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 마님이 하인 돌쇠에게 눈독을 들인다. 일 잘하는 우직한 돌쇠를 보니 딴 생각이 자꾸 든다. 저 녀석을 키워서 냉큼 잡아먹어야겠다! 마님은 돌쇠에게만 쌀밥을 그득그득 담아주신다. 돌쇠는 영문을 모르는지 아는지 달콤한 쌀밥 맛에 조금씩 조금씩 넘어간다......... 그라치아 델레다 <악의 길>의 어떤 부분은 돌쇠에게 쌀밥을 퍼주는 마님, 기운 넘치는 돌쇠를 훔쳐보며 왠지 타는 듯한 갈증에 목말라하는 마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마님이 아니라 ‘아씨’에 가깝고, 돌쇠가 젊고 미남인 데다 야성미까지 넘친다는 것이랄까. 아,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점은 애초에 돌쇠가 먼저 아씨에게 눈독을 들인다. 아씨는 자기도 모르게 돌쇠의 매력에 조금씩 넘어가고…….
돌쇠에 속하는 인물은 ‘피에트로 베누’- 소설은 이 피에트로가 마을 선술집에서 술집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누구나 칭찬하는 잘생긴 외모와 숨길 수 없는 야망, 거침없는 태도 등 그는 한마디로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 같다. 이 작품의 배경은 이탈리아 사르데냐섬의 한 마을이다. 가진 것이라곤 지나치게 잘생긴 외모와 타고난 육체적 매력뿐인 이 이탈리아 남자 피에트로는, 마을에서는 왕이라고 불리는 가장 부유한 노이나 집안에 일자리를 얻어 볼 생각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이다. 잠깐 선술집에 들러 이 집안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보던 중 그는 그 집안에 딸, 정숙함의 거울이라는 ‘마리아 노이나’가 있음을 알게 된다. 피에트로는 거칠게 비웃는다. 아무리 정숙함의 거울이라고 해도 그 나이에 사랑하는 남자는 있겠지! 술집 주인은 딱하다는 듯이 답한다. 천만에 그 콧대 높은 아가씨가 아무하고나 결혼할까!
평판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지적을 받기는 했지만 피에트로는 노이나 집안의 하인으로 일자리를 얻는 데 성공한다. 그러면서 흘끔 쳐다본 그 여자, 정숙함의 거울이라는 그 콧대 높은 아가씨, 주인집 딸은 듣던 대로 아름답다. 사실 피에트로는 잘생긴 외모 덕에 여자들을 꼬시는 일은 식은 죽 먹기다. 이 노이나 집안과 가까운 이들 중 피에트로에게 반한 여자가 있었으니, ‘사비나’라는 젊은 처자로 이 아가씬 노이나 집안과 친척 관계이지만 집안이 가난해 신분상으로는 피에트로, 그러니까 돌쇠와 비슷한 처지라고 할 수 있다. 마리아와 사비나는 비슷한 또래에 사촌이라 가깝게 지내지만 마리아는 늘 사비나의 처지- 가난함을 동정하고 안쓰럽게 생각한다.
피에트로는 일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사비나를 사랑한다. 사비나는 청순한 외모에 순박하다. 자신과 신분상의 차이도 크지 않아 언제든 원하면 손에 넣을 수 있는 여자라고 생각한다. 사비나 또한 속내를 잘 드러내지는 않지만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틀림없다. 아씨 마리아는 마리아대로 집안일-주로 포도농장 일-을 돕다가 피에트로와 몇 번 부딪히면서 그가 꽤 잘생겼다는 것을 인지한다. 그녀에게 구애를 해오는 시시한 남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돌쇠는 잘생겼다. 게다가 저 육체 좀 보라지... 이글이글 작열하는 태양 아래 포도밭에서 일하는 피에트로의 땀방울을 훔쳐보노라면 자기도 모르게 와인이 땡기는 것 같다. 그러나 아씨가 어찌 감히 하인을 좋아할 수 있는가! 콧대 높고 허영심 많은 아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하인 그를 경멸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참 이상하다 사비나의 웃음이, 피에트로를 보며 웃는 사비나의 웃음에 왠지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그리고 마리아는, 피에트로를 향한 마음을 털어놓으며 웃는 사촌 사비나의 행복해하는 모습에, 그 가난하고 보잘것없고 소박한 친척을 처음으로 질투한다. 그 잘생긴 돌쇠 때문에. 그런데 공교롭게도 돌쇠의 마음에도 미묘한 변화가 일어난다. 잡힐 듯 말 듯 사비나는 쉽게 마음을 열어주지 않고, 그러는 사이에 누군가가 “피에트로 베누. 마리아는 사비나를 질투해”라고 농담처럼 내뱉는데(어디나 뚜쟁이들은 있다), 이 한마디 때문에 돌쇠의 가슴에는 뜨거운 불길이 확 타오른다. 아씨, 손에 넣을 수 없는 아씨를 향한 거침없는 불길이…. 게다가 아씨는 청순하기만 한 사비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데다 도도하고 무엇보다 관능적이다! 자기를 무시하고 경멸하는 눈빛조차 돌쇠를 사로잡는다. 저 여자를 꼭 갖고 말겠어! 그는 이제 아무도, 다른 여자는 누구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직 마리아, 아씨, 그녀만이 목표가 된다. 부자가 되면 그녀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그녀와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는다.
