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K. 딕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대 때였다. 그의 작품을 읽은 것은 아니었다. <블레이드 러너>- 컬트 팬을 거느린 그 영화 때문이었다. 1982년작- 이 오래된, 낡은 듯한 작품에 왜 그토록 많은 SF팬들이 열광하는 것일까? 처음 보았을 때는 난해하고 지루했다. 그런데 참 묘하게도 그 음울한 분위기만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서 내가 무언가 놓쳤을지도 몰라 하는 마음에 그 후에도 몇 번쯤 더 보았다. 그리고 최근의 <블레이드 러너 2049>에 이르기까지 이 영화는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 되었다. 당연히 영화의 원작인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찾아 읽었고 그렇게 필립 K. 딕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재미나게 본 많은 영화- 그러니까 <토탈 리콜>, <마이너리티 리포트>, <페이첵> 같은 작품의 원작도 모두 필립 K. 딕, 그가 쓴 것임을 알고는 SF 장르를 딱히 좋아하지 않음에도 그 원작들은 찾아서 읽었다.
딕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대단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 아니다. 하나 같이 기억이 불분명하거나 아예 잃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내가 누구인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이번에 <필립 K. 딕의 말>을 읽으면서 나는 그러한 인물들, 그리고 그 미미한 인물들이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세계가 필립 K. 딕 그의 정신세계이자 고난에 찬 삶의 반영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평생 44권의 장편과 120여 편에 달하는 중단편을 발표했지만 살아서는 작품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 낮은 고료를 받으면서 생활고에 시달렸다. 수년 동안 중추신경 흥분제인 암페타민을 복용하며 작품을 썼고 이런 자기파멸적 생활 습관은 그에게 뒤늦은 명성을 가져다주기도 했지만 주변 인물들과는 불화할 수밖에 없었고(5번의 결혼과 이혼), 우울증, 편집증, 망상, 불안, 공황장애 등에 시달리게 했다. 한마디로 이 책에서 말하듯 고립감, 고뇌, 갈망, 가난함은 딕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었지만, 그와 동시에 창작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그는 고독함을 달래기 위해 글을 쓴다. 그리고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과 사랑에 빠진다. 딕이 만들어낸 인물들은 모두가 그의 친구였다. 때문에 그는 책을 탈고하고 나면 상실감으로 우울증에 빠질 정도였다. 그는 말한다. “다시는 그 친구들의 말을 들을 수 없고, 다시는 그 친구들이 고투하고, 역경에 맞서 싸우는 걸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니까. 소설을 탈고한다는 건 친구들을 영영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야.”(38쪽) 고립감 속에 글을 썼던 그는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로부터 위안을 얻었는데 무엇보다 영웅이 아닌 보통 사람이 엄청난 용기를 발휘하는 순간을 묘사하면서 가장 큰 기쁨을 느꼈다. 설령 그가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하고, 현실 세계에 어떤 파문도 남기지 못한다고 해도 그랬다. 그래서 딕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쓰는 소설은 그의 용기에 대한 찬가”(39쪽)라고. 이런 그의 말을 따라가다 보면 지금까지 그가 빚어낸 인물들, 그 평범한 인물들의 고뇌와 분투-SF라는 어쩌면 너무나 헛된 공상의 세계임에도 그 세계를 살아가는 그들의 쉽게 지지 않으려는 투쟁만큼은 왜 그토록 마음에 남았는지 수긍하게 된다.
그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어쩌면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에서 어떤 의미를, 하나의 질문으로 여기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일 수 있는 것에서 어떤 대답을 찾는 범주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의 직업이 하는 일은 바로 이런 질문들을 상상하는 거였다.
