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 제안들 36
아글라야 페터라니 지음, 배수아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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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서커스단 곡예사라 자기 뜻과 상관없이 부모와 함께 이리저리 떠돌며 사는 아이의 삶은 어떠할까. 그것도 말이 통하지 않는 이 나라, 저 나라를 전전하는 삶이라면? 아이니까, 마냥 새로운 일상이 신기하고 재미나기만 할까? 나로서는 잘 상상하기 어려운 삶이지만 꼭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적어도 그 아이가 나처럼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조용히 있기를 좋아하고 낯선 환경에서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는 성격이라면 어디 한곳 정착하지 못하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끊임없이 떠돌아다니는 삶은 지옥과도 같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는 천국을 꿈꿨을까.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는 ‘나는 천국을 상상한다.’로 시작한다. 천국을 상상하는 아이 ‘모니카’는 또 생각한다. 신은 외국어를 할 줄 알까? 신은 외국인도 이해해 줄까? 아니면 천사들이 작은 유리 칸막이 안에 앉아 통역해 주는 걸까? 그리고 정말로 천국에도 서커스가 있을까?

아이의 엄마와 아빠, 이모는 모두 서커스단의 곡예사이다. 엄마는 머리카락으로 공중에 매달리는 연기를 선보이며, 아버지는 광대이다. 아이는 부모와 이모, 언니를 따라 이리저리 전전하는 떠돌이 생활을 한다. 이 아이 ‘모니카’는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의 작가 아글라야 페터라니(세례명 모니카 지나) 그 자신이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삶을 알아야 할 것 같아 몇 자 적어본다. 모니카는 1962년 루마니아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 조세피나는 루마니아 국립 서커스단의 곡예사이며, 아버지는 서커스에서 찰리 채플린 스타일코미디 연기로 인기를 끌던 헝가리 출신 광대였다. 1966년, 그러니까 아글라야가 네 살이 되던 해, 가족의 재능을 알아본 스위스의 서커스 단장은 이들의 망명을 추진하고, 부부와 두 딸 안두자와 모니카, 그리고 조세피나의 언니 레타는 빈을 거쳐 스위스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1967년 부부와 레타 3인의 공연은 서커스단의 최고 인기프로그램이 된다. 조세피나의 머리카락 곡예가 유명해지면서 가족은 서커스단의 일원으로 또는 전 세계 서커스단의 초청을 받아 유럽 여러 도시와 브라질, 미국, 아르헨티나 등을 여행한다. 모니카 또한 아주 어린 나이에 버라이어티쇼 무대에 서기도 한다. 그러나 1976년 어머니가 스페인 공연 도중 사고를 당해 더 이상 머리카락 곡예를 할 수 없게 된다. 그 사이 부모가 이혼해 모니카는 1977년 어머니와 함께 스위스에 정착하는데, 루마니어와 스페인어를 할 줄은 알았지만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던 그녀는 15세 나이에도 문맹이었다. 그때서야 독일어 쓰기와 읽기를 독학으로 공부했고 1999년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를 발표한다. 이 작품은 대중과 비평가 모두에게 호평을 받았으나 2001년부터 심각한 정신 장애에 시달리던 아글라야는 2002년 취리히 호수에서 스스로 익사를 선택한다.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는 작가의 이런 평범하지도, 순탄하지도 않은 삶이 건조하고 담담한, 또 때로는 투박하면서도 묘하게 아름다운 언어로 쓰여 있다. 이 작품은 조국 루마니아를 자신의 선택이 아닌 부모의 선택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고, 또 그 때문에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으며, 그랬기에 모국어를 ‘말할 줄’은 알았지만 ‘쓸 줄’은 몰랐던, 이런저런 외국어를 들어왔고, 어떤 외국어(스페인어)는 할 줄 알았지만 역시 쓸 줄은 몰랐던 문맹이었던 한 아이가 스스로 한 언어를 선택하고 글을 쓰게 되는, 그러니까 자기의 언어를 갖지 못했던(가질 수 없었던) 한 아이가 자기만의 언어, 목소리를 찾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 언어는 독일어라는 하나의 상징으로서의 언어일 뿐 아니라, 자기 목소리, 자기 삶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런 까닭에 어떤 면에서는 조국인 헝가리를 떠나 스위스로 망명, 프랑스어로 글을 써야만 했던 <문맹>의 아고타 크리스토프를 떠올리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작품이 그러했듯이 결코 미문도 아니며, 삶의 아름다운 면을 보여주지 않는, 오히려 참혹한 현실을 보여주는데도 그 진솔함 때문에 작품은 더없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아이는 영원한 이방인이자 방랑자이다. 그런데 그런 삶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다. 루마니아에 두고 온 할머니가 그리워도 돌아갈 수 없다. 루마니아에서는 그들이 탈출한 후 아이의 부모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기 때문이다. 비록 외국일지언정 누군가 아이의 이름을 묻는다면 아이는 어머니에게 물어보라고 대답해야 한다. 우리가 누군지 밝혀지면 우리는 납치되어 루마니아로 돌려보내질 것이며, 어머니와 아버지, 이모는 죽임당하고 언니와 ‘나’는 굶어 죽으리라. 곳곳을 떠돌아도 아버지는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해 호텔에 머물 때면 장롱을 문 앞으로 옮겨 놓고 장롱 앞에 소파를, 소파 앞에는 침대를 밀어 놓는다. 아이의 인형도 혼자 길거리에 나가서는 안 된다. 그런데 아이는 궁금하다. 여기서 이렇게 숨어 다녀야 한다면 왜 굳이 고향을 떠나 온 것일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고향의 할머니는 슬픔과 그리움으로 죽었고 어머니는 여기가 뭐든 훨씬 낫다고 말하는데 눈물을 흘린다. 나는 그저 돌아가고만 싶다.

그렇지만 루마니아가 천국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루마니아에서의 삶은 끔찍했다. 슬픔은 사람을 늙게 만드는데, ‘루마니아의 아이들은 늙은 채 태어난다. 이미 어머니의 배 속에서부터 가난하고, 부모의 근심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향에서 사람들은 꿈에서조차 자유롭게 생각할 수 없다. 소리 내어 말했다가 스파이에게 들키면 시베리아로 끌려간다.’ ‘외국에서는 독재자의 당에 속하지 않고서도 유명해질 수 있다.’ 그러나 외국도 아이에게 천국은 아니다. 루마니아가 아닌 곳에서 우리는 낙원에서처럼 살지만 그것이 나를 더 젊게 만들지는 않는다. 아프리카는 외국이지만 루마니아만큼 가난한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은 흑인이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사람들은 서커스에서 따로 앉아야 하지만 입장료는 전액을 지불해야 한다.’ 게다가 외국에서 그들 가족은 ‘유리처럼 부서’지고 만다. 어머니는 울부짖는다. 민주주의국가에서 우리가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결코 고향을 떠나지 않았을 거라고. 아버지는 우리가 낙원으로 가는 거라고 말했다는데, 그 낙원에서는 ‘개가 사람보다 더 소중’하다. ‘이 나라 욕실에서는 어디든 따뜻한 물이 나오고, 사람들 가슴에는 냉장고가 들어’ 있다. 루마니아와 마찬가지로 이방인들도 우리를 해치고 싶어 한다. 어머니는 누구도 믿지 않으며, 나 또한 그것을 배워야 한다.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다른 나라에서도 언제나 이방인으로서 머물 수밖에 없는 삶. 가족끼리 온전하기만 하다면 더 바랄게 없지만 아버지는 걸핏하면 폭력을 쓴다. 때때로 기묘한 영화를 찍는 아버지는 영화에서 자신의 모국어로 말하지만 어머니와 나는 대개 대사가 없고 있더라도 ‘도와줘!’라는 외침이 전부이다. 게다가 아버지는 언니에게 유난히 집착한다. 아버지의 딸일 뿐인 언니는 사실 나에겐 남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나는 언니를 친언니처럼 사랑한다. 언니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의붓딸이다. 아버지의 의붓딸과 그 어머니. 즉 언니의 할머니이자 아버지의 전 부인은 병원에 있다. 미쳐버렸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언니도 이미 미쳤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언니를 여자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미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어디에 가든 항상 나를 데리고 다닌다. 언니는 나보다 몇 살 밖에 많지 않지만 벌써 무릎이 박살났다. 아버지가 트랙터로 언니의 다리를 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야 언니가 다른 남자를 찾지 못하고 영원히 아버지 곁에 머물 것이므로.
 
어머니는 나를 끔찍이도 사랑한다. 나 또한 어머니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편지를 써도 어머니가 읽지 못한다면, 그 언어를 왜 배워야 할까 의아하기만 하다. 그렇게 사랑하는 어머니인데, 아이는 어머니를 항상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린다. 어머니는 강철 머리카락을 지녔고, 그 머리카락으로 원형 천장 꼭대기에 매달려 곡예를 펼친다. 공연 날마다 아이는 어머니가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린다. 아이는 빵으로 귀와 입을 틀어막는다. 어머니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천장에 매달려 있는 동안 언니는 나를 달래주려고 ‘폴렌타 속에서 끓는 아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폴렌타는 루마니아와 발칸 지역에서 주로 먹는 옥수수 죽이다. 언니는 폴렌타 속에서 끓는 아이가 얼마나 아플지 상상해 보라고 한다. 그러면 어머니가 천장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불안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을 거라고. 그렇지만 소용없다. 나는 항상 어머니의 죽음을 생각한다. 나는 절대로 머리카락으로 매달리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지만 삶은 그렇게 쉽지 않다. 나는 이제 버라이어티쇼 극장에서 공연한다. 처음에는 다른 여자들과 함께 춤을 추었다. 무대 등장 횟수는 점점 더 늘었고, 극장주는 점차 나를 앞줄에 세우기 시작한다. ‘육체-이것은 내가 모든 도시에서 실물 크기 포스터로 광고되는 방식’(152쪽)이다.



