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K. 딕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대 때였다. 그의 작품을 읽은 것은 아니었다. <블레이드 러너>- 컬트 팬을 거느린 그 영화 때문이었다. 1982년작- 이 오래된, 낡은 듯한 작품에 왜 그토록 많은 SF팬들이 열광하는 것일까? 처음 보았을 때는 난해하고 지루했다. 그런데 참 묘하게도 그 음울한 분위기만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서 내가 무언가 놓쳤을지도 몰라 하는 마음에 그 후에도 몇 번쯤 더 보았다. 그리고 최근의 <블레이드 러너 2049>에 이르기까지 이 영화는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 되었다. 당연히 영화의 원작인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찾아 읽었고 그렇게 필립 K. 딕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재미나게 본 많은 영화- 그러니까 <토탈 리콜>, <마이너리티 리포트>, <페이첵> 같은 작품의 원작도 모두 필립 K. 딕, 그가 쓴 것임을 알고는 SF 장르를 딱히 좋아하지 않음에도 그 원작들은 찾아서 읽었다.

딕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대단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 아니다. 하나 같이 기억이 불분명하거나 아예 잃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내가 누구인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이번에 <필립 K. 딕의 말>을 읽으면서 나는 그러한 인물들, 그리고 그 미미한 인물들이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세계가 필립 K. 딕 그의 정신세계이자 고난에 찬 삶의 반영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평생 44권의 장편과 120여 편에 달하는 중단편을 발표했지만 살아서는 작품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 낮은 고료를 받으면서 생활고에 시달렸다. 수년 동안 중추신경 흥분제인 암페타민을 복용하며 작품을 썼고 이런 자기파멸적 생활 습관은 그에게 뒤늦은 명성을 가져다주기도 했지만 주변 인물들과는 불화할 수밖에 없었고(5번의 결혼과 이혼), 우울증, 편집증, 망상, 불안, 공황장애 등에 시달리게 했다. 한마디로 이 책에서 말하듯 고립감, 고뇌, 갈망, 가난함은 딕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었지만, 그와 동시에 창작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그는 고독함을 달래기 위해 글을 쓴다. 그리고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과 사랑에 빠진다. 딕이 만들어낸 인물들은 모두가 그의 친구였다. 때문에 그는 책을 탈고하고 나면 상실감으로 우울증에 빠질 정도였다. 그는 말한다. “다시는 그 친구들의 말을 들을 수 없고, 다시는 그 친구들이 고투하고, 역경에 맞서 싸우는 걸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니까. 소설을 탈고한다는 건 친구들을 영영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야.”(38쪽) 고립감 속에 글을 썼던 그는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로부터 위안을 얻었는데 무엇보다 영웅이 아닌 보통 사람이 엄청난 용기를 발휘하는 순간을 묘사하면서 가장 큰 기쁨을 느꼈다. 설령 그가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하고, 현실 세계에 어떤 파문도 남기지 못한다고 해도 그랬다. 그래서 딕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쓰는 소설은 그의 용기에 대한 찬가”(39쪽)라고. 이런 그의 말을 따라가다 보면 지금까지 그가 빚어낸 인물들, 그 평범한 인물들의 고뇌와 분투-SF라는 어쩌면 너무나 헛된 공상의 세계임에도 그 세계를 살아가는 그들의 쉽게 지지 않으려는 투쟁만큼은 왜 그토록 마음에 남았는지 수긍하게 된다.


그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어쩌면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에서 어떤 의미를, 하나의 질문으로 여기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일 수 있는 것에서 어떤 대답을 찾는 범주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의 직업이 하는 일은 바로 이런 질문들을 상상하는 거였다.

딕이 전에 쓴 비슷한 종류의 이야기들에서, 주인공은 세계의 질서에 관련된 엄청난 비밀을 우연히 발견하고, 믿으려는 이 하나 없는 주변 사람들에게 그것을 설명하려고 무진 애쓴다. (엠마뉘엘 카레르, <필립 K. 딕>, 72쪽~80쪽 발췌)



어린 시절 필립 K. 딕을 우상으로 섬겼던 엠마뉘엘 카레르가 쓴 딕의 평전 <필립 K. 딕>에서는 재미난 일화가 나온다. 인간 심리에 관심이 많았던 딕은 어린 시절에 사람들을 대상으로 심리 테스트를 해보곤 했는데,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그들이 어떤 종류의 정신병에 대한 성향이 강한지 보기 위해, 최대한 자연스럽게 질문했을 때, 거기에 어떻게 반응하고 대답하는지를 살폈다. 애초부터 평범한 이들의 정신세계에도 뭔가 하나쯤은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가 이런 사고를 하게 된 원인은 아마도 스스로 정신에 일종이 균열이 있음을 인지했고 그 균열에서 다양한-또는 특이한 사고가 발생할 수 있음을 알았기에 타인 또한 그렇지 않을까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닐까. 실제로 그는 <화성의 타임슬립>에서 ‘정신병자로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자신을 비롯하여 인간의 정신세계에 그가 이토록 관심이 깊었던 것은 대부분의 인간들은 ‘우리의 세계가 침식당하고 있다는 어렴풋한 느낌을 받을 뿐 우리의 개인적 통일성을 향한 침략이 어디서 오는지도 알아차리지 못’(114쪽)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즉 그의 이러한 ‘주관적 세계’에 대한 탐구는 한 인물의 세계가 그보다 더 강한 위치에 있는 다른 사람의 세계에 침식당하기 쉽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런 섬뜩하고 기괴한 상황을 묘사함으로써 소설을 통해 독자에게 경고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강자에 의한 침식- 딕은 20세기의 가장 큰 위협을 전체주의적 국가로 보았다. 그가 보기에 전체주의는 국가뿐만이 아니라 좌파 파시즘, 심리학적 운동, 종교운동, 마약중독 재활 단체, 권력자들, 책략가들 따위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었고, 심리적으로 자기보다 더 강한 위치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런 경향이 나타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본질적으로 이런 권력 관계에서 약자의 위치에 속하는 사람들, 즉 강하지 못한 사람들을 옹호했다. 그의 소설에서 매번 약자들이 주인공이 되어 분투하는 이유이다.


본질적으로 내가 옹호하는 대의는 강하지 못한 사람들의 대의야. 만약 나 자신이 강자였다면 전체주의를 그렇게 큰 위협으로 느끼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난 강자가 아니기 때문에 약자에게 공감한다네. 내 소설의 주인공들이 본질적으로 반反영웅들인 건 바로 그 때문이야. 거의 루저에 가까운 친구들이지만, 나는 혹독한 세상에서도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특질을 부여하려고 노력한다네. 그러는 동시에, 폭압에 대항하려고 같은 수단을 쓰다가 어느새 상대방처럼 착취적이고 조작적인 인간이 되어버리는 걸 보고 싶지는 않고. (<필립 K. 딕의 말>, 114~115쪽)




전체주의에 대한 경고와 함께 그가 끊임없이 고민했던 주제는 ‘진정한 인간이란 무엇인가’였다. 딕은 <인간과 안드로이드 The Human and the Android〉라는 강연에서 진정한 인간이란 무엇인가 질문한다. 그가 보기에 이 인간 사회에도 생물학적으로는 인간이지만 실제로는 안드로이드인 사람들이 있었다. 컴퓨터는 날이 갈수록 예민한 사고력을 가진 존재가 되어가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은 점점 인간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딕은 이 강연 원고를 작성하면서 아직은 인간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인간성을 강화해줄 필요가 있음을 절감한다. 딕이 생각하는 진정한 인간은 다음과 같다. “그릇된 일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그걸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 “아니, 나는 죽이지 않을 거야. 폭탄을 떨어뜨리지 않을 거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존재.” “뇌물로 매수할 수 없고, 겁을 줘서 어떤 일을 강요할 수도 없고, 프로파간다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불법적인 시스템에 대해 불법적인 저항운동을 개시할 필요성을” 아는 존재, “법 자체가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때로는 법을 어길 수도 있는”(54쪽) 존재…. 이런 정의를 읽노라면 현대는 이미 생물학적으로는 인간이지만 실제로는 안드로이드인 인간들의 디스토피아가 된 것은 아닌가 씁쓸해지기도 한다.

