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리플리 1 : 재능있는 리플리 리플리 1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홍성영 옮김 / 그책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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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유명한 작품을 원작으로 뒤늦게 만났다. 시기, 질투, 열등감, 동경 그 모든 인간의 복잡한 심리가 톰 리플리, 그 한 사람에게 담겨 있다. 분명 나쁜 인간 톰 리플리인데, 왜 자꾸 그의 범죄가 발각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까? 인간 모두가 리플리의 심리에 얼마쯤은 동조하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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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22-03-29 1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리즈 가면 갈 수록 그 마음이 더 강해져서 엄청.. 딜레마가 옵니다. ㅎㅎ 꿀잼!

잠자냥 2022-03-29 14:19   좋아요 1 | URL
네, 저 이거 이제 겨우 1권 남은 2~5권도 열심히 달려보겠습니다!

바람돌이 2022-03-29 11: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플리 하면 자동으로 알랑들롱이 떠오르는 저, 좀 더 젊은 사람들은 맷 데이먼을 떠올릴까요?
영화만 알고 있었는데 원작이 이 책이군요. 왠지 책이 더 좋을듯합니다. 물론 알랭들롱의 그 잘생긴 얼굴이 자꾸 떠올라 리플리를 미워할 수 없겟지만 말이에요. ^^

잠자냥 2022-03-29 14:19   좋아요 1 | URL
전 엄청 웃기게도 리플리는 알랑들롱 얼굴로, 디키는 주드 로 얼굴로 상상하면서 읽고 있다니까요. 마즈는 기네스 펠트로.. ㅋㅋㅋㅋ

다락방 2022-03-29 1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맷 데이먼의 영화로 보면서 엄청 쫄았던 생각나네요. 거짓말 스트레스가 엄청났던 그런 영화입니다. 으휴.. 저도 영화 보고나서 책 볼까 했는데 책이 길더라고요...

잠자냥 2022-03-29 14:21   좋아요 2 | URL
전 <태양은 가득히>, <리플리> 둘 다 봤는데요- 영화도 둘 다 재밌어요. 일단 알랑들롱, 주드 로 다 너무 잘 생겼을 때 찍어서리 ㅋㅋㅋ
책 너무 길어서 엄두를 못내다가, 전자책으로 5권까지 왕창 사서 출퇴근 길에 읽고 있습니다.

책읽는나무 2022-03-29 12: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궁금하네요.
잠자냥님의 백자평도 궁금한데 여러분들의 댓글도 궁금증을!!!!^^

잠자냥 2022-03-29 14:21   좋아요 2 | URL
이건 영화도 책도 둘 다 명작~

책읽는나무 2022-03-29 14:44   좋아요 3 | URL
왓챠 그냥 들어갔는데 마침 리플리 제목 뜨면서 보겠냐고 묻길래..이건 무슨 우연? 하면서 한 시간 정도 봤어요. 아직까진 조마조마~ 왜 저럴까? 하면서 보고 있어요.

잠자냥 2022-03-29 15:06   좋아요 2 | URL
오모나 정말 무슨 조화! ㅋㅋㅋㅋ

책읽는나무 2022-03-29 15:47   좋아요 2 | URL
저도 놀래서 북플 다시 들어와 제목 재확인 했었어요.
신기한 일이롤세~
전 잠자냥님이 명작 한 번 보라고 알고리즘 빵~ 쏘아 주신 줄!!ㅋㅋㅋ

독서괭 2022-03-29 12: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예전에 단편집 한권 봤는데 그때 오열했던 기억 뿐..^^;; 항상 더 읽어보고 싶은데 못 읽고 있네요~ 리플리 궁금합니다!

잠자냥 2022-03-29 14:21   좋아요 2 | URL
헉, 무슨 작품인데 오열했어요?? 궁금해요!!!!

다락방 2022-03-29 14:35   좋아요 2 | URL
저도 궁금해요 알려주세요!!

독서괭 2022-03-29 15:05   좋아요 2 | URL
<동물 애호가를 위한 잔혹한 책>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코끼리가 주인공이었는데.. 당시 제가 다른 일이 있어서 그렇게 울었던 건지 작품 자체가 그렇게 슬픈 건지 아리송해서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잠자냥 2022-03-29 15:13   좋아요 2 | URL
아아아, 저 이 책은 제목 때문에 아마 못 읽었던 거 같아요... 근데 궁금해서 찾아보니 다 절판이네요.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읽을 자신은 없군요....;

독서괭 2022-03-29 15:26   좋아요 3 | URL
동물애호가이신 잠자냥님 오열하신다에 한표..☝️

책읽는나무 2022-03-29 15:45   좋아요 3 | URL
제목부터가 벌써부터 오열 준비, 곽티슈 부여잡고 읽어야할 것 같군요!!^^
일단 제목 찜해 두겠어요.
도서관엔 있으려나요??^^

독서괭 2022-03-29 16:51   좋아요 1 | URL
ㅎㅎ 나무님 도서관에서 구해 읽으시면 감상 알려주세요~!^^

유부만두 2022-03-29 17: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알랑들롱의 “태양은 가득히” 정말 걸작이죠!!!

잠자냥 2022-03-29 20:13   좋아요 0 | URL
네 정말 세월이 지나고 다시 봐도 명작! 진정한 미남자 알랑들롱!
 