가장 아름다운 것들
공연이 끝난 후 함께하는 식사.
침대에 누워 깊은 잠에 빠진 어머니.
새벽에 조용히 일어난 어머니가 내게 이불을 덮어 주며 요리를 시작하는 것.
그을린 닭 털 냄새는 고향이다.
그런 다음 나는 잠이 든다. (79쪽)


모국어를 잃어버린 나. 이제는 어머니를 잃을까 언제나 두려움 속에 떨며 살아간다. 조국인 루마니아는 폭력적인 독재 정권 아래서 사람들이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며 신음한다. 그런 나라를 등지고 낯선 땅을 찾아 왔으나 집안의 아버지 또한 조국만큼 폭력적이며 마침내 좋지 않은 방식으로 가족을 해체하고 만다. 그리고 신은 외국어를 알아듣는지 아이의 말을 알아듣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런 삶 속에서 아이는 ‘폴렌타 속에서 끓는 아이’를 상상해야만 한다. 그러는 동안은 삶의 고통을 잊을 수 있노라고 되뇐다. 아이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보기 전, 아버지는 자신이 신으로 나오는 영화를 찍고 있었다. 어머니는 신의 할머니 역할이었고 그 영화에서 아이는 수호천사였다. 저토록 소박한 것에서 행복을 느꼈던 아이는 비록 영화 속에서였지만 수호천사가 되어 신 가까이에 서 있었다. 거기서 아이는 폴렌타 속에서 끓는 아이를 상상하면서 이방인으로서, 소외자로서, 난민으로서의 삶을 더는 잊고자 애쓰지 않아도 되었을까. 그러나  아이는 어쩐지 평생 ‘폴렌타 속에서 끓는 아이’를 떠올리며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삶의 고통을 조금도 줄여주지는 못했기에 그 아이, 모니카, 그러니까 아글라야는 끝내 스스로 물에 잠겨버렸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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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티나무 2021-05-10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ㅠㅠㅠㅠㅠㅠㅠ

잠자냥 2021-05-10 14:20   좋아요 0 | URL
절규를...! ㅎㅎ

Falstaff 2021-05-10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리즈가 문고판 사이즈.... 같은데 실험적 출판이 눈에 띄네요!!
이 책을 포함해서 위스망스도 일단 보관했습니다. 우쒸... 위스망스, 진짜 모 아니면 빠꾸 도.... ㅋㅋㅋ

잠자냥 2021-05-10 14:23   좋아요 2 | URL
네, 굉장히 독특하면서도 의미 있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시리즈 같습니다. 다 사 모으고 싶기도 하지만 사실 딱히 땡기지 않는 작품도 있어서 그건 좀 무리인 거 같고요. 간혹 정말 보물 같은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그 보물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요. 위스망스 그 작품 저도 지금은 *보관* 중...ㅋㅋㅋㅋ

행복한책읽기 2021-05-10 17: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일단 담아요. 저는 아이가 등장하면 그냥 못 지나치겠어요. 잠자냥님 리뷰는 길고 깊어서 작정하고 읽어야 됨 ㅋㅋ

잠자냥 2021-05-10 17:56   좋아요 1 | URL
제 리뷰는 이 책을 읽고 난 뒤 읽으셔도 됩니다!

새파랑 2021-05-10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그냥 읽어라는 리뷰같아요^^

잠자냥 2021-05-10 20:50   좋아요 1 | URL
네, 맞습니다! ㅋㅋ
 
브라이턴 록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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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고 그름과 선과 악은 어떻게 다를까. 선(善)은 언제나 옳고, 악(惡)은 언제나 그릇된 것일까? 아니, 반대로 생각해서 옳은 것은 항상 선이며, 그릇된 것은 언제나 악일까? 물론 옳고 그름의 문제는 사람마다 기준이 다를 수 있으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가 누군가에게는 정의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옳은 것이 항상 선(善)일 수 없고, 그릇된 것이 늘 악(惡)일 수도 없다. 사람을 죽이는 행동은 그릇된 행동이며 대개는 악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대개’라고 말하는 까닭은 때로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살인이 일어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범죄자를 처단하느라 피치 못해 살인이 일어나기도 한다. 정당방위를 하다가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다. 이럴 때 단순히 사람을 죽였다는 것만으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을 악인으로 몰아갈 수 있을까.

또 다른 질문도 있다. 이렇게 누군가를 죽인 사람을 보호하거나 감싸주는 것은 옳고 그름, 선과 악 중 어디에 속할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살인자가 되었을 때 손쉽게 정의를 부르짖으며 법의 심판대 위에 세울 수 있을까. 대다수의 사람은 옳고 그름의 판단에 따라, 죄를 지은 자는 벌을 받아 마땅하고, 그것이 선이라고 믿을 것이다. 그래서 범죄를 처단하는 것은 ‘정의’라고 믿게 된다. 그것이 현실 세계, 세속적인 세상의 판단이다. 그러나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죄를 지은 자가 법적으로 처벌받는 것만으로 선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을까? 그레이엄 그린의 <브라이턴 록>은 이렇게 쉽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옳고 그름, 선과 악의 문제를.

하드보일드 범죄소설 분위기를 풍기는 이 작품은 단순히 범죄가 일어나고 그 범죄를 처단하기까지의 속 시원한 결말을 바라는 독자에게는 사뭇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작품이다. 범죄가 일어나긴 하지만 살인 방식도 교묘하게 은폐되고(그 모든 살인 방법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처벌 방식도 대부분의 범죄 소설 결말이 그러하듯이 시원하지 않다. 게다가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열일곱 소년, 미성년자라는 점도, 그 범죄에 자기도 모르게 가담(?)하게 되는 또 다른 인물도 열여섯 소녀라는 점에서 여러 가지로 복잡한 심경이 들게 한다.

작품은 신문기자인 프레드 헤일이 누군가에게 불안하게 쫓기며 시작한다. 그는 사실 지역을 장악한 불량 조직 우두머리 콜레오니의 정보원으로, 그를 위해 불법적인 일을 하고 있다. 목숨이 다급해 쫓기는 와중에 낯선 여자들을 이용해 위험한 순간을 피하려고 애쓰는데, 그러다가 건장한 체구에 사람 좋아 보이는 여인 ‘아이다’를 만난다. 그녀와 함께 운 좋게 피신하지만 아이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콜레오니와는 대척점에 있는 또 다른 조직인 카이트의 오른팔 핑키에게 살해당한다. 아이다는 그저 마음이 변해서 자기를 떠난 줄로만 알았던 헤일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범인을 쫓기 시작한다. 검시관은 헤일이 심장 마비로 자연사했다고 결론을 내렸으므로, 살해를 저지른 핑키 일당은 운 좋게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할 수 있었는데, 뜻밖에 정의감 넘치는 아이다와 핑키의 알리바이에 모순이 있음을 알아차린 웨이트리스 ‘로즈’ 두 여자들 때문에 마음 편히 사건을 덮을 수 없게 된다.

이 작품은 이렇게 헤일의 진짜 사인(死因)을 알아내고, 그를 죽인 범인을 잡으려는 아이다의 집요한 추적과, 그 추적을 피함과 동시에 무언가 알고 있는 ‘로즈’의 입을 막으려는 핑키의 노력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옳고 그름의 문제와, 선과 악, 세속적인 세상의 정의와 종교적인 세상의 정의의 문제를 질문한다. ‘아이다’와 ‘로즈’ 그리고 ‘핑키’ 이 세 캐릭터가 무척 인상 깊은데, 먼저 아이다는 죽은 헤일과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날 우연히 만나서 하룻밤 보낼 뻔했던 사이라고나 할까. 그런데도 그녀는 헤일의 죽음에 집착한다. ‘옳고 그름’의 문제에 집착하는 이른바 ‘정의’를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아이다 곁의 남자들도 그녀가 그토록 그 문제에 연연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아이다는 단호하기만 하다. ‘그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의 죽음을  무시할 수 없어서, ‘정정당당한 것을 좋아’해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직접 실행하려는, 말 그대로 정의의 사도이다.