“진정한 인간과, 단지 진정한 인간을 흉내 낼 뿐인 존재들 사이의 괴리”(149쪽)를 끊임없이 고민했고, 현실 세계에서는 딕 그 자신에게 위안을 주는 친구들의 수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설 속에 반영웅들을 창조한 그, 그리고 소설에서 영웅이 아닌 보통 사람이 엄청난 용기를 발휘하는 순간을 그리면서 무엇보다 큰 기쁨을 느꼈던 그. 필립 K. 딕은 전체주의적 국가에 맞서 각자의 고유한 세계를 지켜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안드로이드가 아닌, 진정한 인간으로서 각자의 고유한 세계를 지켜내는 일은 그가 살았던 20세기보다 이 21세기에 더더욱 중요하고 그래서 더 어려운 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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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28 16: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레이드 러너 애정합니다 ㅋㅋ 그의 빻음까지도 😉

잠자냥 2023-03-28 17:25   좋아요 2 | URL
필립 K. 딕도 인간으로서는 좀 싫은 면이 있는데 ㅋㅋㅋㅋ 그 빻음까지 투영 ㅋㅋㅋㅋ

coolcat329 2023-03-28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립 K.딕이 이런 고민을 한 작가였군요. 진정한 인간이란 무엇인가...인간이란 생명체가 있는 동안에는 반드시 계속 물어봐야 하는 질문 아닌가 싶습니다.
멋진 표지의 <안드로이드...> 책 갖고 있는데 또 잊고 있었네요. 블레이드 러너도 안봤구요. 작가 외모도 너무 맘에 듭니다. 😍

잠자냥 2023-03-28 21:41   좋아요 1 | URL
안드로이드… 하고 블레이드 러너 한번 보세요. 놀라운 점은 <안드로이드…> 단편이라는 거! 저도 예전에 깜놀. 영화로 만들어진 그의 작품 대다수가 단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감독들 역량도 한몫한 거 같습니다. 그나저나 쿨캣 님 외모 취향!

coolcat329 2023-03-28 22:21   좋아요 0 | URL
헉 안드로이드가 단편인가요? 지금 찾아보니 22장 구성으로 장편같은데 중간에 이야기가 끊기나요?
책 읽고 영화도 꼭 보겠습니다~^^
근데 사진 확대해서 다시보니 제가 좀 마음이 성급했네요😅

잠자냥 2023-03-28 22:26   좋아요 2 | URL
앗 제가 <토탈 리콜>하고 헷갈렸습니다! 안드로이드는 장편 맞습니다! ㅎㅎㅎ 사진 확대 성급 ㅋㅋㅋㅋㅋㅋ

DYDADDY 2023-03-28 19: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사유하지 않는 인간과 사유하는 안드로이드 중에 어느 쪽이 더 인간적인가라는 의문에서 안드로이드는 약자이기 때문에 사유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약자인 우리가 강자에게 대항할 수 있는 무기 중 하나가 ‘사유함‘이라는 생각을 얻어갑니다. ^^

잠자냥 2023-03-28 21:42   좋아요 1 | URL
오 대디 님 오늘의 베댓 갑니다! ㅎㅎㅎ

DYDADDY 2023-03-28 23:48   좋아요 0 | URL
아렌트 누님이 무사유는 악이라고 규정하셨기에 약자인 우리가 도덕적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서는 사유함이라는 무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자신의 행동을 무엇이든 합리화할 수 있는 무사유의 강자에게 대항할 수 있겠죠. ^^
저의 ‘오늘의 베댓‘은 블레이드 러너의 빻음까지 애정하는 공쟝쟝님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

stella.K 2023-03-28 1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실제로 자기가 창조한 인물에 빠지는 작가가 있긴하군요.
피그말리온과 같은..
좀 자기파괴적 인물이었네요. 흠...

잠자냥 2023-03-28 21:43   좋아요 1 | URL
소설 속 인물들이 친구 같았다는 말에선 참 여러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신적으로는 많은 고통이 있었던 사람 같습니다.

우끼 2023-03-28 21: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늘날 인간의 윤리가 무엇이어야 할지에 관한 논의가 부족한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논의가 부족한 상태에서 좌파파시즘이라 표현하는 것이 괜찮은지 의구심이 들어요. 이미 불평등한 사회에서 고통받는 생명들이 있고, 그걸 발화하는 것을 막는 것처럼 들리거든요 ㅠㅠ 이것은 파시즘이 아닌지, 궁금하기도 하구요.
시스템이 개인의 윤리적 행위를 가로막고 있다면, 그것을 지적하는 것도 좌파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기도 해요..

DYDADDY 2023-03-28 21:39   좋아요 3 | URL
파시즘은 아직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개념이지만 최소한의 합의점은 민족공동체를 신화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포퓰리즘입니다. 즉 민족주의, 신화, 포퓰리즘의 세 키워드를 놓고 보았을 때 좌파는 최소한 민족주의와 신화를 배격하기 때문에 좌파 파시즘이라는 어구는 그저 이어서 쓴 글에 불과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파시즘은 ‘나쁜 놈‘과 등치하여 사용하는 말도 안되는 현상이 있다보니 좌파 나쁜놈이라고 말하는구나 라고 이해하셔도 되지만 논박하고 싶으실 때에는 파시즘에 대한 너의 정의는 무엇이냐고 물으시면 됩니다. 참고로 파시즘과 전체주의는 다른 개념입니다. ^^

잠자냥 2023-03-28 21:48   좋아요 2 | URL
최소한 우리나라에서 쓰는 좌파파시즘이라는 말은 잘못 사용된(나쁜 의도로) 말 같고요, 윤리에 대해 아무런 고민이 없는 사회, 윤리를 말하면 오히려 비정상인 취급받는 사회가 현재의 대한민국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물학적으로는 인간이지만 안드로이드보다 못한 인간들이 많은 사회 같기도 하고요….

우끼 2023-03-28 22:30   좋아요 1 | URL
대디님, 제가 이해한 파시즘은 직접적 폭력 없이 배제하는 구조적이고 포퓰리즘적인 폭력이었어요. 더불어 살기 위해 인간을 한계짓는 것이 윤리이기 때문에 한계짓는다는 특성때문에 윤리가 파시즘이라는 명칭을 얻는다면, 그 또한 위험하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전체주의와 파시즘을 어떻게 구분하고 계신지도 궁금하네요 ㅠㅠ 저는 거의 비슷하게 생각했던것같아요

자냥님 그렇군요 ㅠ 자냥님께서 사용하는 좌파파시즘은 어떤 맥락이었을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윤리에 대한 고민이 없는 사회가 이상하다는 점은 정말 동감해요 ㅠㅠ 윤리적인 발언을 지속하는 어떤 사람은 자신을 바보로 지칭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윤리적인 발언을 하는 사람은 세상물정을 모르는 사람이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생각도 들구요.