석류의 씨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
이디스 워튼 지음, 송은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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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스트 세계문학 시리즈 중 《회색 여인》과 《사악한 목소리》두 권을 먼저 읽었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조금 실망하고 심드렁 하던 참에 이디스 워튼의 《석류의 씨》를 읽기 시작했다. 표제작인 <석류의 씨>부터 읽을까 하다가 순서대로 보기 시작했는데 첫 번째 단편 <편지>를 읽기 시작하고 몇 쪽 지나지 않아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아, 역시 이디스 워튼이구나, 참 잘 쓴다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 묘하게 비아냥대는 듯한 문장! 소설의 즐거움은 단지 줄거리에만 있는 게 아니라 역시 문장의 맛에도 있지! 이디스 워튼, 그녀는 어쩜 이렇게 심리 묘사에 탁월할까, 그런 생각들이 든다. 게다가 <편지>는 어쩜 이야기도 이렇게 재미난지.
 
리지 웨스트는 가정교사로 근근이 살아가는 가난한 여인이다. 일주일에 다섯 번은 유명한 미국 화가인 빈센트 디어링 씨의 딸 줄리엣을 가르친다. 줄리엣을 가르친 지는 2년 째. 그런데 아이는 리지의 뜻대로 잘 되지 않고, 아이의 부모는 화가인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딸의 교육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견디다 못한 리지는 그래도 딸에게는 관심이 있어 보이는 디어링 씨에게 어느 날, 큰맘 먹고 줄리엣에 관한 교육 상담을 신청한다. 그리고 그녀는 아이를 가르치는 일의 힘겨움을 토로하다가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만다. 아니 그런데, 그 틈을 타 이놈의 디어링 씨는 갑자기 리지의 손을 잡으며 그녀를 위로하려 드는 게 아닌가! 여기서부터 웬만한 독자들은 오, 안 돼 리지! 그러지 마! 하는 심정이 들기 마련이다. 나 역시 이 여자가 또 불구덩이로 들어가는구만 혀를 쯧쯧 찼다. 아니나 다를까, 이 디어링 씨는 이윽고 흔한 래퍼토리를 읊는다. ‘어린 줄리엣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된 것은 위층의 어머니 때문’이며 ‘자기 아이에게 무익한 충격만 주고 그런 충격을 다독일 적절한 돌봄을 베풀어주는 것조차 아까워한 어머니’라는…. 물론 아내가 “병자” 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면서 아픈 아내를 아끼고 사랑하며, 걱정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기는 하지만, 그놈 말에 따르면 결국 딸의 교육이 엉망인 것은 다 아내 탓이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디어링 씨의 아내는 왜 위층에만 있는 것일까? 왜 아픈 것일까? 혹시 그녀도 집안에만 갇히다시피 한 건 아닐까? 그녀가 아픈 건 디어링 씨 때문은 아닐까? 원치 않는 결혼과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 이런 것들과 담을 쌓고 싶어서 위층에서 내려오지 않는 건 아닐까, 아니 내려 올 수 없는 상태인 건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스쳐지나가고, 그렇기 때문에 디어링이라는 남자와 리지가 더 가까워지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런 독자의 걱정을 저버리고 안타깝게도 리지는 디어링과 사랑에 빠지고 만다. 왜냐하면 그는 잘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 데다가 화가라서 예술을 알고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말도 잘 통해! 그러니 먹고사는 것에 급급해서 가정교사로 이집 저집 떠돌며 일하느라 연애라고는 해보지도 못했던 리지가 이 남자에게 빠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독자는 아무래도 디어링에 대해 못미더운 감정이 가시지 않는다. 게다가 리지, 도망쳐 이 여자야! 하고 외치고 싶은 순간이 또 한 번 더 찾아온다. 딸과 아내와 함께 여행을 떠났던 빈센트 디어링! 그동안 그를 애타게 기다리던 리지는 빈센트가 돌아오자 기쁜 마음으로 그의 집을 찾아가는데, 이상하다! 딸과 아내는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무거운 얼굴로 아내가 사망해서 상속 문제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게 아닌가. 아내가 죽었는데 어린 딸은 친척 집에 맡겼다?! 아내는 왜 급작스럽게 죽었을까? 아무리 병을 앓고 있었다하더라도 너무나 뜻밖의 일이다. 게다가 딸은 왜 그대로 놔두고 와? 정상적인 상태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모든 정황이 이상하다고 한번쯤은 의심할 것이다. 그러나 리지는 그를 사랑했기에, 그의 잘 생긴 얼굴에 폭 빠졌기에 빈센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그를 미국으로 떠나보낸다. 편지해요, 꼭 편지해.....!

리지는 그에게 편지를 수없이 보낸다. 그러나 그로부터 답장은 점점 뜸해지더니 이윽고 아무런 소식도 오지 않는다. 그녀는 그를 이해해보려 애쓴다. 아내의 사망 때문에 정신이 없겠지, 어린 딸을 홀로 돌보느라 힘겨울 거야. 미국에서 다시 정착하기 어려울지도 몰라 등등. 때로는 분노에 차서 냉정하게 거의 헤어지자는 투로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답이 없다. 그래, 이렇게 끝인 거로구나. 리지도 체념하기에 이르고, 독자들도 그 희멀건한 남자 빈센트란 놈은 그렇게 젊은 처자를 농락하고는 미국으로 튀었구나 한심한 놈, 하고 혀를 차면서 이렇게 그들의 관계는 끝이 나는가 보다 싶다. 이 무렵 리지의 마음 상태를 이디스 워튼은 이렇게 쓴다. 나는 이 구절을 보면서 또 한 번 워튼에게 감탄한다.