‘로즈’는 이와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다. 로즈가 자신의 범죄에 관해 무언가 알고 있음을 눈치챈 핑키는 그녀의 입을 막으려고 거짓으로 사랑하는 척 행세하며 로즈의 마음을 빼앗는 데 성공하는데, 핑키에 비해 로즈는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게 된다. 게다가 핑키와 마찬가지로 자신도 ‘가톨릭’ 신도이기 때문에 그와 자기 자신을 ‘같은 부류’라고 느낀다. 로즈는 핑키처럼 지옥도, 천벌도, 불구덩이도 믿는다. 그래서 핑키를 신뢰하지만 말끝마다 ‘옳고 그름’을 강조하는 아이다는 불신한다. 애초부터 로즈는 아이다의 웃음소리만 듣고도 그녀를 싫어하는데, 그것은 마치 ‘걱정거리가 하나도 없는 사람의 웃음’이다. 핑키도, 자신도 지옥을 믿지만 그 여자는 하나도 믿지 않는 것 같다. 그 여자는 ‘세상이 온통 근사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대죄가 뭔지도 모르는 것’ 같다. 그저 ‘옳고 그름’만 이야기한다. 마치 자기가 그걸 안다는 듯이. 그래서 그 여자는 “불구덩이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그러려고 해도 그러지 못할”(234쪽) 것이다. 무엇보다 아이다는 핑키가 살인자라는 것을 알고 그를 처벌하려고 할뿐만 아니라, 로즈를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핑키와 로즈 사이를 떼어놓으려고 하기에 로즈와 대립할 수밖에 없다.

가장 문제적인 캐릭터는 <브라이턴 록>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17세 소년 ‘핑키’이다. 그는 가톨릭 신자이다. 그런데 천국은 믿지 않는다. 종교는 그에게 ‘그냥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그는 지옥에 대해 특별히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옥 또한 ‘그냥 있는 것’이다. 자신은 평화를 누릴 만한 복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런 걸 믿지도 않는다. 천국은 말일 뿐이지만 지옥은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지옥불이 두렵지 않다고 호기롭게 말하기도 한다. 세상을 떠난 부모, 황량한 슬럼가 출신에 갱단 우두머리 카이트가 양아버지나 다름없었으며 카이트 패거리가 식구인 핑키. 미성년인 그의 주위에는 지옥이 펼쳐져 있다. 살인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며 그는 더 많은 살인을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소년에게는 특이한 점이 있다. 성행위에 극도로 혐오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 자신의 필요 때문에 로즈와 가까워지면서도 손을 잡는다거나, 입을 맞춘다거나, 또는 더 나아가 성행위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속이 메스껍고 구토가 치밀어 오른다. 자기는 사랑이나 아름다움 같은 것들에 속지 않는다고, ‘침대에서 벌어지는 토요일 밤의 움직임’ 같은 것으로는 이 지옥 같은 삶의 탈출구가 되지 않는다고 굳게 믿으며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일에 힘을 쏟지 않을 거’라고 다짐한다.

열일곱 나이에 성적인 관계에 그토록 혐오를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한데, 사실 소년은 어릴 때 부모가 토요일 밤마다 벌이는 ‘그 짓거리’를 훔쳐보면서 ‘그 짓’을 경멸하기에 이른다. 어릴 때 사제가 되고 싶었던 핑키에게 사제란 ‘뭐가 뭔지 아는 사람들’이며 때문에 ‘그들은 이런 것들’, 그러니까 성행위나 술을 마시는 등 쾌락을 위한 행동을 가까이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제가 되기를 꿈꾸던 어린 소년은 자기도 원치 않는 사이에 부모의 성행위 장면, 즉 한없이 쾌락 중심적이고 세속적인 그 행위를 보고야 말게 되었고. 그에게는 그게 하나의 원죄이자 대죄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 고통은 열일곱 소년의 머릿속을 지배할 만큼 강력하다. 한 번 타락한 천사가 다시는 천사가 될 수 없듯이, 핑키는 자기 자신을 불구덩이 속으로 몰아간다. 어찌 보면 그레이엄 그린의 또 다른 작품 <권력과 영광>의 타락한 ‘위스키 사제’ 같은 인물이다. 그래서 그런지 ‘왜 나는 잠깐이라도 천국을 볼 기회를 갖지 못했을까. 설령 그것이 브라이턴의 담벼락 사이에 난 조그만 틈에 불과하다 하더라도’(468쪽) 읊조리는 그를 지켜보노라면 처연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은 변해요.” 로즈가 말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사람은 변하지 않아. 나를 봐, 이제껏 조금도 변한 적이 없잖아? 그건 브라이턴 록 막대 사탕 같은 거야. 끝까지 깨물어 먹어도 여전히 브라이턴이라는 글자가 보이는 막대 사탕 말이야. 그게 인간의 본성인 거야.” (409쪽)

“나는 적어도 네가 모르는 것  하나를 알고 있어. ‘옳고 그름’을 분간할 줄 알지. 그건 학교에서도 가르치지 않아.”
로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여자 말이 맞았다. 그 두 단어는 로즈에게 아무런 의미도 띠지 못했다. 그 두 단어의 맛은 더 강렬한 음식인 ‘선과 악’에 의해 소멸되어 버렸다. 여자는 자기가 모르는 선과 악에 대해서는 로즈에게 말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고-로즈는 핑키가 악하다는 것을 산술적인 수학처럼 분명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 경우에 핑키가 옳은가, 그른가 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411쪽)



살인을 저지른 핑키는 분명 옳고 그름으로 판단해서도 그릇된 행동을 했으며, 선과 악으로 판단해서도 악이다. 로즈 또한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핑키라는 인물은 악(惡) 그 자체일까. 그토록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믿는 아이다는 선(善)을 행한 것일까. 한때 사제를 꿈꿨던 타락한 천사 핑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종교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어두컴컴한 조그만 고해실’이나 ‘신부님 목소리’, ‘영원한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분홍빛 유리 속에서 밝게 타오르는 등불 앞이나 조각상 밑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흐릿한 향수에 젖어들고, 그 때문에 마음이 약해지기도 한다. 이런 핑키에게 조금의 선함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에게 세상은 ‘언제나 천당과 지옥이라는 두 개의 영원 사이에 다툼이 끊이지 않는 피폐한 영역’이다. 로즈가 아무리 자기를 사랑한다 해도, 사랑은 증오나 혐오와 마찬가지로 영원한 것이 되지 못한다고 느낀다. 죽음조차도 그렇다. 그렇기에 로즈의 애정도 그에게는 구원이 될 수 없다.

신부님은 로즈에게 “가장 좋은 것이 타락하면 가장 나쁜 것이 된다” 말하면서 “가톨릭 신자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악마와 더 많이 접촉하는 것” 같다고 한다. 핑키는 어쩌면 가장 좋은 것을 지녔었기에 가장 나쁜 것으로 타락한 것은 아닐까. 어린 시절 만일 ‘그 짓거리’를 보는 대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그의 삶은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니 ‘그 짓거리’를 목격한 그 일 자체를 그토록 죄라고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삶이 조금 달라지지는 않았을까. 자기에게 내려진 한 치의 오점도 허용하지 못했기에 그는 그토록 타락하고 만 것은 아닐까. 핑키의 그 부서지기 쉬운 순수에는 분명 ‘어떤 선한 것’이 있었으리라. 구원과 지옥의 형벌을 믿었던 핑키는 어쩌면 그래서 신의 자비를 찾아냈을지도 모른다. 그에 비해 정의를 이룩해 환하게 웃음 짓는 아이다를 지켜보노라면 세상의 옳고 그름의 기준이 어쩌면 참으로 편협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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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5-06 11: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엄 그린이면 일단 읽는 거지요 뭐.
저도 이거 찜 했습니다. 여간 기대를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이번에 살 때는 꼭 땡투 해야 하는데 늘 잊는단 말입니다. ㅋㅋ

잠자냥 2021-05-06 11:57   좋아요 3 | URL
폴스타프 님이 좋아하실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책 보니까, 이 번역자가 그레이엄 그린 작품 또 번역하고 있더군요. 현대문학에서 출간예정입니다.

이거 영화도 있다던데, 영화도 궁금해요. 암튼 영화에서는 원작과 달리 ‘어떤 장면‘을 완전히 바꿨다던데, 그에 대해서는 폴스타프 님이 책 읽고 나신 뒤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쭈도록 하겠습니다....

coolcat329 2021-05-06 13:03   좋아요 0 | URL
잠자냥님 혹시 그 작품이 <권력과 영광>은 아닌지요? 다른 번역으로 읽고 싶어서요...

잠자냥 2021-05-06 13:05   좋아요 1 | URL
쿨캣 님, <권력과 영광>은 아니고요. 새로운 작품입니다. ㅎㅎ

Falstaff 2021-05-06 13:17   좋아요 2 | URL
<권력과 영광>은 열린책들에 저작권을 팔아서 다른 출판사, 다른 역자로 나오기 쉽지 않을 거 같은데요.
그래서 첫빠따에 번역을 잘 해야 합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진자>, <장미의 이름>도 마찬가지고요.
안 팔리면 모를까 잘 팔리는데 염병을 한다고 다시 번역하겠습니까.

coolcat329 2021-05-06 13:35   좋아요 0 | URL
아...그렇군요.ㅠ 머리에 콕콕 박히는 명쾌한 답변 감사합니다!😄

잠자냥 2021-05-06 14:09   좋아요 1 | URL
아참, 출간예정 작품은 <사랑의 종말)(1951)입니다.

coolcat329 2021-05-06 19:08   좋아요 0 | URL
네~~감사합니다 😄

coolcat329 2021-05-06 12: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요즘 그레이엄 그린 단편 하루 1-2편씩 읽고 있어요. 플래너리 오코너 단편을 너무너무 인상깊고 재밌게 읽어 작가가 같은 카톨릭 신자니 오코너와 비교해보려고 산건데 그린은 그녀보다는 조금 더 밝고 희망적인거 같아요. 아무튼 저도 그 단편 다 읽고 이 책 읽어보렵니다~^^

잠자냥 2021-05-06 13:09   좋아요 2 | URL
오코너랑 비교해서 읽어도 재미날 거 같네요. 그린이 좀 더 밝고 희망적이라는 말씀에도 공감하고요. 플래너리 오코너는 좀 기괴하죠. ㅎㅎ 아 근데 그러고 보니 그 플래너리 오코너 단편선 전 다 못 읽었어요.