잠자냥 2023-03-28 22:44   좋아요 2 | URL
앗 저는 좌파 파시즘이라는 말을 사용한 적은 없고, 본문에 쓴 글은 필립 K. 딕의 말이었습니다… 만 좌파에서도 파시즘은 있을 수 있죠. 지배자에 대한 절대 복종을 강요한다든가, 자기들만의 이데올로기가 옳다고 생각하여 다른 생각이나 사고에 무조건적으로 배타적으로 굴거나 선민사상에 물들어 있거나 대중의 자발적 사고를 경멸하거나 등등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이데올로기를 수호하기 위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면 제 아무리 좌파 운운한다더라도 또다른 파시즘이라고 생각합니다. 딕도 그런 의미에서 좌파 파시즘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DYDADDY 2023-03-29 00:07   좋아요 2 | URL
전체주의와 파시즘의 차이는 큰 틀에서 보면 없습니다. 한나 아렌트도 파시즘을 본질적으로 전체주의와 동일하다고 규정했습니다. 하지만 전체주의는 위로부터의 독재 즉 상명하복을 중시하지만 파시즘은 민족주의 공동체 신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대중의 자발적 혹은 선동적 동참이라는 점에서 조금은 다릅니다. 그리고 파시즘의 시작인 이탈리아에서 파시스트 정권 내에서도 여러 집단의 목소리가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던 점도 다른 점이지요. 전체주의도 여러 갈래가 있는데 파시즘도 그 갈래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다만 전체주의는 어느정도 이론이 확립되어 있는 반면 파시즘은 태생부터 좌파에서 갈라져 나와 부르주아와 함께 하면서 시작부터 이론 자체가 엉성하여 아직도 많은 논란과 학설이 있습니다.
우끼님이 언급하신 직접적 폭력 없이 배제하는 구조적이고 포퓰리즘적인 폭력은 파시즘 이론의 하나인 대중독재라고 생각합니다. 독재가 일방적인 상부의 억압이 아닌 다수의 대중이 직간접적으로 동의했기에 가능하다라는 이론인데 말씀하신 윤리라는 개념이 다수의 찬동이 필요하다는 부분에서는 동의하지만 때로는 윤리적 목소리를 내는 소수도 가능하기에 윤리를 파시즘과 등치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수의 사람이 윤리라고 인정하는 것을 파시즘이라 표현하는 것은 상대적 소수의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으로 다수와 소수의 의견을 모두 들어보고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제가 조금 거칠게 평준화하여 말씀드린 부분에 대해 추가로 말씀드릴 부분은 실제로 좌파파시즘이라는 단어는 존재합니다. 파시즘의 뿌리가 좌파이고 스탈린이 사민주의를 비판할 때 썼던 단어입니다. 하버마스도 68혁명 당시에 학생들의 신좌파운동이 폭력적으로 변하자 좌익 파시즘이라는 단어로 비판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파시스트 당 내에서 좌파와 우파가 존재했지만 결론적으로 우파가 주도권을 잡으면서 그 단어는 사장되었죠. 현재 사용하는 좌파 파시즘은 부정적 이미지를 이용한 정치적 비난에 불과합니다.
우끼님 덕에 예전에 정리했던 자료를 뒤적이면서 다시 공부할 수 있어 기뻤어요. 이런 의문이나 질문.. 대환영입니다. ㅎㅎㅎ 제가 올려드린 글에서 우끼님이 궁금하셨던 부분이 아주 조금이나마 풀리시길 바라요. ^^

DYDADDY 2023-03-29 11:21   좋아요 1 | URL
질문하신 부분에 답글을 드려야지 하고 쓴 후에 혹시 덜 쓴 부분이나 오탈자 있나 라고 보는데 우끼님 댓글이 사라졌어요. 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03-29 11:24   좋아요 2 | URL
네, 저도 오늘은 서재에 좀 늦게 접속했더니 그새 우끼 님 댓글 사라져서 아예 못 봤어요! ㅎㅎㅎㅎ

우끼 2023-03-29 11:29   좋아요 2 | URL
자냥님 상세히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까 댓글달았는데 제 우려만 너무 길게 적은것같아서 지웠었고.. 답변 달아주신거 보고 뒤늦게 다시 답니다. 사실 페미니즘에 나치즘을 붙여서 말하는, 제입장에선 나쁜 사람들도 있고, 좌파파시즘 역시도 마찬가지의 의미에서 약자를 대변하는 좌파가 부족하고 윤리적 메세지 자체가 설득력도 크지 않은(?) 시대에 윤리에 관한 논의에 개입하고 논쟁할 열의 없이 쉽게 판단내리는 그룹이 사용하고 퍼트리기 쉬운 단어처럼 보여서 경계했던것같아요. 한편으로는 논쟁에 개입하는 것도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라 자신을 상처입히지 않을 편한 논리를 쉽게 습득하는 것이 더 빈번해서 그런것도 같구요… 사실 논리와 실재 삶에서 실천하는 윤리에는 차이가 있기도 하구요 각자 선택하는 것이겠지요.. 그렇지만 우리의 선택이 각자를 포함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남은한주 평안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대디님 오 이런 역사적 맥락이 있나요? 공부량이 늘어나는게 살짝 두려워지는 순간입니다 출처를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통일되지 않은 목소리도 파시즘이 될 수 있나요?? 저도 윤리와 파시즘을 동치시키는 건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둘의 차이를 설명해내는 데는 공부가 더 필요할것같아요. ㅠㅠ 답변 상세히 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참고해서 책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DYDADDY 2023-03-29 11:39   좋아요 1 | URL
일상에서 자기 검열은 일정 정도 필요하지만 여기에서는 편하게 글을 쓰셔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요. 누구나 탈출구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하니까요. ^^

- 2023-03-30 12:25   좋아요 2 | URL
한나 아렌트가 이런 종류의 말을 해요. (제 안에 남은 부분이라서… 제 뇌피셜 일 수 있습니다.) 공동의 세계를 짓는일에 참여하고 거기서 자신의 의견를 수정하는 것까지가 용기라고. 그러기위해 같음이 아닌 다름을 (단독자ㅋ) 고수해야 한다고. 전체주의적 도구로 정치를 하는 이런 사회정치적 현실에서 같은 편을 만난 것 같아도 그 다름의 긴장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로 느꼈어요. 저는. 그러므로. 다름을 받아들이고 제시할 수 있는 주체되기의 과정으로 글쓰기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꼭 필요하다고 느꼈고, 이제 그러기 좋은 시절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언어를 가지는 일은 노력과 비용과 여러가지 자원을 쏟아야하는 일 임에는 틀립없어요. 희진샘은 한 발 더가죠. 과정에서 다른 몸이 만나 다른 앎(지식)을 생산해야한다고.

저는 지난번 댓글부터 쭉 이어지는 우끼님이 윤리를 고민하면서도 권력을 갖기를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는 권력입니다. 물론 이는 상대적이죠 ㅋㅋㅋ 이런 미디어 환경에서 고작 독후감쓰는 권력ㅋㅋㅋ) 저어하는 부분에 힘을 드리고 싶습니다. 자신을 고치고 갱신할 수 있는 태도가 있다면 용기내셔도 될 듯 해요. 어려운 용어의 엄밀한 정의는 제가 모르는 영역이지만, 좌파아닌 ㅋㅋㅋ 신자유주의 페미로서 우정을 담아!

우끼 2023-03-30 14:56   좋아요 2 | URL
말씀듣고 생각해보니, 제가 반박받는걸 상당히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더라구요 ㅠ 항상 맞는 (?) 논리에 짓눌려서 제 몸의 목소리를 못듣고 대변하지 못하던 사람이라.. 제 주도권을 잃어버리는 게 두려웠던 것 같아요. 주도권은 쥐고 있되 맞다고 생각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시간을 가지면 되는 거기도 한데요..
마찬가지로 타인도 그런 경우가 있겠지 하고 말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걸 두려워하기도 했구요.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의견을 적극적으로 말하는 사람을 더 편하게 느끼기도 했던 것 같아요. 그 사람이 저를 배려해주기도 한다면, 서로 끝까지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페미니즘 영역의 일부를 공유하는 동지에게(좌파가 아니신데 이런 단어가 괜찮나 싶지만) 이런 응원을 받아서 기쁘고 감사합니다
진보운동 하시는 분들 내부에서도 이런 긴장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채효정님이 하신게 생각이 납니다.. 90%에 동의해도 10%에 의문이 가면 그걸 묻고 가면 안되고 계속 질문해야 한다고..