자신의 고뇌에 마음껏 빠져들 여유가 있었다면 이런 사념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일어나서 일을 해야 했다. 세탁부에게 요금을 치르고, 마담 클로팽의 청구서대로 매주 돈을 지불해야 했고, 검소한 습관에도 감당해야 할 온갖 소소한 ‘잡비’들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언젠가 병들고 일할 능력이 없어질 날이 온다는 두려움이 일할 수 있는 동안 일하도록 그녀를 몰아댔다. 그런 두려움 없이 지내본 날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 단조로운 불행 속에서 죽음의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러나 병들고 ‘자기 한 몸 거둘 수 없게’ 되는 데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편지>, 《석류의 씨》, 35쪽)


가난한 처자는 애인을 잃고 슬퍼할 겨를도 없다. 먹고살아야하는 공포가 그녀를 짓누르기 때문이다. 유부남과 사랑에 빠졌다가 그에게 버림받고도 그 슬픔에 폭 젖어 있기보다는, 이제 또 혼자라는 두려움에 떨기보다는 ‘언젠가 병들고 일할 능력이 없어질 날이 온다는 두려움’이 그녀에게는 더 크다. 그 먹고사니즘의 공포는 그녀를 압박하지 않은 적이 없다. 리지는 그런 ‘두려움 없이 지내본 날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보다도 언젠가 병들고 ‘자기 한 몸 거둘 수 없게’ 되는 것에 대한 공포가 더욱더 크다. 그런 공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100여 년 전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제 한 몸 돌봐야 하는 여성들의 공포를 뉴욕 상류층 출신의 이디스 워튼이 이처럼 빼어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포는 100여 년이 지난 현재의 여성들도 여전히 고개를 끄덕일 절대 공포이다.

어쨌든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리지는 로또에 당첨되는 행운을 얻는다. 아, 물론 리지가 로또를 산 건 아니다. 이 무렵 가난한 처녀나 청년에게 로또란 얼굴도 모르던 부자 친척이 갑자기 죽으면서 그녀 또는 그에게 유산을 남기는 일이다. 리지에게도 뜻하지 않은 그런 행운이 주어지고, 그녀는 이제 물질적으로 더는 쪼들리지 않는다. 먹고사는 것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게 부유하게 지내다 보니 주변에서는 괜찮은(?) 남자를 소개해주기도 하고 리지도 이제는 다즐링인지 디어링에 관한 기억도 서서히 잊혀가, 그 새 남자를 만나볼까 싶어진다. 그런데 그는 아, 너무나 잘 생긴 다즐링과 비교가 된다. 그의 이름은 벤.... ‘어깨가 좁고 각진 체형’에 ‘희미한 감정의 흔적에도 전혀 변치 않는 둥그런 얼굴’, ‘아기 같은 뺨과 직각의 칼라 위로 드러난 푸른 사각턱’ 등등 리지에겐 너무나 가까이 다가가기 힘든 벤 씨..... 리지는 그래도 ‘기적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그의 눈과 귀에 집중’(40쪽) 하려고 한다. 나는 이디스 워튼의 이런 문장에서도 포복절도한다. 아무튼 그런 찰나에 리지 앞에 다시 나타난 그 썩을 놈의 다즐링! 그는 예전과 달리 너무나 초라한 모습이다. 그럼에도 그 잘생긴 얼굴은 어디 가지 않았다(어디 좀 가지 좀...). 그리고 리지는 그가 자신에게 계속 편지를 보내지 않았음을, 답장도 씹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렇게 또 다즐링의 늪에 폭 빠져서는... 결국 독자들의 온갖 만류와 잔소리와 반대와 결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와 결국 결혼하기에 이른다. 리지는 ‘항상 물질적으로 너무나 가난했기에 잔돈까지 세어가며 여윳돈을 계산해야 했기’ 때문에 그녀는 ‘적어도 감정을 아낌없이 쓰는 즐거움은 알았’고 ‘부자가 물 쓰듯 돈을 쓰듯이 자신의 마음을 아낌없이’(26쪽) 다즐링에게 줘버리고 결국 그와 결혼까지 하고 만 것이다! 그 후 그녀가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이 작품의 가장 큰 반전이자 재미는 디어링(이라고 쓰고 다즐링이라 부르고 있는 그 남자)과 리지의 행복해 보였던 결혼 생활이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지는지, 그 ‘나락’의 계기가 되는 사건에 있다. 디어링은 여러 차례 이상한 놈이라는 신호를 리지에게 보냈다. 한발짝 떨어져서 그들을 지켜보는 독자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위층에만 있는 병든 아내, 딸의 교육에 관한 상담을 하는데 느닷없이 손을 잡고 입을 맞추는 남자, 엄마가 죽었는데도 딸을 친척집에 그냥 놔두고 오는  남자, 갑작스레 아내의 죽음을 핑계로 미국으로 돌아가서는 편지 한 장 없는 남자. 이런 단서만 조합했어도 다즐링은 충분히 멀리하고도 남을 사람이다. 아니 다시 만날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리지는 벤 씨의 ‘어좁’에 ‘아기 같은 얼굴’ 대신 어디지 음울해 보이는 잘생긴 예술가형 다즐링을 선택하고 만다. 그리고 그 선택이 잘못된 것을 알고 박차고 나갈 수 있었음에도, ‘집이 무너지면 폐허에서 도망’(66쪽) 친다는, ‘이보다 더 단순할 수 없’는 사실을 알면서도 주저앉고 만다. 그 무렵 여성이 무너진 집, 폐허가 된 집을 떠나기 쉽지 않았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이제 폐허 위에서 거짓된 삶을 살아갈 리지의 인생에 절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편지>는 이 책에 실린 다른 작품들에 비해 가장 현실적이다. 살인이 일어나지도 않고, 유령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이 나타나지도 않는다. 그런데 나는 나머지 세 작품보다 이 작품, <편지>가 가장 무서웠다. 현실에서 너무나 있을 법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마 많은 여성들이 리지처럼 잘못된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살아갈 것이다. 그런 남자와 함께, 그런 남편과 함께. 그 삶이 더 공포이지 않은가?