다락방 2021-05-06 13: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잠자냥 님 덕에 처음 알게 됐는데 여기 계신 분들은 이미 읽고 좋아하고 계셨군요. 그렇다면 저도 읽어보겠습니다!!

잠자냥 2021-05-06 14:10   좋아요 2 | URL
그레이엄 그린은 알아두셔도(아니 알아둬야 할) 좋은 작가라고 소개드립니다~ 다 부장님 정도 독서가라면 더 ㅎ

독서괭 2021-05-06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옛날에 사둔 현대문학 그레이엄그린 단편선 못 읽고 잊고 있었는데..! 어서 읽고 이책도 보고 싶습니다 ㅠㅠ

잠자냥 2021-05-06 21:54   좋아요 0 | URL
네~ 어서 서둘러 읽으세욧~ ㅎㅎ

바람돌이 2021-05-07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또 새로운 작가군요. 이름만 들어봤던 작가인데 급관심 상승입니다. ^^

잠자냥 2021-05-07 07:14   좋아요 0 | URL
네~ 꼭 한번 읽어보세요~~

blanca 2021-05-09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결국 이 책을 사야겠다는 ㅋㅋ 정당한 이유를 주시는군요.

잠자냥 2021-05-09 10:04   좋아요 0 | URL
ㅎㅎㅎ 결국 사시기로! ㅎㅎ
 
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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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에 내 고양이가 몹시 아팠다. 장염과 췌장염으로 이틀 입원했는데, 퇴원하고 집에 와서는 오히려 상태가 나빠져 다시 병원을 가니, 녀석 폐에 물이 찼고 심장병 진단까지 받아 또 다시 입원을 했다. 그때는 심지어 ‘산소방’에 들어갔는데, 너무나 절망적인 소리를 들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펑펑 울었다. 어떤 존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그 존재가 너무나 아프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울기는 태어나 처음이었다. 녀석 없이 일주일 가까이 지내는 날들은 참 이상했다. 허전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녀석이 혹시라도 그렇게 병원에서 세상을 떠난다면 그 이후 내 삶을 상상할 수 없어서 하루하루가 몹시 힘들었다. 다행스럽게도 녀석은 건강해졌고 어쩐지 병원에서 과다 처치를 해서 일시적으로 심장에 무리가 갔던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심장 크기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건강해진 녀석은 다시 내 곁에서 잠들고 일어나 내 눈썹을 그루밍해주면서 애정을 표현하는데 지금도 가끔은 그날 길에서 펑펑 울던 순간이 떠올라 마음 한편이 서늘해지곤 한다.

이 녀석이 사라진다면 내 삶은 얼마나 달라질까. 물론, 언젠가는 정말 작별을 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럼에도 이 녀석이 사라진다면 나는 내 고양이를 잊을 수 있을까? 어떤 존재가 세상을 떠난 후, 남겨진 이들이 겪는 아픔이 크다. 그 상실감과 빈자리. 그래서 사람들은 때때로 그 빈자리를 채우고자 또 다른 존재를 그 자리에 ‘대신’ 앉혀놓기도 한다.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경우엔 또 다른 사랑을 만나고, 아이를 잃었다면 다시 아이를 낳거나, 반려 동물과 이별했다면 또 다른 동물에게 애정을 준다. 그런데 만일 기술이 크게 발달해서, 잃어버린 존재를 똑같이 본떠 만든 AI가 그 존재를 대신한다면, 그건 그 존재일까 아닐까? 예컨대, 내 고양이가 세상을 떠났는데, 녀석의 겉모습을 똑같이 만들고, 녀석의 평소 행동, 취향, 습성까지 인공지능이 정확히 모방해 그 똑같은 겉모습 속에 이식되어 내게 주어진다면 난 행복할까?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내 눈썹을 핥아주는 녀석과 나만 아는 이 깜찍한 행동을 똑같이 따라하는 AI라면? 나는 녀석이 복제된 인공지능 로봇임을 알면서도 사랑할 수 있을까. 그 AI 고양이는 내 둘째 고양이의 ‘마음’까지 완벽하게 학습해서 자기 것으로 삼았는데, 그 마음은, 그 사랑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클라라와 태양>을 읽다 보니 ‘조시’와 조시의 엄마 ‘크리시’의 관계를 문득 내 고양이와 내 관계로 대입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클라라’는 ‘유전자 향상’으로 지능과 능력은 향상되었을지언정 그로 인해 병약해지고 사회적 소통 능력도 떨어지는 소녀 ‘조시’가 매장에서 사오는 AF(Artificial Friend) 로봇이다. 조시 같은 아이들이 선택하는 친구 아닌 친구인 셈이다. 클라라는 갓 출시된 모델 B3에 비해서는 한 단계 아래인 B2 모델로 점점 아이들의 선택을 받는 일이 줄어들고 있는데, 다른 에이에프들과 달리 세상을 관찰하면서 보고 배우는 능력이 뛰어나다. 조시가 클라라를 유독 좋아하는 이유도 이런 능력에서 생겨난 클라라 고유만의 매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설정 때문에 작품 초반을 읽을 때는 클라라와 조시, 인공지능 로봇과 인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우정에 관한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크리시가 클라라를 선택한 이유를 알게 되는 순간부터 작품은 좀 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아무 감정이 없는 게 가끔은 좋을 거야. 네가 부럽다.”
나는 이 말을 잠시 생각해 보고 말했다. “저에게도 여러 감정이 있다고 생각해요. 더 많이 관찰할수록 더 다양한 감정이 생겨요.”
어머니가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려서 나는 놀랐다. “만약 그렇다면, 너무 열심히 관찰하지 않는 게 좋겠다.” (<클라라와 태양>, 150쪽)


몸이 약한 조시가 언젠가는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리던 크리시는 클라라에게 조시를 학습하게 한다. 조시를 대체할 존재로 클라라를 점찍은 것이다. 크리시를 위해서, 조시를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클라라는 조시를 이어, 조시로 살아가야 한다는 주문을 받는다. 그러면서 크리시는 클라라에게 인간의 마음이라는 걸 믿느냐고, ‘사람을 특별하고 개별적인 존재로 만드는’ 마음을 믿느냐고 질문한다. 만일 정말 그런 게 있다면 조시의 습관이나 특징만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 ‘조시의 마음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클라라도 아리송하기만 한 이 ‘마음’에 대해서는 인간들도 확답을 갖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조시를 복제하는 일에 열성을 보이는 ‘카팔디’는 인간에게 고유한 그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은 틀렸다고, 그런 건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부류로, 그런 게 있다고 믿는 크리시 같은 사람들을 ‘감상적’이라고 말한다. 클라라를 비롯한 에이에프들을 차갑게 대하는 조시의 아버지는 카팔디를 혐오하는데, 사실 그런 마음 깊은 곳에는 카팔디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를 미워한다. 그는 정말 딸 조시만의 고유한 무언가는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 사람들이 지금까지 수세기 동안 내내 서로 사랑하고 증오하며 함께 살았지만 모두 잘못된 가정에 근거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일종의 무지나 미신은 아니었을까 두렵기만 하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마음’에 관한 이런 논쟁들을 지켜보며 그런 기준으로만 해석해 본다면 클라라는 단순한 인공지능 로봇일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관찰하고, 보고, 학습해서 ‘마음’을 배운다면 그 마음은 그저 하나의 학습물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조시가 낫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죽었다고 생각한 ‘거지 아저씨’를 살려낸 태양의 놀라운 능력을 보고, 해를 찾아가 간절히 조시를 위해 기도하는 그 마음, 누군가를 위해 희망을 품을 근거를 찾고, 그 희망을 놓지 않으려 애쓰는 마음도 그저 모두 ‘학습의 결과물’, 또는 ‘기술적 복사’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클라라의 이 타인을 위한 순수한 마음들에 비하면 유전적으로 향상되어 지적 능력은 높아졌을지 모르지만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방식에 서투르기 짝이 없어서 타인에게 아무렇지 않게 상처 주는 조시의 교류 모임 친구들이 오히려 인공지능 로봇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클라라보다 향상된 모델인 B3는 AF매장에 전시되었을 때 자기들끼리 서로 눈짓과 신호를 주고받으며 오래된 에이에프들을 슬금슬금 피한다. 능력이 떨어지는 에이에프들을 따돌리는 것이다. 이 로봇들은 어디서 이런 행태를 익혔을까? 인간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런 마음은 인간다운 마음일까 아닐까? 이 작품에서는 인간을 ‘대체’한 로봇으로 인해 일자리를 빼앗긴 인간들이 시위하는 장면도 나오고, AF에게 혐오감을 드러내는 인간들도 종종 보인다. 그러나 그런 이들도 ‘인간’을 또 다른 ‘인간’으로 대체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자기와 다른 생각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에게 폭력과 혐오를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그렇다면 이런 행동과 마음들도 인간 고유의 것이기에 인간다운 것일까? 특별한 관계였다고 할 수 있는 클라라와 조시의 관계도 어느 순간에는 변한다. 조시와 릭의 관계가 변하듯. 그러나 조시와 릭의 관계와는 달리, 조시가 클라라를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다르다. “내가 돌아오면 넌 여기 없겠구나.” 말할 수 있는 대상일 뿐이다. 클라라에게 조시는 대체할 수 없는 존재였지만 조시에게 클라라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이기적인 마음을 지닌 ‘인간’에 비해 클라라의 헌신과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는 그 간절하고 순수한 마음이야말로 이 작품에서 가장 인간다운 마음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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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1-04-26 13:2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마음 고생이 심하셨겠네요... 다행히 나아졌다니 천만 다행입니다. 저 역시 고양이를 키우다보니 반려동물과 이별을 생각하면 먹먹해 집니다. 물론 피할 수 없겠지만요... 그저 함께 하는 순간을 감사하며 미련을 남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잠자냥 2021-04-26 14:25   좋아요 3 | URL
겨울호랑이 님도 귀요미 때문에 마음 졸였던 일이 있으셨잖아요. 귀요미도 저희 집 고양이도 집사들의 간절한 마음을 알았는지 다들 무사히 곁으로 돌아왔으니 참 다행입니다. ㅎㅎ 고양이 녀석들 참 요물이에요. 이렇게 인간의 마음을 들었다놓았다.... ㅎㅎㅎ 맞습니다. 함께 하는 순간에 미련이 남지 않도록 하는 게 최선이지요.