DYDADDY 2023-03-29 12:08   좋아요 1 | URL
그당시 읽었던 책 중에 파시즘 관련 책은 캐빈 패스모어의 <파시즘>과 로버트 팩스턴의 <파시즘>, 임지현의 <우리 안의 파시즘>이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5년 전쯤 <전체주의의 기원>을 읽다가 의문이 생겨 파시즘에 대한 책을 읽었던 것 같아요. 결국 <전체주의의 기원>은 다 못읽었어요. ㅋㅋㅋㅋ 엉뚱한 데 꽂히면 종종 그럽니다. 그리고 공부할 때에는 인터넷에서 해당 키워드와 관련된 것들을 검색해서 같이 정리했기에 아마 책에 없는 내용도 더러 있을겁니다. 혼자서 정리하다보니 어느 내용이 어느책에서 나온건지는 저도 잘 기억나지 않아요. ㅠㅠ
윤리는 다수의 시민이 인정하는 행동양식이라는 점에서 파시즘적인 성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파시즘의 변종인 나치즘의 윤리는 인종 차별과 우생학이었으니까요. 다수가 인준한다고 해서 그것이 윤리가 아니라는 것은 다수의 지지로 용산에 계시는 분을 선출한 것을 윤리적이라고 보지 않듯이 다수의 인준은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전기가오리의 로티 강의에서 꼭 철학책을 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라고 하더군요. 꼭 철학책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인문학책이나 교양서에서 필요하고 중요한 부분만 발췌하여 내것으로 만드는 것도 공부라고 생각해요. 더 확장하면 전기가오리 강의를 듣거나 무언가 새로운 것에 대한 의문이 생길 때 이걸 다 내 머리 속에 넣어야돼 라는 강박관념보다는 정리는 해놓되 내 삶에 필요한 부분만 그때그때 꺼내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공부량에 대한 부담감은 덜어내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어요. ^^
 
행복한 장례식 마르코폴로의 도서관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서정 옮김 / 마르코폴로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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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인종, 계급 차이를 극복하고 화합하게 하는 어떤 장례식. 그러나 모든 여성과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무한한 사랑과 우정 애정을 받는 알릭이라는 캐릭터의 매력이 대체 무엇인지 도무지 공감할 수가 없어서 판타지처럼 읽힌다. 알릭이 그렇게 매력 넘치는 인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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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9
그라치아 델레다 지음, 이현경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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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마님이 하인 돌쇠에게 눈독을 들인다. 일 잘하는 우직한 돌쇠를 보니 딴 생각이 자꾸 든다. 저 녀석을 키워서 냉큼 잡아먹어야겠다! 마님은 돌쇠에게만 쌀밥을 그득그득 담아주신다. 돌쇠는 영문을 모르는지 아는지 달콤한 쌀밥 맛에 조금씩 조금씩 넘어간다......... 그라치아 델레다 <악의 길>의 어떤 부분은 돌쇠에게 쌀밥을 퍼주는 마님, 기운 넘치는 돌쇠를 훔쳐보며 왠지 타는 듯한 갈증에 목말라하는 마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마님이 아니라 ‘아씨’에 가깝고, 돌쇠가 젊고 미남인 데다 야성미까지 넘친다는 것이랄까. 아,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점은 애초에 돌쇠가 먼저 아씨에게 눈독을 들인다. 아씨는 자기도 모르게 돌쇠의 매력에 조금씩 넘어가고…….

돌쇠에 속하는 인물은 ‘피에트로 베누’- 소설은 이 피에트로가 마을 선술집에서 술집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누구나 칭찬하는 잘생긴 외모와 숨길 수 없는 야망, 거침없는 태도 등 그는 한마디로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 같다. 이 작품의 배경은 이탈리아 사르데냐섬의 한 마을이다. 가진 것이라곤 지나치게 잘생긴 외모와 타고난 육체적 매력뿐인 이 이탈리아 남자 피에트로는, 마을에서는 왕이라고 불리는 가장 부유한 노이나 집안에 일자리를 얻어 볼 생각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이다. 잠깐 선술집에 들러 이 집안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보던 중 그는 그 집안에 딸, 정숙함의 거울이라는 ‘마리아 노이나’가 있음을 알게 된다. 피에트로는 거칠게 비웃는다. 아무리 정숙함의 거울이라고 해도 그 나이에 사랑하는 남자는 있겠지! 술집 주인은 딱하다는 듯이 답한다. 천만에 그 콧대 높은 아가씨가 아무하고나 결혼할까!

평판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지적을 받기는 했지만 피에트로는 노이나 집안의 하인으로 일자리를 얻는 데 성공한다. 그러면서 흘끔 쳐다본 그 여자, 정숙함의 거울이라는 그 콧대 높은 아가씨, 주인집 딸은 듣던 대로 아름답다. 사실 피에트로는 잘생긴 외모 덕에 여자들을 꼬시는 일은 식은 죽 먹기다. 이 노이나 집안과 가까운 이들 중 피에트로에게 반한 여자가 있었으니, ‘사비나’라는 젊은 처자로 이 아가씬 노이나 집안과 친척 관계이지만 집안이 가난해 신분상으로는 피에트로, 그러니까 돌쇠와 비슷한 처지라고 할 수 있다. 마리아와 사비나는 비슷한 또래에 사촌이라 가깝게 지내지만 마리아는 늘 사비나의 처지- 가난함을 동정하고 안쓰럽게 생각한다.

피에트로는 일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사비나를 사랑한다. 사비나는 청순한 외모에 순박하다. 자신과 신분상의 차이도 크지 않아 언제든 원하면 손에 넣을 수 있는 여자라고 생각한다. 사비나 또한 속내를 잘 드러내지는 않지만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틀림없다. 아씨 마리아는 마리아대로 집안일-주로 포도농장 일-을 돕다가 피에트로와 몇 번 부딪히면서 그가 꽤 잘생겼다는 것을 인지한다. 그녀에게 구애를 해오는 시시한 남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돌쇠는 잘생겼다. 게다가 저 육체 좀 보라지... 이글이글 작열하는 태양 아래 포도밭에서 일하는 피에트로의 땀방울을 훔쳐보노라면 자기도 모르게 와인이 땡기는 것 같다. 그러나 아씨가 어찌 감히 하인을 좋아할 수 있는가! 콧대 높고 허영심 많은 아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하인 그를 경멸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참 이상하다 사비나의 웃음이, 피에트로를 보며 웃는 사비나의 웃음에 왠지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그리고 마리아는, 피에트로를 향한 마음을 털어놓으며 웃는 사촌 사비나의 행복해하는 모습에, 그 가난하고 보잘것없고 소박한 친척을 처음으로 질투한다. 그 잘생긴 돌쇠 때문에. 그런데 공교롭게도 돌쇠의 마음에도 미묘한 변화가 일어난다. 잡힐 듯 말 듯 사비나는 쉽게 마음을 열어주지 않고, 그러는 사이에 누군가가 “피에트로 베누. 마리아는 사비나를 질투해”라고 농담처럼 내뱉는데(어디나 뚜쟁이들은 있다), 이 한마디 때문에 돌쇠의 가슴에는 뜨거운 불길이 확 타오른다. 아씨, 손에 넣을 수 없는 아씨를 향한 거침없는 불길이…. 게다가 아씨는 청순하기만 한 사비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데다 도도하고 무엇보다 관능적이다! 자기를 무시하고 경멸하는 눈빛조차 돌쇠를 사로잡는다. 저 여자를 꼭 갖고 말겠어! 그는 이제 아무도, 다른 여자는 누구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직 마리아, 아씨, 그녀만이 목표가 된다. 부자가 되면 그녀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그녀와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는다.