<석류의 씨>, <하녀의 종>에서도 이처럼 잘못된 선택으로 그다지 권장하기 어려운 남자들을 남편으로 맞아 살아가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그 남자들에게는 숨길만한 과거가 있거나(<하녀의 종>의 ‘브림프턴 씨’), 굳이 숨기지는 않지만 불쾌한 과거(<석류의 씨>의 ‘케네스 애슈비’)가 있다. 그리고 그들의 전처이거나 현재의 아내들은 병을 앓거나 그로 인해 일찍 세상을 떠나거나, 그 아내들과 가까이 지낸 사람들은 결국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그 남자들로 인해 병들었거나, 세상을 떠난 아내들로 인해 현재 고통 받는 사람들은 또 공교롭게도 현재의 아내(<석류의 씨>의 ‘샬럿 애슈비’)이거나 그 아내를 모시는 하녀(<하녀의 종>의 ‘하틀리’)이다. 여자들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안정적인 삶과 보호를 받지만, 사실 그 보호는 속박일 수 있으며 그것은 곧 자유를 감금당한 고립과 유폐라는 것을,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끔찍한 삶은 이 여인으로부터 저 여인에게로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석류의 씨》의 세 단편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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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3-25 12: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디스 워튼 책이라니 읽어봐야 겠습니다 ^^ 수수께끼 이야기 같아요 ㅋ

유령보다 귀신보다 더 무서운 그것은

사람이겠죠? 옷장에서 갑자기 귀신이 나오는것 보다는 사람이 나오는게 더 무섭다는 애기를 어디서 들어본거 같습니다 ^^

잠자냥 2022-03-25 14:09   좋아요 2 | URL
네, 역시 재미납니다. 유령보다 귀신보다 잘못 만난 사람이 더 무섭죠! 현실에서도 그렇고, 소설에서도 그렇더라고요- ㅎㅎㅎ

다락방 2022-03-25 16: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 이 책을 너무 재미있게 읽고 있는데 말이죠, 제가 이 책을 읽기 전에 이 리뷰를 봤다면, 이 리뷰만 봐도 너무 재미있어서 기꺼이 책을 샀을것 같습니다. 후훗.
저는 그 남자 특유의 게으름과 무심함이 진짜 너무 싫었어요. 그리고 자신은 비록 유부남이지만 사랑에 빠져 그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어쩐지 어깨 으쓱해지는 그 감정도 너무 잘 전해지더라고요. 너는 이런 사랑이란 감정, 남자와의 사이에 오고가는 이 교류 잘 모르지? 하는 그 어떤 젠체함 이랄까. 하여튼 재미납니다. ㅎㅎ 저도 이디스 워튼 워낙 재미있게 읽긴 하지만 이 책도 참 재미있네요. 후훗. 저는 아직 단편 두 개 더 읽어야 해요.

잠자냥 2022-03-25 16:38   좋아요 1 | URL
네, 정말 몰입도 최고에요! ㅎㅎㅎ
어우 그 남자 정말....... 휴 그 남자에 관한 묘사도 정말 압권이죠. ㅎㅎㅎㅎㅎ
나머지 두 편도 재미나게 읽으세요. 전 마지막 단편도 정말 재미나더라고요. 짧은데 강렬!

다락방 2022-03-25 16:51   좋아요 2 | URL
저는 읽으면서 <징구>랑 <로마의 열병> 생각도 나더라고요. ㅎㅎ

mini74 2022-03-25 1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썩을 놈의 다즐링! 에서 자냥님의 분노가 느껴집니다 ㅋㅋ 자냥님 리뷰 읽음 다 읽고 싶어집니다 ㅋㅋ 저 자냥님 글 보고 금색 사서 읽고있어요 ~~

잠자냥 2022-03-25 17:54   좋아요 1 | URL
ㅋㅋㅋ 다즐링 좋아하는 분들께는 좀 죄송하네요. ㅋㅋㅋㅋ 이 책 재미나요! 언제 읽어보세용~

독서괭 2022-03-26 08: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리뷰 너무 재밌어요!! 은근슬쩍 다즐링이라고 이름 바꾸신 것도 넘 웃기고요ㅋㅋㅋㅋ 읽으면서 느끼신 감정들이 생생하게 전해집니다.
전 이디스워튼 순수의시대 사놓기만 하고 계속 못 읽고있는데 얼른 읽어봐야 할텐데요..🙄

잠자냥 2022-03-26 11:58   좋아요 2 | URL
깨알 웃음 포인트 알아봐주셔서 감사해요! ㅋㅋ 책은 더 재미나요.
 
석류의 씨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
이디스 워튼 지음, 송은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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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역시 공포는 유령이나 귀신이 아니라 억압과 금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시리즈 중 <회색 여인>, <사악한 목소리>에 이어 이디스 워튼을 만났는데, 역시 명불허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물 심리 묘사도 그렇고, 아리송한 열린 결말들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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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3-25 05: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있어요!!