바람돌이 2021-04-26 13: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여튼 같이 사는 어린 것들, 작은 것들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다 애달프고 애면글면하게 하는 존재들입니다. 다행이에요. 고양이가 나아서....
이 책의 내용을 보니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실현될 미래를 그린 듯하네요. 지금의 발전 속도면 불가능하지도 않을듯해서 그 때가 되면 고민이 될듯해요.

잠자냥 2021-04-26 14:36   좋아요 2 | URL
그렇죠. 같이 사는 어린 것들, 작은 것들은 참 애달픈 존재에요.
정말 가까운 미래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저는 어떤 선택을 할지 저도 궁금하네요. ㅎㅎ
따뜻한 말씀 감사합니다.

미미 2021-04-26 15: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궁..저희집 츄츄(🐶)도 심장이 약한데다 기관지협착증이 와서 한번은 숨이 멈춰 인공호흡해 살렸어요. 😭몇 번이나 오늘 내일 이랬는데 다행히 아직도 살아있답니다. 자는 사이 떠나버릴까 불안한 시간들..저도 엄청 울었어요.미래엔 또 어떨지 모르겠지만 마음이 통한 존재는 대체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잠자냥 2021-04-26 15:24   좋아요 2 | URL
아이코 그렇군요. ㅠㅠ 그래도 또 그렇게 작은 존재들과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것도 행운이지 싶기도 해요. 츄츄가 내내 건강하길 바랍니다.

mini74 2021-04-26 17: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자들은 이미 반려견과 반려묘를 복제한다고 들었어요. 결국 우린 모두 헤어지고 그 후에 남는 가슴아픔까지도 포함하는 세트가 사랑이 아닐까싶기도 하고요. 그게 잠자냥님이 쓰신 대체할 수 없는 사랑이겠죠 ㅎㅎ모든 분들의 반려묘와 반려견이 건강하고 행복하길.*^*

잠자냥 2021-04-26 18:17   좋아요 1 | URL
오 벌써 그렇게 하고 있군요. 하지만 저도 미니 님 말씀처럼 헤어짐과 그로 인한 고통까지도 온전하고 성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인간다운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컨페션 - 두 개의 고백 하나의 진실
제시 버튼 지음, 이나경 옮김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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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내 나이에 벌써 자식이 있었다. 나는 아직도 내 몸 하나 건사하는 일도 벅차고 가끔 고양이가 조금 아프기라도 하면 녀석 걱정에 삶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정신력이 약한데, 내 나이에 인간을 키운다는 것, 한 아이, 아니 여러 아이의 엄마가 되어 살아간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때때로 상상해 보지만, 나로서는 쉬이 짐작할 수 없는 삶이다. 엄마에게도 엄마이기 이전의 삶이 분명 있었겠지, 결혼 전에 나름대로 하고 싶던 일도 있었을 테고, 그 일로 무언가를 성취하는 꿈을 꾸기도 했고,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고 그런 삶이 있었겠지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어쩐지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였을 것만 같다. 그럴 정도로 엄마의 엄마가 되기 전의 삶은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제시 버튼의 <컨페션>을 읽는 내내 참 이상하게도 언젠가 보았던 엄마의 스무 살 시절, 그 앳된 사진이 떠오른다.

 

세세한 내용을 모른 채 읽기 시작한 <컨페션>. ‘엘리스가 한 남자를 소개 받아 그를 기다리다가 만나지 못하는 장면이 그려지기에, ,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만나서 사랑에 빠지고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는 그런 평범한 이야기인가보다 했다. 그런데 몇 쪽 읽지 않았는데 그 예상치 못한 전개에 깜짝 놀랐다. 엘리스가 만나기로 했던 남자는 결국 오지 않았고, 그 대신 웬 여자가 그녀를 따라오기 시작한다. 외모가 출중해 누군가가 그렇게 따라오는 게 익숙한 엘리스이지만 여자라니 뜻밖이다. 여자는 엘리스에게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계속 따라오고, 엘리스도 그런 관심이 싫지는 않다. 엘리스와 그녀는 결국 첫 데이트를 하고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엘리스를 따라온 그녀의 이름은 코니’, 콘스턴스 홀든으로 <밀랍 심장>이라는 작품을 쓴 꽤 잘 나가는 소설가이다. 이제 스물인 엘리스보다 열다섯 가까이 많은 코니는 성공한 작가답게 자기만의 세계가 확고한, 자신감 넘치고 당당한 멋진 여자다. 엘리스와 코니는 그렇게 사랑하게 되고 함께 삶을 가꾸어 나간다. 1980년 영국의 한 풍경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훌쩍 시간을 건너뛰어 2017, 갑자기 어머니를 죽였을 때 나는 열네 살이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게 어찌된 일이지 싶은데, 엘리스의 딸 로즈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흐른다. 이제 서른다섯인 로즈가 열네 살 때 어머니를 죽였다니, 이게 무슨 말일까. 로즈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엘리스는 남편과 딸을 두고 떠나버렸고, 현재까지도 실종 상태이다. 때문에 로즈는 엄마의 얼굴도 모르는 채 자랐고 늘 가슴속에는 엄마에 대한 궁금증을 안고 살아간다. 아이들 틈에서 엄마 없는 아이로 놀림 받고 소외당하는 데 지친 나머지 엄마를 죽여버린다.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럼에도 엄마에 대한 궁금증은 지울 길이 없어서 아버지에게 엄마 이야기를 물어보지만, 아버지는 늘 어두운 얼굴로 별말이 없다. 그러다가 어느 날, <초록 토끼>라는 책 한 권을 건네준다. 아버지가 도무지 읽을 것 같지 않은 책이라 의아한 로즈에게 놀라운 이야기가 들려온다. 책을 쓴 작가가 엄마의 연인이었다고. 초록 토끼의 지은이는 콘스턴스 홀든’ <밀랍 심장>을 쓴 바로 그녀이다. 엄마에게 아버지 이전에 연인이, 그것도 동성 연인이 있었다니, 그것도 유명한 작가였다니 로즈는 모든 게 놀랍기만 하다. 그리고 책을 허겁지겁 읽는다. 어디선가 엄마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책을 아무리 다 읽어도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엄마에 대한 정보는 찾을 수가 없다. 그저 <초록 토끼>는 삶의 고독과 잘못된 사랑이 일으키는 파괴를 말하고 있을 뿐. 콘스턴스 홀든도 <초록 토끼>를 끝으로 더는 작품을 더 발표하지 않았다. ‘레싱이나 애트우드 같은 작가는 아니지만 숱하게 많은 여성 작가가 그렇듯이 그녀 역시 다른 이름에 가려진 채 사라져갔다.’ 하나뿐인 에세이집이 있어, 그 책도 구해 읽어보지만, 사적인 내용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콘스턴스 홀든, 한때 엄마가 너무나도 사랑했다던 그 여자의 얼굴과 기사를 찾아보지만 그마저도 꽤 오래 전 기사들이다. 그런 로즈에게 우연히 기회가 찾아온다. 콘스턴스를 만나겠다는 마음에 무작정 출판사로 전화를 건 로즈는 구직자로 오해받은 끝에 신분을 속인 채 그의 비서로 일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엄마의 옛 여인을 맞닥뜨리게 되는 로즈. <컨페션>은 이렇게 엄마와 딸 관계인 엘리스로즈가 삼십 년의 세월을 훌쩍 건너 콘스턴스 홀든, 그러니까 코니라는 한 사람을 매개로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면서 엘리스와 코니가 어떻게 파국을 맞이했는지, 또 엘리스는 어떻게 로즈를 낳게 되었는지 그리고 엘리스는 지금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지가 한편의 미스터리를 풀어가듯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엘리스와 코니의 사랑이 파국을 맞이했으리라는 것은 로즈의 존재만으로도 알 수 있다. 그 두 사람이 로즈를 생물학적으로 낳을 수는 없었을 테고(게다가 1980년대 그 보수적인 영국에서), ‘코니는 아이를 싫어해 입양을 할 사람도 아니다. 게다가 로즈에게는 엄연히 아버지가 존재하며 아버지는 엘리스 이야기만 나오면 아직도 얼굴이 어두워진다. 엘리스와 코니 둘 사이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사실 독자는 두 사람의 관계가 잘 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초반부터 알 수 있다. 엘리스는 코니에게 완벽하게 반한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코니는 엘리스에게 세상 모든 것이 된다. ‘강력하고 재능 있는 사람, 다른 사람인 것처럼 전화해 엘리스가 출근하지 않아도 되도록 도와주고, 쌀쌀한 11월 아침에 집에서 따뜻하게 지낼 수 있게 해주고, 목욕물을 받아주고, 상쾌하고 깨끗한 잠자리를 마련해주는 사람의 품에서 보호받는 어린 소녀가 되고 싶었고 코니와의 사랑으로 이렇게 육체와 하나 되는 정신을 경험해본 적 없었다고 생각한다. 로즈에게 엘리스가 부재중인 것처럼 엘리스 또한 엄마의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엘리스는 열여섯에 아버지의 집을 나왔고, 어머니는 그보다 한참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엘리스는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코니의 보살핌 속에서 엄마이자 아빠에게 받지 못한 사랑과 보살핌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코니는 사랑은 할 줄 알아도 자기 일, 커리어도 그 못지않게 중요한 사람이라, 엘리스만을 바라볼 수는 없다.