“맞아요. 그래요. 당신이에요! 왜 웃는 거죠? 내가 가난한 하인이라서? 그렇다고 당신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은 아니잖아요? 아니, 다른 남자들보다 당신을 더 사랑할 수 있어요, 마리아. 다른 남자들은 당신을 다른 목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요. 결혼하기 위해, 당신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난 만질 수 없는 뭔가를 바라보듯 당신을 바라보고 있어요.” (111쪽)


아씨 또한 자꾸만 자꾸만 속절없이 무너진다. 저 징글징글하게 잘생긴 놈, 저 야성미 넘치는 놈, 그런데 저놈이 거침없이 구애를 해온다. 이걸 어쩌지..... 아아아........ 저놈, 저 잘생긴 놈이 말까지 잘해! 저렇게 뜨겁고 달콤한 말에 마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무너진다. 아니, 한번 마음을 열어보기로 한다. 어쩌면 욕망이 속삭이는 대로, 저 잘생긴 놈을 나도 한번 가져보지 못할 게 뭐야!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편이 더 맞을 것이다. 탐욕스럽게 돌쇠를 맛보면서도 한편으로는 도도한 아씨인 내가 이런 저급한 하인 따위와 놀아나다니 문득문득 자기와 돌쇠를 향한 경멸감이 치솟는다. 나는 이런 놈과 맺어질 수 없어, 부모님이 알면, 마을 사람들이 알면 뭐라고 비웃을까! 내적 갈등에 시달리다 차곡차곡 다른 남자와 결혼할 준비를 한다. 그런 그녀 앞에 모든 걸 다 가진.......(그러나 얼굴은 못생긴) ‘프란체스코 로사나’가 나타나 구애를 한다. 그는 오래전부터 마리아를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착하고 다정다감하고 부유한 시의원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못생겼다. 마리아는 프란체스코를 만나면서도 잘생긴 그놈, 돌쇠를 머리에서 지우지 못한다. 그놈은 어쩌자고 그렇게 잘생긴 것인가. 어쩌자고 그렇게 뜨겁고 야성적인가........ 아아........

부자가 되어 마리아와 결혼할 날만을 꿈꾸던 돌쇠에게 이 소식은 청천벽력이다. 그는 이를 빠드득 간다. 어차피 혼자였던 세상, 잃을 게 없다. 자기의 ‘마음속에 다시 들어와 쌓인 사랑의 감정들은 아무도 따고 싶어 하지 않는 썩은 과일처럼 느껴’(42쪽)진다. 크하 표현 봐라! 돌쇠는 꿈을 꾼다. 그러면 그는 꿈속에서 분노해서 총을 집어 들어 신랑을 쏘곤 한다. 마리아는 마리아 대로 머리를 굴린다. 섣불리 행동했다가는 큰일 날 것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안다. 마리아는 돌쇠를 쫓아버릴 궁리를 하지만 한편으로는 생각한다. 그가 복수할 수도 있다고, 주인집을 중상모략하고 그들을 괴롭히고 해를 입힐 수도 있다고, 포도나무를 베어내고 소를 죽이고 곡식에 불을 지를지도 모른다고. 모욕당한 남자는 폭풍과 불길보다 무섭다고, 남자들은 얼마나 경솔하고 불같은지!(117쪽) 진저리를 친다. 아씨와 돌쇠 그리고 사비나, 프란체스코 이 네 남녀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마리아와 피에트로, 피에트로와 사비나, 사비나와 마리아, 마리아와 프란체스코…. 한때 다정했던 마음들, 너그러운 마음과 사랑의 감정들은 각자의 이기적인 욕망이 폭발하면서 저마다의 격렬한 증오로 돌변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런 순간에도 잔인한 열정에 사로잡혀 몸을 떨며 고통스러워한다. 아아아, 잘생긴 돌쇠야, 아아아, 아름다운 아씨여..... ‘사랑을 나누던 행복한 시기’에 그들을 ‘유순하게 만들었던 선한 본능은 봄이 끝나가며 나비의 날개가 떨어지듯 모두 떨어져’ 나간다. ‘죽은 나비 뒤에는 지저분하고 파괴적인 애벌레만 남을 뿐’(189쪽)이다. <악의 길>은 사랑 때문에 선해질 수 있는 마음이 바로 그 사랑, 또는 자기를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 때문에 사람을 악으로 이끌어 갈 수도 있음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니까 아씨의 쌀밥이 마침내는 돌덩이가 되어 돌아올 수도 있음을.



“약혼자가 약혼하기 전과 같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지 않아 잘 들어. 남자는 무기와 같아서 장전되지 않으면 무해하고 장전되면 위험하지………. 약혼자는 장전된 무기야. 건드리면 안 돼………”  (<악의 길>, 3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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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3-03-24 1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으어… 궁금하네요….

잠자냥 2023-03-24 14:26   좋아요 2 | URL
생각보다 재미났어서 이틀만에 후딱 읽었습니다.
사실 하루만에도 읽을 수 있었는데, 내일을 생각해! 자야 해 자야 해 하면서 끊어 읽었다는.

다락방 2023-03-24 13: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제타입이네요. 야성미에 육체 노동이 곁들여진.... 그런데 여자는 신분도 높고 고결하다.... 이것은 잘만 킹인가! ㅋㅋㅋ
저 이 책 사야겠어요. 누구도 날 막을 수 없어!!

잠자냥 2023-03-24 14:37   좋아요 1 | URL
아주 그냥 흥미진진 쫄깃합니다. 다락방님은 순삭으로 읽어치우실 듯...
그리고 이런 이야기 어찌 보면 좀 흔하잖아요? 그런데 작가가 여성이라서 좀 다르게 쓴 부분도 있었던 거 같아요.

잠자냥 2023-03-24 17:23   좋아요 2 | URL
참 이미 올라온 다른 리뷰 읽지 마세요! 결정적 스포일러 마구 발설하신 분들이 좀 있더라고요.

다락방 2023-03-24 17:33   좋아요 2 | URL
오오 엄청난 팁이네요. 감사합니다!!

책먼지 2023-03-24 15: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으아 네 남녀의 운명 어떻게 되나요??? 으으.. 여기서 끊으시다니!!! 이러면 책을 살 수밖에 없잖아요!! 이 글 읽다보니 <알쓸인잡>에서 김영하 작가가 했던 말 떠올라요. 어릴 때부터 나만 바라보고 나를 챙겨주는 다정한 소꿉친구, 돈 많고 잘 생겼지만 어두운 과거가 있어서 어딘지 차가운 실장님. 이렇게 상반된 두 남주가 드라마나 소설 소재로 등장하는 게 여성이 인생에서 반려자를 선택해야할 때 그게 현실이면 너무 리스크가 크니까 허구를 통해 미리 선택을 학습하는 거라는 그런 취지의 분석이었는데.. 못생겼지만 모든 걸 다 가진 그놈인가 잘생겼지만 신분이 낮은 저놈인가.. 하아.. 어렵네요, 어려워요

잠자냥 2023-03-24 17:21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제가 쓴 건 아주 일부분이오니 직접 확인하세요. 이 작품은 이탈리아 지방 한 마을의 이글이글 황량한 분위기하고도 아주 어울리게 절묘하게 쓰고 있어서 읽는 맛이 더 좋았거든요. 이미 올라온 다른 리뷰 스포일러 많더라고요. 그건 주의!!

- 2023-03-24 15: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앜ㅋㅋㅋㅋㅋ ㅋㅋㅋㅋ 실제로 읽어도 이렇게 저렴할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 비싼척 잠자냥 ㅋㅋㅋ 독후감이 너무 저렴해요 ㅋㅋㅋ 제타입임 ㅋㅋㅋㅋㅋ
제가 아씨면 둘다 안먹습니다 ㅋㅋㅋ 비리거나 느끼하거나 ㅋㅋㅋ

잠자냥 2023-03-24 17:04   좋아요 3 | URL
아니 기본 내용은 좀 통속 저렴 ㅋㅋㅋㅋㅋㅋㅋ 근데 잘 썼음. 괜히 노벨상 작가가 아니지
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03-24 17:24   좋아요 2 | URL
쟝 아씨, 돌쇠가 아씨 쌀밥은 안 먹는답니다, 페미 아씨 쌀밥 독약 들어 있을 거 같다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2023-03-24 17:41   좋아요 1 | URL
나 향단이라서 밥을 잘해.. 가마솥에 누룽지 박박 긁어서 숭늉도 잘 만들어서 주저 앉힌 돌 쇠가 …. 근데 몸 좋은 돌쇠는 … 아직…

잠자냥 2023-03-24 17:47   좋아요 0 | URL
아 쟝 아씨는 ㅅㅅ 안 하시고 연구만 하신다고 돌쇠가 그거도 저어된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 2023-03-24 17:49   좋아요 1 | URL
나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구나. 김을 참치회에 싸먹도록 하여라. 소주는 조금만 붓도록 ㅋㅋㅋㅋ
(연어 잘못 먹으면 비리고 느끼한테 참지 혼자 먹긴 좀 그렇고 고민되네 저녁 메뉴 ㅋㅋㅋ)

moonnight 2023-03-24 15: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앜!! 잠자냥님ㅠㅠ;;;; 궁금해요 궁금해ㅠㅠ;;;; 그런 선택이 필요없는 재미없는 인생이라 다행이구먼요@_@;;;;;;

잠자냥 2023-03-24 17:04   좋아요 2 | URL
꼭 읽어보세요! 넘나 재밌어요!