잠자냥 2022-03-25 09:19   좋아요 0 | URL
첫 번째 단편 읽었어요? 저 오늘 그 단편에 대해서 할 말 있음 ㅋㅋㅋㅋ

다락방 2022-03-25 09:21   좋아요 1 | URL
저 두번째 까지 읽었고 둘 다 재미있어요!! 첫번짼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남편새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2-03-25 09:27   좋아요 0 | URL
와, 그 새끼 진짜 할 말 많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2-03-25 09:42   좋아요 1 | URL
전 또 막 답답해가지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에휴 ㅋㅋㅋㅋㅋㅋㅋ 그 편지들 진짜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2-03-25 05: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그렇습니까? 이디스 워튼이 이런 장르를 썼다는 게 궁금했건만. ㅋㅋㅋ

잠자냥 2022-03-25 09:21   좋아요 2 | URL
막 그렇게 무서운 건 아닌데요, 암튼 이 사람이 글을 잘 쓰기는 하는구나, 괜히 퓰리쳐상 받았던 건 아니구나 싶더라고요-

독서괭 2022-03-25 0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셋중 가장 좋으셨어요? 그런데 별 하나 빼신 아쉬움이 궁금합니다!

잠자냥 2022-03-25 09:28   좋아요 1 | URL
네, 이 시리즈 시즌1, 5권 중 (다락방 님도 그렇지만) <프랑켄슈타인>만 빼고 4권 다 샀는데요, 가장 기대 중인 도러시 매카들 <초대받지 못한 자>만 빼놓고 다 읽은 지금... 이디스 워튼의 이 책이 저는 제일 좋더라고요. 별 다섯 줄까 하다가 결국 하나 뺀 것은 단편 4편만 들어 있어서 좀 중량감이 떨어지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이 시리즈는 시즌2에 어떤 책들을 낼지 모르겠으나, 단편보다는 장편을 좀 더 발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그런 면에서는 은행나무 ‘에세‘ 시리즈에 좀 더 점수를 주고 싶네요.)

독서괭 2022-03-25 09:3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은행나무 에세 시리즈를 검색하러 가야겠네요 ㅎㅎ

잠자냥 2022-03-25 10:07   좋아요 1 | URL
에세 시리즈는 앞으로 나올 책들 중에 기대되는 책이 더 많더라고요. 다 장편인 거 같고요~

독서괭 2022-03-25 13:03   좋아요 1 | URL
스콧님 리뷰에서 봤던 마지막연인 그 시리즈로군요! 기억해두겠습니다😍
 
죄와 벌 1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88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문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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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슬럼프를 빠져나오는 나만의 방법은 도선생 작품을 읽는 것이다. 소싯적 읽고 몇십 년 만에 다시 읽는 <죄와 벌>- 진짜 왜 이렇게 재밌어!! 라스콜리니코프 이 미친놈을 어째! 병적인 인간의 심리를 도스토옙스키처럼 잘 그려내는 작가가 또 있을까. 문동 버전은 대화가 오늘날 구어체라 좋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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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3-23 11:0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독서슬럼프를 빠져나오는 방법은 역시 진짜 재밌는 책을 읽는거 맞죠. 그런데 그게 도선생 책이란건 약간 의외!! 역시 잠자냥님이군하고 생각합니다. ^^

잠자냥 2022-03-23 11:31   좋아요 4 | URL
요즘 읽는 책마다 좀 심드렁했거든요. 근데 역시 도선생님 책 너무 재밌어요. >_<

새파랑 2022-03-23 11:4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이미 좋은 책들을 너무 많이 읽으셔서 요즘 읽는 책들이 심드렁한거 같아요 ㅋ

명작중에 잠자냥님 안읽은 책 찾기는 하늘의 별따기일듯 합니다 ^^

잠자냥 2022-03-23 11:59   좋아요 4 | URL
아닙니다~ 아직 갈 길이 멀었어요. 저도 <파르마의 수도원>도 읽어야 하고요!!

coolcat329 2022-03-23 12: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조만간 꼭 읽으려구요~
솔직히 이 책 안 읽은게 저는 늘 창피스러워서요. 😅

잠자냥 2022-03-23 12:45   좋아요 2 | URL
에이, 창피스러운 게 어디 있습니까. 때가 되면 읽고, 또 기회가 안 닿으면 못 읽고 그런 것이죠.

단발머리 2022-03-23 12: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께도 슬럼프가 있군요. 새삼 위로가 되는 이 심정… 뭘까여? 🤔🤔🤔
열린책들로 이 책 읽은 사람입니다. 문동이 그렇게나 좋다구요?

잠자냥 2022-03-23 12:47   좋아요 2 | URL
그럼요, 1년에 한 번쯤 책이 재미 없을 때가 있습니다. 최근에 좀 그랬고요. 그럴 때는 도 선생님 책~
열린책들도 ˝자네~ 그러게나. ~하는군.˝ 이렇게 말하나요? 문동은 라스콜리니코프랑 라주미힌처럼 친구 사이에 주고받는 대화가 진짜 요즘 구어체라 전 오히려 좋더라고요.