 

두 사람이 코니의 일 때문에 미국으로 함께 건너가면서 갈등의 싹은 더 커지는데, 자기 일로 승승장구하는 코니에 비해 엘리스는 그저 코니의 어리고 아름다운 여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엘리스에게는 자기의 일도, 자기만의 친구도, 자기만의 공간도 없이 모든 것이 코니의 삶과 연관되어 있다. 코니의 집, 코니가 아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점점 자기 자신을 잃어간다. 심지어 코니도, 일로 바쁜 나머지 엘리스에 대한 애정이 차츰 희미해진다. 이럴 때 스무 살을 조금 넘은 이 어린 여성이 할 수 있는 선택을 얼마나 될까. 그것도 오직 연인 한 사람만 보고 떠난 그 낯선 미국 땅에서. 엘리스도 차츰 자기의 삶이 기이하다고 생각한다. 코니에게 그렇게 꽉 붙잡혀 있는 것에 비이성적인 증오심이 솟구친다. 엘리스도 미국인 친구에게서 그림을 선물 받는 서른여덟 살의 사람이 되고 싶다. 차를 몰고 웨스트 할리우드로 달려가고 싶다. 말리부 해변에서 살고 싶다. 그러나 대신 그녀는 그 모든 일을 그저 지켜보기만한다. 이 가운데 그 무엇도 엘리스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코니는 엘리스가 가진 얼마 안 되는 것을 순식간에 앗아갈 수도 있다.

 

2017, 서른다섯 살인 로즈의 삶도 엘리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9년이나 사귄 연인 가 있지만 이 두 사람의 사이는 사랑하는 관계라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지켜보고 있자면 지리멸렬하다. 로즈 또한 그 사실을 잘 알지만, 딱히 있을 만한 자기만의 공간도, 확실하게 내세울만한 커리어도 없기에 자기를 심정적으로 괴롭히는 남자친구와 헤어지지도 못하고 답답한 관계를 줄곧 유지한다. 게다가 의 가족들을 만나고 오면 그 역겨운 마음은 더 금할 길이 없다. 그런데 로즈는 코니의 비서 일을 하면서 조금씩 삶을 돌보는 방법을 자기도 모르게 깨달아 가게 된다. 늙어서 몸이 불편해졌으면서도 은둔하면서 사생활을 철저히 지키고, 마지막 작품을 쓰고자 노력하는 그 꼿꼿한 노인 코니의 모습을 보면서 삶을 어떻게 가꿔나가야 하는지 은연중 깨닫고, 코니와 주고받는 이야기들을 통해 자기 삶에서 지금 무엇이 빠져 있는지 서서히 깨달아 간다. 로즈는 처음부터 코니에게는 신분을 숨긴 채 로라라는 가상의 인물로 행세하는데, 자기가 만들어낸 이 로라라는 인물은 로즈보다 대담하고 능률적이며 재미있는 사람이다. 사실 로즈는 자신감도 적고 두려움은 크고 멀리 여행을 떠난 적도 없으며 자기 삶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로라는 그와 완벽하게 상반되는 인물로, 로즈 그 자신이 되고 싶은 자기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데 로즈는 실제로 그 로라와 조금씩 닮아간다. 코니는 로즈에게 그 몇 달 동안 당당하고 자각으로 가득한 삶의 본보기를 보여준 한편, 어떤 이름을 사용하든 자기의 목소리를 찾으라고 격려해준다. 로라는 코니 옆에서 자신을 탐색하면서 어디에서 어떻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자문하기 시작한다.


 

자신을 돌보듯이 사랑도 돌봐야 해. 사랑이 혼자서 유지되며 자라기를 바랄 순 없어. 우린 사랑을 돌보지 않았어. , 그리고 우리 중 누구도 그러길 원하지 않았고.” (324)

 

<컨페션>에서 그려지는 사랑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엘리스와 코니, 엘리스와 맷, 맷과 샤라, 로즈와 조 등등 커플은 많지만 한때 엘리스와 코니가 서로만으로도 행복했던 그 짧은 순간을 제외하고는 어떤 커플도 사랑으로 행복하지 않다. 로즈와 조도 처음 어떤 순간들은 서로만으로도 행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9년 가까이 이어지는 지리멸렬함만이 남았다. 사랑은 누군가에게 구원이 되기도 하지만, 무덤이 되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그려지는 대부분의 사랑은 무덤과도 같은 사랑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엘리스도 로즈도, 자기 자신을 찾지 못한 채 사랑 안에서 그저 허우적대기만 했기 때문이다. 삶도, 사랑도 결국은 자기가 제대로 서 있을 때 그 의미를 찾고 삶에서 제 역할을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엔 사랑은 무덤이 되고 자기 파멸을 부른다. 엘리스는 스물에서 스물셋, 그 어린 나이였기에 자기를 찾는 일에 서툴렀고, 로즈는 자기 자신을 찾는 일보다는 엄마를 찾는 일에 몰두하는 바람에 진짜 자신이 바라는 삶이 무엇인지 생각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코니와 함께 하며 엄마의 그림자를 찾는 동안 자기가 진정 원하는 삶을, 자기 자신을 찾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코니는 그 오래 전에는 엘리스에게 해주지 못했던 것을 그의 딸인 로즈를 통해 이루게 해준 것은 아닐까. 엘리스는 언젠가 하염없이 물을 바라보며 인어가 되고 싶지 않다고, ‘육지의 존재가 되고 싶다’(163)고 생각하는데, 지금 틀림없이 어디선가 육지의 존재로 잘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달라진 로즈가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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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1 1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21 1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목련 2021-04-29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급한 문장, 참 좋았어요 사랑뿐 아니라 관계에 있어서 적용할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로즈의 선택이 멋졌고요!

