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 또는 회고록과 같은 장르를 좋아하지 않는다. 타인이 써준 전기와 달리 자서전은 미화되기 쉽다. 자기의 일생을 기록하여 책으로 펴낸다는 생각 자체가 어찌 보면 오만한 행위일 수도 있다. 자신의 생이 그만큼, 기록으로 남길 만큼, 그리하여 누군가가 읽어야 할 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듯이 들리기 때문이다. 일종의 나르시시즘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몇몇 이들의 삶을 기록한 자서전이나 회고록은 궁금해질 때가 있고 그렇게 읽어 뜻밖의 수확을 얻기도 한다. 그런 책 중의 하나가 사르트르의 <말>이다. 사르트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그의 저작에서도 크게 감화를 받은 적은 드물었는데, <말>만큼은 흥미롭게 읽었다. 그가 왜 이 작품으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지명을 받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달까. 아니, 이런 설명보다는 이 <말>은 ‘읽기’와 ‘쓰기’에 경도된 모든 이들, 책벌레라면 모두가 공감할만한 생의 기록이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여기 또 한 소년이 있다. 사르트르처럼 ‘읽기’와 ‘쓰기’, 문자와 언어가 지닌 힘에 매료당한 소년. 소년의 최초의 기억은 ‘혀’와 관련이 있다. 소년은 한 소녀의 팔에 안겨 문밖으로 나가고 있다. 소년 앞에 펼쳐진 복도의 바닥은 붉은색이다. 계단을 내려가니 문이 열리면서 미소를 띤 남자가 소년 곁으로 다정하게 다가온다. 남자는 소년 옆에 멈춰 서더니 이렇게 말한다. “혀 내밀어!” 아이는 혀를 내민다. 남자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휴대용 접이식 칼을 꺼내 펼친다. 그러고는 소년의 혀에 칼날을 바짝 갖다 대며 말한다. “지금 이 녀석 혀를 잘라버리자.” 소년은 몹시 놀라 내민 혀를 다시 집어넣을 엄두를 내지 못한다. 남자는 점점 더 소년에게 바짝 다가온다. 곧 칼날로 혀를 건드릴 것 같은 찰나, 남자가 칼을 거두며 말한다. “오늘은 아직 아니야. 내일 하자.” 그는 칼을 다시 접어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소년은 왜 혀를 잘릴 뻔했을까. 사실 이 소년을 안고 밖으로 나가던 소녀는 아이의 보모이다. 소녀는 아이를 안고 나가 이런 식으로 젊은 남자와의 밀회를 즐겼는데 그것을 발설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였던 셈이다. 소년은 10년 가까이 이 사실을 침묵한다. 이 최초의 무시무시한 기억으로 말미암아 소년은 말과 언어, 침묵의 힘을 절감한다. 그러나 소년에게 이런 기억만이 강렬하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보다도 소년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이는 단연코 그의 부모-그중에서도 아버지이다. 소년은 아버지와 고작 7년을 함께 살았을 뿐인데, 아버지가 소년에게 남긴 영향력을 실로 막대하다. 그것은 ‘책’이라는 형태로 다가온다. 그에게 처음 책이라는 세계를 알려준 이가 소년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소년은 훗날 아버지가 책을 건넨 “그 사건이 그 뒤로 펼쳐질 내 인생 전체를 결정지었다.”(80쪽)고 고백한다.
말과 관련한 또 다른 기억도 있다. 소년은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언어에 둘러싸여 자라난다. 스페인계 유대인의 후손으로 불가리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영국, 오스트리아, 스위스, 독일 등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살아가는 이 소년은 스페인어와 불가리아어, 영어, 프랑스어 등 다양한 언어와 접한다. 소년이 살던 불가리아 루세에서만 하더라도 일고여덟 가지의 다양한 언어가 사용되었고 누구나 그 언어들을 조금씩은 알아들었다. 오직 시골에서 올라온 어린 소녀들만이 유일하게 불가리아어만 할 줄 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소녀들이 무식하다고 생각했으며, 모두가 자신이 구사할 줄 아는 언어들을 줄줄이 읊어댔고 그곳에선 많은 언어를 할 줄 아는 게 중요했다. 심지어 언어 능력으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 소년에게도 낯선 언어가 하나 있었으니 아버지와 어머니 둘만의 언어가 바로 그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른 가족이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들만의 언어를 사용하고 그 언어는 참으로 다정하게 들린다, 소년은 그 언어를 알고 싶어 죽을 지경이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의 언어는 무엇일까, 남몰래 숨어서 엿듣고 통째로 외워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깨닫는다. 그것이 독일어임을. 그런데 그 언어는 뜻하지 않게 소년을 몰아간다. 부모님에게는 사랑의 언어였지만 소년에게는 한때 고통의 언어가 된다.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불가리아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소년의 가족, 그러나 아버지는 이곳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유일한 ‘귀’가 사라져버리자 어머니는 맏아들에게 독일어를 끔찍하리만치 강압적인 방법으로 가르치기 시작한다.
어머니의 강압적인 교육 방식은 마침내 결실을 이루고 그것은 소년에게 독일어의 근본적인 성격을 규정하게 된다. 소년은 말한다. “그것은 늦게, 그리고 극심한 고통 속에 뿌리내린 모국어”였노라고. 그러나 그 언어는 고통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 독일어 글자 쓰는 법을 배운다는 핑계로 어머니로부터 책을 얻어낼 수 있었고, 소년은 독일어 글자 쓰는 법을 배우면서 읽고 쓰는 것의 욕망을 발견하고 거기서 행복을 찾아낸다. 한편 소년의 어머니는 아들이 독일어 외에 다른 언어를 포기하는 것 또한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어머니에게 ‘교양은 근본적으로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언어로 쓰인 문학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가족의 사랑의 언어는 ‘독일어’이다. 이 소년, 그러니까 엘리아스 카네티가 불가리아에서 스페인계 유대인으로 태어나 영국 국적을 갖고도 독일어로 작품 활동을 하게 되는 사연은 이렇게 시작된다.
