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또 그래서 그토록 어려운 사랑을 하게 되는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 과정이 예상 가능하게 펼쳐진다. 그런데 이 작품이 조금 남다른 까닭은 <그만해 거짓말>이라는 제목에서 비롯된다. ‘거짓말’을 ‘그만하라’는 말은 이 작품에서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처음에 이 제목은 ‘필립’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필립은 아주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의 삶을 마음대로 지어내는 취미가 있었다.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또 어디로 가는지 상상해보거나,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삶을 지어 내고 그들의 모습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에 편집증적으로 집착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 점을 염려한 필립의 엄마가 그에게 이렇게 주의를 준다. “그만해, 거짓말.”이라고. 필립은 이 이야기를 작품이 시작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말한다. 그러니까 작가로서 타인의 삶을 관찰하고 그로부터 상상의 나래를 펼쳐서 이야기를 지어내던 기존의 작품과는 달리, <그만해 거짓말>은 ‘거짓말’이 아닌 자신의 진실한 이야기임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교장의 아들인 ‘나’는 결석하는 일도 없고, 언제나 최고 점수를 받는, 교사들의 자랑거리인 모범생이다. 그의 한 가지 비밀이라면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일찌감치 깨달았다는 것으로, 열한 살에 이미 자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필립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도 전혀 낙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점이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구분 짓는다고 생각한다. ‘드디어 그들과 구분될 것’이며 자신은 ‘더 이상 모범생이 아니게 될 것’이라고 절대 ‘무리를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은근히 자부심을 느끼기도 한다.

필립이 사랑에 빠지는 토마도 과연 그러할까? 기적처럼 토마가 필립에게 먼저 다가오지만, 토마는 철저히 자기의 정체성을 숨긴다. 그들의 만남도 늘 비밀 장소에서 남몰래 이뤄질 뿐이며, 학교처럼 사람들 눈에 띄는 곳에서 토마와 필립은 완전히 남남처럼 행동한다. 때문에 맨 처음 토마가 필립을 만나러 오기까지는 아주 큰 어려움이 따랐다. 그는 온갖 의문, 망설임, 부정, 극복해야 했던 장애물, 지극히 내성적이고 은밀하며 조용한 갈등을 이겨내야만 했다. “어째서 나야?”라고 묻는 필립에게 토마는 말한다. “네가 남들과 전혀 달라서. 너는 그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지만 내 눈에는 너만 보여.” 그리고 필립이 절대로 잊지 못할 말을 덧붙인다. “왜냐하면 너는 떠날 거고, 우리는 남을 테니까.”

토마의 말처럼 필립은 그 작은 도시를 떠날 사람이었다. 공부 잘하고 미래가 밝은 소년. 토마는 필립이 ‘책을 보는 소년이고 더 큰 곳을 향해 나아가는 소년’이라고 한다. 반면 자신은 농장을 좋아하고 땅을 좋아한다고. 다른 것을 열망하지만 자신은 외아들이므로 그가 가업을 잇지 않으면 농장은 그대로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곳으로 떠나서 곧 사라질 사람과 이곳에 남아 자기의 정체성을 숨긴 채 어느 가족의 일원으로 묵묵히 살아가야 할 사람. 토마는 어쩌면 그래서 다른 사람이 아닌 필립을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그 둘이 줄곧 그 작은 도시에서 살아갔다면, 그래서 혹 계속 서로 사랑했다면 토마의 정체는 탄로 나고 말았을 테니까.

토마의 예언대로 필립은 대학에 진학하고 이 작은 마을을 떠난다. 그리고 그는 작가로서 성공한 삶을 살며 텔레비전에도 종종 나오고,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는 삶을 살아간다. 작품을 통해서도, 또 실제로도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당당히 드러내며 살아간다. 필립이 그럴 수 있는 것은 애초부터 자기의 정체성을 남들과 자신을 구분지어 주는 특별함이라고 받아들인 태도에서도 비롯되었을 테지만 성공한 작가라는 이력, 때문에 게이라는 정체성이 종종 작가적 이력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그런데 토마는 어떨까? 농장에 남아 외아들로 가업을 잇고 작은 마을에서 평생 살아야만 한다면 자신의 성 정체성을 당당히 밝힐 수 있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어른이 된 필립은 자기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까지, 몇 년이고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남들에게 거짓말을 했노라고 고백했던 남자들을 떠올리며, 토마는 그들처럼 용기를 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단순히 용기의 문제일까? 필립도 곧 이렇게 말한다.



용기라고는 했지만 어쩌면 다른 것인지도 모른다. 한 걸음 더 내딛지 않은 사람들, 자신의 깊은 본성과 화해하지 않은 사람들이 반드시 겁쟁이인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들은 너무 넓고 빽빽한 숲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 그래서 당황한 사람들일 수도 있다. (<그만해 거짓말>, 206쪽)


숲에서 길을 잃고 당황한 사람들. 그렇지만 마음속에 평생 자기 혼자만의 비밀, 그 진실만은 간직했던 사람. 그가 바로 ‘토마 앙드리외’이다. 그래서 <그만해 거짓말>은 필립 베송의 이야기이지만 작품을 읽다 보면 진짜 주인공은 토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애초에 ‘거짓말’을 ‘그만하라’는 말의 의미는  ‘토마’가 그 자신에게 하고 있는 이야기임을 알게 된다. 필립과는 너무도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자신의 삶이 거짓말 그 자체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던 고독한 토마가 스스로 ‘그만해 거짓말’하고 다그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자기 정체성을 숨기고 거짓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토마의 고독하고도 쓸쓸한 모습이 떠올라서 <그만해 거짓말>이라는 이 책의 제목은 책을 덮고도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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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해 거짓말
필립 베송 지음, 김유빈 옮김 / 니케북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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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베송의 책이 늘 그렇듯이 읽고 나면 마음 한켠에 서늘함이 남는다. 이 책은 자전적 이야기라 더 그런 것 같다. 필립 베송의 팬이라면 그의 다른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도 조금 도움이 될 듯. 계속 다른 작품도 번역되길 또 기다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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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2-27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포기의 순간... 의 그 필립 베송이란 말입니까? 제가 왜 이 책을 모르고 있었죠? 맙소사..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꺅 >.<

잠자냥 2019-02-27 22:58   좋아요 0 | URL
네! 바로 그 베송입니다~ 얼른 배송받아 읽어보세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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