딕이 전에 쓴 비슷한 종류의 이야기들에서, 주인공은 세계의 질서에 관련된 엄청난 비밀을 우연히 발견하고, 믿으려는 이 하나 없는 주변 사람들에게 그것을 설명하려고 무진 애쓴다. (엠마뉘엘 카레르, <필립 K. 딕>, 72쪽~80쪽 발췌)
어린 시절 필립 K. 딕을 우상으로 섬겼던 엠마뉘엘 카레르가 쓴 딕의 평전 <필립 K. 딕>에서는 재미난 일화가 나온다. 인간 심리에 관심이 많았던 딕은 어린 시절에 사람들을 대상으로 심리 테스트를 해보곤 했는데,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그들이 어떤 종류의 정신병에 대한 성향이 강한지 보기 위해, 최대한 자연스럽게 질문했을 때, 거기에 어떻게 반응하고 대답하는지를 살폈다. 애초부터 평범한 이들의 정신세계에도 뭔가 하나쯤은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가 이런 사고를 하게 된 원인은 아마도 스스로 정신에 일종이 균열이 있음을 인지했고 그 균열에서 다양한-또는 특이한 사고가 발생할 수 있음을 알았기에 타인 또한 그렇지 않을까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닐까. 실제로 그는 <화성의 타임슬립>에서 ‘정신병자로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자신을 비롯하여 인간의 정신세계에 그가 이토록 관심이 깊었던 것은 대부분의 인간들은 ‘우리의 세계가 침식당하고 있다는 어렴풋한 느낌을 받을 뿐 우리의 개인적 통일성을 향한 침략이 어디서 오는지도 알아차리지 못’(114쪽)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즉 그의 이러한 ‘주관적 세계’에 대한 탐구는 한 인물의 세계가 그보다 더 강한 위치에 있는 다른 사람의 세계에 침식당하기 쉽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런 섬뜩하고 기괴한 상황을 묘사함으로써 소설을 통해 독자에게 경고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강자에 의한 침식- 딕은 20세기의 가장 큰 위협을 전체주의적 국가로 보았다. 그가 보기에 전체주의는 국가뿐만이 아니라 좌파 파시즘, 심리학적 운동, 종교운동, 마약중독 재활 단체, 권력자들, 책략가들 따위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었고, 심리적으로 자기보다 더 강한 위치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런 경향이 나타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본질적으로 이런 권력 관계에서 약자의 위치에 속하는 사람들, 즉 강하지 못한 사람들을 옹호했다. 그의 소설에서 매번 약자들이 주인공이 되어 분투하는 이유이다.
본질적으로 내가 옹호하는 대의는 강하지 못한 사람들의 대의야. 만약 나 자신이 강자였다면 전체주의를 그렇게 큰 위협으로 느끼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난 강자가 아니기 때문에 약자에게 공감한다네. 내 소설의 주인공들이 본질적으로 반反영웅들인 건 바로 그 때문이야. 거의 루저에 가까운 친구들이지만, 나는 혹독한 세상에서도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특질을 부여하려고 노력한다네. 그러는 동시에, 폭압에 대항하려고 같은 수단을 쓰다가 어느새 상대방처럼 착취적이고 조작적인 인간이 되어버리는 걸 보고 싶지는 않고. (<필립 K. 딕의 말>, 114~115쪽)
전체주의에 대한 경고와 함께 그가 끊임없이 고민했던 주제는 ‘진정한 인간이란 무엇인가’였다. 딕은 <인간과 안드로이드 The Human and the Android〉라는 강연에서 진정한 인간이란 무엇인가 질문한다. 그가 보기에 이 인간 사회에도 생물학적으로는 인간이지만 실제로는 안드로이드인 사람들이 있었다. 컴퓨터는 날이 갈수록 예민한 사고력을 가진 존재가 되어가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은 점점 인간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딕은 이 강연 원고를 작성하면서 아직은 인간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인간성을 강화해줄 필요가 있음을 절감한다. 딕이 생각하는 진정한 인간은 다음과 같다. “그릇된 일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그걸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 “아니, 나는 죽이지 않을 거야. 폭탄을 떨어뜨리지 않을 거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존재.” “뇌물로 매수할 수 없고, 겁을 줘서 어떤 일을 강요할 수도 없고, 프로파간다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불법적인 시스템에 대해 불법적인 저항운동을 개시할 필요성을” 아는 존재, “법 자체가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때로는 법을 어길 수도 있는”(54쪽) 존재…. 이런 정의를 읽노라면 현대는 이미 생물학적으로는 인간이지만 실제로는 안드로이드인 인간들의 디스토피아가 된 것은 아닌가 씁쓸해지기도 한다.
“진정한 인간과, 단지 진정한 인간을 흉내 낼 뿐인 존재들 사이의 괴리”(149쪽)를 끊임없이 고민했고, 현실 세계에서는 딕 그 자신에게 위안을 주는 친구들의 수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설 속에 반영웅들을 창조한 그, 그리고 소설에서 영웅이 아닌 보통 사람이 엄청난 용기를 발휘하는 순간을 그리면서 무엇보다 큰 기쁨을 느꼈던 그. 필립 K. 딕은 전체주의적 국가에 맞서 각자의 고유한 세계를 지켜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안드로이드가 아닌, 진정한 인간으로서 각자의 고유한 세계를 지켜내는 일은 그가 살았던 20세기보다 이 21세기에 더더욱 중요하고 그래서 더 어려운 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