독서괭 2023-03-24 17: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악의 길>이라는 제목 보고는 구매를 망설이던 독자가 잠자냥의 리뷰 제목 보고 구매를 결정합니다 ㅋㅋㅋ 주말 뉴스레터에 꼭 들어가야 합니다 ㅋㅋㅋ 줄거리는 많이 본 듯한 흐름인데 자냥님 리뷰가 아주 찰지네요. 아씨의 쌀밥이 돌덩이가 ㅋㅋㅋㅋ
다락방님 바로 주문해서 하루만에 홀딱 읽으실듯요 ㅋ

잠자냥 2023-03-24 18:00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 때로는 저렴한 리뷰가 구매욕을 당깁니다!

책읽는나무 2023-03-24 21: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뷰 분위기를 이런 버전으로?ㅋㅋㅋ
근데 마지막 문장!
약혼자는 장전된 무기야. 건드리면 안 돼!
왜 갑자기 컬리의 초인종 소리가 울리는 것 같죠?ㅋㅋㅋㅋ 유부남도 건드리면 안 됑띵똥띵똥!!!
책은 이미 보관함에 퐁당했지요!

잠자냥 2023-03-25 01:31   좋아요 2 | URL
컬리의 초인종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그래서 요즘 어쩐지 컬리 안 시키고 싶더라니…. 다락방 님 오늘은 방해받지 말아야 할 텐데….. 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3-03-25 18: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너무너무너무 읽고 싶어요, 이 책 ㅋㅋㅋㅋㅋㅋㅋ 읽고 나서 리뷰는 안 쓸거에요. 페이퍼도, 100자평도 안 쓸거에요.
몰래 혼자만 읽을 거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저는 잠자냥님 같은 대인배가 아니거든요. 이런 재미있는 책은 무조건 혼자 봐야 제 맛.

잠자냥 2023-03-25 21:09   좋아요 2 | URL
꼭 혼자 읽으시고 말하지 마세요! 특히 가족분들한테! ㅋㅋㅋㅋㅋㅋㅋ

은성 2023-07-26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리뷰 필력이 엄청 나네요ㅋㅋㅋ 책 소개글보다 리뷰 보고서 책이 더 사고 싶어졌습니다

잠자냥 2023-08-02 14:5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악의 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9
그라치아 델레다 지음, 이현경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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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욕망에 눈이 멀어 영원한 상복을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 처음에는 좀 통속적인 내용이라 뻔한 결말 아닐까 싶었는데… 그럼에도 흥미진진해서 쭉쭉 읽다가 막판에 몰아치는 부분에서는 전율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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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3-24 0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판 몰아치는 소설 넘 좋아요~~😆

잠자냥 2023-03-24 08:33   좋아요 0 | URL
이 작품은 초반부터 좀 쫄깃하긴 해요. ㅎㅎ

다락방 2023-03-24 09: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율.. 이라고요? 아이참. 또 담습니다.

DYDADDY 2023-03-24 10:01   좋아요 0 | URL
담기만.. 하시는 거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03-24 10:11   좋아요 1 | URL
부장님 마음껏 담으세요. 이거 부장님이 좋아하실 거 같아요. ㅋㅋㅋ 주인공들 성적 텐션이 장난이 아닙니다.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3-03-24 10:18   좋아요 3 | URL
성적 텐션이 장난 아닌게 저랑 무슨 상관이죠? 저를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시는거예요? 흥!!

DYDADDY 2023-03-24 10:23   좋아요 1 | URL
단꿈(?)을 위해 컬리를 취소하고 싶은 다락방님으로 보고 있어요. 단꿈은 소중하니까요. 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03-24 10:42   좋아요 2 | URL
부장님, 전 저 성적 텐션 댓글 부장님 꿈 이야기 읽기 전에 달았거든요?
그것봐요. 부장님은 그런 분이라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1963년, 라리부와지에르에서, 지금과 똑같은 공포와 불신 속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N.의사의 판정을 기다렸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내 삶은 오기노 방식과 1프랑짜리 자판기 콘돔 사이에 자리한다. 이것이 삶을 가늠하는 적절한 방법이다. 심지어 그 무엇보다 더 확실한. (아니 에르노, <사건>, 12쪽)


마거릿 생어의 <여성과 새로운 인류 Woman and the New Race>를 읽고 책을 덮을 즈음, 아니 에르노의 <사건>이 떠올랐다. 1920년에 여성의 피임할 권리를 외치던 마거릿 생어, 그로 인해 여성은 피임을 하며 예전에 비해 자유로운 성생활을 하지만 그럼에도 늘 걱정에 시달려야 한다. 베란일을 계산하고 콘돔에 의지해도 임신의 공포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자유로울 것 같은 영혼 아니 에르노조차도. 에르노는 피임에 실패해 임신을 하고 낙태를 하기 전까지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낸다. <사건>은 그 고통의 기록이다. 프랑스는 1970년대 중반에야 낙태를 합법화했기 때문에 그전까지 미혼 여성의 임신은 사회적 자살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노동자와 소상공인 가정에서 태어나 고등교육을 받으며 계층 이동의 열망을 품었던 에르노에게 혼전 임신은 실패의 낙인이자, 하층계급으로 돌아가야 함을 뜻하기도 했다.

임신 후 에르노는 전처럼 수업을 듣고, 학생 식당에 가고, 학생들만 다니는 바에서 커피를 마시지만 이제 그들과 자신은 다른 처지이다. 에르노는 그들과 자신이 더는 같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임신 때문에 다시 나락으로 떨어진 것 같다. 그녀는 ‘그때 내 안에서 자라나던 무언가는 어떻게 보면 사회적 실패라는 낙인이었다.’고 회상한다. 공부를 좋아하고 미래를 꿈꾸던 총명한 대학생은 이제 ‘이념의 천국’에는 다가갈 수 없다. ‘그 아래로 구토하며 진창에 빠진 자신의 육신을 질질 끌고 다닐’ 뿐이다. 지식이란 습득해 봐야 결국 무너져 내릴  허울 같은 구조물처럼 보일 뿐이고 논문조차 도저히 쓸 수 없다. 그녀의 수첩에는 이런 단어들이 적혀 나간다. ‘아무것도 쓸 수 없다. 공부도 되지 않는다.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더 큰 세상을 꿈꾸던 총명한 대학생이 임신으로 말미암아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 모습은 임신과 출산이 사회적 존재로서 여성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일임을 내다본 마거릿 생어의 주장과 맞닿아 있다. 생어는 간호사로 일하면서 원치 않는 임신과 거듭된 출산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을 수없이 목격한다. 보다 못한 그녀는 1916년 뉴욕 브루클린에 피임클리닉을 열어 피임법을 가르쳤는데 이것이 불법이라는 이유로 체포된다. 이후 법정 싸움을 통해 산아제한과 법 개정, 여성 인권 운동을 시작하고 이 운동에 동참했던 그레고리 핀커스는 연구를 시작해 1960년 경구 피임약을 발명하게 된다. 생어의 인생은 산아제한(birth control)을 통한 여성 해방의 길 그 자체였다.