잠자냥 2021-04-29 17:23   좋아요 0 | URL
맞아요. 로즈가 그 남자랑 헤어져서 얼마나 후련하던지..;; ㅋㅋㅋㅋ 사랑도 사랑이지만, 자기 자신부터 돌보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피에 젖은 땅 -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 걸작 논픽션 22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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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라는 말이 있다. 티머시 스나이더의 <피에 젖은 땅>은 처음 몇 쪽만 읽어도 상처투성이가 된다. 너덜너덜해진다. 2차 세계 대전을 다룬 역사책은 무수히 많다. 많은 사람들이 2차 대전에 대해서라면 알만큼 안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 참혹한 전쟁을 다룬 책은 아주 많다. 어디 책만 그러할까, 영화 같은 대중매체에서도 이 전쟁은 즐겨 쓰는 소재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주로 히틀러와 나치스가 벌인 유대인 대학살이 중심을 이룬다. 최근에는 급기야 히틀러를 희화화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조조 래빗> 같은 영화). 그런데 정말 2차 세계 대전은 미치광이 히틀러와 그를 신봉한 나치스, 그에 부역한 독일국민에 의해 이루어진 홀로코스트, 그것도 아우슈비츠 같은 집단 수용소에서 일어난, 유대인 대학살이 전부였을까. 물론 오늘날 아우슈비츠는 홀로코스트의 대명사이며 20세기 악의 대명사이다. 그러나 스나이더는 그런 시선을 경계해야한다고 단호히 말한다. 2차 세계 대전은 히틀러와 스탈린,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러시아 사이에 끼어있었던 블러드랜드, 즉 폴란드 중부에서 러시아 서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연안국들에 이른 넓은 땅에서 대량학살이 일어났다. 그 희생자 수는 무려 1400만 명에 이른다. 스나이더의 주장에 따르자면, 2차 세계 대전의 비극은 우리가 잘 아는 아우슈비츠를 비롯해 트레블린카, 헤움노, 베우제츠 등 몇몇 집단학살 수용소에서만 이뤄진 게 아니라 동유럽의 저 넓은 땅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 기간도 스탈린주의와 국가사회주의가 세력을 굳히던 시기(1933~1938), 독일과 소련의 합동 폴란드 침공(1939~1941), 독소 전쟁(1941~1945)에 이르며, 희생자들은 주로 유대인,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 러시아인 발트 연안국가들로 그 땅에 살고 있던 평범한 주민들이었다. 1400만 명이 1933년에서 1945, 겨우 12년 동안 학살되던 때는 히틀러와 스탈린 두 사람의 집권기이다. 스나이더는 전쟁보다는 히틀러와 스탈린 두 사람의 잔혹한 정책 때문에 희생자가 대량 발생되었다고 본다. 그 희생자의 대부분은 여성, 어린이, 노인이었다. <피에 젖은 땅>을 읽기 전, 나는 스탈린의 실체는 이렇게 제대로 알지는 못했다. 피의 대숙청쯤은 알고 있었어도 스탈린이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이토록 많은 민간인의 목숨을 빼앗았는지는 알지 못했다. 히틀러의 범죄 행위는 그래도 많이 알려졌는데, 그에 비해 왜 스탈린의 범죄 행위는 은폐되고 때로는 긍정적인 평가까지 나오는 것일까.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동부 전선에서 나치 독일을 꺾었고, 그리하여 스탈린은 수백만 명으로부터 감사와 함께 전후 유럽 질서에서 중요한 축을 얻었다. 나치 독일, 파시즘을 꺾은 영웅 신화가 여기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 따르면 스탈린이 저지른 대학살량은 히틀러의 그것과 맞먹는다. 비 전시 학살만 따져보면 오히려 한수 위이다. 스탈린은 소련을 지키고 현대화한다는 명목으로 1930년대에 수백만 명을 인위적으로 굶겨죽이고 75만 명의 총살을 지휘했다. 히틀러가 다른 나라 국민을 죽인 정도에 전혀 뒤지지 않을 강도로 자국민을 죽였다. 1933년에서 1945년까지 블러드랜드에서는 1400만 명이 타살당했으며 그 가운데 3분의 1은 소련 땅에서 숨졌다. 이 희생자들은 모두 소련 또는 나치의 살육 정책으로 목숨을 잃었으며, 그 둘 사이의 전쟁으로 숨진 것이 아니다. 스탈린의 범죄는 흔히 러시아에 지은 죄악으로 여겨지며 히틀러의 범죄 또한 독일에 대한 죄악으로 불린다. 그러나 소련의 가장 심한 만행은 비 러시아 변경지대에서 저질러졌고, 나치 또한 폴란드처럼 독일 바깥에서 살육의 대부분을 자행했다. 하지만 20세기 대량학살은 몇몇 집단수용소에만 일어난 일이라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스나이더는 국가사회주의와 스탈린주의의 희생자 대다수를 낳은 곳은 집단수용소가 아님을 이 책을 통해 생생히 증언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대량학살의 장소방식에 대한 잘못된 이해20세기를 보는 시각을 오도할 수 있다고 그 위험성을 지적한다.

 

이 책에서는 그 잔혹함과 끔찍함 때문에 읽는 내내 눈살이 찌푸려지는 구절들이 많다. 정말이지 이것이 인간인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중에서도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잔혹 그 자체이다. 스탈린은 집단화정책을 통해 통제를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비옥한 땅이었던 우크라이나에 인위적인 기아를 일으킨다. 굶주림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죽어나갔고, 이런 굶주림은 마침내 식인 행위를 불러온다. 소련 령 우크라이나에서는 가족이 그 가장 약한 식구를 잡아먹었다. 보통 그 대상은 어린아이들로, 자기 자식을 죽이고 먹은 부모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어떤 어머니는 자신과 딸의 식사를 위해 자기 아들을 잡아서 요리했다. 친척들에 의해 목숨을 건진 여섯 살짜리 소녀는 자기를 죽이려고 칼을 갈고 있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본 아빠의 모습이었다. 어떤 가족은 며느리를 죽이고, 그녀의 머리통은 돼지밥으로 준 다음 몸뚱이는 구워서 잔치를 벌였다’(102~103). 1932년에서 1933년까지 우크라이나에서는 최소한 2505명이 식인 행위 혐의로 처벌받았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대기근, 대학살은 여전히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우크라이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식인 이야기를 숨기려고 한다. 모스크바 통신원이자 1932년 퓰리처상을 받은 월터 듀런티는 수백만 명이 굶주려 죽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소련의 기아 사태에 대한 내용을 어이없는 괴담이라고 일축하면서 실제로 기아 따위는 없고” “다만 영양부족 때문에 전염병이 번져서 사망자가 많이 나오는 것이라면서 소련 쪽 주장과 비슷한 왜곡된 주장을 했다. 그러면서 그는 기아가 더 큰 목표를 위한 과정이라는 입장을 고집했다. “달걀을 깨지 않고 오믈렛을 만들 수는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113). 한편 히틀러는 우크라이나 기근을 자신의 선거운동에 활용해, 마르크스주의의 폐단을 증명하는 증거로 사용한다. 스탈린의 정책은 히틀러에게 득이 된 것이다.

 

이렇게 1933년에서 1945년까지 블러드랜드에서 살육된 1400만 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 중 절반 이상은 식량을 배급받지 못해 죽었다. 홀로코스트 다음가는 두 가지 최대 대량학살, 1930년대에 스탈린이 시행한 의도적 굶주림과 1940년대 초 히틀러의 소련 전쟁포로 굶기기는 이런 식의 학살이었다. 굶겨죽이기 다음에는 총살, 그다음은 가스실이었다. 1937년에서 1938년까지 스탈린의 대숙청 때 거의 70만 명에 이르는 소련 시민이 총살되었다. 소수 민족이라면 무릎을 꿇리고 미친개처럼 쏴 죽여야 한다.”는 말은 스탈린의 대공포 시대에 민족 박멸 작전을 실행하던 공산당 지도자의 말이었다. 1930년대 후반 소련은 그 어느 곳보다 민족적 박해가 심한 곳이었다. 스탈린은 소련을 구성하는 민족 가운데 다수를 대량 살육하라고 지시했다. 게다가 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공동 침공 이후 21개월 동안 독일인과 소련인들은 각각 폴란드의 절반을 지배하면서 비슷한 이유와 비슷한 숫자의 폴란드 민간인들을 죽였다. <피에 젖은 땅>은 이렇듯 폴란드를 비롯해 우크라이나, 러시아 서부, 벨라루스, 발트 연안국들에 이르는 넓은 땅에서 스탈린과 히틀러에 의해 이뤄진 대량학살의 면모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이런 방대한 자료 조사를 통해 스나이더는 나치와 소련의 집권은 우리가 세계를 평가하는 능력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나치의 범죄가 역사적으로 몹시 심각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스탈린의 그 참혹한 범죄는 새로운 근대 국가를 지켜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주장을 고수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정책을 쓰든 그 방향과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수단과 과정 또한 모두 정당할까? 달걀을 깨지 않고 오믈렛을 만들 수는 없기 때문에 어떤 잔혹한 방법을 써서 닭을 잡든, 달걀을 깨든 오믈렛만 만들면 그 모든 방법은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인가? 소련 지지자들은 소련이 나치 독일의 적이기 때문에 스탈린을 비판하는 것조차 금기시했다. 1936년 즈음 유럽에서는 소련 정권을 비판하는 사람은 파시즘과 히틀러를 옹호하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게다가 소련과 그 동맹국들은 이 전쟁을 유대인 해방전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데 합의한다. 서로 다른 관점에서 소련. 미국, 영국의 지도자들은 유대인의 고통은 독일 점령의 사악함의 한 측면으로 여겨져야지, 그 자체로 주목받아서는 안 된다는 데 의견을 모으기도 한다. 반유대주의의 결속이 역사를 왜곡하고 은폐하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스탈린에게는 증오스러운 파시스트 침략자들에게 가열 차게 저항함으로써 조국의 영예를 지켰노라단합된 소련 국민이라는 신화가 만들어진다.

