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 제안들 36
아글라야 페터라니 지음, 배수아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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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서커스단 곡예사라 자기 뜻과 상관없이 부모와 함께 이리저리 떠돌며 사는 아이의 삶은 어떠할까. 그것도 말이 통하지 않는 이 나라, 저 나라를 전전하는 삶이라면? 아이니까, 마냥 새로운 일상이 신기하고 재미나기만 할까? 나로서는 잘 상상하기 어려운 삶이지만 꼭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적어도 그 아이가 나처럼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조용히 있기를 좋아하고 낯선 환경에서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는 성격이라면 어디 한곳 정착하지 못하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끊임없이 떠돌아다니는 삶은 지옥과도 같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는 천국을 꿈꿨을까.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는 ‘나는 천국을 상상한다.’로 시작한다. 천국을 상상하는 아이 ‘모니카’는 또 생각한다. 신은 외국어를 할 줄 알까? 신은 외국인도 이해해 줄까? 아니면 천사들이 작은 유리 칸막이 안에 앉아 통역해 주는 걸까? 그리고 정말로 천국에도 서커스가 있을까?

아이의 엄마와 아빠, 이모는 모두 서커스단의 곡예사이다. 엄마는 머리카락으로 공중에 매달리는 연기를 선보이며, 아버지는 광대이다. 아이는 부모와 이모, 언니를 따라 이리저리 전전하는 떠돌이 생활을 한다. 이 아이 ‘모니카’는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의 작가 아글라야 페터라니(세례명 모니카 지나) 그 자신이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삶을 알아야 할 것 같아 몇 자 적어본다. 모니카는 1962년 루마니아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 조세피나는 루마니아 국립 서커스단의 곡예사이며, 아버지는 서커스에서 찰리 채플린 스타일코미디 연기로 인기를 끌던 헝가리 출신 광대였다. 1966년, 그러니까 아글라야가 네 살이 되던 해, 가족의 재능을 알아본 스위스의 서커스 단장은 이들의 망명을 추진하고, 부부와 두 딸 안두자와 모니카, 그리고 조세피나의 언니 레타는 빈을 거쳐 스위스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1967년 부부와 레타 3인의 공연은 서커스단의 최고 인기프로그램이 된다. 조세피나의 머리카락 곡예가 유명해지면서 가족은 서커스단의 일원으로 또는 전 세계 서커스단의 초청을 받아 유럽 여러 도시와 브라질, 미국, 아르헨티나 등을 여행한다. 모니카 또한 아주 어린 나이에 버라이어티쇼 무대에 서기도 한다. 그러나 1976년 어머니가 스페인 공연 도중 사고를 당해 더 이상 머리카락 곡예를 할 수 없게 된다. 그 사이 부모가 이혼해 모니카는 1977년 어머니와 함께 스위스에 정착하는데, 루마니어와 스페인어를 할 줄은 알았지만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던 그녀는 15세 나이에도 문맹이었다. 그때서야 독일어 쓰기와 읽기를 독학으로 공부했고 1999년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를 발표한다. 이 작품은 대중과 비평가 모두에게 호평을 받았으나 2001년부터 심각한 정신 장애에 시달리던 아글라야는 2002년 취리히 호수에서 스스로 익사를 선택한다.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는 작가의 이런 평범하지도, 순탄하지도 않은 삶이 건조하고 담담한, 또 때로는 투박하면서도 묘하게 아름다운 언어로 쓰여 있다. 이 작품은 조국 루마니아를 자신의 선택이 아닌 부모의 선택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고, 또 그 때문에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으며, 그랬기에 모국어를 ‘말할 줄’은 알았지만 ‘쓸 줄’은 몰랐던, 이런저런 외국어를 들어왔고, 어떤 외국어(스페인어)는 할 줄 알았지만 역시 쓸 줄은 몰랐던 문맹이었던 한 아이가 스스로 한 언어를 선택하고 글을 쓰게 되는, 그러니까 자기의 언어를 갖지 못했던(가질 수 없었던) 한 아이가 자기만의 언어, 목소리를 찾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 언어는 독일어라는 하나의 상징으로서의 언어일 뿐 아니라, 자기 목소리, 자기 삶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런 까닭에 어떤 면에서는 조국인 헝가리를 떠나 스위스로 망명, 프랑스어로 글을 써야만 했던 <문맹>의 아고타 크리스토프를 떠올리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작품이 그러했듯이 결코 미문도 아니며, 삶의 아름다운 면을 보여주지 않는, 오히려 참혹한 현실을 보여주는데도 그 진솔함 때문에 작품은 더없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아이는 영원한 이방인이자 방랑자이다. 그런데 그런 삶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다. 루마니아에 두고 온 할머니가 그리워도 돌아갈 수 없다. 루마니아에서는 그들이 탈출한 후 아이의 부모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기 때문이다. 비록 외국일지언정 누군가 아이의 이름을 묻는다면 아이는 어머니에게 물어보라고 대답해야 한다. 우리가 누군지 밝혀지면 우리는 납치되어 루마니아로 돌려보내질 것이며, 어머니와 아버지, 이모는 죽임당하고 언니와 ‘나’는 굶어 죽으리라. 곳곳을 떠돌아도 아버지는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해 호텔에 머물 때면 장롱을 문 앞으로 옮겨 놓고 장롱 앞에 소파를, 소파 앞에는 침대를 밀어 놓는다. 아이의 인형도 혼자 길거리에 나가서는 안 된다. 그런데 아이는 궁금하다. 여기서 이렇게 숨어 다녀야 한다면 왜 굳이 고향을 떠나 온 것일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고향의 할머니는 슬픔과 그리움으로 죽었고 어머니는 여기가 뭐든 훨씬 낫다고 말하는데 눈물을 흘린다. 나는 그저 돌아가고만 싶다.