생어가 보기에 여성은 번식 능력을 통해 자신을 노예화하는 한편, 세상 사람들마저 속박하고 있었다. 낙태는커녕 피임조차 제대로 할 수 없던 시절에 여성들은 다산으로 대가족을 양산하고 그 수많은 아이들을 양육하느라 육체적·정신적인 힘을 낭비했다, 이는 여성의 사회적 죽음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산의 악순환에 빠진 여성은 심지어 번식 능력을 통해 자기도 모르는 사이 독재국가의 설립과 존속까지 가능케 했다. 생어의 주장에 따르면 ‘군주제, 과두제, 공화제 아니면 폭정이든, 이 존재의 필연적인 요인은 바로 인간이라는 종족’이었다. 인구과잉은 전 인류의 재앙이었다. 생어는 “번식의 힘이 아니었다면 그 어떤 군주도 다른 나라를 정복하다 죽지 않았을 것이고, 어떤 강대국도 영토를 넓히려고 잔혹한 전쟁을 일삼지 않았을 것”이며 “노동자들이 저임금이나 실업의 고통을 겪지도 않았을 것이고, 죄수 노역이나 아동 노동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다산이 아니었다면 ‘신의 행위‘라는 미명하에 포장된 기근이나 전염병도 없었을 것”(<여성과 새로운 인류>, 19쪽)이라고 말한다.

이런 재앙의 고리를 끊기 위한 그녀의 결론은 명확했다. 더 나은 임금, 더 짧은 노동 시간, 노동 선진화를 위한 새로운 시스템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수를 줄여야 했다. 번식 중단. 여성이 재생산만 하다 죽는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생어는 전쟁과 기근, 전염병이 문제를 해결해 주길 기다리지 말자고 촉구했다. 원치 않은 아이들을 잠깐 이 세상에 데려와서, 그들이 고통받고 우리에게 짐만 더해주다가 죽게 하는 일을 그만 멈추자고 제안한다. 생어는 여성이 ‘자궁을 비우는 간단한 과정을 통해 전쟁도 종식될 것’(204쪽)이라고 내다보았다.

생어에게 산아제한은 여성이 기본적인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수단이자, 복종을 통해 겪은 악을 뿌리째 뽑아버리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제껏 여성은 무지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사회적 재앙을 초래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현명하게 이 재앙을 원상태로 돌리고 새롭고 더 나은 질서를 만들어야 했다(21쪽). 그리고 그것은 여성이 어떤 상황에서, 언제 어머니가 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것이 생어가 말하는 여성의 근본적인 저항이며, 여성에게 이 저항은 자유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생어는 인류가 번창할지 아니면 쇠퇴할지 여부 또한 여성에게 달려 있다고 말하면서 자유라는 수단을 갖는 것은 여성의 의무이자 기본적인 인권이며, 여자는 자신의 자유에 대해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123쪽) 고 역설한다.

물론 생어는 사회가 여성들의 저항을 교묘한 수단으로 억압할 것 또한 예측했다. 여성을 단순한 재생산 도구로 삼고 저항하면 처벌할 수도 있고, 엄마가 될 것인지, 얼마나 많은 아이를 낳을 것인지를 선택하도록 몰아갈 수도 있다고. 그러나 생어는 정치권의 엉터리 대책과 사회적 만병통치약은 부가적인 수준에 그칠 뿐이며, 그런 처방으로는 절대 사회적 질병의 근원을 해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여성이 자신의 삶을 가치 없게 만들 때 전쟁, 기근, 빈곤 및 노동자에 대한 억압은 계속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생어는 출산을 제한하고 인간의 삶이 더 이상 낭비되지 않을 때에만 비로소 이 모든 억압이 중단될 것이라고 말했다. 100년 전 생어의 이 주장들은 현재 한국 사회에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출생률은 0.78.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1위. 사람들이 아이를 낳지 않고 도리어 목숨을 끊는 사회. 정상적인 기능이 멈춘 지 오래인 이 사회에서 여성들은 아이를 낳지 않음으로써 침묵의 저항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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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3-21 15:5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마거릿 생어가 지금 살아있다면 한국의 래디컬 페미니스트들과 함께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이 페이퍼를 읽으면서 하게 됩니다. 더불어 파이어스톤도 생각나고요. 분명 더 깊이 보고 그래서 더 멀리 볼 수 있었던 여성들이 이렇게 존재했었네요,

마지막 단락을 읽노라니 오늘 제가 아침에 읽었던 ‘케이트 밀렛‘의 <성 정치학> 생각이 나요. 헨리 밀러와 노먼 메일러를 가열차게 비판하면서 장 주네에 대해서는 뛰어난 작가였다고 평하거든요. 장 주네의 <발코니>에 대해 케이트 밀렛이 뭐라고 했는지 좀 길지만 인용해볼게요.


《발코니》는 남성과 여성 혹은 이를 대체하는 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 착취와 억압을 건드리지 않는 혁명이란 아무 쓸모가 없음을 보여준다. 주네는 섹슈얼리티라는 근원적 인간관계를 그로부터 생겨난 모든 정교한 사회적 구성물의 핵심 모델로 간주함으로써, 그것이 그 자체로 가망 없이 타락했을 뿐만 아니라 제도화된 불평등의 원형 그 자체임을 깨닫는다. 인간을 두 집단으로 나누고 생득권에 따라 그중 한 집단에 지배권을 주면서 사회 질서는 이미 억압 체제를 확립한 동시에 정당화했다고 주네는 확신한다. 이러한 억압 체제는 인간의 사유와 경험의 영역뿐만 아니라 모든 다른 인간관계의 형태에 잠재하여 타락하게 한다. -성 정치학, 케이트 밀렛, p.64

잠자냥 2023-03-21 16:59   좋아요 2 | URL
네, 생어는 틀림없이 지지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출생률 낮아지면 인구 감소로 경제성장/국가 위기가 온다 뭐 이런 말로 협박하지만 사람의 목숨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국가에서 아이를 낳으라고 강요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죠. 아이들 목숨도 여성들 목숨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인을 지금 이 사회는 너무 많이 보여주잖아요. 그러면서 출생은 무슨 개뿔.... 태어난 목숨부터 지킬 궁리나 하라고 좀...... 에휴

케이트 밀렛의 저 <발코니> 분석 글 명문이네요. <발코니>도 궁금해집니다... (지만지에 있네?!)

다락방 2023-03-21 17:04   좋아요 2 | URL
제가 장 주네를 잠자냥 님 서재에서 본 것 같아 검색했는데 잠자냥 님이 쓰신건 <하녀들> 이더라고요. 저도 지만지의 <발코니>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후훗

책먼지 2023-03-22 13:3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글 읽으면서 저는 토베 디틀레우센 코펜하겐 삼부작 중 <의존>이 떠올랐어요ㅠㅠ 임신과 낙태 자체도 절망적이었지만 낙태가 금지되었던 시절에 불법시술하고 그로 인한 약물중독으로 인생이 완전히 망가진 것에 대한 자전적 기록인데.. 또 생각하니 울분이 치솟으면서ㅠㅠ 의식적이었든 아니든 우리는 이미 번식 중단으로 저항하고 있었네요..

잠자냥 2023-03-22 14:09   좋아요 2 | URL
와우, 그 책이 자전적 이야기이군요. 약물중독까지.... 어쩐지 넘나 심란할 것 같아서 읽지 않았던 책인데 기회 되면 읽어봐야겠군요.

책먼지 2023-03-22 14:29   좋아요 2 | URL
잠자냥님 예감대로 엄청 심난한 책 맞습니다!! 인용해주신 아니 에르노 <사건>하고도 비슷하고 실비아 플라스를 연상시키기도 하고요!!