 

전쟁이 끝난 뒤 유럽의 유대인들의 오랜 고향은 대부분 공산 국가의 영토가 되었고, 새로운 종류의 반유대주의를 세상에 선보이면서 스탈린은 홀로코스트의 진실을 축소했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국제적인 집단 기억이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나타났을 때, 그것은 주로 독일과 서유럽 유대인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고, 희생자 가운데 소규모 집단들인 아우슈비츠에 집중되었다. 서구와 미국 역사가와 기념운동가들은 스탈린주의적 역사 왜곡을 시정하려 하면서도 아우슈비츠 동쪽에서 희생된 거의 500만 명에 가까운 유대인과 나치에게 죽은 거의 500만 명의 비유대인 희생자는 외면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홀로코스트는 많은 유대인을 공산주의로 이끌었으며 소련을 해방자로 여기는 이념을 따르도록 한다. 스탈린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지도적 유대 공산주의자들이 홀로코스트의 중요성을 부정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공산당이 유럽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분위기에서 홀로코스트는 그 실체를 제대로 나타낼 수 없었다. 그러나 스나이더는 동방에서 특히 유대인들이 많이 죽어간 사실과 서방에서의 지리적 조건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면 홀로코스트는 유럽사에서 제자리를 찾았다고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스탈린과 히틀러, 소련과 나치 독일 모두는 유토피아를 꿈꿨다. 이상적인 세계가 비전으로 제시되고, 그 비전은 현실과 타협하면서 대량학살로 이어졌다.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유혹의 손길을 뻗친다고 스나이더는 주장한다. 이데올로기는 대량학살의 도덕적 해석이 되기 때문이다. 살해하는 사람과 그 이유를 설명하는 사람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범죄자를 단지 잘못된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 따라서 그의 존재가 자신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여기기는 편리하다. 스나이더는 악은 선에 의존한다는 간디의 말을 인용한다. 모여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헌신적이며 그 일이 옳다고 믿어야 한다는 뜻이다. 힘러도, 괴링도, 괴벨스도, 아이히만도 모두 자신이 하는 일이 옳다고 믿었다. 스탈린주의 또한 정치뿐 아니라 도덕 체계였다. 많은 스탈린주의자와 그 동조자들은 대기근과 대공포가 빚은 희생이 정의롭고 안전한 소련 국가를 세우기 위해 불가피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스나이더는 대량학살에 대한 정당화도 당장의 악이 미래의 선이 되리라는 이야기도 완전히 틀린 것이라고 말한다. ‘큰 고통이 큰 진보와 연관되리라 믿는 것은 일종의 미신적 마조히즘’(705)이라고 일축한다.

 

<피에 젖은 땅>은 이렇게 축소, 은폐되었거나 때로는 왜곡된 스탈린-히틀러의 2차 세계 대전의 진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데,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공포와 두려움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 어떤 역사책에서도 볼 수 없었던 기술 방식이다. 희생자는 대개 죽은 다음 숫자로 알려질 뿐이었다. 그런데 스나이더는 희생자가 살아있던 한 사람임을 보여준다. 저자는 왜 이렇듯 희생자의 삶에 주목했을까. 그에 따르면 희생자들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과 진정으로 동일시되고 싶다면 그들의 죽음만 볼 게 아니라, 그들의 삶을 봐야 한다. 희생자들의 죽음을 내세우며 어떤 정책을 미화하거나 스스로 희생자를 동일시하기는 쉽다. 범죄자들이 저지른 행동을 이해하는 일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그러나 도덕적으로는 이것이 더 중요하다. 도덕적 위험은 누군가가 희생자가 될 때보다 범죄자나 방관자가 될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히틀러나 스탈린을 인간이 아닌 악마라고, 그 부역자들을 인간이 아닌 인간 이하라고 부르면서 악()은 나와는 동떨어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받아들이기는 쉽다. 그러나 스나이더는 다른 인간을 인간 이하의 존재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신이 인간 이하라고 단호히 말한다.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부인해버리면 윤리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저자가 보기에 그런 유혹에 굴복해 다른 사람들을 인간이 아니라고 규정하는 일은 나치의 입장으로 한 발짝 다가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이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이해를 포기하는 일, 다시 말해 역사를 버리는 일이다.(703)

 

희생자 수는 부풀려지거나 축소되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가 없어지면 숫자는 부풀려지고 기억이 억눌려지면, 공포스러운 상황이 찾아오기 쉽다. 희생자는 애도자의 뒤에 가려져 있다. 살육자는 숫자들 뒤에 숨어 있다. 그저 막대한 죽음의 숫자를 읊조리는 것은 익명성의 흐름에 숨어버리는 일이다. 개별적인 삶을 부수적으로 다루는 숫자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것은 개인을 말살하는 것이라고, 정확한 숫자가 전부는 아니라고 스나이더는 주장한다. 우리는 죽은 이의 숫자를 셀 뿐 아니라, 죽은 이 한 명 한 명을 개인으로 취급해야 한다. 나치와 소련 체제는 사람들을 숫자로 바꿔버렸다.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단지 추정치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스나이더는 인간의 마음을 가진 우리로서는 그런 숫자들을 사람으로 돌려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히틀러와 스탈린은 우리의 인간성마저 개조했다는 뜻이 될 것이라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이 말은 또한 이 책에서 언급된 폴란드 시인 체스와프 미워시의 윤리를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각자가 타인의 고독을 떠올리는 것’(506)이라는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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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1-04-12 11:5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첫 문장이 너무 좋습니다.이 책에 대해 말하는 문장이라고 생각해요. 저게는 어렵고 무거운 분야인데, 이렇게 잠자냥 님의 리뷰로 읽고 배우네요.

잠자냥 2021-04-12 11:57   좋아요 5 | URL
이 책을 읽고 나니 스탈린이나 히틀러보다는 동유럽을 예전의 눈으로 볼 수 없을 것 같아요. 휴... 폴란드 사람들과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견디고 살았을까, 살고 있을까 대단하고 심정적으로 참 안타깝고 그렇습니다. 꽤 긴 책입니다만 기회가 되신다면 한 번 꼭 읽어보세요.

미미 2021-04-12 11: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자국민을 죽인게 가장 비난받을 지점이라 생각해요. 관련된 다큐 보면서도 (대역인데)왜그렇게 잔인하게 보이던지.. 이 책 영향인듯.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다‘ 이 책에 더없이 적합한 말이라 생각됩니다.

잠자냥 2021-04-12 11:59   좋아요 3 | URL
그런데 그 자국민들이 스탈린을 요즘 다시 그리워하고 있다는 게 참 역설적입니다. 하긴 더 멀리 갈 것도 없지요. 우리나라도 그런 독재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여전히 있으니까요. 그래서 역사책을 읽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ㅠ_ㅠ

다락방 2021-04-12 11:5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읽어보려고 샀는데 이 리뷰를 읽고나니 과연 읽을 수 있을 것인가 싶네요. 다 읽고 이렇게 리뷰 쓰신 것에 대해 고생하셨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독서는 고생했다는 말이 필요한 것 같아요.

잠자냥 2021-04-12 12:03   좋아요 5 | URL
어떤 책은 고생할 만한 가치가 있지요. 이 책이 그런 것 같아요. 이 책은 읽단 들고 읽기도 참 무겁.... 누워서 읽다가 졸면 큰일납니다. ㅋㅋㅋㅋ 얼굴 위로 떨어지면 캭-!

mini74 2021-04-12 12: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숫자가 아니라 한 사람이었음을 보여준다. 뭉클합니다. 전쟁관련 통계 등에서 매번 몇만 희생 등 숫자로만 볼 때 그 끔찍함이 잘 와닿지 않는 것 같아요. 통계나 숫자가 참상을 잘 드러내는 것 같으면서도 왜곡하는 면이나 개개인을 감추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잠자냥 2021-04-12 14:15   좋아요 3 | URL
네, 희생자를 숫자로 기록하고, 숫자로만 기억될 때 비극의 참상은 흐려지고, 그런 역사가 또 되풀이 되기 쉬운 것 같습니다. 이 책은 단순히 숫자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자 개개인을 한 사람으로 그려냈다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케이 2021-04-21 0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크라이나 이야기는 진심 너무 충격적이네요. 어렸을 때 마리퀴리 위인전을 읽는데, 폴란드어로 수업을 듣다가 러시아 교육관이 온단 소식에 학생들 선생님 모두 급히 폴란드 책 다 숨기는 장면이 떠오르네요. 마리 퀴리가 울면서 왜 내 조국 폴란드는 힘이 없나 라고 우는데 우리나라 일제시대랑 비슷했구나.. 했거든요. 현재 유태인들은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어서 계속 추모하고 있는 반면 동유럽은 여전히 낙후지역이라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고 있는 것 같아요. 별 얘긴 아니지만 고등학교 시절 국제 펜팔을 했는데 그때 매칭된 사람이 폴란드 소년이었거든요. 나중에 자기 사진을 보냈는데 굉장한 꽃미남이었어서 저에겐 폴란드가 좋은 나라로 남아있어요.ㅋㅋ 그리고 강간범에게 거세형을 내리는 아주 바람직한 국가 중 하나기도 하고요.책과 관련없는 댓글이지만, 외롭고 치열한 육아 중에도 올리신 글 잘 읽고 있다고 소식 전합니다.

잠자냥 2021-04-21 10:12   좋아요 1 | URL
저는 좋아하는 축구 선수 중에 우크라이나 선수가 있었어서 ㅎㅎㅎ 그래도 좀 관심이(?) 있는 나라였는데, 스탈린의 인위적 기아정책으로 극심한 굶주림을 겪으면서 인육을 먹는 지경까지 간 것은 정말 저도 이번에 거의 처음으로 알았어요. ㅠㅠ 학계에서도 아직 의견이 분분해서 거의 파묻혔던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이번에 자세히 살펴보니 폴란드는 지정학적으로 정말 최악의 위치에 있더라고요. 하필이면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끼어서... ㅠ_ㅠ 만일 포르투갈 정도의 위치에 이 나라가 있었다면 2차 대전에서 그렇게 피해를 입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요.
ㅋㅋㅋㅋㅋㅋ 강간범 거세형 ㅋㅋㅋㅋ 폴란드가 그런 바람직한 국가였군요. ㅎㅎㅎㅎㅎ

외롭고 치열한 육아라는 말이 와닿습니다. 저는 육아를 해본 적은 없지만 제 동생들을 보니 정말 외롭고 치열하고... 잠도 못자는 극강의 고문(?)을 받고 있더라고요.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