물감 2022-03-23 12: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아직 도끼옹 작품 한권도 안읽었는데요, 문동버전으로 도전하겠습니다 ㅋㅋㅋ 정보 감사합니다

잠자냥 2022-03-23 14:28   좋아요 3 | URL
네, 물감 님의 언젠가 도끼옹 리뷰 기대하겠습니다~

Falstaff 2022-03-23 21:44   좋아요 3 | URL
올롤롤롤로로로로... 걍 편한대로 읽으셔요.
도스토옙스키는 함부로 번역하면 코피 날 작가라서 대충 번역은 거의 없으니 편하게 고르셔도 됩니다. 다 일장일단이 있는 거 같더라고요. ㅋㅋㅋㅋ

케이 2022-03-23 15: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민음사 버전으로 읽었는데 민음사도 요즘 구어체예요. 도선생님 작품의 미덕은 역시 재미죠. 진짜 너무너무 재밌죠. 라주미힌 캐릭터 너무 좋아요.ㅋㅋ이런 친구 있으면 겁나 피곤하겠다 싶으면서도 너무 착하잖아요. 전 라주미힌이 친구의 살인을 눈치채는 찰나의 순간을 묘사한 장면이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아.. 저도 또 읽고 싶네요. 또 읽는다면 문동으로 읽어서 비교해 봐도 재밌을 것 같아요.

잠자냥 2022-03-23 15:29   좋아요 2 | URL
오 그렇군요! 전 예전에는 도선생님 작품 너무 장광설이라서 적응하기 어려웠는데, 그게 한번 거기에 빠지니까 그렇게 재미난 장광설도 없지 뭐예요! 라주미힌 캐릭터도 참 재미납니다. 옆에 있으면 피곤할 거 같지만 ㅎㅎㅎㅎㅎ

Forgettable. 2022-03-23 21: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잠 안와서 백치들 읽다가 후회했어요. 너무 훅 빠져서 밤샐각 ㅋㅋㅋ 하지만 1시간 읽고 끊고 꿀잠 잤습니다. 잡념이 사라지더라구요.

잠자냥 2022-03-23 23:38   좋아요 1 | URL
아껴두고 있는데 조만간 읽어야겠어요!

Falstaff 2022-03-23 21: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슬럼프를 빠져나오는 방법.
흥! 불과 며칠 전에는 서머싯 몸을 읽는 거라 하더니. 역시 여아일언 풍선껌이여! ㅋㅋㅋㅋ

잠자냥 2022-03-23 23:38   좋아요 1 | URL
아 그랬나요? ㅋㅋㅋㅋㅋ 전 기억이….. ㅋㅋㅋㅋㅋㅋ

mini74 2022-03-24 18: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선생님이시군요. 저는 초원의 집 시리즈 다시읽기.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 않는 책입니다. 맥심 대용량으로 제조해서요 ㅎㅎ

- 2022-03-26 14: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아 아거 참 이거 이거 차암 ……!!! (나의 열리지 않는 죄와벌 하권이여……!!!!)

잠자냥 2022-03-27 12:28   좋아요 1 | URL
언능 여시오 ㅋㅋㅋ
 

(다행스럽게도) 내가 직접 겪은 적은 없지만 태어나 살아온 지금까지 세계 곳곳에서 크고 작은 전쟁은 늘 있어왔다. 전쟁에 ‘크고 작은’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 자체가 모순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모든 전쟁은 비극이다. 그 비극이 지금도 우크라이나 땅에서 벌어지고 있다. 눈물을 흘리며 터덜터덜 걸어서, 부모 없이 홀로 국경을 넘는 한 우크라이나 소년의 모습을 보았다. 누가 이 아이에게 비극을 안겨 준 것일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그렁해져서 동영상을 보다가도 전쟁이 이렇게 하나의 감정적인 이미지로 소비되고 마는 것에 나도 한몫 거드는 것 같아 재빨리 영상을 닫는다. 내가 알렉산더 클루게의 <1945년 4월 8일 할버슈타트 공습>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최근의 이런 상황,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때문일 것이다. 폭격으로 민간 시설이 파괴되고 그 아래서 전쟁과는 상관없는 민간인들이 연일 목숨을 잃고 있다. 이 전쟁을 멀리서 지켜보는 이들은 어떤 면에서는 스펙터클한 죽음의 이미지들을 소비할 뿐이지만, 직접 그곳에서 참상을 겪는 이들은 어떠할까?

알렉산더 클루게의 <1945년 4월 8일 할버슈타트 공습>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겨우 4주 전, 당시 열세 살이던 클루게가 살던 독일의 소도시 할버슈타트에서 벌어진 무차별 폭격에 관한 이야기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담아낸다. 1945년 4월 8일, 전세가 이미 독일의 패전으로 기울어진 상황에서, 완전한 무방비 상태에 놓인 이 도시 위로 연합군의 폭격기 215대가 날아와 대량의 폭탄을 떨어뜨린다. 단 몇 십 분의 공격으로 도시는 완전히 초토화된다. 이 책은 그 일요일, 한 영화관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영화관 관리인이자 매표소 직원 슈라더 씨는 그날 아침 10시 갑자기 내동댕이쳐진 채 발코니석의 열이 오른쪽 천장과 만나는 곳에서 연기가 나는 하늘 한 조각을 막 보게 되는데, 거기로 고폭탄 하나가 이 건물을 뚫고 지하실까지 관통해 있었다. 슈라더 씨는 공습경보가 울리고 난 후 홀과 화장실에 관람객들이 남아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려던 참이었다. 이윽고 슈라더 씨는 상영작 안내판이 “배추인지 무인지 모를 정도로” 엉망진창이 된 것을 본다. 이제 막 일어난 일은 슈라더 씨가 관리하는 이 영화관이 경험한 ‘전율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전율, 어떤 최고의 영화가 야기한 것과도 비교하지 못할 전율’이다. 하지만 경험 많은 영화관 관리인인 슈라더 씨는 오후에 있을 정기 상영 네 번이 변경될 수 있다는 것보다 더 큰 전율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사이 11시 55분부터 도시에 폭탄이 쏟아지고 슈라더 씨는 지하실 입구 사이 구석에 숨는다. 파묻히고 싶지 않았으므로 지하실로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는다.
 