그렇지만 루마니아가 천국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루마니아에서의 삶은 끔찍했다. 슬픔은 사람을 늙게 만드는데, ‘루마니아의 아이들은 늙은 채 태어난다. 이미 어머니의 배 속에서부터 가난하고, 부모의 근심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향에서 사람들은 꿈에서조차 자유롭게 생각할 수 없다. 소리 내어 말했다가 스파이에게 들키면 시베리아로 끌려간다.’ ‘외국에서는 독재자의 당에 속하지 않고서도 유명해질 수 있다.’ 그러나 외국도 아이에게 천국은 아니다. 루마니아가 아닌 곳에서 우리는 낙원에서처럼 살지만 그것이 나를 더 젊게 만들지는 않는다. 아프리카는 외국이지만 루마니아만큼 가난한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은 흑인이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사람들은 서커스에서 따로 앉아야 하지만 입장료는 전액을 지불해야 한다.’ 게다가 외국에서 그들 가족은 ‘유리처럼 부서’지고 만다. 어머니는 울부짖는다. 민주주의국가에서 우리가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결코 고향을 떠나지 않았을 거라고. 아버지는 우리가 낙원으로 가는 거라고 말했다는데, 그 낙원에서는 ‘개가 사람보다 더 소중’하다. ‘이 나라 욕실에서는 어디든 따뜻한 물이 나오고, 사람들 가슴에는 냉장고가 들어’ 있다. 루마니아와 마찬가지로 이방인들도 우리를 해치고 싶어 한다. 어머니는 누구도 믿지 않으며, 나 또한 그것을 배워야 한다.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다른 나라에서도 언제나 이방인으로서 머물 수밖에 없는 삶. 가족끼리 온전하기만 하다면 더 바랄게 없지만 아버지는 걸핏하면 폭력을 쓴다. 때때로 기묘한 영화를 찍는 아버지는 영화에서 자신의 모국어로 말하지만 어머니와 나는 대개 대사가 없고 있더라도 ‘도와줘!’라는 외침이 전부이다. 게다가 아버지는 언니에게 유난히 집착한다. 아버지의 딸일 뿐인 언니는 사실 나에겐 남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나는 언니를 친언니처럼 사랑한다. 언니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의붓딸이다. 아버지의 의붓딸과 그 어머니. 즉 언니의 할머니이자 아버지의 전 부인은 병원에 있다. 미쳐버렸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언니도 이미 미쳤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언니를 여자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미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어디에 가든 항상 나를 데리고 다닌다. 언니는 나보다 몇 살 밖에 많지 않지만 벌써 무릎이 박살났다. 아버지가 트랙터로 언니의 다리를 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야 언니가 다른 남자를 찾지 못하고 영원히 아버지 곁에 머물 것이므로.
 