혀를 잘라버리겠다는 최초의 기억, 그러니까 너로부터 언어를 거세해버리겠다는 그 최초의 협박으로부터 시작해, 다양한 언어가 이루어진 세계에서 살다가 어떤 특별한 언어를 알게 되고 그 언어를 사랑하던 아버지가 선물한 책을 통해 읽고 쓰는 기쁨을 알게 된 소년의 삶이 이 책 <자유를 찾은 혀-어느 청춘의 이야기>에서 펼쳐진다. 소년은 탐식하듯이 책을 읽으며 자기 세계를 구축해나간다. 그러는 사이 불가리아 루세, 영국 맨체스터, 스위스 로잔, 오스트리아 빈, 스위스 취리히를 오가며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한 다른 가족들, 보모, 하인, 이웃 사람들, 학교 친구들, 기숙사 사람들, 학교 교사들, 자신이 읽은 책의 작가들, 자신이 좋아한 화가들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빌어 자기의 이야기를 적어나간다. 비단 자기 주변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1차 세계대전을 비롯해 타이태닉 침몰처럼 굵직한 사건들도 여럿 등장한다.
한마디로 이 책은 엘리아스 카네티- 한 소년의 성장기이자 한 세기의 기록이다. 그리고 그 기록은 자신을 비롯하여 가족의 모순된 면모도 숨기지 않는다. 카네티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아버지도 어떤 면에서는 질투 또는 사랑에 눈이 먼 가련한 남자였으며, 일찍 남편을 잃고 홀로 세 아이를 길러낸 어머니도 아이들 교육에는 남다른 열정을 보이며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계급 문제에서는 속물스럽고 오만하기 짝이 없다. 사업가 기질이 농후해 카네티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경멸의 대상이었던 그의 외삼촌은 또 어떤가. 인색하기 짝이 없는 외할아버지나 부유하고 유쾌하지만 자기 아들(카네티의 아버지)에게 저주의 형벌을 내린 할아버지 등등 카네티는 가족의 모순된 면모도 숨기지 않는다. 그 자신에 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글자에 대한 열망이 지나쳐 자신에게 글자 학습 공책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소년은 사촌 누나를 죽이려하기도 했으며, 다양한 언어를 알고 수많은 책을 읽은 이 소년은 자기가 안다는 사실을 감추지 못해 안달복달하기도 하는데, 이런 그의 모습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되돌아온다.
이 자아가 비대한 책벌레에게 소년의 어머니는 급기야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책만 읽으려고 하는 ‘기생충’, ‘떠버리’라는 비난까지 퍼붓는다. 카네티의 어머니는 똑똑한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렇게 책과 죽은 지식에만 파묻혀 지내는 아들을 염려하고 경멸하기도 하는데, 그런 아들을 향한 비난은 독일어를 가르칠 때처럼 맹렬하고 거침이 없다. “너는 아직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데 너는 네가 책에서 읽었거나 그림에서 본 모든 것이 너라는 착각을 하고 있어. 네 손에 절대로 책을 쥐여 주면 안 되는 거였는데” 후회하기도 하고. “네가 읽고 있는 책들은 다른 사람들이 너를 위해 썼어. 네가 정말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거니? 삶과 맞붙어 고군분투해본 자가 인간이야. 너는 아직 인간이 아니야.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떠버리가 인간은 아니야. 너는 모든 것을 그저 읽었을 뿐이야.”(527쪽)라고 퍼붓고 “너는 교활하기도 해. 너의 그 안락한 삶 속에서 그걸 잘 포장하고 있지. 너의 진정 유일한 걱정은 읽을 책이 충분히 남아 있느냐라고!” 거세게 비난한다. 배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 되는 것이라고,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입증해 보이기 위해서 배우는 거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은 책과 지식의 세계에만 머물러 있기를 바라던 카네티를 그저 안락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아들을 끊임없이 몰아붙인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런 강인한 어머니로 말미암아 아들이 제대로 성장한다는 점에서 로맹 가리의 <내 삶의 의미>가 생각나기도 한다.
카네티의 어머니는 말한다. 현실을 피하는 사람은 살 자격이 없다고, 인간이란 배우는 걸 멈추고 뭔가를 해야 한다고, 세상사가 정말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고, 여기저기서 내팽개침당해보고, 그 자신을 방어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고. 그리하여 아들을 전쟁으로 얼룩진 나라 독일로 보내기 위해 이주를 서두른다. 어머니는 소년을 더 가혹한 학교, 그러니까 참전했었으며 최악을 아는 남자들 사이로 보낼 생각이다. 그리고 소년은 유일하게 완전하게 행복했던 시절인 취리히의 낙원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훗날 소년은 깨닫는다. “최초의 인간처럼 낙원에서 추방당함으로써 비로소 내가 태어났다는 것”을(539쪽). 카네티가 그저 책을 사랑하는 사람, 또는 소설이나 희곡을 쓰는 문학가로만 머물지 않고 <군중과 권력>처럼 사회 현실을 담은 저작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20세기의 지성으로 불릴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런 어머니의 가르침 때문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