일요일이었으므로 결혼식을 준비하던 이들도 있다. 11시 20분에 공습경보가 울리자 여성웨이터가 무조건 지하실로 내려가라고 말한다. 결혼식에 온 손님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재잘대며 복도를 따라서 지하실 계단 아래로 내려간다. 신부, 신랑, 신부 어머니, 신랑 어머니, 신부 어머니 자매들과 신부의 자매, 그녀들의 오빠…. 꽃을 뿌리러 신부 측 사람들이 데려온 아이들 네 명도 있었다. 12분 후 그들은 모두 생매장당하고 만다. 공습 보초를 서는 의무 때문에 지하실 입구 까지만 같이 가주었다가 금방 다시 나온 신부의 오빠는 나중에 산더미 같은 잔해를 이리저리 뒤지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들이 질식해서 곧바로 죽었기를 바랍니다.”(31쪽)- 불타는 도시를, 재앙에 휩싸인 자신의 고향을 기록으로 남기려던 어느 무명의 사진가는 헌병대에 붙잡혀 첩자로 몰리고, 증거 여부에 따라 총살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묘지 관리인, 탑 망원보초, 버터 상인, 신문사 편집부, 국민학교 교사, 등등 할버슈타트의 여러 인물들의 관점으로 이 폭격을 묘사한다. 할버슈타트 출산 기자와 미 제8공군 여단장 앤더슨과의 인터뷰, 취리히 신문 통신원과 고위 참모 장교의 인터뷰가 실리기도 한다. 전쟁과 직접 관련이 있는 이들은 자신의 임무를 보다 효율적으로 완수하는 것, 즉 도시를 초토화시키기 위해 폭탄을 떨어뜨리는 노하우와 체계적 과정에 관심이 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은 민간인들은 그야 말로 생지옥이다. 그들은 큰 충격을 받는데도 ‘복수를 할 만한 대상을 찾을 수 없음’(37쪽)에 당혹해 한다. ‘단 20분 만에 이루어진 1945년 4월 8일의 피해가 돌이킬 수 없는 사실임이 점차 사람들의 마음 앞까지 파고든다.’(133쪽)




어느 무명 사진가가 찍은 폭격 직후 할버슈타트 -출처 <1945년 4월 8일 할버슈타트 공습>



제발트는 <공중전과 문학>에서 “이차대전 막바지 몇 해 동안 독일 도시들이 겪은 초토화 규모를 그 절반만이라도 제대로 떠올려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그 초토화의 참상이 어떠했는지를 깊이 생각해보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공중전과 문학>, 14쪽)라며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례없이 벌어진 공중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힌 바 있다. 그는 이어 “역사상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이 파괴 행위는 새로 건설된 국가 연감에 일반론으로 얼버무려 기록되었을 뿐 집단의식에 전혀 상흔을 남기지 않은 양 치부되었고, 당사자의 회고에서도 거의 배제되었을 뿐 아니라 그간 독일의 내적 상태에 관해 진전된 논의에서도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으며, 훗날 알렉산더 클루게가 확인해주었듯이 그 어떤 것도 공적으로 의미 있는 기호가 되지 못했다.”(같은 책, 22~23쪽) 말한다. 제발트는 “사람들 수백만 명을 강제수용소에서 살해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혹사한 민족이, 독일 도시들을 파괴하도록 명령한 군사 정책적 논리에 대해서 승전국들에 조사를 해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었다.”(같은 책, 21쪽)며 2차 세계대전 끝 무렵에 벌어진 독일을 향한 무차별적 공중전이 이제껏 제대로 논의되지 않았음을 날카롭게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제발트의 지적처럼 독일이 전쟁 당사자이기 때문에 연합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민간인들의 죽음마저 계속 외면 받아 마땅한 것일까?

제2차 세계대전 중 공중전은 독일은 물론 영국, 미국 모두에게 중요한 군사 수단이었다. 연합군의 공격은 독일 도시들을 더 강력하게 겨누었다. 군사적이거나 경제적인 목표물만이 폭격당한 것이 아니라, 시민들 또한 폭격 대상이었다. 그것이 독일 국민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실제로 1942년 2월 14일 영국 내각 공중전 담당부의 지역 폭격 지침에는 공습은 무엇보다 적국 주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려야 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 책에서도 미 제8공군에 부임, B-17기를 통한 폭격을 주도한 로버트 B. 윌리엄스 준장은 <노이에 취리혀 차이퉁>의 한 통신원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도시를 파괴함으로써 거기 사는 주민들의 저항 정신을 없애버려야 합니다.”( <1945년 4월 8일 할버슈타트 공습>, 87쪽) 폭격을 맞은 민간인들은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저항 정신은 말살당해 마땅하다는 명목 아래 무시무시한 폭격을 고스란히 감내해야만 했다. 30여분 남짓한 시간 동안 고폭탄 504톤과 소이탄 50톤이 할버슈타트에 떨어졌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 도심의 대략 80퍼센트는 파괴되었다. 희생자 수는 1,600명에서 2,000명 사이였다(당시 대략 65,000명이 이 도시에 살았다).
 