어머니는 나를 끔찍이도 사랑한다. 나 또한 어머니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편지를 써도 어머니가 읽지 못한다면, 그 언어를 왜 배워야 할까 의아하기만 하다. 그렇게 사랑하는 어머니인데, 아이는 어머니를 항상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린다. 어머니는 강철 머리카락을 지녔고, 그 머리카락으로 원형 천장 꼭대기에 매달려 곡예를 펼친다. 공연 날마다 아이는 어머니가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린다. 아이는 빵으로 귀와 입을 틀어막는다. 어머니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천장에 매달려 있는 동안 언니는 나를 달래주려고 ‘폴렌타 속에서 끓는 아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폴렌타는 루마니아와 발칸 지역에서 주로 먹는 옥수수 죽이다. 언니는 폴렌타 속에서 끓는 아이가 얼마나 아플지 상상해 보라고 한다. 그러면 어머니가 천장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불안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을 거라고. 그렇지만 소용없다. 나는 항상 어머니의 죽음을 생각한다. 나는 절대로 머리카락으로 매달리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지만 삶은 그렇게 쉽지 않다. 나는 이제 버라이어티쇼 극장에서 공연한다. 처음에는 다른 여자들과 함께 춤을 추었다. 무대 등장 횟수는 점점 더 늘었고, 극장주는 점차 나를 앞줄에 세우기 시작한다. ‘육체-이것은 내가 모든 도시에서 실물 크기 포스터로 광고되는 방식’(152쪽)이다.



가장 아름다운 것들
공연이 끝난 후 함께하는 식사.
침대에 누워 깊은 잠에 빠진 어머니.
새벽에 조용히 일어난 어머니가 내게 이불을 덮어 주며 요리를 시작하는 것.
그을린 닭 털 냄새는 고향이다.
그런 다음 나는 잠이 든다. (79쪽)


모국어를 잃어버린 나. 이제는 어머니를 잃을까 언제나 두려움 속에 떨며 살아간다. 조국인 루마니아는 폭력적인 독재 정권 아래서 사람들이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며 신음한다. 그런 나라를 등지고 낯선 땅을 찾아 왔으나 집안의 아버지 또한 조국만큼 폭력적이며 마침내 좋지 않은 방식으로 가족을 해체하고 만다. 그리고 신은 외국어를 알아듣는지 아이의 말을 알아듣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런 삶 속에서 아이는 ‘폴렌타 속에서 끓는 아이’를 상상해야만 한다. 그러는 동안은 삶의 고통을 잊을 수 있노라고 되뇐다. 아이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보기 전, 아버지는 자신이 신으로 나오는 영화를 찍고 있었다. 어머니는 신의 할머니 역할이었고 그 영화에서 아이는 수호천사였다. 저토록 소박한 것에서 행복을 느꼈던 아이는 비록 영화 속에서였지만 수호천사가 되어 신 가까이에 서 있었다. 거기서 아이는 폴렌타 속에서 끓는 아이를 상상하면서 이방인으로서, 소외자로서, 난민으로서의 삶을 더는 잊고자 애쓰지 않아도 되었을까. 그러나  아이는 어쩐지 평생 ‘폴렌타 속에서 끓는 아이’를 떠올리며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삶의 고통을 조금도 줄여주지는 못했기에 그 아이, 모니카, 그러니까 아글라야는 끝내 스스로 물에 잠겨버렸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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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티나무 2021-05-10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ㅠㅠㅠㅠㅠㅠㅠ

잠자냥 2021-05-10 14:20   좋아요 0 | URL
절규를...! ㅎㅎ

Falstaff 2021-05-10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리즈가 문고판 사이즈.... 같은데 실험적 출판이 눈에 띄네요!!
이 책을 포함해서 위스망스도 일단 보관했습니다. 우쒸... 위스망스, 진짜 모 아니면 빠꾸 도.... ㅋㅋㅋ

잠자냥 2021-05-10 14:23   좋아요 2 | URL
네, 굉장히 독특하면서도 의미 있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시리즈 같습니다. 다 사 모으고 싶기도 하지만 사실 딱히 땡기지 않는 작품도 있어서 그건 좀 무리인 거 같고요. 간혹 정말 보물 같은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그 보물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요. 위스망스 그 작품 저도 지금은 *보관* 중...ㅋㅋㅋㅋ

행복한책읽기 2021-05-10 17: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일단 담아요. 저는 아이가 등장하면 그냥 못 지나치겠어요. 잠자냥님 리뷰는 길고 깊어서 작정하고 읽어야 됨 ㅋㅋ

잠자냥 2021-05-10 17:56   좋아요 1 | URL
제 리뷰는 이 책을 읽고 난 뒤 읽으셔도 됩니다!

새파랑 2021-05-10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그냥 읽어라는 리뷰같아요^^

잠자냥 2021-05-10 20:50   좋아요 1 | URL
네, 맞습니다! ㅋㅋ