- 2023-03-23 16:22   좋아요 3 | URL
번식 중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갑자기 더글로리 이야기해서 미안한데... 저도 어제 그 이야기 하다 왔어요. 친구들이랑. 사실 더 글로리는 통쾌한 복수극이어서 mz 한테 인기가 많은 게 아니라 부모가 최초의 가해자인 걸 의식화는 못한 세대들의 집단 무의식을 건드린다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웃고만 말았는 데, 제 친구들은 가해자 되기 싫다고ㅋㅋ 그러더라고요 급진적인 자들ㅋㅋㅋㅋㅋ
대한민국은 너무 미쳐서 세상에 내놓기만 해도 가해자 되는 거 같은 기분... 뭐 이해합니다.
(물론 제 경우 mz라고 하기엔 나이 좀 애매하지만 ㅋㅋㅋ점점 양심이... 노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 또래이고 인식이 비슷하니 그냥 엠지라고 하겠습니닼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03-23 16:30   좋아요 2 | URL
쟝쟝/ 어휴 나 그 동은이 엄마? 그 부분은 집사2가 보고 있을 때 옆에서 봤는데 절레절레...˝ 저 여자가 최초의 악이네...˝ 했다능... 내가 보기엔 여러 가지로 제일 악하다..........

책먼지 2023-03-23 19:18   좋아요 2 | URL
자냥님 하필 제일 독한 부분을 보셔가지고!! 동은이가 기원에서 바둑두는 장면을 보셨어야 하는데(하도영이랑 기원 문에서 스치는 장면 원픽..)
쟝님은 친구분들도 예리하시군요!! 집단 무의식 건드린다는 부분 공감이요ㅠㅠ 있는 자원 없는 자원 다 퍼부어가며 너보다 밑에 있는 애들은 밟고 위에 있는 애들은 끌어내리며 계급의 사다리를 올라라,하는 교육을 저희가 받았죠..ㅠㅠ
저는 그것도 미치겠더라고요 동은이는 하나도 잊지 못하고 다 기억하는데 정작 연진이는 우리가 문동은한테 어떻게 했더라, 심했나, 하면서 기억을 더듬잖아요.. 때린 놈이 두 다리 뻗고 자는 세상..
김은숙 작가님 딸이 엄마는 내가 죽도록 맞고 오는 게 나아 죽도록 때리고 오는 게 나아 물은 데서 이 드라마가 시작됐다는 인터뷰 보았는데.. 으으.. 둘 다 싫다!!!

- 2023-03-24 00:13   좋아요 2 | URL
먼지님// 저는 부모님께 자원을 투하받거나 계급을 올라서라는 교육을 받은 적은 없고 (지는 게 이기라는 소리는 많이 들음ㅋㅋㅋ) 부모가 가해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ㅋㅋㅋ 그런 부모들이 너무 많은 한국의 혈연주의와 가족주의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ㅋㅋㅋ (저는 아닙니다 ㅋㅋㅋ 쏙 빠지기ㅋㅋㅋㅋ) 그리고 반대항의 좋은 부모나 조력자들도 드라마에 등장한다고 ㅋㅋㅋ 친구한테도 토 달았음 ㅋㅋㅋ

책먼지 2023-03-24 09:09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저희 부모님도 쟝님 부모님처럼 지는 게 이기는 거라고 가르치시긴 하셨는데 어디가서 경쟁에서 밀릴까봐 엄청 자원을 투하하기도 하셨어요!! (계급의 사다리 어쩌구 요거는 mz세대 부모 전반의 정서에 대한 저의 이해입니다ㅋㅋㅋ 여기에 너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너는 존재만으로 귀해, 니가 제일 잘났어, 요런 교육이 범벅이 되어있는 느낌) 물론 쟝님 말씀대로 개별성이 있긴 하지만 하면 됐던 세대와 해도 안 되는 세대 사이의 괴리가 있긴 있는 것 같아요!!

- 2023-03-24 11:25   좋아요 2 | URL
제가 먼지님이 어떻게 번식 중단까지 가셨는 지(?)에 관한 글을 읽어보진 않아서ㅜㅜ 뭐라고 댓글을 달아야할지 잘 모르겠어요 ㅋㅋㅋ (암튼 그런 글로 많이 괴로워하셨다고 해서 ㅜㅜ) 이 유례없는 출산 중단은 세대의 문제, 생존의 문제 다 껴있겠지만.... 저 역시 나쁘게 보지 않아요. 다만 여성에겐 피임권도 있지만 가임기라는 생물학적인 한계도 있기 때문에 남성에 비해 조금 더 절실하게 부모되기에 대해 고민해야하는 건 사실이고요~~~ 그리고 저는 아마도 탈락‘된‘ 축에 속합니다 ㅋㅋㅋ
앞으로 계속 함께 고민해가는 과정을 공유해야 할 거 같긴 한 데요, 제 경우는 mz축에 들지만 지방이었기 때문에 교육관이 범벅되어있다는 말에 세대로는 또 동의 하지만 ㅋㅋㅋㅋㅋ 교육관이 딱히 있으셨던 것 같지도 않습니다. ㅋㅋㅋㅋ
아 진짜 세대 넘 어려워여 ㅜㅜ 여튼 누가 한번 하면 다 해야만 하는 것 같아하는 한국 특유의 이상한 집단주의 문화는 자본주의와 만나 점점 괴물이 되고 있....는 거 같아요. 그래도 뭔가가 굳이 대세가 되어야 한다면 ‘하기‘보다 ‘안하기‘가 낫지 않나? 그럼 결혼 출산 안하기!하고 있는 한녀들 칭찬합니다ㅋㅋㅋㅋ

건수하 2023-03-22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2의 성에서 낙태 얘기 한참 읽다가, 도서관에 책 찾으러 갔는데 <사건>이 있어서 얼른 집어왔어요. 마거릿 생어도 읽어야겠어요!

(이렇게 밀리는 좌파의 길…)

잠자냥 2023-03-22 23:26   좋아요 1 | URL
<사건> 흥미진진해서 금방 읽으실 거예요! <좌파의 길>은 언젠가 걷다 보면 끝이 있겠지요?! ㅋㅋㅋㅋㅋㅋㅋ

- 2023-03-23 16: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사건>을 읽었습니다......... 으으... 잠자냥이 좋아하는 프랑스 영화 레벤느망도 봤어요.... 임신중지와 함께 멋진 페이퍼를 쓰려고 했지만... 이제 다 까먹었다... 그냥 그건 쓰지 못한 내 머릿 속에 ㅋㅋㅋㅋㅋ
그리고 마가렛 생어....... 우와 꼭 읽어야겠네... 재생산 남의 일이라고 ㅋㅋㅋ 속단(?)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이 시대의 여성주의자 ㅋㅋㅋ 빰! ㅋㅋㅋ

잠자냥 2023-03-23 16:31   좋아요 3 | URL
뭐야 머릿속에서 꺼내 글 써! ㅋㅋㅋㅋㅋ
재생산, 진짜 나에겐 남의 일인데 나도 읽었으니 쟝도 읽으세요. ㅋㅋㅋㅋㅋ

- 2023-03-24 11:11   좋아요 2 | URL
잠자냥도 가치잇는 삶을......... 안읽어도 살고 계신 것 같으니 사십시오 ㅋㅋㅋ

잠자냥 2023-03-24 12:32   좋아요 1 | URL
<가치 있는 삶> 사뒀는데 아직 안 읽었음. 읽고 더 가치 있게 살게요. ㅋㅋㅋㅋㅋㅋㅋ

- 2023-03-24 12:33   좋아요 1 | URL
ㅋㅋㅋ아니오 ㅋㅋㅋ 그냥 살라고!!!

잠자냥 2023-03-24 12:37   좋아요 1 | URL
아니야 더 가치있게 살 거야
내가 젤 좋아하는 페미니스트 잠자냥
내가 젤 가치있게 사는 잠자냥......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2023-03-24 12:42   좋아요 2 | URL
세젤페 내젤페 내젤가 잠자냥 저리가…. 은오 어디갓냐 ㅋㅋㅋ 좀 나타나서 이 자만한 냐옹이좀 케어해랏 ㅋㅋㅋ 난 못참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