할버슈타트 위로 떨어진 폭탄- 출처 <1945년 4월 8일 할버슈타트 공습>



전쟁은 문학 작품에서 늘 다뤄온 주제이다. 그러나 클루게의 <1945년 4월 8일 할버슈타트 공습>처럼 폭격 그 자체에 중점을 둔 책은 드물다. 더욱이 제발트의 지적처럼 전쟁을 야기한 독일에서 폭격당한 경험을 묘사한다는 것은 문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자칫 위험할 수 있다. 때문에 커트 보니것은 드레스덴 폭격을 소재로 삼으면서도 전쟁의 참극을 노골적으로 설명하는 대신 시간과 공간을 어지럽게 넘나드는 이야기 안에서 드레스덴을 오히려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묘사하지 않았던가. 거기서 주인공 빌리가 겪은 드레스덴 폭격 또한 덤덤하기 짝이 없다. 어떤 순간은 도리어 유쾌하고 황당하기까지 하다. 그에 비해 클루게는 폭격을 직시한다. 열세 살 소년으로 겪었던 일, 공습으로 파괴된 부모님의 집을 건조하게 묘사한다. 여러 사람의 평범한 목소리를 싣는다. 그런 면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200여 명의 여성들의 이야기를 모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클루게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런 목소리들에 삽화, 폭격 사진 도시 지도, 공격하는 폭격기의 비행경로, 폭격기 배치의 측면과 후면도, 조감도, 폭탄의 유형별 도해와 사양, 상황 보고서, 실제 문서 인용문, 각주, 전문가 토론, 인터뷰 등등 많은 다양한 형식 요소를 모아 재구성한다. 이 건조한 기록들을 지켜보노라면 이것이 정녕 소설일까? 문학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 자료들과 가공한 자료들이 뒤섞인 각각의 일화들을 쫓아가다 보면 거기에는 결국 인간의 마음을 파괴한 파국의 참상을 보여주는 진실이 있음을 알게 된다. 전쟁에서의 폭격은 “그저 폭탄이 터지거나 도시가 다 타버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폭탄이고 그것이 현실을 태워버린다.”(139쪽)는 것을, 우리는 종종 전쟁을 폭풍우에 비유하지만, “번개, 폭우, 구름, 천둥은 전쟁에서 벌어지는 절멸 효과에 비하면 가장 중요하지 않은 표지일 뿐”(130쪽)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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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3-21 11: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뉴저먼 시네마의 기수였다는
알렉산더 클루게 감독의 다른 소설집
도 사두긴 했는데 읽다가 말았네요...

이번 책도 사려고 했다가 너무 얇고
비싸서리 - 그냥 도서관 희망도서로
만나야지 싶습니다.

최근 역전다방에서 전략폭격의 원흉
이었던 영국의 바머 해리스의 전략에
대해 본 적이 있는데, 적국의 전쟁수행
의지 분쇄보다도 복수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말이 기억에 남네요.

잠자냥 2022-03-21 11:29   좋아요 3 | URL
문지 이 채석장 시리즈 얇은데 좀 가격이 쌔긴 하지요. 허나 흥미로운 목록인 것 같습니다.
이 작품도 형식이 참 독특한데, 읽고 나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클루게의 <이력서들>도 읽어보려고요.
매냐 님도 나중에 꼭 한번 읽어보세요~

coolcat329 2022-03-21 1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폭격도 있었군요.ㅠ
우리편 적군 이런 이분법적인 시선을 버리고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모든 반인륜적인 행위는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참상은 직접 겪어보기 전엔 아무도 모를겁니다.ㅠ

잠자냥 2022-03-21 14:15   좋아요 1 | URL
네, 드레스덴 폭격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편인데 이런 폭격도 있더라고요.
이런 참상은 겪고 싶지 않은데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는 아직 휴전 중이라는 무시무시한 사실이 퍼뜩 떠오르기도 합니다.

blanca 2022-03-21 13: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이거 사려다 말았는데...사실 읽고 마음이 더 무거워질까 봐 일부러 안 샀어요. 전쟁이 막연이 추상으로만 느껴지다 실제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알고 나니 갑자기 사는게 무서워졌어요. 하기사 2차 세계대전도 나기 직전까지 그렇게 전쟁이 나리라고 생각 못했다고 하니...왜 최악은 항상 현실이 되고 최선은 꿈 속에만 있는 건지...잘 읽고 갑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채석장 시리즈 좋더라고요.

잠자냥 2022-03-21 14:17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전쟁 관련 책은 마음이 무거워져서 쉽게 손이 가지는 않는데, 채석장 시리즈가 매력적이라서 이번에는 한번 구매해 봤습니다.
이 책은 사건의 나열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무미건조하게 그때의 증언(목소리)들과 기록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감상적인 기분이 쉽사리 들지는 않는데, 다 읽고 나면 그래서 오히려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더라고요.

mini74 2022-03-22 2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폭격 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6.25때 우리나라도 그렇게 무차별 폭격을 당했다고 하더라고요. 민간인들 희생이 컸고 ㅠㅠ 자냥님 글 읽으니 그 책이 떠오르네요. ㅠㅠ

잠자냥 2022-03-23 10:32   좋아요 1 | URL
네, 멀리 생각할 것도 없지요. 우리나라에서도 불과 몇십 년 전에 일어났던 일...근데 요즘 당선된 그 사람은 막 벙커도 알려주고 그러더라고요?

서니데이 2022-04-09 00: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꼬마요정 2022-04-09 07: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쟁은 너무 참혹하죠ㅠㅠ 자연재해는 어쩔 수 없다지만 전쟁은 인간이 일으키는 거니 너무 끔찍합니다.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새파랑 2022-04-09 09: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단골 당선 잠쟈냥님 축하드립니다~!! 아직도 적립금이 쌓여 있으실거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