“맞아요. 그래요. 당신이에요! 왜 웃는 거죠? 내가 가난한 하인이라서? 그렇다고 당신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은 아니잖아요? 아니, 다른 남자들보다 당신을 더 사랑할 수 있어요, 마리아. 다른 남자들은 당신을 다른 목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요. 결혼하기 위해, 당신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난 만질 수 없는 뭔가를 바라보듯 당신을 바라보고 있어요.” (111쪽)
아씨 또한 자꾸만 자꾸만 속절없이 무너진다. 저 징글징글하게 잘생긴 놈, 저 야성미 넘치는 놈, 그런데 저놈이 거침없이 구애를 해온다. 이걸 어쩌지..... 아아아........ 저놈, 저 잘생긴 놈이 말까지 잘해! 저렇게 뜨겁고 달콤한 말에 마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무너진다. 아니, 한번 마음을 열어보기로 한다. 어쩌면 욕망이 속삭이는 대로, 저 잘생긴 놈을 나도 한번 가져보지 못할 게 뭐야!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편이 더 맞을 것이다. 탐욕스럽게 돌쇠를 맛보면서도 한편으로는 도도한 아씨인 내가 이런 저급한 하인 따위와 놀아나다니 문득문득 자기와 돌쇠를 향한 경멸감이 치솟는다. 나는 이런 놈과 맺어질 수 없어, 부모님이 알면, 마을 사람들이 알면 뭐라고 비웃을까! 내적 갈등에 시달리다 차곡차곡 다른 남자와 결혼할 준비를 한다. 그런 그녀 앞에 모든 걸 다 가진.......(그러나 얼굴은 못생긴) ‘프란체스코 로사나’가 나타나 구애를 한다. 그는 오래전부터 마리아를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착하고 다정다감하고 부유한 시의원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못생겼다. 마리아는 프란체스코를 만나면서도 잘생긴 그놈, 돌쇠를 머리에서 지우지 못한다. 그놈은 어쩌자고 그렇게 잘생긴 것인가. 어쩌자고 그렇게 뜨겁고 야성적인가........ 아아........
부자가 되어 마리아와 결혼할 날만을 꿈꾸던 돌쇠에게 이 소식은 청천벽력이다. 그는 이를 빠드득 간다. 어차피 혼자였던 세상, 잃을 게 없다. 자기의 ‘마음속에 다시 들어와 쌓인 사랑의 감정들은 아무도 따고 싶어 하지 않는 썩은 과일처럼 느껴’(42쪽)진다. 크하 표현 봐라! 돌쇠는 꿈을 꾼다. 그러면 그는 꿈속에서 분노해서 총을 집어 들어 신랑을 쏘곤 한다. 마리아는 마리아 대로 머리를 굴린다. 섣불리 행동했다가는 큰일 날 것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안다. 마리아는 돌쇠를 쫓아버릴 궁리를 하지만 한편으로는 생각한다. 그가 복수할 수도 있다고, 주인집을 중상모략하고 그들을 괴롭히고 해를 입힐 수도 있다고, 포도나무를 베어내고 소를 죽이고 곡식에 불을 지를지도 모른다고. 모욕당한 남자는 폭풍과 불길보다 무섭다고, 남자들은 얼마나 경솔하고 불같은지!(117쪽) 진저리를 친다. 아씨와 돌쇠 그리고 사비나, 프란체스코 이 네 남녀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마리아와 피에트로, 피에트로와 사비나, 사비나와 마리아, 마리아와 프란체스코…. 한때 다정했던 마음들, 너그러운 마음과 사랑의 감정들은 각자의 이기적인 욕망이 폭발하면서 저마다의 격렬한 증오로 돌변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런 순간에도 잔인한 열정에 사로잡혀 몸을 떨며 고통스러워한다. 아아아, 잘생긴 돌쇠야, 아아아, 아름다운 아씨여..... ‘사랑을 나누던 행복한 시기’에 그들을 ‘유순하게 만들었던 선한 본능은 봄이 끝나가며 나비의 날개가 떨어지듯 모두 떨어져’ 나간다. ‘죽은 나비 뒤에는 지저분하고 파괴적인 애벌레만 남을 뿐’(189쪽)이다. <악의 길>은 사랑 때문에 선해질 수 있는 마음이 바로 그 사랑, 또는 자기를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 때문에 사람을 악으로 이끌어 갈 수도 있음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니까 아씨의 쌀밥이 마침내는 돌덩이가 되어 돌아올 수도 있음을.
“약혼자가 약혼하기 전과 같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지 않아 잘 들어. 남자는 무기와 같아서 장전되지 않으면 무해하고 장전되면 위험하지………. 약혼자는 장전된 무기야. 건드리면 안 돼………” (<악의 길>, 3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